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위치: 동부유럽
인구: 146,094,015명 (2023년 추계)
수도: 모스크바
면적: 17,098,200㎢ 세계면적순위
공식명칭: 러시아 연방 (Russian Federation)
기후: 대륙성기후
민족 구성: 러시아인(80%), 타타르인(4%), 우크라이나인
언어: 러시아어
정부/의회형태: 연방공화제 / 다당제&양원제
종교: 러시아정교(15%), 이슬람교(10%), 그리스도교
화폐: 러시아 루블 (RUB) 환율계산기
국화: 캐모마일
대륙: 유럽
국가번호: 7
GDP: USD 1,719,900,000,000
인구밀도: 9명/㎢
전압: 220V / 50Hz
도메인: .ru
러시아와 한국과의 관계
▶ 외교
▶ 수교 초기
▶ 3국간섭과 아관파천
▶ 러일전쟁과 포츠머스 조약
▶ 해방과 소련의 북한 진주
▶ 6·25 전쟁과 냉전시대
▶ 북한의 자주노선 표방
▶ 양국 외교관계 개선 노력
▶ 한소 외교관계 복원
▶ 소련 해체와 러시아연방 수립
▶ 한·러 군사의정서 체결
▶ 경제·통상·주요 협정
▶ 문화교류·교민 현황
요약
소련을 구성했던 공화국의 하나로 현재 독립국가연합(CIS)을 주도하는 연방공화국. 다당제로 최고 권력자는 대통령이다. 수도는 모스크바로 국민의 80%는 러시아인이다. 화폐는 러시아 루블을 사용하며 주요 경제산업은 기계제조업, 화학산업, 경공업이다. 전문 의료의 부족으로 의료의 질은 떨어지고 있다. 약 8년간의 무상의무교육을 실시한다.
1991년 12월 소련이 해체되면서 독립국가가 되었다. 소련의 체제하에서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연방(Russian Soviet Federated Socialist Republic)으로 불렸던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큰 국가로 면적이 미국이나 중국의 2배이다.
인구는 중국·인도·미국·브라질·인도네시아의 뒤를 이어 세계 6위이며, 국민의 대부분이 러시아인이지만 소수민족 집단도 약 70개에 달한다. 인구의 대부분이 러시아의 서부인 유럽의 거대한 삼각지대에 집중되어 있지만 지난 3세기에 걸쳐서, 특히 20세기 동안 인구가 동쪽의 아시아권(시베리아)으로 계속해서 이동하고 있다.
북쪽은 북극해, 동쪽은 태평양에 접해 있으며, 서쪽은 노르웨이·핀란드·폴란드(한때는 동프로이센의 일부였다가 1945년 러시아에 합병된 후 현재는 다시 분리된 주로, 예전에는 쾨니히스베르크라 불렸던 칼리닌그라드 주와 접해 있음)를 비롯해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칼리닌그라드와도 접해 있음)·벨라루스 등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남쪽은 중국·몽골·북한을 비롯해 우크라이나·조지아·아제르바이잔·카자흐스탄 등과 경계를 이룬다. 아시아 북부 전체와 동부 유럽, 북동부 유럽의 많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러시아는 북극권을 따라 동서길이가 최고 7,700km에 이르며 너비는 남북으로 2,000~2,880km에 달한다.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신력은 11월)이 발발하자마자 러시아 공화국이 수립되었으며, 1922년 12월 17일(신력은 12월 30일) 소련에 속한 연방공화국이 되었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자 소련을 구성했던 다른 공화국들과 연합하여 독립국가연합(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CIS)을 수립했다.
역사적으로 유럽권 러시아는 러시아 제국의 중심이 되었으며 13세기 몽골족 침입을 시작으로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 독일의 침입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외세의 공격을 받아왔다. 이같은 역사적인 특성과 함께 대규모의 산업경제의 발전을 가능하게 해준 광활한 영토와 풍부한 천연자원으로 러시아는 소련의 여러 공화국 가운데서도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또한 사색하기에 적합한 자연환경과 혁명전 사회가 안고 있던 복합성이 정신적 자극제가 되어 문학과 음악에 있어 안톤 체호프, 알렉산드르 푸슈킨, 레프 톨스토이, 표트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와 같은 세계적인 거장이 탄생했다.
1917년의 10월혁명과 혁명이 몰고온 광범위한 사회변혁은 소설가 막심 고리키, 미하일 숄로호프,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을 비롯해, 시인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등 유명한 예술가들의 작품 속에 잘 반영되어 있다.
자연환경
지형
러시아는 지리적 특성이나 지형에 따라 크게 2개의 주요지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대략 예니세이 강을 경계로 서부와 동부로 나뉜다.
전체국토의 약 40%를 차지하고 있는 광활한 서부는 저지평원이 전체에 걸쳐 넓게 자리잡고 있으며, 간간이 구릉지대와 고원이 가로놓여 있을 뿐이다. 동부는 산악지대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저지대도 폭넓게 펼쳐져 있다. 이와 같은 지형적 특성에 따라 러시아는 콜라-카렐리야 지역, 러시아 평원, 우랄 산맥, 서시베리아 평원, 중앙시베리아 고원, 동부와 남부 산악지대 등 6개 지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① 콜라-카렐리야 지역 : 6개 지역 가운데 면적이 가장 작은 콜라-카렐리야 지역은 핀란드 국경과 백해 사이에 있는 유럽권 러시아의 북서부에 위치하고 있다.
저지의 평평한 빙산고원인 카렐리야는 최고 고도가 578m이지만 대부분 지역의 고도는 198m 이하이며 낮은 산맥과 언덕이 호수나 늪으로 이루어진 골짜기와 번갈아가며 자리잡고 있다. 콜라 반도 역시 카렐리야와 유사한 지형적 특성이 있는데, 예외적으로 작은 히비니 산은 고도가 1,191m에 이른다. 광물자원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는 고대 암석지대는 많은 지역에 걸쳐 표층이나 표층 가까운 곳에 자리잡고 있다.
② 러시아 평원 : 세계에서 가장 큰 저지대인 동부 유럽 평원을 구성하고 있는 최대 지역으로, 서쪽 경계선부터 동쪽으로 우랄 산맥까지 1,600km에 걸쳐, 북극해에서부터 카프카스 지역과 카스피 해까지 2,410km 이상에 걸쳐 뻗어 있다.
이 광활한 지역의 약 절반에 해당하는 지역은 고도가 낮은 편이지만 예외적으로 모스크바 북서부에 있는 발다이 구릉지대에서는 가장 높은 곳이 342m에 이른다. 그러나 지형을 세분화시키면 매우 다양한 특성을 보인다. 모스크바의 북쪽으로는 빙하의 퇴적작용으로 형성된 저지대가 널리 분포하고 있고, 호수와 늪이 산재해 있으며 배수가 되지 않는 저지의 골짜기 위로 빙퇴석 산맥이 우뚝 솟아 있다. 가장 잘 알려진 빙퇴석 산맥으로는 발다이 구릉지대와 스몰렌스크-모스크바 고원(314m)이 있다.
모스크바의 남쪽으로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기복이 심한 고원과 광활한 평원지대가 교차하고 있다. 서부에서는 최고 고도 293m에 이르는 중앙 러시아 고원이 드네프르 강 상류유역의 저지대와, 오카 강과 돈 강 유역의 저지대를 분리하고 있으며, 러시아 고원 위쪽으로는 프레볼가 고원이 375m의 높이까지 완만하게 상승하다가 갑자기 급경사를 이루면서 볼가 강에 이른다. 이 고원들 사이로 작은 강들이 흐르며 주요 강들은 저지대를 가로질러 넓고 얕은 범람원을 형성한다.
볼가 강의 동쪽으로는 카스피 해 연안 저지대가 넓게 펼쳐져 있는데, 가장 낮은 지역에서는 고도가 해수면보다 27m 이상이나 낮다.
또한 러시아 평원은 남쪽으로 아조프-카스피 지협(북카프카스의 경제지구)을 통과해 카프카스 산맥의 기슭까지 펼쳐져 있는데, 엘브루스 산에서 최고 5,642m에 이르는 카프카스 산맥의 산등성이가 러시아와 자카프카지예 지역에 위치한 조지아와 아제르바이잔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카스피 저지). 북카프카스 지역에 넓게 펼쳐져 있는 쿠반 평원과 쿠마 평원 사이에는 해발 305~610m에 이르는 스타브로폴 고지대가 가로놓여 있다.
③ 우랄 산맥 : 러시아 평원의 동쪽 가장자리를 따라 대상형을 이루고 있는 해발 351~457m의 저지 산맥과 저지 고원이 우랄 산맥의 측면에 접해 있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우랄 산맥의 거대한 산등성이는 북극해의 연안에서 카자흐스탄과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약 2,090km에 걸쳐 뻗어 있으며, 다시 북극해에서 가장 큰 제도인 노바야젬랴 섬까지 960km 더 뻗어 있다. 우랄 산맥은 전통적으로 유럽권과 아시아권을 가르는 경계선이 되어왔지만, 물리적 이동을 가로막는 경계선은 아니다.
최고봉인 나로드나야 산은 해발 1,895m에 이르지만, 우랄 산맥은 대부분 해발 915~1,524m에서 평행을 이루며 솟아 있는 기복이 심한 산맥들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페름과 예카테린부르크 사이의 중앙 지역에는 이들 산맥을 관통하는 저지의 고개가 몇 개 있는데, 이 고개들은 유럽권 러시아와 시베리아를 연결하는 주요 통로이다. 광물자원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는 암석지대가 널리 분포되어 있다.
④ 서시베리아 평원 : 러시아에서 가장 넓은 서시베리아 평원은 러시아 내에서는 물론이고 세계에서도 가장 두드러지게 단일한 지형적 특성을 나타내는 지역이다.
러시아 전체면적의 1/7에 해당하는 서시베리아 평원은 우랄 산맥에서 예니세이 강까지 약 1,930km, 북극해에서 알타이 산맥 기슭까지 2,410km에 걸쳐 펼쳐져 있다. 최남단에서만 고도가 198m를 넘을 뿐이며, 평원의 절반 이상이 해발 100m에도 미치지 못한다. 수십 km에 걸쳐 평원을 가로지르고 있는 범람원과 세계 최대에 속하는 일부 늪지들이 지형적 특성을 이루고 있으며, 특히 평원의 북반부 지역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서시베리아 평원에 거주하고 있는 주민의 대부분은 비교적 고도가 높고, 기후도 좀더 건조한 북위 55°선상의 남쪽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⑤ 중앙시베리아 고원 : 예니세이 강과 레나 강 사이의 대부분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중앙시베리아 고원은 고도 305~701m로 뚜렷하게 이루어져 있다. 북쪽에서는 해발 1,701m의 푸토라나 산맥이 평원의 가장자리에 우뚝 솟아오른 후 다시 하강하여 시베리아 평원의 동부 연장지역인 북시베리아 저지(타이미르 저지)로 이어지며, 남쪽에서는 바이칼리아 산맥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더 북쪽으로는 비랑가 산맥이 북극해까지 뻗어있는 타이미르 반도에 해발 1,146m로 솟아 있으며, 동쪽으로는 저지대의 중앙야쿠트 분지로 이어진다.
⑥ 동·남부 산악지대 : 러시아의 나머지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동·남부 산악지대는 동부와 남부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연방 전체면적의 1/4을 차지하고 있는 이 지역은 연속된 많은 고지의 산맥들로 이루어져 있다. 여러 지형학적 기원 가운데 이 산맥들은 단일한 지형학상의 기원을 가진 주요한 지역으로 여겨지는데, 동부와 남부에서 러시아를 에워싸고 있는 거대한 산맥경계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
바이칼 호 서쪽에는 산맥이 비교적 적은 편이며, 해발 4,507m의 알타이 산맥은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및 몽골의 경계선을 형성한다.
알타이 산맥은 동쪽으로 뻗어 투바 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V자형의 서(西)사얀 산맥(3,121m)과 동(東)사얀 산맥(3,045m)으로 이어지며, 그 지맥들은 북쪽으로 뻗어 쿠즈네츠크 분지와 미누신스크 분지를 둘러싸고 있다. 바이칼 호의 주변지역은 거대한 단층지대로, 주요단층으로 인해 고지의 고원이나 산맥이 깊은 계곡이나 분지와 분리되었다(정단층). 이 지역은 다양한 지형적 특성을 지닌다.
바이칼 호에서 가장 깊은 지점의 수심은 1,158m이고 그 주변의 산맥들은 2,560m에 달하여 3,718m 이상의 고도차를 나타내고 있는 것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바이칼 호의 동쪽에는 부채꼴로 펼쳐진 산맥들이 레나 강과 태평양 연안 사이 대부분의 지역을 차지하고 있다. 이 지역은 전통적으로 스타노보이 산맥을 경계로 북동시베리아와 남동시베리아로 분리된다. 해발 2,412m의 스타노보이 산맥은 동쪽으로 태평양 해안까지 약 644km에 걸쳐 뻗어 있으며, 북극해로 흘러들어가는 레나 강과 태평양으로 흘러들어가는 아무르 강의 분수계가 되고 있다.
스타노보이 산맥의 동쪽 가장자리에는 지맥인 주그주르 산맥(1,906m)이 오호츠크 해안을 따라 북동쪽으로 솟아 있으며, 이 산맥은 다시 콜리마 산맥으로 이어져 추코트 반도까지 뻗어 있다. 스타노보이 산맥계에 속하는 여러 지맥들은 북서쪽으로 뻗어 있는데, 가장 잘 알려진 것으로는 레나 강 정동쪽의 베르호얀스크 산맥(2,389m)과 체르스키 산맥(3,147m)이 있다.
이 산맥계의 북쪽에는 저지의 늪지대인 콜리마 분지가 북극해에 면해 있으며, 체르스키 산맥까지 약 734km에 걸쳐 펼쳐져 있다. 오호츠크 해에서 베링 해까지 이어지는 저지의 좁은 회랑지대는 많은 지맥들이 연속되어 이루어진 이 산맥계 지역을 캄차카-쿠릴 지역과 분리시키고 있는데, 캄차카-쿠릴 지역에는 코랴크 산맥(2,561m)과 스레딘니 산맥(3,621m)이 태평양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캄차카 반도를 따라 북동-남서 방향으로 산맥계를 형성하고 있다.
캄차카 반도에는 수많은 화산이 있으며 그중 대부분이 활화산이다. 최고봉은 클류체프스카야 화산(4,750m)으로 러시아의 극동지역 전체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지진활동이 계속되고 있는 거대한 환태평양 조산대의 일부인 이 화산지대는 남동쪽으로 쿠릴 열도를 지나 일본까지 연결되어 있다.
남동시베리아는 고지의 산맥과 광활한 저지평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장 잘 알려진 산맥은 아무르 강 하류의 서쪽에 위치한 바잘스키 산맥(2,640m)과 아무르-제야 강 연안 저지와 태평양 사이에 위치한 시호테-알린 산맥(2,077m)이다.
타타르 해협을 사이에 두고 시베리아 본토와 분리되어 있는 사할린 섬은 가장 좁은 지점에서의 너비가 6.4km에 불과하다. 남북길이가 966km, 동서너비가 40~153km인 사할린 섬은 북부에는 저지평원이 자리잡고 있으며, 남부에는 동(東)사할린 산맥(1,609m)과 서(西)사할린 산맥(1,325m)이 나란히 뻗어 있다.
국민
러시아는 약 185개의 다양한 민족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민족은 대부분 극소수로서 어떤 민족은 수천명에 불과하다. 러시아인을 포함해 100만 명이 넘는 민족은 타타르족·우크라이나인·추바슈족·바슈키르인·벨라루스인·모르도바인 등 손에 꼽을 정도이다. 그중 러시아인은 전체인구의 4/5를 차지한다.
러시아는 85개의 연방주체로 구성된다. 이는 다시 22개의 공화국, 46개의 주, 9개의 지방, 1개 자치주, 4개 자치구, 3개 연방시로 구분된다. 이들 행정구역에서는 시조의 이름을 자기민족의 명칭으로 하는 민족집단보다 러시아인이 더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1990년대 초부터 민족 내부와 민족 사이에 갈등이 나타났는데 많은 민족들이 더 많은 자치권을 요구했으며, 그중 몇몇은 완전한 독립을 요구했다. 자치령을 이루고 있지 못한 소수민족공화국들이 6개 지구와 49개 주를 이루고 있다.
① 슬라브어족 : 러시아인이 대부분이지만 우크라이나인과 벨라루스인도 일부 포함하고 있는 동슬라브족은 러시아 전체인구의 85%를 차지하고 있으며, 전 국토에 걸쳐 넓게 분산되어 거주하고 있다.
슬라브족은 3~8세기에 유럽의 동부 지역에서 타민족과 구별되는 민족으로 부상했고 9세기에는 최초의 슬라브족 국가인 키예프루시를 건국했다. 몽골의 침입 이후에 권력의 중심은 모스크바로 이전되었고, 러시아 제국은 발트 해, 븍극해, 태평양까지 확장되어 많은 소수민족들을 지배하게 되었다.
② 알타이어족 : 튀르크 제어는 알타이어족 가운데 가장 넓게 쓰이는 언어로 주로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지배적이며, 알타이족·하카스족·쇼르족·투비니아족·토팔라르족 등 시베리아 남부에 거주하는 민족들도 쓰고 있다.
볼가 강 중류와 우랄 산맥 남부도 중요한 튀르크어 사용지역으로 바슈키르인·추바슈인·타타르인이 거주하고 있다. 또한 타타르인은 서시베리아 평원의 수목이 무성한 스텝지대에도 거주하며, 야쿠트족은 주로 레나 강 중류유역에, 돌간족은 북극해에 거주하고 있다.
북부 카프카스 지방에 거주하는 튀르크어 사용 종족은 쿠미크족·노가이족·카라차이족·발카르족 등이며 시베리아의 대부분 지역과 동부 해안에 거주하는 에벤크인과 에벤인은 만주퉁구스어를 사용한다. 한편 바이칼 호 동쪽 연안의 부랴트족과 카스피 해 북서부 연안의 칼미크족은 몽골어를 사용한다.
③ 우랄어족 : 유라시아의 삼림지대와 툰드라에 넓게 흩어져 있는 우랄어족은 매우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핀어군(語群)은 유럽지역에 거주하는 몰도바족·마리족·우드무르트족·코미족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이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볼가 강 상류유역 주변과 우랄 산맥에 거주하는 코미페르먀크족도 이 언어를 사용한다. 한편 카렐리야족과 핀란드인, 베프족은 북서부에 거주하고 있다. 만시인과 한티족은 오브 강 하류에 드문드문 분포되어 있다.
④ 카프카스어족 : 카프카스어족을 구성하는 주요민족들은 카프카스 산맥의 남쪽에 거주하고 있지만, 러시아 내의 북카프카스 지방에도 소규모의 민족들이 많이 퍼져 있다.
아바자족·아디게족·카바르디니아족들도 유사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이것은 나흐어군(체첸인·잉구슈인)이나 다게스탄어군(아르바인·레즈긴인·다르긴인·라크인·타바사란인과 그밖의 10여 민족)과는 많은 차이점이 있다.
⑤ 기타 어족 : 시베리아의 동쪽 끝 지역에는 생활양식은 같지만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몇 개의 구 아시아 제어가 있다.
추크치족·코랴크족·캄차달족 등은 루오라웨틀란어족이라 불리는 어족을 형성하고 있는데, 이것은 에스키모알류트어족과는 별개의 어족이다. 아무르 강 하류와 사할린에 거주하고 니프크족과 콜리마 강 유역의 유카기르인, 그리고 예니세이 강 중류에 거주하는 케트인들은 완전히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인구통계학
러시아는 수십 년 전과 비교해볼 때 인구증가율이 훨씬 낮아졌는데, 이는 주로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러시아인들의 출생률이 낮아진 것에서 기인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소수민족들, 특히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소수민족들은 여전히 높은 자연증가율을 나타내고 있다. 유럽권 러시아에서 시베리아 극동지역으로의 인구이동은 인구증가율에 있어서 지역적 편차를 가져오는 주원인이 되고 있다.
1970년 0.1%대에 머물렀던 인구증가율은 1993년을 기점으로 감소추세로 돌아섰다. 이후 2009년 다시 상승세로 돌아서 연간 0.1%의 인구상승률을 기록하고 있다. 인구는 1970년 1억 304억 명에서 서서히 증가해 1990년 1억 483억 명으로 늘어났고, 이후 소폭 감소하여 2023년 기준 1억 4,609만 4,105명을 기록했다. 인구밀도는 9명/㎢이다.
언어
언어학적으로 보면 러시아에서는 인도유럽어족(동슬라브어·이란어 포함)·알타이어족(터키어·몽골어·만주퉁구스어)·우랄어족(핀우고르어·사모예드어)·카프카스어족(아브하즈아디기아어·나호다게스탄어)에 속하는 언어들이 사용되고 있다.
러시아어는 광활한 지역에 걸쳐 사용되고 있지만 상당한 정도로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다. 인도이란어족에 속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으로는 카프카스 지방의 오세트족이 있다.
문화
이곳에서 다루고자 하는 소련의 문화는 1917년 소련의 출발에서부터 1991년 해체되기까지 소련의 영토 내에서 이루어진 독창적인 문화활동의 결실에 대한 것이다.
이 부분에는 소련의 문화정책도 포함되어 있지만, 주로 러시아의 예술가와 문화와 관련된 사회제도를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소련의 문화에 관한 한 가지 확실한 점은 더이상 이 문화를 창출할 수 있는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소련의 문화를 꽃피우던 소련이라는 국가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어떤 실체가 소련을 대신하더라도 소련 문화를 구성하던 사회적인 제도들은 지난 74년간에 걸쳐 그것이 발전되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다시 구성할 수 없으며, 또 그렇게 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질적인 의미에서 볼 때 소련의 문화가 창출될 수 있었다는 것은 소련의 건국과 관련된 다른 많은 가정과 마찬가지로 비현실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소련의 영토에 수세기에 걸쳐 존속해오다가 소련이라는 연합국가의 정치적 지배를 받게 된 독자적인 민족문화를 지닌 수백 개의 민족집단으로부터 단일적인 민족문화를 도출해낸다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을지라도 풀기 어려운 문제들을 안고 있었을 것이다. 1917년 소련의 수립 이후 문화정책 입안자들과 독창적이며 활동적인 예술가들이 직면한 문제는 아주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 일각에서는 혁명 전 제정 러시아의 정권이 일관되게 추진했던 러시아 중심의 획일적인 문화·교육 정책에서 탈피하여 러시아어, 러시아 문화뿐만 아니라 비(非)러시아인들의 민족언어와 그 문화도 함께 발전시켜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반면에 정치가들과 볼셰비키 정부의 정치이상을 지지하던 예술가들은 혁명의 이념을 표현하고 전소련 인민과 전세계에 전시할 통일된 국민문화를 이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상반되는 이 두 주류는 만족스런 해결방안을 찾지 못하다가 결국 타협의 일환으로 비러시아 민족문화권이 자신들의 전통예술을 계승해온 대규모 공연예술단을 통해 발전적인 문화예술 활동을 펴는 것은 허용하지만 독창적인 예술활동은 어느 정도까지 중앙(주로 러시아)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절충안에 이르렀다.
소련 문화의 창작가들이 직면했던 또 하나의 커다란 난제는 생활의 전영역에서 소련 공산당의 주도적인 역할을 인정하는 전체적인 국가이념과 다양한 예술적 표현방법 및 개개의 예술가들이 지닌 예술관을 어떻게 조화시키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물론 가장 심각한 문제이기는 했지만 예술가들이 획일적인 국가조직과 충돌하면서 자유를 주장할 법한 사태가 실제로는 벌어지지 않았다. 이는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처음 몇 년 동안 정부가 문화와 관련된 토론활동에서 행했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미약했기 때문이다. 소련 정부는 문화정책에 앞서 러시아 내전(1918~20)과 경제회복에 전력했다.
1920년대에는 권력의 통합에 더 큰 관심을 기울였다. 게다가 소련 정부의 초대 교육부장관인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는 모든 형태의 실험적 문화활동에 대해 매우 관대한 태도로 일관했다. 이와 같은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혁명 이후 10년 동안 문학·미술·영화·연극 등의 분야에서 독창적이며 실험적인 창작품들이 많이 쏟아져나왔고, 그 대부분이 정부의 재정적 지원을 받았다. 오히려 이 기간중에 통합된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 주체는 대개 정부가 아니라 예술가들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의 전제정치하에 놓인 1930년대에는 점차 독창적인 예술이 사라지고 국가조직으로부터의 압력이 강화되었다.
단일한 소련 문화가 부각되기 시작했고, 소련 정부는 정부의 문화정책에 반대하는 예술가들이 출판·전시·공연 활동을 벌일 수 없도록 고립시키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특히 상징적인 2가지 사건이 일어났는데, 첫째는 1930년에 일어난 천재시인 블라드미르 마야코프스키의 자살사건이다. 마야코프스키는 열렬한 혁명지지자였던 동시에 강한 개인주의적·독자적 성향을 가진 예술가였다.
많은 예술가들은 그의 죽음을 상반되던 2개의 문화주류가 공존했던 시대의 종식으로 받아들였다. 또다른 사건은 1934년에 소비에트 작가동맹이 결성되고 동맹의 제1차 작가대회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소련 문학과 문학비평의 기본방법으로 채택한 것이다. 얼마 후 소련에서 유일한 창작방법론이 된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대한 실제적인 개념정의는 동맹의 회장인 막심 고리키가 주도한 여러 작가들과, 스탈린 문화정책의 추종자였던 안드레이 주다노프, 이후 곧 숙청될 운명을 가졌던 니콜라이 부하린을 비롯한 정치권 인사들이 함께 토론을 거쳐 정리했다.
소비에트 작가동맹의 작가대회에서 채택한 개념정의에 따르면,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역사 속에서 혁명적 발전단계에 따라 현실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예술이론으로 볼 수 있다.
이 이론을 실제적인 예술활동에 적용하는 데 있어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에 대한 이해는 불명확했지만, 이것이 실험예술이나 추상예술을 허용할 수 없다는 사실은 명확하게 드러났다. 1930~40년대를 거치면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문학 분야에서 가장 먼저 자리를 잡았고, 뒤이어 시각예술, 영화, 심지어 음악에도 적용됨으로써 점차 상투적인 예술사조로 자리를 굳혀갔다.
모든 소설은 젊은 혁명당원들이 어떠한 형태로든 공산당의 지원을 받아 공장이나 농장 또는 건설현장을 부흥시키기 위해 다양한 종류의 파괴행위자, 간첩, 그밖의 장애요인들을 제거하고 승리를 쟁취한다는 내용으로 일관되었다. 시각예술의 경우 1920년대에 형상이나 색채를 통해 추상성을 띠는 실험예술이 성행했으나 스탈린 시대에 들어서는 작업현장에서 노동을 하고 있는 현실적 대상인 농민과 근로자를 주제로 한 기념적인 풍경회화가 주류를 이루었다.
음악에서는 단순하고 활발하며 애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멜로디가 주로 작곡되었으며 복잡한 하모니, 무조음악, 음렬음악 등은 금기사항이 되었다. 국가가 인정하는 예술형식에 부합되는 예술작품을 창작한 예술가들은 상과 함께 대부분의 시민들은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재화를 제공받고 큰 명성을 누릴 수 있었다. 반대로 정부가 지시하는 예술형식을 거부한 예술가들에게는 다양한 처벌방법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관대한 처벌은 출판·전시·공연활동을 금지하는 것이었지만, 수많은 위대한 소련 예술가들이 강제노동수용소에 구류·감금되었고 그중 많은 사람들은 다시는 그곳에서 되돌아오지 못했다.
더욱 끔찍스러운 일은 1937~53년 소련 정부가 수백 명에 달하는 뛰어난 예술가들과 그들을 지지하던 수백만 명의 시민들을 처형했다는 사실이다. 문화영역에 미친 이같은 정부의 강압정책의 결과 1930년대에서부터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할 때까지 소련에서 창작된 위대한 예술작품의 대부분은 소련인들의 표현을 빌리면 '책상서랍' 속에 쌓아두기 위해 만들어진 것에 불과했다. 다시 말해 이 작품들은 출판이나 전시, 공연활동을 위해 결코 제출되지 않았고, 오랜 세월에 걸쳐, 어떤 경우에는 1980년대말까지 숨겨져왔으며 서로 친한 측근들에게만 알려지거나 예술가 혼자만이 알고 있기도 했다.
스탈린의 사망 후, 특히 흐루시초프가 1956년 스탈린을 전제적인 독재자로 비난한 유명한 연설 이후에 '해빙기'(러시아어로 오테펠이라 하며 1954년 발간된 일리야 에렌부르크의 소설 제목에서 비롯되었음)라는 비교적 자유로운 시기가 시작되었다.
물론 이 시기의 자유는 1920년대 예술가들이 누렸던 자유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스탈린 치하의 오랜 암흑시대를 겪은 작가와 예술가들의 예술계로의 복귀가 점진적으로 허용되었으며 신진작가들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의사 지바고 Doktor Zhivago〉와 같이 이념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작품들이 소련 영토 내에서 발행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검열제도는 여전히 위세를 떨쳤다.
1964년 흐루시초프가 축출되기 이전에 이미 그가 집권했던 초기의 몇 년간을 상징하던 비교적 자유로운 문학의 해빙기는 다시 이전의 암흑기로 되돌아가고 있었는데 이러한 경향은 레오니트 브레주네프가 서기장으로 집권하는 동안 더 심해졌다.
이 시대를 상징하는 주요 사건으로는 시인 요시프 브로드스키와 작가이자 비평가인 안드레이 시냐프스키의 유명한 재판사건을 들 수 있다. 브로드스키는 공식적인 직업이 없이 시인으로서 생계를 이어갔다는 이유로 1964년 소련에만 유일하게 존재하는 불로죄(不勞罪)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 사건은 소련은 물론이고 서방세계의 진보적인 지식계층 사이에 회자되었으며 브로드스키는 결국 1965년말 석방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시냐프스키와 율리 다니엘이 체포되었고, 두 사람은 1966년 해외에서 책을 출판했다는 이유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 사건 역시 대대적인 시위를 야기시켰으며 이후 널리 확산된 반체제운동의 시발점이었다고 평가된다.
다시 부활된 국가의 탄압정책에 대응하여 예술가와 작가들은 여러 지하조직을 결성하여 서로의 작품을 감상하거나 읽기 시작했다. 집에서 출판한 서적을 돌려서 읽거나 수집가의 집이나 화가의 화실에서 그림을 몰래 감상했다. 그러나 브레주네프 집권시절중 가장 가혹했던 기간의 탄압정책도 스탈린 시대의 탄압정책만큼 잔인하지는 않았다.
최소한 예술가들이 처형당하는 일은 없었다. 반체제 작가들은 다른 나라로 이주할 것을 강요받았으며 끝내 국가의 정책에 순응하지 않는 반체제 예술가들은 시민권을 박탈당한 후 서방세계로 추방되었다.
소련 문화의 마지막 시기는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1985년 글라스노스트를 선언한 후에 시작되었다. 검열제도는 완화되다가 결국 철폐되었고 독립적인 출판사가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추방되거나 이주한 예술가들의 귀환이 허용되었다. 또한 많은 잡지들이 오랫동안 금지되어온 서적에 대한 출판권을 얻기 위해 서로 경쟁을 벌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소련 경제가 몰락함에 따라 잡지나 신문사들이 출판을 계속하고 예술가들이 생계를 해결하는 일이 더욱 어려워지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소련의 붕괴로 예술가들은 복잡한 상황 속에 빠지게 되었다. 즉 예술가들은 혁명 후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자유를 누리게 되었으나 엄혹했던 체제하에서도 예술가에게 지급되던 정부의 장려금이 중단되어 판매시장이라는 새로운 압력요인에 직면하게 되었으며 점차 경제적인 압박을 받게 된 것이다.
역사
고대
기본적으로는 동슬라브인 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역사이다. 하지만 동유럽의 원주민들인 동슬라브인들 즉 러시아인, 벨라루스인, 우크라이나인들은 고대부터 중앙아시아에서 온 튀르크 민족들에 정복당해 튀르크 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동유럽의 동슬라브 원주민들은 5세기부터 아바르 칸국의 동유럽 정벌에 의해 튀르크의 지배하에 있었고 그 후에는 러시아인, 벨라루스인 그리고 우크라이나인들이 아바르 칸국에 정복되었다. 동슬라브인들에 막대한 영향을 준 하자르 칸국에 정복되어 있었고 루스인들의 초기 국가인 루스 카간국이 건국된다. 러시아인, 벨라루스인, 우크라이나인과 서남 슬라브 민족들은 중앙아시아의 동유럽 정복을 받아들이고 그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5세기부터 10세기까지 이르는 중앙아시아 튀르크 민족의 동슬라브족 지배에 의한 튀르크화의 영향력으로 동슬라브족 문화는 서유럽 문화와는 조금은 이질적인 존재로 취급됐었다.[2] 서유럽에서 프랑크 왕국 등 게르만족의 왕국이 형성되었을 무렵에, 북서쪽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북게르만족 계열의 루스인들이 활동하기 시작했다. 해적·침략 행위 뿐만 아니라 발트 해·북해의 교역에 종사한 루스인은 발달된 항해술로 강을 타고 흑해로 들어가서 남쪽의 경제적으로 번영한 동로마 제국과 교역에도 나섰고, 또 이슬람 제국의 교역도 활발히 행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두 개의 교역 루트를 통해 동슬라브족 사람들은 루스인과 튀르크인의 영향을 받아 루스인들의 카간국인 루스 카간국을 형성했다. 이 루스 카간국의 루스인들은 이후 러시아인, 벨라루스인, 우크라이나인들의 원형이 된다.
중세
<nowiki /> 이 부분의 본문은 키예프 루스입니다.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의 원형인 키예프 루스는 862년에 류리크 왕조의 시조이자 루스 카간국의 마지막 카간인 류리크가 교역도시 노브고로드의 공작이 되어 키예프 루스의 왕조인 류리크 왕조를 개창한 이후 882년 노브고로드의 2대 공작인 올레그 베시가 키예프를 점령한 후 키예프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는데, 이 국가는 류리크가 속하는 부족 루스인의 이름을 따서 루스로 불리게 되고, 후에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기원이 된다. 현재 러시아 영토는 루스인들의 초기 국가인 키예프 루스의 북동부 지방이었다. 이 중세 국가의 수도는 키예프였다. 키예프 루스와 류리크 왕조는 스칸디나비아에서 온 루스인들이 세웠으며 이들은 동슬라브인들에게 흡수되었다. 키예프 루스는 9세기에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동방 정교회와 비잔틴 문화를 수용하였고 10세기와 11세기에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 중 하나가 되어 후의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3국의 국가 정체성 형성의 바탕이 되었다. 키예프 루스는 13세기 류리크 왕조의 분할 상속으로 인한 내부 분열과 몽골의 침략으로 멸망하였다. 키예프 루스가 멸망한 이후에는 스몰렌스크 대공국, 블라디미르 대공국, 랴잔 대공국, 트베리 대공국 등의 군소 루스 공국들이 키예프 루스의 명맥을 이어받게 되었으며, 동시에 타타르의 멍에에 시달리게 되었다.
근대
류리크 왕조 출신의 다닐 알렉산드로비치가 건국한 루스 공국인 모스크바 대공국(1283년~1547년)은 몽골 지배 하에서 루스인들이 칸에 납부하는 세금을 정리하는 역할을 맡았고, 나중에 점차 실력을 길러서 15세기에 킵차크 칸국의 지배를 실질적으로 벗어나 루스의 통일을 추진했다. 모스크바 대공국은 이반 3세(재위 1462년~1505년) 때 차르를 자칭하기 시작해 이반 4세부터는 모스크바 대공 대신 차르를 공식 칭호로 사용하면서 러시아 차르국으로 불리게 되며, 17세기 초에는 로마노프 왕조의 러시아 제국(1613년~1917년)으로 발전하였다. 러시아 제국은 표트르 1세(재위 1682년~1725년) 때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17세기에는 시베리아를 19세기엔 카프카스를 합병하여 유럽·아시아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갖는 대제국이 되어 유럽 열강의 일원이 되었다. 또, 해외 진출을 위해 필요한 부동항을 얻기 위해서 남하정책을 추진하여 오스만 제국 등 주변국들과 전쟁을 일으켰고, 영국과의 팽팽한 대립이 더 심해졌다. 극동에서는 연해주를 청으로부터 획득하면서 블라디보스토크를 세우고, 시베리아 철도를 건설했다. 한편 1867년에 러시아는 알래스카를 미국에게 팔았다. 극동에선 일본과의 전쟁(러일 전쟁, 1904년~1905년)이 일어났다.
현대
러일 전쟁의 패배로 국내가 흔들린 후, 제1차 세계 대전 중인 1917년 3월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2월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은 무너졌다. 1917년 11월, 블라디미르 레닌이 지도하는 이른바 10월 혁명이 성공하자 일체 권력은 노동자·농민·인민의 대표자로써 조직되는 ‘소비에트(평의회라는 뜻)’에 있음이 선언되고(사회주의),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정부가 출현했다. 그후 한동안 왕당파인 백색군과의 내전에 혁명파인 적색군이 승리함으로써 블라디미르 레닌이 지도하는 소비에트 연방이 건국되었다. 이어 러시아 제국의 통치 밑에 있었던 여러 민족은 혁명을 계기로 독립했으나, 1922년 12월에는 그 사이 독립하여 성장해 온 4대 사회주의공화국 즉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및 자카프카스 등이 연방조약에 조인함으로써 러시아 제국영토를 대부분 되찾은 소련은,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소련에 다시 편입하고, 1940년에는 몰도비아 공화국 및 발트3국을 다시 편입하여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15개의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으로 구성되었다.
1941년 6월 22일 나치 독일의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로 시작된 독소 전쟁으로 소련은 전쟁 초반 위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연합군의 지원과 붉은 군대가 승리한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계기로 총 반격에 나선 소련은 이후 중앙 유럽과 독일 동부지역, 만주와 한반도 북부까지 진격하여 제2차 세계 대전 주요 승전국의 일원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국제 연합 안전보장이사회 상임 이사국 5개 국가 중 하나로 소련이 지명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소련은 초강대국으로 성장하여 미국과 냉전을 펼쳤지만 1970년대부터 소련의 경제는 침체되었다. 특히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은 경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1985년 3월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한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대외적으로 '신사고'노선에 입각한 과감한 외교에 나서 냉전을 종결시키는 한편, 1986년 2월 제27차 당대회에서 페레스트로이카(개혁) 및 글라스노스트(개방) 노선을 선언하는 등 공산주의 체제의 정치적 부조리 척결과 경제회생을 위한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런데, 각지에서 민족주의가 분출하게 되었다. 1989년 10월 제한주권론을 표방했던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공식폐기했고, 1990년 2월 대통령제를 도입하여 고르바초프가 소련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러시아의 혁명가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당시의 소련 서기장 및 총리였던 이오시프 스탈린
1991년 7월 당 중앙위는 공산주의를 공식적으로 포기 선언하였다. 그 해 여름에 공산당의 고르바초프 축출시도가 실패하면서 1991년 12월 25일 고르바초프가 소련 대통령직에서 물러났고 소련은 붕괴되었다. 소련의 붕괴로 독립한 국가들은 독립 국가 연합을 탄생시켰다. 러시아는 소련이 가지고 있던 국제적인 권리(상임이사국 등)와 국제법 상의 관계를 승계했다. 1992년 5월, 러시아 연방 조약으로 러시아 연방이라는 국명이 확정되었다. 러시아 연방의 국명 변경은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 사임한 날인 1991년 12월 25일, 당시의 러시아 최고 회의 결의에 따른 것이다.
옐친 대통령은 1991년 11월 러시아 최고회의가 부여한 비상대권을 1년간 유지하면서 지속적인 시장경제 정책을 추구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경제가 악화됐다. 이를 계기로 옐친은 보수파의 온상인 최고회의와 인민대표회의의 심한 견제를 받기 시작했다. 이후 권력이 불안해진 옐친은 1993년 10월 의회를 해산했다. 이 과정에서 무장력을 갖추고 있던 의회보수파는 무력으로 저항했지만 옐친은 군대를 동원해 진압했다. 같은 해 12월 의회 재선거에서는 보수파의 의석이 크게 줄어 보수파를 막는 데 성공했으나, 많은 의석을 확보하는 데는 실패하여 의회는 극우파와 공산당이 득세했다. 그 뒤로 인민대표회의와 갈등을 빚고 있던 옐친은 1994년 10월 국민투표를 실시해 58.5%의 찬성으로 국민들로부터 정당성을 인정받았다. 공산당 체제가 무너진 후 러시아에서는 많은 정당들이 생겨났는데, 1993년 12월 러시아 하원 총선에서는 친옐친계 러시아의 선택당이 450석 중 96석을 차지하여 최대 정당이 됐다. 그리고 극우파 자유민주당이 70석, 공산당이 65석, 농민당 47석, 야블린스키연합 33석, 러시아 여성 25석, 러시아 민주당 21석, 시민동맹 18석, 민주개혁운동 8석, 존엄과 자선 3석, 러시아의 미래 1석, 기타 무소속이 30석을 차지했다. 1996년 선거에서 옐친은 과반이 넘는 53.8%를 득표해 승리했다. 대선 후 건강이 악화된 옐친은 심장 수술을 받고 체르노미르딘 총리에게 전권을 일시 이양하였다. 러시아 하원은 1997년 1월 말 옐친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시도했으나 부결되어 수포로 돌아갔다. 1997년 1월 교사 50만명이 체불된 임금 지급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고 러시아 전역에서 벌어진 노동자 총파업에는 200만명이 참가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보국장인 블라디미르 푸틴은 1999년 러시아 대통령 보리스 옐친에 의해 총리로 지명되었으며, 옐친의 하야 선언으로 대통령 권한 대행이 된 뒤 이듬해 대선에서 당선되어 대통령이 되었다. 푸틴은 불안해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러시아에 닥친 혼란을 수습하고 체첸 내전에서 승기를 잡아 무너져가는 러시아의 재건을 이끌었다. 러시아는 소련 해체 이후 경제는 서방 식을 따르고 있으나,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는 '강력한 러시아'를 외치며 서방에 맞서고 있어 러시아를 위협으로 보는 유럽 연합, NATO 등의 반발을 불러오고 있다.
대통령에 재선돼 임기를 끝마친 푸틴은 법령에 따라 3선이 불가능해 출마하지 않는 대신 2008년 대선에서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를 후보로 내세웠고 당선되었다. 이후 푸틴 대통령은 메드베데프 정부에서 총리직을 맡아 실권을 잡았다. 2011년 러시아는 영토분쟁으로 조지아와 전쟁을 벌인 뒤, 남오세티야-압하지야에 군대를 주둔하고 그루지아와는 외교관계를 단절했으며, 압하스 공화국과 남오세티야의 독립을 승인했다. 그리고 집단 안보 조약 기구에 가입한 가입국들은 러시아의 입장을 지지했다. 9월 17일에는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와의 우호조약을 체결했다. 이후 2008년 11월 11일 메드베데프는 대통령 임기를 4년에서 6년으로 연장하는 개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11월 14일에 러시아 하원은 대통령 임기 연장을 통과시켰다. 러시아도 경기침체에 빠져들면서 반푸틴 시위가 일어날 조짐을 보이고 있다. 2009년 3월 15일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푸틴을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러시아는 체첸 내전이 끝난 직후부터 10년 동안 체첸 공화국에 내렸던 안보통치 체제를 해제했다.
한편 2013년 겨울에 시작된 우크라이나 위기를 계기로 우크라이나의 빅토르 야누코비치 정권이 붕괴하자, 2014년 3월 18일 주민 투표를 통해 우크라이나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크림 공화국을 다시 합병하였다. 합병 조약 이후에 러시아는 크림 반도에 별도의 연방관구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국제 사회는 러시아의 크림 반도 합병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종교
러시아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민족들은 각기 민족적 특성에 따라 오랜 시대에 걸쳐 종교적인 요소를 생활 속에 수용해 왔지만, 종교적 조직의 지위나 종교에 대한 각 민족들의 의식은 정치적 상황에 따라 그 양상을 달리해왔다.
소련의 헌법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했지만, 실제적인 종교활동은 엄한 단속을 받았으며, 종교단체에 소속된 사람은 공산당에 가입할 수 없었다. 그러나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개방정책(글라스노스트)과 함께 시작된 종교의 자유는 특히 소련이 해체된 이후 현실화되었으며, 많은 국민들이 여러 종교를 꾸준히 가져왔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사실상 새로이 부각되고 있는 러시아 민족주의는 러시아 정교를 러시아 문화의 주요요소로 재확인했다.
규모가 가장 큰 종교집단은 그리스도교의 분파인 러시아 정교이다. 그 기원은 대개 10세기가 끝날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때 슬라브 왕국인 키예프루시의 통치자가 비잔티움에서 건너온 전도사에 의해 그리스도교로 개종했으며 그 이래로 1,000년의 세월 동안 러시아 민족의 주요종교로 자리를 지켜왔다.
이밖에도 17세기에 러시아 정교에서 갈라져 나와 20세기에 발달한 복고신앙주의, 침례교, 복음주의 단체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가톨릭교와 루터교는 소련의 다른 공화국에는 신자들이 많았으나 러시아에는 신자가 거의 없다.
러시아와 한국과의 관계
외교
수교 초기
1860년의 베이징 조약으로 러시아 제국이 연해주 일대를 획득, 국경을 접하면서부터 조선과 러시아는 본격적으로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주요 관심은 표트르 대제 이후의 남하정책에 따라 부동항 확보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조선은 일본과의 강화도조약(1876) 체결을 시발로 열강들과 잇달아 외교관계를 수립했지만 임오군란 이후 청의 지위가 강화되고 영국과 미국의 압력이 위험수위에 이르자 견제세력의 하나로서 러시아를 끌어들였다.
1884년 7월 외교고문 묄렌도르프의 주선으로 한·러 수호조약이 체결되고 갑신정변으로 수구파와 청의 압박이 가중되는 가운데 한·러 밀약이 인준됐다. 한·러 밀약은 오래도록 소망해온 영흥만 조차를 가능하게 했으나 밀약의 전말을 탐지해낸 영국은 1884년 4월 거문도를 점령, 이를 제재하고 나섰다. 거문도 사건을 계기로 러시아의 동아시아 군사정책은 수정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후 시베리아 철도부설계획이라는 육군 중심의 방위전략을 채택하게 됐다.
3국간섭과 아관파천
3국간섭을 주도한 러시아가 세력을 만회하고 조선정부의 노골적인 인아거일정책이 을미사변을 초래한 뒤, 국제여론은 오히려 일본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었고 1896년 고종은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했다. 러시아 공사는 고종을 상대로 끊임없는 이권획득활동을 전개했다. 1896년 4월 경원·종성 일대의 광산채굴권이 러시아로 넘어갔고, 같은 해 8월에는 블라디보스토크 상인 Y. 브린네르의 명의로 압록강·두만강 유역과 울릉도의 산림벌채권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아관파천이라는 절대절명의 호기를 맞은 러시아가 조선 정부의 불신을 사게 된 주요 원인은 외무장관 S. Y. 비테의 관심이 새로운 만주횡단철도에 집중돼 있었고, 국제적인 압력과 함께 내부의 금융·산업 위기가 더해졌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3월의 포경합동조약안이나 1899년 9월 1일과 1900년 3월 30일의 마산포 조차 기도는 정책담당자의 최종결정에 따른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의화단의 봉기가 만주지역까지 파급됐을 때 러시아의 자제정책은 의미를 잃게 됐다. 러시아는 연합국의 대열에서 베이징의 교섭에 임하는 한편 중국의 지방관리와 단독 접촉해 만주의 보호령화를 추진했고, 이에 대한 선제조치로서 한반도의 중립화안을 제의했다. 중립화안에 촉각을 곤두세운 영국 정부는 일본의 동맹제의에 소극적인 반응을 보여왔던 그간의 자세에서 탈피해 1902년 1월 이른바 영·일 동맹을 결성했다.
러일전쟁과 포츠머스 조약
이에 따라 러시아군의 만주철병이 이뤄지고 외무장관 비테는 실각했으며 대신 베조브라조프가 아시아 전략을 수행하게 됐다. 그러나 압록강 산림이권의 이용 통고와 용암포 점령으로 이어지는 베조브라조프의 ‘진정책’은 일본과의 전쟁을 촉발시켰다. 러일전쟁은 쓰라린 패배를 맛보게 했고 일본의 조선 보호를 인정한 포츠머스 조약은 장차 일본의 조선병합을 가능하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했다.
해방과 소련의 북한 진주
1905년 이후 광복이 이뤄질 때까지 러시아와 한국과의 관계는 사실상 단절상태에 놓이게 됐다. 1945년 8월 민족의 해방은 찾아왔으나 북위 38˚선 이북은 소련이, 그 이남은 미국이 점령통치를 하기 시작했다. 38˚선은 미국이 구상하고 제안한 것이었으나 잠정적으로 제안된 남북분단이 고착화되게 된 데에는 소련의 책임 또한 적지 않았다. 포츠머스 조약은 을 세력권 내에 편입시키려는 소련의 야심은 결국 북한에 소비에트 정치체제를 이식시켰고, 소비에트 연방은 위성국가의 수립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45년 8월에야 대일선전포고를 발령했다. 함경북도 웅기로부터 평안도를 거쳐 평양에 도착한 소련 제25군은 자생조직인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받아들이고 이를 소련에게 유리하도록 개편한 후 배후조종을 꾀했다.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민족의 통일된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미국·영국·중국·소련 등 4개국이 5년 동안 신탁통치권을 행사한다는 내용의 의정서가 발표됐다. 소련은 미·소 공동위원회에서도 의정서의 원칙들을 강력하게 고수했고, 이러한 비합법적인 자세가 회담 결렬의 주된 이유가 됐다.
6·25 전쟁과 냉전시대
점차 격화돼가는 미·소 간의 냉전구조는 남북의 분단을 기정사실화했다. 1948년 9월 9일 김일성을 수반으로 하는 공산정부가 탄생하고, 소련은 북한의 소비에트화라는 점령초기의 목표를 달성했다. 정권수립 이후 소련 정부가 제공한 막대한 군사·경제 원조들은 고스란히 남침준비를 위해 충당됐다. 요시프 스탈린의 남침계획 승인은 미국의 전쟁 불개입을 전제로 한 것이었으나 트루먼 행정부는 국제연합의 이름 아래 연합국의 참전을 결정하는 강경한 대응조치를 강구했다. 스탈린은 중국의 참전을 적극 권유했고, 중국군의 참전으로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져들자 휴전의 분위기가 조성됐다.
1951년 6월 소련측에 의해 휴전이 제안되고 1953년 7월 마침내 휴전협정이 조인됐다.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과 1958년까지 계속된 북한주둔은 소련과 북한의 관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됐다. 그 후 북한은 친중국·친소련 노선을 거듭하면서 일련의 줄타기 외교를 벌였다. 소련과의 갈등은 요시프 스탈린이 사망하고 1956년 2월 니키타 흐루시초프가 스탈린의 개인숭배와 1인독재체제를 비난하고 나섬으로써 시작됐다.
1960~61년 중·소분쟁의 격화시기에 북한은 중국을 선택했으나 1964년 10월 흐루시초프가 실각하고 새로운 지도층이 등장하자 군사원조협정이 체결되고 중단됐던 군사원조가 재개됐다. 소련은 1968년 1월 북한이 미국 군함 푸에블로호를 나포하고 4월 해군 정찰기 ET-121기를 격추시켰을 때 비합리적이고 무책임한 북한의 행동을 비난했으며, 이에 대해 북한은 1969년 세계공산당대회에 불참하고 1970년 3월의 조·소 공동해양연구를 보이콧했다. 1970년대의 긴장완화와 국제정세의 다원화 속에서 북한은 새로운 대외관계좌표를 설정했다.
북한의 자주노선 표방
즉 중립적인 입장에서 국익을 추구하려는 자주노선을 표방하기 시작한 것이다. 소련은 북한의 자주노선과 그 이념적 배경을 이루는 ‘주체사상’을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변종 정도로 취급했고 1976년말 이후 대북한 지원을 대폭 격감시켰다. 군사지원과 무역량의 축소가 곧 기본적인 유대관계의 변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1982년 이후로도 과학기술협조협정·철도협정·국경협정·영사협정·경제기술협정·원자력발전소건설협정 등이 체결됐다.
소련의 38˚선 이북 점령과 북한정권의 수립으로 말미암아 한국과 소련의 관계는 적대적인 성격을 지닌 채 출발했다. 1953년 10월 1일 체결된 한·미 상호방위조약은 소련의 팽창주의를 동맹조약으로 견제하려는 미국의 반공정책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상호불신관계는 제2공화국에서도 지속됐고, 1961년에 시작된 군정에서도 반소·친미 정책은 강화됐다. 소련 관영통신은 군사정부를 비난했고, 군사정부 역시 소련과의 접촉을 고려하지 않았다. 이는 제3공화국 때도 마찬가지였으며, 소련은 한·일 기본관계조약을 미국이 주도하는 동북아시아의 나토(NATO)라고 규탄했으며, 한국군의 베트남 참전을 비난했다.
양국 외교관계 개선 노력
적대감 속의 한·소 관계는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됐다. 닉슨 행정부의 출범과 함께 미국의 세계정책이 바뀌고 동서진영의 데탕트가 시작됨에 따라 한국도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에 대해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게 됐다. 1971년 8월 당시 김용식 외무장관은 소련이 한국에 대해 적대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면 외교관계를 수립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으며, 1973년 6월 23일 박정희 전 대통령은 특별외교선언문을 발표, 공산권에 대한 문호개방의 용의가 있음을 선언하고 그들 역시 호혜적인 조치를 강구해주도록 요청했다.
소련은 1973년부터 대한민국 여권 소지자들의 입국을 허용했으며, 비공식이지만 양국의 무역계약이 이뤄졌고 다양한 형태의 문화교류가 전개됐다. ‘2개의 조선’을 고정화시키려는 책동이라는 중국과 북한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양국 사이에는 은밀한 접촉이 계속됐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양국의 외교관계는 개선과 악화가 교차되는 복잡한 양상을 보였다.
1983년 9월 1일의 ‘대한항공(KAL)기 격추사건’은 소련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감을 환기시켰고, 이듬해 5월 조·소 정상회담과 군사유대강화는 소련이 북한의 군사모험주의를 부추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한·소 관계는 제24회 서울 올림픽 대회를 앞두고 소련 외무부 영사단 일행이 입국, 외교문서의 하나인 구상서를 교환한 것을 시작으로 새로운 계기를 맞이했다. 예술단이 서울에 왔으며 올림픽 대회에는 788명의 선수단이 파견됐다.
한소 외교관계 복원
1989년 4월 3일 소련 연방상공회의소 서울사무소가 개설됐고 7월에는 무역진흥공사 모스크바 사무소가 설치됐다. 12월 8일 양국은 서울과 모스크바에 영사처를 개설하기로 합의를 이뤄 1904년 러일전쟁 패권으로 러시아 공사관이 폐쇄된 이후 86년만에 공식외교관계를 복원시켰다. 1990년 6월 4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워싱턴의 미·소 정상회담을 마치고 샌프란시스코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과 담화를 가졌고 수교원칙에 합의했다. 이어 9월 30일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과 최호중 외무장관이 뉴욕의 유엔 본부에서 접촉했고 이날 대사급 외교관계의 수립에 동의했다.
한국은 10월 30일 소련 주재 대사관을 개설하고 공노명 초대 소련 주재 영사처장을 초대 대사로 발령했다. 12월 7일 초대 한국 주재 소련 대사 올레그 소콜로프가 부임했다. 양국은 11월 23일 이중과세방지협정, 12월 8일 투자방지협정에 가조인했으며 한·소 관계는 12월 14일부터 17일까지 노태우 전 대통령이 모스크바를 방문한 데 이어 1991년 4월 고르바초프 대통령 내외가 1박 2일동안 제주도에 체류함으로써 절정에 달했다.
소련 해체와 러시아연방 수립
비교적 순탄하던 한·소 관계는 1991년 8월의 보수파 쿠데타를 계기로 소련 연방의 급속한 해체가 진행됨으로써 재조정이 불가피해졌다. 정부는 러시아연방·우크라이나 등 11개 구성 공화국을 12월 30일 각각 독립된 주권 국가로 승인하고 각 공화국들과의 개별적인 긴밀외교를 하기로 결정했다. 12월 4일 유럽공동체(EC)가 러시아를 승인했으며 미국도 26일 러시아를 소련의 공식적인 계승자로 인정하고 나섰다. 서울의 소련 대사관은 주한 러시아 대사관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정부는 그 밖에 우크라이나·카자흐스탄 등 주요공화국에도 별개의 대사관을 설치해 기타 공화국들의 외교업무를 대행하도록 훈령을 내렸다. 소련의 해체로 대소 경제협력 30억 달러의 계속집행 여부가 관심을 모았는데, 앞으로의 차관 제공은 각 공화국과의 직접 교섭에 의해 이행보증서를 받은 연후에 집행하기로 결정됐다. 1992년 11월 18일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의 공식방한이 이뤄져 한·러 기본관계조약에 서명하고 한국전쟁과 KAL기 격추사건에 대해 사과를 표명했다.
한·러 군사의정서 체결
특히 한·러 군사의정서는 양국 간 군사분야협력을 최초로 명문화한 것으로, 러시아가 북한과 유지하고 있는 실제적인 군사협력수준과 거의 유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94년 6월에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러시아를 방문해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한 공조방안 및 양국간 교류 확대 방안에 협의했다. 러시아는 1995년 9월 북한에, 1996년 9월로 효력이 끝나는 상호원조조약(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과 소비에트사회주의 공화국연방간의 우호협조 및 호상원조에 관한 조약) 제1조에 규정된 전쟁시 자동개입조항의 수정을 요구했다.
이로써 러시아와 북한의 기존 군사동맹관계는 완전히 폐지됐다. 2001년 러-북 정상회담, 한-러 정상회담이 개최된 후 2002년 러-북 철도장관회담이 진행되면서 철도 연결에 관한 문제가 대두됐다. 2003년 한-북-러 3자 철도장관회담이 개최되고 한국은 철도연결에 관해 협의하기로 결정했다. 이 협의는 2008년까지 계속해서 논의됐으나 북한에 김정은 정권이 출범하면서 핵실험 등의 문제로 논의가 중단됐다.
2013년 푸틴 대통령이 한국을 공식 방문하면서 철도사업이 다시 주목되기 시작했지만 계속되는 북한의 핵실험에 따라 2016년 한국은 철도 프로젝트에서 빠지게 됐다. 철도 사업에서는 성과를 내지 못했지만 한국과 러시아는 에너지 산업 부문, 과학기술 등에서 협력하며 양국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경제·통상·주요 협정
1992년 1억 9,000만 달러로 시작한 양국 간의 교역량은 2012년 224억 달러의 규모로 20년 만에 약 100배의 증가세를 보였다. 한국의 주요 수출품은 승용차, 자동차부품, 합성수지, 플라스틱제품 등이다. 2016년 기준 한국의 대러시아 수출액은 47억 6천만 달러이고, 대러시아 수입액은 86억 4천만 달러이다.
2008년 한국과 러시아의 FTA 협상이 잠정 중단된 후 다시 추진하기 위해 많은 회담을 거쳤고 아직 FTA가 체결되진 않았지만 밝은 전망을 앞두고 있다. 이 밖에도 대한민국 정부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정부간의 과학 및 기술협력에 관한 협정(1991), 대한민국과 러시아연방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1993), 대한민국 정부와 러시아연방 정부간의 영해바깥 해상에서의 사고방지에 관한 협정(1994), 대한민국 정부와 러시아연방 정부간의 소득에 대한 조세의 이중과세회피를 위한 협약(1995)이 체결되었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와 러시아연방 정부간의 영해바깥 해상에서의 사고방지에 관한 협정의 개정을 위한 각서교환(1996), 서울소재 구러시아 공사관 부지문제 해결에 관한 대한민국 정부와 러시아연방 정부간 협정(1997), 대한민국 정부와 러시아연방 정부간의 관광 분야에서의 협력에 관한 협정(2001), 1992년 3월 18일 체결된 대한민국 정부와 러시아연방공화국 정부간의 사증발급에 관한 양해각서의 개정에 관한 의정서(2002)가 체결되었다.
이와 함께 대한민국 정부와 러시아연방정부간의 위험한 군사행동방지 협정(2003), 대한민국 정부와 러시아연방정부간의 외교관여권 소지자에 대한 사증요건의 면제에 관한 협정(2004), 대한민국 정부와 러시아연방정부간의 중거리 지대공 유도무기체계 사업의 상호 협력에 관한 협정(2005), 대한민국 정부와 러시아연방정부간의 가스산업에서의 협력에 관한 협정(2006), 대한민국 정부와 러시아연방정부간의 외기권의 탐색 및 평화적 목적의 이용 분야에서의 협력과 관련된 기술보호에 관한 협정(2007), 단기 방문사증 발급 간소화에 관한 협정(2010) 등이 체결돼 있다.
문화교류·교민 현황
한국에서는 각종 문화예술이 발달된 러시아에 유학을 가거나 여행을 가는 등 러시아의 문화를 접하고 있으며, 러시아에서도 관광 목적으로 한국에 오는 경우가 늘면서 양국의 문화 교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2016년 기준 러시아에는 169,680명의 재외동포가 있다. 2016년 기준 한국에는 일반체류자, 유학생 등을 포함한 10,535명의 러시아 국적 등록외국인이 거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