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장 중풍병자의 치유와 레위의 소명사건 및 금식 논쟁과 안식일 논쟁
구속자적 개관:
마가는 우리 주님의 여러 측면 중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 순종하여 우리 죄인을 위하여 일하시는 종(빌 2:7)으로서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런 마가는 앞서 자신의 복음서 첫 장에서부터 공생애(公生涯) 개시 기사를 중심으로 일하시는 예수의 모습에 일단 주의를 집중시켰었다. 그리고 이제 그에 이어지는 본장에서 시작되는 2:1-8:26까지에서는 예수님의 전 3차에 걸친 갈릴리 사역 중에 발생한 실로 죄인을 위해 애써 일하셨던 주님의 주요 사건을 보도하고 있다. 여기서 이런 기록 뒤에 담겨 있는 마가의 의도 중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즉 마가는 예수의 초기 갈릴리 사역을 보도함에 있어서 모든 사건을 다 보도한 것이 아니라 몇몇 특정 사건만을 보도하되 그중 특히 예수의 구속주(救贖主)요 하나님과 성도를 위한 종으로서의 사역을 초기부터 유대 지도자들에게 부당한 배척을 당하셨음을 잘 드러내는 사건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결국 주님은 하나님과 성도를 위해 일하시는 종이셨지만, 아니 그랬기 때문에, 죄인을 구원하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는 주의 사역은 하나님과 인간을 이간(離間)시키고 나아가 하나님께 도전하려는 사탄의 궤계(詭計)에 의하여, 그의 사주를 받은 당시의 유대 정치 종교 지도자들로서 세상의 세력을 대표한 자들의 배척을 받으셨음을 강조하려는 마가의 의도를 보여 주는 것이다. 마가는 이를 강조함으로써 결국 예수는 세상의 배척은 받았으나 이를 오히려 당신의 구속사역 성취의 기회로 삼으시고 또 이를 이기고 부활 승리하셨듯이 자신의 복음서의 1차 수신자인 그 시대의 성도들로서 당장의 박해에 처해 있던 성도들에게 박해를 받겠으나 그것은 잠시이며 오히려 구원을 얻는 지름길에 불과하고 곧 구원 승리를 얻을 것을 격려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면 이제 이런 관점에서 구원과 사랑의 종이신 예수의 사역이 구약의 일부 내용만을 편협하게 왜곡 해석한 유대교의 오류와 자신들의 정치 종교적 기득권에 혈안이 된 유대지도자들에 의하여 배척당한 사건들의 몇몇 실례를 연속 보도한 본장의 내용을 개관하면 다음과 같다.
1-12절은 유명한 네 친구에 의해 지붕으로부터 주님 앞에 내려진 중풍병자의 치유 사건이다. 여기서 주님은 다른 치유 사건의 경우와 달리 특이하게도 질병의 치유로 끝나시지 않고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까지 선언하셨다. 이는 주님은 인간 문제의 일부가 아니라 모든 문제의 근원인 죄(罪)까지 해결하실 수 있는 구속주이시요, 또 죄 용서의 권한이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심을 선언하신 것이었다. 바로 이것이 발단이 되어 예수의 메시야직을 인정치 않으려는 서기관들과 논쟁이 야기되었던 것이다. 이 당시는 아직 주께서 자신의 메시야 직을 공개하기 이전 단계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을 목격한 자들과의 논쟁에서 자신이 제 2위 성자로서 죄를 사하는 직접적 권세를 가진 사실 만큼은 추호의 주저 없이 밝힌 사실에서 주님은 사역 초기부터 구속사역을 통하여 천국 구원을 도래시킬 당신의 영원한 메시야 직에 대하여 인지하고 계셨음을 확인케 된다.
13-17절은 주께서 레위 곧 마태를 제자로 부르시고 세리 출신이었던 마태의 친구들과 식사한 사건 때문에 야기된 비방을 보도하고 있다. 당시 유대는 로마 식민 체제하에 있었다. 따라서 그 식민 정부에 붙어서 세금 징수를 대행하던 세리들은 폭력과 포탈을 일삼는 자들로서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었다. 그리하여 이런 자들을 주님이 제자로 부르셔서 그들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 복음의 사도(使徒)가 되게 하신 사건에 담긴 주님의 사랑과 감화력 그리고 인간은 그 누구나 죄인이지만 자신의 죄를 깨닫고 변화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 등은 무시한 채 유대 지도자들은 무조건 비방만 하였던 것이다. 이에 병든 자에게 의원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영혼의 병자 같은 죄인들을 부르시고 가르치시는 당신의 사역의 정당성을 밝히시는 동시에 사실은 자신들은 영적으로 더욱 더 완악한 자일 수도 있으면서 자신을 의인(義人)으로 착각하는 자들의 어리석음도 꼬집으셨다.
18-22절의 금식(禁食)에 대한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과 그에 대한 주님의 답변 그리고 본장 말미에서 시작하여 다음 장 전반부까지 이어지는 2:23-3:6절까지의 안식일(安息日) 논쟁 및 안식일 치유 사건은 그 동기와 내용은 다소 다르더라도 다음과 같은 공통성을 갖는다. 첫째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께 제기한 다른 모든 논쟁들과 마찬가지로, 이 논쟁들도 예수님의 메시야직 즉 주님은 제 2위 성자 하나님이요(요 1:1,2) 세상의 구속주(救贖主)로 오사 성도를 구원하시고 천국(天國)을 세우실 왕이시며 이제 주님의 도래로 구약 시대가 끝나고 신약 시대가 도래하였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들이 제기한 질문 또는 논쟁이었다. 둘째 물론 이런 논쟁을 제기한 자들은 근본적으로 예수님의 메시야 직을 깨닫지 못한 것이 원인이기도 하지만 이들은 수단에 불과한 종교 의식(儀式)이나 계율을 그것들이 반영하는 구속사적 진리들, 즉 그 목적과 혼동하거나 오히려 더 내세우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결국 당시 예수께 유대 지도자들이 이런 논쟁을 제기한 것은 구속사의 시대가 바뀐 것과 주님은 율법을 지키는 분이시기 전에 그 율법을 직접 개폐할 권리가 있으신 주권자임을 모르고 그것도 율법의 목적이 아니라 형식을 강요하여 제기한 어리석고 악한 행동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셋째 주님은 공생애 초기 단계에서 야기된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그에 대한 근본적인 해답인 당신의 메시야로서의 신분과 주권 그리고 이제 당신의 도래로 구약 시대가 끝나고 신약 시대가 도래된 사실을 직설적으로 선언하시기보다는 금식 논쟁의 경우에는 우회적 표현으로, 안식일 논쟁의 경우에는 제기된 문제 자체에 대한 부분적 답변만 주셨지만 그렇다고 결코 문제의 본질과 이의 근본 해답인 메시야(Messiah)로서 당신이 가지신 구속사적 진리를 흐리게 하거나 유보하시지는 않으셨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각 논쟁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을 문제의 내용, 그 상황, 그리고 구속사적인 근본 진리와 연결시켜 매우 섬세하게 해석하여야 한다. 이상의 기본 관점을 가지고본장의 논쟁은 물론 복음서의 전 논쟁들을 이해하면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한편 본장에 나타난 두 논쟁들의 세부적 개관은 평행기사를 보도한바 제 9장의 개관을 필히 참조하라. 또한 본장 등에 나타난 논쟁들의 배경이 된 것은 물론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의 직접적 원인이 되기까지 했던 유대인들의 예수에 대한 오해와 배척에 대하여 구속사적 관점에서 전반적으로 개관해 둘 필요가 있는 바 이에 대해서 막 12장 연구 자료를 필히 참조하라.
외울 말씀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막 2:22)
중풍병자 치유 사건과 논쟁
1 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
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5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6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의논하기를
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8 저희가 속으로 이렇게 의논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
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레위의 소명
13 ○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무리가 다 나아왔거늘 예수께서 저희를 가르치시니라
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예수와 죄인들의 식사
15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저희가 많이 있어서 예수를 좇음이러라
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17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금식에 대한 질문과 예수의 답변
18 ○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혹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 하나이까
19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나니
20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21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22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안식일 논쟁
23 ○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24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희가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한 자들이 핍절되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26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27 또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본문 & 자료노트
보감-2:3-5 한 중풍병자와 네 친구의 믿음
1. 장애물을 극복한 불굴의 믿음
2. 위험까지 감수한 도전적 믿음
3. 이웃의 고통을 함께한 사랑의 믿음
4. 목적을 위해 직접 나아간 담대한 믿음
5. 진지한 열심을 보인 믿음
6. 자신만이 아닌 타인을 위한 믿음
7. 목적 달성까지 끈질기게 매어달린 믿음
8. 사람들의 이목도 무시한 용기 있는 믿음
9. 병 고침의 축복받은 믿음
10. 예수께 칭찬 받은 믿음
도표-2:3-12 성경에 나타난 주요 질병
1. 불임증(창 16:1; 눅 1:7)
2. 종기(출 9:8-12; 왕하 20:7)
3. 폐병(레 26:16; 신 28:22)
4. 열병(신 28:22; 막 8:14,15)
5. 설사병(대하 21:28)
6. 중풍병(마 8:6; 막 2:3-12)
7. 소경(마 9:27-31; 요 9:1)
8. 간질(마 17:15-18)
9. 혈루증(막 5:25)
10. 문둥병(눅 17:11-19)
도표-2:5 주요 이적 시행 전 주님의 말씀들
다음은 예수께서 이적을 행하시기 전에 말씀하셨던 내용들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이적을 행하실 때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계셨다는 사실과 믿음을 요구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1.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마 8:26; 막 4:39)
2.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 9:2,6,7; 막 2:5)
3. 내가 능히 이 일을 할 줄을 믿느냐(마 9:29)
4. 네 손을 내밀라(마 12:13; 막 3:5)
5.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마 14:31; 막 6:48; 요 6:19)
6. 너희에게 떡이 몇 개 있느냐(마 15:34; 막 8:5)
7. 세상 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마 17:25)
8.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마 20:33; 눅 18:41)
9. 네 이름이 무엇이냐(막 5:8; 눅 8:30)
10. 무엇이 보이느냐(막 8:23)
11.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요 2:4)
12. 네가 낫고자 하느냐(요 5:6)
13.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요 9:7)
14. 그를 어디 두었느냐(요 11:34)
15.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요 21:5)
주요주제-2:5 신약 시대의 사회 ․ 문화적 배경 본 권 신약 총론 참조
주요주제-2:10, 인자의 이해 본 권 13권 눅 12장 자료노트 참조
보감-2:13 선생으로서의 그리스도의 특징
1. 어떤 곳에든지 가르치심(마 5:1)
2. 부지런히 다니시며 가르치심(마 11:1)
3. 누구에게나 가르치심(마 22:16)
4. 권위 있게 가르치심(막 1:22)
5. 비유로 알기 쉽게 가르치심(막 4:2)
6.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르치심(요 3:2)
7. 직접 본을 보이시며 가르치심(행 1:1)
원어연구-2:8, 의논하느냐?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는 '디아로기조마이'( )이다. 이 단어는 '~을 통하여'(through, 엡 4:16)라는 뜻의 전치사 '디아'( )와 '말하다', '연설하다', '대화하다'라는 뜻의 동사 '레고'( )에서 유래한 동사 '로기조마이'( )의 합성어이다. 이 때 '로기조마이'는 '생각하다'(고후 11:5, 히 11:19)라는 뜻을 가진다. 이는 마음 속으로 어떤 일의 원인이나 이유를 헤아리거나 계산하는 따위의 행동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로기조마이가 전치사 '디아'와 합쳐질 경우, 이는 어떤 사건이나 일이 있을 때 이것들의 깊은 내막을 속속들이 파헤쳐 가며 '토론하다'(막 9:33) 또는 '생각하다(눅 1:29, 요 11:50)라는 뜻을 지니게 된다.
한편, '디아로기조마이'의 명사형인 '디아로기스모( )는 '변론'(눅 9:46) 또는 '시비'(빌 2:14) 및 '다툼'(딤전 2:8)이나 '의심'(눅 24:48; 롬 14:1)을 뜻하기도 한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본절에 나타난바, 예수께서 왜 마음에 의논하느냐고 서기관들에게 물음조로 질책하신 말씀의 참된 의미는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나의 사죄 선언(5절)에 대해 변론 및 다툼과 시비를 일으키며 의심스럽게 생각하느냐'라는 것이다.
죄 사함의 권세는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 따라서 본문에서처럼 죄 사함을 선포하신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서기관들은 예수께서 죄 사하는 권세로서의 한 증거로 중풍병자의 병을 고치신 사실을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도 예수 그리스도가 곧 죄 사함의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이란 사실을 믿지 않았다. 이에 본절에서 예수께서는 그들의 완악함과 불신을 책망하신 것이다.
인물연구-2:14, 마태
본권 마 9장 연구자료 참조
도표-2:16 바리새인들의 예수님 비난
본권 마 15장 자료노트 참조
주요주제-2:18-28 바리새인과 예수의 논쟁
본서 13권 눅 6장 연구자료 참조
보감-2:13-17 예수와 죄인
예수님은 죄가 전혀 없으신 의로우신 분이시나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죄악된 이 세상에 오셨다. 따라서 그분은 스스로 의로운 체하며 율법적인 자기 의에 만족하는 자를 배척하시고, 겸손하고 심령이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시며 이들을 구원하셨다. 이런 예수님이 죄인과 어떤 관계에 계시며 또 어떤 일을 행하셨는가 다음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1.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심(롬 8:3)
2. 죄사하시는 권세를 가지심(막 2:10)
3. 죄인을 부르러 오심(막 2:17)
4. 죄인을 위해 죽으심(롬 4:25)
5. 피 흘리심으로 죄사하심(히 9:22)
6. 죄인을 의롭게 하심(롬 3:28)
7. 근본부터 죄는 없으심(히 4:15)
2:1-12 중풍병자 치유 사건과 논쟁
앞장에서 백성들의 환영과 찬탄(讚歎)의 대상이었던 예수님께서 이미 본장에서는 유대 지도자들의 배척과 비난의 대상이 되어 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유대 종교의 지도자들이 교만과 위선에 젖어 있었던 탓에, 종의 모습으로 세상에 임하셔서 겸손과 섬김의 삶을 살아가시는 예수님의 메시야적 사역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막 12장 연구자료, '유대인의 예수 배척'을 참조하라.
한편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초기 갈릴리 사역의 중심지로 삼으신(마 9:1) 가버나움에서 중풍 병자를 고치신 사건이 소개되고 있다(마 9:1-8; 눅 5:17-26). 그런데 이 사건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여느 치유 사건과 다른 독특성을 갖는다. 곧 병자의 병을 치유하시기 이전에 그 병자와 그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먼저 죄 사함을 선포하셨다는 것이다(5절).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 인간에게 있어서 최우선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것이 죄 문제이며, 자신이 세상에 임하신 것은 온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함이라는 사실과, 또한 친히 하나님과 동등한 권세를 지닌 분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내셨다. 한편 그와 같은 예수님의 선언에 대해 유대 종교의 지도자들은 신성 모독(blasphemy)으로 정죄하면서(7절) 결국 예수님을 살해하려는 음모마저 꾸미기에 이르렀다(막 3:6).
이런 의미에서 본문은 예수께서 반대를 직면하시는 계기를 기록한 부분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① 비록 성도들은 자신이 직접 이웃의 어려움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할지라도,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함으로써 이웃 사랑의 도리를 훌륭히 수행할 수 있다. 중풍병자의 가련한 처지를 안타깝게 여기던 주위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계신다는 소문을 듣고 즉시 중풍병자를 침상에 누인 채 지붕에 구멍을 들어서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왔다. 그 결과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과 헌신적 사랑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고쳐 주셨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기 위해 반드시 재물과 재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하려는 열심을 성도가 지니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마땅히 행할 바를 우리에게 보여 주실 것이다(요일 3:10).
② 잘못된 메시야관은 오히려 더 큰 위험과 오류를 초래한다. 유대 종교의 지도자들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들의 메시야관이 잘못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작 세상에 임하신 메시야를 보고도 깨닫지 못했으며 심지어 신성 모독 죄로 메시야를 살해하려는 음모마저 꾸몄다(막 서론 특별자료, '메시야의 이해' 참조).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누구보다도 손꼽아 기다리면서 실제로는 너무나 잘못된 종말론 사상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성경을 인위적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온갖 거짓 주장을 퍼뜨리기 때문에, 자신들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까지 올바른 신앙에서 떠나도록 만들고 있다(마 24:23-26). 실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께 책망 받음을 면하지 못했던 것과 같이 이러한 자들 역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다.
2:1 수일 후에. - 혹자는 이를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셔서 집에 머무신 지 수일 후로 이해한다(Bruce). 그러나 이는 예수께서 가버나움을 떠나(막 1:38,39) 다른 지역에 순회 전도하시며 한적한 곳에 계신지 수일이 지난 후를 말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Could). 즉 예수께 고침 받은 문둥병자가 예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소문을 내어 예수님이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지 수일 후에 다시 예수께서는 가버나움을 방문하신 것이다.
다시 가버나움에‥‥소문이 들린지라. - 이 말은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등장하셨다는 소문이 들렸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들어가셔서 계신 '집'이 누구의 집인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 볼 수 있다. ① 베드로의 집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막 1:29에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와 안드레의 집에 계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헬라어 '다시'(팔린)라는 말이 이미 발생한 상황과 앞으로 발생할 상황을 밀접하게 연결하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Grant). ② 예수님의 집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본절과 병행구인 마 9:1에 보면 예수께서 '본 동네'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런데 본 동네라는 말은 예수님이 살던 집이 있는 동네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마 4:13에서 예수님이 나사렛을 떠나 가버나움에 가서 사셨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버나움에 예수님의 집이 이미 있었으므로 본절의 집은 예수님의 집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이다(Meyer).
2:2 많은 사람이‥‥도를 말씀하시더니. - 마가는 본절에서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다시 돌아오셨다는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매우 많이 모였음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즉 '용신 할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을 사용하여 너무 많이 모였기 때문에 자유롭게 활동하거나 통행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된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누가는 이때 모인 사람이 가버나움 사람뿐만이 아닌 것을 나타내기 위해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을 언급하고 있다(눅 5:17). 여러 지역에서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모인 것은 아마도 예수께서 베푸시는 이적을 체험하거나 구경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여 이적을 행하기보다는 '도'를 말씀하셨다. 한편 여기서 '도'(道)란 헬라어로 '로고스'(말씀)이다. 그런데 이 말은 헬라어 '레고'(말하다)에서 파생된 말로서 '셈', '설명', '말씀' 등의 의미를 지니며 구약 성경에서는 '다발'(말씀)로 표기된다. 그리고 구약에서 '다발'은 하나님 뜻과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계시하는 전달자로 여겨졌다(사 2:1; 렘 38: 21; 겔 1:1; 나 1:1). 따라서 여기서도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밝혀주는 진리의 복된 소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막 4:11). 한편 로고스의 신학적 개념에 대해서는 요 1장 연구 자료를 참조하라.
2:3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 중풍병은 주로 비만이나 동맥경화 중상이 있는 사람에게 경심증(驚心症, 놀라면 심장의 압력이 높아지면서 경련이나 마비를 일으키는 중세)이 악화되면 뇌성 색전증(塞栓症, 뇌동맥이 막히는 증세)이나 뇌출혈이 일어나면서 발생된다. 또한 이 병은 매독균의 감염으로 올 수도 있다. 그리고 불의의 사고로 받은 충격 때문에 생긴 척추신경의 염증으로 인하여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병이 발견되면 대뇌조직의 손상이나 척추신경의 파괴, 혹은 척추신경 등을 파괴하여 신체의 일부분이나 전신을 마비시킨다. 한편 이러한 마비 현상은 구약에서 ① 나발이 다윗이 자기를 징계하겠다는 소식을 들은 뒤에(삼상 2:37), ② 여로보암이 하나님의 사자의 책망을 들은 뒤에(왕상 13:4) 나타난 경우가 있다. 따라서 히브리인들은 이 병을 죄와 밀접하게 연관된 병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본절의 중풍병자는 그 병세가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이적을 통해 예수님의 치유를 간절히 기대했을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만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데리고 왔음이 기록되고 그들의 희생적인 봉사를 부각시키고 있다.
2:4 지붕을 뜯어‥‥달아내리니. - 중풍병자를 메고(네 사람은 예수님이 계신 집까지 왔으나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예수께 가까이 갈 수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지붕 위로 올라가서 지붕을 뜯고 중풍병자를 달아 내리는 비상한 방법을 사용했다. 그런데 그들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팔레스틴 가옥 구조의 특수성 때문이었다. 즉 당시의 팔레스틴의 전통적인 가옥 지붕이 평면이었고 집 옆면에는 지붕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다. 그리고 지붕은 굵은 나무로 대들보를 놓고 작은 나무들을 걸쳐놓은 후 진흙으로 발라서 비가 새지 않도록 하였다. 그리고 나서 풀이나 짚을 엮어서 그 위에 덮거나 또는 단단히 다져서 만든 흙 기와로 덮었다 이와 관련해서는 본장 연구자료, '신약시대 팔레스틴의 가옥 구조'를 참조하라. 따라서 네 사람은 큰 어려움 없이 지붕을 뜯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예수님 앞으로 달아 내릴 수 있었다. 한편 그들이 달아 내린 상은 짚이나 밀짚을 넣어 만든 요가 깔려 있는 것으로 그 당시의 서민들이 사용하던 일종의 침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2:5 저희. - 부르스(Bruce), 알렉산더(Alexander) 등은 이 말이 중풍병자를 메고 온 희생적인 봉사를 한 네 사람만 가리킨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 말은 테일러(Taylor)나 크랜필드(Cranfield)가 본 것과 같이 중풍병자를 포함한 다섯 사람을 모두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왜냐하면 네 사람이 행한 모든 일은 중풍병자가 요구했거나, 적어도 그들의 계획에 찬성하기 때문에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죄 사함을 받는 것은 본인의 믿음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병 고침을 받은 일이나 귀신에게서 놓임 받는 일, 그리고 죽음에서 살아나는 일 등은 본인의 믿음이 없이도 가능하였다(마 8:13; 막 1:25,26; 5:39-43). 즉 이러한 일들은 주위 사람들의 믿음이나 예수님의 절대적인 권위에 의하여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여 죄 사함을 받는 일은 죄를 지은 당사자의 믿음과 회개가 반드시 요청된다(막 16:16; 눅 7:50; 롬 4:5). 따라서 본절의 '저희'는 중풍병자를 포함한 다섯 사람을 모두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네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 - 예수님은 자신의 앞에 누워있는 중풍병자의 병을 고쳐 주시기에 앞서서 그에게 죄 사함을 선포하셨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행동은 이 사람이 중풍병으로 고통 받게 된 원인이 죄라는 것을 암시한다. 사실 중풍병을 포함한 질병들이 항상 죄 때문에 발작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중풍병만 하더라도 건강 관리의 소홀 때문에 발생하거나, 또는 불의의 사고로 받은 충격 때문에 생긴 척추 신경의 염증(압축척수염) 때문에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중풍병이 죄와 간접적으로 또는 직접적으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이 신뢰하던 모세 오경의 신 28:15-28의 경우를 보면 만약 하나님의 계명과 명령을 지키지 않고 죄악을 행하면 각종 질병으로 고통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으며 그 질병들의 목록 중에는 경심증(驚心症)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경심증은 중풍병의 초기 단계로 볼 수 있다(3절). 따라서 죄는 중풍병의 내면적 원인이며 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한편 중풍병이 죄와 간접적으로 연관된 예를 든다면 아비가일의 남편이었던 나발의 경우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삼상 25:32-38에 보면 나발은 비대하고 포도주를 즐기며 방탕한 생활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먹을 것을 달라는 다윗의 부탁을 거절하여 다윗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그리하여 다윗은 그를 징벌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들은 나발은 마음에 충격을 받아 몸이 돌처럼 굳어졌다. 따라서 나발에게 나타난 현상은 경심증이 악화되어 중풍이 발작되었으며 그 결과 전신마비를 일으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성경의 기록들로 보아 당시 사람들은 죄가 중풍병의 직접적인 원인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러한 경우들을 볼 때 예수님 앞에 누워있는 중풍병자도 타락과 방탕을 즐기며 오랫동안 나쁜 죄악에 빠져 있다가 중풍병에 걸리게 되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에게 죄 사함을 먼저 선포하신 것은 병의 원인인 죄를 먼저 제거하신 후에 그의 병을 치유하시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이러한 견해는 예수께서도 죄가 병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신 사실에 비추어 볼 때(요 5:14) 더욱 타당성을 지닌다. 이와 관련해서는 눅 5장 자료노트, '죄와 질병의 관계'를 보다 참조하라. 한편 예수께서 사죄 선포를 하신 사실은 그가 하나님의 신성과 권위를 지닌 분임을 보여 주는 계시의 행위였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7절을 참조하라.
2:6 어떤 서기관들‥‥마음에 의논하기를. - 예수께서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을 선포하는 자리에는 서기관들이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바리새파에 속하는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는 당시 사회의 식자층(識者層)으로서 하나님의 기록된 율법을 정식으로 교육받았다. 그리고 그 율법을 구전적(ㅁ傳的) 전통에 따라 해석하였다. 또한 그들은 시험에 의해서 서기관의 자격을 얻었으며 안수 받은 후에 율법 전문가로서 활동하였다. 신약 총론 '신약시대의 사회 ․ 문화적 배경'을 참조하라. 그리고 그들은 율법 교사의 권위를 수호하였으며 구전 율법인 '할라카'(halaka)를 권위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에 대해서는 막 7장 연구자료, '장로들의 유전'을 참조하라. 따라서 할라카에 거부하는 예수님의 메시지와 태도를 심히 못마땅하게 여겼으며(마 15:6), 예수에 대한 반감을 갖고 그의 행위를 살펴보기 위해 이 자리에 나왔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께서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을 선포하시자 더욱 불만을 품게 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선포할 수 있는 죄 사함의 선포를 예수께서 자신의 권위로 선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감히 소리 내어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으며 마음으로만 불만을 토로하였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권위가 너무나 당당하고 위엄찼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옳은 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2:7 참람하도다. - 이 말은 하나님의 신성과 권위에 합당한 것을 사람이나 다른 피조물에게 돌리는 것을 정죄하는 말이다. 그런데 서기관들은 예수께 이 말을 사용하였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오직 하나님만이 행사할 수 있는 죄 사함의 선포를 자신이 직접 함으로써 하나님의 신성과 권위를 자기에게 돌렸기 때문이었다. 사실 당시의 서기관들은 죄를 사하는 권세는 오직 하나님만의 특권이라고 믿고 있었다. 따라서 서기관들은 예수께서 죄 사함을 선포한 것은 하나님의 신성과 권위에 도전하는 뻔뻔스러운 행동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보기에는 예수님의 행동이 본질상 신성모독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님을 참람하다고 정죄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예수님과 아버지 하나님은 연합되어 있으며 그 신성과 권위에 있어서 동등한 분임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사실은 다음에서 잘 나타난다. 사 9:6,7의 '메시야 예언'에 보면 다윗의 위에 앉아서 영원히 통치할 한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아들은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으로 불릴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이 아들은 예수님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신성과 권위를 지닌 분임을 알 수 있다(본서 제 1권 성경 교리 중 신론의 '삼위일체'를 참조하라). 사실 예수께서도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여 자신과 하나님은 하나라고 말씀하셨다(요 10:30). 그리고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셨다(요 14:9). 그러나 서기관들은 이러한 사실을 믿지 못하고 예수님을 참람하다고 정죄한 것이다. 한편 유대인에게 있어 참람 죄는 돌로 쳐 죽이는 형벌을 당했다(레 24:10). 실제로 스데반도 이러한 형벌을 당해서 죽었으며(행 7:54-60) 예수 역시 참람 죄로 정죄 받으셨다(마 26:64-66).
2:8 중심에 아시고. - 여기서 '중심에'는 헬라어로 '토 프뉴마티'( )로서 직역하면 '영으로'이다. 그리고 '아시고'는 헬라어로 '에피그누스'( )로서 감각 기관을 통하여 얻은 것이 아니고 영적 능력을 통하여 얻은 깊고 정확한 지식을 말한다. 따라서 '중심에 아시고'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영적 능력으로 서기관들의 마음을 꿰뚫어 봄으로써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정확하고 분명하게 파악했음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성경에서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숨은 비밀을 간파하는 일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삼상 16:7; 대상 28:9; 요 2:25). 따라서 예수님이 서기관들이 마음에 품고 있는 생각을 꿰뚫어 보신 것은 자신이 전지한 분이며 신적 능력을 소유한 분임을 나타내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 2장 자료노트, '전지' 참조.
2:9 중풍병자에게‥‥어느 것이 쉽겠느냐. -사실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 라'라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고 말하는 것은 모두 다 하나님의 신적 권위와 능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측면에서 본다면 이 두 가지 일을 성취하는데 있어서 어느 것이 더 쉽거나 어렵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서기관들에게는 아마도 '죄 사함을 받았다'고 선언하는 것보다 '일어나 걸어가라'고 말하는 것이 더 어렵게 느껴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죄 사함을 받는 것은 어느 누구도 확인할 수 없으며 어떤 외적인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일어나 걸어가라'고 하는 말은 완전한 치유, 즉 외적인 증명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 질문을 한 것은 중풍병자를 이적을 통하여 치유함으로써 자신이 신적 능력을 지녔다는 것과, 또한 죄 사함의 권세를 지녔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견해는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10절)는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더욱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
2:10 인자. - 마가복음 전체에서 14회 사용되는 이 용어가 본절에서 처음 나온다. 이 말은 헬라어로 '호휘오스 투 안드로푸'( )로서 문자적으로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 말은 신약에서 총 94회 나온다. 그런데 요 12:34; 행 7: 56; 계 1:13; 14:14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켜 사용한 독특한 칭호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이 말은 예수님이 사람의 아들로 태어난 완전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칭호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는 완전한 인간이 되어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요구하시는 '의'를 온전히 성취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칭호를 단순히 '사람의 아들'이라는 의미를 초월하여 더 넓은 의미로 사용하였다. 즉 예수님은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분, 즉 성육신 한 분임을 나타낼 때 이 칭호를 사용했다. 그리고 자신이 성육신하여 인간이 되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속성과 권세를 지닌 신적 존재임을 나타낼 때 이 칭호를 사용했다. 예를 들어 본절의 경우와 같이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죄 사함을 선포할 때(마 9:6; 눅 5:24), 그리고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주겠다고 할 때(마 16:13-19)에 인자라는 칭호를 사용한 것이다. 특히 예수님은자신이 메시야 직분을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낼 때 인자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사실 당시의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나타나서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행동을 통하여 자신들을 구원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막 서론 특별자료, '메시야의 이해' 참조, 따라서 예수님은 메시야라는 칭호를 자신에게 사용하는 것을 피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인자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자신이 메시야 직분을 수행하고 있음을 나타낸 데는 다음과 같다. ① 사 53:3-10에 예언된 고난 받는 종임을 나타낼 때 이 칭호를 사용하였다(눅 18:31-33). ② 십자가에 달려죽음으로써 구속 사역을 성취하는 분임을 나타낼 때 이 칭호를 사용하였다. 즉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자신도 십자가에 달려 죽는 방법을 통하여 인류의 구속을 성취하는 메시야임을 나타낼 때 이 칭호를 사용한 것이다(민 21:9; 요 3:14). ③ 우주적인 통치권을 가진 메시야임을 나타낼 때 이 칭호를 사용했다. 이러한 사실은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을 것이며 하늘 구름을 타고 오리라(막 14:62)는 말씀에서 잘 나타난다. 그런데 이 말씀은 예수님이 단7:13,14의 예언을 성취하는 메시야임을 보여 주는 말씀이기도 하다. ④ 최후의 심판을 수행하는 심판권을 가진 메시야임을 나타낼 때 이 칭호를 사용하였다. 그 예수는 인자가 세상 끝 날에 천사들을 보내어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을 것이라고 하신 말씀에서 잘 나타난다(마 13:38-42). 따라서 예수님이 자신에게 호칭한 '인자'는 예수님이 완전한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한 말일 뿐만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의 속성과 권세를 지니고 메시야 사역을 수행하는 신적 존재임을 나타낼 때 사용한 이중적 칭호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사복음서 개론 특별자료, 예수 시리즈 중 예수에 대한 묘사와 칭호들을 참조하라.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알게 하려. - 예수의 이적은 그가 하나님이란 사실과 그 결과 당연히 죄를 사하는 권세를 지녔음을 알게 하려는 목적으로 시행되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이적을 목격한 자나 이를 읽는 자는 마땅히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의 죄를 해결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2: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 이러한 명령(소이 레고)은 일반 사람들이 다른 존재의 힘을 빌어 말하는 것과는 달리 전적으로 자신의 권위에 입각해서 명령하는 것으로 그리스도만이 지니신 절대적인 신적 권위를 보여 준다.
일어나‥‥집으로 가라. - 이 말씀은 완전한 치유를 전제한 것이다. 왜냐하면 완전한 치유가 없이는 몸을 움직일 수도 얼었던 중풍병자가 일어나 자기가 눕혀서 온 상을 가지고 집에 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말씀이 성취되는 것은 예수께서 중풍병을 치유하시되 일반 의술과는 달리 즉각적으로 치유하는 신적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또한 이러한 너무나 분명한 객관적인 증거가 서기관들에게는 예수께서 죄 사하는 권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2:12 그가 일어나 곧‥‥나가거늘. - 말씀에 뒤이어 곧바로 그 말씀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가 발생한다는 사실 역시 그리스도의 치유의 능력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신적 기원을 지님을 보여 준다.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 무리들이 이러한 반응을 보인 것은 예수께서 말씀으로 중풍병자를 즉각적으로 고치신 사건이 놀라운 일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편 마태와 누가의 병행구에 의하면 무리들의 놀람 속에는 두려움과 공포가 깃들어 있었다(마 9:8; 눅 5:26). 그런데 그들이 두려움과 공포를 느낀 이유는 중풍병자가 치유된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당시의 무리들은 역사적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은 거룩하고 숭고한 분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레 11:44).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의 죄악성을 느꼈을 것이며, 그 결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두려움, 공포의 감정이 복합적으로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무리들은 이 사건을 보고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런데 그 이유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심판하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질병을 치유하시고 죄악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하여 임재 하셨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병행 구절인 눅 5:26에서는 '기이한 일을 보았다'로 나온다. 즉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행하던 일은 역사상 없었던 초자연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본 치유 사건의 핵심이 죄 사함에 있다고 볼 때 그리스도의 죄 사함이란 이 기이한 사건은 그 이후로부터 지금까지 계속되어 오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죄 사함은 초자연적인 기이함의 극치라 할 수 있다.
2:13-17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신 예수
이미 1:16-20에서 베드로를 위시한 4명의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신 바 있는 예수님께서는 이제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고 계신다. 이처럼 12제자 가운데 앞선 4제자와 더불어 마태만을 부르는 장면이 공관복음서 전체에 기술되어 있는 것은(마 9:9-13; 눅5:27-32) 그 사건이 그만큼 감동적이며 하나님 나라의 일꾼을 부른 전형적인 예이기 때문일 것이다. '12사도의 행적'에 대해서는 행 서론 특별자료를 참조하라.
그런데 당시의 유대 사회에서 세리는 '죄인' 혹은 '매국노'로 낙인찍혀 있었다. 그러므로 죄인 취급받던 세리를 예수님께서 자신의 제자로 부르신 것은 갈릴리의 미천한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셨던 때와 마찬가지로 주님 자신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의인을 부르기 위함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시기 위함(17절)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세리 레위와 함께 그의 집으로 들어가신 예수님께서 레위의 동료였던 다른 많은 세리들과 교제를 나누신 것도 교만과 위선에 젖어서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멸시하고 정죄하기에 급급하던 유대 종교의 지도자들과는 달리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는 친히 하나님과 동등된 본체를 버리시고 종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셔서 지극한 겸손과 섬김의 삶을 살아가셨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해 준다(빌 2:6-8). 동시에 이러한 본문은 죄 인을 구원하기 위한 예수의 사역이 구체화되면 될수록 반대자의 저항 역시 점점 노골화됨을 보여준다. 즉 종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께서는 쉴틈 없이 복음 전파사역을 수행하시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이를 방해하려는 사탄의 충동으로 말미암아 점점 예수를 고난으로 몰아넣고자 애쓰는 것이다. 이처럼 본문에는 몸소 종으로 오사 죄인들의 친구가 되실 예수님의 사람과 겸손하심에 반해 바리새인들의 질시와 악한 세력의 기승이 대조되어 나타나고 있다.
한편 우리가 본문을 통하여 깨닫게 되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①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는 자들은 지금까지 자신이 닦은 세상적 기반에 더 이상 미련을 두지 말고 즉시 주님의 뒤를 좇아야 한다. 세리 레위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자. 베드로를 위시한 네 명의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좇았다(눅 5:28). 비록 당시의 유대 사회에서 세리라는 직업이 주위 사람들의 비난을 한 몸에 받기는 했어도 경제적 풍족을 보장해주는 직업이었기 때문에,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세리가 되기 원했고 또한 그만큼 아무나 세리로 채용되지도 않았다. 그런데 레위는 '나를 좇으라'는 예수님의 단 한 마디 말씀에, 지금까지 온갖 비난을 무릅쓰고 자신이 이룩한 삶의 기반을 포기한 채 주님의 뒤를 따라 나선 것이다(14절). 실로 온전하고도 즉각적인 순종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일꾼들에게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태도이다.
② 성도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부류의 사람들과도 거리낌 없이 교제를 나눌 수 있어야 한다. 비록 세상적 관점에서 볼 때 도무지 자신의 친구가 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증거하기 위해서라면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그들의 친구와 이웃이 되기를 자청해야 된다. 즉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의 영광을 버리고 종의 모습으로 세상에 임하여서 친히 겸손과 섬김의 삶을 살아가셨듯이. 그리고 가장 높으신 하나님께서 인간 중에서도 가장 낮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함께 식사하셨듯이(16절) 이제 우리 성도들 역시 사회적으로 소외당하고 무시 받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아낌없이 사랑과 관심을 쏟아야만 하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할 때라야, 지금까지 우리 성도들이 아무리 힘껏 입으로 복음을 전해도 결코 마음의 문을 열지 않던 자들이 비로소 복음을 받아들임과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삶 중심에 모시게 될 것이다(살전 2:13).
2:13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 예수께서 마태를 부르신 장소가 바닷가라는 사실은 마가복음에만 나온다. 한편 여기서 '다시'(팔린)란 말이 쓰인 것은 막 1:16의 사건, 즉 예수께서 갈릴리 바닷가에서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제자로 부르신 사건이 있은 후 다시 갈릴리 바닷가에서 이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은 예수님의 사역이 반복적 형식을 띠고 있음을 보여 준다. 즉 막 1:14-20에 보면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파하시고 해변으로 지나시다가 앞의 네 제자를 부르셨다. 그런데 본절과 14절에서도 예수께서 바닷가에 나가셔서 복음을 전파하시고 지나가시다가 레위(마태)를 부르셨다.
가르치시니라. - 본문에서 이 말이 미완료시제(에디다스켄)로 쓰인 것은 예수의 가르치심이 일시적인 일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계속적으로 시행되어 옴을 보여 준다. 이처럼 예수님의 가르치시는 사역은 복음서에서 초자연적인 이적과 같이 화려하게 묘사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지속적으로 시행된 가장 가치 있는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2:14 또 지나가시다가. - 앞 절에서 가르치시는 행동에 이어 해변가에서 세관이 있는 곳으로 장소 이동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준다.
알패오의 아들 레위. - 본절의 '레위'에 대하여 마태는 '마태'(마 9:9)로 기록하였고, 누가는 마가와 마찬가지로 '레위'로 표현하였다. 그런데 '친한 자'라는 뜻을 지닌 레위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이 있는 마태는 서로 다른 사람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동일한 인물을 지칭하는 두 이름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왜냐하면 병행구인 마 9:9에서 '레위'라는 이름 대신에 '마태'라는 이름이 쓰이고 있으며, 12제자 명단에서도 '세리 마태'(마 10:3)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그의 본명은 레위였으며, 사도로 부름 받은 후에 마태라는 새 이름을 받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12제자 명단에서 '레위' 대신에 마태라는 이름이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마태에 대해서는 마 9장 연구 자료를 참조하라.
세관에 않아 있는 것을 보시고. - 레위가 앉아 있었던 세관은 가버나움에 있었다. 그런데 가버나움은 갈릴리 바다 서북편에 위치한 도시로서 다메섹, 두로, 예루살렘, 이집트 등을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지였으며 상업이 발달하였다. 또한 빌립의 영토인 데가볼리에서 헤롯 안디바의 영토에 들어서는 첫 성이었다. 따라서 그곳에는 국립 세관이 있었으며 어업세, 통관세, 통행세 등을 징수하였다. 가버나움에 대해서는 마 9장 자료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그런데 그가 세관에 앉아 있었다는 것은 그의 직업이 세리였음을 보여준다.
나를 좇으라. - 이 명령 역시 현재 미완료형(아폴루데이모이)이 사용됨으로써 단 회적으로 한번 좇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계속된 추종을 의미한다. 즉 이는 세리로서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예수의 제자로서의 새 삶을 시작하라는 요청이다.
일어나 좇으니라. - 이와 병행 구절인 눅 5:29에서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란 말이 첨가되어 당시 마태가 예수를 따르기 위해 취한 자기희생을 강조하고 있다.
2:15 그의 집에 않아 잡수실 때에. - 혹자는 여기서 '그의 집이 예수의 집이라고 하나(Meyer) 병행 구절인 마 9:10과 눅 5:29에서 볼 때 레위의 집임이 명백하다(Bruce, Taylor). 즉,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눅 5:29) 베풀었던 것이다. 이로 볼 때 레위는 큰 잔치를 베풀 만큼 부자였으며 또한 예수의 제자 됨을 기뻐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세리와 죄인들. - 당시의 세리들은 팔레스틴을 다스리는 로마 관리들 밑에서 일하는 자들과 세금 청부업자 밑에서 일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두 부류로 나누어지는 것은 토지세, 인두세(人頭稅) 같은 정기적인 세금은 로마관리들의 직접 관할 아래 징수하였고, 어업세, 통관세, 통행세 등의 비정기적인 세금은 세금 청부업자들에게 맡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이 이와 같이 이중적인 세금징수 제도를 둔 것은 정기적인 세금을 징수하는 것은 비교적 손쉬운 반면, 비정기적인 세금을 징수하는 것은 까다롭고 복잡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편 세금청부업자와 세리들은 로마인도 있었지만 대개 유대인들이 많았다. 그리고 세금 청부업자들은 일정 지역에서 어업세, 통관세, 통행세 등을 징수할 수 있는 권리를 얻기 위해 선금으로 계약금액을 지불하였다. 그리고 나서 더 많은 세금을 거두어서 자기들이 지불한 돈을 충당하였으며 많은 이익을 남겼다. 따라서 이들에 의한 착취가 극심하였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세금 청부업자와 세리들을 강도와 같이 취급하였다. 특히 유대인 청부업자와 세리들은 민족의 반역자로 규정되었으며 이중으로 천대와 멸시를 받았다. 예를 들어 세리와 그의 가족들은 유대인들의 자치적인 조직에 직무를 담당할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으며, 심지어 유대인 법정에서 증언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세리들은 죄인들, 창기들과 함께 민족적 동질을 파괴하는 극악한 무리들로 분류되었다(마 9:10,11; 11:19; 눅 5:30). 한편 여기서 '죄인들'이란 어떤 형사적 범법 행위를 했다는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의 서기관적 전통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천민 계층을 가리키는 전문 용어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문자 그대로의 죄인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모세의 율법에 대하여 바리새인들의 해석대로 따르지 않는 세속적인 자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절의 '세리와 죄인들'은 당시에 사회적으로 죄인 취급을 받으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정죄의 대상이 되었던 사람들을 통틀어서 지칭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이‥‥좇음이리라. - 지금까지는 사회적으로 소외되었으며 정죄 받았으나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그리스도에 의해 친구로 인정되었으며 위로 받았기 때문에 예수의 가르침에 많은 동조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17절).
2:16 바리새인의 서기관. - 본문을 더 정확히 묘사하면 '바리새파에 속하는 서기관'이나 일반적으로 '바리새인의 서기관'이란 표현은 바리새인과 동일시된다. 사실 유대인의 문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동일시하며 복음서에서도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동일 부류의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즉 복음서에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율법에 관해서 항상 동일한 견해를 가지고 있고 사두개인들에 대하여 반대하는 자들로 묘사되어있다. 예를 들어 예수에서 다윗과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마 22:41 이하에서는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한 것으로 되어 있고, 병행 구절인 막 12:35 이하에서는 서기관들에게 말씀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의 견해는 일치하는 반면, 사두개인들의 견해와는 일치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바알세불 논쟁(마 12:24; 막 3:22)에서도 나타난다. 그런데 이와 같이 유대 문서와 복음서에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동일시하고 있으나 전혀 구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서기관은 바리새인이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며, 또한 바리새인 중에서도 시험을 치루어 합격한 사람에게만 서기관의 자격이 주어지기 때문이다(6절 주석). 그러나 이러한 구별은 역할의 차이에 불과할 뿐이므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유사한 부류라는 사실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는 신약 총론, '신약시대의 사회 ․ 문화적 배경'을 참조하라.
제자들에게 이르되. - 앞부분에서 예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면서 죄 사함을 선언했을 때 서기관들은 '마음속으로 불만을 가졌으나'(6절) 본절의 사건에서는 그 불만을 제자들에게 털어놓았다. 그리고 조금 있으면 예수님에게 직접 불만을 토로하게 된다(24절). 이처럼 당시 예수의 적대자들은 예수에 대한 적대감을 점점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어찌하여 세리와‥‥함께 먹는가. - 서기관들이 이와 같이 불평한 것은 예수님의 행동이 그들의 생활 방식과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레위기 법전과 장로들의 유전에 입각한 엄격한 율법주의를 중요시했다. 또한 그들은 율법주의적 관습과 법령들이 요구하는 조건들을 정확히 준수함으로써 완전한 상태의 정결과 정화를 성취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일상의 교제에서 생기는 의식적 불결을 줄이거나 제거하기 위해서 계획된 정교한 율법적 규칙들을 제정하였다. 예를 들자면 랍비 문서에 있는 '무식한 자들과 함께 식탁에 임하여 길게 누우면 안되며․․․' 또는 '바리새인은 그 땅의 백성과 함께 희생을 먹어서는 안 된다' 등의 조문을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두 번째 조문에서 '땅의 백성'은 율법을 모르는 천한 백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들이 보기에는 예수님의 행동이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에게 적합한 것이 아니었으며 매우 불결하고 부정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라고 불평 섞인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의 식사에 기꺼이 참여한 것은 그가 세리와 죄인들의 행위들을 묻어 두거나 인정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타락한 무리들과 교제를 통하여 자신이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를 보여줌으로써 그들이 새로운 삶을 살게 하려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2:17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 이 말은 바리새인들의 불평 섞인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으로서 당시 팔레스틴에서 흔히 통용되던 속담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건강한 자와 의인'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정말 건강한 자이며 의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자칭 건강한 자요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여기서 '의원'은 예수님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를 제거함으로써 영혼을 치유하는 의원이다. 따라서 그는 죄인들을 부르셨으며 그들에게 사죄를 선포함으로써 그들의 영혼을 치유하셨다. 그러나 의인이 하나도 없음에도(롬 3:11) 불구하고 자칭 건강한 자요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께 나아와 치유 받기를 원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쓸데없는 존재였다. 그러므로 본절은 예수님의 구원 사역은 스스로 건강하고 의롭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죄악을 깨닫고 죄 사함을 갈구하는 자들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2:18-22 금식에 관찰 논쟁
이미 앞 단락에서 예수께서 당시 소외당해 죄인 취급받던 세리들과 함께 식사하심에 대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비난을 소개한바 있는 본서의 기록자 마가는 이제 계속해서 당시 사람들의 보편적인 생각과 메시야 시대에 가져야 할 생각이 확연히 다름을 금식 논쟁을 통해 부각시키고 있다. 본문에는 일주일에 두 차례씩 규칙적으로 금식하는 바리새인의 제자들과 요한의 제자들의 예를 들면서, 왜 예수님과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는지 묻고 있는 자들이 등장한다. 아마 그들은 금식이야말로 종교적 경건의 상징으로 생각하면서, 예수님과 제자들을 경건하지 못한 부류의 사람들로 매도하려는 의도를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와 같은 그들의 비난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더 큰 논쟁을 일으킬 위험이 있는 직선적 답을 피하시고, '혼인집 손님들과 신랑의 비유'(19,20절)와 '생베조각의 비유'(21절), 그리고 '새 포도주와 새 부대의 비유'(22절)를 교훈하심으로써 간접적으로 자신은 구주이시며, 메시야가 도래한 새로운 시대의 윤리는 율법의 의무적인 준수에 국한될 수 없다는 보다 근본적인 진리를 보여 주었다. 이처럼 본문은 예수의 가르침이 소위 말하는바 유대교를 개선시킨 정도의 것이 아니라 구약 율법의 완성자로 임하신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된, 구약과는 완전히 다른 체계를 지니는 새로운 것임을 보여 주며, 이를 과거의 것으로 통제하려는 것이 무의미함을 강조한다. 한편 예수님은 당신을 혼인 잔치의 신랑으로 비유하며 빼앗기는 날이 있을 것이라 언급함으로써 앞으로 있을 십자가 수난을 미리 예고하셨다. 한편 이 부분에 나오는 비유의 보다 자세한 의미에 대해서는 마 9:14-17; 눅 5:33-39 문단 강해 부분을 참조하라.
한편 본문의 세 비유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①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총에 감사하며 늘 기뻐하는 생활을 해야만 된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하나님나라의 혼인 잔치에 초대된 자들이므로 그 생활을 감사함으로 누려야 하는 것이다. 만약 성도들 중에 근엄한 얼굴로 심각한 표정을 지어야만 경건한 자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직도 예수를 통한 구원의 기쁨을 맛보지 못한 자라고 할 수 있다(살전 5:16).
②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금식은 그저 습관적으로 식사를 거르는 외부적 행위가 아니라 겸비한 자세로 말씀을 상고하며 기도에 힘쓰고, 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 온전히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느 9:1-3; 사 58:6,7). 그러므로 주위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여 자신의 종교적 경건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금식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으며, 오히려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된 위선에 지나지 않는다(마 6:16-18).
2:18 요한의 제자들과‥‥금식하는데‥‥아니하나이까. -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이 금식한 정확한 목적은 본문에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아마도 구약시대의 전통과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구체화된 관습에 따라서 금식했을 것이다. 사실 구약시대에 있어서 금식은 괴로움이 있을 때나 또는 참회할 때에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과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려는 목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러한 경우의 예를 들자면 다원이 밧세바와 불륜의 관계를 맺은 결과로 태어난 아이가 죽게 되었을 때 행한 금식(삼하 12:16-23)과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강탈한 후 하나님의 책망을 들었을 때 행한 금식(왕상 21:27)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금식은 율법에 의하여 제정된 속죄일을 지키기 위하여 실행되었다(레 16장). 그리고 국가적인 재난을 피하기 위한 회개의 행위로 실행되기도 했다. 또한 개인적이거나 국가적인 재난이 발생한 후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면서 그 사건을 애도하기 위하여 실행되었다(욜 1:14; 2:7). 그런데 이러한 금식들은 여러 날 계속되는 수도 있었고 하루 동안 실행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음식물뿐만 아니라 포도주나 물도 마시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또한 의복을 찢거나 굵은 베옷을 입고 땅바닥에 앉아서 머리에 먼지와 재를 뿌리는 행위를 곁들였다. 한편 예언자 시대가 끝나갈 무렵에는 다른 동기의 금식이 전통화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슥 7:5; 8:19 등에 보면 네 번의 금식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런데 랍비의 주석(TJ, Taanith)에 의하면 이 네 번의 금식은 다음과 같은 목적으로 실행되었다. ① 네 번째 달(담무스, Tammuz) 17일- 율법의 비석을 깨버린 것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하여 ② 다섯 번째 달(압, Ab) 9일- 느부갓네살이 성전을 파괴한 날을 잊지 않기 위하여 ③ 일곱 번째 달(티스리, Tishri) 3일- 그달리야의 살해당함(왕하 25:25 이하)을 잊지 않기 위하여 ④ 열 번째 달(데뱃, Te-beth) 10일-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공략한 것을 잊지 않기 위하여 금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전통은 예수님 당시까지 계속되었다. 한편 시간이 흐름에 따라 금식은 신앙심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실행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신앙이 깊은 사람들은 이레에 두 번씩, 즉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하는 것이 관습이었으며(눅 18:12; 타아 12상; 디다케 8:1). 특별히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은 더 많이 금식하여도 좋았다(외유 8:6). 그리고 이러한 관습도 예수님 당시에 널리 퍼져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경우의 금식은 특별한 죄악이나 회개에 관계없이 자기의 신앙과 헌신, 경건함 등을 표현하기 위한 목적으로 실행하였다. 이상과 같은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경건한 유대인들 사이에는 금식이 보편화되어 있었다. 따라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이 금식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추측해 볼 수 있다. ① 스가랴서에 기록된 4번의 금식 중에서 어느 한 가지를 지키기 위하여 금식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② 로마의 압제로 인하여 당하고 있는 국가적 재난을 슬퍼하며 애도하기 위하여 금식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③ 자기들의 신앙과 헌신, 경건함 등을 나타내기 위하여 금식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④ 요한의 제자들의 경우, 그들의 선생이 감옥에 갇혀있는 것을 애통해 하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얻기 위하여 금식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들과 관련하여 볼 때 예수께 본절과 같이 질문을 한 것은 왜 제자들에게 ① 스가랴서의 전통에 따른 금식을 가르치지 않는가, ② 국가적 재난을 슬퍼하며 금식하도록 가르치지 않는가, ③ 금식을 통하여 신앙과 헌신, 경건함 등을 표현하도록 가르치지 않고 먹기를 탐하는가 라고 비난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이 레위의 집에서 식사를 한 사실과 병행구인 눅 5:33에 비추어 볼 때 ③번 항의 이유 때문에 이 질문을 했다고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혹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 본문에서는 잘 나타나 있지 않으나 병행 구절인 마 9:14에 따르면 '요한의 제자들'이 직접적인 질문자이다. 또한 그 부분에서는 '그 때에'라는 시간을 언급함으로써 레위의 집에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더불어 잔치를 벌이고 있을 때 이 일이 발생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눅 5:33에 의하면 '저희'라는 말이 나옴으로써 질문자들 가운데는 레위의 잔치에서 예수의 제자들에게 불만을 말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부분적으로 포함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바리새인의 제자들. - 일반적으로 바리새인들은 교사가 아니므로 제자들을 두지 않았다. 따라서 이 말은 서기관 계열에 소속되어 있는 바리새인의 제자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또는 바리새인들의 교훈과 생활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한편 금식에 대한 논쟁에 대해서는 눅 6장 연구 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2:19 혼인 집 손님들이‥‥금식할 수 없나니. - 예수님은 본절에서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 이유는 혼인 잔치를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이 혼인잔치 기간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을 의미하며, 신랑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킨다(마 25:1 이하; 요 3:29; 고후 11:2; 계 19:7). 그리고 이 기간을 통하여 예수님은 죄와 질병, 재난으로 고통당하는 자들을 구원하여 자신의 신부, 즉 천국 백성으로 삼으셨으며 그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셨다. 사실 이러한 일은 예수께서 재림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특별히 예수께서 지상에서 활동하시는 기간은 혼인잔치의 기간이요 기쁨이 넘치는 축복의 기간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잔치에 참여하는 자들이 금식을 함으로써 자신을 괴롭게 하며 슬픈 기색을 보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뜻으로 예수께서 본절의 말씀을 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하여 자신은 신적 존재이며 메시야라는 사실과 메시야의 시대가 이미 도래했다는 사실을 암시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구약의 여러 곳에서 하나님을 신랑으로 묘사하고 있으며(사 54:6; 호 2:16-20), 유대 랍비들이 메시야의 도래 또는 메시야의 잔치에 대해서 가르칠 때에 메시야를 '신랑'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가끔 묘사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사복음서 개론 특별자료 2, 예수 시리즈 중 '예수에 대한 묘사와 칭호들'을 참조하라.
2:20 신랑을 빼앗길 날‥‥금식할 것이니라. - 여기서 '신랑을 빼앗길 날'은 히브리인의 결혼 풍습에 있어서 결혼식이 7일간 계속되다가 마지막 날 신랑을 신부에게로 데려다 주는 것으로 결혼식이 마치게 됨을 그 배경으로 한다(창 24장 자료노트, '결혼 절차' 참조). 그러나 이는 실제적으로 예수께서 원수들에게 잡히셔서 고난 받고 십자가에서 죽게 되는 날을 의미한다. 따라서 예수님은 본절에서 지금은 혼인 잔치의 기쁨을 누리는 기간이므로 금식하지 않지만 앞으로 원수들에게 신랑을 빼앗기게 되면 자연히 금식을 통하여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게 될 것이며 슬픔을 표현하게 될 것임을 가르치셨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본절은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은 이유는 예수님이 금식을 부정하거나 가르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2:21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 여기서 생베 조각은 아직 표백하지 않은 새로 짠 천으로 대단히 질기고 신축성이 있는 옷감이나, 상징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낡은 옷은 약간의 힘만 가하여도 찢어질 수밖에 없는 옷으로, 상징적으로는 유대교의 전통과 의식에 입각한 바리새인들과 세례인 요한의 교훈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절은 유대교의 낡고 생명력이 결여된 전통에 입각한 교훈과 예수님의 왕성한 생명력을 지닌 새로운 복음이 조화를 이루지 못할 것임을 가르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러한 비유의 말씀을 또 다시 반복하신 것은 혼인잔치와 금식에 대한 예수님의 앞선 가르침을 바리새인의 제자들과 요한의 제자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아마도 그들은 유대교의 전통에 근거하여 금식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비판하고 배척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은 마치 생베를 낡은 옷에 붙이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복음은 유대교의 전통적인 교훈을 능가하는 것이며 새로운 하나님나라를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본절은 유대교의 시각에서 예수님의 복음을 이해하려고 하거나 판단하는 것은 마치 생베 조각이 낡은 옷을 찢는 것처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혼란과 고통을 주게 될 것임을 가르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2:22 새 포도주를‥‥버리게 되리라. - 여기서 새 포도주는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을 의미하며 낡은 가죽부대는 유대교의 낡은 전통과 의식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절은 유대교의 낡은 전통과 의식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을 비유를 통하여 가르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당시 팔레스틴에서는 주로 염소 가죽으로 부대를 만들어서 물이나 포도주를 담는 용기로 사용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가죽 부대는 낡게 되면 얇아지고 신축성을 잃게 되어 쉽게 터졌다. 그러므로 낡은 가죽 부대에 새로 담근 포도주를 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왜냐하면 포도주가 발효되면서 생기는 가스의 압력으로 낡은 가죽 부대가 터지게 되어 포도주와 부대를 모두 쓰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본절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유대인의 낡은 전통과의 의식 속에 결합하려고 하는 것은 마치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담는 것과 같아서 매우 부적절하고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어리석은 일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새롭고 생명력 있는 교훈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새로운 가치 체계와 생활방식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 여기서 포도주를 수식하는 '새'(네오스)는 시간적으로 오랜 것과 대조되는 '새로운' 것을, 또한 부대를 수식하는 '새'(카이노스)는 지금까지 있었던 것과 구별되는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는 예수께서 주신 새로운 교훈은 이전 것과는 질적으로 구분되는 새로운 체계를 지님을 보여준다 하겠다. 한편 이 구절은 A.D. 5-6C경에 쓰여진 베자 사본(D)에는 없으나 다른 본문에는 포함되어 있으므로 그 신빙성에는 의문을 제기할 수 없다.
2:23-28 안식일 논쟁
본문은 마 12:1-8과 눅 6:1-5과 병행 구절인데, 타 복음서에 비해 마가는 예수의 사역 자체를 부각시키려는 의도로서 더욱 노골화되어지는 적대자들과 벌어지는 안식일논쟁을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마 12장 자료노트, '바리새인과 예수의 안식일 논쟁'을 참조하라.
즉 율법의 근본정신을 망각한 채 그저 율법의 외부적 규정에만 얽매여 있던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준수하지 않는다고 예수님과 제자들을 강력히 비난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과 제자들을 정죄할 수 있는 기회만 노리고 있던 바리새인들은 마침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여 밀 이삭을 잘라먹자, 율법에 규정된 안식일 조항을 위배한 처사라고 즉시 비난했던 것이다. 참으로 종교적 형식주의에 젖어 있던 그들이 보기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이란 안식일에 금지된 타작이란 노동행위를 한 정죄의 대상들이었을 뿐, 결코 율법에 허용된 긍휼의 행위를 한 자들이 아니었다(신 23:25).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비난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구약성경에 나타난 다윗의 예를 들어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교훈하심으로써 그들의 잘못된 율법주의를 지적하심과 아울러서 안식일의 올바른 의미를 일깨워 주셨다. 뿐만 아니라 이 논쟁을 빌미로 예수께서는 스스로 안식일의 주인 되심을 밝힘으로써 자신이 인간을 죄와 율법의 규제에서 해방시켜 영적인 안식을 제공하실 구속주이심을 암시하셨다. 안식일에 대해서 본서 3권 신 5장 자료노트를 참조하라.
따라서 우리가 본문을 통하여 발견할 수 있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① 구약의 안식일이나 신약의 주일은 우리 성도들에게 종교적 의무를 부과하기 위해 제정된 날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성도들에게 축복을 가져다주기 위해 제정된 날이다. 분명히 성경은 인간이 먼저 창조된 후에 안식일이 제정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으며(창 1:26-2:3), 율법 역시 인간에게 복을 가져다주기 위해 안식일 규정이 마련되었음을 선언한다(출 20:8-11; 신 5:12-15). 오늘날 우리도 주일을 종교적 의무로서만 받아들인다면 이 역시 공허한 의식 준수에 불과할 뿐이다.
② 올바른 안식일(주일) 성수는 가급적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들을 실천하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즉 궁핍한 이웃을 돌보고 어려움에 처한 자들을 힘써 돕는 것이 바로 우리 성도들이 안식일(주일)의 참된 정신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다(사 58:3-14). 왜냐하면 오직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 합당한 일들을 행하는 자라야 안식일을 온전히 지키는 자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마 12:9-13; 요 5:9-18).
2:23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 안식일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밀밭 사이를 통과하여 지나가게 되었다. 그때 제자들은 곡식 이삭으로 가려진 길을 열면서 이삭을 자르게 되었다. 그런데 제자들이 이삭을 자른 것은 단순히 길을 열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먹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의 행위를 비난했을 때, 예수께서 다윗과 그의 동료들이 배고플 때에 진설병을 먹은 사건을 예로 들어 제자들을 변호했기 때문이다. 또한 병행구인 마 12:1에서는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먹었다고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복음서가 반드시 시간 순으로 기록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본절의 사건이 정확히 언제 일어났는지 알기 어렵다. 즉 마가와 누가는 사건 배열이 일치되나 마태는 이를 보다 뒤에 배치한 것이다. 이러한 여러 정황에 따라 본문의 사건은 그리스도의 마지막 유월절이 되기 약 1년 전에 일어난 일로 추정한다. 이러한 사실은 본 사건의 마태의 배열과 더불어 본문에 나오는 '밀'(스타퀴스)이 밀 뿐 아니라 전반적인 곡식을 의미한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따라서 이를 다른 곡식이라 보면 곡식 추수의 축제적 성격을 지니는 유월절(태양력 4월)보다 조금 이른 시기일 것이며, 이를 밀이라 보면 밀 추수의 축제적 성격을 지니는 칠칠절(태양력 6월)보다 조금 이른 시기일 것이다.
2:24 바리새인들이‥‥못할 일을 하나이까. - 제자들의 행위에 대하여 바리새인들은 비판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이와 같이 비판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이삭을 자른 행위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행위를 안식일에 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타인의 곡식에 낫을 사용하여 대량으로 수확해 가는 것은 불법이지만 손으로 잘라서 비벼먹는 정도는 율법에서도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다(신 23:24,25). 그러나 손으로 이삭을 잘라서 비벼먹는 행위라 할지라도 안식일에 그러한 행위를 한다면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은 곡식의 이삭을 자르는 일은 추수 행위에 해당하고, 손으로 비비는 일은 타작 행위에 해당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리새인에게는 제자들의 행위가 율법과 히브리인의 구전 유전을 모은 미쉬나(Mishina)에서 금지하고 있는 안식일 규례를 깨뜨리는 노동행위로 보였던 것이다. 미쉬나에 대해서는 막 7장 연구 자료, '장로들의 유전'을 참조하라.
사실 율법은 안식일에 곡식 거두는 일을 공적으로 금지하고 있다(출 34:21). 그리고 미쉬나에서는 안식일의 금지사항 39개 항목 중에서 곡식 수확 행위를 세 번째로 금지하고 있다. 또한 '이삭을 자르는 행위는 수확의 행위이다'라고 명시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의 행위에 대하여 비판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비판적인 반응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 율법을 능가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영적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마 12장 자료노트, '바리새인과 예수의 안식일 논쟁'을 참조하라.
예수께 말하되‥‥어찌하여. - 과거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더불어 식사하실 때 바리새인의 서기관이 이를 제자들에게 항의한 바 있다(16절). 그러나 이제는 반대로 제자들의 행위를 들어 예수를 비난하고 있다. 이는 예수와 제자 사이를 이간시키려는 책동으로 볼 수도 있으나 제자들의 행위의 책임은 스승에게도 있다는 생각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한편 여기서 '어찌하여'(티스)는 의문 강세형으로서 예수께 대한 강한 항의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2:25 다윗이‥‥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 여기서 다윗과 그의 동료들이 '핍절되어 시장할 때 한 일'은 다윗이 사울에게서 도망하던 때에 한 일을 말한다(삼상 21:1-6). 그런데 그때 다윗과 그의 동료들이 한 일은 다음과 같다. 다윗은 배고픔을 면하기 위하여 당시의 대제사장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자 대제사장은 제사장들만 먹도록 되어 있는 진설병을 주었다. 그리고 다윗과 그의 동료들은 함께 진설병을 먹고 배고픔을 면하였다. 사실 그러한 행위는 분명히 율법을 어기는 것이었다(출 25:30). 그러나 성경의 어디에서도 그들의 행위를 정죄하지 않았다. 이에 예수님은 그들의 행위를 상기시킴으로써 제자들의 행위가 정당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근거로 삼으셨다. 실제로 인간의 생명과 직결된 인간의 핍절과 배고픔은 율법주의적 의식규범과 형식적인 종교 행위보다 우선하는 근본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안식일에 곡식의 이삭을 잘라서 비벼먹은 사실이 비록 안식일의 규례를 어기는 것이라 할지라도 다윗과 그의 동료들이 한 일보다는 심각하지 않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다윗과 그의 동료들이 정죄 받지 않은 것처럼 제자들도 역시 정죄 받지 않을 것임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유대인들은 다윗을 메시야를 상징하는 통치자의 이상으로 여겼기 때문에 다윗의 행위를 옹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읽지 못하였느냐. - 여기서 '읽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기노스코'( )는 '~위에'( 아나)란 전치사와 '알다', '배우다'(기노스코)란 동사의 합성어로서 '보다 자세히 알다'란 의미가 있다. 따라서 본절은 유전보다 더 중요한 성경의 진리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지를 힐난하는 역설적 질문이라 볼 수 있다.
2:26 아비아달 대제사장. - 삼상 21:1-6에 의하면 다윗에게 진설병을 준 대제사장은 아비아달이 아니라 아히멜렉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아비아달은 아히멜렉의 아들이었다(삼상 22:20).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래 출전과 다르게 아비아달이 대제사장으로 기록된 이유를 혹자는 본서 저자의 기록 착오로 이해하나(Grant) 이는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으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즉 이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으로는 ① 아비아달이 아버지 아히멜렉과 함께 놉에서 대제사장직을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히멜렉이 한 일은 아비아달이한 일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Grofiuo). ②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은 흔히 혼용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Bruce). ③ 아들인 아비아달이 다윗 밀접한 관련이 있었고, 아버지보다 더 유명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Granfield). 그런데 이 중에서 어떤 견해가 옳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①와 ③의 견해를 혼합하여 당시 아히멜렉과 아비아달은 같이 진설병을 다윗에게 주는 일을 하였고 이로 인해 아히멜렉이 사울에게 죽은 후 대제사장이 된 아비아달이 다윗의 치세 동안 여러 큰 일을 하였으므로 이러한 표현을 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한 듯하다.
진설병. - 진설병은 성소에 있는 상에 진설되는 떡을 말한다. 그런데 이 상은 조각목으로 만들었으며 정금으로 싸고 주위에는 금테를 둘렀다(출 25:23-30). 그리고 그 위에 진설되는 떡은 모두 열두 덩이였으며, 향과 함께 봉헌되었고 두 줄로 진설되었다. 그리고 이 떡이 진설되는 날은 안식일이었으며 다음 안식일이 되기까지 계속 상 위에 놓아두었다. 그리고 다음 안식일이 되면 묵은 떡은 치우고 새로 구운 떡을 진설했다. 그때 묵은 진설병은 제사장들이 먹게 되어 있었으며 일반 백성은 먹을 수 없었다(레 24:5-9).
2:27 또 가라사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이 엘레규 아우토이스'( )는 직역하면 '그리고 그들에게 말하기를'이다. 마가에게 있어 이러한 문장은 어떤 문맥 가운데 새로운 말을 삽입시킬 때 사용되어지곤 한다(막 6:10; 7:9). 따라서 본절 말씀 역시 다른 상황에서 말씀되어진 것이 이 부분에 포함된 형태로 보여지기도 한다. 이러한 주장은 본문과 병행 구절에서(마 12:1-8; 눅 6:1-5) 본절에 해당하는 문장이 빠져있다는 점에서 신빙성을 갖는 듯이 보여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절의 내용이 문맥과 잘 조화된다는 점에서 꼭 이질적인 요소라고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 안식일 계명이 공식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것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받은 때라고 할 수 있다(출 20: 8-11). 그러나 모세가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받기 전에도 안식일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알려져 있었다(출 16:23,25). 그리고 이미 하나님은 천지 창조를 마치시고 제 7일을 안식하는 날로 정하시고 신적 모범을 보여주셨다. 또한 그 날을 인간의 이익을 위해 축복하고 구별하셨다(창 2:2,3; 출 20:8-11). 한편 신 5:12-15을 보면 안식일에는 육체적 노동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인도주의적인 면이 강조된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의 억압받는 노예 생활로부터 구원받은 사실이 안식일을 지켜야 할 이유로 제시된다. 따라서 안식일은 육체적 노동과 압박 그리고 고통으로부터 사람을 해방시키고 휴식을 취하도록 제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안식일은 각종 죄로 인한 정신적 압박과 고통에서 해방되어 안식을 누리게 하려는 목적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를 하면서 기쁨의 찬송과 감사의 예물을 드리는 목적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목적들은 각종 제사와 언약행위, 예배 등을 통하여 성취가 가능하다. 따라서 안식일은 온 이스라엘 회중이 모여서 이러한 일들을 하는 성회로 제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레 23:3). 그리하여 제사장들은 안식일마다 성소 안의 식탁 위에 진설병을 진설해야 했다(레 24:8). 그리고 안식일에는 평일에 드리는 희생 외에 특별 희생을 드려야 했다(민 28:9,10). 또한 안식일이 사내아이가 태어난 지 8일이 되는 날이면 그 안식일에 할례식이 거행되었다(레 12:3; 요 7:22). 그리고 안식일에는 온 회중이 다 함께 예배를 드렸다. 그렇게 함으로써 백성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으며, 또한 각종 죄로 인한 고통과 압박에서 해방되어 정신적으로도 안식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는 바리새인들이 부과한 온갖 제약들로 인하여 안식일의 참된 의미가 불투명해졌다. 즉 외형적인 형식과 규범에 얽매여서 안식일의 참된 의미가 희미해진 것이다. 그리하여 안식일은 사람에게 안식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억압과 고통을 주는 요소로 작용했다. 따라서 본절은 예수께서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 안식일을 주신하나님의 원래 목적과 의도를 강조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신 5장 자료노트 '안식일'을 보다 참조하라.
2:28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 이 말은 예수님이 참된 안식을 누리게 하는 분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동안 안식일을 기억하고 지키기 위하여 노력하였지만 참된 안식을 누릴 수는 없었다. 그들은 일차적으로 육체적 노동과 고통으로부터도 완전히 해방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안식일에도 기본적인 노동은 감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성막 봉사의 일, 짐승에게 먹이를 주는 일, 가족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일, 국방을 위한 일 등은 안식일이라고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각종 질병, 특히 불치의 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 역시 안식일이라고 해서 그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어 안식을 누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한 모든 육적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 참된 안식을 누리게 할 수 있다. 한편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신적인 압박으로부터도 해방될 수 없었다. 즉 각종 죄악으로 말미암은 양심의 가책과 고통들은 안식일이라고 해서 저절로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이러한 것들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죄의 용서를 필요로 하였다. 그런데 죄의 용서는 인간을 죄에서 구속하실 예수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정신적인 압박과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어 안식을 누리게 하시는 분도 예수님이시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육체적, 정신적 압박과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 사람들에게 참된 안식을 주실 수 있는 분이다. 안식에 대해서는 수 21장 자료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따라서 인자이신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주요, 사람의 구원에 관련된 모든 것들의 주이시다(10절). 그러므로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시다. 따라서 만일 안식일규례 중에서 사람을 억압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요소가 있다면 그것을 완화하거나 면제할 수 있는 권리는 예수께 있다고 할 수 있다.
연구자료
신약 시대 팔레스틴의 가옥 구조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 가운데는 이스라엘의 가옥 구조를 이해해야만 그 사건의 전체 상황이 쉽게 이해되는 그러한 사건들이 많이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본장에 기록된 중풍병자 치유사건이다.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치유받도록 하기 위해 예수께 나아가고자 했으나 많은 사람들이 문을 막고 있어서 나아갈 수가 없었다. 그러자 그들은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예수 앞으로 달아 내렸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지붕은 덤불이나 갈대에 진흙을 이겨서 평평하게 만든 것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쉽게 뜯어낼 수가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면 본문의 상황을 잘 이해할 수가 없다. 이외에도 이스라엘의 가옥 구조를 알아야만 이해될 수 있는 기사들이 많이 있다.
이에 이스라엘 가옥 구조의 변천 역사와 신약 시대 팔레스틴 지역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었던 가옥들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이스라엘의 가옥은 시대에 따라 또 동시대에도 지역과 계층에 따라 큰 차이를 갖고 있어 좀처럼 일반화시키기가 어렵다. 하지만 개략적 이해를 얻기 위하여 팔레스틴 지역의 대략적인 가옥 변화사와 우리의 주관심인 신약시대 가옥의 구조와 기본 유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가옥 구조의 변천 역사 개요
선사시대의 팔레스틴의 가옥 구조는 대개 원형이나 사각형의 방이 하나인 그런 구조였다. 그리고 방이 둘 달린 가옥 구조는 B.C. 5000년경 쯤에 생겨났으며 고대 여리고 성에서 발굴된 가옥의 유적이 그런 구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안마당이 딸린 형태의 가옥 구조는 청동기 시대 중 반경(B.C. 2200-1500)에 생겨났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던 초기의 가옥 구조는 가나안인들 보다 매우 초라한 형태로서 돌과 진흙 벽돌로 지은 방 두 칸의 단층집들이었으며 이는 신약 시대에까지도 가난한 서민들의 가옥으로 사용되었다.
왕정 시대의 가옥 구조는 대개 방이 4개 딸린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가옥 형태는 3개의 방이 ㄷ 형태로 안마당을 감싸듯이 둘러서 있고 1개의 방은 3개의 방 뒤편에 따로 있는 형태가 일반적이었다.
이러한 왕정 시대의 가옥 구조는 그렇게 큰 변화 없이 신약 시대에까지 서민들의 가옥들로 그대로 이어져 왔다. 그러나 신약 시대의 부유층 가옥 가운데는 전통적인 팔레스틴의 가옥도 있었으나 로마인들의 가옥 구조를 본 따서 큰 마당을 중심으로 빙 둘러서 방들을 많이 짓고 또 은밀한 사생활을 위한 밀실이 딸린 그런 형태의 가옥들도 많았다.
2. 신약 시대 가옥의 기본 구조
신약 시대 서민의 가옥들은 대개 돌과 진흙 벽돌로 지은 방 두 칸이나 네 칸 정도의 단층집이대부분이었다. 그리고 부유층의 가옥은 대개 2층집이었는데 전통적인 팔레스틴식 가옥과 로마식가옥이 있었다. 다락방은 대개 부유층의 가옥에만 있었다.
① 건물의 기초석:
팔레스틴 지역에는 갑작스런 홍수나 지진 등이 자주 일어났기 때문에 건물의기초석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즉 홍수시의 침식이나 지진 때에 암반이 가라앉는 것을 대비하여 기초석을 잘 다져서 만들었다. 마 7:23-27에 나오는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반석 위에지은 집의 비유도 바로 이같은 건물의 기초석과 관련된 비유이다.
② 방의 구조:
이층집일 경우에는 대개 윗층은 가족들의 숙소로, 아래층은 거실을 비롯한 하인들의 방이나 기타 다용도실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2층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대개 내실의 계단이나 사다리를 이용했다. 그리고 단층집일 경우에는 방은 대개 상하 두 칸으로 구분되었다. 그래서 아래 칸은 가재도구나 기타 물건들의 저장소, 또는 밤이나 비가 을 때 가축들의 거처로 사용되었고, 위 칸이 가족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③ 지붕:
지붕의 모양은 대개 평평하였으며 큰 대들보와 양옆에 작은 석가래를 두고 덤불을 섞은 진흙으로 덮었다. 그리고 매년 돌로 만든 룰러로 지붕을 다졌는데 그것은 비를 맞을 경우 흙이 패여서 빗물이 새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지붕에 올라갈 때에는 밖으로 나있는 계단을 이용하였다. 자세한 설명은 본서 제 5권 삼상 9장 자료노트를 참조하라.
④ 대문:
대문은 대개 안쪽으로 열려지도록 만들었으며 나무나 돌쩌귀로 고정시킨 형태로서 사람의 키보다 조금 낮은 것이 보통이었다. 또한 문은 문짝, 문지방, 문설주, 인방 등으로 되어있으며 문설주에는 '쉐마'(신 6:4-9)를 기록한 파피루스 종이나 양피지를 넣어둔 함이 달려있었다.
⑤ 다락방:
지붕 위에는 대개 다락방을 두는 경우가 많았다(왕상 17:19, 왕하 1:12). 예수께서 성만찬을 행하셨던 곳도 큰 다락방이었다(눅 22:12). 이 다락방은 일반적으로 마가의 집 다락방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로 볼 때 마가의 집은 당시 상당한 부유층에 속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⑥ 벽과 창문:
벽은 대개 석판(石版)이나 진흙 벽돌로 되어 있으며 방수를 위해 석회를 두텁게 발랐다. 벽의 두께는 대개 1m가량 되었으며 벽에는 1개의 창문만이 있었다.
⑦ 바닥:
일반적으로 바닥은 진흙으로 만들었으며 맨발로 다닐 수 있도록 딱딱하게 굳혔다. 그러나 그것은 서민의 경우이고 부자 집에서는 바닥을 옥석으로 평평하게 깔았다. 이외에 안마당이나 안마당에 있는 우물 등에 관해서는 본서 제 5권 삼하 11장 자료노트를 참조하라.
3. 신약시대 가옥의 기본 유형
① 전통적인 팔레스틴식 부자 집:
안마당에 옥석이 깔린 전통적인 팔레스틴 지역의 부자들의 가옥이다. 안마당 위는 열려있어 햇빛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어 있고 2층과 지붕에는 난간이 있어서 아래로 내려다 볼 때 떨어지지 않게 되어 있다. 한편 위의 삽화는 B.C. 1800년경 갈대아 우르(Ur) 지역에서 발굴되 가옥 유적을 복원한 것이며 이 같은 형태의 전통적인 팔레스틴의 부자들의 가옥이 신약 시대에도 있었다.
② 로마식 부자 집:
이는 로마인들의 가옥 형태를 본 따서 만든 것으로 이스라엘 부자들 가운데서도 일부만 이런 형태의 가옥을 소유했다. 넓은 마당과 많은 방들, 그리고 창이 달린 2층 방과 지붕이 인상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