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한 한국의 역대 임금들1 - 고구려 태조왕, 차대왕, 신대왕
- 고구려 제6대 태조왕(太祖王, 47~165년); 향수 119세
고구려 태조왕의 재위 기간은 무려 93년(53년, 7세에 재위. 146년에 양위)이며, 휘는 궁(宮), 아명은 어수(於漱)이다.
유리왕의 손자이며, 왕족인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의 아들이다. 국조왕(國祖王)이라고도 한다.
그는 모본왕(慕本王)이 죽은 후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7세의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으나, 태후(太后)가 섭정을 하였다.
56년(태조왕4) 동옥저(東沃沮)를 정벌해 영토를 동으로 창해(滄海), 남으로 살수(薩水)에 이르게 하였으며, 68년에는 갈사국을 병합했다. 72년에는 부족장 달가(達賈)를 파견해 조나(藻那)를 정벌하고, 121년에는 한(漢)나라의 요수현(遼燧縣)을 공격해 요동태수(遼東太守) 채풍(蔡諷)을 죽이는 등 서북면의 영토를 넓혔다.
또한 정치체제 확립에 힘써, 중앙집권 체제를 정비했다. 146년 동생인 수성(遂成:차대왕)에게 양위하고, 별궁으로 은퇴하여 태조왕이라 했다. 165년에 119세로 떠나니, 우리 역사상 가장 장수한 왕이 되었다.
- 고구려 제7대 차대왕(次大王, 71~165년); 향수 95세
고구려 차대왕의 재위기간 20년(146~165년)이었으며, 이름은 수성(遂成)이다. 태조왕의 동생(『후한서(後漢書)』에는 아들로 전함)이다. 용감하지만 인자함이 적은 성품이었다고 한다.
121년(태조왕 69)에 후한(後漢)의 유주자사(幽州刺史) 풍환(馮煥) 등이 고구려를 침공하지 이를 격파했고, 그 공으로 군사와 국정 전반에 관한 업무를 장악하였다. 그 후 세력이 더 커져서 측근세력들과 함께 왕위찬탈까지 꾀하다가, 마침내 형인 태조왕의 양위를 받아서 임금에 즉위했다.
즉위 당시 그의 나이는 76세였다. 즉위 후 147년(차대왕 2)에는 측근세력인 관나 패자(貫那沛者) 미유(彌儒), 환나 우태(桓那于台) 어지류(菸支留), 비류나 조의(沸流那皂衣) 양신(陽神) 등을 각각 좌보(左輔)· 중외대부(中畏大夫)에 임명하여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였다. 한편 전 임금인 태조왕의 측근세력인 우보(右輔) 고복장(高福章)과 태조왕의 아들인 막근(莫勤)· 막덕(莫德) 등을 제거하고, 나아가 자신의 동생 백고(伯固)를 핍박하는 등 왕권의 강화를 도모했다.
그러나 재위 중 천재지변과 함께 사회불안이 계속되는 중에 165년 연나 조의(椽那皂衣) 명림답부(明臨答夫)에게 살해당했다(동생 신대왕 백고에게 살해당했다는 설도 있다). 그렇지 않다면 아마 차대왕 역시 그의 형(태조왕)처럼 100세 이상 살았을지 모른다.
한편 『후한서(後漢書)』에는 차대왕이 121년에 즉위했고, 122년에는 후한에 중국 포로들을 돌려보내는 등 평화공세를 펴기도 했다고 전한다.
- 고구려 제8대 신대왕(新大王, 88~179년); 향수 91세
고구려 신대왕의 재위기간은 15년(165∼179년)이었고, 이름은 백고(伯固)이며 태조왕의 친동생이다. 그는 기질이 영특하면서도 성품이 인자했다고 한다.
형인 차대왕이 신하와 백성들에게 지지를 받지 못하자, 장차 변란이 발생하여 그 화가 자신에까지 미칠까봐 두려워서 한동안 산속에 은둔해 있었다. 그러다가 차대왕이 명림답부(明臨答夫)에게 살해된 뒤에, 좌보(左輔) 어지류(箊支留) 등의 추대를 받아 즉위했다.
즉위 다음해인 166년에 대사령(大赦令)을 내리고, 차대왕의 태자 추안(鄒安)을 양국군(讓國君)에 봉하며 토지를 하사하는 등 반대세력을 무마하는 데 힘썼다.
한편으론 고구려의 최고위직이던 좌보(左輔)와 우보를 단일화해 국상(國相)의 관직을 설치하고, 명림답부를 임명하여 귀족세력들의 조정·통제를 도모하는 등 왕 중심의 중앙집권적 지배체제 정비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176년에는 왕자 남무(男武)를 태자로 책봉하여 왕위 부자상속제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는 재위 중에 후한(後漢)과의 충돌을 거듭했다. 그 과정에서 169년과 172년에 후한 현도태수(玄菟太守) 경림(耿臨)의 침공을 받았다. 하지만 수차 요동군을 공격하여 후한의 압박을 분쇄하고자 시도했고, 나아가 서방으로의 진출을 계속 추진했다.
169년에는 대가(大加) 우거(優居)와 주부(主簿) 연인(然人)을 파견해, 요동·요서 지역의 신흥세력으로 등장한 공손탁(公孫度)을 도와 부산적(富山賊)을 치게 했다고 한다(공손탁이 독립세력으로 등장한 것은 190년 이후이므로, 이는 후대의 일이 잘못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신대왕은 91세로 타계하였으며, 고국곡(故國谷)에 장례를 지냈다고 한다.
글; 무 애 (한국 선도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