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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장 세례인 요한의 순교와 오병이어 및 물위를 걸으신 이적 등
구속사적 개관
제 14-17장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한지로는 약 2년이 흘렀고 십자가 수난을 당하기까지는 아직 1년이 남았던 A.D. 29년 초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이 무렵에는 예수의 공생애 사역이 상당히 진행되었으나 전 우주의 구속주(救贖主)요 메시야로 오신 예수의 구속 사역을 다만 편협한 유대인의 입장에서 정치적으로만 곡해(曲解)한 무지한 민중이나 제자들은 예수를 정치적 해방자로 추앙하고' 정치 종교적 기득권자들은 정적(政敵)으로 무조건 배척하는 양상이 점점 심화되어 가고 있었다.
본장은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 일련의 몇 사건을 보도하고 있다. 먼저 1-12절은 공생애 사역을 수행하신 이 당시의 예수에 대한 헤롯 안디바의 오해와 그 원인을 소개하는 형식으로 예수의 선구자였던 세례 요한(John the Baptist)이 헤롯 안디바의 손에 순교 당했던 사건을 보도한다. 그리하여 세례 요한의 순교 사건 자체를 보도하는 동시에 이 당시 사람들의 예수에 대한 평가의 일단을 보여 주고 있다. 다음 13-33절은 서로 연속되는 사건으로 일어난 두 기적인 오병 이어의 기적과 물위를 걸으신 이적을 보도한다. 그리고 끝으로 34-36절은 예수께서는 이런 세례 요한의 죽음과 오병이어의 기적 같은 대사건 뒤에도 묵묵히 자신의 사역을 계속하셨음을 짧게 보도한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에 의하여 파송된 예수의 선구자였다. 그는 회개의 물세례를 베풀고 메시야 예수의 오심을 미리 전하여 예수의 오심을 준비하였었다. 즉 그는 사역과 선포를 통해서 예수의 선구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했다. 뿐만 아니라 이미 그의 이적적 탄생(눅 1:5-25,57-66), 그의 생활(마 3:1-4)을 통해서도 예수의 탄생과 삶을 예표함으로써 예수의 선구자의 역할을 하였다. 그런 그가 이제 하나님의 정의를 선포하다가 죽었듯이 예수께서도 복음의 진리와 정의를 전하다가 죽으실 것을 예표함으로써 결국 그는 죽음을 통해서도 예수의 선구자가 되었던 것이다.
나아가 이런 예수의 선구자인 세례 요한의 죽음은 더욱 오묘한 교훈도 함축하고 있다. 이미 예수에 의해서도 선포된바(마 11:7-15)와 마찬가지로 세례 요한은 신약의 시발점(始發點)이신 예수의 선구자로서 그 자신은 구약을 마감한 인물이었다. 이런 그가 예수의 죽음을 예표하는 순교를 당하였으나 세례 요한은 결코 자신의 죽음으로 다른 죄인을 구속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예수는 당신의 죽으심으로 모든 택한 죄인의 죄를 구속하시고 그들에게 영생을 주셨다. 이는 결국 구약(舊約)은 그 자체가 독립된 것이 아니며 그 자체로서는 생명의 구원을 줄 수 없고 모두 예수님의 새 언약과 연결된 것이며 또 오직 신약(新約)과 연결될 때에만 예수님의 구속의 효력을 소급 적용 받을 수 있는 것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준다. 따라서 구약 시대의 선민들도 동물 희생 제사를 드린 사실 자체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구속받은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그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와 예표와 그 성취의 관계로서 연결되어 예수 구속의 효력이 소급 적용되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우리는 다시 한 번 그 누구가 아니라 오직 예수 안에서만 구속과 그 결과인 영생(永生)을 얻을 수 있음을 깨닫는다. 또한 세례 요한의 순교 사건은 이 땅에서는 사탄의 앞잡이인 헤롯 등이 한 계집의 춤 값에 불과한 명분으로조차 선지자의 목을 벨 수 있으나 결코 하나님의 구속의 진리를 영원히 억누를 수는 없으며, 훗날 하나님 안에서 구속의 진리에 따라 하나님의 택한 자들이 영원한 승리를 얻을 것이라는 구속사의 현실과 미래를 새삼 바라보게 해준다.
13-33절의 연속된 오병 이어의 이적과 물위를 걸으신 두 이적 모두에는 모든 주의 이적이 전반적으로 갖는 교훈 즉 예수께서 메시야, 우리의 구속주(救贖主)로서 절대적 주권과 능력을 가지신 동시에 이를 뜨거운 사랑으로 택한 자의 구원을 위하여 사용하고 계신다는 일반적 교훈과 함께 특히 다음의 구속사적 교훈을 전해준다. 먼저 구속주이신 예수는 그 구속의 대상인 우리의 연약함과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시며 이를 찾아가 채워 주는 것까지를 원하시고 계심을 깨닫게 해준다. 그리고 이럴 때 필요한 것은 구속주이신 주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헌신임을 깨닫게 한다. 둘째' 예수는 영원한 생명과 우주의 창조자 그 자체이시므로 주안에 있으면 여러 가지 부분적 축복이 아니라 궁극적인 영원한 생명과 천국을 무궁히 그리고 끝없이 얻을 것을 보여 준다.
끝으로 34-36절은 주께서 오병이어의 이적 같은 큰 이적 이후에도 조금도 흔들림 없이 계속하여 일상적인 선포와 치유사역도 계속하였음을 보도하는 게네사렛에서의 사역 기사이다. 앞서 설명한대로 무지한 백성이나 사회 지도자들이나 다 당신의 사역을 편협한 유대인의 입장에서 정치적으로만 곡해하는 상황에서 나아가 당신의 선구자인 세례 요한마저 순교당하는 혼란의 소용돌이에서도, 예수님은 오병이어 이적 같은 큰 사건을 행하셨고 또 말씀의 선포와 치유 사역을 계속함으로써 추호도 흔들림 없이 구속주로서의 공생애 사역을 묵묵히 실천해 가셨음을 보여준다. 이는 택한 자를 구원하고자 성부 하나님에 의하여 작정된 구속사역을 성자 예수께서 수행하시면서 실로 뜻과 마음과 정성을 바쳐서 절대적 신념과 헌신으로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온전히 수행하셨음을 보여 준다. 이는 결국 이런 주님의 사역으로 구속된 우리도 주님과 하나님께 오직 한 뜻과 한 정성으로 헌신하여야 할 이유를 보여 주고 있다(마 22:37).
외울 말씀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마 14:30,31)
예수에 대한 헤롯의 반응
1 그 때에 분봉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2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라 저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권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는도다 하더라
세례 요한의 순교 기사
3 전에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으니
4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당신이 그 여자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5 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하되 민중이 저를 선지자로 여기므로 민중을 두려워하더니
6 마침 헤롯의 생일을 당하여 헤로디아의 딸이 연석 가운데서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하니
7 헤롯이 맹세로 그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 허락하거늘
8 그가 제 어미의 시킴을 듣고 가로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여기서 내게 주소서 하니
9 왕이 근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을 인하여 주라 명하고
10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옥에서 목 베어
11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 그 여아에게 주니 그가 제 어미에게 가져가니라
12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께 고하니라
오병이어의 이적
13 ○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좇아간지라
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
15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이 곳은 빈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16 예수께서 가라사대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17 제자들이 가로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
18 가라사대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19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20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21 먹은 사람은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주께서 물 위를 걸으시다
22 ○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24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26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27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28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32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예수께서 게네사렛 방문
34 ○ 저희가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니
35 그 곳 사람들이 예수신 줄을 알고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모든 병든 자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36 다만 예수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
본문 & 자료노트
도표 14:1-12 헤롯과 헤로디아의 5가지 악행
1. 불의에 대해 용기 있게 충고한 의인을 박해, 죽이기까지 함(3-5,10절)
2. 하나님께서 정하신 신성한 결혼의 원칙을 깨뜨림(4절)
3. 자녀를 올바로 양육치 않고 오히려 악행의 도구로 사용함(6-8절)
4. 경솔하고 즉흥적인 맹세를 함(7절)
5. 체면을 위해 양심에 가책되는 일도 서슴지 않음(9절)
인물연구-14:1-11 헤롯 안디바
본장 연구 자료 참조.
주요 주제-14:1,2 예수의 선구자 세례 요한
눅 3장 연구 자료 참조.
삽화-14:17 유대인들의 보리떡
유대인들의 주식(主食)인 떡은 얇고 평평한 팬케잌 같은 모양이었다. 떡에는 밀로 만든 것과 보리로 만든 것이 있는데' 밀로 만든 떡이 더 좋은 것이었다. 한편 예수의 오병이어 기적시 한 아이가 갖고 있던 떡은 보리떡이었다(요 6:9).
지도-14:13-36 오병이어 이적 직후의 예수 행적
보감-14:22,23 예수의 기도 생활의 특징
1. 제자들에게 친히 모범을 보이시며 기도하심(마 6:5-15)
2. 당신의 사역을 감당할 자들을 세우실 때 기도로 준비하심(마 9:38)
3. 육신의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으심(마 14:22,23)
4. 가르치고 병 고치는 일에 앞서 먼저 기도하심(눅 5:15,16)
5. 밤늦게까지 기도에 열중하시곤 하심(눅 6:12)
6. 이적 행함보다 기도를 더 중요시 여기심(눅 22:32)
7. 제자들과 장차 성도들을 위해 중보하심(요 17:6-26)
8. 지금도 살아계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중보기도 하심(롬 8:34)
도표-14:3-10 신약의 주요 여인 20인
인 물 특 징
1. 마리아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마 1:18)
2. 헤로디아 세례 요한의 죽음을 요구한 헤롯의 왕비(마 14:3-10)
3. 막달라 마리아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준 자(마 27:56-61; 막 16:9)
4. 살로메 사도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막 15:40,41)
5. 엘리사벳 세례 요한의 어머니(눅 1:5,7)
6. 안나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인식한 여인(눅 2:36-380
7. 요안나 수난나 예수께 물질적인 소유로 섬긴 여인(눅 8:3)
8. 마르다, 마리아 예수가 살리신 나사로의 누이들(눅 10:38-42)
9. 삽비라 초대 교회에 바칠 헌금의 일부를 감춘 자(행 5:1,2)
10. 간다게 에디오피아의 여왕(행 8:27)
11. 도르가 베드로에 의해 희생한 욥바의 성도(행 9:36-41)
12. 루디아 바울의 빌립보 사역 때 희심한 여인(행 16:14)
13. 브리스길라 고린도, 에베소에서 바울을 도와준 아굴라의 아내(행 18:2)
14. 드루실라 유대의 총독 벨릭스의 아내(행 24:24)
15. 버니게 아그립바 왕의 누이(행 25:13)
16. 뵈뵈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롬 16:1)
17. 글로에 고린도 교회 분쟁을 바울에게 알려준 자(고전 1:1)
18. 로이스 디모데의 외조모(딤후 1:5)
19. 유니게 디도메의 어머니(딤후 1:5)
20. 글라우디아 로마의 크리스찬(딤후 4:21)
도표-14:22-33 신약의 예수께 대한 위대한 신앙고백자 7인
1. 배에 있던 제자들(마 14:33)
2. 베드로(마 16:16)
3. 백부장(마 27:54)
4. 나다나엘(요 1:49)
5. 사마리아 여인(요 4:29)
6. 마르다(요 11:27)
7. 도마(요 20:28)
보감-14:13-36 예수의 7대 능력
마 8장 자료 노트 참조.
원어연구-14:30,31 의심하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디스타사스'는 '디스타조'의 부정 과거형이다. 이런 부정 과거 직설법은 때때로 방금 이루어진 마음의 상태' 또는 그 상태를 있는 그대로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데에 사용된다. 이것은 보통 현재 시상(時相)보다 더욱 생생한 효과를 나타낸다. 본문에서는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는 베드로의 순간적인 심정을 잘 드러내고 있다.
여기에서 '디스타조'의 어원을 분석해 보면, 먼저 앞부분의 '디'는 '두 번'을 뜻하는 '디스'에서 나온 것이고. 여기에 '서다' (stand) 또는 '붙잡다'라는 뜻의 동사 '히스테미'의 기본 동사인 '스타오'가 결합되었다. 그러므로 '디스타조'의 원어적 의미는 '양 쪽을 붙잡다', '이중으로 하다' 즉 '우왕좌왕하여 갈피를 못 잡다'라는 의미가 된다. 따라서 '에디스타사스'는 어느 한쪽을 견고하게 붙들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상태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의심'이란 결국 자신이 평소 신뢰하던 어떤 대상을 떠나 다른 것을 잡으려고 우왕좌왕하는 것임을 보여 준다. 그리고 본문에서 이는 베드로가 처음에는 예수님만 의지하여 물위로 걸어 가다가 풍랑이 일자 크게 당황하여 갈피를 못 잡게된 상태를 잘 묘사하고 있다. 즉 베드로는 눈앞에 불어 닥친 풍랑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예수께 대한 신뢰를 상실한 것이다. 때때로 우리들도 이런 실수를 많이 범한다. 우리의 유일한 반석이요 요새이신 그리스도 예수 위에 견고히 서지 못하고 세상의 것을 생각하고 그것을 의지하여 더 깊은 실패와 좌절의 구렁텅이로 빠져 들어갈 때가 많지 않았는가?
14:1-12 세례 요한의 순교
본장은 예수님의 왕적 권능이 계속해서 입증되고 있음을 서술하고 있는데, 분명히 마 11:2-6과 연결되어야 할 세례 요한의 순교 기사가 본문에 언급되는 이유도 예수님의 메시야적 사역에 관한 소문이 드디어 혜롯 안디바(Herod Antipas)에게까지 전해 졌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즉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이적에 관한 소문을 들은 헤롯 안디바가 이미 자신에 의해 처형된 세례 요한이 환생(還生)한 줄로 여기며 심히 두려워할 정도로, 예수님의 왕적 권능은 널리 증거되었던 것이다(1,2절; 눅 9:7-9).
한편 세례 요한이 투옥당한 원인은 헤롯 안디바의 근친상간(近親相姦)을 지적하면서 비난했기 때문이었는데, 결국 세례 요한은 헤롯의 경솔한 맹세와 헤로디아의 간계(諦計)로 말미암아 참수형(新首列)에 처해지고 말았다(3-12절). 그런데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한 선구자요, 예표로서 그의 삶 전체가 예수님의 삶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세례 요한의 투옥과 죽음은 서서히 닥쳐오고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예고해 준다.
이와 같은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① 성도들은 비록 핍박을 겪게 될지라도 세상 사람들의 죄악과 불의를 지적하면서 회개를 촉구해야 된다. 만약 죄악을 방관하고 불의에 대해 침묵한다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박해를 받지 않게 될지는 몰라도 장차 주님께로부터 엄한 책망을 받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죄악과 불의에 대항하여 적극적으로 맞서 싸우지 않는 것은 곧 그것에 동조하는 처사이기 때문이다(마 12:30).
② 향락과 방탕은 반드시 더 큰 범죄를 초래하고 만다. 헤롯 안디바가 세례 요한을 죽이게된 직접적 계기는 연회장의 들뜬 분위기와 헤로디아의 딸이 보여준 춤 때문이었다. 만약 헤롯이 좀 더 절제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면 결코 세례 요한을 참수시키는 어리석음에는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③ 성도들은 절대로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지 말아야 한다. 헤롯은 세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인정하며 보호하려는 태도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세례 요한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기꺼이 그의 말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지녔다(막 6:20). 하지만 그와 같은 자신의 태도도 불구하고 헤롯은 세례 요한을 여전히 감옥 속에 가두어 놓고 있었으며, 취중에 행하여진 경솔한 맹세를 지키기 위해 참수형을 명령하는 모순을 범했다. 예수님께 대해 호감을 느끼고 복음을 긍정적으로 대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다(마 10:37,38; 눅 9:57-62).
14:1 그 때에. - 이 표현은 어떤 구체적인 시간을 가리킨다기보다는 마태가 어떤 주제를 전개하기 위해 사용하는 관용적 표현으로 막연한 시기를 가리킨다(마 13:1 주석 참조). 그러나 여기서는 '그 때'를 추정해 볼 수 있는 바 이 때는 예수에 대한 유대 교권주의자들의 적개심이 점차 증가한 갈릴리 사역 후반기로 헤롯 안디바가 세례 요한을 처형시켰던 A.D. 29년 이후이다.
분봉왕 헤롯. - 여기서 '분봉왕'에 해당하는 '테트라아르케'는 '네 짝으로 이루어진 한 벌'을 뜻하는 헬라어 '테트라스'( )와 '통치'를 뜻하는 '아르케'의 합성어로, '한 나라의 1/4을 통치하는 자'란 의미가 있다. 결국 '분봉왕'이란 한 나라의 일부를 다스리는 권세를 가진 통치권자란 의미가 있는데, 여기서는 당시 로마 황제의 임명을 받아 로마가 정복한 정복지의 한 부분을 통치하는 자를 가리킨다.
한편 '헤롯'은 애굽의 '바로'와 같이 하나의 왕조의 칭호로, 여기서는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를 가리킨다. 즉 본래 팔레스틴 지역은 한 사람의 왕인 이두매 출신 헤롯 대왕(B.C. 37-4)에 의해 통치되었다. 그러나 그가 죽자 팔레스틴 지역은 세 지역으로 분할되어 그의 세 아들들에게 할당되었는데 사마리아와 유대 지역은 '아켈라오'(B.C.4-A.D.6)가, 갈릴리 동쪽 지역을 '빌립'(B.C.4-A.D.33)이,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은 '안디바'(B.C.4-A.D.39)가 각각 분봉왕이 되어 통치했다. 신약 총론, '신약 시대의 역사적 배경' 참조. 하여간 헤롯 안디바는 아켈라오에 비하면 온순했으나 교활하고 간사한 성품 때문에 예수에 의해 '여우'라고 불리기도 했는데(눅 13:32), 세례 요한과 예수의 처형에 직 ․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그에 대해서는 본장 연구 자료에 자세히 다루었으니 그곳을 참조하라.
예수의 소문을 듣고. - '소문'(아코에)은 '들음'이라는 뜻으로, '평판' 또는 '명성'으로 표현될 수 있다. 이는 당시 예수의 전도 활동이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 알 수 있다. 한편 이러한 예수님의 소문을 헤롯 안디바가 이제야 들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지금이 A.D. 29년 이후라면 예수께서는 이미 1년 또는 2년 이상을 헤롯 안디바의 통치 지역인 갈릴리에서 말씀을 전파하시고 이적들을 행하셨기 때문이다. 이는 아마도 헤롯 안디바가 갈릴리에 오래 머물지 않고 주로 세례 요한을 가두었던 감옥이 있던 베레아의 마케루스(Machaerus) 궁전에 거하며, 사치와 향락에 젖은 생활을 하면서 그의 통치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에 무관심했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14:2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본절에 나타난 헤롯의 말은 신하들이 했고, 헤롯은 그 사실을 부인한 것으로 나타난다(눅 9:7-9). 반면에 마가의 기록에 의하면 본절과 같이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예수를 세례 요한이 부활한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나타난다(막 6:14,16). 이로 미루어 보건대 헤롯 안디바는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는 신하들의 말을 듣고 처음에는 그 말을 부인했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심경의 변화를 느껴 예수를 세례 요한이 부활한 것으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세례 요한이라. - 헤롯 안디바의 이러한 오해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잘 알지 못했으며, 세례 요한의 사역과 예수의 사역의 유사점 때문인 것이다. 세례 요한에 대해서는 마 3장 연구 자료를 참조하라.
저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 헤롯의 내세관을 단편적으로 보여 주는 구절이다. 즉 헤롯은 미신적이나마 부활을 믿었던 것이다. 그는 아마도 당시 바리새인들의 영향을 받아 내세와 부활을 믿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유대인들의 부활관에 대해서는 행 서론 특별자료 '기독교와 유대교의 관계'를 참조하라.
운동하는 도다. - '운동하다'(에네르게오)란 말은 '활력을 돋우다'란 의미로, 이것은 어떤 초월적인 힘이 한 개인에게 무한한 힘을 주는 것을 가리킨다. 결국 헤롯은 죽은 세례 요한의 영이 예수 안에 들어가 그와 같은 권능을 행하게 한다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14:3 동생 빌립. - 헤롯 대왕과 대제사장의 딸이었던 마리암네(Mariamme) 사이에서 태어난 헤롯 빌립 1세(Herod Philp I)를 가리킨다. 따라서 그는 클레오파트라의 아들로 갈릴리 동쪽 지역의 분봉왕이었던 '헤롯 빌립 2세'와는 구별된다. 헤롯 빌립 2세는 헤롯 빌립 1세와 헤로디아 사이에서 출생한 살로메(6절)와 결혼하였다. 헤롯 가계에 대해서는 신약총론, 신약시대의 역사적 배경을 보다 참조하라.
헤로디아의 일. - 헤로디아는 헤롯 안디바의 이복 형제인 '아리스토블루스' (Aristobolus)의 딸이다. 따라서 헤로디아는 헤롯 안디바나 헤롯 빌립 1세의 조카이다. 그녀는 처음에는 헤롯 빌립 1세와 결혼했었다. 그리고 살로메라는 딸을 낳았다. 그런데 당시 갈릴리 지역의 분봉왕이었던 헤롯 안디바는 로마로 가던 도중에 빌립 1세의 집에 들린 적이 있는데 이때 안디바는 빌립 1세의 아내였던 헤로디아와 불륜의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두 사람은 결혼하기 위하여 헤로디아는 빌립 1세와 이혼하였으며, 안디바는 그의 아내였던 아라비아 나타비타의 아레타스(Aretas)왕의 딸과 이혼하였다. 여기서 '헤로디아의 일'이란 바로 이를 가리킨다. 어쨌든 이러한 일은 종교적으로 유대인들의 감정을 상하게 했으며 세례 요한은 안디바를 공개적으로 비난하여서 그에 의해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결국 헤로디아의 간계에 의해 요한은 죽임을 당하게 된다. 이러한 세례 요한과 헤로디아의 관계는 구약의 엘리야와 간교했던 이세벨(왕상 18:1-19:3)과 좋은 대응을 이룬다 하겠다. 한편 아레타스왕은 그의 딸의 일로 인하여서 헤롯 안디바와 전쟁을 벌였는데, 안디바는 이 전쟁에서 패하게 된다. 그런데 이 전쟁은 세례 요한 살해 직후에 발발했던 까닭에 유대인들은 이것을 안디바가 요한을 살해한 데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 간주했다(Josephus).
요한을…옥에 가두었으니. - 헤롯은 세례 요한이 그를 자꾸 비난하자 감옥에 잡아넣었다.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요한은 베레아 지역에 위치한 마케루스성의 감옥에 갇혔다고 한다.
14:4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 여기서 '말하되'에 해당하는 헬라어 '엘레겐'은 미완료 시제이다. 따라서 본절은 요한이 헤롯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그의 부당한 처사를 비난하고 책망했음을 보여준다.
그 여자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 헤롯이 세례 요한의 책망을 받게 된 이유를 보여 주는 구절이다. 사실 유대 율법에 의하면 헤롯은 헤로디아를 취함으로 이중의 죄를 지은 것이었다. 그중 하나는 간음죄이다. 율법은 형제의 아내를 취할 수 있는 경우를 형제가 후사 없이 죽었을 때로만 한정하고 있다(신 25:5). 그런데 헤롯은 살아 있는 형제의 아내를 취했을 뿐만 아니라 정당한 이유 없이 그의 아내를 버렸으므로 간음죄를 지은 것이다. 또 하나는 근친상간의 죄이다. 율법은 근친상간을 엄격히 금하고 있다(레 18:6,16; 20:21). 그런데 헤롯은 형제의 부인일 뿐만 아니라 조카인 헤로디아와 결혼함으로써 근친상간을 범하는 죄를 졌던 것이다.
14:5 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하되. - 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한 이유는 도덕적인 이유와 정치적인 이유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도덕적인 이유는 자신의 비윤리성을 비난했기 때문이며, 정치적인 이유는 백성들을 선동하여 그에게 대항할 위험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민중을 두려워하더니. - 본절은 세례 요한이 당시 유대인들에게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즉 헤롯은 세례 요한을 단번에 처형하고 싶었지만 유대인들의 폭동이 일어날까봐 요한의 처형을 유보했던 것이다(Josephus). 한편 세례 요한이 이처럼 민중들의 지지를 받았던 것은 ① 요한이 유대 지도자들과 율법주의자들의 죄악을 책망하고, ② 로마를 등에 업고 민중들을 탄압한 헤롯 가문을 비판했을 뿐만 아니라, ③ 예수 또한 그를 칭찬하므로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그를 참 선지자로 여긴 까닭이다. ④ 또한 헤롯이 세례 요한을 감금한 일로 온 민중들의 시선이 요한에게 주목되었기 때문이다.
14:6 헤롯의 생일을 당하여. - 여기서 '생일'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네시아'는 본래 어떤 기념일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래서 본절의 생일을 헤롯의 즉위 기념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Alford, Grotius), 다른 문헌들에 의하면 '게네시아'가 생일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었으므로 다른 문제가 없다. 한편 왕들은 보통 자기의 생일을 성대하게 축하하며 귀족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헤롯이 이러한 자리에서 의인 세례 요한을 처형한 것은 이 세상에서의 악의 득세를 매우 극적으로 보여주는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헤로디아의 딸. - 헤롯 빌립 1세와 헤로디아 사이에서 태어난 딸, 살로메를 가리킨다. 후에 이 살로메는 이복 삼촌인 분봉왕 헤롯 빌립 2세와 결혼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16,17세 가량 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춤을 추어. - 살로메가 춘 춤은 빠른 템포의 춤으로, 일종의 애굽의 '알메'( )와 같은 것으로 매우 관능적인 춤이었다. 그런데 이 춤은 보통 천한 신분의 여자들이 추는 춤으로서 왕족의 신분을 가진 자가 이러한 춤을 춘다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살로메가 이 춤을 추었다는 것은 그녀의 방탕함을 보여 주는 동시에 세례 요한을 죽이고자 하는 헤로디아의 음모가 사전에 철저히 준비되었음을 시사해 준다.
14:7 맹세로…허락하거늘. - 직역하면 '맹세로 고백하거늘'이란 의미로, 결정적인 허락을 표시하는 말이다. 결국 헤롯은 살로메의 육감적인 춤에 도취되어 자신이 이행해야 할 내용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 채 취소할 수도 없는 결정적인 약속을 하고 만 것이다.
14:8 제 어미의 시킴을 듣고. - 여기서 '시킴'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비바스데이사'는 '앞으로 밀다', '선동하다'라는 뜻으로, 이는 헤로디아가 살로메로 하여금 세례 요한의 목을 요구하도록 집요하게 사주했음을 보여 준다.
소반에 담아. - 여기서 '소반'이란 음식을 나르는 커다란 쟁반을 뜻한다. 한편 살로메는 어머니인 헤로디아의 요청을 듣고 놀랐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으나 곧 동의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요한의 신실함이 헤로디아의 모든 가족들에게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음탕한 어머니와 방종한 그 딸에게 그들을 비난하는 요한을 제거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당시의 관습으로는 왕자나 공주가 죄인의 목을 베어 가져다주도록 요청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원수의 시체를 봄으로써 복수심을 만족시키기 위함과 둘째, 형이 집행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함이다. 아무튼 본절은 헤로디아의 흡혈귀와 같은 잔인성을 보여 준다.
여기서 내게 주소서. - '여기서'(호데)는 모든 무리가 헤롯이 그의 약속과 맹세를 지키고 선물을 내어 주는 것을 볼 수 있는 공식적인 연회 장소였다. 이러한 곳에서 요한의 목을 가져다 달라고 말한 살로메의 요청은, 헤롯이 그의 딸에 대한 맹세를 깨뜨릴까 염려하여 모인 사람들의 눈과 귀를 담보로 헤롯으로 하여금 요한의 처형을 늦추지 말고 즉각 실행하게 하려는 헤로디아의 사악한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14:9 왕이 근심하나. - 헤롯이 근심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첫째, 헤롯은 요한이 거룩한 사람임을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하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막 6:20). 즉 헤롯은 비록 악한 사람이었지만 요한을 거룩하고 의로운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다. 둘째, 요한이 백성들에게 널리 알려졌으므로 그를 죽임으로 해서 민란을 유발할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당시 세례 요한이 백성들의 정신적인 지주였으므로 그를 죽인다면 그를 따르는 백성들이 가만 있지 않을 것을 헤롯은 알았던 것이다.
자기의 맹세한 것. - '맹세'(호르쿠스)는 복수형으로서, 여러 번 반복되어 그의 약속을 강조했던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헤롯은 그 맹세를 지킬 수밖에 없었는데, 그 이유는 당시 근동지역에서의 맹세는 율법에서도 명시되어 있는바(민 30:1-8)와 마찬가지로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되어졌으며, 그의 왕으로서의 권위 때문에 맹세를 깨뜨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을 위하여. - 막 6:21에 의하면 이들은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이다. 이들은 당시 사회 지도층에 속하는 인물들로 응당 헤롯의 잘못을 지적하고 헤로디아의 간계를 막았어야 옳았다. 그러나 이들은 오히려 헤롯의 맹세의 증인이 되는 자리에 앉음으로써 오히려 불의에 동조자가 되고 말았다. 한자 숙어의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는 말과 같이 악인에게는 악한 자들만이 모이는 법이다. 아무튼 헤롯은 자기의 맹세를 깨뜨렸다는 양심의 가책보다는 주위 사람들의 눈초리와 표정을 더 두려워했기 때문에 세례 요한의 참수를 명령할 수밖에 없었다.
14:10 사람을 보내어 …목 베어. - 본절의 사람은 왕의 측근에서 명령을 전달하는 심부름꾼이다. 한편 유대 사회에서 재판이나 심문 없이 사람을 죽이는 것과, 목을 베어 죽이는 일은 사회적, 종교적인 공적 범죄를 제외하고는 금지된 형벌이었다(출 32:27; 신 13:6-18). 따라서 세례 요한에 대한 헤롯의 참수형은 로마 풍습에 따른 것으로, 헤롯 스스로 유대인임을 자처했는지는 모르나 그의 행위가 그를 이방인인 것으로 증거해 준다.
14:11 여아에게 주니. - 여기서 '여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라시온'은 혼기가 찬 처녀를 가리키는 말이다. 당시의 팔레스틴에서는 조혼의 풍습이 있어서 이제 15세 정도가 되었을 살로메에게도 이 말이 붙어졌다.
제 어미에게 가져가니라. - 헤로디아의 요구대로 세례 요한은 곧 처형되어 목만 헤로디아에게 보내졌다. 한편 초대 교회의 전승에 의하면 이때 헤로디아는 자기를 비난했던 요한의 혀를 뾰족한 송곳으로 사정없이 찔렀다고 전해진다(Jerome). 실로 악인은 피 흘리기를 좋아하고 그것을 신속히 행할 뿐만 아니라 잔혹하기가 이루 말 할 수 없다. 한편 요세푸스(Josephus)의 기록에 의하면 세례 요한의 참수 직후 헤롯은 전처의 본국인 나타비타국의 아레타스(Aretas)왕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로마 원로원의 노여움을 사 헤로디아와 함께 프랑스의 리용으로 추방되어 그곳에서 최후를 마쳤다고 한다. 그리고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는 빙판 위에 넘어져 날카로운 얼음에 목을 찔려 죽었다고 한다.
14:12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 요한의 제자들이 마지막으로 나타나는 구절이다. 그들은 늘 스승 곁에서 스승과 연락이 잦았으므로 스승의 처형 소식을 곧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감옥 속에 있는 요한의 머리 없는 시체에 접근해서 스승의 시신을 장사한 후 예수께 나아갔다.
예수께 고하니라. -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스승인 요한의 증언, 곧 예수가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말을 듣고 예수를 신뢰하던 중 스승이 죽자 예수에게로 와 그의 제자가 되려고 하였을 것이다. 이것은 이미 그들이 예수와 스승 사이의 사상의 일치를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요한의 가르침대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이 많았을 것임을 암시한다. 한편 세례 요한의 죽음의 소식은 예수께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임에 분명하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은 메시야의 선구자요 예표로, 그의 삶 전체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보여 주는 바, 그의 죽음은 앞으로 예수께 닥칠 운명이 어떠할 지를 보여 주는 전조였기 때문이다(Robertson). 눅 3장 연구 자료 참조.
14:13-21 오병이어의 이적
예수님의 왕적 권능에 관한 소문이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가 두려워할 만큼 널리 퍼졌음(1,2절)과 세례 요한의 죽음(3-12절)을 보여주는 앞 단락의 내용에 이어서 본문은 예수께서 다시 한 번 자신이 온 세상을 구원할 메시야이심을 명백히 드러내신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 따라서 본문을 예수께서 세례 요한의 죽음 소식을 들은 12절과 연결되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죽음 사건은 1,2절에 대한 보충 설명일 뿐, 본문은 앞 단락의 2절과 연결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본문은 시간상으로 볼 때 마 10:1~11:1의 12제자 파송 사건과 연결된다. 즉, 본문의 오병이어의 사건은 예수께서 전도 여행에서 돌아온 12제자들의 전도 결과를 보고 받고, 그들에게 휴식을 제공하고, 그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한적한 곳으로 옮긴 상황 가운데서 행해진 이적이다(막 6:30,31).
한편 본문의 내용은 예수님의 이적 중에서 4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 유일한 것으로서(막 6:30-44; 눅 9:10-17; 요 6:1-14),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자비(14절), 제자들의 하나님 말씀을 전파해야 할 사명(16절), 그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모든 인간의 육신적 궁핍과 영적 갈급함을 동시에 해결해 주실 수 있는 생명의 양식(19-21절)이시라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본문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① 참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인간의 영적인 부족함과 육적인 결핍을 채우는 참된 양식이 되심을 보여준다(요 6:35).
② 예수께 나아오는 자는 신분의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구원의 은혜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요 3:16; 행 2:21; 롬 10:13).
③ 예수께서는 복의 근원이 되시므로 그와 함께 하는 자는 영원한 축복에 동참하게 된다는 것이다(요 1:16; 빌 4:19; 히 6:14).
④ 성도들은 다른 사람들이 처해 있는 육신적 곤고와 물질적 궁핍을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되며 그들의 부족함을 새워주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약 2:15,16).
⑤ 하나님께서는 비록 우리의 부족하고 작은 것일지라도 당신께 드리기만 하면 그것을 통하여 놀랍고 풍성한 축복을 베푸신다는 것이다(막 10:29-31; 롬 12:1).
14:13 예수께서 들으시고. - 이 말은 예수께서 요한의 처형 소식을 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헤롯이 예수를 다시 살아난 세례 요한으로 생각한다고 하는 소식을 예수께서 들었다는 말이다(2절). 본장의 구성상으로 볼 때 12절 다음에 본절이 바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예수께서 세례 요한의 죽은 소식을 듣고 떠나신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3-12절의 사건은 1,2절에 대한 보충 설명으로서 이미 지나간 이야기를 삽입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본절은 2절 다음에 연결되어야 논리적으로 타당하게 된다. 즉 예수께서는 당신에 대한 헤롯의 반응을 듣고 일단 그와의 충돌을 피하고자 하셨을 것이고, 한편으로는 이때 12제자들이 전도 여행에서 돌아왔으므로 그들과 의논하시기 위해 무리들로부터 떠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막 6:30,31).
빈들에 가시니. - '빈들'은 누가의 기록(눅 9:10)을 참조할 때 '벳새다', 곧 갈릴리 북동쪽 해안에 위치한 '벳새다 율리아스'(Bethsaida Julias) 지방 중 어느 한 지역이었을 것이다. 이곳의 위치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 노트, 지도를 참조하라. 이때부터 예수의 사역은 주로 제자들을 염두에 두고 그들을 훈련하기 위한 것이 되었는데, 이는 그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 바로 십자가 수난과 죽음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4:14 큰 무리를 보시고. - 이 무리들은 13절에서 예수를 좇던 무리들로서 많은 수가 있음을 나타낸다. 한편 이들의 수를 21절과 막 6:44에서는 남자만 오천 명이라고 하였으므로 여자와 어린아이들까지 포함하면 실제는 만오천 명에서 이만 명은 되었을 것이다.
불쌍히 여기사. - 이 말은 직역하면 '불쌍히 여길 정도로 마음이 감동된다'는 뜻으로, 내장 혹은 심장 등 인간의 내부로부터 그 아픔을 느끼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히브리인들이 '내장'을 인간의 깊은 감정이 거하는 곳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 - 이 말에는 병인의 믿음이 내포되어 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계신 것은 한적한 빈들이었으므로 병인이 이곳까지 왔다는 것은 예수께서 그의 병을 고쳐주시리라는 확신이 있었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기 고통을 극복하며 예수를 좇는 것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 받는 원천이 된다.
14:15 저녁이 되매. - 예수 당시 유대인들은 저녁을 두 가지로 나누어서 이해하였는데, 첫째 저녁은 늦은 낮, 즉 3시부터 시작되고, 둘째 저녁은 일몰 이후부터 약 40분 정도의 짧은 시간을 말한다. 본절의 저녁은 첫째 저녁에 해당되고, 23절에 언급된 저녁은 둘째 저녁을 가리킨다.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 문자적으로 '때가 벌써 지났으니'이다. 이 때가 언제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식사 시간(Grotius), ② 가르치는 시간(Fritzsche), ③ 낮 시간(Meyor), ④ 군중들을 보낼 시간(Bruce) 등 다양한 견해가 있다. 어느 것을 취해도 가능하나 문맥의 흐름으로 볼 때 ①의 견해가 비교적 가장 적합하다. 즉 그 당시 무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적과 말씀에 완전히 매료되어 시간과 끼니를 거르는 것 정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무리를 보내어 … 사 먹게 하소서. - 예수께서는 무리들의 허기와 때가 지난 것에 대해 무관심한 것 같아 보였으나 실제는 그의 제자들에게 이 문제를 생각하도록 의도하셨음이 분명하다. 즉 예수께서는 당신이 모든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실 수 있는 분임을 제자들이 알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으로 그들이 지금 있는 곳은 먹을 것을 구할 수 없는 빈들 인데다 더욱이 그들이 가진 것으로는 2만여 명에 달하는 무리들을 먹인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로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의 의도와는 달리 무리들을 자기들에게서 떠나게 할 것을 예수께 요청하고 있다.
14:16 갈 것 없다. - '가게 할 필요가 없다'의 뜻으로 강압적인 부정문이다. 예수께서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제시한 제자들의 말을 한 마디로 일축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나아온 자로 하여금 결코 그 필요를 채우지 못하고 돌아가기를 원치 않으셨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자기를 원하는 자들에게 자기 몸을 주기 위해 이 땅에 왔기 때문이다. 하여간 예수의 이 말씀은 예수께서 제자들이 지금까지 간과하고 있는 어떤 양식의 공급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요 6:35).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 제자들은 예수에게 '무리들이 사 먹게 하소서'라고 말하였고, 예수는 '너희가 그들에게 주어라'라고 하셨는데 이 말은 제자들을 무척 당황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이 많은 무리들을 다 먹이려면 적어도 200데나리온의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요 6:7). 그러나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이들을 먹일 수 없음을 알고 계시면서도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은(첫째는 자신에 대한 제자들의 신앙의 정도를 알아보기 위함이고, 둘째는 굶주린 군중들에 대한 그들의 책임감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이다. 물론 여기서의 책임은 물질적인 양식뿐 아니라 영적인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할 사명까지 가리킨다. 세상에 생명의 양식을 나누어 줄 책임을 잊어버릴 때 그리스도의 제자된 자의 설 곳은 없어지게 되는 법이다.
14:17 우리에게 있는 것은…두 마리 뿐이니이다. - 무리에게 먹을 것을 주라는 예수의 말씀에 대한 제자들의 답변으로, 자신들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으므로 예수의 말씀을 도저히 이행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대답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지 못하는 인간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자신들이 무지하다는 이유로 그것을 회피하려 한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 여기서 '떡'(아르토스)은 밀기울이 제거되지 않아 빛깔이 검은 밀가루로 만든 것으로 당시 가난하고 비천했던 계층의 사람들이 주로 먹던 양식이었다. 그리고 '물고기'는 아마도 갈릴리 바다에서 잡은 것일 것임에 분명하다. 한편 요한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어떤 아이가 제공한 것이었다(요 6:9). 이로 보아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어린아이가 한 끼 식사로 먹을 수 있는 소량의 음식이었던 것 같다. 따라서 이것 자체만으로는 그 많은 군중을 먹일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이것들을 하찮은 것으로 판단한 것은 일면수긍이 간다. 그러나 제자들은 생명의 양식인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반면 어린아이는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을 바침으로써 그뿐만 아니라 모든 군중이 배불리 먹고 12광주리나 남기는 놀라운 이적이 일어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이처럼 모든 사람이 하찮게 생각하는 것일지라도 자기의 소유한 모든 것들을 주를 위해 바치는 믿음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업신여기지 않고 그 어떠한 귀중한 것보다 더 귀중히 여기시며 그것을 통해 하늘의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내려 주신다.
14:18 내게 가져오라. - 제자들의 무기력한 말(17절)과는 달리 예수님의 확신에 찬 말씀이다. 즉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불신앙과 의심에 사로잡혔을 때, 그 자신이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생명의 떡이신 것을 보이고자 하신 것이다.
14:19 잔디 위에 앉히시고. - 본절의 '앉히시고'는 이스라엘의 보통 식사 때와 마찬가지로 비스듬히 기대어 눕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때 무리들을 명하여 백 명씩' 또는 오십 명씩 떼를 지어 앉게 하셨다(막 6:40; 눅 9:14). 이것은 예수에서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 무리를 향해 '순종'과 '질서'를 요구하신 것이다. 물론 예수께서 이러한 질서를 요구하신 것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가 영적인 이적 행하는 것을 보게 함으로써 그가 곧 생명의 떡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무리를 이렇게 나눔으로써 제자들이 떡을 나누어 주고 수를 헤아리기에 훨씬 쉬웠을 것이다. 한편 팔레스틴에서는 2월 중순경에 우기가 끝나고 그때부터 잔디가 돋아나기 시작한다. 또한 요한은 예수께서 이 이적을 행하신 때가 유월절(니산월 14일; 니산월은 태양력으로 3,4월에 해당)이 가까운 때라고 기록하고 있다(요 6:4).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 이적을 행하신 때는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지 2년이 되는 해(A.D. 29년)의 봄인 3,4월 경으로 추정된다.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 예수의 이와 같은 행위는 당시 유대인 가정에서 가장이면 누구나 하는 일반적인 기도 관습으로 단순히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 감사하는 행동이었다(마 26:26; 눅 24:30). 따라서 예수의 축사하심은 감사기도였을 뿐 인간이 하나님께 구하듯 이적이 일어나기를 간구한 것은 아니었다.
떡을 떼어‥‥주시매. - 유대인들의 떡 덩이는 얇고 잘 쪼개졌다. 그러므로 그들은 떡을 자르지 않고 떼어먹었다. 한편 예수께서 떡과 물고기를 떼실 때 이 두 가지는 그의 손에서 기적적으로 늘어나 남자 5천 명과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먹일 수 있었다. 마태 는 이것을 미 완료로 하지 않고 부정과거 '에도케'(주시매)를 사용했다. 이것은 전체 행위가 하나로 간주되었다는 뜻이다. 즉 예수가 행하시는 기적은 이상한 주문이나 신기한 동작이 필요치 않는 일상적인 자연스런 행동 속에서 이루어졌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은 예수께서 천지 만물의 창조주이심을 증거해 준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 제자들은 예수께서 떡과 고기를 떼어 주자' 그것을 무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즉 그들은 이적을 시행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이적을 분배하는 자들이었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사실은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존재는 교회 자체나 제자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보여준다. 한편 제자들은 이적의 시행자는 아니었으나 본절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항상 주님의 곁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가까이서 주의 행하심을 목격한 자요, 그 일의 증인이었다. 그와 같이 주의 은혜를 체험한바 된 성도들은 모두 그 일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14:20 다 배불리 먹고.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코르타스데산'은 짐승들을 살찌우기 위해 풀이나 먹이를 양껏 먹이운다는 의미를 지닌 '코르타조'에서 파생한 말로, 이는 무리들이 겨우 한 끼 식사를 때우는 정도로 먹은 것이 아니라 먹을 수 있을 만큼 양껏 먹었다는 말이다. 이는 결국 예수께서 행하신 이적의 풍성함을 잘 묘사해 준다. 한편 이러한 이적은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의 영적 양식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으시며, 또한 그에게 나아오는 모든 죄인이 구원 얻기에 부족함이 없음을 시사해 준다.
남은 조각. - 성경에 나타난 이적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남는다는 것이다(왕하 4:1-7; 42-44), 이러한 사실은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과 긍휼을 나타낸 것이다. 한편 '남은 조각'이란 먹다가 남긴 부스러기가 아니라 먹기 위해 떼 놓은 조각을 가리키는 말이다.
열두 바구니. - '바구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피노스'는 유대인 여행자들의 휴대용 가방으로 음식을 넣는데 사용되었다. 이로 보아 12 바구니는 제자들이 가지고 다니던 것으로서 남은 것들은 제자들의 식량이 되었을 것이다. 한편 요 6:12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남은 부스러기들을 버리지 말고 모으라고 명령하셨는데 이것은 절약의 모범을 보여 주신 것이다. 즉 모든 음식은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므로 신성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음식들을 낭비해서는 안 되는데 그것은 어디엔가 항상 필요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14:21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 일명 '오병이어의 기적'이라고 부르는 이 기적을 통해 음식을 먹었던 자들은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다. 그런데 마가와 누가는 이 사건을 기록하면서 남자만 오천 명(막 6:44; 9:14)이라 했고, 요한복음에서는 사람들의 수효가 오천 쯤 되었다고(요 6:10) 하였다. 그런데 여자와 어린아이가 무리의 계수(計數)에서 빠진 이유는 아마도 사람을 계수할 때 여자와 어린아이를 제외한 성인 남자(만 20세 이상)만을 계수하는 유대인 계수법(민 1:2,3)에 따랐기 때문일 것이다.
14:22-36 물 위를 걸으신 예수
본문에는 앞 단락에서 언급된 오병이어의 이적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메시야로서의 초자연적 권능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 자연을 다스리는 권세를 지니신 만왕의 왕이라는 사실은 이미 8:23-27에서도 나타난바 있다. 하지만 본문은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의 풍랑을 잔잔케 만드셨을 때에, 그저 기이히 여기며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 고'(마 8:27)라는 말을 했던 제자들이 이제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위를 걸어가시는 이적을 행하자 모두 그 앞에 절하며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33절) 라는 신앙고백을 하게 되었음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본문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천지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통치자로서 죄악에 빠진 모든 인류를 건져 내시는 구원자이심을 다시 한 번 친히 드러내신다.
이러한 본문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깨달을 수 있다.
① 성도들은 언제 어떤 상황 가운데 처하게 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동행해 주시고 또한 그가 능히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갈릴리 바다의 거센 풍랑 속에서 어려움을 겪던 제자들은 예수께서 친히 물 위를 걸어서 자신들에게로 찾아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주님을 유령으로 오해하며 무서워 소리를 질렀다. 아마 그들은 기도하기 위해 혼자 산으로 올라가신 예수께서 이미 육지로부터 약 5km나 털어진 바다 한 가운데서 풍랑을 만나 고생하는 자신들의 형편을 아실 리도 없고, 더욱이 자신들을 도와주시기 위해 친히 물 위로 걸어오실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혹은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 우리를 구원하시지 못하는 일은 결코 없다(민 11:23; 사 59:1).
② 성도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며 앞을 향해 나아가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히 12:2).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예수님 만을 바라보며 나아갈 때 물 위를 걸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눈을 돌려서 풍랑을 쳐다보았을 때 두려움을 갖게 되었고 그만 물 속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운동 선수처럼, 그 어떤 세상 풍파도 두려워하지 말고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며 믿음의 경주(競走)에 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고전 9:24,26; 빌 3:12-14; 히 12:1).
14:22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 예수께서는 무리들이 배불리 먹고 나자 무리들을 보내시면서 제자들에게는 배를 타고 강 서편으로 가도록 재촉하셨다. 특별히 여기서 '재촉하다'(에낭카센)은 '강요하다'는 말로 가기를 싫어하는 제자들을 억지로 보내셨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처럼 성급하게 제자들을 강요하신 이유는 다음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① 기도 시간을 갖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23절). ② 한적한 곳에서 쉬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막 6:31,32) ③ 예수의 기적에 놀란 무리들이 예수를 유월절이 가까워 오는 이 때에 왕으로 삼으려고 했었기 때문이다(요 6:15). 이 가운데 ③ 의 견해가 예수께서 제자들을 재촉하신 가장 직접적 이유라 할 수 있다. 즉 당시 억압과 빈곤에 시달리던 무리들은 예수를 왕으로 삼고자 했는데, 만일 제자들이 이에 합류한다면 정치적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컸다. 그러나 정치적 혁명은 예수의 구속 사역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예수는 정치적인 메시야가 아닌 자기 몸을 내어줌으로 죄인들을 구원할 메시야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서론 특별자료, '메시야 이해' 참조. 그래서 예수께서는 자신을 여전히 정치적 메시야로 오해하는 제자들을 무리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무리들과 제자들의 합류를 차단하고 무리들의 고조된 분위기를 억제하고자 하신 것이다.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니. - 이는 갈릴리 바다 서편, 곧 게네사렛 땅을 가리킨다(34절). 그런데 마가복음은 제자들이 도착한 지명을 구체적으로 '벳새다'(막 6:45)로 기록하고 있다. 반면 요한복음은 '가버나움'(요 6:17)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두 기자의 관점의 차이에서 발생한 것이다. 즉 예수께서는 제자들로 하여금 벳새다에서 기다리게 하고 거기서 제자들과 만나 함께 가버나움으로 가고자 하셨는데, 마가는 중간 목적지를 기록하고, 요한은 최종 목적지를 기록한 것이다(Westcott, Morris). 이와 관련해서는 본장 자료노트, 지도를 참조하라.
14: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 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먼저 갈릴리 바다 서편으로 보내신 후 당신을 왕으로 삼으려는 무리들을 해산시키시고 홀로 산에 오르셨다. 이는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나누시기 위함이었다. 사실 예수께서 그의 메시야 사역을 온전히 수행할 수 있었던 비결도 바로 이러한 기도 생활에 있었다. 한편 예수께서 오르신 산은 그가 제자들의 항해 모습을 주시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막 6:48).
14:24 배기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 이 말은 성경에서 보통 '바다 한가운데'를 의미하는 말로 쓰였다. 한편 요한복음에는 구체적으로 십여 리(요 6:19)로 번역되고 있는데, 헬라어 원문에는 25-30 스타디온으로 나와 있다. 여기에서 1 스타디온은 185m이므로(제 1권 성경 총론, '성경 도량형 환산표' 참조), 결국 이 거리는 약 4.6km 내지 5.5km 정도로' 우리나라 도량형으로 환산할 때 약 10리쯤 되는 거리다. 따라서 요한복음의 '리'와 마 5:41의 '리'와는 구별된다. 왜냐하면 마 5:41의 '리'는 로마 마일(Romam Mile)로, 약 1.48km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바람이 거슬리므로. - 갈릴리 바다는 지역적 특성상 돌연한 돌풍과 급격한 기후 변동으로 유명하다. 이에 대해서는 마 8:24 주석과 막 4장 자료 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바사니조메논'은 '고통을 받다', '동요하다'라는 뜻으로 귀신들린 자가 예수를 보고 괴로워한 상태를 묘사할 때 사용된 단어(마 8:29) 이다. 이는 결국 제자들이 풍랑으로 인하여 심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당했음을 시사해 준다. 한편 예수께서는 산 위에서 제자들의 이러한 모습을 목격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즉시 돕지 않으셨는데, 이는 제자들로 하여금 당신이 육신으로 더불어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더라도 언제나 예수의 능력과 보호하심이 그들 위에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게 함으로써 장차 그가 승천한 이후에도 복음 전도 사역에 용기를 갖고 믿음으로 일을 추진하도록 하게 함이었을 것이다.
14:25 밤 사경에. - 유대인들은 보통 하루 밤을 3경으로 나누었던 반면, 로마에서는 4경으로 나누었다. 따라서 본절은 로마식 표현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로마에서 밤은 오후 6시에서 시작하여 다음날 오전 6시까지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4경이란 새벽 3시부터 6시 사이의 때를 말한다. 한편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은 새벽 3시-6시 사이였으므로 거의 온 밤을 산에서 홀로 기도하셨음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 오병이어의 이적과 함께 예수의 신성을 보여주는 초자연적인 능력이다. 사실 바다 위를 걷는다는 것은 자연의 법칙을 완전히 무시한 사건으로 자연을 지배하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아니라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때문에 이를 목격한 제자들은 비로소 예수를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33절)이라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일부의 학자들은 예수의 이 이적에 대해 상당히 회의적인 견해를 표명하면서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것이 아니라 물가에 위치한 갈대숲 혹은 바닷가에 난 길을 따라 걸으신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Paulus, Schenkel). 이러한 주장은 과학을 신봉하는 현대인들에게 상당히 설득력 있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하나님의 능력을 인간의 사고 범위 안에 제한시키려는 어리석은 발상으로 일고(一考)의 가치도 없다.
14:26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오심을 보고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를 지르거늘. - '유령'(판타스마)은 '비치다', '보이다'라는 의미의 '파이노'에서 유래한 말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허상' 또는 '악령'을 가리키는 말이다. 어쨌든 이러한 태도는 아직까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실한 지식과 신앙을 갖추지 못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데 이것은 그들 마음속에 잠재해 있는 미신적 사고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Bruce).
14:27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마라. - 미신적 사고에 빠져 자신을 유령으로 착각하는 제자들을 향해 예수께서는 '안심하라 나다'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들의 공포심을 멎게해 주셨다. 특별히 여기서 '안심하라'(달세이테)는 '담대하라', '용기를 내라'의 뜻으로' 힘을 얻고 즐거워하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내니'에서는 '내'가 유령이 아니라는 이유를 제공한다. 즉 '너희의 미신적 생각을 내어 던져라' 나는 너희 주요 선생이다'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한편 '내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고 에이미'는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 '스스로 있는 자'(출 3:14)란 말과 같은 의미로, 이는 예수 자신을 확인시켜 주시기 위한 친근한 말씀이라 할 수 있다. 결국 본절은 예수께서 당신의 존재를 쉽게 망각하여 쓸데없는 두려움에 가득차 있는 제자들로 하여금 실족치 않도록 위로의 말씀으로 격 려해 주셨음을 보여 준다(막 5:36; 눅 12:4; 요 14:1,27; 행 18:9; 벧전 3:14).
14:28 본절에서부터 31절까지는 사복음서 가운데 본서에만 나오는 기록으로 베드로가 물 위를 걷는 사건을 언급하고 있다. 그래서 혹자는 이를 후대에 삽입된 것으로 추정하나 베드로의 열정적인 성격에 비추어 볼 때 그 역사성을 의심할 수 없다(Alford' Bruce).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시도 주여 만일 주시어든. - 문자적으로 '과연 주이시므로'라는 뜻으로, 의심의 말이 아닌 확신을 의미한다. 즉 베드로는 주님께서 물 위를 걸어오셨다는 확신이 서자 그도 그와 같이 행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 베드로의 신앙의 담대한 일면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즉 베드로는 예수의 말씀 한 마디면 자신이 물 위를 걸을 수 있다고 확신한 것이다. 이는 베드로가 주님을 천지의 주재자로 알았음을 의미한다. 베드로가 여러 결점을 지닌 존재였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수제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앞서 가는 신앙 때문이었다(마 16:13-19).
14: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서. -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보여준 신앙을 받으시고 정당시하셨다. 만일 그의 신앙이 참된 것이 아니었다면, 혹은 만일 그 신앙이 예수의 능력을 시험하고자 하는 불순한 것이었다면 예수께서는 '오라'고 명령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한편 '신앙'이란 결국 하나님의 명령에 자신의 전인격을 복종시켜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모험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구약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갈바를 알지 뭇하고 나아갔으며(히 11:8),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믿음으로 홍해를 건넜다(히 11:29). 그와 같이 베드로 역시 주님의 명령에 따라 믿음으로 배에서 내려 그가 알지 못하는 초자연의 세계를 경험한 것이다.
14: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가는지라. - 베드로는 예수의 말씀에 의지하여 예수만을 바라보고 나아갈 때 자연법칙도 초월하여 바다 위를 걸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충동적인 성격의 베드로는 주님께 나아가는 동안 관심의 대상이 달라졌다. 예수가 아닌 바람을 본 것이다. 즉 그는 예수만 바라보고 앞으로 나아갔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을 삼킬 듯이 달려드는 풍랑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염려하게 된 것이다. 여기까지가 베드로의 믿음의 한계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예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믿었지만 폭풍의 위협에 인내할 만한 더 큰 믿음이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의심이 많은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체험하는 중에도 확신하는 믿음이 부족해 결국은 시험에 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퀴리에 소손 메'는 부정 과거형으로' 이는 베드로가 한 순간에 외친 말임을 나타낸다. 결국 이 말은 당시 베드로의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는지 충분히 연상케 한다. 어쨌든 지금까지 베드로의 발밑에서 고체가 됐던 물이 이제 다시 액체가 되고 있었다. 이것은 베드로의 의심이, 신앙의 자리를 대신했을 때 세상이 다시 그를 지배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14: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 예수께서 물에 빠진 베드로를 건지시기 위해서는 말씀 한마디로도 족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굳이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아 주셨다. 이것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거친 세파에게 늘 붙잡아 주시는 구원의 손길을 경험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믿음이 적은 자여. - 이 말은(올리고피스토이) 신약에서 다섯 번 나오는데 모두 제자들에게 말할 때 사용되었다(마 6:30; 8:26; 16:8; 눅 12:28). 이는 가장 믿음이 깊어야 할 자들이 의심하여 넘어졌기 때문이다(마 8:26 주석 참조). 한편 이 말은 믿음이 전혀 없음에 대한 책망이 아니라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믿음의 질에 대한 지적이라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베드로에게 문제가 된 것은 그리스도의 능력에 대한 신뢰 여부가 아니라 그것을 끝까지 신뢰하지 못했던 불완전함에 있기 때문이다.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로. - 여기서 '의심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디스탓사스'는 '이중으로 하다'라는 의미의 헬라어 '디스타조'에서 유래한 말로, '두 줄로 잡아당긴다'는 의미가 있다. 결국 이 말은 마음이 두 갈래로 갈라져 하나로 통일되지 못한 상태를 가리킨다. 즉 베드로의 예수께 대한 믿음은 바람과 파도에 대한 공포심으로 무너져 갔던 것이다.
14:32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 여기에서 바람이 '그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인 '코파조'는 '피로해지다', '쇠퇴하다'의 뜻으로' 바람이 잠잠케 되고 평온함을 찾는 것을 의미한다. 즉 예수께서 배 위에 오르자 바다는 다시 평온함을 찾은 것이다. 결국 이러한 이 적은 예수께서 바람과 물결을 다스리는 만유의 주(主)인 동시에 혼란과 두려움을 잠재우는 평화의 왕이신 것을 다시 한 번 증거해 준다. 한편 요 6:21은 마태와 마가의 기록을 보충하여 즉시 목적지에 도착했던 사실을 자세히 덧붙였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보호하신다면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하고 인생의 항해를 무사히 마칠 수 있음을 교훈해 준다.
14: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 제자들이 예수를 진실로 신앙의 경배 대상으로 인정했다는 뜻이다. 즉 초자연적인 현상은 그가 천재의 주재이신(창 14:19; 행 17:24)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히 드러내 주었고 또한 이 사실을 깨달은 제자들은 그에게 경배했던 것이다. 창 42장 자료노트, 두려움과 경배 참조.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 이 말은 제자들의 신앙고백으로서 이제 서야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에 대해 확실히 깨닫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이러한 제자들의 신앙고백은 후일 베드로에 의해 더욱 구체화되어졌다. 즉 베드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란 예수의 질문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대답했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완전히 파악한 그의 신앙고백이었다(마 16장 연구자료, '베드로의 신앙고백' 참조). 이처럼 제자들은 예수의 절대적 능력을 목격하고서야 비로소 그분이 메시야이심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들은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라고 하신 예수의 말씀을 깨달아 어떠한 상황에서도 예수께서 나의 주인이심을 확신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14:34 그들이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니. - 이곳은 갈릴리 바다의 서북쪽에 위치한 평야 지역으로서 토지가 비옥하고 많은 인구가 밀집해 살았다. 그리고 북쪽에는 가버나움이, 남쪽에는 디베랴가 위치해 있다. 게네사렛의 위치에 대해서는 막 2장 지도를 보다 참조하라. 한편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게네사렛 지방에 도착했을 때 그곳 주민들은 예수를 알아보고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모든 병자를 예수께 데리고 왔다. 이것은 예수의 사역이 얼마나 넓은 범위에 미쳤는가를 말해 준다.
14:35 그곳 사람들이 예수이신 줄 알고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모든 병자를 데리고 와서. - '통지하여'(아포스텔로)는 '사자를 보내어 소식을 전하다'라는 뜻이다. 즉 게네사렛 사람이 이웃과 주위의 사람들에게 일일이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것을 알렸다는 말이다. 한편 예수께서 게네사렛 땅에 오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림에도 불구하고 게네사렛 사람들이 예수를 알아보고 모여 들었다는 것은 예수의 사역이 미친 영향력이 매우 컸음을 시사한다.
14:36 다만 예수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 예수의 신적 능력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던 가버나움 사람들은 예수께 병든 자를 만져 달라고 요청하지 않고 다만 병자가 그를 만지도록, 즉 그의 옷자락이라도 만지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것은 마 9:20의 혈루병에 걸린 여인이 예수의 옷자락만 만져도 병이 나을 것이라고 확신한 믿음과 같은 것이었다.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느니라. - 문자적으로 '완전히 구원을 받다'라는 의미로' 이는 병자들이 육신의 질병에서 고침을 받을 뿐만 아니라 영혼의 질병에서도 자유함을 얻게 된다는 이중의 뜻이 내포되어 있다. 한편 게네사렛에서 이루어진 그러한 치유의 이적은 그들의 열정적인 신앙에 의한 보상이라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능력과 사랑의 발로였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사실이다.
연구자료
헤롯 안디바-세례 요한을 죽인 부도덕한 왕
1. 인적 사항
① 헤롯 안디바는 '아버지를 대신한 영웅의 아들'이란 뜻.
② 헤롯 대왕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사마리아 여인 말타케.
③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의 분봉왕(B.C. 4-A.D. 39년).
④ 다메섹 왕 이레다 4세의 딸과 결혼(A.D. 14년).
⑤ 자신의 조카이자, 이복동생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재혼(마 14:3).
2. 시대적 배경
헤롯 대왕 사후 세 형제 중에서 갈릴리와 베레아 지방의 분봉왕으로 임명되어 B.C. 4-A.D.39년까지 약 40년간 그 지역을 통치한 인물이다. 당시 로마의 황제는 가이사 아구스도의 뒤를 이은 디베료 가이사(A.D. 14-37년)였다. 한편 예수의 십자가 처형 판결 당시 그는 예루살렘에 잠시 거주하고 있다가(눅 23:7) 유대 총독 빌라도로부터 갈릴리 사람 예수에 대한 판결을 의뢰받기도 했으나, 결국 최종 판결권은 빌라도에게 넘겨주었다(눅 23:11,12), 그는 디베료 황제 사후, 그의 후계자 칼리굴라(Caligula)에 의해 가을에 있는 리용(Lyons)으로 추방당했다.
3. 주요 생애
세례 요한의 처형 이전 출생 BC. 20년
갈릴리 분봉왕이 됨 BC. 4년 마 14:1
디베랴 도시 재건 -
다메섹 왕녀와 결혼 BC. 14년 -
동생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AD. 29년 마 14:3 불법 재혼
세례 요한의 책망을 들음 AD. 29년 마 14:4
세례 요한을 옥에 가둠 AD. 29년 마 14:3
세례 요한을 죽임 AD. 29년 마 14:10
세례 요한의 처형 이후
예수의 소문을 듣고 두려워함 - 마 14:1
예수 살해에 대한 음모를 계획 - 눅 13:31-33
빌라도에게서 예수 판결을 의뢰받음 AD. 30년 눅 23:6-8
예수를 빌라도에게 되돌려 보냄 AD. 30년 눅 23:11'12
다메섹 왕 이레다와의 AD. 36년 -전쟁에서 패배
리용으로 유배당함 AD. 39년 - 죽음 - -
4. 성품
① 이복동생인 빌립의 아내와 불법으로 재혼한 것으로 보아 부도덕한 자(마 14:3).
② 충언을 아끼지 않은 세례 요한을 옥에 가두고 부당하게 목을 벤 것으로 보아 교만하며 권력을 남용한 자(마 14:3-10).
③ 어미 헤로디아의 사주를 받은 조카 딸 살로메의 부당한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세례 요한을 죽인 점으로 보아 올바른 판단력이 결여되고 우유부단한 자(마 14:6-11).
④ 분봉왕으로 등극 후 리비아스, 디베랴 등 폐허된 도시를 재건한 것으로 보아 통치 권력욕이 강하고 다소의 지도력을 갖출 자.
⑤ 재판 받으러 온 예수에게 이적 볼 것을 기대하고,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함께 예수를 희롱한 것으로 보아 직무에 충실치 못하고 사악한 자(눅 23:7-11).
⑥ 악을 행하기 위해 대적 빌라도와 친구가 되고(눅 23:12)' 예수님께 '여우'라 불릴 정도로 간교하고 교활한 자(눅 13:32).
5. 구속사적 지위
① 메시야의 도래를 예비한 자였던 세례 요한을 처형한 자,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훼방코자 하나님의 종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사탄의 하수인.
② 빌라도와 힘을 합해 그리스도를 대적한 자.
6. 주요 공적
① 임기 중 리비아스, 디베랴 등 도시를 재건.
② 이방인으로서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의 분봉왕이 되어 43년간 통치(마 14:1).
7. 주요 실수
① 이복 동생인 빌립의 아내와 불법으로 재혼(마 14:3).
② 충고자 세례 요한을 권력을 남용하여 죽임(마 14:3-10).
③ 예수 그리스도를 희롱하고, 빌라도와 함께 그를 대적함(행 4:27).
8. 평가 및 교훈
① 분봉왕 혜롯 안디바는 세례 요한이 자기가 불법으로 동생의 아내와 재혼한 것을 꾸짖자, 자신의 죄를 돌이켜 회개하기는커녕 도리어 무죄한 세례 요한을 옥에 가두어버렸다(마 14:3,4). 이처럼 어리석은 자는 지혜자의 책망을 싫어하며, 도리어 그를 미워한다. 실로 견책을 달게 받는 자만이 삶의 참 지혜를 얻게 된다(잠 15:5,32).
② 헤롯 안디바는 부도덕하게도 동생의 아내와 재혼하는 죄를 저질렀다. 그러나 그의 죄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헤로디아와의 불법 재혼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결국 세례 요한을 죽이는 또 다른 죄를 초래했던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죄는 단 일회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파생적으로, 또한 연쇄적으로 다른 모양의 죄를 짓게 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약 1:15).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이 같은 죄의 속성에 유의하여 비록 작은 죄 를 짓게 되었다 할지라도 재빨리 회개함으로써 다른 큰 죄를 만드는 원인과 동기를 제거해야 하는 것이다.
③ 헤롯 안디바는 조카 딸 살로메의 청이 부당한 것임을 알면서도 이를 거절치 못하였다. 이러한 그의 우유부단함과 결단력 부족은 의인의 처형이라는 최대의 악을 초래했다(마 14:9,10). 여기서 우리는 지도자의 올바른 판단력과 그 결단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진리를 행할 수 있는 결단, 오늘날 무엇보다도 필요한 지도자의 자세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가? 이 세상을 선도하여 나가야 할 우리의 사명대로 죄악에 대하여 그 모양이라도 버리는(살전 5:22) 결단력을 갖추고 있는가?
④ 헤롯 안디바와 빌라도는 예수가 무죄함을 알면서도 예수를 대적하고 죽이는 일에는 서로의 권한을 인정해 주며 힘을 합하였다(눅 23:12; 행 4:27). 여기서 우리는 악한 자들이 성도를 대적하고 넘어뜨리는 일에는 비록 그들 사이가 서로 좋지 않다 할지라도 하나가 되어 연합함을 보게 된다. 그러기에 우리 성도는 악인의 연합에도 불구하고 승리할 수 있도록 주의 도우심을 덧입어야 한다.
9. 핵심 성구
"분봉왕 헤롯은 그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그의 행한 모든 악한 일을 인하여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이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눅 3: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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