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 계룡산 ⑫신원사 중악단 –
흰 도포 휘날리며 上峰에 노닐다가
용천령 밤하늘의 별 보며 내려오니
비구니 독경소리만 신령님前 울리다.
배달9203/개천5904/단기4339/서기2006/07/23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덧붙임)
운무(雲霧) 속의 여름 계룡(鷄龍)
1) 산행계획
암용추, 천왕봉, 머리봉, 숫용추!
계룡의 중심(中心)에 있으면서 쉽사리 접근할 수 없는 곳!
그만큼 천연(天然)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곳!
그러므로 그들을 대면(對面)해보지 않고
계룡을 論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 될 것이다.
지난 번 부산에서 이시관 사장님을 만나 산행 이야기를 하던 중
이 인적미답(人跡未踏)의 절경(絶景)에 대하여 말씀드리니
몇몇 산우(山友)들과 한번 가 볼 수 없느냐고 말씀하셔서
요로(要路)의 경로(經路)를 통하여 산행허가(山行許可)를 득(得)할 수 있었다.
최초의 계획은 상봉에 오른 후 숫용추를 경유하여 계룡산 남부능선에 달라붙어
향적산(香積山, 574m))을 거쳐 황산성(黃山城)까지 20여km를 계획했으나
폭서(暴暑)의 여름에 너무 무리라는 이사장님의 의견에 따라
[암용추-천왕봉-머리봉-숫용추-용천령-신원사]로 변경하였다.
향적산에서 황산성까지 못 가는 아쉬움에
2주전 가까운 산우(山友)와 더불어 우중(雨中) 등정을 하여 보았는데
계룡의 영역(領域)에 대하여 그 드넓음을 새삼 깨달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 단축한 길도 상봉(上峰)에 오른 후 완전 하산 후
해발 400여m를 다시 올라 용천령이라는 고개를 넘어가야하는
장장 10여 km의 쉽지만은 않은 길이었다.
더구나 나에게는 14명이란 적지 않은 인원을 안전하게 모셔야하는 책임이 있었다.
2) 구룡관사-암용추-상봉[09:00-10:50, 110분]
유성나들목에서 서울 손님들을 만나 09:00에 계룡대 구룡관사에 도착하니
한국통신 신장호씨가 지프차로 마중 나와 있었다.
우리가 타고 온 버스는 하산지점인 신원사로 향하게 하고
초병(哨兵)이 열어주는 철책문을 통과하여 용동저수지를 돌아가니
암용추로 올라가는 초입(初入)이다.
잘잘거리는 시냇물 소리를 들으며 완만한 오솔길을 오르니 암용추다.(09:20)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은 암용추에 잠입(潛入)한 후
다시 하류로 하류로 흘러 마침내 용동지에서 노닐다가
종국에는 바다로, 하늘로 가리라.
사람들이 접근하지 않아서 그런지 장마의 계곡수(溪谷水)가
지난 가을의 낙엽마저 쓸어버려 누군가 청소해 놓은 듯 깨끗하기만 하다.
신성하다는 암용추에서 10여분 머무른 후 계곡을 치고 오르니
간신히 형체만 유지한 오솔길 양옆으로
수풀이 무성하게 우거져 헤집으며 나아가야만 한다.
때로는 된비알에 물이 흘러 너럭바위에서 미끄러지기도 하여 서로 잡아주며 올랐다.
그렇게 30여분 오르니 마루금에 다다를 수 있었는데
거기서 내려다보는 안개 속의 드넓은 초록의 수해(樹海)는
한없는 흡입력(吸入力)으로 일행의 눈길을 빼앗고 발길을 떼이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지저귀는 새소리에 놀란 일행은 다시금 앞으로 나아간다.
상봉에 가까워 올수록 길가엔 야생화가 절정(絶頂)이다.
바위를 노랗게 수놓은 바위채송화,
여름 들국화 같은 금꿩의 다리꽃, 은꿩의 다리꽃,
황금색 현란한 미역취, 마타리꽃,
새색시의 입술 같은 연분홍 물봉선, 패랭이꽃...
그렇게 운무(雲霧)를 헤집으며 오르니
갑자기 시야(視野)가 확 터지면서 헬기장이 나타났는데
지도상에 나와 있던 형제봉(764m)으로 짐작됐다.
형제봉에서 올려다보니 구름을 두른 통신탑을 보관(寶冠)처럼 쓰고 있는
천왕봉이 한걸음에 성큼 다가왔다.
상봉에 다가가자 이미 연락을 받은 한국통신 윤인섭씨가 대문(大門)을 열어 주었다.
3) 상봉에서(10:50-11:30, +40=150분)
상봉(845.1m)을 복원(復元)했다고 하지만
철탑을 상봉 아래로 약간 끌어 내린 것에 불과한 반쪽 복원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그러나 윤인섭씨의 설명에 의하면 그것도 대단한 공사였다고 한다.
충청인의 정기(精氣)를 살리고자
인근 황산벌의 황토를 헬기로 퍼 날라 상봉을 메우고
주변의 식생(植生)을 채취하여 심구고 대단한 정성을 기울였다고 한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엔 일반인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철책과
그리고 상봉의 혈맥(血脈)을 누르고 있는 수많은 통신탑과 구조물들을 볼 때
진정한 복원(復元)은 아니라고 본다.
어쨌든 윤인섭씨의 안내에 따라 용(龍)이 승천할 때 남긴 자국으로 보이는
비룡대(飛龍臺)를 지나 가파른 계단을 오르니
상봉을 막는 또 다른 철책이 가로막는 것이었다.
그 열쇠를 풀고 다시 비탈길을 오르니 "山祭壇"이란 표석(標石)이 보인다.
상봉에 천단(天壇)이란 표석이 세워지기 전에
상봉에 있던 것을 밑으로 내려 세웠다니
진정한 상봉의 표석은 이 산제단이 아닌가 한다.
이어 가파른 암릉을 오르니 주황색 황톳빛으로 복원한
몇 평 남짓한 상봉에 "天壇"이란 표석이 있는 정상이다.
드디어 계룡의 정상에 선 것이다.
천지사위(天地四圍)로 운무가 상서롭게 피어오르는 가운데 윤인섭씨의 설명이 계속된다.
계룡산은 “장군능선-자연성능-쌀개능선-머리봉능선”을 축(軸)으로 하여
음(陰)과 양(陽)의 영역(領域)으로 구분되는데
음의 영역인 동측에 암용추와 동학사가 있고,
양의 영역인 서측에 숫용추와 신원사와 갑사가 있단다.
그래서 동학사는 비구니(比丘尼)의 도량(道場)이고
신원사와 갑사는 비구(比丘)의 도량이란다.
그 증거로 음의 영역인 동학사 부속암자인 심우정사에
한 비구가 살았는데 시름시름 앓다 죽었다고 한다.
워낙 음기가 강해서 양의 기운을 빼앗긴 탓이란다.
그러한 설명을 들으며 일행은 천단에 제사를 올리고 내려와 상봉을 한 바퀴 돌았다.
상봉에서 내려다보는 서측의 연천봉과 문필봉 방향,
자연성능이 있는 북측의 쌀개봉 방향,
그리고 올 봄에 종주(縱走)한 동측의 황적봉 능선,
앞으로 가야 할 남측의 머리봉 방향의 수많은 산봉우리들이
운무 속에 모습을 감추었다가 나타나곤 하여
한 폭의 동양화 속으로 들어와 있는 기분이다.
그러한 운무 속에 역시 야생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오솔길을 돌아 머리봉으로 향(向)하였다.
4) 상봉-정도령 바위-머리봉[11:30-12:20, +50=200분]
상봉에서 머리봉으로 가자면 닭벼슬 같다는 주능선을 타야하는데
거기까지 가기가 만만치 않다.
통신탑 주위의 철책(鐵柵)을 두 손으로 부여잡고 날카로운 바위를 딛고서
한발 한발 나아가니 윤인섭씨가 말한
음과 양의 경계선을 이루는 주능선에 달라붙을 수 있었다.
주능선은 발하나 겨우 디딜 정도의 날카로운 능선이다.
한 쪽은 상월면 쪽으로 급경사를 이루고
한 쪽은 계룡대 쪽으로 급사면을 이루고 있어 자칫 헛디뎠다간
천길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하고야 말리라.
그렇게 고실고실한 오솔길을 산님들은 잘도 내려간다. 베테랑들인 것 같다.
드디어 정도령 바위에 도착했다.
정도령의 머리가 희어지는 날, 밝은 개벽의 세상이 온다고 설명 드리니
인형의 바위 사람에 산님들은 경탄을 보낸다.
이어 문다래미, 그리고 기이한 암릉 지대를 지나니 병풍 같은 직벽(直壁)이 앞을 막는다.
두 손과 두 발로 거미처럼 암벽에 붙어서 머리봉(733m)에 오르니
사방이 산안개로 막혀 보이지 않는다.
맑은 날은 대둔산이며 덕유산까지 가물가물 보일 테지만
안개에 막혀 천상(天上)에 올라 떠 있는 느낌이다.
커튼을 젖히듯 간간히 이동하는 안개 틈새로 보이는 황산벌이
인간(人間)들이 개간한 바둑판같은 조각들을 예쁘게 드러내곤 한다.
안개가 일어나고 스러지는 산록(山麓)을 보니 불경의 한 구절(句節)이 절로 읊어진다.
生也一片浮雲起(생야일편부운기) 삶은 한 조각구름이 일어나는 것과 같고
死也一片浮雲滅(사야일편부운멸) 죽음은 한 조각구름이 스러지는 것과 같을진저.
그러할 진데 저 아래 인간세계에서 어찌하여
조그마한 이권(利權) 하나에 목숨을 걸고 핏대를 세우며 살아가야 하는가?
구름처럼 절로 일어나고 절로 스러지고 어울렁 더울렁 살아갈 수는 없을까?
그러나 저 아래로 내려가면 만날 수 밖에 없는
조직(組織)의 틀과 삷과 애증이 그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금세 생존경쟁의 틈에서 날카롭게 살아가야겠지만
신령스런 이곳에 올라온 이 순간만큼은 저 발아래 인간세계를 가소롭게 굽어보며
가슴을 열고 넓은 마음을 가져보자. 이 순간만큼은...
5) 머리봉-숫용추[12:20-13:10, +50=250분]
머리봉에서 내려가는 길에도 뿌연 안개가 자욱하다.
아쉬운 점은 자욱한 운무 때문에 날개 펼친 매의 형상을 한
머리봉(매봉)을 산님들에게 보여드릴 수 없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여기까지도 원추리, 바위채송화, 패랭이, 꿩의 비름등 야생화가 즐비하여
멀리서 오신 그들이 흡족해하는 걸보니 다행이다.
문득 안개가 걷히며 발아래 계룡대가 드러난다.
예전엔 신도내라 불렸지만
지금은 종로터, 대궐평, 신털이봉, 동문다리, 서문다리등
지도상의 지명(地名)으로만 간신히 남아 있어
일국(一國)의 수도로써 간택되었었다는 흔적(痕迹)만 겨우 남기고 있다.
그 산자락 아래 거대한 골프장이 드러누워 있다.
천연의 아름다움을 가진 계룡의 이 능선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니다.
이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이 굳이 저렇게 능선을 뭉개어 놓고
공놀이를 해야지만 체력단련이 되고 이 나라가 유지되는 것인지 의심이 든다.
푸른 잔디로 패어지고 할퀴어진 속살을 감추고 있긴 하지만
깊게 멀리서 내려다보니 깊게 패인 자국이 확연히 드러난다.
일본 사람들은 쓰레기장이나 해변을 매립하여 골프장을 만들고
자연을 절대 훼손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그런데 우리는 석재(石材)를 채취하기 위해
포천의 야산(野山)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는 것도 모자라
땅 속까지 파고 들어가 화강석을 채굴한다.
또한 천연 골재(骨材)의 고갈로 골재를 조달하기 위해
백두대간과 13정맥의 허리가 잘려지고 파헤쳐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시관 사장님을 따라 8/11-8/14까지
일본 북알프스를 가 볼 예정인데
일본 사람들은 자연을 어떻게 보존(保存)하는지 잘 살펴보아야겠다.
그런데 머리봉에서 내려오는데 일행 중 최용화씨가
“혹시 주공에 근무하지 않았느냐?, 의정부 현장에 있지 않았느냐?” 물어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낯이 익다했더니 대화를 나누어 보니
의정부현장 감독시절 시공사 소장님이셨던 분이셨다.
모래사장같이 드넓은 세상이라지만 그러나 손바닥 안처럼 좁기도 하다.
변하지 않은 그의 모습 속에 의정부 현장에서 있었던 기뻤던 일,
슬펐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더니
어느덧 완만한 능선이 이어지며 계곡에 흐르는 시냇물 소리가 점점 요란해지더니
가느다란 오솔길이 마침내 급격히 아래로 추락하여 갔다.
그리고 박씨묘가 있는 너럭바위가 나타나며
너덜겅길이 이어지더니 숫용추로 떨어지는 하얀 폭포 줄기가 나타났다.
6) 숫용추[13:10-14:10, +60=310분]
너덜겅길을 조심조심 내려오니 폭포 상류이다.
폭포 위에서 내려다보는 숫용추가 장관이다.
잘생긴 용추는 남성의 심벌을 닮아있으니 과연 여기는 양(陽)의 영역(領域)이란 말인가?
깊이를 측량할 수 없는 용추는 검푸르기만 한데
굵은 폭포 줄기에 하이얀 물보라가 일어나면서
포말(泡沫)이 흩어지면서 잠자는 용을 깨우려 한다.
그러한 용추의 벼랑을 살금살금 기어서 내려오니
맑은 소류지(小流地)가 펼쳐지며 정자가 나타난다.
군인들이 만들어 놓은 아담한 정자였다.
그 정자에서 점심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또 놀랄 일이 벌어졌다.
일행 중 정해길 부사장님은 바로 전 직장이었던 주공의 선배요,
더구나 고향이 서천이라니 겹선배이었던 것이다.
좁은 세상, 송사리처럼 서로 위로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
그러다 저 용추의 포말처럼 부서져 흩어질 한세상,
넓은 마음으로 용서하며, 사랑하며, 위로하며 살아갈게라.
증오와 갈등을 저 부서지는 포말처럼 삭혀버리고 살자스라.
일행(一行)들과 오늘의 산행이야기, 세상이야기하면서
밥을 먹고 휴식을 취하다보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여기서 오늘 산행을 종료(終了)하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결국 용추 계곡을 가로질러 신원사 까지 가기로 했다.
7) 숫용추-용천령-신원사[14:10-16:00, +110=420분]
숫용추에서 계곡을 거슬러 가니
그 곳 또한 인적미답이어서 수풀은 자랄 대로 자라고
폭우에 가끔씩 길이 끊기기도 하여 길을 분간하기 어렵기도 하였지만
대체로 완만하여 힘들지 않고 오를 수 있었다.
계곡에서 쳐다보는 머리봉 능선이 병풍처럼 굽어보는 속에
치마바위를 지나 계곡을 가로지르기도 하며
숲 그늘을 천천히 오르니 용천령(龍天嶺)에 다다랐다.
금남정맥의 주요지점이어서
흡사 어릴 적 보았던 성황당의 나뭇가지에 달려있던
색동천조각처럼 형형색색의 리본들이 달려있다.
리본을 자세히 살펴보니 여기가 용천령임이 확실한 것 같다.
그렇다면 이 길은 바로 2001년에 친구와 종주한 길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네 갈래길 중 어느 길로 가야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한길을 택하여 소봉(小蜂)을 오르는데
고단한 일행은 잘못 접어든 것 아니냐고 의구심을 표시한다.
길라잡이가 그대로 소봉을 넘어 능선길을 조금 내려가니
연천봉과 쌀개능선 아래로 멀리 신원사(新元寺) 부속암자가 보인다.
이 길도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길인지
솔잎이 수북이 쌓여있어 발바닥의 충격을 완화해 준다.
계곡의 끝에 다다르니 신원사의 산신각인 중악단(中岳壇)이다.
국가에서 신령스런 계룡산 산신께 제사를 지낸 산제단이다.
지난겨울에 왔을 때는 산신각이 닫혀있었는데 오늘은 열려있다.
안을 들여다보니 인자한 산신(山神)의 영전 앞에 여승 한 분이 독송(讀訟)을 하고 있다.
대웅전, 산신각은 우리나라 절에만 있는 전각(殿閣)들이다.
일본에도, 중국에도, 인도에도 없는 이러한 명칭들은
토착신앙과 외래종교의 융합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외국 사람들이 이해 못하는 한국인의 종교관중 하나가
부부가 종교가 달라도 부부로써 일생을 같이하고,
할아버지는 유교, 아들은 기독교, 아내는 불교를 믿어도
가정(家庭)이 유지되는 현상이라 한다.
그들은 한국의 지정학적 특성상 외세(外勢)의 수많은 침탈로
일정종교에 귀의하지 못하는
불안 심리의 반영이라고 해석한다고 하지만 동의할 수 없다.
그 어떠한 종교도 한국인만의 독특한 사상인
고유의 선도사상이란 용광로에 용해되고 마는 이러한 현상이야말로
왜 배달민족의 국시(國是)가 홍익인간(弘益人間)인가를 말해준다고 하겠다.
8) 후기(後記)
필자는 산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무리지어 산행하기보다는 혼자하거나,
아내와 같이 하거나, 벗과 같이하는 단출한 산행을 좋아한다.
이렇게 14명이라는 대부대와 함께하며, 더구나 길라잡이를 해보기는 처음인 것 같다.
그리고 워낙 느림보인지라 이시관 사장님이 안내를 부탁했을 때 망설여지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계룡의 비경(秘境)을 탐닉한
산우(山友)들의 기쁨에 젖은 얼굴들을 서로 바라보며
호젓한 길을 7시간여 돌고난 후 맥주 한잔하며 덕담(德談)을 나누는 모습을 보니
보람 있는 산행이었던 것 같다.
더욱이나 옛 지인(知人)을 만나고, 고매하신 겹선배님을 알게 되었으니
이는 계룡산 산신령님의 선물이 아니었던가 싶다.
이에 산행에 참가한 분들의 이름을 남기고자 한다.
길라잡이 라강하, 고문 정해길, 회장 이시관, 등반대장 이혜연, 장한수, 최용화,
이유진, 김희철, 성동섭, 이병우, 민정희, 최숙경, 최재영, 김선아(무순, 존칭생략)
배달 9203/개천5904/단기4339/서기2006/07/23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1. 암용추에서
2. 암용추에서 내려다 본 계곡의 아름다움
5. 상봉 근처의 바위채송화 군락
6. 패랭이꽃 / 부처손 / 꿩의다리꽃
7. 드디어 나타난 상봉은 운무에 쌓여있고
8. 쌀개능선도 운무에에 쌓여있고
9. 용이 승천한 흔적(비룡대라 명명)
10. 국가 돈으로 하였을 텐데 굳이 이름 석자를 남겨야하나?
11. 상봉의 진정한 주인
12. 상봉의 새로운 주인
13. 정상에 선 산우들
14-1. 황산벌 방향인데 안 보이고 잠자리 한마리만 춤추고
14-2. 자연 성릉 방향, 중앙이 삼불봉
14-3. 칼릉 방향
14-4. 황적봉은 운무에 보이지 않고 잠자리떼의 군무만이(헬기장은 형제봉, 뒷편 마안봉)
15. 상봉에 핀 구실사리와 물봉선
16. 머리봉(중앙) 능선
17. 정도령 바위(일명 범바위)
18. 문다래미
19. 머리봉 능선
20. 숫용추
21. 용추계곡에서 올려다 본 머리봉 능선
22. 숫용추에서 용천령을 넘어 신원사로 하산 중 향적산 능선을 바라보며
23. 연천봉과 신원사 부속암자
24. 신원사로 하산중(연천봉-쌀개능선)
25. 명성황후가 설치한 중악단
26. 신원사 대웅전
27. 1930년대 신도내 모습
등반대장 이혜연 선생님 등정기(2006/7/23)
2006년 7월 23일
지리지리한 장마는 언제 끝날까? 오늘도 걱정을 한가득 마음에 담고 길을 나섰다.
새벽 잠을 반납하고 대전으로 달려가는 동안 바라본 하늘은 번한 것이
우리를 배반할 것 같지는 않았다. 일단 믿어보자.
오전 8시경
유성 톨게이트에서 나상무님과 대혜 직원 한 명을 더 태우고 차는 모르는 길을 달린다.
오늘은 일반인 출입이 금지된 코스를 나상무님께서 특별히 안내해 주신다고 하셔서
잔뜩 기대를 걸고 왔다. 지난 번에 갔을 때 멀리 보이는 천황봉을 오르지 못 하고
바라만 본 것이 못내 아쉬웠는데 이번에는 군사지역이라 일반인 출입 금지인 곳을 가 볼 수 있단다.
어딘가에서 대절 버스를 내려 갤로퍼로 갈아타고 다시 길을 갔다.
군인이 지키는 곳을 통과하여 계곡 안쪽까지 간 다음 뒤에 남겨진 일행을 기다렸다.
누군가 어떻게 들어왔느냐고 물어보면 개구멍으로 들어왔노라고 대답하라는 지령(?)까지 받고.
무슨 007사건을 방불케 한다. 우리는 처음에 일반적인 코스를 산행하고
천황봉만 허가를 받아 가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오전 8시 55분
군사지역이라 지도상에 자세히 표시되지 않은 길을 따라서 산행을 시작했다.
일렬로 서니 일행이 꽤 많다. 애초에 계획했던 인원까지 하면 제법 많은 수라서 신경이 쓰였을 것 같다.
아직 그리 더울 시간이 아닌데도 습도가 높아서 그런지 땀이 줄줄 흐른다.
오늘 쏟는 땀을 한 곳에 모아 놓으면 적어도 1L는 되지 않을까?
선두에서 가시는 나상무님은 오늘 따라 준비를 철저히 하셨는지 성큼성큼 앞서가신다.
미리 연습 산행을 여러 번 하신 모양이다. 몸이 풀리지 않아서 그런지
나는 몹시 힘이 들어 나도 모르게 "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온다.
가파르지는 않지만 처음부터 살금살금 고도를 높여 간다.
사람들이 다닌 흔적은 있지만 장마통에 무성해진 풀들이 내 다리를 감고 놓아주려 하지 않는데
인적이 드물어 그런지 주변 식생이 다양하다. 그러나 아직은 그것들에 눈을 줄 겨를이 없다.
일단 어느 정도 몸이 말을 들을 때까지 묵묵히 길을 가는 수밖에는.
푸른 것들은 살의를 품은 듯
있는 힘 다해 햇빛 빨아들인다
살아서 푸르른 것이다 내 어려 살던 곳
보리밭 이랑이랑 푸른 것들의
무더기들 더운 흙속을 쑤셔대고 있었거니
이문재의 < 비닐우산 > 중에서
30분 정도 갔나 싶자 계곡 쪽으로 내려서서 암용추란다.
암용추란 것이 무슨 이름인가 했더니 하산길에 있는 숫용추와 함께
정감록에 나오는 사상을 배경으로 지어진 이름인 모양이다. 계룡산은 유독 무속 신앙이 강하다.
조선 태조도 개국 초기에 수도를 옮기려고 준비를 다 하였다고 할 만큼 풍수지리상 중요한 곳이란다.
그래서 지금 우리 나라의 중요한 군사시설도 이곳에 많이 몰려 있고. '李龍'이라고
누군가 새겨 놓은 沼가 우멍하게 들여다 보인다. 정도령 운운 하니 '鄭龍'이어야 하지 않나?
숨을 돌리고 다시 출발했다. 이제 능선길로 들어선다.
가다가 보니 무속인들이 집을 지어 놓고 치성을 드리던 터가 여기저기 있다.
그런 생각을 하니 갑자기 무슨 기운이 내게로 오는 것만 같다. 계룡산을 간다고 했을 때
어떤 친구가 氣 많이 받고 오라고 내게 말하더니 오늘은 그런 대화가 계속 이어지겠군.
힘이 들기는 하지만 이제 정신이 좀 들어 주변이 눈에 들어온다.
땅이 축축하면 제 세상인 듯 불쑥불쑥 솟아나는 버섯이 우선 반갑군.
무슨 버섯인지 이름이야 어릴 적 엉터리로 알았던 것 밖에 기억에 없고
그저 화려하면 광대버섯, 무당버섯이고 그 앞에 부수적으로 두어 자 붙이면 되지 않나?
이것도 눈에 설고, 저것도 특이하고, 이건 또 예쁘고... 내가 이렇게 감탄을 해대자
대혜의 김이사님이 한 마디 한다. "예쁜 것은 독이 있는 거래요."
아니 예쁜 것이 아니고 색이 화려하고 눈에 띄는 것이 독이 있겠지.
요즘이야 워낙 인공적으로 기른 버섯이 종류도 다양하고 많이 나오니
약효가 있다고 소문난 버섯이 아니면 사람들이 야생버섯을 먹지는 않지만
우리 어렸을 적에는 야생 버섯을 따다가 볶아 먹기도 하고 된장찌개에다 넣어 먹기도 했다.
내가 먹는 버섯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독버섯이라며 펄쩍 뛰는데
나는 아니라고 하면서 그 증거로 내가 살아있다고 말한다.
이름은 정식으로 몰라도 생활에서 체험으로 익혀진 것이 바로 산 지식 아닌가.
초등학교 시절 동네 뒤에는 산이 있었다. 물론 우리가 쉽게 올라갈 수 있는 야산이다.
비만 오면 올라오는 버섯을 따러 우리는 놀이 삼아 바구니를 들고 나가곤 했다.
봄날 나물을 캐는 것보다 그게 더 즐거웠으니 그 때부터 산꾼이 될 소질이 내게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직 어리니 사흘만 지나면 따야지 하고 남겨 놓았던 달걀 버섯을
누군가 참지 못 하고 따 갔을 때의 속상함이란...
널따랗게 자리를 잡고 퍼져 있는 싸리버섯, 보랏빛으로 쫄깃쫄깃했던 가지버섯,
거무스름한 갓에 거뭇거뭇한 점을 달고 있는 갓버섯,
매끈한 갓을 가지고 대가 도르르 말리던 밀버섯...
이렇게 버섯 마당에서 놀면서 가니 한결 갈만 하다.
또 한번의 휴식. 대략 30분에 한번꼴로 몸이 휴식을 요구한다.
초콜릿으로 허기를 채우고 물을 들이켜고 보니 벌써 물통이 반 이상 비었다. 잠깐 배낭을 벗어 놓고
보니 세상이 여유롭네. 이번에 눈에 들어오는 것은 한여름의 열기와 물기를 즐기는 식물들.
도감에서 본 바위 채송화의 작고 노란 꽃이 앙증맞다.
책과 실제가 차이나 늘 자신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맞단다.
그 옆에 삐죽삐죽 올라온 것은 고란초라고 숙경씨가 말한다. 이름만 들었을 때
무슨 특별한 사연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를 해서인지 평범하다 못 해 밋밋하기까지 하다.
그 옆으로 이끼 같은 것은 부처손이란다. 왜 그런 이름이 붙었을까?
궁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식물 공부를 하며 잊지 않으려고 입으로 한참 중얼중얼 한다.
다시 몸을 채찍질한다. 나상무님께서 쉬지 말고 천황봉까지 가자고 하신다.
오랜만에 산행을 하신다는 이고문님 친구분인 정해길 부사장님은 뚜벅뚜벅 힘들이지 않고 걸으신다.
평소에 무척이나 과묵하시다고 들었는데 가끔 사람 좋은 너털웃음을 웃으셔서
주변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 주신다. 늘 일에 지치고 시간에 쫓긴다는 민대리는 뒤에서 연신 힘들다며
쫓아오는데 사실 힘이 그 정도로 들면 입이 저절로 닫힌다는 얘기를 하며
누군가 말을 하는 것을 보니 아직 힘이 덜 든 모양이라고 해서 모두들 한바탕 웃었다.
최재형씨는 민대리 근처에 꼭 붙어서서 상관을 아주 잘 보필한다. 보기에 아주 좋군.
천황봉이 눈 앞에 다가왔다.
앞으로 10여분이면 족히 올라가리라. 발도 가벼워져서 한결 걷기가 수월하고
등에 멘 배낭도 이제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구름 사이로 살짝 불어주는 바람에 미소를 짓는다. 이 맛도 없다면 어찌 여름 산에 다니랴.
시작할 때는 늘 언제 정상에 올라가나 싶은데
시작이 반이라고 일단 발을 내디디면 나도 모르게 가게 된다.
오래 다니면 힘이 들지 않지 않느냐고? 모르는 말씀이다. 20년 가까이 산에 다녀도
산은 늘 내게 힘들고 두려운 대상이다. 다만 그때그때 어떻게 자신을 이길 수 있느냐의 문제일 뿐.
오전 10시 40분
천황봉( 해발 845m) 앞에 서니 기다렸다는 듯이 누군가 나와서 문을 열어 준다.
이런 완전히 칙사 대접을 받는군. 통신대라고 하더니 통신탑과 여러 가지 선들이 보인다.
잠깐 인사를 나눈 후 자세한 설명을 듣는데 '산제단'과 '천단'이라고 새겨진 비석이 서 있었다.
계룡산에서는 모든 것이 하늘과 연결되고 그것을 받드는 형국으로 이루어졌는가 보다.
누가 '천단'이라는 새겨진 비석 앞에 돗자리를 폈다.
순식간에 한 사람씩 가져다 놓는 제물. 제주에 과일에 시루떡에...
계획된 것이 아닌데도 구색은 다 갖췄다. 고문님의 지시에 나는 꾸뻑꾸뻑 절을 했다.
"그저 우리 일행이 무사히, 그리고 열심히 산에 다니게 해 주소서!"
한바퀴 둘러보고 수통에 물을 채운 후 잠시 쉬는데
구름이 살그머니 지나간 곳에 잠자리들이 群舞를 춘다. 어지럽다.
잠자리를 눈으로 따라가고 있는데 나상무님 다리에 말잠자리가 앉았단다.
무슨 古木인 줄 안 게지. 얼른 카메라를 들이대니 훌쩍 날아가 버렸다. 까만 줄과 노란 줄이
교대로 선명하게 나 있는 잠자리... 오늘은 좋은 날이라고 나상무님께서 한 말씀 하신다.
이제 내려가야 한다. 물론 본격적인 하산은 아니지만
오르락내리락 즐기면서 가도 되리라.
오랜만에 나온 최용화 전무님은 나상무님과 이전 직장에 근무할 때
일로 연관이 있었다면서 갑자기 꼭 붙어서서 지난 이야기에 열을 올리신다.
철책을 넘고 철망에 의지해서 가야 하는데 두 분이 나란히 철망을 잡고 서서는
갈 생각도 안 하고 정담을 나누는 모습이라니... 남자분들도 의외로 수다가 많다니까.
겨우겨우 철책을 지나고 나니 바위가 나온다.
물기가 살짝 배어 있는데가 이끼가 많아서 미끄러지기 십상이다.
조심조심 가는데 정부사장님께서 미끄러지셨다. 나도 조심해야지. 가다가 아래를 내려다 보니
오른쪽은 희뿌연 안개요, 왼쪽은 장군봉과 신선봉이 모습을 드러낸다.
나상무님은 이런 현상도 암과 수가 다른 것으로 해석을 하신다.
尋牛精寺에 기거하시던 牧樵 스님이 입적하신 일을 비유하면서.
아무튼 안개가 걷혔다 몰려왔다 하는 현상을 즐기면서 내려가는 길은
올라올 때와는 딴판으로 마음에 여유가 있다.
게다가 요즘 산에서 사람 구경을 하지 않고 갈 수 있는 길이 어디 그리 있겠는가.
비슷한 것이기는 하지만 들꽃은 여전히 시선을 잡아끌고
바위 위에 비단 방석을 깔아 놓은 것 같은 이끼는 한껏 생명력를 자랑한다.
가다가 보이는 바위를 보고 나상무님 설명하시기를 '정도령 바위'란다.
정감록에는 정씨가 정권을 잡는다고 그랬는데 우리 역사상 정씨가 한번도 그런 적이 없으니
앞으로 기대를 해 보아야 하나? 하기는 보충 설명에 의하면 바위가 하얗게 변하면
세상이 바뀐다니 김이사님 친구분 말씀하시기를 '우리 생전에는 아닌 모양이네.'
정도령 바위를 바라보며 어느 것이 눈이고, 코이며, 입인가 찾아보며 가는데
이번에는 머리봉이라고 알려주신다. 봉우리가 꼭 매의 부리 형상을 하고 있는데
계룡산 전체로 볼 때 龍의 머리 부분에 해당한단다.
구름이 인심을 써서 한번 보여주고는 다시 싸악 머리봉을 감싸안는 것을 보고는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암릉은 끝났으니 마음을 놓아도 되나?
이번에는 김이사님 친구분이 넘어졌다. 오늘은 아무래도 여러 명이 다칠 모양이군.
얼마 되지 않아 앞서가던 숙경씨도 미끄러지네.
내 키 높이로 자란 풀들은 팔뚝 여기저기 할퀴어 놓고 간간이 거미줄은 내 눈을 가로막는다.
팔로 앞을 휘휘 저으며 가다가 아이쿠! 이번에는 내가 미끄러졌다.
손바닥이 얼얼한 것이 며칠 쑤시겠구먼.
시간은 12시를 넘겼고 점심을 어디서 먹느냐를 가지고 說往說來한다.
숫용추에서 식사를 하면 나머지 된비알은 갈 수가 없으니 나는 조금 더 가서 먹자고 하고
다른 분은 시간이 너무 늦으니 숫용추에서 먹자고 하신다.
식사 후 힘들면 봉우리 하나를 생략하자는 의견도 함께.
일단 숫용추까지 가서 보자고 했다. 한참 내려가니 물소리가 들린다.
암용추가 계곡이었으니 숫용추도 계곡이리라. 물소리만 들어도 그만 살 것 같다.
적당히 긴장이 되는 길을 따라 내려가니 움푹 파인 곳에 퍼런 물이 보인다.
바로 이곳이 숫용추인가 보다. 사진으로 증명을 하고 조심조심 바윗길을 내려가 정자에 자리를 잡았다.
언제 이고문님도 넘어지셨나 앞섶을 지르잡고 계시네. 이미 시간은 1시 15분을 가리키는데
김이사님과 성부장님은 물 속으로 그만 풍덩. 으메, 부러운 것.
그런데 밥도 먹자구요. 배가 고픈데 물 속에서 애들마냥 놀기만 할 건가.
자리를 펴고 각자 가져온 음식을 펴는데
우리 이고문님 햇반을 전저렌지에 넣고 깜빡 하셨단다.
하긴 그럴 연세가 충분히 되셨지. 평소에 다른 사람들을 그리도 잘 챙기시더니
오늘은 새벽같이 출동하시느라 정신이 없으셨던 게지.
十匙一飯으로 나누어 점심을 먹는데 시간이 늦은데다 에너지 소모가 많아서 그런지
게눈 감추듯 그릇이 빈다. 물소리에, 盛盛한 녹음에, 좋은 사람에, 그리고 화기애애한 대화에...
한 가지 딱 빠진 것이 있다면 飯酒렷다. 하지만 누구도 술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아직도 갈 길이 멀고 난이도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니 긴장을 한 것 같다.
뒷정리를 하는데 오늘 처음 본 이대리는 꼼꼼하게 쓰레기를 한 군데 모아 봉지에 담는다.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는 착실한 사람이 많으니 대혜 건축은 무궁무진한 발전을 하겠구나.
보기에 흐뭇해 한번 더 쳐다보았다.
오후 2시 10분
된비알은 후일을 기약하고 그냥 계곡을 따라 신원사 방향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계곡길도 만만치 않게 길다고 미리 겁을 주시는 나상무님께서 앞장서신다.
길인지 물길인지 질척질척한 길이 이어진다. 점심을 먹은데다 오후 들어서니 기온이 올라가
또다시 땀범벅. 그래도 점심을 먹어서인지 다들 활기차다.
10분쯤 가다가 꾀를 부리고 선두를 부르면서 널찍한 바위 위에 앉았다.
손도 씻고, 세수도 하고 가자구요. 산 그늘이 불러주는 자장가에
그만 살그머니 졸음이 쏟아지는데 아직도 갈 길이 머니 이를 어쩐다?
그렇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가는데 금남정맥이라는 리본이 걸려 있다.
사실 이 길이 금남정맥 길은 아닐텐데 계룡산이 금남정맥에 속한단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대간'과 '정맥'은 신경준의 산경표에 나오는 표현인데 지형 개념이다.
반면 전에 불렀던 '산맥'이라는 말은 일제 강점기 자원을 이용하기 위해
지질 개념으로 일제가 붙인 말이란다. 아직도 일제 잔재가 곳곳에 남아 있는 것 같아
씁쓸함을 금할 수 없다. 사실 天皇峰이라는 이름도 일제 강점기에 일본 天皇을 빗대어
기존에 天王峰이었던 것을 고쳤다고 하여 바로잡아야 한다고 여론이 들끓었다.
그러나 아직 고쳐지지 않은 곳이 많으니
산을 다니는 사람들이 그것을 제대로 알고 바로잡는데 앞장서야 하지 않을까.
오후 3시
계곡길에서 벗어나 龍天嶺에 도착했다.
계룡산 어디나 속출하는 하늘과 용의 기운이 우리에게 氣를 북돋워 주어
하는 일이 모두 번창하기를 빌어본다. 갈림길이다. 나상무님도 5년 전에 한번 와 보셨다고 하니
함께 길을 찾아가며 내려가야 한다. 길을 잃을 염려만 없다면 낯선 길에서 지도를 보고
이리 갈까 저리 갈까 궁리를 하는 것도 재미있다.
오른쪽이 신원사 방향이 맞다는데 의견을 모으고 발을 옮긴다.
에구, 그런데 올라가야 하네. 오르막은 다 지났다고 생각했었는데 맥이 탁 풀린다.
그래도 가야지. 누가 대신 가 줄 수도 없는 일 아닌가.
허억허억 숨소리를 내며 올랐더니 길이 희미하다.
살살 풀섶으로 난 길을 찾아 이번에는 내려간다. 진짜 내려갈 일만 남았을 것이다.
앞서가던 숙경씨가 사람들 발에 걸리적거리는 나뭇가지를 휙 수풀 쪽으로 던진다.
내가 농담 한마디 " 숙경이는 힘이 세다." 작은 일이지만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씨가 보인다.
까매서 약간 징그러워 보이는 버섯,
하얗게 면사포를 쓴 듯이 갓을 늘어뜨리고 있는 버섯,
툭 차면 금세 뚝 부러져 버릴 듯한 붉은 버섯 ...
약간 남은 배터리가 안간힘을 쓰는데 나도 덩달아 힘을 모아 셔터를 눌러댄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민대리가 무슨 기운에 그리 사진을 찍고 가느냐고 한다.
사계절 산을 쏘다니는 사람하고 어쩌다 시간 내어 오는 사람하고 어디 같은가?
길이 많이 평탄해졌다. 거의 내려왔다는 말이리라.
저 건너편에 큰 길도 보인다. 계곡에는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도 들리고.
오후 3시 50분,
계곡을 따라간 사람들은 벌써 신원사에 갔나 보다.
뒤에 가던 사람들도 허이허이 이름만 알던 신원사 경내에 들어섰다.
여기는 中嶽壇이 유명하다고 나상무님께서 미리 일러 주셨으니 보고 가야지.
다른 건물은 다 개축하고 증축해서 볼 것이 없는데 중악단만 옛 건물 그대로란다.
중악단은 유교에 불교, 무속까지 곁들여진 것을 보여주는 건축물이란다.
다시 한번 문 앞에서부터 꼼꼼히 살피며 간다.
三日修心千載寶 사흘 닦은 마음이 천년 동안 보배이고
貪物百年塵一朝 백년 동안 물질을 탐한 것이 하루 아침에 먼지가 된다.
문 양쪽에 씌어 있는 글자를 무심히 보다가 내용을 읽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안쪽에 들어가 안목은 없지만 지붕도 한번 더 보고 문의 무늬도 살펴본다.
아는 것이 없으니 무엇이 보일 리가 없지. 그만 돌아서 나오는데
최재형씨가 담을 바라보며 이렇게 조상들은 벽돌색도 다르게 했다고 한다.
그렇구나. 역시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맞는구나.
인테리어 설계사 눈에는 보이는 것이 내 눈에는 그냥 스쳐지나가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기다리는 것 같으니 서둘러 내려가야 한다.
점심을 먹은 지 얼마 안 되었으니 근처에서 간단히 목을 축이고 가기로 했다.
동동주에 감자전, 도토리묵과 두부김치를 시켜 놓고 하루 산행을 정리한다.
쉽게 갈 수 없는 코스를 택해 여러 사람이 무사히 산행을 마쳤으니
안내해 주신 나상무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다 같이 애썼다는 의미의 건배!
* 신원사 [新元寺]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摩谷寺)의 말사이다.
백제 말기인 651년(의자왕 11) 열반종(涅槃宗)의 개조(開祖)인 보덕(普德)이 창건하였다.
고려 충렬왕 때(1298) 무기(無奇)에 의해 중건이 되었고,
조선 태조 때 무학(無學)이 삼창을 하면서 영원전(靈源殿)을 지었다.
그 뒤 1876년(고종 13) 보연(普延)이 중수하였다.
이 절은 계룡산 동서남북 4대 사찰 중 남사(南寺)에 속하는데,
경내에는 석탑 부도(石塔浮屠)가 있고 백제시대의 연화문와당(蓮花文瓦當)이 발견되었으며,
절 건물들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다시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경내에 대웅전과 계룡산의 산신제단(山神祭壇)인 중악단(中嶽壇)이 있으며,
부속 암자로는 고왕암(古王庵)·등운암(騰雲庵)·남암(南庵) 등이 있다.
* 계룡산 중악단 (鷄龍山 中嶽壇)
종목 : 보물 제1293호 (지정일:1999.03.02.)
소재지 : 충남 공주시 계룡면 양화리 산8
중악단은 국가에서 계룡산신에게 제사 지내기 위해 마련한 조선시대의 건축물이다.
계룡산은 예로부터 신령스러운 산으로 여겨 왔으며, 신라 때 5악의 하나로 제사를 지냈다.
조선시대에는 북쪽의 묘향산을 상악으로, 남쪽의 지리산을 하악으로,
중앙의 계룡산을 중악으로 하여 단을 모시고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무학대사의 꿈에 산신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태조 3년(1394)에 처음 제사를 지냈다고 전하며,
효종 2년(1651)에 제단이 폐지되었다.
그 후 고종 16년(1879)에 명성황후의 명으로 다시 짓고 중악단이라 하였다.
구릉지에 동북·서남을 중심축으로 하여 대문간채, 중문간채, 중악단을 일직선상에
대칭으로 배치하고 둘레에는 담장을 둘렀다. 건물배치와 공간구성에
단묘(壇廟)건축의 격식과 기법을 엄격히 적용하고 있다.
1.5m의 높은 돌기단 위에 앞면 3칸·옆면 3칸의 규모에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조선 후기의 특징적인 수법으로 조각·장식하여 화려하고 위엄있게 하였다.
또한 각 지붕 위에는 각각 7개씩 조각상을 배치하여
궁궐의 전각이나 문루 또는 도성의 문루에서 사용하던 기법을 쓴 점도 특이하다.
중앙단의 현판은 조선 후기 문신 이중하(1846∼1917)가 쓴 것이라고 한다.
내부 중앙 뒤쪽에 단을 마련하고, 단 위에 나무상자를 설치하여
그 안에 계룡산신의 신위와 영정을 모셔 두었다.
조선시대 상악단과 하악단은 없어져서 그 유적 내용을 알 수 없으나,
중악단이 잘 보존되어 있어 나라에서 산신에게 제사지냈던 유일한 유적으로 역사적 의미가 있다.
* 계룡시 숫용추와 암용추
신도안 암·숫용추, 무속인들이 찾는 신앙숭배지(충청매일경제/입력 : 2006년 02월 27일)
계룡시는 행정구역상 논산시 두마면 이었는데
2003.9.19 부로 논산시와 분리되어 출범하였으며, 문화관광도시이자 군사도시이다.
계룡시는 1989년 육군.공군 본부의 계룡대 이전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되었는데
1990년에는 충남도 직할 계룡출장소가 설치 되었고,
1993년에는 해군본부의 계룡대 이전으로 육.해.공 3사가 모두 이전하게 되어
명실상부한 軍의 중추적 기능을 담당하는 중심부 역활을 하게 되었다.
계룡시는 대전에서 20분 내외에 있는 거리로 시주변에는 계룡산 천황봉을 비롯하여
향적산,천마산,계룡산 계곡의 숫용추,암용추 등의 관광지와
은농재,신원재,모원재,김국광의 묘,각종 묘비.기념비 등 문화재 및 유적.유물들이
시내 곳곳에 널려 있어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렇게 많은 관광지와 문화유적지 중에 재미있는 전설이 서려있는 계룡산 계곡의
숫용추와 암용추에 대해서 알아보자. 계룡시 남선면 용동리와 부남리에 가보면
시원스럽고 경치좋은 계룡산 자락의 계곡에 바위로 이루어진 웅덩이 두개가 있는데,
용화사 앞산 계곡에 있는 못을 암용추라 하고
신도안에서 서문다리로 가는 계곡에 있는 못을 이를 숫용추라 한다.
이곳에 얽힌 재미있는 전설이 있는데 전설인 즉,
이곳에는 언젠가는 하늘로 승천하기를 기대하면서 살아가는 암용과 숫용 두마리가 있었다.
두 용은 계룡산 밑을 파서 산의 물을 금강으로 흐르게 하였고,
땅속으로는 계룡산 어느곳이든지 다니면서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옛날 계룡산에는 추잡한 이무기들이 많이 살고 있었고 이 두마리 용은
이런 추잡한 이무기들을 보지 않기 위해서 밖에 나오지 않고 땅속에서만 살고 있었다.
천둥번개가 치면서 비오는 어느날 「대체 너희들은 하늘의 부름을 거역하고
항상 땅에서만 살려고 하느냐」라는 추상같은 호령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용들은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그러자 하늘에서 또한번의 호령이 떨어졌는데
"하늘에 올라올 만반의 준비를 해놓고 있어야 한다.
너희들의 정(情)이 너무 지나치니 따로 따로 자리를 정해 다시는 만나지 말아라" 는 것이었다.
그리고 날씨가 잠잠해 졌다. 이 두마리 용은 하늘의 뜻을 거역할 수가 없어
암용과 숫용은 꼬불꼬불 내려오는 계곡의 못을 택해 땅을 파기 시작했다.
땅을 다파고 이제는 하늘에 올라갈 준비가 거의 다 되었다.
갑자기 천둥 번개와 함께 비가 퍼붓기 시작하던 어느날 용들은
「때가 되었으니 어서 올라오너라」라는 하늘의 부름을 받고 승천하였다 한다.
이곳 사람들은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고 암용이 올라간 자리를 암용추,
숫용이 올라간 자리를 숫용추로 불렀다.
또한 암용추와 숫용추는 옛날에는 땅속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어
두용이 땅속을 통해 서로 만났다고도 전해진다.
실제로 암.수용추는 직선거리로 약 1km 정도이고 계룡산 자락의 같은 능선상에 있으며
두 용추는 수심은 4-5m정도이고 이런 형태의 웅덩이는 계룡산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1958년도에는 산길공사로 숫용추에 돌이 가득 메워져 있었는데
주민들의 기도로 어느날 저녁 한번에 모두 없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신도안 주민들은 숫용추의 신비스러움을 똑똑히 목격하였으므로
이 일대를 신이 있는 곳이라고 더욱 깊이 믿게 된 것이다.
이곳은 또한 수 많은 무속인들의 집성촌인 신도안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이같은 사실은 신도안 암·숫용추가 무속인들이 찾는 신앙숭배지 였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증거이다. 암.숫용추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알아보자.
○.암용추는 계룡시 용동리 암용추골에 있는 연못으로
현재는 군사보호지역으로 민간인의 통제를 제한하고 있다.
이곳은 화강암 바위위에 직경12m, 깊이 2.5m의 맑은 못을 이루고 있다.
암용추는 숫용추보다 더 넓은 바위로 되어 있고 물이 맑으며 여자의 생식기를 연상케 한다.
딸을 원하는 부부는 암용추에서 제를 지냈고, 자연히 남자들이 많이 모였으며,
바위벽과 부딪치는 물소리는 신비스런 자연의 교향곡을 듣는 듯하다.
그리고 양쪽 바위에는 갖가지 자기의 소원을 빌었던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무속신앙인들의 숭배지 였음을 짐작케 한다. 계곡아래에는 작산저수지가 있다.
○.숫용추는 계룡시 부남리 숫용추골에 있는 연못으로
이곳 역시 군사보호지역으로 민간인 통제지역이다. 이곳에는 폭포가 있고,
길이가 10m 정도로 일대 장관을 이룬다. 숫용추는 화강암 바위속에 4m 깊이의
신비스런 웅덩이로 되어 있다. 숫용추는 그 생김새가 남자의 성기를 닮았고
위·아래에 2개의 웅덩이가 있으며 암용추보다 더 깊다. 성기숭배사상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 듯하다.
아들을 원하는 부부는 숫용추에서 계룡산신에게 산신제를 올렸고 여자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한다.
이와같이 재미있는 전설을 가지고 있는 계룡시의 암.숫용추는
민간인에게 개방되지 않은 관계로 시민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비록 민간인에게 개방되지는 않았지만
이런 아름답고 경치좋은 용추골 계곡을 시민들의 휴식처로
그리고 관광자원으로 잘 가꾸고 다듬어 우리의 문화유산으로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 鷄龍山 三神堂
시도민속자료 제19호(지정일 : 2003.10.30)
소재지 : 충남 계룡시 소유자 : 계룡대근무지원단 관리자 : 계룡대근무지원단
삼신당이 위치한 자리는 태조 이성계가 백일기도를 한 후 조선을 건국하고 왕위에 올랐다는 명당지로서
신라시대에는 왕용암, 고려시대에는 수심대, 조선시대에는 삼신당으로 불리웠다 한다.
1889년 평양에서 출생한 정원강은 수도생활을 위해 21세 때인 1910년에 계룡산을 찾았으며,
백옥성 도장에 머물면서 백옥성의 딸과 혼인을 하고,
천단, 정심원·태상전, 산신각, 칠성각, 용궁 등을 연차적으로 건립하여
삼신당 지역을 재정비하였다. 서울의 삼각산에 기도하러 다니면서 독립운동가들과 인연을 맺고
독립운동을 하면서 조국 독립을 위한 기도와 독립운동가의 은신처로 사용하였고,
정원강은 1943년 6월경에 일경에 의해 체포되어 경북 상주경찰서에서 모진 고문을 받고
서울로 압송도중 사망하였다. 그 후, 장자(長子)인 정운복이 대를 이었으나
일제의 강제징집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그의 부인(박영숙)이 주관하여 관리·운영해오다가
1984년 4월 삼신당 지역의 건물을 남겨 놓은 채, 대전시 서구 장안동으로 이전하면서
삼신당 건물 그대로 신축하였다 한다. ‘계룡대(3군본부)’내 암용추 인근에 위치한
계룡산 삼신당은 1925년에 정원강이 삼신당을 설립하고 독립운동을 하였던 장소로서
1983년의 620사업 시행 시 모든 무속·신흥종교 시설들이 철거되었으나
역사성과 주변 경관 훼손방지를 위해 존치해오고 있는 상태이다.
각종 무속·신흥종교의 요람이었던 신도안의 종교적·향토적·역사적 특성을 간직하고 있는
상징적 장소로서 역사적·민속학적인 측면에서 보존가치가 크다.
* 십승지지 [十勝之地]
천재(天災)나 싸움이 일어나도 안심하고 살 수 있다는 열 군데의 땅.
참위설(讖緯說)과 풍수지리설을 신봉하던 술가(術家)들의 말로는
풍기(豊基)의 금계촌(金鷄村),
안동(安東)의 춘양면(春陽面),
보은(報恩)의 속리산(俗離山),
운봉(雲峰)의 두류산(頭流山),
예천(醴泉)의 금당동(金堂洞),
공주(公州)의 유구(維鳩)와 마곡(麻谷),
영월(寧越)의 정동상류(正東上流),
무주(茂州)의 무풍동(茂豊洞),
부안(扶安)의 변산(邊山),
성주(星州)의 만수동(萬壽洞)을 가리킨다.
한편 《정감록(鄭鑑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보신(保身)할 땅이 열이 있으니
첫째는 풍기·예천이요,
둘째는 안동의 화곡(華谷)이요,
셋째는 개령(開寧)의 용궁(龍宮)이요,
넷째는 가야(伽倻)요,
다섯째는 단춘(丹春)이요,
여섯째는 공주의 안산심마곡(安山深麻谷)이요,
일곱째는 진목(鎭木)이요,
여덟째는 봉화(奉化)요,
아홉째는 운산봉 두류산(雲山峰頭流山)이요,
오래 살 땅이라 착한 정승과 좋은 장수가 이어 나리로다.
열째는 풍기의 대·소백산이니 길이 살 땅이라 장수와 정승이 이어 나리로다.”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 후기는 물론 3·1운동 후 이러한 괴설(怪說)을 믿고 솔가(率家)하여 이사를 가는 일이 있었다.
* 정감록[鄭鑑錄]
조선 중기 이후 민간에 성행하였던, 국가운명·생민존망(生民存亡)에 관한
예언서·신앙서.참서(讖書)의 하나인 이 책은 여러 비기(??記)를 모은 것으로,
참위설(讖緯說)·풍수지리설·도교(道敎) 사상 등이 혼합되어 이루어졌다. 조선의 선조인
이담이란 사람이 이씨의 대흥자가 될 정씨의 조상인 정감한테서 들은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라는
말도 전한다. 이런 까닭에 그 종류가 40∼50종류에 이르며
정확한 저자의 이름과 원본은 발견되지 않았다.
현재 이 제목이 붙은 책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① 규장각본 《정감록》:필사본. 1책,
② 김약술(金若述) 소장본 《정감록》:필사본. 1책,
③ 김용주(金用柱) 발행 《정감록》:활자본. 국판. 163면. 1922년 발행,
④《비난정감록진본(批難鄭鑑錄眞本)》:활자본. 4×6판. 100면,
⑤ 자유토론사 장판(自由討論社藏版) 호소이 하지메[細井肇] 편저《정감록》:4×6판 등을 들 수 있다.
내용은 조선의 조상이라는 이심(李沁)과
조선 멸망 후 일어설 정씨(鄭氏)의 조상이라는 정감(鄭鑑)이
금강산에서 마주앉아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엮어져 있는데,
조선 이후의 흥망대세(興亡大勢)를 예언하여 이씨의 한양(漢陽) 도읍 몇백 년 다음에는
정씨의 계룡산(鷄龍山) 도읍 몇백 년이 있고,
다음은 조씨(趙氏)의 가야산(伽倻山) 도읍 몇백 년,
또 그 다음은 범씨(范氏)의 완산(完山) 몇백 년과
왕씨(王氏)의 재차 송악(松嶽:개성) 도읍 등을 논하고,
그 중간에 언제 무슨 재난과 화변(禍變)이 있어 세태와 민심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차례로 예언하고 있다. 현재도 전해오고 있는 것은
이 두 사람의 문답 외에 도선(道詵)·무학(無學)·토정(土亭)·격암(格庵) 등의 예언집도 있다.
이에 관한 가장 오랜 기록은 1785년(정조 9) 홍복영(洪福榮)의 옥사사건 기록에서 나온다.
비록 허무맹랑한 도참설·풍수설에서 비롯된 예언이라 하지만,
당시 오랜 왕정(王政)에 시달리며 조정에 대해 실망을 느끼고 있던 민중들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하였다.
실제로 광해군·인조 이후의 모든 혁명운동에는 거의 빠짐없이 정감록의 예언이 거론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반면 우매한 백성들이 이 책의 예언에 따라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십승지지(十勝之地)의
피란처를 찾아 나서는 웃지 못할 희극을 수없이 연출시킨 것은 이 《정감록》의 악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