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트남
위치: 인도차이나반도 동부
인구: 98,858,950명 (2023년 추계)
수도: 하노이
면적: 331,210.0㎢ 세계면적순위
공식명칭: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Socialist Republic Of Vietnam)
기후: 열대몬순기후
민족 구성: 베킨족(86%)
언어: 베트남어
정부/의회형태: 사회주의공화제 / 단원제
종교: 불교(70%), 로마가톨릭(10%)
화폐: 베트남 동 (₫) 환율계산기
국화: 연꽃
대륙: 아시아
국가번호: 84
GDP: USD 240,779,000,000
인구밀도: 291명/㎢
전압: 220V / 50Hz
도메인: .vn
베트남과 한국과의 관계
▶ 외교
▶ 경제·통상·주요 협정
▶ 문화교류·교민 현황
요약
아시아의 국가. 수도는 하노이이며 공식어는 베트남어, 화폐 단위는 동이다. 국민의 대부분이 베트남 족으로 80%가 불교를 믿는다. 중국, 라오스·캄보디아, 타이 만, 통킨 만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세계 최대의 인구과밀 국가 중 하나다. 북부는 아열대성 기후이고 남부는 열대 몬순 기후이다.
서북쪽에서 동남쪽까지 최대길이는 약 1,650km이고 동서간의 최대너비는 북부 550km, 남부 340km 가량이다. 북쪽으로는 중국, 서쪽으로는 라오스·캄보디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남서쪽으로는 타이 만, 남쪽과 동쪽으로는 남중국해와 통킨 만에 접해 있다. 수도는 하노이이다.
BC 3세기 중국의 남쪽으로의 영토 확장이 베트족에까지 이르렀을 때, 홍강 삼각주에 거주하는 베트족이 역사에 등장했다. 그때부터 베트남 역사의 주요 흐름은 베트남 고급 문화의 원천이 되어온 중국과의 상호작용이었다. 베트남은 938년 중국의 통치에서 벗어난 뒤 조공을 바치는 국가로서 중국 황제에게 칠기, 피륙, 상아, 열대 산물들을 바쳤다. 그리고 그 대가로 철학·행정·문학 서적들을 받았다. 중국 문화는 베트남 사회 깊숙이 침투했으나, 그것은 하층민들보다는 귀족과 고위 지배층에 더 많은 영향을 주었다. 농촌의 하층민들은 베트남의 독특한 관습과 신념, 언어, 생활습관, 남녀의 사회적 역할 등을 그대로 유지했다.
베트남의 왕들은 중국 황제들을 본보기 삼아 베트남 변경에 있는 소수 인종집단으로부터 공납을 거뒀고, 중국의 왕실에 조공을 바치지 않을 때는 그들 스스로를 황제라 불렀다. 베트남의 왕실과 지역사회 간에 존재하는 문화·공간적 격차가 중국과 베트남만큼 크지는 않았지만, 국가의 통치력이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까지 미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베트남의 인구와 국토 면적은 중국의 성 하나와 비슷하다. 대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농촌공동체에 대한 통치의 어려움은 "황제의 칙령은 마을 입구에서 멈춘다."라는 격언에 잘 드러나 있다.
베트남은 지배문명과 연계를 갖고, 오랫동안 자국의 목적에 맞게 중국 문명의 사상과 제도 및 기술을 변형시켜왔다. 이러한 연계와 변형의 양태는 일찍이 중국과 베트남의 역사적 관계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전통을 거부하고 식민화에 싸우는 공산주의를 채택한 것에서 중국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일면이 다시 확인되었다. 그 대응양식은 사회적 개혁을 촉진하기 위해 서양의 제도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20세기에 다시 명백해졌다. 그리고 1980년대 이후 그 양상은 베트남 공산당이 자유경제주의를 받아들이고 세계 경제로 통합되는 이면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런 전략적 흡수와 적절한 변형은 베트남이 세계 최대의 인구과밀 국가 중 가장 빠른 성장을 이루어낸 시장경제 국가가 되도록 했다.
수도인 하노이는 나라의 북쪽에 위치한다. 반면 베트남에서 가장 큰 도시인 호치민시티(이전의 사이공)는 남쪽에 있다. 베트남은 20세기 중반에 길고 지리한 전쟁의 결과, 1954~75년에 분단을 겪었다. 북베트남이라고 알려진 베트남 민주공화국과 남베트남이라고 불리던 베트남 공화국으로 나뉜 분단은, 처음에는 군사적 성격이 짙었으나 이후에는 정치적인 것으로 굳어졌다. 1975년 4월 통일되었고 1976년 7월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자연환경
베트남은 중서부를 통과하며 남북으로 뻗은 안남 산맥, 북부의 홍강 삼각주, 남부의 메콩 강 삼각주, 동부의 해안평야 등 지형상 4부분으로 나뉜다.
삼림이 빽빽하며 바위투성이인 안남 산맥은 윈난[雲南]고원의 남쪽 연장부분으로 전국토의 약 2/3를 차지한다. 북반부의 서북-동남 방향으로 나란히 뻗은 산맥들에는 해발고도 1,830m가 넘는 봉우리가 여러 개 솟아 있으며, 심하게 침식된 세로로 뻗은 일련의 고원들(평균고도 760∼1,500m)이 남반부로 뻗어 내린다. 산맥 사면에는 고무·차를 재배하는 광대한 농장이 펼쳐져 있다.
인구가 조밀한 북부의 홍강 삼각주는 삼각형 모양의 지대로 집약농업이 이루어진다. 주요작물은 쌀이다. 홍강과 그 지류들은 대규모로 범람하는 경우가 많으며 관개와 지역 화물수송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홍강 삼각주의 4배 가까운 면적을 차지하는 메콩 강 삼각주는 세계에서 가장 비옥한 벼농사 지역 가운데 하나이다. 메콩 강의 범람은 홍강과는 달리 연중 일정한 편이며 이 범람으로 범람원에 매년 퇴적물이 쌓여 기름진 토지가 계속 늘어난다. 이 범람원에는 넓은 논과 사탕수수·바나나·코코넛 등을 재배하는 농장들이 형성되어 있다. 두 주요 삼각주는 길이 약 1,000km에 이르는 좁은 저지대 해안평야를 통해 연결된다.
베트남은 열대계절풍 기후로 겨울에 남부는 덥고 북부는 서늘하다. 연평균기온은 북부 하노이 23℃, 남부 호치민시티 27℃이다. 연평균강우량은 1,500∼2,000㎜로 5∼10월에 집중적으로 비가 내린다. 북부와 남서부 지역은 태풍의 영향을 자주 받는다.
전국토의 약 1/3은 열대상록수림과 참나무·너도밤나무·밤나무·소나무·티크·흑단 등의 아열대 낙엽수림으로 덮여 있다. 대나무는 숲 속의 나무 그늘이나 주로 강 연안 지대에 널리 퍼져 있다. 간만의 차가 있는 해안평원에서는 망그로브 숲을 많이 볼 수 있고, 사바나형 목초와 관목이 남서부의 산악지방과 고원을 뒤덮고 있다.
많은 임야가 화전식 경작 및 1960년대말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과 고엽제 살포로 손상되었지만 전쟁으로 황폐해진 지역은 1980년대 이후 회복되었다. 국토 총면적의 약 1/5이 경작지이다.
베트남 북부는 여러 가지 광물자원이 풍부하다. 이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대규모로 매장되어 있는 무연탄·갈탄이며 철광석·납·아연·보크사이트·구리·크롬원광·텅스텐·주석 등의 광물도 발견되었다. 남해안 앞바다에는 유전이 몇 군데 있다.
국민
베트남인이 가장 우세한 인종집단으로 전체 인구의 90%를 차지한다. 대표적 소수민족은 북부의 중국인, 몽족, 타이어를 사용하는 여러 민족, 눙족·타이(토)족 등과 남부의 고산족·크메르족·찬족 등이다. 공용어는 베트남어이고 프랑스어·중국어·영어·크메르어도 사용된다.
사상은 유교 철학의 비중이 크며 주요 종교는 불교와 도교이다. 로마 가톨릭교, 이슬람교, 호아하오교, 카오다이교, 개신교 신자도 있다. 출생률과 사망률, 연평균 인구증가율은 동남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과 비슷하지만 세계 수준에 비추어 비교적 높은 편으로, 인구의 약 1/5 이상이 15세 미만이다. 도시지역에 거주하는 주민은 전체 인구의 1/3 이상에 달한다. 평균기대수명은 약 76세이다(2020). 2023년 기준 인구는 9,885만 명이다.
1976년 베트남 정부는 남부지방을 위주로 1986년까지 도시인구 중 1,000만 명을 농촌의 '새 경제구역'으로 재배치하려는 계획을 시행했다. 이에 따라 1976∼86년 사이에 새 경제구역에 정착한 인구는 40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1975년 남베트남 정부가 무너졌을 때 약 100만 명의 난민이 베트남을 떠났으며, 이것이 계기가 되어 해외이민이 금지되기도 했다. 이후 1975∼79년에도 베트남인과 화교를 포함한 100만 명 가량이 베트남을 탈출한 것으로 추산된다.
언어
베트남의 공식 언어는 베트남어이며 로마자로 적는다. 베트남어는 단철어(單綴語)로 성조에 6성이 있다. 중국의 영향으로 한자가 사용되고 있었으나, 19세기부터 프랑스의 식민통치를 받으면서 베트남어의 로마자 표기가 추진되어 현재 한자는 별로 쓰이지 않는다.[46] 꾸옥 응으(베트남어: quốc ngữ / 國語)로 불리는 이 로마자 표기는 16세기부터 로마 가톨릭 선교사들이 현지어를 로마자로 옮겨 적으려는 작업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예수회의 알렉상드르 드 로드는 포르투갈어 철자법을 바탕으로 최초의 안남어 사전을 만들어냈다.
베트남어는 민난어처럼 동아시아의 언어들 중에서 중국어와 유사한 문자 체계에서 로마자로 변경한 흔치 않은 언어 중 하나이다. 이 로마자 표기법은 현지인들의 교육에 널리 사용되었으며 1945년 이후 베트남이 독립한 뒤 공식 표기법이 되었다.
베트남에서는 15세기 말에 한자와 비슷한 문자인 쯔놈이 발생하였지만, 그 사용은 한문에 익숙한 일부 지식인층에 국한되었고, 널리 보급되지 않았으며 20세기 이후에는 사용이 끊어졌다. 이는 프랑스의 식민 정책과 관련이 있다. 프랑스 식민통치자들은 베트남을 지배할 때 베트남의 전통적인 유교 사상을 말살하기 위해서 베트남어를 로마자로 표기하는 꾸옥 응으를 사용하게 하였다.[48] 그러나 처음에 프랑스 식민지배에 대한 반감으로 로마자에 거부감을 표시하던 베트남의 독립운동가들은 베트남 민중들에게 새로운 지식과 근대사상을 보급하기 위해서는 어려운 한문이나 쯔놈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절감하여 로마자의 편의성을 인정하고, 이후 로마자를 베트남어의 새 문자로 적극 받아들여 오늘날에는 전통적인 한자문화를 완전히 대체하였다.
베트남은 55종에 달하는 언어의 다양성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들은 다시 6, 7개 정도의 언어 집단으로 나뉜다.
외국어로는 영어를 가장 많이 선호하며, 일부 엘리트 층들은 프랑스어, 러시아어 등을 구사한다. 현재 프랑스어는 식민 지배에 대한 반감 및 프랑스어의 쇠퇴 등으로 인해 거의 감소 추세에 있지만, 베트남은 이미 프랑스어사용국기구(프랑코포니)의 정회원국으로 가입되어 있다.
문화
중국 남부 지방과의 오랜 교류로 인하여, 베트남 문화를 특징짓는 한 가지 요소는 재정적 책임이다. 베트남에서 교육과 자수성가는 높은 가치를 부여받는다. 역사적으로, 중국의 과거 시험을 통과하는 것만이 베트남 사람이 사회적 지위를 높이는 유일한 것이었다. 베트남이 오늘날의 영역으로 통합된 것은 근대의 일로, 그 전에는 유교 및 한(漢)문화의 영향을 받은 북부와 베트남의 주 종족인 킨 족외에 인종적으로 말레이계에 속하는 참파인의 국가였던 참파가 있었던 중부문화권, 그리고 크메르 제국의 영역에 속했던 남부 등으로 나뉘어 있으며, 이 북부, 중부, 남부의 차이는 언어 및 풍속, 문화 등 모든 영역에 걸쳐 존재한다. 중국의 유교 영향을 많이 받았음에도, 베트남에서는 윗사람과 아랫사람이라는 상하 개념은 없고, 서로 스스럼없이 대한다.
역사
베트남의 역사는 BC 200년경 베트남어를 쓰는 민족언어 집단이 남베트(Nam Viet, 南越)라는 독립 왕국을 세우면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한동안 베트남 북동부와 중국 남부를 지배했으나 BC 111년 중국의 전한(前漢)에 점령되었다. AD 1세기에는 인도와의 접촉으로 인도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푸난 왕국이 메콩 강 삼각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6세기에 멸망했다. 939년 드디어 북부지역이 약 1,000년에 걸친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났고 13세기에 3차례 몽골의 침략을 받았으나 모두 물리쳤다.
1407년 중국에 다시 정복되었지만 거국적 저항운동으로 1428년 마침내 중국인들을 몰아냈다. 레[黎] 왕조 치하에서 중국식 관료주의 정부가 수립되었고 국경은 점차 남하했다. 1757년 양분되었다가 1802년 후에 통일왕조의 황제(嘉隆帝)가 된 구엔 안[阮映] 장군에 의해 통일되었다.
19세기 후반 베트남은 서서히 프랑스에 정복되어 1883∼1939년에는 식민지로, 1939∼45년에는 속령으로 지배를 받았다.
1945년 공산주의자 및 민족주의자들이 호치민[胡志明]의 영도 아래 베트남 독립을 선언했다. 7년 동안 프랑스는 독립을 반대했고 호치민이 프랑스에 대항해 게릴라전을 벌이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1954년 5월 7일 디엔비엔푸에서 베트남이 승리하면서 종결되었다. 같은 해 7월 21일에 체결된 제네바 협정에 따라 베트남은 북위 17°를 경계로 해 공산주의자가 주도하며 소련이 지원하는 북부와, 미국이 지원하는 남부로 임시 분할되었다.
그러나 북베트남의 게릴라 활동과 남베트남 내 친(親)공산주의자들의 반란은 미국의 개입과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곧 베트남 전쟁(1955∼75)을 불러일으켰다.
엄청난 파괴와 인명손실을 입은 후 1973년 휴전협정이 조인되고 미군이 철수했다. 그러나 전쟁은 곧 재개되었으며 1975년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에 전면공격을 개시했다. 그 결과 남베트남 정부는 붕괴되고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섰으며, 1976년 7월 2일 마침내 두 베트남은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통합되었다.
1978년 베트남군과 캄보디아군 사이에 국경분쟁이 일어나고 수천 명의 화교들이 정부의 정책으로 불이익을 받고 있다는 이유로 베트남을 탈출하면서 캄보디아·중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1979년 베트남은 캄보디아를 침공해 폴 포트 정부를 무너뜨리고 친베트남 정권을 수립했다(→ 크메르루즈). 이에 대응해 중국군이 베트남의 북쪽 국경을 따라 공격을 개시해 베트남의 영구 군사시설을 닥치는 대로 파괴하면서 약 40km 정도 진격해 들어왔다.
베트남은 캄보디아로부터 병력을 끌어오지 않고 중국군의 진격을 막았지만 9일간 계속된 전쟁으로 커다란 경제적 손실을 입었다.
1980년대 초 베트남은 라오스와 캄보디아에 많은 자국 군대를 주둔시키며 인도차이나 반도 대부분을 장악했고, 이에 따라 몇몇 국가와의 관계가 상당히 악화되었다. 한편 폴 포트의 추종자들은 캄보디아 내 베트남군에 대항해 끊임없이 전투를 벌였으며, 마침내 베트남은 단계적으로 군대를 철수하기 시작해 1989년 철군을 종료했다.
심각한 경제상황과 소련에서 전개된 유사한 개혁 조치들에 힘입어 1980년대 중반부터 베트남은 민간기업들에 대한 자유화 조치들을 비롯한 일련의 경제개혁을 감행했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하자 많은 아시아 및 서방 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을 도모했으며, 이로써 국제적인 고립상태에서 벗어났다.
종교
베트남의 종교로는 불교, 기독교(로마 가톨릭교회, 개신교) 등이다. 베트남은 대승불교권 국가이다. 그 외에 까오다이교와 호아하오교 같은 신흥 종교도 있다. 까오다이교는 1926년 베트남 남부의 터이닌에서 응오반쩨우에 의해 창시된 불교, 기독교와 토속신앙이 혼합된 유일신 사상이며, 호아하오교는 베트남 남부에서 기원한 불교에 바탕을 둔 신흥 종교이다. 1939년 후인 푸 소가 창시하였다. 발원지인 메콩 강 삼각주 지역을 중심으로 대략 200만명의 신자가 있다고 추산된다. 베트남은 과거에는 종교의 자유가 없었지만 예로부터 베트남에서 가장 많이 믿는 종교가 중국, 인도의 영향을 받은 불교였기 때문에 불교나 유교만은 탄압하지 못했다. 현재는 극히 제한적인 종교 활동은 허용되고 있는데, 정부의 허가 없이 찬송가를 부르는 것은 불법이며, 집회는 사전 신고를 하여야 하고 선교는 불법이다. 이것은 공산주의 국가의 종교 정책이 탄압 정책에서 종교를 실용적으로 활용하는 실용 정책으로 변경되었기 때문이다. 특이하게 대승 불교권인데도 부처님 오신 날은 음력 4월 15일이다.
베트남과 한국과의 관계
외교
베트남이 통일되기 전 한국은 남베트남과, 북한은 북베트남과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한국은 그 후 1964년 베트남 전쟁에 병력을 파견하기 시작해 1975년 사이공이 함락되기 직전까지 남베트남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군사적인 면에서는 1964년 9월 의무중대 파견 이래 맹호·청룡 등 한국 전투사단이 파견돼 한때 남베트남 파견 한국군 장병수가 4만 명을 기록하기도 했으나 1973년 파리 휴전협정이 조인되면서 모두 철수했다.
남베트남 주재 한국대사관은 사이공이 함락되기 직전인 1975년 4월 29일 폐쇄됐고 미처 철수하지 못했던 일부 공관원들과 교민들은 1976~80년에 걸쳐 한국으로 송환됐다. 그 밖에도 베트남 전쟁 특수를 타고 한국 기업의 진출이 눈에 띄게 활발해졌으며 남베트남 파견 한국인 문제와 국제결혼으로 인한 한국인·남베트남인의 혼혈아 문제가 대두되기도 했다.
남베트남 정권이 무너지고 베트남이 사회주의 국가로 통일된 후 북한은 이전 북베트남 시절에 맺었던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반면, 한국은 베트남 통일 후 17년 만인 1992년 12월 22일 수교에 합의했다. 한국에는 남베트남 패망 후 공산 베트남에서 탈출한 선상난민들을 수용하기 위한 시설이 부산에 설치돼 있었으나 폐쇄됐다.
2000년 이후 포괄적인 동반자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서 2003년 판반카이 총리가 방한하고, 2005년에는 이해찬 총리가 베트남에 방문하는 등 본격적인 교류가 진행됐다. 2009년에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 국빈으로 방문하면서 FTA에 관한 논의를 시작했다. 2014년 한국-베트남 FTA가 실질적으로 타결되고 2015년 한국-베트남 FTA가 발효되면서 무역관계도 강화됐다. 2017년 한국-베트남 수교가 25주년을 맞이하면서 11월 11일 호치민시에서 호치민-경주 세계문화엑스포가 개최됐다.
경제·통상·주요 협정
1992년 한국-베트남 국교수립 이후 양국 간 교역 규모는 90배 이상 성장해 2016년에는 470억 불을 달성했다. 2017년 기준 베트남은 중국과 미국 다음으로 한국의 3위 수출대상국이자 제1위 아세안 교역 대상국이다. 수요 수출품은 원자재와 자본재로 그 비중이 월등히 높고, 전자, 섬유, 봉제 관련 품목이 그 뒤를 잇는다. 2016년 기준 한국의 대베트남 수출액은 326억 5천 1백만 달러이며, 대베트남 수입액은 124억 9천 5백만 달러이다.
2014년 한국-베트남 FTA 협상 실질타결을 공동 선언해 2015년 한국-베트남 FTA가 발효됐다. 이 밖에도 정부간 경제 및 기술 협력에 관한 협정(1993), 직업 훈련사업의 시행에 관한 약정(1994), 과학 및 기술 협력에 관한 협정(1995), 원자력 협정(1996), 외교관 관용여권 비자 면제 협정(1998), 관광분야 협력에 관한 협정(2002), 투자 증진 및 보호에 관한 협정(2003), 교육협력 약정(2005), 한베 원자력 개발 협력 약정(2006), 항공협정 개정을 위한 교환 각서(2008), 관광협력에 관한 양해각서(2010), 교육협력 양해각서(2015) 등이 체결돼 있다.
문화교류·교민 현황
한국-베트남 친선협회, 한국-베트남 재단, 한국-베트남 문화교류센터, 한아세안센터 등을 통해 양국간 교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으며, 2016년 기준 베트남에는 124,458명의 재외동포가 있다. 한국에는 2016년 기준 128,263명의 베트남 국적 등록외국인이 거주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