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장 북국의 행로
구양봉이 변량 외성에 이르러 보니 성안에는 저자들이 많았고 놀음하는 장소와 점 보는 곳도 있었다. 구양봉은 구경삼아 휘휘 둘러 보며 사람들을 따라 걷다가 한 말라깽이 점쟁이 앞에 이르렀다.
점쟁이 앞에는 자그마한 탁자가 놓여 있고 탁자 위에는 왕망이 한(漢)을 찬탈하고 찍어 낸 동전인 신전(新錢) 세 닢이 놓여 있었다. 손님이 없어 한가롭게 앉아 있는 점쟁이의 손에는 죽통이 하나 들려 있고 그 죽통 안에는 인간의 생사와 길흉을 점치는 죽첨(竹潛), 즉 대꼬챙이들이 담겨 있었다.
구양봉은 심심하던 차에 내일 운수나 한번 짚어 볼 셈으로 점쟁이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이 점쟁이가 내건 주련이 실로 이상했다. 다른 점쟁이들이 내거는 주련은 모두 듣기 좋은 말들이다. 예를 들면, '신기묘산(神機妙算)은 강남 천하에서 으뜸이요, 금심수구(錦心銹口)로는 천하의 미래를 짚어 보인다'라든가 '철구(鐵口)로는 천하를 평정하고 묘산(妙算)으로는 재앙을 해소한
다'라든가 하는 미사여구들을 내거는 것이 상례였다. 그런데 이 점쟁이는 달랐다. 주련의 내용도 그다지 좋지 않은 데다가 무슨 놈의 주련인지 상련(上聯)은 완전한데 하련(下聯)은 절반밖에 없었다. 상련은 '하늘을 나는 봉황, 봉황은 봉황력으로 바람 타고 날고(上飛鳳凰, 鳳凰乘風鳳凰力)'인데 하련은 오직 '땅에서 기는 두꺼비…… (地上爬蛤 ……)'뿐 그 아래 절반이 없었다.
'어떻게 이런 주련을 내 걸었을까…….'
구양봉은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하늘의 봉황과 땅 위의 두꺼비를 대조하는 것부터가 이 점쟁이의 학식이 얼마나 얕은가를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정말 무식한 점쟁이로군.'
구양봉이 생각에 잠겨 머뭇거리자 점쟁이가 얼굴에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손님께선 뜻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구양봉은 순간 흠칫하였으나 점을 보려는가 어쩌려는가를 묻는다고 생각하고 되는대로 대답했다.
"점칠 뜻이 있으면 어떻고 없으면 어떻소?"
"자고로 뜻이 있으면 대도(大道)가 성사되는 법이오, 뜻이 없으면 피안에 당도한다 해도 수포가 되지요."
점쟁이는 허허 웃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승벽이 강한 구양봉으로 하여금 그대로 그곳을 떠날 수 없게 만들었다.
'네가 나한테 유학 선생(儒學先生)을 자처하며 입씨름을 해 보자는 거냐? 나 구양봉도 유가(儒家) 선비이다. 불선(佛禪)을 논함도 유가 학설을 논함도 우리 송의 대소 유학 선비들의 소임이거늘 감히 나와 겨루려 들다니. 좋다, 어디 한번 해 보자.'
구양봉은 점쟁이에게 읍을 한 뒤 입을 열었다.
"자고로 뭔가를 달성하고 말겠다는 욕심에 일심전력 산으로 들어갔다가는 오히려 불상도 못 찾아 참배도 못 드리고 돌아 나오는 헛고생만 하는 수가 많지만, 반대로 무심히 산에 들어갔다가 뜻밖에 정과(正果)를 얻어 진리를 깨닫는 수가 있지요."
뜻밖의 말에 놀란 점쟁이는 잠시 구양봉을 가만 올려다보다가 다시 웃으며 물었다.
"선생께선 무슨 일로 여길 오셨습니까?"
"하릴없이 오고 하릴없이 가는 것이 제일 좋은 것 아니겠소?"
구양봉은 점쟁이가 불선을 담론하자는 줄로 알고 이렇게 대답했다. 물론 이 말에는 자기가 형 구양적처럼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중원에 온 것이 아니라 구경삼아 왔다는 의미도 들어 있었다.
"선생의 손을 좀 보여 주시지 않겠습니까?"
구양봉이 손을 내밀어 보이자 점쟁이는 한참 들여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저는 점괘도 잘 보지만 의술에도 능합니다. 선생의 골격을 보니 보통 사람과는 다릅니다. 춘추가 어떻게 되시는지 원하신다면 점괘를 보아 드리겠습니다."
아무래도 무방하다는 생각에 구양봉은 손을 내밀어 맥부터 짚어 보게 하였다. 점쟁이는 한참이나 걸려서야 떨리는 손으로 겨우 구양봉의 맥을 짚어 냈다. 그는 한동안 맥을 짚고 있더니 갑자기 무척 기뻐하는 기색으로 말했다.
"선……선생은 워낙 무공은 모르시는군요."
구양봉은 은근히 놀랐다.
'아니, 그러고 보니 꽤나 능한 점쟁이로군. 내가 무공에 익숙치 않다는 걸 진맥 한 번에 알아 맞추다니.'
그러나 구양봉은 자기가 무공을 모르는 게 부끄러워서 스스로 비꼬듯 말했다.
"내가 무공을 몰라 스스로 화날 때가 많은데 당신은 그 사실에 오히려 기뻐하다니. 그래 이것도 무심과 유심의 구별이란 말이오?"
그러자 점쟁이는 빙긋 웃었다.
"선생의 문장이 대단히 능하지 않고서야 이렇듯 무공을 가볍게 볼 수가 있겠습니까?"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 말이었지만 어쨌든 이 말에 구양봉은 기분이 좋아졌다.
"선생, 여기 주련 한 쌍이 있는데 재간이 없어 절반은 놔 두고 있습지요. 벌써 많은 사람들이 그 절반을 맞추어 주느라고 하였지만 어느 하나도 소인의 마음에 들지 않아 이렇게 놔 두고 있습니다. 선생께서 한번 도와주시 지 않으시렵니까?"
점쟁이의 청이었다.
'그 잘난 두꺼비 주련 말이지?'
구양봉은 속으로 뇌까리다가 엉터리 주련을 맞추어 내어 점쟁이를 놀려먹는 것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양봉은 선뜻 두꺼비 주련을 맞추겠노라 승낙했다.
"부탁이 그러하시다면 내가 한번 맞추어 보지요."
구양봉이 웃으며 말하자 점쟁이는 잠시 묵묵히 구양봉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선생께서 선뜻 응낙하시는 것을 보니 역시 제 짐작대로 문장이 대단하신 분임에 틀림없으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소인이 호의로 선생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이 주련이 얼핏 봐선 시시해 보이나 아직까지 자연스럽고도 운치 있게 맞춰 낸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니 선생께서도 너무 얕잡아 보시진 마십시오."
그러나 구양봉은 그 말을 새겨듣지 않았다.
"말씀이 너무 지나친 것 같소. 이렇게 짧은 주련을 못 맞출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이오?"
그의 말에 점쟁이는 비로소 기뻐하는 기색을 뚜렷이 보이며 구양봉을 재촉했다.
"이제야 제대로 사람을 만난 것 같습니다. 선생의 글재간을 믿겠습니다. 제발 이 주련을 운치 있게 맞추어 주십시오.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이 주련을 운치 있게 맞추는 사람을 기다리느라고 소인이 이렇게 날이면 날마다 여기에 나와 앉아 바람에 낯가죽이 트고 빗줄기에 온몸을 적시는 고생을 하던 참입니다. 제발 소인의 이 고초를 헤아려 아무쪼록 선생의 천하 문장을 보여 주십시오."
구양봉은 의아한 눈길로 점쟁이를 바라보았다.
'이 잘난 주련을 가지고 날마다 여기서 기다려 왔다니? 이 중원에 한다 하는 유생들이 적지 않을 텐데 이 주련 하나 맞출 사람이 없었단 말인가. 아마 모두들 이 점쟁이를 곯려 주느라고 아무렇게나 해 주다 보니 그리 된 것이겠지. 이까짓 게 무슨 일이라고.'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구양봉은 짐짓 딴청을 부렸다.
"말씀을 들어 보니 나도 그리 자신이 서는 일 같지는 않습니다만 어디 한번 맞추어 보지요. 잘 맞추지 못하더라도 웃지는 마십시오. 물론 괜찮게 된 성싶으면 웃음 한 번으로 흘려 보내도 좋겠지만."
그러자 점쟁이는 웃으며 읍을 하고 어서 맞출 것을 권했다.
구양봉은 즉시 상련으로부터 시작하여 단숨에 내리 읊었다.
하늘을 나는 봉황(天上飛鳳凰)
봉황은 봉황력으로 바람 타고 날고(鳳凰乘風鳳凰力)
땅 위를 기는 두꺼비(地上爬蛤 )
두꺼비는 합마공으로 혼자서 기어가네(蛤 獨行蛤 功).
주련이 끝나기가 무섭게 점쟁이는 기쁨에 넘치는 얼굴로 벌떡 일어나더니 앞으로 나서며 구양봉의 옷자락을 텁석 부여잡았다.
"멋지네요. 참 멋집니다. 두꺼비는 합마공으로 혼자서 기어가네. 참 멋들어지게 맞추셨습니다!"
구양봉은 이 사람이 그 잘난 주련을 갖고 왜 이다지도 기뻐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점쟁이는 갑자기 탁자 위에 놓았던 죽통을 와락 거머쥐더니 땅바닥에 냅다 던져 버렸다.
"이거 경사입니다, 경사예요. 선생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시오? 학수고대하던 선생이 과연 오셨구려. 이게 경사가 아니고 무엇이 경사겠습니까……?"
그는 너스레를 떨면서 큰소리로 웃어대더니 점치는 탁자까지 일장에 박살을 내고 또 그 왕망이 한을 찬탈하였을 때 찍은 신전 세 닢도 미련 없이 내던져 버렸다.
"기쁩니다. 정말 기쁩니다. 이런 기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두꺼비는 합마공으로 혼자서 기어가네, 과연 멋들어집니다."
점쟁이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눈물까지 비 오듯 흘려 댔다.
구양봉은 얼떨떨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었다. 설사 자기가 맞춘 주련이 제아무리 신묘하다 해도 전렇게까지 미친 듯이 날뛸 수가 있나 싶었다. 점쟁이의 하는 양을 보면, 오로지 주련을 제대로 맞추는 사람만 나타나면 점치는 일은 그 즉시 집어치울 작정을 일찍부터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주련을 한 쌍 맞춘 데 불과한데 어찌 그리 기뻐하시오?"
구양봉의 물음에 점쟁이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에 웃음을 내비치며 대답했다.
"아심하우(我心何憂)는 천지척척(天之戚戚)입니다."
자기 마음속의 근심과 걱정은 하늘만이 안다는 말이다. 그는 이어서 무엇을 깨닫기라도 한 사람처럼 구양봉에게 읍하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이렇듯 실례해서 죄송합니다. 선생과 더불어 어디 가서 술 한잔 했으면 하는데 어떠신지요?"
"공이 없이는 녹을 받지 말라 했는데, 초면에 그런 폐를 끼칠 수가 있겠소?"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일견이 여구하다는 말도 있는데 폐라니요? 다 그렇게 해서 가까워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점쟁이가 점치는 도구들을 모두 내던져 버리고 간청하다시피 하는 데다가 어느새 구경꾼들이 우르르 몰려와 둘러서는 바람에 구양봉은 점쟁이가 끄는 대로 따라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작은 성을 나와 주기 (酒旗)가 펄럭이는 한 주점 앞에 이르렀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주기를 보던 구양봉은 소스라쳐 놀랐다. 주기의 글자는 술 주(酒)자가 아니라 독(毒)자였다. 주점이 분명한데 독자를 써 놓다니, 이러고서야 어떻게 술꾼들을 불러들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보다 더 놀라운 것은 주점 안의 정경이었다. 주점에는 술에 취한 사람들 몇 명이 앉아 있었는데 모두들
벌겋게 된 눈을 게슴츠레 뜨고 구양봉과 점쟁이가 들어오는 것을 지켜 보고 있었다.
술집 주인이 점쟁이를 보고 반색을 하며 맞이했다.
"둘째 동생이 이 시간에 술 마시러 오는 걸 보니 일이 성공한 모양이네그려?"
그러자 점쟁이는 희색이 만면하여 떠들었다.
"그야 물론이지요. 성공하다마다요. 3년을 내처 기다리다가 끝내 이렇게 만났단 말이오. 보시오, 이 공자님을 보시오. 이 공자님이 내가 날이면 날마다 풍우를 무릅쓰고 앉아 학수고대하던, 3년이나 기다리던 그분이시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구양봉에게 쏠렸다.
구양봉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점쟁이의 말에 설령 과장이 섞였다 하더라도 그의 행동거지로 봐서는 학수고대하였단 말이 거짓은 아닌 성싶었다. 그렇다면 구양봉을 3년이나 기다렸다는 말이 되는데 왜 그래야만 했는지, 그 잘난 두꺼비 주련을 맞출 사람을 3년씩이나 기다릴 만한 까닭이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멋진 수염을 가진 한 장한(壯漢)이 구양봉을 쏘아보며 물었다.
"그래, 당신이 그 주련을 맞췄단 말인가?"
적의를 품은 장한의 태도에 구양봉은 더욱 놀랐다. 기껏해야 주련을 맞춰 준 일밖에 없는데 이 사람들이 왜 이러는 걸까?
구양봉이 어리둥절해서 서 있자 장한이 그에게로 바싹 다가오며 불쑥 손을 내밀었다.
"형장께서 그렇듯 재간이 좋으시다니 어디 한번 형장의 수단이 어떠한지를 겨뤄 봅시다."
그는 당장 구양봉을 잡아당기려 했다. 구양봉은 이 사내가 왜 이러는가 싶어 얼른 뒤로 물러섰으나 그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는 괴상한 동작을 하며 구양봉의 손목을 확 움켜잡았다. 구양봉은 비록 무공이 익숙치 못해도 상대방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의 술법은 극히 교묘하여 형님의 스승도 이보다 뛰어나지는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오늘 큰 화
를 당하려는 모양이었다.
'이 사람이 기가 올라 나 같은 걸 죽이려고 든다면 그것은 식은 죽 먹기일 텐데.'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어려움을 안 구양봉은 기왕에 이렇게 된 거 그가 무슨 짓을 하든지 참고 견디는 도리밖에 없다는 배짱이 생겼다. 구양봉이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없자 장한은 본때를 보여 주겠다는 듯 손에 한껏 힘을 넣었다. 장한에게 붙잡힌 손이 바스러지는 듯 아파 왔으나 구양봉은 비명 소리도 내지 않고 죽을 힘을 다해 이를 앙다물었다.
장한의 힘은 점점 더 강해졌다. 그는 구양봉이 어떤 특출한 무공을 갖고 있어서 자기를 업신여기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손아귀에 점점 힘을 넣다가 어째선지 구양봉이 전혀 내공을 쓰지 않는 것을 깨닫고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이 정말 천하에 없는 고수인지라 엄청난 정력을 갖고 있어서 나 같은 건 상대로도 여기지 않는다는 건가? 그렇다면 나는 너무 주제넘는 짓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러나 손에 계속 힘을 넣으면서 보니 상대방은 말없이 비지땀만 흘릴 뿐 특별한 무공은 없는 것 같았다. 장한은 마음이 놓여 구양봉을 골탕먹이기로 작정했다.
구양봉은 비지땀을 흘리면서도 애걸 따위는 절대 하지 않았다. 이런 자리에서 동정을 바라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그는 한 방에 장한을 쳐죽이지 못하는 자신의 무력함이 원통할 뿐이었다.
장한은 자기의 이 분근착골(分筋錯骨)의 술법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보통 사람은 반도 안 되는 힘만 써도 비명을 지르며 살려 달라고 애걸복걸하는데 구양봉은 그러지 않는 것이 화가 났다. 그는 어떻게든 구양봉이 애걸복걸 무릎을 꿇게 하겠다고 작심했다. 그런데 아무리 힘을 써도 구양봉은 여전했다. 장한은 놀라는 한편 묘한 기분이 되었다. 이 인간에게 정말 초인적인 능력이
있어서 이 분근착골의 술법을 견뎌 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렇다면 그런 초인적인 능력을 가지고 왜 묵묵히 참고 견디기만 하면서 손은 쓰지 않는단 말인가.
구양봉이 고초를 겪는 동안 점쟁이는 한쪽 탁자에 앉아 술 한 주전자를 청해 벌컥벌컥 들이키고 있었다. 한참 후 그는 구양봉의 얼굴에 땀이 비 오듯 하는 것을 보고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선생께서 무공을 지니고 계시면 마음대로 쳐 갈겨 보시오. 저 사람이 잘못되면 내가 책임지리다."
구양봉은 그의 괘씸한 태도에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원래 네 놈들의 그 두꺼비 주련은 나를 놀려 주려는 것이었구나. 여기로 나를 데리고 온 것도 작당하여 나를 욕보이자는 것이었고. 내가 너희들과 도대체 무슨 원수를 졌다고 이 짓들이냐?'
그가 속으로 분통을 터뜨리는데 장한의 손에 다시금 힘이 가해졌다. 구양봉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더 이상은 아픔을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 순간 불현듯 그가 얼음 동굴에 있을 때 형님의 스승이 읊어 주던 시가 생각났다. 속을 찢어 발기는 듯한 아픔을 덜어 보자는 생각 때문인지 그의 입에서 무심코 그 시가 흘러 나왔다.
얼음같이 찬 세상
세상 인심이 이러하도다
세상이 이런 줄 모르고서야
어떻게 세상일을 올바르게 처리하랴.
이 시는 당시 구양봉이 얼음 동굴에서 고생하면서 형님의 스승 백면라살에게 추위를 어떻게 하면 견딜 수 있겠는가고 물었을 때 그가 읊어 준 시였다.
지금 구양봉이 그 시를 읊은 것은 생각을 딴 데로 돌려서라도 어떻게든 고통을 견뎌 보자는 행동에 불과했다.
이를 지켜 보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소스라쳐 놀랐다. 장한의 분근착골 술법의 위력이 얼마나 강한지 그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술법이 구양봉에게는 먹혀 드는 것 같지 않더니 급기야 난데없이 시를 읊어 대지 않는가. 뜻하지 않은 구양봉의 태도에 장한마저 흠칫하여 손을 놓았다.
'그렇다. 대도(大道)를 품고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고통 앞에서 이렇듯 태연할 수가 있겠는가.'
사람들은 일제히 구양봉에 대한 존경심으로 숙연해졌다.
"둘째 동생, 정말 바로 모셔 왔네."
술집 주인은 점쟁이에게 이렇게 말하고는 구양봉에게 정중히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무례하게 행동한 것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 주십시오."
장한도 웃으며 구양봉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얼떨떨해진 구양봉은 얼결에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자 장한은 아예 덜컥 무릎을 꿇더니 머리로 바닥을 찧을 듯 넙죽 절까지 한 뒤 희색이 만면하여 일어서는 게 아닌가.
한동안 주점 안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들로 술렁였다. 술집 주인도 너무나 기쁜 나머지 눈물까지 흘리면서 소리쳤다.
"이젠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구나. 자, 이젠 집으로 돌아갈 수가 있다!"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던 사람들인 양 집 소리가 나오자 모두들 어린애들처럼 기뻐 날뛰었다.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어라고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자꾸만 주절대는 사람도 있었다.
"선생, 선생의 존함은 어떻게 되십니까? 대호(大號)는 무엇이며 어디 분이십니까?"
점쟁이가 물었다.
'반나절이나 실랑이질을 하고서 이제 통성명을 하자고?'
구양봉은 어이가 없었지만 사실대로 말했다.
"서역 사람이오. 이름은 봉으로 구양씨인데 형님과 더불어 강남 구경을 왔소."
물론 형님이 중원을 찾아온 진정한 까닭은 말할 수 없었다.
"우리는 북국 사람들입니다. 모두 형제나 다름없죠. 제가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점쟁이가 자기 패거리들을 하나하나 소개하기 시작했다. 구양봉에게 욕을 보이던 장한은 석초수(石楚秀), 점쟁이는 속문성(續文成), 나이 지긋한 노인은 제갈정(諸葛征), 그리고 또 장비같이 험하게 생긴 사나이가 둘, 이렇게 모두 다섯이었다. 구양봉은 그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건성으로 흘려 들었다. 다섯 명의 이름을 일시에 모두 기억할 수도 없었거니와, 오다가다 만난 사람들인데 그 이
름을 기억하여 무얼 하겠나 싶었던 것이다. 이러다 헤어지면 모두들 구름같이 흩어져 제 살길을 찾아 기약 없이 흘러가 버릴 것이다.
소개가 끝나고 점쟁이 속문성이 말했다.
"저희들은 여기서 꼬박 3년이나 기다렸지요. 우리 집 주인님께서 꼭 이 북지(北地) 변경( 京)에서 기다리라고 하셨으니까요. 기다리면 꼭 오신다고 말입니다. 과연 저희 주인님의 말씀대로 기다림이 헛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구양 선생께선 우리와 함께 가셔야겠습니다. 선생께서 응낙하시지 않더라도 저희들은 반드시 선생을 저희 주인님께 모셔 갈 것입니다."
순간 구양봉은 형님 구양적과 모용쟁을 떠올리고 초조해졌다. 설령 동행이 없는 혼자 몸이라 해도 생전 처음 보는 낮선 사람들을 따라 그 주인을 만나러 갈 이유가 없었다. 구양봉은 일언지하에 그들의 청을 거절했다.
"나는 북국에 갈 수가 없소."
속문성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공손하게 대꾸했다.
"구양 선생 뜻이 그러시다 해도 저희들은 선생을 북국으로 모셔갈 방법이 세 가지 있습니다."
"내가 가지 않겠다는데 방법은 무슨 방법이 있단 말이오?"
구양봉은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속문성은 구양봉의 말에 조금도 개의치 않고 분명하게 말했다.
"상중하 세 가지 방책이 있습지요. 구양 선생께서 선뜻 응낙하심이 상책인데, 그러면 저희들이 사람을 보내어 구양 선생의 형님에게 알린 뒤에 이곳을 떠나 북국으로 가는 것이고, 중책은 저희들이 하는 수 없이 선생을 협박해서라도 모셔 가는 것인데 그러면 가는 동안 선생님께 자유를 줄 수가 없게 되지요. 그리고 마지막 하책은, 선생께서 끝까지 우리의 요청을 거절하신다면 우리는 부득
불 선생의 형님을 죽이고 선생을 마취시켜서라도 북국엘 모셔 가는 것입니다."
구양봉은 어이가 없었다.
'이자들이 정말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을 모르는군. 우리 형님 구양적도 나처럼 아무렇게나 주물러도 될 사람인 줄 아는 모양인데 그런 줄 알았다간 큰코 다치지. 우리 형님이 서역 대사막에서 으뜸으로 꼽히는 고수인 줄도 모르고. 하긴 내 형님이 고수라는 걸 네놈들이 알 리가 없지.'.
구양봉은 이자들을 형님한테 데리고 가 혼을 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자들 중에 가장 힘을 쓴다는 놈이 장한이라면 아마도 그의 분근착골 술법이 이자들 중에선 가장 위력을 가진 것일 터였다. 그것은 형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다른 놈들이야 상대나 되겠는가. 생각이 이에 미치자 그는 선선히 말했다.
"정 그렇다면 좋소. 우필 형님한테 먼저 가 봅시다. 형님께서 허락하신다면 당신들을 따라 북국으로 가겠소."
그러자 모두들 기뻐하며 구양봉을 따라 구양적을 만나러 떠났다.
구양적과 모용쟁은 객점에서 구양봉이 돌아오지 않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국자감인지 어딘지 간다고 했는데 시간이 이렇게 흐르도록 돌아오지 않는 게 이상했다. 무슨 좋지 않은 일이라도 생긴 것인가, 이런저런 추측을 하며 걱정하고 있는데 때맞춰 구양봉이 성큼 객점 안으로 들어왔다.
"형님, 친구들 몇을 데리고 왔습니다."
'친구라니? 변경에 친구들이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는 데.'
구양적은 납득이 안 가는 얼굴로 들어서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이 사람들은 도대체 뭣 하는 사람들이지?'
불청객들을 찬찬히 훑어보던 구양적은 은근히 놀랐다. 그들은 모두 겉만 봐서는 알 수 없는 무림의 인물들이었다. 맨 앞에 선 속문성도 결코 평범한 인물이 아니거니와, 그 뒤에 있는 장한 석초수도 한의 맹장 번쾌(樊 )처럼 생겼고, 깡마른 영감도 무공의 정도를 헤아릴 길이 없었다.
그러한 사실을 알 리가 없는 구양봉은 형을 만나자 자기 일을 말 하기에만 급급했다.
"형님, 이 사람들이 날 억지로 북국에 데려가겠다지 뭐요? 뭐, 상·중·하 세 가지 방책이 있다나요?"
"상·중·하 세 가지 방책이라니요? 뭔데요?"
모용쟁이 입빠르게 물었다.
"합의하에 좋게 나를 데리고 가는 것이 상책이고, 나를 묶어 억지로 잡아가는 것이 중책이고, 하책은 형님을 죽이고 나를 마취시켜 잡아가는 것이랍니다."
구양적은 순간 섬뜩한 기분이 되었다.
"하책은 나를 죽이는 것이라고?"
"그렇습니다. 죽인다고 했습니다. 구양 선생께서 끝내 우리 소청을 거절할 경우 당신과 이 처녀는 여기서 죽습니다."
속문성이 오만하게 대답했다.
그 말에 구양적도 울컥 화가 치밀었다.
"그래 우리 세 사람이 그렇게도 만만히 죽을 사람으로 보인단 말이오?"
구양적은 눈살을 찌푸리며 손에 사장(蛇杖)을 들고 버텨 섰다.
"내가 당신을 죽일 수 없으면 우리 동생 석초수가 있고, 석초수가 죽이지 못하면 또 제갈정이 있지요. 우리는 한번 한다 하면 반드시 해내는 사람들이오."
속문성의 수작에 격노한 구양적은 사장 쥔 손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솟구치는 화를 간신히 누르며 무겁게 말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당장 손을 쓰지 않소?"
구양적은 사장 쥔 손을 천천히 들어올려 손등이 눈길과 수평이 되게 했다.
"자, 덤벼 보시오."
조용히 상대방의 공격을 기다리는 태세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일개 점쟁이에 지나지 않던 속문성은 태도를 바꿔 손바닥이 위로 가게 오른손을 펴 내밀었다. 손바닥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보란 듯 주먹을 쥐자 네 손가락 사이에서 큼직큼직한 동전 세 닢이 불쑥 튀어나왔다. 동전 복판의 네모난 구멍으로 손가락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큰 동전이었다. 그렇게 큰 동전을 병기로 쓰는 걸로 보아 속문성의 무공이 여간이 아님을 짐
작할 수 있었다.
속문성은 동전 세 닢을 한번 추스려 보이더니 "죄송합니다!" 하고 한마디 하면서 몸을 비틀었다.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양손을 이용하여 구양적의 앞가슴에 있는 육대 사혈(六大死穴)을 향해 동전 여섯 개를 내뿌리면서 중얼거렸다.
석숭(石崇)은 돈을 만들어 부자가 되었고
자야(子耶)는 쌀을 팔아 가난뱅이가 되었지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 동전만 바람 타고 날아다니네.
구양적은 사장을 휘둘러 동전을 막으면서 속문성의 무공에 은근히 탄복했다. 병법에 의하면 치[寸]가 척(尺)보다 짧다는 걸 알아야 한다지 않던가. 그런데 속문성은 구양봉이 마구 휘두르는 사장 앞에서도 때를 놓치지 않고 틈만 있으면 동전을 내뿌리곤 하였다. 구양적의 수양명대장경(手陽明大腸經)의 상양(商陽)·오리(五里)·곡지(曲池) 삼혈(三穴)을 공격하는가 하면, 또 술법을 바꾸어
구양적의 족양명위경(足陽明胃經)의 불용(不容)·유근(乳根)·대거(大巨) 삼혈을 겨냥했다. 사실 구양적도 웬만하면 속문성을 단번에 사장으로 요절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구양적의 사장이 속문성의 골통을 내리치려고 하면 동전 세 닢이 그의 삼혈을 향하여 날아오는 통에 그걸 막기에 급급했다. 구양적은 화가 났다. 속문성의 무공은 그에 비하여 변법도 많았거니와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날쌔기까지 하였다. 미인이 나풀나풀 춤을 추는 듯한 몸짓 또한 일품이었다. 반면에 구양적은 사장을 휘두르기조차 점점 벅차 왔다. 이런 식으로라면 승부는 뻔했다.
"잠깐!"
구양적은 소리 지르면서 한 옆으로 물러섰다. 속문성도 싸움을 멈추고 뒷짐을 지며 서 버렸다. 아주 여유만만한 태도였다.
구양적은 어두운 표정으로 말이 없었다. 일이 이 지경이 되자 누구보다 놀라고 얼떨떨해진 사람은 구양봉이었다. 그는 형님이 한 번만 손을 쓰면 이 오합지졸 같은 북국의 사람들이 당장에 무릎을 꿇거나 놀라 달아나 버리리라 확신했었다. 그런데 형님의 절묘한 장법(杖法)이 속문성의 여섯 개 동전을 막지 못하고 패하고 말다니,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구양적이 입을 다물고 있자 속문성이 웃으며 말했다.
"이쯤에서 동생이 북국으로 가는 것을 허락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동생의 안전은 염려 마십시오. 이 속문성이 보장하리다."
구양적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그러자 한쪽에 서 있던 모용쟁이 참지 못하고 끼여들었다.
"저이의 일을 왜 저한테 먼저 물어 보지 않습니까?"
"낭자는 누구시오? 구양봉 선생은 형님 말만 꺼냈지 다른 사람에 대해선 말이 없었소."
속문성은 의아한 눈길로 물었다.
모용쟁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말이 없었다구요? 그럴 리가 없는데……. 오, 그래요. 저와 한바탕 다투다가 화가 나서 국자감 구경을 간다고 훌쩍 가 버렸거든요. 그런데 당신네 같은 괴물들을 데리고 올 줄이야 누가 알았겠어요? 참, 저이가 저한테 어떤 사람인지 아세요? 저의……."
모용쟁은 말을 끌다가 불쑥 내뱉었다.
"저의 남편이에요."
이 말이 떨어지자 구양적과 구양봉은 동시에 놀라 쳐다보았다.
속문성네도 어리둥절해져서 모용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낭자의 뜻은 무엇입니까?"
속문성이 물었다.
모용쟁이 미소를 띤 채 그들 몇 사람을 일일이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들과 무공을 겨루어 보자는거죠. 속문성 선생은 우리 아주버님과 겨루어 보았으니 그만두시고, 저는 저 두 형제와 겨루어 보겠습니다. 만약 그래서 내가 지면 또 저 노인과 겨루어 보겠어요. 언제든 한 번은 이길 때가 있겠죠."
"이기면 어쩌구 지면 어쩌자는 거요?"
속문성의 물음에 모용쟁은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했다.
"이기면야 내 남편을 당신들에게 내줄 수가 없죠. 진다고 해도 전 끝까지 해 보겠어요."
"그래서야 됩니까? 우리들 중 어느 한사람과 겨루어 보십시오. 그래서 이기면 낭자의 뜻대로 하시고 지면 두말할 것 없이 구양봉 공자님을 우리와 함께 가시도록 하는 겁니다. 정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면 낭자 역시 우리와 함께 가시든가요."
속문성의 이 말은 구양봉네 세 사람을 무척 난처하게 만들었다.
구양적은 모용쟁이 동생 구양봉에 대한 마음을 오늘에야 제대로 내보인 것 같아 내심 여간 기쁘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동생과 모용쟁을 천리 밖인 북국으로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싸우다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동생과 모용쟁을 놈들에게 내줄 수는 없다고 그는 결심했다.
그가 모용쟁의 속마음을 알지 못한 채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는데 모용쟁은 속으로 이렇게 투덜대었다.
'저 바보같이 서 있는 구양봉이 내 남편이라구? 어림도 없는 소리. 사나이다운 기백이라고는 쥐꼬리만큼도 없는 바보를 내 남편이라고 한 것은 현재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어서야. 저 바보를 구해내려고 머리를 쓴 것뿐이라구.'
대답을 기다리던 속문성은 답답한 듯 하늘을 올려보다가 탄식조로 입을 열었다.
"이런 답답할 데가 있나. 구양 공자님, 우리 주인님께서 공자님을 학수고대한 지 벌써 3년이나 됩니다. 연로하신 주인님께서는 매일 문설주에 기대 서서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희 세 사람은 모두 가솔들을 거느리고 있지만 이렇게 3년을 타관 객지에서 지냈습니다. 자라나는 자식들이 자기 아버지를 몰라보게 되었고, 꿈속에서나마 아버지를 부르게 되었습니다. 저희들의 이
고충을 널리 헤아리시어 부디 저희와 함께 북국으로 가서 우리 주인님의 갈망을 풀어 주십시오. 이렇게 간청합니다."
속문성의 간곡한 애원이었다. 그의 달라진 태도에 구양봉은 연민과 의협심이 발동하여, 자기도 모르게 그럼 따라가겠다고 말할 뻔했다. 그러나 그는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말을 꿀꺽 삼켜 버렸다. 북국으로 가는 길의 길흉을 가늠할 수가 없는 터라 무슨 일이 생길지 조심스러웠던 것이다.
모용쟁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좋아요. 속 선생께서 내놓으신 제안에 따르기로 하죠. 하지만 누구와 무공을 겨룰지 그 상대는 내가 결정하겠어요."
그러고는 속으로 생각했다.
'열 손가락도 각각 그 길이가 다른데 무공이 모두 속문성과 같지야 않겠지, 동전 여섯 닢으로 독장(毒杖)을 막아낼 정도면 보통 무공은 아니거든. 어디 보자……. 저들 중에 저 석씨라는 사람이 제일 힘이 센 것 같은데, 자칫하다간 주먹 한 방에 등뼈가 부서지겠어……. 뒤에 서 있는 저치들도 만만치 않겠군. 태양혈이 튀어나오고 기름을 바른 듯 얼굴이 번들번들한 것만 봐도 내공과 외공을
모두 겸비한 작자들임에 틀림없어. 그렇다면……?'
모용쟁은 속문성 패거리들을 살피다가 한쪽에 서 있는 노인에게 시선을 멈추었다.
'저 노인은 눈썹이 축 늘어지고 작은 눈이 게슴츠레한 게 정기라고는 보이지 않는 꼴이 제정신인가 의심스러울 정도군. 얼굴색은 꼭 산송장 같은 게 칼 한 번만 가볍게 휘둘러도 밑둥 잘린 나무토막처럼 거꾸러지겠어.'
모용쟁은 함빡 웃음을 띄우며 말했다.
"노인과 겨루어 보겠어요."
그러자 속문성과 그 일행이 큰소리로 웃어대기 시작했다. 모용쟁은 그들이 웃거나 말거나 자신이 현명한 판단을 내렸다고 스스로 자족했다.
"아무래도 아가씨께서는 다른 사람과 겨루어 보는 것이 더 좋을 성싶구려."
속문성이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모용쟁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하필이면 너희들 중 제일 약한 고리를 짚어서 후회가 되는가 보지? 하지만 어디까지나 약속은 약속이니 사정을 봐 주리라 기대하진 말아라.'
"칼 받아라!"
모용쟁이 느닷없이 소리치며 칼을 내찔렀다. 그런데 그 노인은 너무 늙어 움직일 기운조차 없는지 칼아 가슴팍에 다가온 순간에도 꼼짝을 하지 않았다. 모용쟁은 이런 무기력한 노인을 이렇게 간단히 죽여 버릴 생각까진 없었으므로 얼른 칼끝을 옆으로 빗나가게 하려 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런데 검 끝이 노인의 의복을 찢으며 가슴에 푹 박히는가 싶었으나 그것은 착각에 불과했다. 노인은 놀랍게도 오른손 두 손가락만을 이용해서 모용쟁의 칼날을 간단히 막아낸 것이다.
"보아하니 아가씨의 마음이 그리 나쁜 것 같지는 않으니 이쯤에서 끝내도록 하지."
노인은 느릿느릿 말하더니 칼을 잡아 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칼은 그대로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모용쟁은 너무나 놀란 나머지 눈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모용쟁이 만만하게 본 이 노인이 사실은 그들 패거리 가운데 무공이 제일 강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잠자코 지켜 보던 속문성이 느긋하게 물었다.
"구양 공자님,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가씨도 함께 데리고 가시렵니까, 아니면 혼자 따라가시겠습니까?"
일이 이쯤 되자 구양적도 하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우리 동생을 당신들이 데리고 가려면 당신들이 대관절 어떤 사람들이며 우리 동생을 데리고 가서 무엇을 하려는 건지, 자세한 내용을 듣고 싶소."
"죄송하지만 저로서도 이 한 가지밖엔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저희가 둘째 공자님을 북국에 모시고 가는 데는 절대 악의가 없으니 아무 염려 마시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낭자께서도 우리와 동행하기를 원하신다면 저희들이 함께 모시고 갈 수도 있습니다만, 그럴 경우 많은 시간 공자님과 헤어져 혼자 계셔야 할 것임을 미리 알려드리는 게 좋을 것 같군요."
"혼자 있다니요? 그건 무슨 말씀이에요?"
모용쟁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거기 가시면 구양 공자님께선 무척 바쁜 나날을 보내시게 될 것입니다."
구양적은 난감한 기분이었다. 속문성 일행의 무공이 대단함은 이제 명약관화했다. 제갈정이라는 노인 한 사람도 대적하기 어렵거늘 일류 고수들인 속문성과 저 장한들을 어떻게 당해 낼 수 있겠
는가.
그가 속수무책으로 침묵만 지키는데 속문성이 갑자기 모용쟁의 손목을 덥석 잡아 쥐더니 동강난 칼을 낚아채어 번쩍 치켜 들었다. 그리고는 누가 말릴 틈도 없이 짧은 순간에 자기의 새끼손가락 하나를 내리쳤다. 끊어진 손가락에서 붉은 선혈이 뚝뚝 떨어졌다.
"내가 구양 공자를 잘못 건드린다면 이 손가락처럼 될 것입니다."
구양적과 모용쟁, 그리고 구양봉은 말문이 막혀 서로 쳐다보기만 했다. 속문성이 이처럼 독한 맹세까지 하면서 구양봉을 북국으로 끌고 가려는 목적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하면서 사정을 하는데야 무턱대고 반대만 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구양적은 비로소 긴장을 풀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시다면 동생을 보내도록 하겠소. 돌아오기까지 얼마나 걸릴지 그게 궁금하오."
"빠르면 1, 2년 후에는 돌아올 수 있을 것입니다. 저희 주인님의 마음에 들면 3년이 될 수도 있으나 마음에 들지 못할 경우엔 반년도 못 되어 돌려보낼 수도 있지요."
속문성의 말에 구양적은 동생의 손을 잡아 쥐었다.
"내게 일이 없으면 너를 따라 나도 북국에 가 보고 싶다만 사정이 여의치 않으니 안타깝기 짝이 없구나."
그는 착잡한 마음으로 모용쟁을 돌아보았다. 동생을 따라갈지 말지 모용쟁의 의사를 묻는 것이었다. 모용쟁은 구양적의 눈길을 피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니, 내가 정말로 얼뜨기 구양봉을 좋아하는 줄 아는가 보지?'
그녀는 고생길이 훤한 구양봉을 따라가서 괜히 자기까지 화를 입을 까닭은 없다고 생각했다.
'백 타산장의 장주(莊主)에게 끌려 사막에 가서 그 고생 한 것도 몸서리쳐지는데 내가 또 무슨 고생을 하자고 북국엘 가?'
모용쟁이 잠자코 딴청을 부리자 구양적은 그녀의 마음을 읽고 반감이 치밀었다. 동생 구양봉을 자기 남편이라고 서슴없이 말했을 정도면 그만큼 정이 깊다는 얘긴데 선뜻 따라 나서지 않는 태도가 마땅치 않았다. 하지만 자기도 못 가면서 모용쟁더러만 따라가라고 강요할 수도 없었다.
형과 헤어질 생각을 하니 구양봉의 마음은 전에 없이 슬퍼졌다. 구양봉이 딱 한 번 형과 헤어져 홀로 경성 임안에 가 본 적이 있지만 잠시뿐이고, 그 이후로는 형과 헤어져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북국에 가면 언제 돌아올지 기약이 없고 또 어떻게 될지 그 길흉화복을 점칠 수도 없지 않은가. 구양봉은 코끝이 시큰하여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구양적이 말했다.
"너도 알다시피 난 중원에 중요한 일이 있어 따라갈 수가 없다. 여기 일이 끝나면 그 즉시 북국으로 가겠다. 길이 아무리 멀고 험해도 꼭 찾아가마. 그동안 네가 무사하면 내가 저 사람들에게 감사를 드릴 테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엔 사부님을 모시고와서 저들을 가만두지 않겠다."
마음속 근심을 털어 버릴 수 없는 구양적은 더 많은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쯤에서 입을 다물었다. 동생을 홀로 떠나 보내기가 여간 괴롭지 않았다. 두 형제가 눈물겹게 작별 인사를 나누는 동안 속문성네 일행은 한편에 서서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다.
구양봉은 형님과 모용쟁을 뒤로하고 속문성을 따라 몇 걸음 걷다가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지 고개를 돌렸다. 눈물을 닦는 듯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용쟁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모용쟁은 형님을 좋아해. 이제 형님과 단둘이 있게 됐으니 두 사람이 더욱 가까워지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구나……. 그래야 형님이 구해 준 은공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 되지.
그들 일행은 어느 큰 읍에 이르렀다.
속문성은 준마 여섯 필을 샀다. 그들 여섯은 새벽같이 일어나 밤이 깊어서야 주막에 들면서 북으로 북으로 말을 달렸다. 말이 지치면 또 새로 준마를 사서 잠시도 쉬지 않고 길을 재촉하여 며칠 만에 천여 리 길을 달려왔다. 자기가 무엇 때문에 북국에 가는지도 모르는 채 구양봉 역시 속문성 일행을 따라 말을 재촉했다. 모두 무예가 뛰어난 속문성네 일행은 길을 가는 동안 아무리 괴상한
일을 만나도 끼여들지 않았다. 심지어는 술도 한잔 마시지 않았다. 그러나 속문성은 자기들은 술 한 방울 입에 대지 않으면서도 구양봉한테만큼은 각별한 태도로 술을 권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주량이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장한은 매번 끼니마다 술이 없는 줄 알면서도 습관적으로 술잔을 움켜쥐곤 할 정도였는데, 빈 잔이라도 들고 있어야 술 생각이 달래진다는 것이었다. 구양봉은 그들의
이러한 인내력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구양봉은 틈만 나면 속문성에게, 왜 자기를 북국에 데려가는 것이며, 주인이 자기를 그토록 기다리는 까닭이 무엇인지, 자기에게 과연 무슨 일을 시키려 하는 건지를 물어 보곤 했다. 그러나 속문성은 그냥 웃기만 할 뿐 대답이 없었다.
날씨는 점점 추워졌다. 8월 가을 날씨는 아침 저녁으로 더욱 쌀쌀해서 옷을 두텁게 입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고향이 가까워 오자 석씨 성을 가진 장한은 눈물이 글썽하여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창창한 하늘
망망한 들판
내 고향 귀틀집
내 옷을 빨아 주는
사랑하는 내 아내
치렁치렁한 검은 머리
우리 함께 사냥하여
사슴을 잡고
우리 함께 자식 낳아
가죽옷 입혀 기르네.
석초수의 구성진 노랫소리가 일행의 향수를 자아내는 듯 나머지 다섯도 일제히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아―아―
내 고향 귀틀집
사랑하는 아내여
혹진주 같은 눈동자로
남편의 환향을 기다리네
휘장을 드리우고
원앙처럼 즐겨 보세
검은 머리 흴 때까지
백년해로 잊지 마세.
그들의 노랫소리에 구양봉도 가벼운 흥분을 느꼈다. 이런 사람들이 두꺼비 주련을 맞출 줄 아는 자기 같은 사람을 찾느라고 변경에서 3년이나 고생하며 지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어쨌든 구양봉은 그들을 따라 이미 천리 밖인 북국 땅을 밟게 되었다.
그날 밤, 그들은 숲 속에서 노숙하게 되었다. 모닥불을 피워 놓고 불을 지키는 사람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서로에게 몸을 기대고 잠이 들었다. 하지만 구양봉은 잠이 오지 않았다. 모두들 그에게 공손하게 대하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달아날까봐 경계심도 늦추지 않고 있음을 구양봉은 알고 있었다.
언제부턴지 얼핏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구양봉은 잠결에 느닷없이 들려 오는 함성과 요란한 말발굽 소리에 눈을 떴다. 저만치 앞에 흙먼지를 일으키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었다. 가죽옷을 입고 창칼이나 활 같은 무기들을 지닌 그들은 하나같이 용맹스런 모습이었다. 구양봉 일행에게 가까워지기가 무섭게 그들 중 한 사람이 꽥 소리를 질렀다.
"네 이 놈들! 우리가 누군지 아느냐? 우리는 북국의 범, 표범, 이리, 늑대, 개로 알려진 다섯 맹수이다. 목숨이 아깝거든 어서 무릎을 꿇고 냉큼 물건들을 내놓아라!"
느닷없는 기습에 일제히 잠에서 깨어난 속문성 일행은 그러나 두려워하는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구양봉은 그들의 무공이 비상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저 많은 사람들이, 그것도 저마다 활을 지닌 마당에 속문성네가 무슨 재간으로 막아낼 것인지 걱정스러웠다.
그런데도 속문성과 그 일행들은 웃는 낯으로 별일 아니라는 듯 물끄러미 상대방을 바라볼 뿐이었다. 마치 도적떼를 마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고향 친구들이라도 만난 듯한 기색이었다.
"어서 물건들을 내놓지 못할까? 그래 내 칼맛을 보아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두목인 듯한 놈이 소리쳤다.
"물건을 내놓으라구? 물건이야 있지. 멀고먼 변경에서 왔는데 귀한 물건이 없을 리 있겠나."
속문성이 빙글빙글 웃으며 이렇게 말하자 다른 사람들도 서로 마주보며 너털웃음을 쳤다.
"대관절 너희들은 뭐하는 놈들이냐?"
칼을 들이대며 죽일 듯이 위협하는데도 너털웃음을 웃는 작자들을 보고 놀란 듯 두목이 물었다.
"이 사람 둘째, 이런 한심한 일이 있나. 변경에 가서 3년 있다 왔다고 이렇게도 사람을 몰라본단 말인가?"
늙은 제갈정이 개탄하였다.
"형님, 내버려두시오. 몇 마디 하다 보면 자연 우리가 누군지 알게 될 테니."
속문성의 말이 끝나자 다섯은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일어났다.
그러자 도적 두목이 갑자기 겁을 먹으며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혹시 유운장(留雲庄) 분들이 아니십니까?"
다섯은 웃기만 할 뿐 대답이 없었다. 그제야 이들이 틀림없는 유운장의 다섯 형제들임을 깨딜은 두목이 말에서 굴러 떨어지듯 내려와 넙죽 엎드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죽을 죄를 지었나이다. 나으리들을 몰라보다니, 죽을 죄를 지었나이다."
"너희들 다섯 맹수가 어떤 죽을 죄를 저질렀는지 그건 알 바 없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단잠이 들었는데 이렇게 소란을 떨었으니, 그래 무엇으로 우리 형제들의 용서를 바라겠느냐?"
속문성이 빈정대자 다섯 맹수 중의 형인 범이란 자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눈이 있어도 유운장 다섯 형제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으니 이 눈을 뭣에 쓰겠습니까?"
그는 대뜸 제 손가락으로 제 눈알을 후벼 파내더니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뒤에 서 있던 네 사람도 일제히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이 놈들, 어서 물러가지 않고 뭣들 하느냐. 우린 노독이 풀리지 않아 한잠 푹 자야겠다."
속문성이 빙글거리며 성가시다는 듯 말하자 도적출은 번개처럼 일어나 삽시간에 뿔뿔이 달아나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