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十一章 곰은 목욕을 시키고 여도사는 옷을 훔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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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太古)의 어느 날에 산신(山神)이 분노하여 뜨거운 불길을 토해내었을 때, 그 가슴속 가득 찼던 뜨거운 눈물을 불길과 함께 내뿜어 그 열기로 파인 골이 수백 갈래로 뻗었을 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며 새 땅이 새 하늘 아래 솟아올라 다섯 개의 봉우리를 이루었을 그때에 오지산은 비로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누천, 누만 년이 지나오면서 그때의 불길은 꺼지고, 붉게 달아올랐던 땅거죽도 이제는 푸른 수림에 덮여 버렸지만 아직도 그때의 흔적은 지워지지 않고 있었으니, 산을 거의 덮고 있는 구멍 뚫린 검은 돌들과 녹아 흐르다가 굳은 듯 엉겨 있는 바위들의 모습, 그리고 봉우리를 둘러싸고 곳곳에서 발견되는 유황온천(硫黃溫泉)들이 그것이었다.
유황이라는 것이 묘해서 손으로 만지면 피부가 굳어 버리고 냄새만 슬쩍 맡아도 숨이 멎어 버릴 것같이 독한 놈이지만 적당한 방법으로 적당히 사용하면 양생(養生)과 치료에 탁월한 효과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산짐승들은 평소에는 얼씬도 않다가도 어디 다치기라도 하면 찾아와 그 거품 일어나는 누런 물에 몸을 담그고, 유황이 섞인 진흙에 뒹굴기도 하곤 했다.
산짐승들이 이런데 하물며 사람이 찾지 않을 가 없었다. 그래서 이 오지산을 중심으로 한 종화 지역이 광동에서도 유명한 온천 지역이 된 것이다.
그 중 향로봉(香爐峰)은 오지산 다섯 손가락 중 중지라고 할 위치에있는 봉우리로, 산세가 유독 험하고 기암절벽이 많아 온천을 찾아온 사람들의 발길도 닿지 않는 곳이었다.
새벽. 향로봉 산기슭에 곰보처럼 뚫려 있는 간헐천(間歇泉)에서 뿜어져 나오는, 유황 냄새 자욱한 수증기가 섞인 새벽안개를 뚫고 한 사람이 려가고 있었다. 자욱한 안개와 수증기 속에서 스치듯 보이는 거대한 체구가 마치 한 마리 회색 곰이 질주하고 있는 모습을 연상케 했다.
그는 철탑같이 장대한 체구에 걸맞지 않게 빠른 속도로 기기묘묘하게 튀어나온 바위틈을 헤치고 구멍 뚫린 검은 돌들의 무더기를 스쳐 지나가며 산정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진자앙이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경공술을 연마함으로써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경공술이라고는 하지만 지금 진자앙이 연마하고 있는 것은 비모각(飛毛脚)이라고 해서 달리기 연습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비모각. 이름 그대로‘털이 휘날리도록 뛰는’것이다. 근육은 사용하면 할수록 단련되는 것이니 매일 달리면 점점 빨라지기도 하고, 오래 달릴 수도 있게 된다. 그러니 산길을 매일, 그것도 무거운 동판 같은 것을 다리에 매달고 뛰면 걸음이 빨라지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이런 것이 무림에서 말하는 경공술은 아니었다. 신체적 훈련으로 키울 수 있는 능력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사람이 아무리 단련을 한다고 하더라도 새처럼 날 수는 없는 것처럼.
그러나 경공술은 그러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을 말한다. 밀가루를 깔아 놓은 곳을 걸어도 흔적이 남지 않고, 뛰어가는 말을 달려가 잡으며, 오 장, 십 장 너비를 가뿐히 뛰어넘는 것 등은 하나같이 인간의 한계를 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진자앙은 그런 경공술은 배운 적이 없었다. 외가에서는 경공술을 그리 중요시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배울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더 정확한 이유였다.
이 년 전 사형인 유소림이 금강당을 뛰쳐나가 버린 이후, 소삼중은 이전보다 더욱 병세가 악화되어 버렸다. 하루에 깨어 있는 시간보다는 그렇지 않은 시간이 훨씬 많은, 거의 탈진한 사람처럼 되어 버린 것이다.
게다가 진자앙에게는 무공수련보다는 생계를 해결하는 것이 더 급한일이 되어 버렸다. 사부를 간호하면서 쌀과 생필품 몇 가지는 사야 하는데 자신에게는 유소림처럼 약을 가져다 팔 재주도 없으니 진자앙으로서는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경공수련을 나올 때마다 한두 마리씩 잡곤 하던 산짐승들을 팔아 보자는 데로 생각이 미쳤다. 그래서 이제는 하루의 반 이상을 산을 돌아다니며 사냥을 하는 것으로 보내게 되어 버린 것이었다.
그 나머지 시간만이 수련에 할애될 수 있었는데 하필이면 삼단계의 수련을 시작할 즈음이라 영 곤란하게 되어 버렸다.
금강삼십육로의 삼단계 수련은 여태까지의 신체단련 수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실 내가수련(內家修練)을 겸해야 하는 일종의 기공수련 (氣功修練)이었다. 이른바 외문기공(外門氣功)의 단계였다.
이십오로(二十五路)인 철사장(鐵沙掌)에서 시작해서 무형지기의 권격무공(拳擊武功)을 수련하는 정권공(井拳功),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는다는 선인장(仙人掌), 손바닥 옆 부분을 칼같이 만들어 강철을 자른다는 관음장(觀音掌), 돌을 비벼 가루로 만들어 버리는 합반장(合盤掌) 등이 장과 권을 단련시키는 수련법인데 하나같이 내가의 수련을 동시에 해야만 효과를 볼 수 있는 수련들이었다.
더구나 삼십로(三十路)인 점화공(拈花功)은 엄지, 중지, 식지를 단련하여 지풍(指風)을 사용하게 하는 것이고, 용조공(龍爪功)은 손가락으로 사람의 혈도를 움켜쥐어 제압하는 점혈법(點穴法)의 일종. 발산공(拔山 功)은 금나수의 일종으로 손아귀 힘을 단련시켜 거력을 발휘하게 하는 수련법이었다.
마안공(馬鞍功)은 다시 장권을 단련시키는 것이고, 삼십사로(三十四路)에서는 다시 경신공을 연마하게 된다. 그런데 이때의 경신공이 진짜였 다.
이러한 열 가지 수련들은 하나같이 기공이기 때문에 사실 소삼중도 이것들은 익히지 못했었다. 내공이 없으면 전혀 시도조차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진자앙에게는 내공수련을 일찌감치 시키고 대충 효과가 보인다고 생각되자, 바야흐로 삼단계의 수련을 시키려던 참인데 유소림이 뛰쳐 나가 버렸으니 소삼중의 실망이 더욱 컸던 것이다. 이러한 기공수련에 있어서는 다른 것에 방해를 받지 않고 그저 며칠이고 전념해서 수련할 여건이 필요한데 그게 불가능하게 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소삼중은 오랜 시간 고민한 끝에 특단의 조치를 내려야 했다.
‘금강삼십육로의 수련법 중 상당 부분을 포기한다’가 그것이었다.
철사장에서 마안공까지는 사실 방어용이라기보다는 공격용의 기공 측면이 강했다. 이것을 포기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경신공에 대해서는 수련 시간은 많이 걸리지만 별 필요는 없다는 이유 때문에 포기하게 되었다.
‘도둑질을 할 목적이 아니면 소리 내지 않고 걷는 것이 무슨 필요냐’는 것이었다. 과연 그런지 여부는 별개의 문제라 치고라도 나머지 수련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었기 때문에 진자앙도 별 불만은 없었다.
그는 근 이 년 동안 새벽같이 일어나 산으로 뛰어 올라오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향로봉의 기암절벽들을 타고 뛰는 것이 경신술만이 아니라 몸 전체의 단련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전에 해왔던 수련들, 즉 이단계까지의 수련들은 이제 그에게는 너무 쉬운 것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되풀이할 필요도 없었다.
대신 그는 나름의 수련법을 개발해 내었다. 산을 타면서 체력을 기르고, 그 동안 짐승을 잡는다. 그리고……!
“이야아아압`─`!”
향로봉 산정 가까운 높은 바위에 올라간 진자앙은 그대로 네 활개를 펴고 아래로 뛰어내렸다.
대충 눈대중으로 보아도 십여 장이 넘는 높이의 바위, 게다가 그 아래에는 울퉁불퉁한 바위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거기로 진자앙은 그대로 떨어져 버렸다. 네 활개를 편 몸의 전면으로 바위에 부딪쳐 간 셈이었다.
쾅`─`!
마치 묵직한 바위 하나가 떨어진 듯한 소음이 퍼지고, 바위 가루가 부서져 뿌연 먼지가 솟아올랐다.
보통의 사람, 아니, 무공을 꽤나 수련한 무인이라 할지라도 도저히 살아남지 못할 일이었다. 그런데 진자앙은 천천히 그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물론 아프다. 그러나 부상은 전혀 입지 않았다는 것이 진자앙의 상태였다. 게다가 이전에 했을 때보다, 아니, 어제보다도 훨씬 덜 아프다는 것이 중요했다. 이것이 그가 나름대로 개발한 수련법이었다.
그는 다시 바위 위로 뛰어 올라가 이번에는 뒤로 떨어져 내렸다. 등판을 단련시키는 것이다.
사실 이렇게 무식한 수련법이 가능했던 것에는, 그러고도 죽지 않을 수 있었던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포기한 수련들 대신에 ‘이것만은’ 이라며 소삼중이 강조한 두 가지 수련, 바로 금강대력(金剛大力)과 금강지식(金剛止息)의 두 가지 수련법이 효과를 본 것이다.
이 두 가지야말로 금강당의 독보적인 수련이라고 소삼중은 강조했는데 사실 그런 면이 적지 않았다.
금강대력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하다. 그저 두 다리를 벌리고 기마식으로 서서 가상의 상대가 공격해 온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받아 쓰러뜨리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연습상대가 없어서가 아니라 혼자 수련하는 것이 정석이며 그래야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가상의 적을 상대로 밀고 밀리는 수련을 거듭하는 동안에 진자앙의 체내 기운이 동작을 따라 움직이게 되고, 그러한 기운은 그의 발에서부터 지면으로 이어져 어떠한 힘으로 밀어도 꿈쩍도 않게 되는 이른바 금강부동(金剛不動)의 경지에 다다르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진자앙은 이 수련을 통해 상식적으로 기대되는 것보다 훨씬 더 진보를 얻을 수 있었는데, 그것은 묘하게도 어머니 고대랑 덕분이었다.
그는 이전에 싸워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가상의 상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그저 어머니뿐이었다.
고대랑이 어떤 사람인가?
천하무림을 통틀어도 백대고수의 반열에는 올라가고도 남음이 있는 광동제일의 여장부인 것이다.
그런 고수를 상대로 매일 수련을 하니 처음에는 힘들었어도 나중에는그 진보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말하자면 목표를 높이 잡으면 성취도 크다는 셈이었다.
금강삼십육로의 마지막인 금강지식은 그야말로 금강당 무공의 총화요, 완결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의식적으로 호흡을 조절하는 수련이며, 의식적으로 숨을 멈추는 기공이었다.
내뱉는 숨과 들이마시는 숨 사이에 멈추는 시간을 갖는데 처음에는 그 시간이 길지 않게 한다. 그러다가 수련이 진행되어 가면서 점점 내뱉고 들이마시는 시간을 보다 길게 하고, 나중에는 소위 한 모금의 호흡으로 하루를 견디는 경지에까지 이르도록 수련하는 것이다.
물론 아직 그 경지에는 다다르지 못하였지만 진자앙은 이 금강지식의수련법이 자신을 변화시킨 것에 대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얼굴과 눈의 단련 같은 것이 그것이었다.
그는 이전에 그 부분에 대해서는 단련을 한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금강지식의 상태에서는 바위의 날카로운 모서리에 눈을 찔려도 끄떡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구나 이 수련법은 소삼중에게서 배운 운기조식법과도 묘하게 상관관계가 있는 것 같았다. 금강대력을 수련할 때도 그런 것을 느꼈지만 이 금강지식의 수련을 하는 동안에는 몸 안에서 원인 모를 기운이 큰 강과도 같이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는데, 그것은 운기조식을 할 때도 미처 느껴 보지 못했을 정도로 큰 기운이요, 큰 흐름이었다. 그러나 사실 그 방향은 세 가지가 다 공통되었던 것이다.
진자앙은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가 익힌 운기조식법, 그리고 지금 금강대력과 금강지식의 두 수련법은 인체의 기를 인위적으로 조작하려 하지 않고 그저 자연스런 흐름에 맡긴다는 면에서 공통되는 것이었다. 이것은 무림에 일반적으로 돌아다니는 내가기공, 내공심법과는 그 궤를 달리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런 것들이 비록 기의 자연스런 흐름에 맞게 진기를 운행하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무리해서 이끌어 가는 느낌이 강한 데 반해서 여기에는 그런 인위적인 것이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었다.
사람이라는 것이 눈 한번 꿈쩍거려도 발뒤꿈치에까지 상호 연관을 갖고 기를 서로 주고받는 것이 상례이니, 금강대력이나 금강지식과 같이 수련을 하는 데에 기의 움직임이 없을 수가 없다. 그러한 기를 인위적으로 움직이려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두면 그것이 어디로 움직이는가?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고 불길은 위로 치솟는 것과 마찬 가지로, 그 순간 진자앙의 체내에서 가장 적합한 자리로 움직여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니 이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자연의 이치에 합치하는 흐름이었다.
그렇게 해서 진자앙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과거 그의 온몸에 두루 퍼져 있던 이화복령사의 기운을 거의 체내로 흡수하고, 그것을 그 자신의 힘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비록 복용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나 원래의 효용이 다 내공으로 만들어지지는 못하였지만 그것이 완벽하게 진자앙 자신의 기로 흡수되어 안팎이 모두 자연스러운 기로 충만케 되었으니, 차라리 좋을 수도 있는 결과였다.
적어도 이전처럼 연운십팔박이라는 간단한 동작조차 못 하지는 않았다. 근골이 부드럽게 풀린 덕분이었다.
단지 이목이 영민하지 못하여 지금도 주변의 낌새를 잘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그것은 워낙 어렸을 때 극양의 화기를 섭취한 부작용으로 신체가 이미 그렇게 변해 버린 때문이니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이 성격 자체에도 작용해서 어딘지 느긋한 인물이 되어 버린 것도 하는 수 없는 일이다.
좋게 말하면 당황하는 법이 없는 침착한 사람이고, 나쁘게 말하면 둔해서 반응이 빠르지 못하니 좀 멍청해 보인다고도 할 수 있는 그런 사람, 그것이 이제 스물하나가 되는 진자앙의 상태였다.
그런 진자앙의 눈에 뜨일 뿐 아니라 잡히기까지 하는 산짐승들도 그러고 보면 대단히 한심하다 아니할 수가 없었다. 오늘도 그런 한심한 짐승 중 하나가 나타났다.
거대한 붉은 곰 한 마리가 진자앙이 뛰어가는 그 길목 앞 바위 뒤로 사라지고 있었다. 진자앙은 걸음을 멈추고 잠깐 머뭇거렸다.
아직 식량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저 정도로 큰 곰은 자주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 마리만 잡으면 고기는 포를 떠서 말리고 쓸개는 사부의 약으로 쓸 뿐 아니라 가죽을 벗겨 팔면 산에서는 맛볼 수 없는 음식을 대접해 드릴 수도 있게 된다.
진자앙은 오늘 아침의 수련은 저 곰을 잡는 것으로 대신하기로 결정했다.
2
곰은 흔히 미련한 동물의 대명사처럼 취급되지만 산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호랑이보다도 더 무서운 놈이 그것이다. 집채만한 바위도 굴려 버리는 엄청난 힘에, 체구답지 않게 신속한 동작, 역시 체구에 걸맞지 않게 교활한 두뇌는 일반적으로 그것에 대해 가지고 있던 오해를 공포로 만들어 버리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곰을 가장 두려운 존재로 만드는 것은 놈이 가지고 있는 치열한 공격성이다.
‘곰을 만났을 때는 죽은 척하면 산다.’
일반적으로 널리 퍼진 이 속설만큼 곰의 흉포함을 모르고 하는 소리는 없다. 놈은 산 것이건 죽은 것이건 일단 물어뜯어 찢어 놓고서야 따지려고 들 것이니 말이다.
덧붙여 말해서 그것에게 물어 뜯기고도 살아남을 것이라는 기대는 않는 것이 좋다. 한입에 서너 근씩은 족히 뜯어 갈 것이요, 운이 좋아 그 입 에서 피해 도망친다고 해도 그 발톱과 이빨의 독은, 살아남은 사람을 썩은 고깃덩어리로 만들기에 충분할 만큼 독하기 때문이다.
그런 곰을 쫓는 일은 어렵지 않다. 놈에게는 두려운 것이 없고, 그런만큼 적을 피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놈이 누군가를 피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귀찮아서이지 결코 두려워서는 아니다.
그런데도 진자앙이 놈을 쫓아 잡은 것은 처음 발견한 곳에서도 한참이나 더 간 봉우리의 남쪽 기슭, 화룡동(火龍洞)의 초입에서였다.
화룡동.
화룡동은 사실 동굴이 아니었다. 향로봉의 옆에 혹처럼 튀어나온, 봉우리라기엔 좀 작고 언덕이라기엔 좀 큰, 그런 곳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이곳이 동굴로 불리는 것은 화룡의 굴이 거기 있기 때문이었다.
화룡의 굴, 바로 분화구(噴火口)였다.
이제 불을 내뿜지는 않지만 아직도 짙은 황색의 연기가 그침 없이 뿜어져 나오고, 그 주변에는 부글부글 끓는 진흙탕과 유황 연기 자욱한 고열의 열탕(熱湯) 구덩이들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는 곳이었다.
진자앙은 잠시 머뭇거렸다. 이곳은 향로봉 구석구석을 다녀 본 그 아직 들어가 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온천이라고는 하지만 봉우리 북쪽의 그것들에 비해서 유황 연기도 너무 짙고, 온도도 높아서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탓이었다.
“그래도 한번 가보기로 하지.”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화룡동의 중심, 분화구를 향해 걸었다.
사방에는 반쯤 녹다가 만 것 같은 바위들이 즐비하고, 그 사이사이로거품이 부글거리는 진흙탕이 흘렀다. 애써 땅을 밟으려니 오히려 힘들어 진자앙은 바위로 올라가 징검다리를 건너듯 뛰었다.
서너 개를 그렇게 뛰어넘었는데도 곰은 보이지 않았다. 기괴한 모습의 바위들이 이곳저곳에 널려 있기는 하지만 그리 크지는 않으니 별달리 숨을 곳이 없을 것 같은데 신기하게도 전혀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진자앙은 바위 하나를 딛고 서서 중얼거렸다.
“그만 포기해야 하나……? 여길 찾아온 걸 보니 다친 놈 같기도 하고…… 그래, 관두자!”
그렇게 돌아서는 순간, 바위 아래 진흙탕이 분수처럼 튀어 올랐다. 흠칫 놀라 돌아보는 진자앙에게 거대한 곰이 악마처럼 입을 벌리고 덮쳐 들 고 있었다. 놈은 진자앙이 서 있던 바위 바로 아래, 진흙탕에 몸을 묻고 숨어 있었던 것이다.
진자앙은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올려 곰의 발톱을 막으려다가 마음을 바꿔 다른 바위로 뛰어 피하려고 했다. 좁은 바위 위에 서서, 그것도 예상치 못한 기습을 받아 힘을 모으지도 않은 상태에서 곰의 일격을 받으면 아래로 굴러 떨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갈피를 못 잡고 엉거주춤하고 있는 사이, 곰의 발톱은 이미 그의 가슴팍을 후려치고 있었다. 진자앙은 더 고민할 것도 없이 그냥 바위 아래 진흙탕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그야말로 싸움 경험이 없던 소치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에 반해 곰의 공격은 빠르고 정확했으며 망설임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었다. 그대로 바위를 돌아 진흙탕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진자앙의 머리를 향해 다시 일격을 가했다.
퍽`─`!
진자앙은 그대로 진흙탕 속에 머리를 처박았다. 뒷골이 울리고 있었다.
처음 맞은 가슴팍도 시큰거리는 것이, 곰의 일격이 가볍지는 않았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사이에 침착을 되찾았다.
곰의 연속타를 맞고도 그저 골이 띵하고 가슴팍이 시큰거린다는 정도에 그친 것은 그의 육체가, 그리고 그의 수련이 곰의 공격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넘길 수 있다는 증거였다.
그보다 걱정되는 것은 곰의 공격이 아니라 이 자욱이 피어오르는 유황 연기였다. 겉은 가죽이 두꺼우니 괜찮다고 쳐도 폐가 견딜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는 사이 곰이 다시 공격을 가해 왔다.
놈은 진흙탕 속에 절반이나 파묻힌 그를 물어 당기며 찢어발기려고 흔들고 있었다. 진자앙은 힘없는 사슴처럼 곰의 이빨에 목덜미를 물린 채로 덜렁거렸다.
꼴이 우스울 거라는 게 뻔했지만 움직이기 어려운 진흙탕에서 꺼내어진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아프지는 않았다. 이것보다는 차라리 벼랑에서 떨어지는 게 훨씬 아팠다. 단지 어떻게 곰의 이빨에서 빠져 나가야 할지 몰라 곤란할 뿐이었다.
진자앙은 그제야 자신이 공격을 하는 방법이라고는 단 하나도 배우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곰도 이젠 좀 난감한 모양이었다. 아무리 씹어도 씹히지가 않을 테니까. 아마 놈은 이렇게 질긴 고기는 씹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곰이 이제 방법을 바꾸었다. 진자앙을 물고는 바위로 다가가 거기에 패대기를 친 것이다.
이번에는 아팠다. 진자앙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으로 곰의 머리를 내질렀다. 약간 반응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공격하는 방법은 모를지라도 무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는 걸 그때 깨달았다. 지금의 그에게는 온몸이 흉기가 될 수도 있었다.
그는 좀 더 자신을 가지고 팔을 휘둘렀다. 팔뚝을 가로로 세워 곰의 옆구리를 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곰은 어마어마하게 컸고, 그는 목이 물려, 들려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그의 일격은 곰의 목덜미에 격중했다. 잘된 일이었다.
아무래도 살이 많은 옆구리나 팔보다는 목덜미 쪽이 충격이 더 갈 터였다.
그러나 곰은 꿈쩍도 않았다. 발이 땅에서 떨어져 있는 데다가 자세가 좋지 않아 별 충격을 주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사실 곰은 옆구리보다는 목덜미 쪽의 가죽이 더 두껍다.
어쨌거나 공격을 한다는 점이 중요했다. 진자앙은 그치지 않고 팔을휘둘렀다.
그것이 곰의 신경을 적지 않게 긁어 놓았던 모양이었다. 곰은 포효를 지르며 물고 있던 진자앙을 저만치에 던져 버렸다. 진자앙은 바위에 부딪혀 땅바닥을 굴렀다. 거기로 곰이 다시 덮쳐 왔다.
팡`─`!
곰의 앞발 일격이 옆구리에 작렬했다. 진자앙은 공처럼 떠서 저만치에 굴러 떨어졌다.
팡`─`!
다시 한 방. 진자앙은 다시 굴렀다. 곰은 공놀이를 하는 것처럼 진자앙을 이리저리 쳐내고 있었다. 살기에 가득 찬 공놀이였다.
곰이 다시 덮쳐 들 때, 진자앙이 발로 그 얼굴을 걷어찼다. 자신이 철소추를 연습했다는 것을 뒤늦게야 깨달은 것이다.
팍`─`!
이번에는 제대로 먹혀들었다. 타격점도 좋았다. 진자앙의 발은 정강이를 앞으로 해서 곰의 콧잔등에 그대로 박혀들었다.
크와아아앙`─`!
곰은 머리를 흔들며 물러났다. 진자앙도 그 틈을 타서 일어나 뒤로 물러났다.
어느새 그와 곰은 진흙탕을 빠져 나와 언덕의 정상에 보다 가까워져 있었다. 온통 진흙을 뒤집어쓴 곰과 사람의 싸움은 거기에서 다시 시작되었다.
곰이 살기로 충혈된 눈에 시뻘건 입을 벌리고 사람처럼 일어섰다. 통나무처럼 굵은 두 개의 앞발이 비수처럼 날카로운 열 개의 손톱을 번뜩이며 하늘을 향해 들려 있었다. 곰의 앞발이 진자앙을 향해 휘둘러졌다. 발톱이 바람을 끊었다.
진자앙은 이미 몇 대 맞아 보고 그 발톱이 별 타격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알았지만 일단은 본능적으로 두렵고, 그 다음엔 아무리 곰과 싸우는 것이지만 변변히 공격 한번 못해 보고 지는 것은 싫어서 곰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았다. 아무 형식이 없이 주먹을 휘둘러 곰을 후려친 것인데, 놀랍게도 제법 날카로운 맛이 있었다.
사실은 이 구 년 동안 수없이 되풀이해 온 연운십팔박 중에서 충권,즉 정권지르기의 요령이 진자앙의 이번 공격에 자연스럽게 배어 들어간 덕이었다.
곰과 사람의 공격은 서로에게 정확하게 격증되었다. 곰이 약간은 충격을 받은 듯 멈칫거렸다. 그러나 그때 진자앙은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힘은 둘째 치고 체중에서 너무 차이가 나는 것이었다.
진자앙이 얼굴을 붉혔다. 그는 처음으로 분하다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기껏 무공을 배웠는데 곰에게도 밀리면 어디다 쓸 것이냐.’
곰이 다시 덮쳐 왔다. 그도 곰에게 같이 덤벼들었다. 힘으로 이기고 말겠다는 생각이었다.
곰의 양팔이 진자앙에게 잡혔다. 정확히 말한다면 그가 곰의 양팔에매달렸다고 하는 것이 더 옳았지만.
‘금강대력공은 괜히 익힌 줄 알아?’
진자앙은 그 상태에서 그대로 힘을 썼다. 그러나 월등히 키가 큰 곰이 한번 힘을 쓰자 진자앙은 그대로 발이 떠서 공중으로 날아 나가떨어져야 했다.
‘이럴 리가 없는데……?’
바닥을 구르면서도 진자앙은 그 생각을 했다. 분명 이럴 리가 없었다.
무언가 그가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강대력공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밀리는 것일 뿐이라고 그는 믿고 싶었다.
다시 곰이 덮쳐 왔고, 진자앙은 그 팔에 다시 한 번 매달리면서 자신의 생각을 확인하려 했다.
발가락을 안으로 굽혀 땅을 움켜쥐듯 하고, 혀는 윗니 안쪽, 입천장에 붙여라. 항문에 힘을 주어 당기고, 전신은 힘을 푼 듯이 자연스럽게 서는 것이다.
이것이 금강대력공의 기본자세였다.
그러나……!
‘서로 힘을 쓰는데 어떻게 자연스럽게 선단 말인가?’
한쪽이 힘을 쓰면 상대는 힘을 안 쓰려야 안 쓸 수가 없는 것이 이치 아닌가! 그런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선다는 것이 가능한 이야기일까?
진자앙은 머릿속으로 만든 적과, 실제로 힘을 써가며 싸워야 하는 적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가상의 적을 상대로 싸우면서 수련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힘을 사용하지 말고 뜻[意]을 사용하는 것이다!
상체와 하체가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허리를 중심으로 조화로이 움직이는 것이다!
근육과 뼈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뜻과 기가 함께 움직이는 것이다!
기는 멈춤 없이 흘러야 하고, 호흡을 흩뜨리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요결이었다.
한 순간 진자앙은 이것을 여태 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야말로 알맹이는 버리고 껍데기만으로 싸워 온 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정말 잘못 배운 것이었다. 아니, 여태 잘못 익혀 왔던 것이다. 그 오의(奧義)는 파악하지 못하고 겉으로 보이는 것만 따랐기 때문에 실제 상황에 부닥치자 배운 것 전부를 의심하게 되었던 것이다.
진자앙의 몸이 갑자기 태산같이 무거워졌다. 그의 발은 지면에 달라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곰이 너무나 가볍게 느껴졌다.
조금 전까지는 단지 매달려 있는 것이었지만 이제 그는 진정으로 곰의 팔을 잡고 있는 셈이었다.
곰이 발버둥을 쳤다. 진자앙은 가볍게 비웃으며 그대로 곰을 잡아 던져 버렸다. 그 순간, 그가 의식적으로 상대를 제압하려 힘을 쓰는 그 순간에 그의 몸이 유지하고 있던 조화가 깨어져 버렸다.
‘아차!’
진자앙은 후회했지만 때는 늦었다. 더 좋지 않은 것은 그와 곰이 어느새 분화구의 가장자리에까지 와서 싸우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곰과 진자앙은 한 덩어리가 되어 그릇처럼 움푹 파인 분화구의 안쪽으로 뒹굴어 갔다.
퍽`─`!
무언가 뜨겁고도 뭉클한 감촉이 진자앙의 등에 느껴졌다. 다음 순간그 감촉은 온몸으로 퍼져 그를 감싸 안았다. 무거운 압력이 그를 숨막히게 했다.
진자앙은 그 무겁고, 뜨거운 수렁 속으로 빙글빙글 돌며 떨어지고 있 었다.
암흑.
그것뿐이었다.
3
‘용암인가?’
용암은 아닌 모양이었다. 제아무리 철골(鐵骨)과 같이 단련한 몸이라고 해도 용암에 떨어지고야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없을 것이었다.
‘그럼……?’
진자앙은 가물가물해지는 정신을 간신히 놓지 않으며 생각했다. 우선
은 자신의 바보스러움에 대한 후회였다.
‘제대로 못 배워서 이 모양이지!’
마지막 순간에 오만해지지만 않았으면, 어렵게 배워 놓고는 그렇게 쉽게 잊어버리지만 않았으면 여기 떨어지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걱정이었다.
금강지식법을 배웠으니 두 시진 정도는 숨을 쉬지 않고 견딜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아니, 여기에서는 훨씬 시간이 단축될 것이었다.
온몸을 으스러뜨릴 것 같은 이 엄청난 압력 속에서는 기운이 훨씬 더 빨리 소진되고, 그러면 숨을 쉬지 않고 견딜 수 있는 시간이 훨씬 짧아질 것임에 틀림없었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이미 의식이 흐려지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기분이 좋군!’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마치 흠씬 두들겨 맞고 난 뒤에 가물가물 의식이 사라져 가는 그 순간의 안락함 같은 것이었다. 무거운 육체를 벗어 던지고 정신이 한없는 자유로움을 얻기 직전의 그 황홀감과도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그러면서도 진자앙은 자신이 방금 전까지 생각하던 그것, 금강지식법 의 구결을 암송하고 있었다. 생각이 단순해지면서 다른 생각을 떠올릴 기회도, 능력도 없어져 버린 때문이었다.
머릿속 어디에선가 음악 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천강을 따라 공(功)을 나르고 북두(北斗)를 따라 걸음을 옮기라.
제때에 화로에 불을 지펴 납[鉛]을 뽑고 수은(水銀)을 더하라.
오행(五行)을 모으면 조화가 생기고 사상(四象)을 합하면 시간이 정해진다.
이기(二氣)는 황도(黃道) 사이로 들어가고 삼가(三家)는 금단(金丹)의 길에서 모인다……
‘저게 왜……?’
진자앙은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구 년 간 끊임없이 연마해 온 그운기조식법의 구결 아니던가. 보법을 밟으며 그렇게 구결을 외면 몸 안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뜨거운 기운 같은 것이 움직이던, 그 구결이었다.
노랫소리는 하나 더 있었다.
오행이 생기고 변함은 불〔火〕로 하여 이루어진다.
간목(肝木)은 능히 심화(心火)를 왕성케 하고, 심화는 또한 비토(脾土)를 평케 한다. 비토는 금(金)을 낳고, 금은 수(水)로 화하고, 수는 목(木)을 낳아 영(靈)을 통하게 한다.
생생화화(生生火火)가 다 화(火)로 인하니, 화는 장공(長空)에 퍼져 만 물을 성하게 하느니라.
오칠구결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가 들려 주시던 그 비결.
‘그러고 보니 이젠 뜨겁지 않군!’
조금 전까지 뼛속까지 태울 것 같던 열기가 이젠 그리 뜨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내장 속에서부터 시원스럽게까지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는 몽롱한 정신 속에서 두 가지의 구결을 헛소리처럼 외며 자신도 모르게 기를 움직이고 있었다. 운기가 진행됨과 더불어 그의 몸이 무게를 잃어버린 듯이 가볍게 느껴지기 시작했고, 실제로 그의 몸은 조금씩 떠오르고 있었다.
그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분화구 안쪽에 파인 몇 개의 진흙구덩이 중 하나에 둥둥 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진흙 구덩이라지만 용암만 아닐 뿐, 사실은 유황 구덩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같이 떨어진 곰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이미 진흙
구덩이 속에 깊이 가라앉고 있었던 것이다.
진자앙은 그런 곳에 빠지고도 살아난 것이었다.
태어나자마자 그가 먹었던 이화복령사의 기운이 여기 유황 구덩이가 뿜어내는 기운과 성질상 합치하는 것이었고, 게다가 그가 외우던 오칠비결이 화기를 부르는 구결이라 엄청난 화독의 덩어리나 다름없는 곳에서 살아나게 만든 것이지만 진자앙으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그는 단지 자신이 그 동안 쌓아 온 수련이 아주 쓸모가 없지는 않았다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
오늘의 이 일이 그가 평소에 쌓아 왔던 수련의 효능과 더불어 그의 몸 안에 잠복하고 있던 이화복령사의 기운을 완전히 녹여 그의 것으로 만들어 주었을 뿐 아니라 유황이 지니고 있는 불과 같은 기운을 더해 주기도 했지만 그것 역시 그는 모르는 일이었다.
그는 단지 진흙 속에 누워 바라본 하늘의 해가 상당히 올라와 있는 것을 보고는 산 아래 초막에 누워 그를 기다리고 있을 사부를 떠올렸을 뿐이었다.
“아차, 늦었다!”
그는 허겁지겁 진흙탕 속을 빠져 나와 분화구를 나오려 했다. 그때 한 가지 물건이 그의 시선을 잡았다. 온통 검고, 혹은 노란 바위들 틈에 뒹굴고 있는 어떤 물건이 유독 불처럼 붉게 빛나고 있었다.
“저게 뭐지?”
그가 집어 든 것은 빨갛게 빛나는 둥근 구슬이었다. 마치 보석처럼 빛나는 구슬. 그러고 보니 그 구슬이 있던 장소에는 같은 구슬들이 여러 개 흩어져 있었다.
진자앙은 구슬을 덮고 있는 노란 돌들을 치우고 구슬들을 꺼내었다.
전부 해서 다섯 개였다.
“왜 여기 이런 것이……? 응? 이거, 그러고 보니……!”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는 구슬이 있던 그 바위가 사실은 상자임을 알고 크게 놀랐다.
워낙 낡고 부식이 되어 있어서 바위와 구별이 안 가긴 했지만 분명 그 것은 상자였다. 그리고 상자 안에는 주변의 바위와 같은 노란 돌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진자앙은 이 노란 돌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이 주변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것, 바로 유황이었다. 도가에서는 불사의 선단을 만드는 데 재료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사실 약으로 사용 하기에는 너무 위험한 물건. 그러나 그가 놀란 것은 상자가 있으면 누군가 사람이 여기 왔었다는 점이었다. 유황 연기가 심해 누구도 오려 하지 않는 곳에 누군가가 왔다 간 것이다.
아니, 그는 오기는 했으되 가지는 못했다. 상자 옆에는 노랗게 변색이 되어 얼른 눈에 띄지도 않던 사람의 유해가 여러 구 뒹굴고 있었다.
진자앙은 고개를 끄덕였다.
추측은 간단했다. 유황이 담겨 있는 상자, 그 옆에 뒹구는 여러 구의 시체. 아마도 이들은 유황을 구하러 이곳에 왔다가 상상보다 훨씬 지독한 연기에 질식되어 죽어 버린 모양이었다.
그는 소삼중에게서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유황을 캐는 광산에서는 이렇게 죽는 일이 드물지 않다는 것이었다.
갑작스런 연기의 분출 때문에, 혹은 그 열기 때문에, 그리고 대부분은 너무 오래 유황에 가까이 있느라고 안에서부터 중독이 되어 죽어 버린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 시간은 오래라고는 하지만 사나흘이면 충분하다고도 했다.
진자앙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유황이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목숨까지 잃어 가며 캐낼 가치가 있는 것일까?
그는 다시 한 번 하늘을 보았다 해는 점점 더 하늘 중심을 향해 가고
있었다.
“아…… 늦었는데!”
그래도 사람의 유해를 보고 어찌 그냥 갈 것인가. 그는 혀를 차며 옷을 벗어서는 거기에 유해들을 주섬주섬 모아 담기 시작했다.
그때 또 다른 물건이 나왔다. 불꽃을 연상케 하는 무늬가 빽빽히 새겨진 작은 창같이 생긴 물건이었다.
한 자가 조금 못 되는 길이에 앞뒤로 창날이 달려 있고`─`사실은 일반적인 창날처럼 납작하지가 않고 팔각형으로 둥그스름해서 창날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웠지만`─`그 양쪽 창날을 중간에 자리한 손잡이와 구분지어 주는 둥글둥글한 테가 있었다. 테에는 뿌옇게 흐려져 있기는 하지만 구슬 같은 것이 박혀 있어서 장식품 같기도 하고 무기 같기도 한데 어떤 종류에 속하는 것인지를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손잡이 한쪽에 작은 글씨로 무언가가 쓰여져 있었다. 그것을 그는 읽을 수가 없었다. 처음 보는 문자였다.
하지만 그 글자는 다른 것에도 생각이 미치게 했다. 진자앙은 상자의 옆에 쌓인 돌들을 치우고 살펴보았다. 돌들 틈에 묻혀 있던 부분은 밖에 드러나 있는 부분보다는 훨씬 부식이 덜해서 혹시 글자라도 새겨져 있으면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과연 그런 것이 있었다.
“산…… 서……, 벽력…… 당!”
그제서야 모든 것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났다.
유황은 도가의 약으로 쓰이는 것보다는 훨씬 대중적인 용도에 더 많이 쓰인다. 바로 화약을 만드는 재료인 것이다.
산서 벽력당은 화기(火器)의 제조로 천하에 이름 높은 곳, 그들이 유황을 필요로 했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럼 이것도 벽력당의 것이겠군!”
진자앙은 양쪽으로 날이 달린 그 묘한 물건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장난감처럼 보여 어딘지 호감이 가는 물건이었다.
“나중에 그 사람들을 만나면 돌려줘야겠다!”
그는 그것과 구슬들을 바지춤의 주머니에 넣고, 옷가지에 계속 유골들을 담았다.
양지 바른 곳에 묻어 줄 생각이었다.
4
진흙탕 속에서 반나절을 뛰고 뒹굴다가 뜨거운 온천물에 몸을 담그면 어떤 기분이 될까?
지금 진자앙의 상태가 그러했다.
태울 듯이 뜨거운 열기와 숨을 막히게 하는 매캐한 냄새는 금세 잊혀져 버렸다.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온몸의 무게감이 사라지고, 지친 육신을 부드럽게 만져 주는 물의 찰랑임 속에서 뼈마디 하나하나가 산산이 흩어졌다가 다시 재구성되는 듯한 느낌.
체내의 온갖 혼탁한 기운들이 녹아 내려 땀구멍으로 배출되고, 머릿속에 가득했던 잡다한 생각들이 또 그것을 따라 씻겨져 가는 듯한 청량한 기분 속에서 진자앙은 자신을 잃고 무아지경에 빠져 들어갔다.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진흙 범벅인 채로 집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가는 길에 온천에 들러 잠깐 씻고 가려고 한 것인데, 일이 한번 꼬이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가 없게 되는 경우가 있다.
오늘 진자앙이 그런 모양이었다.
한참 무아지경에 빠져 있는데 무언가가 나타났다. 아니, 나타난 것 같았다.
진자앙이 눈을 떴을 때, 온천 옆에는 대여섯 명이나 되는 여자들이 그를 손짓하며 깔깔거리고 있었다.
“어머, 눈떴어! 눈떴어!”
“아유, 난 하도 모른 척하기에 도 닦는 중인 줄 알았다, 얘.”
“귀머거리거나?”
“저 놀라는 것 좀 봐, 어머, 귀여워라!”
진자앙은 처음엔 산짐승들만 출몰하는 이 외진 곳에 여자들이, 그것도 한둘도 아니고 떼거지로 몰려 있어 놀라고, 그 다음엔 그 말하는 것들이 워낙 거침이 없어 더욱 놀랐다. 젊은 남자가 목욕하는 것을 알고서도 여자가 어찌 그 옆에서 알짱거린단 말인가. 물소리만 들어도 멀찌감치 피해 가야 정상이 아닐까.
그런데 이 여자들의 말을 들어 보면 이미 한참 동안 그를 보며 수군덕거리고 있었다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이젠 눈을 뜨니 희롱까지 하려고 드는 것 같았다.
한 여인이 손을 온천물에 담그며 물었다.
“물은 따듯한가요?”
옆에 섰던 여인은 그녀보다 한술 더 떠서 진자앙이 보는 앞에서 신발을 벗더니 하얀 비단버선까지 까 내리면서 요염한`─`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보일 거라고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이, 피곤해. 이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면 피로가 그냥 확 풀리겠지?”
진자앙은 그 순간 뜨거운 물속에 앉아 있는데도 등골로 소름이 쫙 끼쳤다. 여인의 억지로 꾸민 간지러운 목소리가 마치 맨손으로 척추를 훑고 지나가는 것처럼 끔찍하게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진짜 소름 끼치는 일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버선을 벗은 여인이 하얀 다리를 온천에 담갔다. 그러면서도 엉덩이는 여전히 온천 가의 바위에 얹어 놓고 있으니 물에 젖지 않으려면 치마를 걷어 올리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었다. 엉덩이는 높이 있고, 다리는 발끝만 물에 찰랑거릴 정도로 담갔으며 치마는 걷어 올려져 있다.
그런 상태에서 진자앙의 머리는 수면에 턱만 내밀어져 있으니 여인의 허벅지 사이가 보이지 않으면 그것도 이상한 일일 것이다.
진자앙은 눈을 질끈 감았다.
“어머, 정말 순진한 총각이네?”
“저 얼굴 붉어진 것 좀 봐!”
“여란 사저가 너무 거칠게 다뤄서 그런가 봐요. 숫총각은 조금씩 이끌어야지 그렇게 당기면 도망간다구요, 호호호!”
“까르르르……!”
여인들의 웃음 소리가 귓전에 메아리쳤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진자앙은 어떻게 여길 빠져 나가나 고민하며 여인들의 희롱을 귓전으로 받아넘겼다. 그러다가 그는 한 생각이 떠올라 슬그머니 눈을 떴다.
여인들의 웃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눈떴네?”
“다시 보고 싶은 게지?”
“여란 사저, 좋은 구경 계속 시켜 주셔야죠?”
“호호호호!”
‘여란이라고……?’
진자앙은 여란이라 불린 여인을 보았다. 그의 앞에서 다리를 보여 주고 있는 여인이었다.
이름은 처음 듣는 것이지만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얼굴, 진자앙은 그것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흐흥!”
여란은 재미있다는 듯, 혹은 만족스럽다는 듯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용모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여인이었으니, 오늘 우연히 길가에서 만난 떠꺼머리총각이라도, 자신에게 넘어왔다고 생각하면 즐거워지는 것이다.
즐거우니 과한 행동도 나오는 것일 게다. 그녀는 갑자기 치마를 활짝 들어올렸다가 내렸다. 물론 진자앙의 정면에, 그러나 너무 찰나지간에 한 행동이라 그대로 다 드러나지는 않을 것이라 계산하고 한 행동이었다.
진자앙의 눈이 퉁방울처럼 커졌다. 그의 입에서 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믿을 수가 없군!”
여인들의 웃음이 다시 터져 나왔다.
“사저, 그러게 총각을 너무 거칠게 다루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저 눈 튀어나온 것 좀 봐.”
“아니!”
진자앙은 고개를 저었다.
“당신들 하는 짓이 하도 파렴치해서 하는 말이오! 얼굴을 들고 어떻게 그런 짓들을 할 수가 있지?”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쿡`─`!”
한 여인이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다가 황급히 입을 막고 눈치를 살폈다. 여란이 도끼눈을 뜨고 그녀를 위아래로 쓸어보고 있었다. 웃음을 터뜨린 여인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했다.
그사이에 진자앙은 자신의 기억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여란이라 불린 여인이 그가 알던 그 여인임을 떠올린 것이다.
구 년 전 그날, 염정과 함께 쫓길 때 뒤를 쫓아왔던 두 여도사 중의하나.
“복장이 달라서 못 알아봤군!”
여란이 그 소리를 들은 것처럼 그를 돌아보았다.
“무슨 소리지? 언제 날 보기라도 했다는 거냐?”
괜히 웃는 바람에 그녀에게 찍혔다고 생각한 여인이 얼른 말을 보태었다.
“그러고 보니…… 네놈은 그 늙은이랑 한패냐? 우릴 기다린 것 아니냐?”
그러고는 여란을 향해 돌아서서 열심히 자기 주장을 설명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 깊은 산중에서 저러고 있겠어요? 괜히 시비를
걸고……! 수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그 말에 동조를 하는지 여인들이 심상찮은 기색으로 온천 가에 다가들었다. 여차하면 뛰어들기라도 하겠다는 기세였다.
진자앙은 기가 막혔다.
이 깊은 산중에 그럼 자기들은 왜 왔는가. 시비를 걸긴 누가 걸었단 말인가. 남 목욕하는 데 와서 훌렁훌렁 치마 까뒤집어 가며 희롱한 사람들이 누군데 이제 와서 시비를 걸었다고 하는 것인가.
잘잘못은 둘째 치고, 일이 적지 않게 귀찮아질 것 같자, 진자앙은 빨리 자리를 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억지스럽고, 방자한 여인네들과 시비를 가리려 하면 그 자신이 오히려 바보가 될 것 같아서였다.
그는 물속으로 잠수해 버렸다.
온천은 넓지는 않지만 꽤 깊고, 바위가 많아 바닥에는 굴곡도 제법 있었다. 몸을 숨길 곳은 많았다.
문제는 여자들이 갈 때까지 물속에서 고개를 내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가능할 것 같았다. 아까 같은 진흙탕 속이 아니니 한 두 시진 정도 숨을 멈추고 있는 것은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움직여야 한다면 호흡을 하지 않고 버티는 시간이 그보다는 훨씬 짧겠지만 그냥 물속에서 참고만 있는다면 대충 그 정도는 견딜 수 있으리라.
저 여자들이 할 일이 없다면 모르지만, 아니, 할 일이 있어도 지나가다 우연히 시비 걸린 사람을 잡겠노라고 하루 종일 온천 가에서는 버티지 않으리라는 것이 그의 계산이었다.
‘늙은이라고 했던가?’
물속에 들어오니 다시 긴장이 풀리는 것이 창졸간에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녀들은 누군가를 피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그녀들이말한 대로라면 ‘늙은이’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녀들이 있던 주위에 짐 보따리 같은 것도 있었던 것 같았다.
‘누군가를 피해 달아나고 있는 걸까?’
그러거나 말거나 그가 알 바는 아니었다. 그는 그녀들이 갈 때까지 피하고만 있으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그러고 있다 보니 문득 과거의 그때와 상황은 다르지만 공통되는 점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의 그때.
‘염정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염정을 생각했다.
그녀와는 그 이후 다시 만난 적이 없었다. 그날 헤어지면서 혹시 갈곳이 없으면 진가장으로 가라고 했었는데, 집에는 간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가 금강당에 입문한 이후 집에서 전갈을 가지고 온 진 노육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진자앙은 구 년 동안 단 한번도 집에 가지 않았다. 여섯째 누나 소남 과 막내 누나 소보가 시집간다는 소식이 왔을 때도 가보지 못했다.
어렸을 때는 멀게 느껴졌지만 사실 종화와 불산이 그리 먼 곳은 아니다. 그런데도 못 간 것은 소삼중의 지시 때문이었다. 무공수련 이외의 모든 것에 대한 관심을 끊으라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가끔 집과 주고 받는 전갈도 줄여야 했었다.
어쨌든 염정은 집에 간 적이 없었고, 그 후로는 전혀 소식을 알 길이 없었다. 궁금했지만 찾을 방법도, 시간도 없으니 그저 세월만 흘러갈 뿐이었다.
진자앙은 그 생각을 하곤 잠시 우울해졌다. 그런데 그를 더욱 우울하게 만드는 일이 벌어졌다.
여자들이 그가 상상도 못했던 방법으로 위협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을 통해 밖에서 소리치는 것이 어렴풋이 들려왔다.
“나와!”
“안 나오면, 이 옷 가지고 가버린다!”
진자앙은 흠칫했다. 여태 옷 생각을 않았다.
온천에 들어올 땐 당연히 옷을 안 입고 들어온다. 사실은 진흙탕에 뒹구느라고 더러워진 옷을, 옷이라기보단 짐승가죽이지만, 물에 헹궈서 나뭇가지에 널어 두었었는데 여자들이 찾아 낸 모양이었다.
가져가면 다시 곰가죽 같은 걸로 만들면 그만이지만 당장 내려갈 때
벌거벗고 가야 했다.
‘아 참! 물건들은?’
아까 화룡동에서 주운 구슬들과 작은 창은 근처 바위틈에 두었는데
저 여인들이 그걸 발견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밖에서는 한참 시끄러웠다.
“옷 같은 건 없어도 되는 모양이지?”
“우린 바쁜 사람들이야. 셋 셀 때까지 안 나오면 가져 가 버리겠어!”
“언니, 냄새나는 걸 가져 가긴 뭘 가져 가요. 그냥 태워 버려요.”
“좋아, 하나!”
“둘!”
진자앙은 다급해졌다. 하는 짓으로 보아 못 하는 일이 없이 막 나가는 여인네들인 줄 뻔히 아는데 단순한 위협이라곤 생각하기 어려웠다.
“세…… 엣! 좋아, 태워 버려!”
“잠깐!”
진자앙은 너무 다급한 김에 물에서 채 머리를 다 내밀기도 전에 입을 벌려 물까지 마셔야 했다. 그리고 그 물을 토해 내느라고 자신도 모르
게 벌떡 일어서 버렸다.
물 밖으로 그의 건장한 상체가 다 드러났다.
“어머……!”
여인들이 창졸간에도 사내의 나신을 보고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꼬았다. 그러나 이런 일에 이력이 난 여인들이 그녀들, 곧 그를 가리키며 수군거렸다.
“얼굴은 어린데 몸은 아니네?”
“그러게, 꼭 짐승처럼 크다……!”
“뭐가? 너 짐승 그건 봤니?”
“어머, 누가 그거래? 그냥 근육이 울퉁불퉁한 것이 짐승 같다는 건데……!”
그냥 놔두면 무슨 말이 더 나올지 몰랐다.
진자앙은 얼른 쪼그려앉으며 손을 내밀었다.
“객쩍은 소리 말고 옷이나 두고 빨리 가시오! 난 시비 건 적도 없고, 당신들이 말하는 늙은이도 모르오!”
여란이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손에 진자앙의 옷이 들려 있었다.
“이제야 제대로 사람 같은 소릴 하는구나! 근데 사람이면 왜 이 산중에서 그러고 있지?”
“소생은, 음…… 나는 여기 와서 목욕을 하는 것이 매일의 습관이요. 나야말로 당신들이 여우 요정이 아니면 왜 이 깊은 산속에 왔는지 모르겠소이다. 사내의 옷을 가지고 장난이나 하려 들고……!”
“장난? 이게 장난으로 보여?”
여란은 옷을 들었다. 그녀의 옆에 선 여인이 짐짓 화섭자를 가져다가 옷 아래에 대었다. 불도 안 붙은 화섭자를 댄다고 옷이 타기야 하겠느냐마는 진자앙에게는 위협이 되었던지 다시 벌떡 일어나다가 자신의 실태를 깨닫고는 얼른 주저앉았다.
여인들이 그게 우스워 깔깔거렸다.
“사내가 옷 없다고 뭐가 부끄러워서……!”
“이봐요, 원래 사내와 여인네 만날 때는 옷 같은 건 필요가 없다네!”
“일단 나와 봐. 왜 필요없는지 알게 해줄게!”
분분히 희롱조로 한마디씩 던지는데 진자앙은 얼굴만 붉힐 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도대체 이 여자 같지도 않은 괴물들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
그때 구세주가 나타났다. 바위 틈 사이로 중년의 여도사와 젊은 여인 하나, 그리고 몇 명의 사내가 나타난 것이다.
여도사는 시선 한번으로 사태를 파악하고는 일갈했다.
“요 잡년들이 그새 사내를 물어서 노닥거리고 있어! 뒤질년들 같으니! 내가 뭐라고 했느냐? 언제 그 늙은이가 나타날지 모르니 경계하고 있으랬잖으냐!”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냐?
여란이 변명조로 몇 마디 하려 하는 것도 막아 버리고 여도사는 손에 든 불진으로 진자앙을 가리켰다.
“웬 놈인데 알몸으로 여인네들을 희롱하고 있는 게야! 썩 꺼져 버렷!”
다시 한 번 치한이 되어 버린 진자앙은 어이가 없었지만 가라고 하는 것만으로도 고마워서 여란이 들고 있는 옷을 가리켰다.
“옷을 줘야 갈 것 아니오!”
기회를 놓칠세라 여란이 나섰다.
“그 늙은이의 동료인 것 같아서 잡아 두고 있던 참이었……!”
“닥쳐라, 요년아! 옷도 빼앗겨서 벌벌거리고 있는 것이 무슨 동료 하수인이야! 어디 무지랭이 나무꾼이나 사냥꾼쯤 되는 거겠지! 얼른 주고 가자!”
“하지만……!”
할 말이 없게 된 여란이 우물거리며 옷을 내미는 것을 사내 하나가 막았다.
“잠깐만!”
그는 이십대 정도의 제법 영준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의 사내로 귀 옆에는 구레나룻까지 길러 멋을 부렸는데 사내들 중에서는 지휘자급인 것을 옷차림으로 알 수 있었다. 다들 무명옷인데 혼자 비단옷을 차려 입고 있었다.
“그의 동료건 아니면 나무꾼이건 간에 이왕 우릴 봤으니 그냥 둘 수는 없지요.”
“그럼……?”
사내는 여도사를 향해 교활한 눈을 깜빡여 보였다.
“벌인 일은 깨끗이 마무리하라는 게 우리 등천비룡문(騰天飛龍門)의제일 원칙이지요. 이런 경우 우리는 이렇게 처리합니다.”
그러면서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여도사, 칠선관의 삼선녀인 미선고(味仙姑) 여영영(呂瑛瑛)은 지금 구레나룻의 사내가 뭔가 꾸미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었다. 그의 말대로 마무리가 깨끗한 것도 좋지만 그런 일로 피까지 볼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그리고 그녀가 알기로는 이 사내, 등천비룡문의 팔향주(八香主)인 옥면교(玉面蛟) 가휘섭(賈輝葉)도 그렇게 피를 즐기는 사내는 아니었다.
그녀는 얼른 장단을 맞추었다.
“향주의 말이 옳아 보이는군요. 하지만 우릴 봤다고 그냥 죽이는 것 도 가련한 일 아닙니까?”
“가련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가휘섭은 진자앙에게 들리도록 일부러 소리를 크게 하며 허리춤에 찬 검을 잡아 갔다. 그의 눈에서는 금세 차가운 살기가 서리서리 뻗어나 왔다.
진자앙은 기가 막혀 아무 말도 않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아무리 눈치가 없다지만 지금 이 사람들이 그를 어르고 뺨치려 하고있다는 걸 모를 정도로 눈치가 없진 않았다. 그를 정말 완벽하게 무지랭이 촌놈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이런 식으로 위협하려 들진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겁날 것도, 당황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진자앙이 곤란해 하는 것은 단 하나, 어떻게 옷을 돌려받나 하는 것뿐이었다.
그 모습을 위협이 먹혀든 것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가휘섭은 검을 반쯤 뽑다 말고 혀를 찼다.
“그래, 자네가 무슨 죄가 있겠나? 공연한 목숨을 해치는 것도 하늘의 호생지덕(好生之德)에 크게 벗어나는 일이겠지.”
그는 한 발 다가서서 짐짓 다정하게 말했다.
“들어서 알겠지만 우린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다네. 뭐, 그리 무서운 상대도 아니고, 별로 쫓겨 다닐 이유도 없지만 사실 약간의 오해 때문에 다투기 싫어 피하고 있는 것이지.”
여란이 그때 끼어들었다.
“이사하느라 바빠서 다른 선녀 분들이 없지만 않았으면, 그냥 혼을 내주는 것인데……!”
“그래서 말이지만……”
가휘섭은 쓸데없는 말을 하는 것을 책망하는 듯 눈총을 한번 줘서 여란의 입을 막아 두고 자기들이 왔던 방향을 가리켰다.
“아마 한 시진 이내에 저쪽 방향에서 늙은이 하나가 올 걸세. 우리가 중간에 조금 장난을 쳐놨기 때문에 그 정도 시간은 벌 수 있단 말이지. 그러니 그 늙은이가 오면 자네가 그를 따돌려 주면 좋겠다, 이걸세.”
진자앙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가 그들의 말에 따를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나 가휘섭은 그것도 자기 마음대로 해석했다.
“왜? 어려울 것 같나? 하나도 어렵지 않네. 우리가 이리로 가면…
…!”
그는 온천의 옆을 통과해서 향로봉 정상을 피해 뒤로 넘어가는 길을 가리켰다.
“그냥 이리로 갔다고 말하면 되는 걸세. 아주 쉽지?”
진자앙은 잠시 멍청해졌다. 그냥 간 곳을 제대로 알려 주면 된다는 얘기 아닌가. 그럼 굳이 그가 말해 줄 필요는 뭐가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가휘섭은 계속 말했다.
“자네에게 설명해 줘봤자 잘 모르겠지만 그 늙은이는 강호에서도 자기가 제일 똑똑하다고 자처하는 정신나간 늙은이란 말일세. 그러니 자네가 이쪽 길을 가리키면서 ‘그들이 이리로 갔습니다’ 그러면 그는 의심을 하고 오히려 다른 쪽 길로 갈 거란 말이지.”
가휘섭은 산봉우리로 바로 넘어가는 길을 가리켰다.
“물론 우린 중간에 또 다른 길로 가겠지만 그건 자네가 알 필요가 없는 것이고……, 하여간 그 늙은이가 산봉우리로 올라갔다 내려왔다 하 면서 정신을 못 차리는 동안 우린 멀리 피한다 이거지. 어떤가? 푸하하하!”
그는 자기 계략이 자기 생각에도 마음에 드는지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고는 진자앙을 보았다.
“해주겠지?”
진자앙은 묵묵히 그를 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옷이나 주시오!”
기대했던 대답이 나오지 않자 가휘섭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여란이 앙칼지게 소리를 질렀다.
“살려 주겠다는데 이게 무슨 뻣뻣한 태도냐! 건방진 것!”
“아니, 아니!”
가휘섭이 여란을 막았다.
“자넨 잘 이해를 못하는 모양인데 이게 다 호생지덕을 지키자고 하는 일일세. 호생지덕, 하늘은 살아 있는 생명을 좋아한단 말이지. 사실 우리가 자네 하나 죽이자면 닭 모가지 하나 비트는 것처럼 간단한 일이네만 그러기에는 안돼 보여서 이러고 있는 것 아니냔 말일세.”
“그 바보같은 녀석에겐 그런 말이 필요없어요. 제가 한번 해보지요.”
여란이 다시 나섰다.
“빨리 끝내자!”
미선고 여영영이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그녀와 같이 온 여인, 사실 그 녀는 지란이었지만, 그녀가 비수를 꺼내 들었다.
“그냥 죽여 버리면 깨끗할 일을……!”
“아니, 좋은 방법이 있단 말야!”
여란은 지란을 타박 주고는 진자앙을 향해 옷을 들고 흔들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이 무지랭이를 다루어서 말을 듣게 함으로써 가휘섭의 눈에 들고 싶어했다.
“말을 들어야 옷을 주지. 빨리 옷 받아서 가고 싶지 않아?”
어린애에게나 할 위협이지만 위협을 했던 당사자도 놀랄 정도로 효과 가 바로 나왔다.
진자앙은 옷 이야기를 하자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으니 주시오!”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 ‘늙은이’가 이들의 계략에 속아 넘어가도 그의 책임은 아닐 것이라 생각하니 빨리 승낙하고는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게다가 이맘때면 사부가 깨어날 즈음이었다.
‘얼른 내려가서 밥을 차려 드려야 하는데……!’
이들이 문제가 아니라 요즘 들어 소삼중이 거의 식사를 않고 있다는 것이 더 걱정스러운 진자앙이었다. 여기서 아웅다웅하고 있을 시간이 어디 있는가.
여란이 눈을 빛내었다. 그것 보라는 표정이었다.
“좋아, 남아일언(男兒一言)은?”
“그런 말은 어려워서 모르겠지만 하여튼 약속은 지키지요.”
진자앙은 바보로 보는 바에야 아주 바보처럼 보여도 상관없다는 심산에서 한 말이었지만 그 말 자체가 남아일언중천금(男兒一言重千金)이 라는 말을 모르고는 할 수 없는 말이니 약간 안 맞아 들어가는 대꾸였다.
그러나 여란은 대충 넘어가 버렸다.
“어쨌든 좋아, 약속은 지킨다니 됐네. 삼선녀님, 어떻습니까?”
말은 여영영에게 하는 것 같지만 보기는 가휘섭을 보며 하는 말이었다. 대답도 가휘섭이 했다.
“그런대로 됐군. 네가 이런 사람을 다스리는 덴 나보다 낫구나!”
여란은 교태로운 미소를 지었다.
“별말씀을……!”
“그만 가자!”
여영영은 짜증스럽게 소리치곤 앞장서서 길을 떠났다. 나머지 사람들이 분분히 짐을 챙겨 들고 뒤를 따르는데 가휘섭은 뭔가 석연치 않은 듯 진자앙을 몇 번이고 돌아보며 갔다.
한참을 간 뒤에 그는 불쑥 소리 질렀다.
“그래, 그놈 무공을 익힌 놈이야!”
여영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죠?”
“그놈 몸에 붙은 근육이 나무꾼이나 사냥꾼 노릇을 한다고 그렇게 될 리가 없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소.”
“무공을 익혀도 그렇게 무식하게 근육이 나오진 않잖아요?”
“아니, 아니오!”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왜 진작 그걸 깨닫지 못했는지 아쉽다는 표정이었다.
“무식하게도 근육이 많이 나와서 미처 몰랐는데, 놈은 적어도 상당기간 동안 외공을 익힌 놈일 거요. 전에 산서(山西)의 유철두(劉鐵頭)를 본 적이 있는데 그가 그런 체격을 가졌었지요. 듣기로는 소림외가(少林外家)의 외공을 익혀서 그렇다더군요.”
“산서의 유철두라면 패권(覇拳) 유철(劉鐵)이잖아요. 산서제일권(山西第一拳)이라는 그가 저렇게 무식한 근육을 가졌단 말이에요? 저런 근육은 보기만 좋지, 사실 제대로 권법을 하는 사람에겐 불필요한 것 아닌가요?”
“물론 그렇소. 유철두의 경우에는 제대로 권법을 배우기 전에 외공부터 익혀서 그렇게 되었다고 하긴 하는데……, 하여간 지금 중요한 건 아까 그 녀석도 외공을 익혔다는 거지요.
지란이 돌아섰다.
“가서 죽이고 올까요?”
“그만두시오!”
가휘섭이 손을 저었다.
“외공이야 아무리 익혀 봤자 별것 아니니 죽이기 어려울 건 없지만 아쉽게도 시간이 없소. 그리고 외공 따위를 익힌 자들은 대개 머리가 단단해지기 마련이니……!”
그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혼자 웃었다.
“유철두도 왜 이름 뒤에 머리 두(頭) 자가 붙었겠소? 산서 사람들은 그를 산서제일권이라는 이름보다는 산서제일우(山西第一愚)라고 부르기를 더 즐겨 하지.”
머리가 좋은 사람들은 자기 외에 다른 사람들은 대개 머리가 나쁘거나, 적어도 자기보다는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습성이 있다. 가휘섭도 그래서 지금 신분은 겨우 향주에 불과하지만 머리 굴리는 것으로는 문중(門中)에서 자기를 따를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던 사람이었다.
그가 보기엔 체구가 크다는 것도 바보스러운데 외공까지 익혔으니 오죽 멍청할 것이냐, 라고 진자앙을 가볍게 보아 넘겨 버렸던 것이다.
그것이 실패의 원인이었다.
물론 오늘 그가 실제로 진자앙을 죽이려고 했다 하더라도 과연 성공했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최소한 나중에 다시 만났을 때처럼 힘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처음엔 별것 아닌 줄 알고 지나친 이 일이 나중엔 그의 가장 큰 실수였음이 드러나고 말았던 것이다. 그에게도, 그리고 그가 속한 방파에도.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