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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17:1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 이 귀절은 다음과 같이 개역될 수 있다. 곧,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고요한 것이 집에 희생 제물들이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라고 가조들이 가난하게 살면서도 서로 화목하는 것은 그들이 다른 것으로 만족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하나님으로 만족하기 때문이다. 시 23:1에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하였고, 딤전 6:6-8에는,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 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고 하였다. 이 점에 있어서 창 13:8-9을 참조하여라. "희생 제물들이 가득하다"고 함은 옛날 이스라엘의 생활을 반영시킨다. 그 때에는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고 남은 것을 가족들이 나누어 먹었다(레 7:16, 19:6; 삼상9:24). 제사드리고 즐겁게 먹어야 할 그 자리에서까지 서로 다투는 가족은 불만이 심각한 가정이다. 예를 들면 사무엘의 모친 한나가 살고 있던 가정과 같은 것이다(삼상1:7) 이런 가정의 투재의 원인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세상을 사랑함에 있다.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은 언제나 만족이 없으므로 그들 자신이 불과 같은 시기(猜忌)와 질투(嫉妬)의 연료(燃料)가 되고 있다.
잠 17:2
슬기로운 종은 주인의 부끄러움을 끼치는 아들을 다스리겠고 또 그 아들들 중에서 유업을 중에서 유업을 나눠 얻으리라 - 이것은, 하나님의 법에 있어서는 충성 그것이 계급이나 지위보다 낫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충성된 자에게 반드시 상을 주신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종이었으나 충성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그 집의 가사(家事)를 주장하였고(창 39:4-5), 하나님은 마침내 그를 애굽의 총리 대신의 자리에까지 올려주셨다(창 41:41-43). 마 25:21, 23 참조.
교회 일에 있어서 특별히 이 진리는 살아 역사한다. (1) 성직을 가지고 스스로 교만하기만 하고 하나님 앞에 두려움으로 봉사하지 않는 자들은 마침내 타락하여 천국의 기업을 상실한다. (2) 정통 교리를 빙자하고 자칭 하나님의 장자들의 총회라고 하면서도 말 뿐이고 그 진리대로 충성하지 않는 교파들도 성회의 반렬에서 떨어진다. 종과 같이 겸손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섬기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기업을 누린다. 하늘나라에서는 지위, 명예, 외부적 계통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롬 2:26-29에 말하기를 ,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제도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판단치 아니하겠는야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
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고 하였다.
잠 17:3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 도가니나 풀무는 부을 가지고 은이나 금의 불순물을 갈라낸다. 그와 같이 하나님은 환란이나 고통을 사람에게 주심으로 그 사람의 숨은 죄악을 떼어내신다. 그 숨은 죄악은 그사람 자신도 몰랐던 것인데 하나님은 그것을 아신다. 대상 29:17; 시 7:9, 17:3, 66:10; 잠 15:11, 21:2, 24:12, 27:21; 렘 17:10; 슥 13:9; 말 3:3; 벧전 1:7 참조. 그러므로 신자들은, 시험과 환란을 당할 때에 괴롭기는 해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하여서 연단을 주시는 줄 알고 지혜롭게 참아야 된다. 그들이 연단을 받아야 신앙이 견고해지고 덕이 빛난다(롬 5:3-4). 산 꼭대기에 있는 나무는 바람을 많이 맞기 때문에 그 뿌리가 깊이 박힌다. 욥 23:10에 말하기를,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고 하였다. 사 31:9; 렘 9:7참조. 사 1:25에 말하기를, "내가 또 나의 손을 네게 돌려 너의 찌끼를 온전히 청결하여 버리며 너의 혼잡물을 다 제하여 버리고"라고 하였다. 신자가 이렇게 시련을 받는것이 도리어 그의 택함 받은 증표라고 할 수 있다(사 48:10). 히 12:7-13 참조. 그러므로 과거 참된 성도들은 이런 실련의 의미 있는 환란을 달게 받았다. 예레미야는 환란을 원하는 의미로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를 징계하옵시되 너그러이 하시고 진노로 하지 마옵소서 주께서 나로 없어지게 하실까 두려워하나이다"라고 하였다(렘
10:24). 우리가 이 점에 있어서 또 한 가지 생각할 것이 있다. 그것은, 환란과 고통을 우리가 잘 대우해야 된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실수한 신자들도(그들이 회개하는 한) 우리는 사랑해야 된다. 그들도 그런 식으로 그 환란 중에서 연단을 받았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 실수 때문에 많은 상처를 받고 이제는 굳게 바로 서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도 베드로도 환란 중에 일시 그리스도를 버렸었으나 그 환란 때문에 자기를 밝히 알고 그 후에는 바로 섰다(요 21:15-17).
잠 17:4
악을 행하는 자는 궤사한 입술을 잘 듣고 거짓말을 하는 자는 악한혀에 귀를 기울이느니라 - 이 귀절은, 악한 사람과 거짓된 사람이 서로 잘 통하고 있는 사실을 보여준다. 실상 양자(兩者)는 질적으로 같은 자들이다. 거짓되지 않은 악인이 없고 악하지 않고 거짓될 수도 없다. 부릿지스(Charles Bridges)는 이 점에 있어서 네 가지 중요한 실례를 들었으니, 곧, 다윗의 아들 암논이 거짓된 요나답의 말을 따라갔다가 범죄한 사실(삼하 13:1-14), 악한 임금 아합이 그 아내 이세벧의 말을 잘 들은 사실(왕상 21:4-7), 유대인들이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잘 들은 사실(사 30:9-11; 렘 38:1-6), 예수님을 정죄하는 자들이 그 때 거짓 증인들의 말을 받아들인 사실(마 26:59-62) 등이다(A Commentary on Proverbs, The Banner of Trust, 1968, pp.256-257). 동양사(東洋史)를 읽어보면 옛날 진(秦)나라 시황(始皇)은 폭군으로서 이사(李斯)란 신하의 그릇된 말을 듣고 선비들의 서책들을 불살랐으며, 학자 464명을 구덩이에 묻었다. 그리고 진 시황의 아들 호해(胡亥) 황제는 간신(奸臣) 조 고(趙高)의 말을 듣고 공신(功臣)들을 모두 잡아 죽인 결과 각처에서 내란이 일어나서 진나라는 망하고(주전 207년) 말았다(장 충식 역, 세계 고전 전집, 十八史略 , pp.184-189). 이렇게 진나라에는 폭군들 앞에서 직언(直言)하지 않고 임금의 악한 소원을 따라서 아첨하는 간신들이 있었다. 그들은, 임금이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指鹿謂馬)고 해도 '예'하고 따라갔다. 폭군들은 그런 간신즐과 더불어 자기 소욕만을 채우다가 나라를 망케 하였다.
잠 17:5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이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할자니라 - 여기서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것이 조물주를 멸시함과 같은 죄라고 함은 무슨 이유인가? 이에 대하여 어떤 해석가들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가난한 처지도 섬리하셨기 때문이라고 한다(Keil & Delitzsch, Cherles Bridges, C. H. Toy). 그러나 이와 같은 해석은 잘 된 것이 아니라고 본다. 그러므로 나는 다음과 같이 해석은 잘 된 것이 아니라고 본다. 그러므로 나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곧, 하나님께서 심각하게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시기 때문에 그를 조롱하는 자에 대하여 그 자신(하나님 자신)을 멸시하는 자와 같이 간주하신다는 뜻이다. 잠19:17에 말하기를,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고 하였다. 약 2:5 참조. 동양 도덕에도 이와 유사한 말이 있다. 예를 들면, "남의 신체의 불구나 흠점을 보고 비웃는 것이 죄니라"고 한 것이다(Shin-sin-luh , p.44). 이것은 도가(道家)에서 한 말인데, 물론 도교(道敎)는 참 하나님을 모르는 어두운 종교이지만 이만한 말은 하였다. 이것을 보면 남의 불행을 비웃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 불쌍히 여김이 되어야 할 자를 도리어 천대하는 것은 너무도 진리에 대한 적극적 반역 행위이다. 레
19:14 참조. "형벌을 면치 못할 자"란 말은 물론 그가 하나님의 벌을 반드시 받는다는 뜻이다. 극도로 악한 자가 천벌을 받는다는 뜻이다. 극도로 악한 자가 천벌을 받는다는 사상은 유교에도 있다. 명심보감에 말하기를, "악한 마음이 가득 차면 하늘이 반드시 벧것이다"(惡??若天必誅之)라고 하였다(明心寶鑑, 天命篇, 4, p.36). 유교의 신관은 물론 참되지 못하지만, 유학자들의 사상이 그들의 양심과 경험에 의하여 벙어리 입 노름격으로나마 천벌(天罰)에 대하여 표현한 것만은 확실하다. 우리는, 물론 유교(儒敎)의 '하늘'이란 것이 매우 막연한 신관(神觀)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된다. 유교에서 하늘을 신봉(信奉)한 것은 유일신주의(唯一神主義)의 유신론(有神論)이 아니고 서물 숭배(庶物崇拜)에 속한 것이었든지, 혹은 음양론(陰陽論)에 속한 것이었다. 공자(孔子)가 신에 대하여 말하기를 , "귀신의 덕이 성하다.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아니하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아니하지만 만물 체내에 들어 있어서 만물이 이를 빠뜨릴 수 없다"(鬼神之爲德基盛矣乎 視之而不見 聽之而不聞 體物而不可遺)라고 하였다(中庸, 玄岩社, 1970, p. 195). 공자의 이 말 가운데 귀신이 만물 체내에 들어 있어서 만물이 이를 빠뜨릴 수 없다는 말은, 후대의 유학자들(程子, 張橫?, 朱子)의 해석되로 보아 음양(陰陽)이란 두 기운의 작용을 가리켰다. 이런 학설은 신(神)과 기운(energy)을 혼동하는 잘못된 사상이다. 공자의 말한 신은 물론 참 신은 아니지만 신이라고 하면 자의식(自意識)을 가진 인격(人格)인데, 어떻게 무인격한 기운과 동일하게 간주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잠 17:6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요 아비는 자식의 영화니라 - 여기 "손자"란 히브리어는 "자손들의 자손들"이라고 번역되어야 하므로 이것은 많은 자손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노인"이란 말은 부모나 선조(先祖)들을 가리킨다. 여기 상반절의 말씀은, 자식이 하나님의 은혜로 올바로 살 때에 그 부친에게 영광이 된다는 뜻이다. 옳지 않은 자식은 부조에게 부끄러움이 된다. 아벧은 그 부모에게 면류관과 같았으나 가인은 부끄러움이었다(창 4:1-12). 요엘과 아비야는 그 아버지 사무엘에게 부끄러움이 되었고(삼상 8:1-3), 암논과 압살롬은 다윗왕에게 부끄러움이 되었다(삼하13:1-18:18). 그러나 자식들이 부모 밑에서 받은 교훈을 잘 순종하면 그 부모에게 영광이 된다. 특별히 젊은 부모들이 그 자식들을 가르치며 인도할 시간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시 127:4에 말하기를,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라고 하였다. 우리가 여기서 명심할 것은, 부모가 자식들을 잘 가르쳐도 그들이 잘 순종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모가 자식들을 잘 가르치기는 해야 된다. 곡식이 잘 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하심에 달렸을지라도 사람이 마땅히 밭을 경작하고 종자를 심어야 된다. 그리고 이 귀절의 하반절은, 부조(父祖)가 하나님 앞에서 옳게 살았을 때에 그 자손들의 받을 축복에 대하여 말한다. 므비보셋이 그 아버지 요나단 때문에 특별한 축복을 받은 것은 적절한 실례이다(삼하 9:6-13).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옳게 산 조상 때문에 그 자손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출 20:6에 있으니, 곧,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고 하신 말씀이다. 우리는 이 말씀의 의미를 옳게 깨달아야 된다. 이것은, 의인의 후손들이라고 천대가지 개인 개인이 모두 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의인의 후손 천대까지라도 잊지 않으시고 그 자손의 어떤 자들을 축복하시겠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었으나 그의 육신의 자손들이 모두 다 축복을 받은 것은 아니다. 그 자손들 중에는 에서와 같은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그의 자손들 중에 축복을 받는 자들이 오랜 세월 동안 많이 나왔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자기 후손들을 위하여서도 신앙으로 바로 살아야 된다.
잠 17:7
분외의 말을 하는 곳도 미련한 자에게 합당치 아니하거든 하물며 거짓말을 하는 것이 존귀한 자에게 합당하겠느냐 - 여기 "분외의 말"이란 히브리어는 "넘치는 말"이란 뜻이다. 이것은, "미련한 자"(잠언에서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를 가리킴)로서 진리에 속한 고상한 말을 하는 경우를 가리킨다. 미련한 자가 그런 고상한 말을 한다는 것은 하나의 연극에 불과하니,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음이다. 부릿지스(Charles Bridges)는, 이점에 있어서 그리스도에게 대한 마귀의 고백과 같은 것이 "분외의 말"이라고 하였다(A Commentary on Proverbs, The Banner of Truth Trust, 1968,p. 259). 바울도 마귀의 진리 증거를 좋지 않게 여겨 그것을 거절하였다 (행 16:16-18). 사람 중에도 사회적으로 죄악된 생활을 계속하는 사람이 복음을 증거한다면, 그것은 도리어 역효과를 거두게 될 것이다. 잠 26:7에 말하기를, "저는 자의 다리는 힘 없이 달렸다니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도 그러하니라"고 하였다. "존귀한 자"는 지도자를 가리킨다(잠 8:16). 지도자라고 하면 그는 많은 사람들의 신임과 존경을 받고 있다. 그러니 만큼 그에게는 진실성이 가장 중요한 자격증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가 타락하여 거짓말을 하게 된다면 그것은 많은 사람의 기대에 어긋난다. 그로 인하여서 또한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도 된다. 사회의 지도자보다 더욱이 교회의 지도자들을 가리켜 "존귀한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받은 성직(聖職)은,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영혼을 맡길 만큼 역사적으로 신임성을 차지해 온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때로는 그들 중 대다수가 속화(俗化)되어 신령한 생명력과 진리의 깊은 지식 없이 교회를 지도한다. 실력 없는 자들은 필연적으로 거짓말로 일을 꾸며 나가게 마련이다. 그들의 교역방침은 인본주위요 또 비열한 정치적 수단이 앞설 수 밖에 없다. 그들이 그렇게 할때에 교회를 속화시킬 뿐아니라 불신자들로 하여금 복음을 멀리하게 만든다. 마 23:13 참조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딛1:16), 그것이 속화운동이다. 속화주의는 실상 실제적 무신론(實除的無神論)이다. 속화주의 자들은 그들의 옳지 않은 행위로써 힘있게 사람들의 신앙을 타락시킨다.
잠 17:8
뇌물은 임자의 보기에 보석 같은즉 어디로 향하든지 형통케 하느니라 - 이것은, 뇌물을 쓰는 것이나 받는 것을 찬성함이 아니고 뇌물의 위험성을 지적함이다. 성경은 뇌물을 금한다(출 23:8; 삼상 12:3; 욥 5:34).삼상 8:3; 시 26:10-1; 암 5:12 참조.여기 "임자"란 말은 뇌물을 받아 가진 자를 가리킨다. 뇌물을 받는 관리들은 법적으로 부당한 일도 통과시키니, 그들의 나라에는 공의가 설 수 없고 도리어 불의(不義)가 득세한다. 그 이유는 이렇다. (1) 국법을 범한 자도 뇌물을 쓰면 무사해지니, 그가 앞으로도 불의를 행하게 되고, (2) 뇌물을 쓰지 못한 자는 외로울지라도 억울함을 당하게 되니, 그는 의로움의 보람을 못 느낀다. 그러므로 의(義)를 위하여 힘쓰려 하지 않게 된다. (3) 뇌물을 받기 좋아하는 관리들은 뇌물 받는 습성이 생겨서 뇌물 받을 기회가 없는 일은 중요한 일일지라도 속히 처리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불의가 성행되는 나라는 망할 수 밖에 없다. 의를 소유하지 못한 나라가 어떻게 번영할 수있겠는가? 잠 14:34에 말하기를, "의는 나라로 영화롭게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고 하였다. 여기 "보석"이란 말은, "행운(幸運)의 돌 곧, 마술의 보석"이란 뜻 이라고, 토이(C.H. Toy)는 말하였다. 그러나 토이 자신도 인정한 바와 같이, 성경의 다른 부분에 이 말이 그런 뜻으로 사용된 적이 없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저 탐심을 일으키는 진귀한 보석을 의미할 뿐이다. 뇌물은 이런 보석과 같아서 그 받은 자의 마음을 흐뭇하게 만들어 주므로 그는 그 부탁 받은 일을 힘껏 성사시키려고 한다. "어디로 향하든지 형통케" 한다는 말씀이 그 뜻이다. 여기 "형통"이란 말은 지혜를 다하여 성공시킨다는 뜻이다(W. H. Gispen, Korte Verklaring Der Heilige
Schrift, Spreu-ken, J.H. Kok, Kampen, 1954,p.34). 불신자들도 뇌물의 위험성을 안다. 마게도냐의 필립(Philip)은 말하기를, "강한 요새지라도 나귀에 금을 싣고 그 성문에 가면 빼앗을 수 있다."라고 하였다(Charles Bridges). 다시 말하면, 뇌물러써 강국도 정복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의로운 통치자들은 뇌물을 금물(禁物)로 하였고, 어디까지나 정의(正義)를 세웠다(시101:1-8).
잠 17:9
허물을 덮어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 "허물을 덮어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이것은, 누가 어떤 사람의 허물을 가리워준 결과로 그 사람의 사랑을 받게 된다는 뜻이 아니다. 사람의 사랑을 받기 위하여 그 사람에게 선을 행하라는 사상은 성경적 윤리의 동기가 아니다. 이 말씀은, "남의 허물을 덮어주는 자가 바로 남을 사랑하는 자"란 뜻이다. 잠 10:12에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고 하였다. 인간에게는 죄악 문제가 제일 큰 문제이다. 인생 문제란 다만 죄악 문제리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유일한 목적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어 그들로 하여금 사죄 받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렇다면 사죄 받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만물을 주셨다(고전 3:21). 그뿐 아니라 그가 우리에게 사죄의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는 그리스도를 주셨으니(요 3:16), 그리스도는 만물보다 크시다. 요 3:31, 35 참조.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 된 신자들도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본받아서(요일4:9-110 사랑을 제일로 알고(고전 13:1-3) 그것을 중심으로부터 실행하기를 힘써야 된다. 우리 본문의 "구하는 자"란 뜻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그와 반면에 누구든지 남의 허물을 거듭 말한다면 그것은 남의 아픈 에를 또 다시 찔러주는 잔인한 행동이다. 사실상 사람은 그 몸이 구타를 다함보다도 그 인격이 훼방을 받는 것에서 더욱 큰 상처를 입는다. 그 때문에 피해자(被害者)인 그는 가해자(加害者)에게서 영구히 멀어진다. 옛글에도 말하기를, "사람을 이롭게 하는 말은 솜 같이 따뜻하고, 사람을 상하게 하는 말은 가시 같아서 한 마디의 말이 무겁기다 천금과 같고, 한 마디의 말이 사람을 중상함은 아프기가 칼로 베는 것과 같다"(利人之言煖如綿絮 傷人之語利如荊棘 一言半句重値千金 一語傷人痛如刀割)라고 하였다(明心寶鑑,玄岩社, 1970, p.284)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사람들도 경험과 양심에 의하여 이렇게 남을 해롭게 말해서는 안되는 사살을 지적하였다. 어거스틴(Augustine)은, 때때로 많은 동역자들을 초대하여 같은 식탁에서 먹었다. 그는, 그 좌석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써서 붙였다고 한다. 곧, "여기 함께 있지 않은 사람의 허물을 말하지 말라." 라고.
잠 17:10
한마디로 총명한 자를 경계하는 것이 매 백개로 미련한 자를 때리는 것보다 더욱 깊이 박이느니라 - 이 귀절의 의미는, 총명한 자는 충고를 잘받으나 미련한 자는 그것을 배척한다는 뜻이다. 여기 이른바 "총명한 자"는 깨가닫는 자를 가르치
는데,이는 지식적으로 민첩한 자를 말함이다. 충고가 옳은 줄 알면서도 그대로 따르지 않는 자들이 많은데, 그들은 발뒷꿈치로 송곳을 차는것과 같은 우매한 자들이다. 촬스 브릿치스(Charles Bridges)는 이 점에 있어서 좋은 실례를 성경에서 인용 하였다. 곧,"다윗은 나단이란 선지자의 한 마디 말을 달게 받고 회개 하였고(삼하 12:1-7, 13; 시51편),베드로는 예수님의 한 번 쳐다 보심 때문에 회개하였다(눅22:61-62)."라고. 공자(孔子)도 충고를 달게받는다는 의미로 말하기를, "나의 선을 말해 주는 자는 내게 도적이 되고,나의 악을 말해주는 자는 내게 스승이 되느니라"(道吾善者是吾賊道吾惡者是吾師)고 하였다(論語) . 공자의 이와같은 언사가 진리에 가까운 것은 사실이다. 물론 이것이 형식적으로는 위의 잠언 귀절의 정신과 부합한다. 그러나 공자의 생각한 선(善)의 표준이 잠언의 그것과 다른 것은 확실하다. 잠언이 말하는 선의 표준은 하나님을 경외함(잠1:7)인 반면에, 공자의 그것은 이세상 중심이다. 물론 양자(兩者)가 일반 은총면에 국한하여 윤리상(倫理上) 일치되는 점도 있다. 이런 공동 은혜의 영역(領域)에 있어서 기독자는 유학자(儒學者)들로 더불어 공동 보조를 취할 수 있는 것이다. "미련한 자를 때린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것은 잘못하는 자를 징계하기 위하여 어떤 형식의 고통을 줌에 대한 비유일 것이다. 성경에는,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를 채찍하신다는 말씀이 있는데 (히12:5-6), 그것도 환란과 고통의 방편으로 죄인을 징계하심에 대한 비유의 말씀이다. 사람이 고통을 받으므로 바로 되는 일이 많다. 그러므로 시 119:67 에 말하기를, "고난 당하기 전에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고 하였다. 그와 동시에 이것은 징계와 권위(權威)를 가진자가 완강히 반역하는 자를 합법적으로 구타함을 의미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부모가 그 순종하지 않는 자식을 적당히 매로 다스림과 같은 것이다. 나는 여기서 "적당히"라는 말을 다음과 같은 뜻으로 사용한다. (1) 보통 12,3세 미만의 자식에게 매를 드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것과, (2) 자식이 잘못할 때에 먼저 말로서 타이르며 돌이킬 기회를 주면서 또다시 잘못하면 벌을 준다고 경고해야 된다. 이렇게 미리 그자식에게 선택의 기회를 줌이 그의 의지(意志)의 자유를 존중함이다. 그 뒤에 그 자식이 또 잘못한다면 경고한대로 벌을 주어야 된다. 그렇게 징계할 때에 그 자식의 의지를 파괴시키지 않게 된다. (3) 또 종아리나 팔과 같은 지체를 매로 아프게 하여 교훈을 하되, 혈기를 내지 않도록 조심해야 된다. 약 1:20 참조.
잠 17:11-13
악한 자는 반역만 힘쓰나니 그러므로 그에게 잔인한 사자가 보냄을 입으리라 차라리 새끼 빼앗긴 암콤을 만날지언정 미련한 일을 행하는 미련한 자를 만나지 말것이니라 누구든지 악으로 선을 갚으면 악이 그 집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 이 말씀은, 하나님을(혹은 하나님의 선에 대하여) 반역하기만 하는 "악한 자"에 대하여 지적한다. (1)그는 반드시 재앙을 만나게 되며(11절), (2) 그는 남을 해롭게만 하는 위험한 인물이며(12절), (3) 그는 가족적으로 재앙을 만난다(13절)고 한다.
"악으로 선을 갚는 것"(13절)은 반역자들의 특징이다. 이런 행동을 하는 자는 소나 나귀만도 못한 자이다(사 1:3). 그런 자는 실상 주인을 향하여 발꿈치를 드는 자이다(시 41:9; 요 13:18). 딤후 3:4 참조. 이죄악은 극도로 악하기 때문에 이에 해당하는 벌이 크다. 곧, "악(재앙을 의미함)이 그 집을 떠나지 아니하니라"고 한다. 이 재앙은 물론 하나님께서 그 악인에게 보내신다. "잔인한 사자가 보냄을 입으리라"(11절). 여기 말한 "사자"는 하나님의 사자(使者)로서 재앙을 베푸는 자를 의미한다. 이런 사자가 보냄을 받는다는 말씀과 "악이 그 집을 떠나지 아니하리라"(13절)고 하신 말씀은, 재앙을 보내시는 이가 하나님이신 사실을 보여준다. 이것을 보면, 배은망덕(背恩忘德)하는 죄악은 극도로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것이다. 이런 죄악을 범하였던 고라(민16장), 압살롬(삼하 18:9-15), 유다(마 27:3-5)의 당한 벌은 이 사실을 증명한다.
잠 17:14
다투는 시작은 방축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즉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칠것이니라 - 이 말씀은, 싸움이란 것이 작은 일로부터 시작하여 점점 확대되고 나중에는 큰 일이 잘못되도록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싸움은 불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불이 사정 없이 불어나가며 그칠 줄 모름과 같이 싸움도 별 일도 아닌데 시작되어 크게번져 나간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작은 일에 있어서부터 분쟁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된다. 혹시 분쟁이 시작된 때에라도 그들은 어느 편에서든지 먼저 양보하여 그 싸움이 확대되지 않도록 해야 된다. 큰 사고가 작은 사건에서 발단되는 수가 흔히 있다. 시카고(Chicago)의 어느 집 외양간에서 소가 등불을 찼으므로 일어난 불이 그 도시의 절반을 태우는 큰 화재를 가져왔었고(1871년), 세계 제일차 대전은, 설비야의 음모자가 오스트리아의 황태자를 죽인 사건에서 발단되었던 것이다(1914년).
동양의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싸움에는 이기기를 구하지 말고, 재물을 나누는데 있어서는 많이 가지기를 구하지 말라"(한母求勝分母求多)고 하였다(小學集註 券之三,4). 여기 말한대로 이기기를 구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사람이 싸움으로 분노가 터지면 일을 저질러 어려운 형편을 당하게 됨을 생각하기(忿思難) 때문이라고 한다(陳氏의 주석). 주자(朱子)는, 계시 종교(啓示宗敎) 곧 기독교를 알지 못한 중국의 철학자였다. 그는 다만 양심과 경험에 의하여 이런 지혜로운 말을 하였던 것이다. 이런 말은 이 세상에 처신하는데 관계된 것이고 내세와 영적 사실과는 직접 관계 없다. 그러므로 누구나 양심과 경험을 주의 깊이 지키는 자는 그것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위의 잠언의 말씀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처지에서 나온 것이다. 다음 귀절에 여호와의 심판을 관설한 것이 이 사실을 증명한다.
아브라함은 자기 조카 롯으로 더불어 다투게 될 즈음에 그 자신이 먼저 양보함으로 싸움을 하지 않았고(창13:8-9),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에돔의 도전적(挑戰的) 행동에 응전(應戰)하지 않았다(신2:2-5; 민20:14-22). 그리고 다윗은 자기 원수들의 악담과 욕설에 대항하지 않고 참았다(시38:12-14). 그런데 바울과 바나바는 끝까지 다투다가(행15:39) 마침내 나위었다(Charles Bridges, A Commentary on Poverbs, The Banner of Truth Trust, 1968,p.264).
잠 17:15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 - 이것은, 불의한 재판이 하나님을 노엽게 한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특별히 교회의 일에 있어서 의(義)를 찾으신다. 그러나 그는 사회 질서에 있어서도 정의의 실시를 원하신다. 그 이유는, 그는 그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마6:10). 그는 말 방울까지 성결하게 되기를 원하신다(슥14:20-21).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하는 재판은 적극적으로 악을 장려하는 행동이니, 극도로 악한 것이며, 악마적인 행동이다. 이와 같이 극도에 이른 악은 극도로 하나님을 거스리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급격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 성경의 교훈이다. 이에 대한 성경의 말씀은 화(禍)를 선언하는 엄위로 나타난다(사5:20).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불의한 재판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악하게 취급되신 예수님이 받으셨던 재판이다(Charles Bridges). 그 재판에 있어서 바라바(살인강도)는 놓이고 예수님은 사형 선고를 받으셨다(마27:26). 예수님은 이 점에 있어서도 최대의 억울함을 당하셨다.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재판은 이처럼 특별히 악독한 죄악이다. 그러므로 이 죄악을 범한 자들은 멸망하게 된다. 아합은 무죄한 나봇을 죄인으로 몰아
서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았다. 이 죄악 때문에 그 자손의 시대에 그 온 집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을 당하였다(왕상21:1-24). 국가의 정권도 이런 죄를 범하면 오래지 않아서 패망한다. 유다의 말년에 여호야김왕은 의인 예레미야를 박해하였으며 우리야를 죽였고(렘26:22-24), 시드기야왕도 예레미야를 박해하였다(38:5-6). 그 뒤에 오래지 않아서 그 나라는 바벧론에게 멸망을 당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죄악을 가리켜 멸망의 앞잡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죄는, 뇌물을 받는 자들이 범하고(출23:7-8), 또한 교만하여 어두워져서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는 자들이 범한다.
잠 17:16
미련한 자는 무지하거늘 손에 값을 가지고 지혜를 사려 함은 어찜인고 - 이 귀절은 다음과 같이 개역되어야 한다. 곧, "미련한 자가 마음은 없이 그 손에 값을 가지고 지혜를 사려 함은 어찜인고."라고. 여기 "마음은 없이"란 말은 마음으로는 참으로 원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마음"이란 히브리어는 뜨거운 애착을 지니고 있는 심리를 가리킨다. 사람들이 겉으로는 하나님을 찾는 모양(지혜를 찾는 모양)을 취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중심에는 뜨거운 소원이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미
련한 자"들이라고 불리운다. 왜 참된 보배를 외식으로 찾는가? 빌라도는 예수님을 옹호하는 듯이 말하면서도 마침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 주었고(눅23:14, 14,20, 22, 24; 요19:15-16), 벧릭스는 바울의 전하는 복음을 듣기 원하면서도 중심에 뜨거운 소원이 없었으므로 결국 그것을 받아 들이지 않았다(행24:25). 오늘날 기독자들 중에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중심에서부터 사모하지 않고 겉으로만 신자 노릇을 하는 자들이 많다. 사람이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롬10:9-10). 마음은 두뇌가 아니고 심장으로 표현된 애정이다. 그것이 우리 인격의 중심이다. 주님은 뜨거운 마음을 원하신다. 그러므로 그가 베데스다 못 가에 누워 있던 38년 된 병자를 고치실 때에도 먼저 그에게 물으신 말씀이,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하시면서, 그의 뜨거운 소원이 있는 여부를 알아보셨다.
잠 17:17
친구는 사랑이 끊이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까지 위하여 났느니라 - 델리취(Delitzsch)는 이 귀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곧, "진정한 친구는 언제나 사랑하나니 형제처럼 곤란한 때를 위하여 났느니라"라고. 그러나 우리 한역이 더 자연스럽고 문법적이다. 이 귀절에는 친구에 대한 말이 있는 동시에, 형제에 관한 말도 있다. 여기 "친구"란 말의 히브리어는 친구에 관사가 붙어 있는 어형(語形)이다. 델리취(Delizsch)는, 여기서 특별한 친구(곧,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친구)란 의미를 찾았다. 그래서 그는 이 말을 "옳은 친구"(the right friend)라고 번역 하였다. 언제든지 사랑을 계속하는 친구는 쉽지 않다. 요나단은, 그의 친구인 다윗이 환란을 당할 때에 계속 도와주었으며, 특별히 자기의 부친이 다윗을 미워할 때에도 그는 부친의 뜻에 맹종하지 애고 끝까지 다윗을 도와주었으니, 참으로 위대하다. 요나단은 혈통(血統)보다는 의리(義理)를 따랐다. 삼상 18:3, 19:2, 23:16 참조. 다윗과 요나단의 친교(親交)는 여호와를 믿는 신앙의 열매였다. 다윗의 신앙은 말할 것도 없고 요나단도 신앙의 사람이었다(삼상 20:12).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자들 가운데도 역시 하나님이 주신 양심에 위하여 친구를 사귐에 있어 옳음을 지키는 일이 더러있다. 옛날 중국에 있었던 제나라(濟國) 환공(桓公) 시대의 관중(管仲)과 포숙(鮑淑)의 친교(親交)는 후세에 모본이 된다. 그 두사람이 함께 장사하여 이(利)를 나눌 때에 관중이 더 많이 차지하였다. 그 때에 포숙은 아량 있게 관중을 이해하며 말하기를, "관중이 저렇게 행한 것은 너무 가난한 까닭이라."고 하였다. 그 후에 관중이 전쟁하다가 세 번씩이나 패하여 도망하였을 때에, 포숙은 그를 겁장이라고 하지 않고 좋게 말하기를, "관중이 전쟁에 패하여 도망한 것은 늙은 어머니가 계셔서 어머니를 봉양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세계 고전 전집 十八史略 I, 1970, p.101). 동양 도덕에서도 이렇게 변치 않는 사랑을 존중시 하였다. 공자(孔子)는 춘주 시대(春秋時代)의 제나라 경공(景公) 때의 선한 정치가였던 안 평중(晏平仲)을 다음과 같이 칭찬하였다. 곧, "안 평중은 사람 사귀기를 훌륭히 했도다. 오래도록 변함없이 공경했나니"라고 하였다(晏平仲善與人交久而敬文之. 一論語, 公冶長 第五, 17). 공자의 이와 같은 말은 친교의 원리를 가르침에 있어서 잠언의 말씀과 유사하다. 다만 양자(兩者)가 서로 다른 점은, 그 배후 관계이다. 공자는 단순히 인본주의(人本主義) 처지에서 말하였고, 잠언 저자는 신본주의(神本主義) 처지에서 말하였다.
그런데 친교가 오래 계속되게 하는 비결은 무엇인가? 그것은, 성경에 있는대로, 남의 죄를 가리워주라는 말씀(마 5:44-48)을 순종할 때에만 성립된다. 시 109:4-5 참조. 내가 남에게서 무엇을 얻으려고 남과 사귀면 안된다. 그런 사귐은 그 기대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때에 깨어지고 만다. 그러나 원수 사랑의 정신의 소유자는 그런 난관도 극복한다. 유교(儒교)에도 우교(友交)가 계속되게 하는 비결로써 가르친 교훈이 있다. 그것은, 그것은 친구를 사귐에 있어서 마음을 청백(淸白)하게 가지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명심보감(明心寶鑑)은 말하기를, "군자의 사귐은 물과 같이 맑고, 소인들의 사귐은 단술과 같이 달다"(君子之交淡如水 小人之交甘如醴)라고 하였다(玄岩社, 1970,p.97). 이것은, 친구를 사귐에 있어서 단술과 같이 상대방을 기쁘게만 하려고 아부하지 말고 청백하게 행해야 된다는 뜻이라고 본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교훈이지만, 죄를 용서함과 원수 사랑함을 강조한 성경 말씀의 수준에 도달하지는 못하였다. 형제는 위급한 때까지 위하여 났느니라." 이 말씀에 대하여 델리취(Delizsch)는, 형제가 재앙을 위하여 난 것 같이"란 번역을 주장한다. 곧 참된 친구는, 재앙 가운데서도 도와주는 형제와 같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번역은 문법적으로 자연스럽지 않다. 이 말씀은, 상반절에 관설된 친구와는 별도로 형제에 대하여 말한다. 곧, 한 혈통에 속한 형제들은 환란 때에 자발적으로 서로 도와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되어지는 일을 그대로 들어 말한 것이다. 유교 시경(詩經)에도 말하기를, "환하니 빛 넘치는 산 앵두꽃 피었네, 세상 사람 중에서 형제 같음 또 없네, 죽을 고비 당해서도 형제면 생각하고, 송장 깔린 그곳에도 형제는 찾아 가네, 들에 있는 할미새 몹시 바쁘듯 형제면 어려울 적 급히 구하네, 아무리 좋은 벗이 있다 하여도 그럴 때눈 우리의 탄식만 사리. 형제는 집 안에서 다투다가도 밖에서는 업신여김 손 잡고 막네. 아무리 좋은 벗이 있다 하여도 그럴 때는 우리를 돕지 않으리"(常태之華鄂 風今之人莫如兄弟 死喪之威 兄弟孔懷 原濕裏矣 兄弟求矣 脊令在原 兄弟急難每有良朋 況也永歎 兄弟??于墻 外禦基務 每有良朋 烝也無我. 一時經 小雅常태, 玄岩社, 1970, pp.214-215). 위의 싯귀(詩句)는, 이 세상 사람들이 혈통에 이끌려 행하는 가족적 윤리 생활의 현상을 그대로 말해준다. 이것은, 이 세상 사람들도 경험에 의하여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 계시(自然啓示)에 속한 것으로써 영감(靈感)된 것은 아니다.
잠 17:18
지혜 없는 자는 남의 손을 잡고 그 이웃 앞에서 보증이 되느니라 - 이것은, 그 어떤 보증 행위든지 모두 다 금하는 것이 아니다. 올바른 보증은 남을 돕는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위하여 여관 주인에게 담보하는 말을 하였고(눅
10:35), 바울은 오네시모를 위하여 그리하였고(몬 1:18),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보증이 되어 주셨다(히 7:22).
18절 말씀은, 누구든지 감당할 수 없는 보증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 뿐이다.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보증을 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로 합당치 않다. 곧, (1) 상대방을 도와준다는 명예를 위한 것이니, 이는 허영주의이고, (2) 장래에 경제적 실력이 생길 줄로 예상하고 취한 행동이니, 이는 경제 모험이다. 경제 모험을 하는 개인이나 단체는 실패하기 쉽다. 오늘날 한국에서 큰 기업체들이 파산하는 원인도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잠 28:6에 말하기를 , "성실히 행하는 가난한 자는 사곡히 행하는 부자보다 나으니라"고 하였다. 우리 본문의 "남의 손을 잡는다"는 말은 그저 "손바닥을 친다"는 뜻
이다. 그렇게 때문에 70인역(LXX)과 라틴역은, 이것을 기뻐하는 행동으로만 보았다(C.H. Toy). 그러나 욥 17:3을 보면 손을 치는 행동은 보증한다는 뜻이다.
잠 17:19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죄과를 좋아하는 자요 자기 문을 놓이는 자는 파괴를 구하는 자니라 - 여기 이른바, "다툼을 좋아하는 자" (상반절)는 하반절의 "자기 문을 놓이는자"(교만한 자)와 같은 자이다. 사람들 중에는 마지못하여 분쟁에 말려들어가는 자도 있다. 그러나 다투기를 좋아하는 자도 있는데, 그런 사람은 교만한 자이다. 그는 언제나 남들을 무시하는 것만큼 남들의 권리를 침해하려고 한다. 따라서 온갖 불의한 행동이 거기서 나온다(잠 29:22-23). 그는 죄악을 사랑하는 것만큼 그 죄악을 극도로 채운다. 이런 교만한 자("문을 높이는 자")는 마침내 멸망을 당한다. 이 귀절에 있어서 우리가 주목할 만한 것은, 여기 두 번 나온 "좋아한다"는 말과 "구한다"는 말이다. 이런 표현들은 저 교만한 자의 어리석음을 풍자적으로 지적한다. 그가 자기 자신을 위하여 다툼을 좋아하지만 그것은 정의감(正義感)에서보다 죄악의 충동에서 그리한다. 사람으로서 보통으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서는 다투지 않음이 의(義)의 편에 속한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전
13:5). 고전 10:33; 빌 2:21 참조. 그러나 교만한 자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다투기를 좋아하니, 그것은 죄를 좋아함(히브리 원문대로 죄를 사랑함)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 자신의 파멸을 힘써 구함과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리석기 그지 없다. 동양의 옛글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덕(德)은 하늘을 움직이는지라, 이르지 아니함이 없나니, 자만(自慢)은 손해를 부르고 겸손한 것은 이익을 받음이 하늘의 도(道)이니라"(惟德動天滿招損謙受益詩乃天道)고 하였다(虞書, 玄岩社, 1970, p.63). 이 말을 보면, 교만한 자가 하늘의 심판 때문에 멸망한다는 사상이 나와 있다. 그런데 서경(書經)이 말하는 '하늘'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서경의 신관(神觀)은 막연하다. 그것은 유신론(有神論)에 부합하는 것이 아니다. 서경에서 어떤 때에는 우주(宇宙)의 최고 통치자를 하늘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책에 말한 바 하늘이 명하였다는 것(天命)은, 극히 형식적인 최고의 전제(前提)를 가리밀 뿐이고 적극적 내용 있는 계시(啓示)는 언급하지 못 하였다. 그리고 어떤 때에는 이 책이, 하늘의 신(天神)과 땅의 신(地神)을 공존(共存)의 생산자들로 표현한다. 예를 들면, "천지는 만물의 부모이고, 사람은 만물의 영이다"라고 한 것이다(玄岩社, 1970, 泰誓, p.211). 그러면, 우리가 위에 인용한대로 교만한 자를 하늘이 심판한다는 의미의 사상을 어떻게 평가해야 되는가? 그것은 부패해진 인류라도 어떤 때에 일반 은총에 의하여 말할수 있는 양심의 소리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성령의 감동에 위하여 기록된 하나님 말씀의 권위에도 미치지 못하나 이 점에 있어서 우리가 명심할 것은, 일반 은총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그 증거를 존중시 해야 된다는 것이다.
잠 17:20
마음이 사특한 자는 복을 얻지 못하고 혀가 패역한 자는 재앙에 빠지느니라 - 여기서는 사람들이 늘 등한히 취급하는 두 가지에 대하여 말한다. 사람들이 보통으로 행동은 어느 정도 조심하면서도 마음을 단속하기엔 주의하지 않는다. 그 뿐 아니라 그들은 말도 조심성 없이 한다. 그러나 성경 말씀은 이 두 가지를 무엇보다 중대시한다(신6:5; 롬 10:9-0; 약 3:2; 마 12:36). 우리는, 무엇보다도 이 두 가지를 잘 지켜야 된다. 이 두 가지에 있어서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그 진실성이다.
우리 본문에 "사특하다"고 함은, 거짓됨을 의미하고, "패역하다"고 함도 역시 거짓됨을 가리킨다. 마음이 거짓된 자는 하나님의 진리를 믿지 않는다. 거짓과 신앙은 서로 정반대이기 때문이다(시 51:6). 그리고 사람의 언사가 거짓되면 그것은 그 인격의 자살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사람의 말의 가치가 그 인격의 가치를 정하여 주기 때문이다. 누구나 거짓말장이로 더불어 함께 일할 수도 없고 함께 살 수도 없다. 더욱이 그런 사람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다. 그는 마귀에게 속한 자이다(요 8:44).
잠 17:21
미련한 자를 낳는 자는 근심을 당하나니 미련한 자의 아비는 낙이 없느니라 - 잠언에 이와 유사한 말씀이 많이 나온다(10:1, 15:20, 17:25, 19:13). 자식이 미련한 것은 생래적(生來的)으로 되는 일이니 인력(人力)으로 할 수 없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 이유는, 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여러 자식들 중에는 어질고 총명한 자와 어리석고 미련한자가 섞여 있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라 위대한 신앙가의 자식들 중에도 미련한 자가 있기 때문이다. 이삭의 아들 에서는 불민(不敏)하였고 창 25:34), 아론의 두 아들(나답과 아비후)도 그러했고(레 10:1), 사무엘의 아들들(삼상 8:1-3), 다윗의 아들들(삼하 13:1-39, 15:1-12)도 역시 불량하였다. 그러므로 선량한 자녀들을 소유한 것은 하나님에게서 받은 분복이다. 시 127:3-5에 말하기를,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라고 하였다. 이런 축복을 받지 못한 부모는 그 자식들 때문에 근심하게 되는데, 그 근심은 늘 좋지 못한 것이 아니다. 그 부모는 그 근심 때문에 겸손해질 수 있고, 또 간절히 기도하게 된다. 그들이 그렇게 될 때에 그것이 역시 복이 된다. 만일 선량하고 총명한 자식으로 인하여 교만해지고 기도하지 않는 부모가 있다면 그들(부모)은 하나님의 축복을 바로 감당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선량한 자식들로 인하여 역시 겸손하여져야 하며, 기도를 많이 해야 된다. 그 이유는, 그 선량하고 총명한 자식들에게 불량한 후손이 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새는 선량한 아들 다윗을 인하여 얼마나 기뻐하였으랴! 그런데 다윗에게서도 불량한 자식들이 나왔다. 우리가 이 점에 있어서 또 한 가지 생각할 것이 있다. 곧, 자식들의 미련한 원인이, 그 부모가 옳은 길을 가르쳐 주지 않은 사실에도 있다는 것이다. 자녀를 교육함은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또 다시 하나님의 축복으로야 그 교육의 결실을 보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된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니라"고 하였다(고전 3:6-7).
잠 17:22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 촬스 부릿지스(Charles Bridges)는, 여기 "즐거움"이란 것이 육체적인 즐거움(이 세상 정욕의 즐거움)을 말함이 아니고 영적(성령으로 말미암은 즐거움)인 것이라고 한다. 그 이유로서는, 솔로몬이 육체적 즐거움을 하나의 광증(狂症)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ACommentary on Provers,The Banner of Truth,1968,p.272). 사실상 사람의 육체적 즐거움이란 것은 그의 영혼에는 물론이고 그의 몸에도 건강케 하는 양약이 될 수 없다. 육체적 향락을 누리는 자들에게는 남 모르게 후회와 심리 고통이 많은 법이다.황금으로 집을 짓고 살던 네로 황제는 얼마나 괴로웠으면 자살하였으랴? 향락주의자들은 심신(心身)이 아울러 약해져서 외래의 곤란으로 더불어 싸워이길 힘이 없다.그러나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얻는 즐거움은 후회할 것이 없는 참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의 몸도 강건케 되고, 우리의 영혼도 강건케 된다.그 즐거움을 소유한 자는,모든 외래적 고난도 찬송하며 견디어 나간다.그는 구름속의 무지개를 본다(Charles Bridges). "심령의 근심"이란, 이 세상 일로 인한 염려를 말한다.그것은 영혼을 죽이는 것이다(마13:22). "뼈로 마르게 한다"고 함은 신체의 골격보다 인격의 지주(支柱)가 쇠약해짐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그 몸과 영혼이 다 함께 병약해진다는 것이다. 이세상 근심은 불신앙이고(마6:34), 또 해롭기 때문에 예수님은 신자들에게 가르치시기를 의복과 음식이 없는 처지에서도 그것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고(마6:25),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다(마6:34). 공자는 말하기를,"군자는 근심도 아니하고 두려워하지도 않는다"(君子不優不懼)하였고 , 또 말하기를, "군자가 마음을 살펴 허물할 것이 없으면 근심할 것 무엇이며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겠는가?"(內省不疾夫河憂河懼)라고 하셨다(論語, 顔淵 第十二,4). 이것은, 사람이 다른 사람들 앞에 잘못 행한 것이 없으면 그들 상대로 걱정할 일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생의 근본적인 근심의 문제와 두려움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누구든지 자기는 죄인인 줄 알고 그리스도에게 나아가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자에게서는 근심과 두려움을 이기고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길을 그들에게 주셨다. 그는 믿음의 길을 주장하신다(히12:2).
잠 17:23
악인은 사람의 품에서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느니라 - 사 33:15-16 참조. 여기서 뇌물 받는 관리를 "악인"이라고 하였으니, 뇌물을 받는 것이 큰 죄악인 사실이 알려진다. 위의 8 절 해석을 참조하여라. 유교의 정치 도덕도 뇌물을 죄악시 하였다. 서경(書經)에 말하기를,"인품을 보지 않고 뇌물을 따라 처사함은 크게 관직을 더럽힘이니,왕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허물이 크다.내가 너를 벌하리라"(非人基吉貨基吉懷厥官惟爾大佛克祗厥君辛惟予汝宰)고 하였다(書經,??命 3). 이와 같은 유교 사상은 영감된 하나님 말씀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양심에서 나온 것이고, 하나님의 일반적 계시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잠 17:24
지혜는 명철한 자의 앞에 있거늘 미련한 자는 눈을 땅 끝에 두느니라 - 지혜가 "명철한 자의 앞에" 있다고 함은, (1) 명철한 자가 지혜 그것만을 따른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여호와를 경외함(지혜)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두 주인을 섬기지 않고(마6:24), 오직 여호와(신약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 한분만 사모한다(시 27:4). 하나님만 바라본다고 한 다윗의 시편(62:1-12)을 자세히 읽으라. 거기 "만"이란 말이 네 번(1,2,5,6)나온다. 다윗은 오직 여호와로만 만족하였다(시 23:1). (2) 명철한 자에게는 지혜가 가깝다는 뜻이기도 하다. 잠언이 말하는대로 "명철한 자"란 말은 이 세상 지혜의 소유자를 말함이 아니고 신령한 지혜의 소유자를 가르킨다. 그에게느 하나님이 멀리 계시지 아니한다. 그는 영적 지각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어디서나 하나님이 거시 계심을 느낀다. 시 139:1-18; 롬 10:8;행 17:24-27참조. 그와 반면에 미련한 자는 땅 위의 모든 것을 다 구하고자 하여 모든 것에 주목한다. 그것은 허영주의와 또 탐심에 끌린 모습이다. 그것이 "눈을 땅 끝에 둔다"는 말씀의 뜻이다. 그는, 그 모든 것을 구하여 얻는데 성공도 못하고 따라서 그에게는 만족도 없다. 인간은 하나님을 모심으로만 만족한 법인데(전 3:11),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 뿐이시다(요 14:6). 그러므로 그는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한다(히 12:2).
잠 17:25
미련한 아들은 그 아비의 근심이 되고 그 어미의 고통이 되느니라 - 이 귀절은 부모와 자식에게 각각 경고하는 말씀이다.
(1)자녀들에게 경고함. 곧, 그들이 부모를 걱정시키고 괴롭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자식된 자들 잘 순종하므로 부모를 기쁘게 하여야 한다(엡 6:1). 자녀들로서는 순종하는 것으로 효도의 진수로 알아야 된다. 이 순종은 실상 맹종(盲從)이 아니고 부모의 사랑에 순응하여 그 사랑을 받는 행동이다. 부모은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해로운 것을 명령하지 않고 오직 유익한 것을 부탁한다. 부모의 뜻을 받들어 그들을 기쁘게 해야 될 일에 대하여는 유교(儒敎)에서도 많이 가르친다. 증자(曾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곧, "효자는 부모가 사랑하는 것은, 보모의 마음을 즐겁게 하야 그의 뜻을 어기지 않는다"(孝子之養老人樂基心不達基志)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효자는 부모가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며, 부모가 공경하는 것을 공경한다"(父母之所愛赤愛之 父母所敬赤敬之)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말하기를, "부모가 나를 사랑해 주면 나는 기뻐하여 잊지 말고 부모가 나를 미위하면 나는 두려워하기는 하면서 원망하지는 말것이고, 부모에게 허물이 있으면 나는 간하기만 하고 거스리지는 말 것이다 "(父母愛之善而不忘 父母惡之懼而無怨 父母有過速而不逆)라고 하였다(小學集註 卷之 二,鄕民社,1967,p.41). 위의 증자의 교훈은, 인간의 경험과 양심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연 계시의 일부라고 할수 있다. 그것이 성경처럼 영감(靈感)된 글은 아니지만 효도 (孝道)에 대한 옳은 지식을 보여준다.
(2) 부모들에게 경고함. 곧, 부모된 자들은 자녀들을 감화시키고 또 가르쳐 그들로 하여금 미련한 자가 되지 않게 하라는 것이다. 어린 자녀들의 교육 받을 환경은 가정이 아니면 거리이다. 그들이 가정에서 기쁨을 얻지 못하면 결국 거리로 나가게된다. 거리에는 더러운 죄악들이 많으므로 위험한 곳이다. 아무래도 어린 자식들이 가정에서 기쁨을 얻도록 되야 한다. 거기는 혹시 엄한 법도 있어야 하지만 보다도 그들에게 대한 사랑이 많아야 한다. 거기엔 희생적인 봉사, 거룩한 경건이 힘있게 운동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기도는 헛되지 않으니 부모된 자로서는 그 자녀들을 위하여 끝까지 기도하면 때가 이를 때에 열매를 거둔다. 전 11:1에 말하기를,"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하였고, 갈 6:9에 말하기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하였다. 모니카는 그의 방탕한 아들 어거스틴(Augustine)을 위하여 늘 울면서 기도한 것이 헛되지 않았으니,어거스틴은 마침내 회개하고 기독교의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다.
잠 17:26
의인을 벌하는 것과 귀인으 정직하다고 때리는 것이 선치 못하니라 - 정권(政權)은 선을 장려하기 위하여 있는 법이다(롬 13:1-3).그런데 어떤 때에는 의인을 벌하는 정권도 있다. 그것은 권세를 잘못 쓰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 이런 일을 행하는 정권을 하나님의 벌으 받아서 멀지 않아 멸망한다. 옛날 중국의 상(商) 나라는 주(紂) 임금의 폭정으로 인하여 망 하였고, 진(秦)나라는 시황(始皇)의 악정(惡政)때문에 무너졌다. 이 밖에도 이같은 실례들이 역사상에 많이 남아 있다.
잠 17:27,28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성품이 안존한 자는 명철하니라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기우고 그 입술을 닫히면 슬기로운 자로 여기우느니라 - 여기 이른바 "서품이 안존한"이란 말은 성품이 냉정함(침착함)을 가르킨다. 그리고 "명철하니라"라고 한 말은 "명철한 사람이니라"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이 귀절들은, 사람이 마땅이 침착하여 말이 적어야 할 것을 장려한다. 말보다 행실이 더 귀하니, 신자는 말은 적게 하고 선을 행하는데 주력해야 된다. 예수님은 가장 억울함을 당하셨을 때에 도리어 침묵하셨다(눅 23:9; 마26:59-63,27:14). 약1:19 참조. 공자(孔子)는 말하기를, "군자는 말에는 더디 하고 행실에는 민속히 한다"(君子欲訥於言而 敏於行)라고 하였다(論語, 里仁 第四, 24). 이것이 영감으로 된 말씀은 아니지만 이간의 경험과 양심으로 깨달은 것이니, 자연 은총에 속한 빛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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