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0장 칠십인 제자의 파송과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및 마리아와 마르다 자매
많은 은헤 받으시고 하나님 좀 자랑해주세요.
하나님 영광을 받으시는것 좋아하세요.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9:51-19:27까지 이어지는, 갈릴리 전도 사역 이후 그리고 고난주간(Holy Passion Week)이 시작되기 이전까지의, A.D. 29년 여름에서 A.D. 30년 초까지의 대략 6개월 남짓 사이에 유대 지역을 중심으로 진행된 예수의 후기 사역을 보도한 일련 기사의 연속 부분이다. 이런 문맥하의 본장의 내용을 세분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1-24절은 70인 제자의 전도 파송사건을 25-37절은 우리가 성도로서 사랑을 실천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이웃이 누구인지를 묻는 자에게 이웃(neighbor)의 개념을 비유로 말씀해 주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그리고 38-42절은 주께서 베다니 나사로의 집을 방문하셨을 때 발생한 마리아, 마르다 두 자매와 예수의 대화를 통하여 주님과 성도 사이에서는 일순간의, 그리고 외적인 봉사나 공로보다 그 이전에 성도들이 주의 복음 자체를 사모하는 것이 보다 근본적이며 또 더
우선되어야 함을 보여 주고 있다.
1-24절의 70인 제자의 파송기사는 다음처럼 보다 세분될 수 있다. 먼저 1절은 파송 사건 자체를 보도한다. 다음 2-16절은 파송에 즈음한 주의 교훈으로서 전도자로서 시급한 시대적 사명을 깨닫고 전도 사역 도중 모든 생활을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의뢰할 것에 대한 교훈(2-9절)과 전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도시의 백성들에 대하여 단호한 저주의 경고를 발할 것에 대한 교훈(10-16절) 등이 주어진 사실에 대한 보도이다. 다음 17-24절은 전도 사역을 필하고 돌아온 70인의 보고를 들은 주께서 이제 당신의 사역으로 사탄(Satan)의 세력이 꺾이는 동시에 천국이 더욱 뚜렷이 도래되는 사실에 대한 구속사적 기쁨(17-20절)을 나타내시며 이제 인자(Son of Man)로서 이처럼 엄청난 구속사적 대 전환기를 맞는 기쁨과 확신을 하나님과 사람을 향하여 기도와 교훈으로 드러내신 사실의 보도이다. 이상의 본 단락에서 우리는 특히 다음 사실들에 유의하게 된다. 먼저는 주님이 제자들에게 당신의 복음(福音)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게 강력한 종말론적 저주의 경고를 행할 것을 명령한 사실이다. 이는 진리와 사랑에 의거하여 주의 종들을 통해서 간절히 전파되는 주의 복음은 인간들이 받아들여도 그만 아니어도 그만인 세속 철학이나 종교의 하나에 불과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즉 복음은 훗날 분명히 닥칠 세상 끝 날에 영생(永生)과 영벌(永罰)을 가름할 유일한 기준으로서 우리가 생명과 구원을 위하여 순복할 유일한 진리라는 구속사적 진리를 강력히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우리는 70인 제자의 귀환 보고를 듣고 인자(人子)이신 주께서 당신이 주도하시는 복음 사역으로 구속사(redemptive history)가 확실히 전개되고 있는 사실을 새로이 확인하시고 또 당신을 통하여 구속사를 전개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새삼 확신 감사하고 나아가 제자들에게도 이제 구약 구속사가 분명히 신약 구속사로 확장 전개되었음을 지적하신 사실에도 주목하여야 한다.
이는 결국 완전하고 흠 없는(벧전 1:19) 유일한 인자이신 예수께서도 이를 계기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거듭 확신을 가지셨듯이 우리 주 예수를 통하여 역사를 초월하신 성부 하나님의 주재(主宰)로, 그리고 태초부터 종말까지 연속되는 구속사의 섭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분명히 진행되고 또 성취되어 가고 있음을 죄로 더렵혀진 불완전한 인자인 우리 모두에게 다시 입증해 보인 것이며 따라서 예수만이 우리가 믿고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구주라는 구속사적 진리를 분명히 입증해 주는 구절이기 때문이다.
25-37절은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이다. 이 비유는 매우 단순한 것 같으나 깊이 고찰할수록 매우 오묘한 진리가 복합적으로 내포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누가 서로 사랑을 나눈 이웃이냐는 문제와 더불어 누가 이웃에게 참 사랑을 베푸는 자이냐 하는 이웃 사랑의 문제 전체를 포함한 것으로서 결국 성도가 가져야 할 참 이웃 관계 전체를 보여 주고 있다. 이를 좀 더 세분하면 먼저 25-29절은 선한 이웃 관계에 대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주어지게 된 배경 설명으로서 한 율법사가 영생의 조건을 묻고 다시금 영생의 조건인 이웃 사랑에 있어서 이웃 사랑의 대상에 대해서 묻게 된 경위가 소개된다. 30-35절은 선한 이웃 관계의 전형을 제시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자체를 그리고 36-37절은 주께서 자신은 당연히 이웃 사랑을 베풀고 있다고 착각을 하고 이웃 사랑의 대상에 대해서만 물은 율법사에게 참 이웃 사랑을 베푸는 자는 누구인가 하는 문제까지 다시 되물으시면서 나아가 이웃 사랑의 실천까지 촉구한 사실을 보도하고 있다.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구속사적 교훈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먼저 성경은 하나님과의 수직적(垂直的) 관계 뿐만 아니라 이웃과의 수평적(水平的) 관계도 강조하고 있다는 원칙 자체 이다. 인간은 처음부터 한 분 하나님에 의하여 서로 어울려 존재하도록 창조된 존재이다. 그러므로 신앙으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한 성도는 주위의 인간들 곧 이웃과의 관계도 하나님의 창조원리에 따라 회복하는데 주력하여야 하겠다. 둘째 불경하고 비천한 자로 천대받던 사마리아인이 거리에서 만난 불면식(不面識)의 환자를 아무런 대가도 없이 사랑으로 대했듯이. 선한이웃 관계는 아무런 조건 없이, 주변의 모든 이웃에게 그리고 환경, 지위. 능력을 핑계 삼지 말고 자신의 최선을 다하여 결국 순수한 사랑과 열심으로 성도 서로가 유지해야 하근 것임을 교훈받게 된다.
38-42절은 주께서 사랑하는 제자의 하나였던 베다니 나사로(Lazarus)의 집을 방문했을 때 두 자매와 예수 사이에 일어난 한 작은 에피소드(episode)의 기록으로서 짧지만 심오한 교훈을 전해주는 삽입기사이다. 이 기사는 무엇이 틀리냐 맞냐의 절대적 문제를 떠나서 성도가 무엇을 먼저 힘써야 하는가 하는 상대적 문제에 대한 심오한 시사를 주고 있다. 즉 성도가 가져야할 바른 가치관의 체계에 대한 시사를 주고 있는 것이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본문은 성도의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주님을 믿고 그의 복음을 열망하는 내적 영적 자세가 우선(優先)이며 외적 육적관심사는 언제나 차선(次善)임을 보여 준다. 또한 이는 주님과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는 우리가 주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고귀한 것은 특별한 봉사와 업적의 결과보다 순수한 신앙의 사랑 그 자체임을 강력히 시사해 준다(시 51:17).
외울 말씀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눅 10:27)
본문 & 자료노트
난제해설 -10:4,7 칠십 인 제자에 대한 예수의 문안 금지와 유숙 명령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칠십 인 제자를 둘씩 둘씩 파송하시면서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을 보게 된다. 그런데 이 말은 평소 친절하고 자상하던 예수님의 말씀답지 않으며, 더더욱 어째서 무례하기까지 한 그러한 권고를 예수께서 하셨는가 우리를 의아하게 한다. 보통 우리에게 있어 문안이라면 고개를 끄떡이거나 미소짓는 정도, 혹은 악수를 한다든지의 그다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 것이기에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이해가 잘 안되는 부분일 수밖에 없다.
또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는 예수님의 명령도 당시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복음 전파에 유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자아낸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왜 칠십 인의 전도대를 파견하면서 그들에게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 것과 이집 저집 옮겨다니지 말고 유하게 된 한 집에 머물러 있을 것을 명령하겼겠는가? 이는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는 간단한 문제이다.
1. 문안 금지에 대한 이해
고대 팔레스틴에서는 오랜 시간 동안 서로의 안부를 나누고 입 맞추는 것이 우애 있는 인사법이었다. 만일 시간이 급하여 허둥지둥 달려가면서 고개를 끄떡이는 정도로만 인사를 하였다면 그것은 대단한 무례가 되었다.
또한 오랫만에 만난 사람이 아니라 자주 접하는 사람일지라도 마을이나 동네 어귀에서 만나게 되면 그 때마다 목을 안고 입을 맞추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리고는 서로의 손을 움켜잡고 인사를 나누는데, 이때 서로 오른손을 가슴에 올려놓으면 '충심으로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손을 입술에 갖다 대는 것은 '우정을 함께 나누고 싶다'는 것을, 또한 손을 이마 높이까지 천천히 올리는 것은 '당신에게 존경과 경의를 표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렇게 인사를 나눈 후에도 서로의 안부를 묻고, 또 한 반시간 정도 서로를 칭찬하기도 하며 이런 말 저런 말로 같은 말을 되풀이 하면서 많은 시간을 서서 보내기 일쑤였다. 그런 다음 다시 양팔로 서로를 껴안고 이별을 고한 후 자기 볼 일을 향해 떠나게 된다. 때문에 고대 팔레스틴에서는 문안하는 데 여러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런데 이는 여행 도중에 만난 여행자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서로 환영을 뜻하는 표현을 되풀이 하고 여러 질문과 인사에 대한 지루한 형식 등을 다 갖추느라고 많은 시간을 빼앗기게 되며, 따라서 이러한 잦은 인사는 여행 여정을 대단히 지연시키기도 하였다. 결국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에서 지체하는 경우가 자주 일어나면 일어날수록 여행에 크게 방해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칠십 인의 제자들에게 길에서 많은 시간을 빼앗기지 말고 신속히 맡은 바 사명을 다하도록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 것을 명령하신 것이다.
2. 한 집에 유할 것에 대한 이해
성경 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나그네 대접이나 손님 접대에 굉장히 후대한 편이었다(본서 열왕기하 13장 자료노트, '히브리인의 나그네 대접' 참조). 그래서 못 보던 사람이 마을에 나타나면 마을사람들은 그 사람을 서로 초대하여 식사를 대접했다. 또한 그들은 위선에 가까울 정도로 후대 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만일 어떤 사람이 나그네를 정성껏 대접하지 않았다면 마을 사람들은 이에 대해 분노했을 뿐만 아니라 심할 경우 다투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러한 극진한 환대를 받는 데는 많은 시간이 허비되었고, 식사를 마친 후에도 잡담과 여러 형식적인 행위로 인해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래서 이 집 저 집에 다닐 경우 대접받는 데 너무도 많은 시간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전도대를 파송하시면서 먼저 기거하기에 적합한 집을 찾아 그 마을에 서의 임무가 다 끝날 때까지는 그 집에서만 머물러 있고, 다른 집으로 대접받고 초대받는 것을 금하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3. 교훈
예수께서 칠십 인의 제자를 파송하실 때는 복음을 전해야할 대상은 많고 그에 비해 시간은 한정되어 있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 제자들은 여행길에 많은 사람들과 인사하는 데 시간을 허비할 수도, 여러 집에 다니면서 극진한 대접을 받는 것으로 시간을 빼앗길 수도 없었다. 그들은 주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파송된 자들이지 대접받고 초대받으라고 파송된 자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곧 그들은 메시야의 사절단으로서 중요한 임무를 띠고 각처에 파견되는 중이었기 때문에 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여유가 없었고, 오직 신속하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해야만 했다.
한편 예수께서는 길에서의 여행자들끼리의 문안을 금지하셨지만 일상 예절 자체를 금지하신 것은 아니었다. 곧 그들이 다른 집에 들어갈 때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5절)라고 말할 것을 말씀하심으로써 일상의 예절은 지키되 지루한 형태의 습관적인 예절로 인해 시간을 빼앗기지 않도록 하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파송하실 때는 길에서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에게 문안하지 말 것에 대한 말씀은 하지 않으셨다(마 10:8-15). 그러나 본문에서 칠십 명의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이 같은 말씀을 하신 것을 보아 우리는 칠십 인 파송 때가 그만큼 복음 전파의 신속성이 요구되었던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예수의 전대나 주머니나 신을 가지지 말라는 명령에 대해서는 막 6장 자료 노트를 참조하라.
도표-10:1-11, 70인 제자 파송 때의 예수 명령
예수님은 70인 제자를 파송하실 때 다음과 같은 명령을 주셨다. 이런 예수의 명령은 특별히 목회자나 선교사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에게도 해당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 한 가지로 주님의 지상대명 (The Great Commission)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에 70인 제자 파송 당시의 예수 명령을 통해 우리의 복음 전파 사명을 새롭게 다짐하는 계기로 삼도록 하자.
1. 어린 양이 이리 가운데 가는 것같이 각오를 단단히 하라(3절)
2. 세상적 도움을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주만 의지하라(4절)
3. 불필요한 일로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4절)
4. 먼저 평안을 빌어준 후 복음을 전하라(5절)
5. 한 집에서 머물면서 지속적으로 전도하라(7절)
6. 전도 중에 받는 선한 대접은 기꺼이 받으라(7,8절)
7.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라(9-11절)
8. 영접지 않은 자와는 관계를 끊으라(10,11절)
풍습-10:4 여행자의 장비
6장 자료 노트 참조
신학용어-10:6, 평안
대상 12장 자료 노트 참조
주요주제-10:8-11 하나님 나라의 이해
눅 서론 특별 자료 참조
보감-10:29-37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교훈
1. 참된 이웃은 보상을 바라지 않고 친절을 베푸는 자임(30-35절; 마 7:12)
2. 참된 이웃은 기회 있는 대로 선을 베품(31,32절; 갈 6:10)
3. 참된 이웃은 도움이 필요한 자를 뿌리치지 않고 도움(31-35 절; 사 41:6)
4. 참된 이웃은 진정한 동정심에서 자비를 베푸는 자임(33절; 출 22:25-27)
5. 참된 이웃은 어떤 대상이라도 차별 없이 선을 베품(33절; 약 2:8,9)
6. 참된 이웃은 자기희생을 감수하면서도 선을 베품(33-35절; 왕상 17:13)
7. 참된 이웃은 선행해야 할 때 망설임 없이 즉각 수행함(33-35절)
8. 참된 이웃은 행함과 진실함으로 선행하는 자임(33-35절; 요일 3:18)
9. 참된 이웃은 그 대상의 형편에 알맞게 도와주는 자임(34,35절)
10. 참된 이웃은 끝까지 변치 않고 도와주는 자임(35절)
원어 연구- 10:30, 만나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는 '페리핍토'이며, 이는 전치사 '페리'와 동사 '핍토'의 합성어이다.
여기서 '페리'는 ~에 대하여'(요 1:7), 또는 '~둘레에'(막 3:32)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동사 '핍토'는 별이나 씨 따위가 땅에 '떨어지다'(마 13:4; 계 9:1). 집이나 성벽 따위가', '무너지다'(눅 11:17; 계 11:13) 및 두려움이 '엄습하다'(계 11:11)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페리핍토'는 원래 어떤 사물이나 사람에 대하여서 또는 이들의 둘레에 무언가가 갑작스럽게 떨어지거나 임하는 것을 가리킨다. 즉 거리상으로는 특정한 사물의 주변 가까이에, 시간상으로는 느닷없이 예견하지 않은 가운데 일이 벌어지는 모습을 보여 준다.
따라서 본절의 '만나매'의 정확한 뜻은 여리고로 내려가던 유대인이 강도들에 의해 '좌우 사방이 갑작스럽게 둘러싸였다'는 뜻이다. 이것은 강도들이 음침한 골짜기의 바위틈에 숨어 있다가 행인들이 지나가면 도망갈 틈을 주지 않고 갑작스럽게 튀어나와 눌러 덮쳤던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는 단어이다.
한편 당시 예루살렘과 여리고를 연결하는 도로는 하나뿐이었으며 도로 주변은 산지와 골짜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곳에 도적떼들이 많이 은거하고 있어 본문의 상황과 같은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고 한다.
지도-10:38-42 예수의 마리아와 마르다의 방문 경로
지도-10:13 예수께 경고 받은 성읍들
마 11장 자료 노트 참조
인물 연구-10:38-42 마르다와 마리아
요 12장 연구 자료 참조
주요 주제-10:25-28 계명 준수에 관한 예수 교훈의 특징
막 12장 자료 노트 참조
주요 주제-10:30-37 구제의 자선
신 26장 자료 노트 참조
10:1-16 칠십 인의 제자 파송
눅 9장까지는 1,2,3차에 걸친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을 소개했다. 이제 19장까지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까지의 예수님의 행적을 살피게 된다. 먼저 본문은 12사도를 파송하신데(눅 9:1-6) 이어 70인의 제자를 다시 파송하는 장면이 소개된다. 이러한 본문은 크게 70인의 제자들을 세우시고 파송하시면서 권면의 말씀을 하신 것(1-9절)과 복음을 거절하는 자에 대한 심판의 경고(10-16절)로 구분되어 진다. 이것은 누가만이 기록하고 있는 사건인데 70인을 파송할 때 하신 말씀은 12사도를 보낼 때에 주셨던 권면(마 10:8-15)과 매우 비슷하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4절)란 말이 첨가되어 있는 것인데 이것은 그만큼 복음 전파의 임무가 시급하기 때문에 길에서 문안하느라고 시간을 소비할 여유가 없음을 보여준다. 즉 예수님께서는 공생애의 마지막 시간이 다가오므로 복음 전파의 시급성을 강조하신 것이다. 한편 여기서 70이라는 숫자는 세상의 모든 민족들을 상징하므로(창 10장에 70개의 민족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온 세계에 전파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70은 모세에 의해 임명된 장로들의 숫자이기도 한데(민 11:16,24). 이는 예수가 모세에 의해 입법된 율법의 완성자임을 암시한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파송하시면서 복음 전파를 위한 영적 권위를 허락하셨는데 이 권위에 불순종하면 하나님을 거역하는 불신앙임을 말씀하신다(16절). 따라서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에 하나님의 권위를 위임받은 자들임을 깨닫고 담대하게 세상에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10:1 이후에. - 이는 누가가 자주 사용하는 시간 부사로 어떤 구체적인 때를 가리킨다기보다는 앞뒤의 문장을 자연스럽게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한다.
달리‥‥세우사. - 이것은 앞서서 12제자들을 파송했던 사건(눅 9:1)을 의식한 표현으로서, 여기의 칠십 인에는 12명의 제자들이 포함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칠십 인. - 대부분의 권위 있는 사본에는 '칠십 인'으로 나타나나 일부 사본에는 '칠십이 인'으로도 나타난다(바티칸, 베자사본). 한편 예수께서 70인을 세우신 것은 이스라엘의 70인 장로(민 11 :16-25)를 염두에 두신 것으로 추정된다(Brown). 여기서 '70'은 유대인의 성수 '7'에 세속적 만수 '10'을 곱한 수이다.
친히 가시려는 각동 각처로. - 이는 칠십 인의 전도대를 파견한 장소와 파견 이유를 간접적으로 말해 준다. 즉 예수께서는 그의 공생애가 거의 마감되는 시점에서 한정된 시간과 공간적 제약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타파하기 위해서 70인의 전도대틀 세워 그 앞서 각 성읍과 마을로 보내 복음을 전파하게 하신 것이다.
둘씩. - 70인 전도대를 둘씩 짝지워 보낸 조치는 12제자를 파견할 때 취한 조치(막 6:7)와 동일하다. 이 조치는 예상되는 핍박과 환난 중에 서로에게 격려가 되게 하거나(전 4:9) 혹은 이스라엘의 관습에 따라 복음의 증거의 유효성을 위해서(민 35:30; 신 19:15; 마 18:16; 요 8:17; 고후 13:1; 딤전 5:19) 취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2인 1조의 전도대 구성은 초대 교회에서부터 오늘날 교회에 이르기까지 전도의 모델이 되고 있다(행 13:1-3; 15:37).
10:2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 이 구절은 12제자를 부르셨을 때(마 9:37,38) 주셨던 말씀과 동일한 말씀으로 이는 12제자의 선택 뿐 아니라 70인 제자 파견의 중요한 이유가 되는 바, 그것은 사역지의 광활함에 비해 사역자의 절대 부족 현상으로 축약해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 이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원인데, 해석은 두 가지로 나뉘고 있다. 첫째 는 12제자가 진행할 복음 사역에 비해 사역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70인 제자를 보내셨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Weiss). 둘째는 시간적 구분에 따른 요청이 아니라 70인 제자를 보내더라도 아직 일꾼이 부족하니 더 많은 일꾼을 보내 주시도록 기도하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Plummer), 문맥의 흐름상 두 번째 견해가 보다 타당하다.
10:3 갈지어다. - 이는 70인 전도대에 대한 예수님의 명령으로서, 복음 전파가 일종의 권장 사항이 아니라, 준엄한 지상적 명령임을 보여 주고 있다.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 이는 12제자를 파견하실 때 하신 말씀의 반복으로서, 70인 전도대를 보내실 때 역시 동일한 심정을 가지셨음을 보여 준다. 이런 비유는 목축을 산업의 중요한 근간으로 삼았던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매우 생생한 효과를 나타내었다고 볼 수 있는데 , 실제 '이리'(뤼코스)는 '양'들의 천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린 양과 같은 유순한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는 예수님의 심정을 이 비유는 충분히 반영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즉 이것은 70인 전도대가 복음을 전파할 때 닥칠 핍박과 환난이 매우 위태로운 것임을 잘 알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래서 이 구절은 단지 예수님의 염려하시는 마음을 그려내는데 그치지 않고, '이리 떼'로 표현되는 세상의 극도의 위험에 대처하는 지침을 가르치는 4절 이하의 도입부가 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0:4 전대나 주머니나 신을 가지지 말며. - 본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은 12제자의 파송 때와 동일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마 10:8-15). 따라서 그 내용에 대해서는 마 10:8-14 주석과 눅 9:3-5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한편 여기서 전대나 주머니나 신을 가지지 말라는 것은 여행을 위한 여비나 그 외의 준비를 따로 준비하지 말라는 뜻으로서, 이것은 모든 것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여 사역에 임할 것을 권면하시는 의도의 말씀이다.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 이것은 70인 전도대 파견 때 첨부된 당부 말씀으로 이는 당시 이스라엘의 인사 관례를 염두에 둔 지침이다. 즉 손위 사람이나 존경하는 사람에게 인사를 해야 하고, 손아래 사람에게 절을 받아야 하는 것이 당시 관습임을 미루어 볼 때, 예수님께서 이를 금지한 것은 70인 제자들의 복음 사역의 긴급성과 중요성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해서 70인 제자들은 보냄을 받은 자로서 자신들의 임무를 완수할 때까지, 어떤 가치에 의해서도
방해받아서는 안된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다.
10:5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 '평안'(에이레네)을 비는 것은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인사법으로서, 보통 개인이나 공동체 전체의 영적 육체적 안녕을 빌 때 사용된다. 또한 이 평안은 경제적(시 147:14), 정치적 번영(왕하 20:19; 대상 22:9)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는 인사법이 70인 전도대에 의해 채택된 것은,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것이라는 사실로 인해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즉 하늘과 땅에 있는 것들을 자신 안에서 통일되게 하신(엡 1:10) 예수님께서 주셨던 '평안'이므로 더 실제적인 효과를 발휘하는 권위 있는 인사법인 것이다. 물론 이 효과는 인사 자체의 주술적인 마력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를 새롭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만 가능함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이런 점만 유의한다면, 믿음으로 평안을 전하는 자나, 이 평안을 믿음으로 수납하는 자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며, 여기에서 성도의 아름다운 교제가 이루어지게 된다.
10:6 평안을 받을 사람. - 이는 다른 말로 하면 '평안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이란 뜻으로서(마 10:13) 제자들을 통한 그리스도의 평안을 믿음으로 수납하는 자를 뜻한다. 실제 하나님 안에서 평안 기원의 효과를 믿었던 야곱과 같은 구약 족장들의 전례를 두고 볼 때(창 27:30), 본절의 평안의 대상자에 대한 자세한 구분은 단지 의례적인 언급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 이는 평안을 받을 만한 사람이 없을 때 나타나는 경우로서, 그리스도의 평안의 실제적인 효과를 뚜렷이 보여 주는 대목이 되고 있다. 이 구절은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다'는 시편 기자의 경우에 대한 주석적 해설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시 35:13; 롬 12: 20,21).
10:7 그 집에 유하며. - 이 집의 경우는 제자들이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수납하는 가정을 뜻하는데, 특히 이런 믿음의 가정은 전도대를 위한 주님의 예비하신 처소가 된다.
일군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니라. - 이는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의 마음을 세심하게 배려 하신 말씀으로 여겨진다. 즉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그 머무는 집에 폐를 끼치는 일로 부담스러워 함으로써 복음을 전하는 일에 지장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날 성도들이 목회자의 생계를 책임져야 할 근거가 되기도 한다.
이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 이것은 '타인의 집들을 옮겨 다닐 수밖에 없는 전도대의 특성상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 즉 제자들은 묵고 있는 가정의 형편을 보고 부담이 되거나 또는 의․ 식․ 주 생활습관의 현격한 차이로 인해서 거처를 옮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거처를 자주 옮기다 보면 전도에 투자해야 할 시간을 낭비하기 쉬울 뿐만 아니라 제자들이 거처했던 집 주인으로 하여금 제자들에 대해 좋지 않은 인식을 심어줄 우려가 있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거처를 옮기지 말도록 명령하신 것이다. 본장 자료노트의 난제해설을 참조하라.
10:8 차려놓는 것을 먹고. - 이는 단지 7절의 반복이라기보다는 70인 전도대의 사역지인 요단강 동편 즉 트랜스요르단(Transjordan)지역의 특성이 유대 지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방 지역까지 포괄하기 때문에 하신 말씀으로 여겨진다. 사실 70인의 전도대 대부분이 유대인이었을 것을 감안할 때 그들이 이방인 가정에서 레위기 규례상 부정한 음식을 대접 받을시 매우 당황하게 될 경우를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레위기의 규례로 인해 차려 놓은 음식을 거절한다면 그들을 대접한 사람들은 실족하게 되어 복음 전파에 큰 악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예수께서는 자신들 앞에 차려진 음식은 양심에 거리낌 없이 먹도록 교훈하신 것이다(고전 10:27). 물론 예수께서 이처럼 말씀하신 것은 복음 전파의 효율성을 위해서는 율법도 어길 수 있다는 상황 윤리적인 의미로 하신 말씀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율법의 완성자이시므로 그 안에서 부정하고 정한 음식의 구분이 이미 없어진 데에(행 11:9) 근거를 두고 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
10:9 병자들을 고치고. - 이 병자 치유의 권능은 이미 12제자들에게 주어졌을 뿐 아니라(눅 9:1),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전파시 병행하셨던 전례가 있었다(막 1:34). 대개 병이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도입된 하나님의 형벌이나 진노의 한 수단으로 이해되었던(출 4:11; 민 25:18; 신 32:39 ; 요 9:2) 히브리적 사고 방식 속에서, 치유의 이적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나라를 실현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보증하는 증거이자(마 9:21,22; 눅 17:19) 하나님 나라의 지상적 도래의 가시적 표징이 된다. 따라서 이 같은 치유의 능력이 제자들에게 재현된 것은 그들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진정성을 보여 주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점진적 확장을 보여 주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행 3:6; 8:7; 9:12; 고전 12:9,28).
하나님의 나라가‥‥가까이 왔다. - 이는 70인 전도대가 병 고치는 이적과 함께 전할 메시지인데, 이는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의 첫 일성이기도 하다(막 1:15). 보통 '하늘나라'로도 번역되는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선포의 중심 주제로서 이는 성령 안에서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성도들의 왕국을 뜻한다. 이 왕국의 완전한 실제는 종말에 재림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실현될 것이지만, 이미 70인 제자들의 복음 전도 속에서도 그 역사적인 출현이 시작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본서 서론 특별자료, '하나님 나라의 이해'를 보다 참조하라.
10:10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나와. - 여기부터 16절까지는 제자들의 복음을 거부하는 경우에 제자들이 취할 행동 지침을 말씀하신 것이다. 특별히 여기서 '거리'(플라테이아)는 넓고 트인 길을 의미하는데 그 거리로 나오라는 것은 복음을 거부한 자들에게 취할 제자들의 행동이 공개적이어야 할 것을 시사한다.
10:11 발에 묻은 먼지도‥‥털어 버리노라. - 이런 행위는 경건한 유대인들이 부득이하게 이방인의 마을이나 가정과 접촉했을 때, 자신의 종교적 ․ 도덕적 정결을 이전과 마찬가지로 그대로 유지되도록 하는 상징적 행위였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적용시킴으로써, 그 결과 그들에게 임할 심판의 책임은 그들 스스로가 전적으로 져야 함을 나타내는 상징적 행위로 행하게 하신 것이다. 실제 이런 상징적 행위는 전도자의 전례가 되어,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을
거부한 비시디아 안디옥을 향해서 그대로 적용하기도 했다(행 13:51). 본절과 관련해서는 눅 9:5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 - 이는 비록 복음이 거부되는 곳에서 조차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는 반드시 선포되어야 할 것임을 보여 준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도래는 복음을 듣는 자의 수용 여부와 관계없이 엄연히 임할 사실이기 때문이다.
10:12 저 날에. - 여기서 '저 날'은 최후의 심판 날을 가리킨다(마 10:15).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 소돔은 종종 고모라 성과 더불어 성경에서, 관영하는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가 임박한 상황이나 상태를 상징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신 32:32 ; 사 1:10; 3:9; 렘 23:14; 겔 16:49,56; 계 11:8).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주어지는 심판으로 인한 철저한 파멸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되었다(신 29:23; 사 1:10; 13:19; 렘 49:18; 50:40; 애 4:6; 암 4:11; 습 2:9; 눅 17:29).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고 볼 때, 본절은 복음을 거부한 지역과 그 지역 사람들의 죄악의 심각성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임할 심판이 매우 중차대함을 잘 보여 준다 할 것이다.
10:13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 고라신(Korazin)은 가버나움 북서쪽 약 4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오늘날 '키르베트 케라제'(Khirbet Kerazeh)와 동일시되는 곳으로 예수님께서 많은 권능을 베푸셨지만, 복음을 등한시하고 배척함으로써 저주받은 도시의 대명사가 되었다.
벳새다. - 오늘날 '엣 텔'(et Tell)로 추정되는 갈릴리 바다 북쪽에 속한 마을로서 베드로, 안드레, 빌립의 출신지이기도 하다(요 1:44; 12:21). 이곳은 특히 분봉왕 빌립에 의해서 확장되었으며, 아우구스 황제의 딸을 기념하기 위해서 '벳새다 줄리아스'로 명명되기도 했던 곳이다. 이곳은 예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눅 9:10)과 소경 치유(막 8:22-26) 등 많은 권능을 베푸시던 곳이었지만 고라신과 마찬가지로 복음을 거부했던 대표적인 지역 중 하나였다. 벳새다에 대해서는 막 6장 자료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한편 예수께 저주받은 도시들의 위치에 대해서는 마 11장 자료노트 지도를 참조하라.
두로와 시돈. - 이 두 성은 서로 약 40km 정도의 거리를 두고 지중해 연안에 위치했던 교대 베니게(Phnenicia)의 두 주요 성읍으로 성경에서는 그 부패상으로 인해 늘 책망의 대상이 되곤 하였던 곳이다(사 23장; 겔 26-28장).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 비통함과 회개를 표현하는 전형적인 상징적 행위이다(삼하 13:19; 왕상 21:27; 욥 16:15). 즉 예수께서는 두로와 시돈의 가상적인 회개 모습을 예상함으로써, 고라신과 벳새다와 같은 마을 주민들의 완악함을 부각시키고 있다.
10:14 심판 때에‥‥견디기 쉬우리라. - 이것은 두로와 시돈이 심판에서 제외된다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복음에로의 초청을 거부한 고라신과 벳새다가 더 중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뜻한다. 결국 이 구절은 책임은 기회에 비례한다는 사실을 잘 보여 준다.
10:15 가버나움. - 이곳은 갈릴리 바다 북쪽 해변에 위치한 마을로서, 당시 로마 군대와(마 8:9; 눅 7:1-10) 세관이 있을 정도로(마 9:9) 제법 발달된 곳이었다. 그런데 이곳은 예수님의 갈릴리 전도의 근거지 였을 뿐만 아니라(막 9:1) 예수께서는 이곳에서 중풍병자(막 2:1-12)와 백부장 하인(마 8:5-13; 눅 7:1-10) 그리고 신하의 아들(요 4:46-54)과 회당장 야이로의 딸(막 5:41, 42)등을 살리는 많은 이적을 베푸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 사람들은 복음을 거부하고 예수를 영접하지 않았다. 때문에 가버나움은 복음을 거부한 전형적인 경우로 지목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형벌이 준엄할 것을 경고 받고 있는 것이다. 가버나움에 대해서는 마 9장 자료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하늘‥‥음부. - 이는 가버나움이 복음을 거부한 교만과 그 결과 처하게 될 심판의 상태를 나타내는 단어들이다. 실로 교만은 패망의 지름길임을 잘 보여 준다고 하겠다. 이와 관련해서는 마 11:23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10:16 너희 말을‥‥내 말을 듣는 것이요. - 이 구절은 70인 전도단의 복음 증거의 진정성을 보여 주고 있는데, 그들의 선포는 비록 인간의 입술을 통해서 나가지만, 예수님의 직접적인 선포와 동일하다고 인정을 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예수님의 직접적인 위임을 받은 제자들로서, 예수님께서 이 같은 전도자의 특권을 주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이 전한 복음의 수용 여부는 곧 예수님의 구주되심에 대한 수용 여부와 직결되는 것이고, 그래서 그 결과에 따른 심판은 예수님께서 직접 전파했을 경우와 동일한 취급을 받게 될 것이다. 즉 전도자의 전한 복음을 수용하는 것은 곧 예수님의 구주되심을 인정하는 것이고, 반대로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10:17-24 70제자의 귀환에 따른 평가 및 감사
본문은 앞단락(1-16절)에서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유대의 각 고을에 파송된 70인이 복음 전파 사역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와서 예수께 자신들의 행적을 보고하는 장면(17절)과 그에 대한 예수의 평가(18-20절) 그리고 예수의 하나님을 향한 기쁨의 기도(21,22절)와 제자들을 향한 교훈(23,24절)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에서 우리는 다음 몇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① 초자연적인 능력을 소유한 귀신등과 같은 사탄의 세력들도 그리스도의 능력을 의지하여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자들 앞에서는 굴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17-20절). ② 복음의 비밀은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을 통해서 알 수 없으며 오직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고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21절). ③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지 않는 누구도 하나님과 그의 뜻을 알 수 없으며, 따라서 구원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22-24절).
그러므로 성도들은 세상에 대해서는 담대하며 하나님 앞에서는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바라야 할 것이다.
10:17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 본절에서 20절까지는 70인 전도대 보고와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를 기록하고 있다. 전도대가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장소와 때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다만 본절은 전도대가 임무를 마치고 한꺼번에 돌아왔음을 의미한다기보다는 따로 따로 도착했으나, 이를 누가가 편집 의도상 이들이 마치 한꺼번에 돌아온 것처럼 묘사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한편 이들의 전도 보고는 매우 성공적인 것으로, 그 결과에 대해서 이들이 매우 흡족해 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귀신들도‥‥항복하더이다. - 이는 70인 전도대의 보고 내용인데, 이런 귀신 축출 능력은 '주의 이름'으로 행한 능력이었다. 이것은 70인 전도대 파견 때 부여했던 직접적인 임무(9절)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결과인지라, 제자들이 배로 기뻐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10:18 사탄이‥‥번개같이 떨어지는 것. - 이 구절은 사 14:4-20절의 간접적인 인용으로서, 이에 대해서는 ① 예수께서 사탄이 처음 타락하여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는 견해(Chrysostom, AHord, Ellicott) ② 예수님의 광야 시험 때 사탄의 의도가 실패함으로써 그의 권세가 이미 붕괴했다는 견해(Zahn) ③ 70인 전도대가 사탄의 힘을 견제했다는 견해(Godet, Plummer) 등이 있다. 그러나 이는 예수께서 제자들이 사탄의 존재들인 귀신들을 내어 쫓은 사건을 통해 장차 사탄의 세력이 멸망하게 될 것을 예지의 눈으로 본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보다 옳을 것이다(Robe티son).
10:19 뱀과 전갈을 밟으며. - 여기서 뱀과 전갈은 사탄의 상징으로서(사 65:25; 계 12:9; 20:2), 이것을 밟는 행위 는 사탄의 세력을 정복했음을 뜻한다(막 16:17,18; 행 28:6).
해할 자가‥‥없으리라. - 이는 70인 전도대의 승전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사탄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셨기 때문인데, 이런 예수님의 능력이 담보되는 한, 사탄의 세력이 아무리 발광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해칠 수 없을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이다(요 10:27,28; 롬 8:28-39).
10:20 귀신들이‥‥항복하는 것. - 이 구절은 귀신까지도 제어했던 70인 전도대의 기쁨을 한층 더 강화시켜 주기 위한 말씀이다. 즉 비록 예수님의 권능에 힘입은바였지만, 자신들의 목전에서 귀신들이 혼비백산 쫓겨나는 현상은 그들을 매우 고무시켰을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귀신 축출 사건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 주심으로써, 그들이 기뻐해야 할 더 큰 것이 있음을 한 발짝 앞서 보여 주신 것이다. 한편, 축사에 대해서는 막 9장 자료노트를 참조하라.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륵된 것. - 이는 70인 전도대들이 정말로 기뻐해야 될 이유로서, 귀신 축출 능력은 이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므로 주어지는 부가적인 특권임을 가르쳐 주고 있다. 즉 이들에게 주어진 귀신 축출 능력은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일 때만이 의의가 있는 것이고, 또한 하늘의 생명책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등록되었다는 사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출 32:32; 시 69:28; 사 4:3; 단 12:1; 빌 4:3; 히 12:23; 계 13:8; 20:12; 21:7).
10:21 이 때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아우테 테 호라'는 직역하면 '바로 그 시간에'라는 뜻으로 구체적인 시간을 지시한다. 따라서 여기서 '이 때에'는 예수께서 70인 전도대의 사역을 치하하신 그때를 가리킨다.
성령으로 기뻐하사. - 이것은 복음서의 예수님께서 기뻐하셨다는 표현이 사용된 복음서에서의 유일한 경우이다. 특히 누가는 70인 전도대의 보고를 받은 예수님의 기쁨을 성령이 충만한 상태와 연관시킴으로써, 그의 큰 기쁨이 인간적인 것이 아닌 거룩한 기쁨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 - 이는 하나님에 대한 예수님의 호칭으로서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을 엿볼 수 있는 구절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을 우주의 주재와 아버지로 부르고 계신다. 여기서 '천지의 주재'는 하나님께서 70인 전도대의 귀신 축출 사건을 통해서 온 우주 안에 충만하신 주권을 드러내신 데에 대한 고백적 호칭이다. 반면 '아버지'는 성자에 대한 성부의 부성적 지위를 보여 주고 있다.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 - 여기서 '지혜롭다'(소포스)는 사물을 직관할 수 있는 통찰력이 있음을 뜻하는 말이며 '슬기 있다'(쉬네토스)는 것은 지적인 지식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이란 진정한 의미에서 지혜 있는 자들이 아니라 교만하여 스스로 지혜있다고 자처하는 자로서(롬 11:25; 12:16), 당시 이스라엘의 종교적 지도자들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가리킨다.
숨기시고. - 이 단어는 뒤에 나오는 '나타내심'이라는 단어와 대조되는데, 원어로는 '제거된'이라는 뜻으로서 여기서는 하나님의 계시가 '숨겨진' 것을 말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시를 애써 은밀한 곳에 감추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세상에 훤히 드러내었지만, 인간들 스스로의 영적인 교만으로 인해 진리를 바로 알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지혜인 복음의 비밀을 보지 못해 생기는 모든 결과는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의 책임인 것이다.
어린아이들. - 이것은 당시 지적 능력이 결여된 존재로 취급받은,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로 볼 수도 있겠지만 더 적합한 뜻은 영적으로 어린 아이와 같이 겸손한 자들을 말한다. 이들은 스스로를 신뢰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만 의존해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하겠다. 눅 9:48 주석 참조.
나타내심. - 이는 하나님의 지혜인 복음의 비밀을 믿음으로 수납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시는 전도자들에 의해 다같이 전파되었지만, 스스로를 지혜있다고 자처하는 자는 복음을 미련한 것으로 경멸하고, 자기를 낮추는 자들만 생명의 복음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10:22 내 아버지. - 예수님의 하나님에 대한 호칭은 예수님과 하나님의 독특한 관계를 어렴풋이 보여 주고 있다. 특히 예수님께서 제자를에게 성부 하나님을 소개할 때 흔히 '너희 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하시는데, 이는 동일한 하나님에 대한 예수님과 제자들의 미묘한 관계의 차이가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같은 의미의 아버지였다면 '우리 아버지'라고 했을 것이고, '너희 아버지'와(마 5:48) '내 아버지'(요 6:32,40,65; 8:19,38)라는 용어상의 구분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점을 미루어 볼 때, '내 아버지'라는 예수님의 호칭은 '영원한 아들' 성자와 성부 하나님이라는 그와 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라고 할 것이다.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 여기서의 '모든 것'에 대해 다양한 의견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예수께서 중보자로서의 임무를 수행하는데 필요로 하는 것들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예수님만이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하고 완벽한 중보적 계시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버지 외에는‥‥아는 자가 없고. - 이는 먼저 성부 하나님의 성자 예수님에 대한 유일하신 지식을 나타내는 표현인데, 이는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영원 전부터 하나님께 나신 독생자이기 때문이다. 즉 성자 하나님에 대한 영원한 기원은 오직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 외에 알 자가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요 8장 자료노트 '그리스도의 선재성'을 참조하라.
아들과‥‥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 이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존재들로서 첫째는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시고, 두 번째는 그에게 속한 백성들이다. 즉 영원한 기원을 가지셨을 뿐만 아니라 거룩하신 성부 하나님 을 알고 계시 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그와 함께 영원 전부터 영원토록 함께 하시는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뿐이며, 그 성자 하나님을 통해서 그의 백성들은 성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아들을 보는 자는 아버지를 보는 것과 같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주석적 성격이 강하다고 하겠다(요 1:8; 6:46; 14:9-21).
10:23 너희의 보는 것. - 이는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 이것은 대망의 메시야이신 역사적 예수를 본 제자들의 엄청난 특권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구약의 성도들이 오실 메시야를 대망하며 희미한 가운데 바라보았던 그리스도와 함께 시 ․공간적 일체감을 공유할뿐만 아니라 그 당시 지혜롭다고 자처한 자들이 볼 수 없었던 그리스도를 보았다는 사실은 은혜가 아니고서는 달리 설명할 수 없는 특권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10:24 많은 선지자와 임금. - 이들은 구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거나 그 모형이 되었던 구약의 성도들을 가리킨다. 대표적으로 이사야 선지자(사 49장-57장)와 다윗왕을(시 110:1) 들 수 있는데, 특히 다윗 왕은 자신의 후손 중에 날 메시야를 '주'라고 부르는 신앙을 가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은 믿음 가운데 오실 메시야를 보고자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메시야의 도래의 현장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되지 않았다. 이런 사실들은 당시 제자들이 누렸던 특권이
얼마나 커다란 은혜 였는가를 잘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히 11:13; 벧전 1 : 10, 11).
10:25-37 율법사의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
앞 단락(17-24절)은 70인의 제자들이 복음을 전파한 후 귀환하여 보고하자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장면이었다. 본문은 영생을 얻는 방법과 이웃이 누구인가를 물은 한 율법사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구약의 말씀과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써 답변해 주시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다. 마태와 마가도 이 사건을 소개하고 있는데(마 22:34-40; 막 12:28-34) 각각 다른 관점에서 쓰여진 것으로 기록의 차이를 보여 준다. 즉 마태와 마가는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핵심을 두고 율법과 사랑의 관계를 다루고 있지만, 누가는 '영생을 얻는 방법'에 중점을 두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율법의 참된 정신을 가르쳐 준다.
본문을 보면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게 되는가'라는 영생을 얻는 방법을 묻는다(25절). 여기에 대해 예수께서는 하나님 사랑(신 6:5)과 이웃 사랑(레 19:18)이라는 율법의 가르침을 재차 확인시킴으로 답변을 주셨다(26-28절). 여기서 율법사의 새로운 질문이 제기되는데 그것은 과연 '내 이웃이 누구인가'라는 것이었다(29절). 그의 이러한 질문은 그의 선행을 과시하기 위한 의도에서 행한 것이었다(29절 주석 참조), 그런데 예수께서는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 대신에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라 불리는 비유를 말씀하심으로 질문에 대한 답변과 더불어 새로운 사실을 교훈하고 계신다. 비유의 내용은 이렇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되었다(30절). 그때 마침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제사장과 레위인과 어떤 사마리아인이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보다 어려움을 당한 동족을 돌보는 일에 더욱 열심이어야 할 제사장과 레위인은 오히려 피하여 지나갔다(31,32절). 반면 당시 유대인들에 의해 멸시의 대상이 되었던 사마리아인은 이를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33절). 기름과 포도주로 그를 치료하고, 자신의 시간과 물질을 드려 그를 돌보아 주었다(34,35절). 이러한 비유를 마치신 후에 예수께서는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는 역질문을 하셨는데(36절),
이는 '누가 나의 이웃인가? '라는 율법사의 질문과는 현격한 차이점을 드러내고 있다. 또 율법사의 경우는 이웃의 범위를 한정시키는 작업을 통해 이웃 사랑의 계명을 실천했음을 증명코자 시도했던 반면, 예수께서는 이웃의 범위를 철폐시키고 이웃을 중심으로 자아를 개방토록 하신 것이다. 사실 유대인들은 이웃 사랑의 한계를 명확하게 규정한다. 그들의 이웃은 유대인들을 의미하며 이방인은 이웃이 될 수 없었다. 특히 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불의한 자들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그 율법사는 사마리아인을 이웃에 대한 사랑을 베푼 자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36절). 여기서 예수께서는 참된 이웃이란 사람이 규정하고 한정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며 누가 나의 이웃이냐를 묻기에 앞서 자신이 다른 사람의 참 이웃이 되어 사랑과 자비를 베풀도록 교훈하신 것이다. 이러한 이웃 사랑이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며 이 사랑이 바로 율법의 본질과 목적이며 참된 의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영생의 길임을 깨닫고(요일 4:20) 내 이웃을 찾기 전에 내가 가난한 자, 소외된 자, 병든 자, 고통당하는 자의 이웃이 되어 참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야 하겠다.
10:25 율법사. - '서기관' (마 2:4) 또는 '교법사' (눅 5:17)로도 불리는 자들로, 율법을 해석하여 가르치는 사람을 가리킨다. 마 5:20 주석 참조.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 직역하면 '내가 무엇을 행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이다. 이는 율법사가 예수께 질문한 내용인데, 이를 자세히 분석해 보면 구원에 관한 그의 입장이 전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그는 이미 사람이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여기에 합당한 행위를 해야 한다고 믿고 있는데, 그에게서 행위는 바로 율법 준수와 선행 두 가지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소위 '결의법 준수'와 '선행 공로 개념'이라고 하는데, 전자는 율법을 통해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주었고, 후자는 구원 받기에 다소 미진한 부분들을 보충시켜 주는 역할을 했다. 특히 '선행 공로 개념'은 당시 서기관들을 비롯한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일치된 공통 분모적인 사상이었는데, 이 개념에 의하면 사람이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하더라도 선행을 많이 하면 그 공로로 구원 받기에 부족한 부분들이 채워진다고 믿어졌던 것이다. 따라서 본절의 율법사의 질문은 그가 속한 서기관들의 구원 사상을 잘 보여 주는 대목이라고 하겠다.
10:26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 이는 예수님의 반문이다. 율법사의 질문에 직접적인 대답을 회피하는 대신 반문을 통해서 그의 의도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자 하셨던 것이다.
10:27 본절은 예수님의 반문에 대한 서기관의 답변이다. 그러나 마 22:37-40과 막 12:29-31에는
예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으로 나타난다. 어느 기록이 더 역사적이든지 간에 이 대답은 예수께서 의도하신 말씀임에 분명하다.
네 마음을 다하며‥‥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 신 6:5의 인용으로, 십계명 가운데 하나님과의 관계를 규정한 첫 번째 돌비에 기록된 내용의 요약이다. 본절과 관련해서는 마 22:37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네 이웃을‥‥사랑하라. - 레 19:18의 인용으로 십계명 가운데 인간 상호간의 관계를 규정한 두 번째 돌비에 기록된 내용의 요약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마 22:39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10:28 네 대답이 옳도다. - 이는 율법사의 답변에 대한 예수님의 긍정적인 평가이다. 이 율법사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말했든지 예수님께서는 그의 대답에 매우 훌륭하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으신 것이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 이것은 25절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이다. 즉 원칙적으로 엄격히 말하면, 어떤 사람이든지 하나님과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하면 영생을 받을 수 있다는 말씀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원론적으로는 가능할 법한 것이지만 경험적으로는 도저히 이를 수 없는 것임을 감안할 때, 이미 예수께서는 이 말을 통해 스스로의 힘으로 영생을 쟁취하려 했던 율법사의 위선을 지적하고 계시며 또한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교훈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10:29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 율법사는 예수로부터 그의 대답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답변을 듣자 이번에는 자신의 선행을 과시하기 위해 그의 이웃이 누구인지를 예수께 질문했다. 당시 유대인들의 개념상 이웃에 이방인은 포함되지 않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율법사는 아마도 그의 친족과 인근의 같은 유대인들에게는 선을 베풀었던 것 같다.
10:30 본절에서부터 36절까지는 일명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라 불리는 부분으로, 예수께서 참 이웃을 묻는 율법사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이야기하신 비유이다. 특별히 이 비유는 이웃의 개념에 자신의 친족이나 인근 유대인들만을 포함시킨 율법사의 위선과 편협한 사고를 지적하기에 매우 적절한 비유라 아니할 수 없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 여리고는 요단 계곡의 사해 북서 방향 약 16km 지점에 위치한 성읍으로서, 동서 무역로를 끼고 있는 이스라엘의 중추적인 상업 도시였다. 여리고에 대해서는 수 6장 자료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한편 예루살렘에서 여리고까지는 약35km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은 굴곡이 심하고 길 양쪽에는 골짜기 가 많아 상인들을 노리 는 강도의 출몰이 잦았다고 한다.
내려가다가. -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로 그곳으로 가는 것을 보통 '올라간다'하고 그 반대의 경우를 '내려간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서는 예루살렘이 해발 760m의 고원에 위치하고 여리고가 해면보다 250m 낮은 곳에 위치한 까닭에 문자적으로도 '내려간다'는 말이 맞다.
강도를 만나매‥‥버리고 갔더라. - 이는 예수님의 비유의 발단 부분에 해당하는 사실로서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나 가진바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맞아서 거의 사경을 헤매는 지경에까지 놓이게 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즉 강도 만난 자는 타인의 도움이 없이는 죽은 목숨과 진배가 없는 상태에 놓인 것이다.
10:31 한 제사장이‥‥피하여 지나가고. - 제사장은 이스라엘의 예배를 보존하면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중재했던 직책으로서, 아론의 후손들이 맡았다. 이들 제사장 계급은 그들의 반차에 따라 성전에서 봉사했었는데(대강 24:7-19). 본절의 제사장은 이 임무를 마치고 고향으로 낙향하는 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여기서 제사장의 죄악은 피가 강도 만난 자의 처지를 보고서도 피해갔다는 사실에 있는데, 비록 그가 시체와 같은 부정한 것을 멀리해야 하는 정결 의무를 지켜야 할 위치에 있다손 치더라도(레 21장), 죽어가는 이웃을 외면한 죄는 어떤 변명도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즉 그는 비록 제사장의 직무에는 충실했지만 누구보다도 더 동족을 보살피고 돌봐 주어야 할 의무를 저버리고 강도 만난 자를 피해 감으로써 이운 사랑의 계명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행위를 한 것이다.
10:32 한 레위인. - 레위인은 성전에서 아론 계열의 제사장을 보좌하고 성전의 기물들을 운반, 보관하는 역할을 감당했던 사람들이다(민 3:81; 18:2-4). 이러한 레위인 역시 강도 만난 이웃을 외면했는데, 그 까닭은 제사장의 그것과 같았을 것이다. 이처럼 소위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되었던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한결 같이 강도 만난 자를 외면한 것은 이들의 심각한 도덕적 불감증 상태를 여실히 보여 주는 증거가 되고 있다. 즉 소위 하나님에 대한 경건만 강조하면서 이웃의 아픔에는 철저히 외면하는 거짓 종교지도자의 전형이 아닐 수 없다.
10:33 어떤 사마리인은‥‥불쌍히 여겨. - 사마리아인은 인종적 ․ 종교적 혼혈로 인해 유대인으로부터 멸시를 받았던 민족이다. 이에 대해서는 눅 9:52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그런데 예수께서 이러한 사마리아인을 비유에 등장시킨 것은 앞서 두 명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비인간적인 처사와 사마리아인의 선행을 대조시킴으로써 말로만 사랑을 부르짖는 교만하고 완악했던 유대 율법주의 자들의 위선을 보다 실질적으로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10:34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 포도주는 살균제로. 기름은 방부제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즉 본절은 일단 응급 조치를 한 것을 보여 준다.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 사마리아인의 극진한 사랑의 행위는 끝이 없다. 그는 강도 만난 자를 응급 조치를 하고 난 후 친히 주막으로 데리고가 치료를 하려고 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대가를 바라지 않는 진실한 사랑의 향기가 진동하고 있다
10:35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 사마리아인이 주막 주인에게 당부하는 말이다. 이로 미루어 사마리인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지금 떠나야할 입장에 놓인 듯한데, 이것은 강도 만난 자로 인해서 많이 지체했던 것도 요인이 된 듯하다. 아무튼 그는 자기 대신 여관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의 비용을 주어가면서까지 간호를 부탁하는데, 실로 그는 자신의 시간과 물질을 투자해 가면서까지 곤경에 처한 이웃을 돕고자 한 것이다. 한편 한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으로(마 20:2). 당시 로마의 하루 숙박비가 1/32데나리온이었다는 증언(Polybius)을 감안하면 두 데나리온은 약 두 달치의 숙박비에 해당한다 할 것이다.
내가‥‥갚으리라. - 이는 간호 비용이 초과할 경우까지 계산한 것인데, 이것은 이웃에 대한 진실한 사랑이 없이는 할 수 없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10:36 누가‥‥이웃이 되겠느냐. - 이는 비유를 정리하는 예수님의 역질문인데, 이 구절은 특히 '누가 이웃인가? '라는 질문을 던졌던 율법사의 접근 방식과는 현격한 차이를 보여 주고 있다. 즉 율법사의 경우에는 이웃의 범주를 한정시키는 작업을 통해서 이운 사랑의 계명을 실현했음을 증명코자 시도했던 반면, 예수님의 경우는 이웃의 범주를 철폐시키고 이웃을 중심으로 자아를 개방하여 이웃 속으로 들어가도록 명령하신 것이다.
10:37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 율법사의 답변인데, 그는 '사마리아인'에 대한 편견으로 인해 그 호칭을 입에 담기 싫어했던지, 완곡어법(婉曲 語法)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아직도 그가 인종적 ․종교적 범주 내에서의 이웃 개념에 매몰되어 있다는 증거가 된다고 하겠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 여기서 '하라'에 해당하는 '포이에이'( )는 현재시제로서 '계속 행하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즉 예수께서는 이웃의 개념을 묻는 율법사에게 참 이웃의 개념을 깨닫게 하셨음은 물론 그에 바탕한 지속적인 이웃 사랑까지 요구하신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명령은 이웃 사랑을 민족적 ․ 종교적 카테고리 속에서만 행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던 율법사의 교만과 위선을 완전히 꺾어버리기에 충분한 위엄있는 말씀이었다.
10:38-42 마르다와 마리아
앞단락(25-37절)에서는 예수님께서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를 묻는 율법사에 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능동적인 이웃 사랑에 대해 교훈하셨음을 살펴보았다. 이어 본문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상반된 태도를 통하여 성도가 신앙생활에서 취해야 할 우선순위에 대한 교훈을 준다. 이 사건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와 함께 사복음서중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누가의 의도를 볼 수 있다.
누가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이웃 사랑의 중요성을 설파한데 이어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말씀 듣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한 것이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전도 여행 도중에 마르다와 마리아의 영접을 받아 그들의 집에 유하시게 되었다(38절). 이때에 마르다와 마리아의 대조적인 모습이 드러나는데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하고자 하는 정성에서 분주하게 음식을 준비하였고(40절) 마리아는 주의 발아래 앉아 말씀 듣는 일에 열중하였다(39절). 여기서 무심한 마리아에 대한 마르다의 불평이 터졌지만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말씀 듣는 태도를 지지하신다(41,42절). 이러한 마리아와 마르다의 대조적인 모습은 우선순위의 가치관이 다른 데에서 기인한다. 즉 마르다의 관심사는 좋은 여주인이 되어 손님을 잘 대접하는 것이고, 마리아의 관심은 말씀을 청종하는 제자가 되는데 있었다. 그리고 예수님의 관심은 손님으로서 대접받는 것보다 복음 전파를 수행하는데 있으셨다. 이에 예수께서는 마르다의 불만을 가볍게 나무라셨던 것이다 물론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 열심이었던 마르다의 태도가 잘못된 것이라 할 수는 없다. 예수님을 초대하고 잘 대접하려고 애쓰는 열심 또한 예수님에 대한 사랑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마르다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예수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복음 전파를 수행하기 위해 오신 예수를 잘 대접하는 것이 없으며 또한 가치 있는 일은 없다는 사실이다. 결국 이러한 본문은 성도의 생활에 있어서 육적 문제보다 영적 문제가, 그리고 주님과 성도의 관계에서 외적 형식이나 결과보다 주님의 복음을 향한 순수한 사랑 자체가 우선적으로 요청됨을 교훈하고 있다.
이 외에 우리는 본문에서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첫째, 우리는 결코 이기적인 주관주의에 빠져서 내 기준에 의해서 다른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 말씀을 통해 나의 모습을 점검해 보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마르다는 봉사의 열심이 지나쳐서 예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먼저 생각하기 보다는 자신이 정한 우선순위의 일을 자신의 힘으로 해내려고 노력했다. 또 다른 사람이 가치를 두고 하는 일을 예수님의 기준이 아닌 자신의 기 준으로 판단했다.
둘째, 마르다는 세상일에 분주하여 하나님 말씀을 듣는 일에 소홀했다. 우리도 일상생활 속에 파묻혀 하나님을 잊기 쉽다. 이 때에는 마리아처럼 신앙생활에 유익한 기회를 잡아서 과감하게 상황을 박차고 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있게 대하는 태도가 요구된다.
셋째,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일보다는 영적인 일을 먼저 추구할 것을 명령하신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물질적인 헌신도 요구되지만 먼저 말씀을 올바로 받아들인 후에 이와 함께 여러 차원의 봉사로 나타나야 한다.
10:38 저희가 길 갈 때에. - 본절에서 42절까지는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에 관한 기사이다. 한편 여기서 예수님 일행들이 어디로 여행하는 중이었는지 구체적인 언급이 없으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전 얼마 동안 예루살렘을 여러 차례 방문한 것을 감안할 때 '길 갈때'라는 말은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것을 의미하거나 반대로 예루살렘에서 낙향하는 도중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 촌. - 베다니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것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요 11:1), 베다니에 대해서는 막 14장 자료노트를 참조하라.
마르다. - 마르다는 항상 마리아보다 먼저 언급이 되는데(요 11:5; 11:19,20; 12:2,3), 이는 그녀가 마리아와 나사로보다 연장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마르다에 대해서는 요 12장 연구 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자기 집. - 이것은 마르다가 가장 나이가 많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단어인데, 이는 마르다가 실제 호주였음을 말해 준다.
10:39 마리아. - 공관복음서에 등장하는 마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들이 많이 있지만(마 1:18; 27:55,56; 막 15:40; 행 12:12), 여기의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털로 닦은 여인을 가리킨다(요 12:3). 이 여인을 막달라 마리아(마 27:55,56)와 동일 인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신빙성이 없다. 아무튼 이 여인은 베다니의 마리아로 알려지는데, 그녀는 마르다의 동생이자 나사로의 누이이기도 했다(요 11:32).
주의 발 아래 앉아. - 마리아의 이 같은 자세는 보통 랍비의 교훈을 경청하는 자세로서, 마리아가 진리에 대해 몰입하는 모습을 충분히 짐작하게 해주고 있다. 한편 베다니의 마리아는 일명 '발 아래 여인'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그녀가 본절에서와 같이 예수의 발아래 앉아 예수의 교훈을 경청하고 또한 예수의 발아래 엎드려 나사로를 위해 기도했을 뿐만 아니라(요 11:32). 예수의 발아래 앉아 주께 기름을 부었기 때문이다(요 12:3).
10:40 마르다는‥‥마음이 분주한지라. - 마르다가 예수의 일행을 대접하기 위해 매우 분주했음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사실 혼자 예수의 일행이 먹을 음식을 준비하기에는 힘에 겨웠을 것이다. 특별히 여기서 '마음이 분주한지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리에스파토'( )는 '주의력을 산만하게 하다'라는 뜻으로, 마르다 역시 예수님의 말씀에 집중하려고 했지만, 산적한 일로 인해 들을 수가 없었던 사실을 짐작케 해준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마르다는 말씀을 경청하는 것보다 주의 일행을 대접하는 일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마르다는 전 단락의 어떤 율법사처럼 무엇이 되느냐(to be)는 문제보다 무엇을 할 것이냐(to do)고 하는 외형적인 업적에 생의 우선권을 두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내 동생이‥‥도와주라 하소서. - 이는 마르다가 마리아의 경청을 못마땅하게 여긴데서 비롯된 원망형의 간청이다. 즉 마르다는 마리아가 말씀을 깊이 경청하는 태도를 자신의 봉사보다 열등한 것으로 취급한 듯 하고, 또한 이를 제지하지 않은 예수님의 무관심이 약간은 원망스러웠던 것 같다. 뿐만 아니라 마르다의 간청은 자신의 수고로운 봉사가 마리아의 경청보다 더 헌신적이었음을 평가해 달라는 요청이기도 했다.
10:41 마르다야 마르다야. - 이름을 거듭해서 부르는 것은 대체로 중요한 교훈을 하시기 위함일 수도 있고, 마음이 격동된 상태에 있는 마르다에 대한 애정과 관심의 표현일 수 있다(Plummer). 염려하고 근심하나. - 마르다의 마음 상태에 대한 예수님의 진단이다. 여기서 염려는 그녀의 내적인 마음의 동요를, 근심은 이것으로 인한 외적인 소란을 가리킨다. 즉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의 헌신적인 봉사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신 것이 아니라, 그 일을 수행하는 마음가짐이 잘못되었음을 가르치고 계신 것이다.
10:42 몇 가지만‥‥혹 한 가지만이라도. - 여기서 '한 가지만이라도'는 일부 사본에 '한 가지만' 이라고 표기되어 있다(알렉산드리아, 에브라임 사본 등). 이러한 읽기의 차이에 따라 각각의 해석이 다르다. 먼저 전자를 취할 경우는 다음 세 가지의 해석이 가능하다. 즉 ① 몇 가지와 한 가지가 다 같이 물질적인 것, ② 몇 가지와 한 가지가 다 같이 영적인 것(Ellicott). ③ 몇 가지는 물질, 한 가지는 영적인 것(Bruce) 등이다. 반면 후자를 취할 경우는 다음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즉 ① 몇 가지와 한 가지가 다 같이 물질적인 것(Farrar). ② 몇 가지는 물질, 한 가지는 영적인 것(Bengel,Plummer) 등이다. 이상의 견해 가운데 본절에 가장 적절한 해석은 후자의 ②의 견해이다. 즉 예수께서는 식사 준비에 분주하여 마음까지 번잡하게 된 마르다와 오직 자신의 말씀에만 경청한 마리아의 단순성을 대조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결국 예수께서는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는 마리아의 자세를 가장 훌륭한 대접으로 받으신 것이다(Moffat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