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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장 예수 형제들의 불신, 예수 사역의 신적 기원에 관한 교훈 및 고조되는 유대인들의 예수 배척
많은 은헤 받으시고 하나님 좀 자랑해주세요.
하나님 영광을 받으시는것 좋아하세요.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예수께서 본래 제 2위 성자 하나님으로서 절대 신성(神性)을 가지신 존재였으나 하나님이 태초부터 세우신 구속의 법에 따라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그리스도임을 입증함으로써 결국 예수의 그리스도 직과 예수 안에서의 우리의 구원의 절대성을 확증하기 위하여 기록된 요한복음의 전반부로서 먼저 예수 공생애의 여러 사건 중에서도 이상의 사실을 잘 입증하는 여러 자료들 곧 예수의 관련자들의 중언들과 예수 자신이 행한 표적들과 자기 계시를 제시하는 1:19-12:50까지 일련 기사의 연속부분이다. 1:19-12:50은 예수의 공생애 개시 기사에서부터 시작하여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공식 입성하시어 이제 곧 십자가 수난을 당하기 전날 밤인 최후의 만찬 직전까지의 사건 중 이상의 진리를 입증할 수 있는 주요 기사들을 대략 연대순으로 제시하고 있다.
또 본장과 8장에 기록된 사건들은 유대 종교력으로는 7월, 태양력으로는 10월경에 있는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을 전후로 하여 갈릴리와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사건들이다. 이는 전장에 기록된 바, 유월절 가까운 때에 있었던 오병이어 사건 이후 약 6개월이 지난 때임과 동시에 예수께서 십자가 수난을 당하시기가지 불과 약 6개월 정도 남긴 때였다. 이 무렵에는 예수의 공생애 사역이 상당히 진행되었으나 전 우주의 구속주(救贖主)이신 메시야(Messiah)로서 오신 예수의 구속 사역을 다만 편협한 민족주의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입장에서 곡해한 유대인 가운데 한편으로는 민중들이 예수를 정치적 해방자로 추앙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 ․ 종교 기득권자들이 예수를 정적(政敵)으로 여기고 무조건 배척하는 양상이 점점 심화되어 가고 있던 때였다. 특히 본장은 유대인들 가운데 있었던 예수에 대한 이러한 상반된 견해. 즉 그를 정치적 해방자로 추앙하는 자들과 종교적 ․ 정치적으로 혼란을 가져오는 자로 적대시하는 자들 간의 첨예한 대립 상황이 매우 잘 나타나 있다. 이러한 문맥 하의 본장 내용을 개략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전반부(1-24절)는 초막절 이전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자기 형제들에게 배척받으신 사실(1-9절)과 예수께서 은밀히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초막절 행사에 참여한 사실을, 그리고 초막절 기간 동안 성전에서 예수께서 자기 교훈이 신적 기원을 가진 것임을 강론하고 이어 유대인들이 편협된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구약의 일부를 선택하여 곡해한 결과 궁극적으로 모세 율법을 지키지 아니한 것처럼 예수의 교훈을 무조건 무시하고 심지어 예수를 죽이려 한 유대인들의 악한 의도를 지적한 사실을 기록한다(14-24절).
이러한 본 단락에서 발견되는 구속사적 의의는 다음과 같다.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전우주의 참 구속주이신 예수께서 구약 곧 옛 언약을 일단 성취하시고 영생과 천국을 골자로 하는 새언약 곧 신약을 주시고 구약 계시의 핵심인 율법이 신약적으로 계승 발전된 복음을 선포하셨을 때 예수 당시 유대인들은 이를 다음 몇 가지 관점에서 배척했다. 먼저 구약이 신약으로 발전확장됨을 모르거나 인정치 않고 구약의 일부 내용을 이스라엘 민족주의적 또는 인본주의적 관 점에서 편협하게 해석하여 예수를 배척한 자들이 있었다(바리새인 및 율법사들). 또한 예수가 가르치는 복음의 정의와 진리가 자신들의 부패와 불의에 대치되자 정치적 기득권을 고수하기 위하여 예수를 배척한 자들도 있었다(헤롯 및 사두개인들). 또한 예수의 메시야로서의 참 본성을 바로 보지 않고 편견에 사로잡혀 예수를 무조건 배척한 자들도 있었다(예수의 고향 사람들 및 형제들). 어쨌든 그 이유는 다양하다고 하더라도 이들은 예수와 그 복음을 있는 그대로 바로 보지 못하고 메시야를 배척함으로써 구원을 상실하였다는 점에서는 동일했다. 또한 이는 정의나 진리보다 이해타산과 편견에 더 사로잡히기 쉬운 인간의 약점을 이용한 사탄의 획책의 결과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혹시 예수는 믿는다고 하는 나도 나의 이해와 편견에 사로잡혀 성령이 제시하는 구속사의 실체를 못 깨닫는지 돌아보아야 하겠다.
후반부(25-53절)는 유대인들 간에 있었던 예수에 대한 상반된 두 가지 견해를 기록한 부분으로서 많은 표적을 보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되 유대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정치적 해방자로 믿고 추앙하는 민중들과 예수를 정적(政敵)으로 여겨 무조건 배척하며 살해하고자 하는 유대 지도자들의 대립과 예수께서 자기 신성에 대한 증거로서 십자가 수난 후 성부께로 돌아갈 것이라 예언하신 사실(25-36절)과 초막절 마지막 날 예수께서 자기를 믿는 자들이 장차 성령을 받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신 사실 및 유대인 군중 가운데서는 예수가 참 그리스도이냐의 논의가 일어난 것에 대해 산헤드린 공회에서는 백성들을 미혹케 하는 예수를 체포할 것이냐 말 것이냐에 대해 논쟁을 벌인 사실을(37-53절)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요한복음은 예수에 대한 당시 유대인들의 입장을 거의 예수 배척에만 초점을 맞추어 기록한 공관복음(共觀福音)과는 달리 예수를 그리스도, 곧 메시야로 믿는 자들도 유대인들 가운데 많았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할 수 있는 대로 예수가 신성을 가지신 참 메시야이심을 입증할 증거들을 많이 제시하고자 한 요한복음 전체의 기록 의도에 따른 것이다. 즉 요한은 유대인들 가운데 일부는 비록 예수를, 예수 자신이 제시한 대로 구약에서 내내 예언한 참 메시야로서 올바로 이해하고 믿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편협된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정치적 메시야로 잘못 이해한 것으로서 메시야의 사역에 대해서는 오해하였으나 그가 메시야일지도 모른다고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다는 측면에서 그들의 증언들을 매우 중요한 자료로서 본장에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불완전하게나마 예수를 메시야로 알고 있었던 자들도 궁극적으로는 유대 지도자들의 획책에 말려 들어 후에 예수를 배반하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인간의 완악함이 얼마나 큰가를 심각하게 생각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지식과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해 있지 아니하면 유대인들이 사탄의 도구로 사용된 것과 같이 언제든지 사탄의 획책에 말려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외울 말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 7:37,38)
예수 형제들의 불신
1 이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2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3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4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5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7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8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9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
예수에 대한 유대인들의 두 가지 평
10 〇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비밀히 하시니라
11 명절 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어디 있느냐 하고
12 예수께 대하여 무리 중에서 수군거림이 많아 혹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하게 한다 하나
13 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를 말하는 자가 없더라
예수 교훈의 신적 교훈
14 〇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15 유대인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1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18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19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20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를 인하여 괴이히 여기는도다
22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주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주느니라
23 모세의 율법을 폐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케 한 것으로 너희가 나를 노여워하느냐
24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하시니라
예수의 추종자들과 배척자들
25 〇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혹이 말하되 이는 저희가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26 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저희가 아무 말도 아니하는도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
27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
28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가라사대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로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이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29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니라 하신대
30 저희가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31 무리 중에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의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
32 예수께 대하여 무리의 수군거리는 것이 바리새인들에게 들린지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를 잡으려고 하속들을 보내니
3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34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신대
35 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저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
36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니라
예수에 대한 유대 군중들의 논의
37 〇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40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혹은 이가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41 혹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42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43 예수를 인하여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44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
예수에 대한 산헤드린 공회의 논의
45 〇 하속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저희가 묻되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
46 하속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47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48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이가 있느냐
49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50 그 중에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저희에게 말하되
51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
52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상고하여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53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본문 & 자료노트
원어연구-7:7, 세상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는 '코스모스'( )이다. 이는 '정돈하다', '장식하다', '명령하다', '경의를 표하다' 등의 다양한 의미를 가진 동사 '코스메오'( )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질서', '장식', '세계'(world)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는 헬라인들의 우주관이 잘 반영되었는데, 곧 그들은 세계를 질서 정연하게 잘 정돈되어 있는 아름다운 장식품과 같은 것으로 보았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성경에서 헬라어 '코스모스'를 통해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는 매우 다양하다. 그것은 '장식'(ornament)이라는 일반적인 의미 이외에 ①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창조 세계, 즉 우주 전체 (행 17:24; 고전 8:6; 골 1:16,17). ② 인류의 거처, 역사의 현장, 사람이 사는 세계 및 지구(마 4:8; 막 8:36; 롬 4:13). ③ 타락한 인류,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대상으로서의 세상 등을 의미한다(눅 2:10; 행 1:8; 롬 3:19; 고전 11:32). 이 가운데 ③의 의미는 신학적인 의미로만 사용되는 것이며, ① 은 히브리인들의 창조관과 우주관을 잘 반영한 것이다. 그리고 ②는 일반적으로 널리 쓰이는 의미이다.
한편 본문은 위의 세 가지 의미 중 ③의 의미에 가까운 것으로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공중권세 잡은 자(엡 2:2)사단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들, 곧 직접적으로는 유대인들을, 궁극적으로는타락한 인류 전체를 가리킨다.
보감-7:1-53 본서에 나타난 유대인의 예수 배척 기록
본서 저자는 유대인의 예수 배척 사실을 기록함에 있어서 주로 예수의 신성에 대한 자기주장 때문에 유대인들이 그를 배척한 것으로 기록한다. 그러나 유대인의 배척으로 결국 십자가 수난을 당하신 예수께서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도리어 유대인의 배척 사건은 그의 신성을 반증하는 것이 되었다. 한편 유대인의 예수 배척에 대한 전반적인 사실은 막 12장 연구자료를 참조토록 하고 여기서는 본서에 나타난 유대인의 예수배척 기록들만 모아보도록 하겠다.
때와 장소 | 사 건 | 배척 이유 |
어떤 명절, 예루살렘(5:1-47) | 안식일에 예수가 38년된 병자 치유 | 예수께서 스스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언 |
유월절, 갈릴리에서(6:1-71) | 오병이어의 기적 | 예수의 생명의 떡에 관한 교훈이 난해함 |
초막절, 예루살렘(7:1-10:21) | 성전에서의 여러 설교, 소경치유 |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라고 선언 |
수전절, 예루살렘(10:22-42) | 유대인들이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냐고 물음 |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라고 선언 |
유월절, 예루살렘(11:1-12:50) | 죽은 나사로의 부활, 승리의 예루살렘 입성 |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정치적 소요를 걱정함 |
보감-7:37 성도의 구원의 각 단계
구원이란 태초 이전에 계획되어 과거에 이미 성취된 사실을 현재 적용하고 또 훗날 최종 완성할 하나님의 사역인 동시에 단회적으로 영구 인정된 사건이며, 또한 계속 점진적으로 발전하다가 최후의 영화에 이르는 긴 과정이기도 한 포괄적 개념이다. 그러면 이러한 구원을 각 단계별로 분해하여 설명해 보자.
단계 정의
1. 소명: 죄인을 인도해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준비된 구원을, 믿음을 통해 받도록 부르는 신적 사역의 시작(히 3:1; 벧전 2:9; 벧후 1:3)
2. 중생: 성령에 의한 소명이 결실을 맺어 죄인의 마음이 변화되는 것, 거듭남이라고도 함(엡 2:1,8,9)
3. 회심: 성령의 내적 소명에 의해 중생한 신자가 새로운 성향을 가지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임(고후 7:10)
4. 칭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긍휼로 인해 죄인의 신분이 바뀌어 의인으로 불려지는 것임(롬 5:18,19)
5. 양자: 마귀의 자식이던 죄인이 신분을 바꾸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서 자녀로서의 특권을 누리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게 됨(롬 8:15)
6. 성화: 구원 받은 성도가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점차적으로 죄와 부패에서 떠나 성결케 되어 점차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과정임(엡 4:24)
7. 성도의 견인: 중생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 비록 성화의 과정에서 퇴보하거나 방황케 돼도 결단코 구원받은 자의 지위에서 떨어지지 않고 반드시 구원 얻게됨(요 10:27-29; 롬 11:29)
8. 영화: 구원의 최종 단계로서 우리의 영혼과 육체가 죄와 죄책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영원한 행복으로 들어가는 것임(고전 15:51-53; 딛 2:13)
주요주제-7:37-39 성경에 나타난 '물'의 상징적 의미
물은 인간에게 있어서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물은 갈증 해소와 더러움을 씻어 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인 것이다. 이렇게 물이 갖는 다양한 속성 때문에성경에서는 물이 매우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태초의 에덴동산에는 그곳에서 발원하여 에덴동산을 적시고 흘러나오는 네 강이 있었다. 그 때의 네 강은 에덴동산을 비롯한 온 지상의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창 2:10-14). 또한 계시록에 나타난 천국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 강이 길 가운데로 흐르고 강 좌우에는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는, 그야말로 생동감이 넘실대는 모습이었다(계 22:1,2). 이에서 보듯 물은 성경에서 인간이 타락하기 이전의 에덴동산에서의 온전한 삶과 타락 후 죄 가운데 신음하는 모든 인간이 궁극적으로 소망하는 천국의 삶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
1. 물의 상징적 의미들
① 생명의 근원: 성경에서 물은 종종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자신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렘 2:13; 17:13). 구원은 오직 생명의 근원이신 여호와께로부터 말미암는다. 이에 이사야 선지자는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사 55:1-3)고 외쳤다. 아브라함의 여종 하갈이 자기 아들 이스마엘과 함께 브엘세바 들판에서 목이 말라 죽게 되었을 때(창 21:14-19), 또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기갈로 인해 고통 받고 있을 때(출 15:23-25; 17:6) 그들을 살린 것은 바로 하나님이 주신 물이었다. 또한 에스겔이 환상에서 본바, 성전에서 흘러나와 큰 강을 이룬 물은 생명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겔 47:1-12).
② 씻음 곧 정결케 됨: 구약 시대의 종교 의식에 있어서 물은 곧 부정(不淨)한 것을 씻고 정결케 하는 의미를 포함한다(레 11:32-36; 민 19:9). 이러한 의미는 신약 시대의 세례의식과 관련하여 보다 더 확장되어 나타난다. 즉 세례를 통하여 성도는 죄에서 깨끗케 되는 것뿐만 아니라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는(엡 4:22-24) 중생을 경험하게 된다. 이에 관해서는 행 8장 연구 자료 세례의 이해'를 참조하라.
③ 성령: 신·구약 성경 전체에서 물은 3위 하나님 중 특별히 제 3위 성령 하나님을 상징하는 용어로 자주 쓰였다. '내 신을 부어 주리니'(욜 2:28-29), '하나님의 신을 충만케 하며'(신 34:9),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요 4:14), '생수의 강'(요 7:38) 등이 모두 성령을 가리킨다. 이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을 가지고 지상에 있는 성도들이 영생에 이르도록 이끄는 성령의 사역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이다.
2. 의의
이상에서 살펴본 의미 이외에도 물은 죽음 곧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기도 한다(창 6-9장; 출 14장). 이 같은 물의 상징적 의미들을 통해서 우리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그분을 힘입어 생명을 얻고자 하는 인간에게 요청되는 죄 씻음, 그리고 성령을 통한 기쁨 충만한 삶에 대해 보다 분명하게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값없이 목마른 자에게 생명수 샘물을 주시는(계 21:6; 22:1,17)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하게 된다.
보감-7:1 사람들이 예수를 죽이려 한 이유
막 3장 자료 노트 참조
주요주제 -7:2-44, 초막절
느 8장 자료 노트 참조
도표-7:10-44 초막절에 참석하신 예수에 대한 무리들의 견해
1. 좋은 사람으로 생각(12절)
2. 미혹하는 사기꾼으로 생각(12절)
3. 훌륭한 선생으로 생각(15,46절)
4. 귀신들린 자로 생각(20절)
5. 그들의 메시야로 생각(31,41절)
6. 참 선지자로 생각(40절)
7.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생각(41,42절)
풍습-7:22,23, 할례
수 5장 자료 노트 참조
도표-7:33-35 예수님의 말씀을 도해한 무리들
예수님의 말씀 | 무리들의 오해 | |
1. 유대인들(2:18-20) |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 일으키리라 | 이 성전은 46년 동안 지었거늘 네가 3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
2. 니고데모 (3:3,4) |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
3. 사마리아 여인(4:14,15) |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나히리니...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
4. 제자들 (6:32-34) |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
5. 유대인들 (7:33-35) |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오지도 못하리라. |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저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 |
6. 유대인들 (8:21,22) |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 저가 나의 가는 곳에는 오지 못하리라 하니 저가 자결하려는가? |
7. 유대인들 (8:51,52) |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 | 지금 네가 귀신들릴 줄을 아노라. |
8. 유대인들 (8:56,57) |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라. |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
9. 바리새인들 (9:39,40) |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나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 우리도 소경인가? |
10. 제자들, 도마(11:11-16) | 우리 친구 나사로로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그에게로 가자. |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
11. 베드로 (13:8,9) |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 주여 내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
12. 도마 (14:4,5) |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할겠삽니이까? |
13. 빌립 (14:7,8) |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
주요 주제-7:25-32 메시야 이해
막 서론 특별 자료 참조
7:1-9 육신의 형제들로부터 불신 당하신 예수
본문은 앞장 말미에서 보았듯 이미 예수님을 추종하던 많은 사람들이 떠나버린 상태에서(요 6:66) 잠시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온 예수님(1절)이 육신의 형제들에게까지 불신당하는 장면을 보여 준다(2-9절).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배척당하심은 갈릴리인들의 배척(요 6:41,42,66), 육신의 형제들의 배척(1-9절), 바리새인과 대제사장들의 배척(32절), 그리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셔서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요 19:16-42) 그 범위가 점점 확대되고 구체화되어 간다. 이는 곧 이제 예수께서 성부 하나님의 뜻, 즉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줄 때가 가까왔음을 시사해 주는 전조가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이 부분은 앞장의 사건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3차 갈릴리 사역 기간 중에 있었던 일이나 본서 저자 요한은 공관복음서가 모두 기록하는 베드로의 신앙고백(마 16:13-20; 막 8:27-30; 눅 9:19-21) 및 변화산 사건(마 17:1-13; 막 9:2-13; 눅 9:28-36) 등과 같은 중요한 사건들을 생략한다. 이는 요한복음이 다른 복음서를 전제하고 쓰여졌다는 사실과 더불어 요한은 이 부분에서 영광 받으시는 그리스도를 묘사하기 보다는 점점 더 큰 고난을 향해 나아가시는 예수의 면모를 분명히 전달하기 위한 목적을 지녔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편 고향으로 돌아온 예수님을 향해 육신의 형제들은 예수님이 참으로 메시야라면 조그만 갈릴리가 아닌 예루살렘과 같은 큰 도시에서 놀라운 표적을 행하여 메시야임을 증거하라고 촉구했다(3,4절). 이 같은 형제들의 요구는 수많은 군중들이 몰려드는 초막절 축제 기간 동안에 초자연적인 이적을 예루살렘에서 행하심으로써 예수가 정치적 메시야로 군림하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형제들의 진의를 간파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권유와 빈정거림을 묵살하시면서, 아직 주님 자신의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6,8절).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 때'란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주님 자신이 십자가 사역을 감당하게 될 결정적인 순간을 가리키는데, 결국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때를 의미한다. 진정 예수님께서는 때가 차매 구약 성경의 예언대로 이 땅에 오셨고(갈 4:4), 또한 하나님께서 정하신구원의 때가 이르자(요 17:1) 제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향해 기꺼이 나아가심으로써 메시야 사역을 완수하셨다(마 16:21-23).
따라서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성도들 역시 무슨 일에든지 하나님의 뜻과 때를 지혜롭게 분별하여(롬 12:1,2) 지나치게 조급하거나 혹은 그 반대로 하나님의 때가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머뭇거리거나 회피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교훈 받게 된다.
7:1 이 후에. - 본서 기자인 요한은 앞장의 유월절과(요 6:4) 본장의 초막절(2절) 사이의 약 6개월 간의 기간을 본절로서만 기록함으로써 과감히 생략하고 있다. 하지만 이 기간의 예수의 행적은 공관복음서에서는 비교적 상세히 나타난다(마 14-18장; 막 7-9장). 한편 본절의 시점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불과 6개월여 밖에 남지 않은 때이다.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 '다니시고'에 해당하는 '페리에파테이'는 미완료 과거로서 예수께서 순회 전도를 하시며 이곳저곳을 여행하시던 상황을 적절히 묘사해 준다.
유대에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 요 5:18에 나타난 예수에 대한 유대인들의 살의(殺意)가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할 때 10절에 나타나는 예수의 예루살렘 행(行)은 설령 비밀히 이루어졌더라도 이미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예수에게 있어선 대단히 위험스러운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7:2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 '초막절'(스케노페기아)이란 명칭은 '천막'(tent)을 뜻하는 '스케네'와 '잠그다', '튼튼히 하다'란 뜻의 '페그뉘미'가 합해서 된 합성어로서 과거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의 나그네 생활을 기념해 모든 가족들이 임시 거처 속에서 생활하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절기를 가리킨다. 이 절기는 유대 종교력 7월(티스리월) 15일부터 8일 동안 지키던(레 23:34, 태양력으로는 대략 10월 중순) 일종의 추수감사절이다(레 23:39,41). 유대인의 3대 명절 중 하나인(신 16:16)이 절기는 '장막절' 혹은 '수장절'이라고도 불리웠다(출 23:16). 신명기 서론 특별 자료 '히브리인의 절기' 참조.
7:3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예수의 친형제들을 가리킨다(마 13:55). 예수께서는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와 그리고 두 명 이상의 누이들이 있었다. 요한은 공관복음에서 증거하는 대로(막 3:21) 예수의 형제들이 초기에는 예수를 믿지 않고 적대적이었음을(5절) 밝히고 있다.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 '당신의 행하는 일'이란 예수의 가르침보다는 예수의 표적을 염두에 둔 말이다. 그리고 '유대'는 보다 정확히 말해 예루살렘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러한 주의 형제들의 요청은 당시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메시야관을 반영한다. 즉 그들은 메시야는 반드시 공개적이고 영광스러운 지도자로서 유대인들의 종교 중심지인 예루살렘에서 많은 사람 앞에 드러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이러한 주의 형제들의 요구는 예수를 정치적인 메시야로 부각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권면'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무리들이 예수를 억지로 임금 삼으려던(요 6:15) 세속적인 욕망과 전혀 다를 바 없다(Hoskyns).
제자들도 보게. - 여기서 말하는 '제자들'이 누구를 가리키는가에 대하여 이견들이 많다. ① 혹자는 초막절을 맞이하여 예수보다 앞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12제자(요 6:67)로 본다(Young). 그러나 이들 12제자들은 이미 예수가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인 줄 믿고 안 자들이니(요 6:69) 이들에게 새삼 표적을 행해 보이라는 것은 부당하다. ② 그러므로 대개의 학자들은 이들을 '예수를 추종하던 무리', 즉 보다 폭넓은 제자의 개념으로 본다. 즉 예수의 형제들은 예수가 이들에게 표적을 행해 보임으로 보다 확실한 지지를 얻기를 희망한 것이다.
7:4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 자신들의 가족 중 한 사람이 '출세' 하기를 바라는 예수의 형제들의 시각에는 중요한 명절을 맞이하여 모여들었을 예루살렘의 수많은 인파와 한적한 갈릴리의 소수 무리는 너무도 명백한 비교거리였다. 즉 그들에게 있어 예수의 갈릴리 사역은 도피적이요 소극적인 듯이 보였다. 따라서 그들은 '나타나기를'(엔 파르레시아)이라고 말하며 공개적인(public) 사역을 요구하고 있다(A.T. Robertson). 어쩌면 주의 형제들의 이러한 요구는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라는 예수 자신의 말씀을(눅 8:16; 11:33; 12:2) 인용하여 예수를 반박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H. Reynolds).
이 일을 행하려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라. - '세상'(코스모스)에 대해서 본서는 다양한 뜻을 가지는데, 본절에서는 3절의 '제자들'과 상응하는 표현으로 '많은 사람', 혹은 '대중'(大衆)의 의미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주의 형제들의 요구와는 상반되게 예수께서는 세상에 대해 인기를 얻으려는 목적이 아니라 철저히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의 죽음을 택함으로 세상에 구원을 주려고(막 10:45)오셨다(Barrett).
7:5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 이러라. - 주의 형제들이 예수께 무분별한 요구를 한(3,4절) 이유가 예수를 진정한 세상의 구원주로 믿지 않았기 때문임을 밝히고 있는 구절이다. 그런데 여기서 '믿지'(에피스튜온)의 시제가 미완료 과거인 것은 주의 형제들의 이러한 불신앙적 태도가 이전에도 이미 여러 번 있었음을 암시한다(마 13:54-58; 막 6:1-6; 눅 4:16-31). 사실 이들은 예수의 승천 이후에야 올바른 신앙의 길에 들어섰고(행 1:14) 그중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행 15:13). 아무튼 신앙은 혈육 관계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엡 2:8) 임이 본절에서도 다시금 확인될 수 있다.
7: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 본서에서 '때'라고 번역되는 단어는 ① '카이로스'(6,8절) ② '호라'(요 4:21; 7:30; 12:23; 13:1) '크로노스'(요 5:6; 7:33; 12:35; 14:9) 등이다. 바레트(C.K. Barrett)는 이중 ①과 ②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지만 대체적으로 ①은 (하나님의 주권으로) '정해진 시기' 혹은 '허락하신 때'를 의미하고(Grosheide. A. T. Robertson) ②는 보다 일반적으로 '지정된 시간'을 가리킨다(Bernard). 반면 ③은 어느 시점이 아니라 '시간이 어느 정도 경과한 것'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C.K. Barrett). 한편 구체적으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내 때'가 언제인지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① 예수가 자신을 공개적 메시야로 드러내시는 때(Bernard, Robertson). ② 십자가 수난의 때(Chrysostom, C. K. Barrett). 그러나 예수께서 이미 행하신 여러 표적들은 실상 자신의 메시야 되심을 공개적으로 나타낸 것들이었다(요 2:1-11; 4:43-54; 5:1-47; 6:1-21). 그러므로 여기서 '내 때'란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자신의 구속 사역을 성취하실 때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요 13:1).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 예수의 형제들은 언제고 그들의 원하는 '때'(Kaupds, 카이로스)에 예루살렘을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음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나 예수께선 아직 대적들에게 체포당하실 때가 이르지 않았으므로 조심스레 행동하신 것이다(10절).
7:7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 '세상'에 대해서는 4절 주석을 참조하라.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라는 표현은 현재까지 예수의 형제들이 불신 세계에 속해 있음으로 인해 그들이 세상과 타협점을 가진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엡 2:2,3, Westcott). 그런데 이처럼 불신의 세상에 속한 자들은 예수를 사랑할 수 없고(요 5:42-45) 오히려 미워할 뿐이다(요 15:18,23,24). 왜냐하면 예수 앞에서 자신들의 죄성이 여지없이 드러나 도저히 감출 수 없기 때문이다(요 8:7-9).
7:8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 '아직…아니하노라'고 개역 성경이 번역하는 헬라어 단어는 사본에 따라 '우크'와 '우포' 두 가지 형태가 있다. 이중 '우크'는 '아니'(not)라는 뜻이며 '우포'는 '아직 아니'(not yet)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를 ① '우크'(시내 산 사본, 베자 사본, 벌게이트 역)로 보면이 명절에 예수께서 '올라가지 않는다'라는 뜻이 된다. ② 또한 이를 '우포'(바티칸 사본, 프리얼 사본, 레기우스 사본)로 보면 '아직 올라가지 않는다'란 뜻이 된다. 이중 '우포'는 '우크'로 읽는 독법이 10절과 직접적으로 모순되 보이는 어려움으로 인해 후에 도입된 듯하다. 그러나 '우크 아나바이노'는 그 자체가 이미 '지금은 올라가지 않는다'라는 뜻이므로 문맥상으로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즉 예수께서는 명절에 예루살렘을 향하는 대열에 합류해서 올라가신 후 메시야 됨을 과시하라는 형제들의 요구(3,4절)를 거절하시면서 '지금은 올라가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이다(A.T. Robertson, H. Alford). 한편 이러한 예수의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자신이 사역 행하시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의 십자가상에서의 대속 사역은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질 것이었고 또한 그곳에서도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곧 그의 뜻이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선 잠시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다가(9절) 이윽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것이다(10절).
7:9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 - '머물러'에 해당하는 '에메이넨'은 비록 부정과거 시제이지만 얼마 간의 지속 기간을 의미한다(A.T. Robertson). 그러나 이 기간 동안 예수께서 하신 일에 대하여선 공관복음서에도 나와 있지 않다. 이는 예수께서 갈릴리에 머물러 계신 기간이 극히 짧았음을 시사해 준다(14절).
7:10-24 성전에서 가르치신 예수
앞 단락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불신한 육신의 형제들이 예수님을 향해 예루살렘에서 공개적으로 초자연적인 능력을 행해 보이라 한 그들의 참 의도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았다(19절). 그에 이은 본문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상경하셔서 초막절 중간에 저들의 기대와는 달리 이적을 행치 않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의 교훈에 대한 가르침만을 설파하시는 모습을 소개하고 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행동은 형제들의 권유를 뿌리칠 때 보였던 태도와 모순되는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앞 단락에서의 예수님의 말씀(6-8절)은 무리들이 요구하는 정치적 메시야로서 군림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는 않겠다는 의미였으며, 또한 십자가 사역을 감당할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성부 하나님의 계속적 창조 사역에 따라 자신도 쉬지 않고 사역한다고 교훈하신 바 있는(요 5:17)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초막절 축제 기간 동안에 그들에게 율법의 올바른 의미를 가르치고 구원과 영생의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신 것이다.
한편 초막절 축제의 중간 무렵에 예수님께서 성전으로 올라가서 사람들을 가르치시자,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결코 예수님이 정식 랍비 교육을 받은 바 없다는 점을 구실로 삼아 공공연히 비난을 퍼부었으며(15절), 심지어 예수님을 귀신들린 자로 매도하기조차 했다(20절).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비난과 모함에 대해서, 자신의 가르침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신적 권위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감히 그 어떤 랍비의 가르침과도 비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천명하셨다(16-18절). 그리고 누구보다도 모세의 율법을 잘 지킨다고 자부하는 유대인들이 실상은 율법의 근본정신을 도외시한 채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종교 계율로 변질시켜 버렸음을 책망하셨다(22-23절).
결국 이와 같은 주님의 말씀은 선입견을 버리고 공의롭게 판단한다면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메시야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영적으로 눈이 멀고 귀가 닫혀 있었으므로 예수의 가르침을 자신들에 대한 도전 및 기득권 침해 행위로 간주하고 급기야 예수를 죽이려고 획책하기에 이르렀다 (25절; 요 11:53). 이는 실로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5)는 사도 요한의 증거를 확증해 주는 단적인 예가 아닐 수 없다.
7:10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비밀히 하시니라. - '비밀히'(엔 크뤼프토)라는 표현은 형제들이 요구한 '나타나기'(엔 파르레시아, 4절)와 정반대 된다. 즉 예수께서는 성전을 향한 순례자들의 대열에 끼지 않고 따로 입성하신 것이다(Bernard, Morris). 한편 이 '비밀히'라는 표현과 관련하여 튀빙겐 학파(Tubungen School)는 예수가 실제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이 아니라 다만 그의 환영(幻影)에 의해 그처럼 보였을 뿐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신빙성이 있는 주장이 못된다. 전기(前記)한 대로 '비밀히'는 '나타나기'와 대조되는 표현으로 단지 예수의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조심스러운 행동을 강조해 준다. 6절 주석 참조.
7:11 명절 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 '유대인들'이라는 표현은 통상적으로 요한에게 있어서 적대적인 유대인들'의 뉘앙스를 가지며(M. Alford) 본절에서도 비교적 그러한 의미가 강하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며 그들 중에도 예수를 '좋은 사람'으로 생각하여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예수를 찾은 자들이 있었다(12,31절).
그가 어디 있느냐 하고. - '그'라는 표현(에케이노스)은 경멸적 어투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는데(요9:28), 본절에서도 '그 작자' 정도의 뜻으로 볼 수 있다(C.K. Barrett, M. Alford). 즉 예수에 대한 일말의 존경심도 없는 유대인들은 그의 이름조차 거명하기를 꺼려한 것이다(M. Luther).
7:12 예수께 대하여 무리 중에서 수군거림이 많아. - '수군거리다'의 '공귀조'는 이오니아식(ioniatic) 의성어(擬聲語)로서 '불평을 투덜거리는 것'(빌 2:14)이나 '은연중의 불쾌감'(행 6:1)을 표시하는 것을 의미한다(A.T. Robertson). 이는 대개 격렬한 논쟁을 의미하지는 않고 밀담 형식으로 뒤에서 속닥거리는 것을 의미한다(Dods). 요 6:41 주석 참조.
혹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 '좋은'에 해당하는 '아가도스'는 하나님의 속성을 표현하는 '디카이오스' 즉 '의'와는 조금 다른 의미로 순수한 동기의 도덕적 미덕을 의미한다(Hendriksen, H. Reynolds, A. Robertson).
혹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하게 한다 하나. - 유대인들이 예수를 경멸한 주요 이유 중 하나이다. '미혹하게'에 해당하는 '플라나오'는 '타락시키다' 혹은 '길을 잃게 하다'의 뜻이다. 즉 유대인들은 무리를 가르치고 먹인 예수의 행위가 도리어 그들 무리를 혼란 속에 빠뜨려 우매하게 만든 것이라고 평가한 것이다(M. Alford). 후대 속사도시대의 자료들에 의하면 이렇게 '대중을 미혹케 하는 죄'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적용되는 경우가 많았다(Justin, Trypho, 69). 따라서 예수에게 적용된 이 반감(反感)은 요한이 본서를 기록한 시대 상황도 반영하는 듯하다(C. Barrett).
7:13 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 11절에 나오는 '유대인들' 즉 예수에 대해 비교적 방관적인 '무리'와 구분된 이 '유대인들'은 예수께 대하여 노골적으로 '적대적인 유대인들'(요 9:22; 16:12)을 가리킨다. 그 가운데서도 본절은 특히 유대 종교 지도자들, 즉 바리새인과 대제사장 등을 가리킨다(32절). 한편 무리가 유대인들을 두려워한 이 '두려움'이 구체적으로 출교(黜敎)를 의미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요 9:22을 참조하라.
드러나게 그를 말하는 자가 없더라. - '말하는'에 해당하는 '엘랄레이'는 당당한 공식적 선언을 의미하지 않고 속삭임과 같이 은밀하게 하는 말을 뜻한다. 이처럼 지금 당장은 박해를 두려워하여 서로 간에 은밀한 말만을 주고받았던 소극적인 유대인들이었지만 이들 중에 장차 성령을 받아 담대히 신앙을 고백할 자들이 있었다(행 4:21; 6:7).
7:14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서 가르치시니. - 8일간 지속되는 초막절 절기 중 이미 3,4일이 지난 시기를 가리키는 듯하다. 혹자는 22절 이하에 나타나는 안식일 논의를 고려해 이 날을 그 주간의 안식일일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하나 확실하지 않다(R.E. Brown).
7:15 유대인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 예수가 유명한 랍비의 수하에서 교육을 받지 않았음은 물론(행 22:3) 그의 교훈이 랍비적인(Rabbinic) 형식을 갖추지 않았음을 지적하는 말이다. 유대인 랍비들은 토라(Torah)에 '기록된 토라'와 '구전된 토라'가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들은 이 양자의 권위를 동일한 것으로 본다. 그리고 그들은 가르침을 베풀 때마다 '랍비 A는 랍비 B,C,D,…의 이름으로 말한다'고 서두를 꺼내는데, 그 궁극적 근원을 모세에게 돌린다(G. Beasley-Murray). 하지만 예수의 말씀은 이러한 전통적인 형식을 따르지도 않으면서 그 지혜나, 특히 학식에 있어 놀라운 것이었다(M.Dods). 사실 평범한 유대인 가정에서 자라 회당교육을 받으며 쉐마(shema) 본문(출 13:2-16; 민 15:37-41; 신 6:4-9; 11:13-21)을 암송하는 정도의 교육을 받았을 일개 목수인 예수에게서 전혀 기대할 수 없는 가르침이 있자 유대 지도자들은 당혹해 했던 것이다. 한편 '이 사람'(후토스)이란 말이 지니는 경멸적 의미에 대해서는 11절 주석을 참조하라.
어떻게 글을 아느냐. - '글'(그람마타)이란 ① 글자(letter, 요 6:11) ② 편지(행 28:21) ③ 성경(요 5:47; 딤후 3:15) ④ 학문(letters) 혹은 지식(행 26:24)등의 폭넓은 의미를 지닌다(Hendriksen, Robertson). 그러나 본절에서는 ③ 혹은 ④의 뜻으로 쓰였다. 따라서 본절은 예수가 성경에 대한 폭넓은 이해나 성경해석에 대한 지식이 결여되었다고 보고 그 가르침이 성경이나 그 주변 지식으로 말하는 정통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단지 그의 사견(私見)일 뿐이므로 그의 말을 따를 필요가 없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Hendriksen).
7:1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 자신의 교훈의 정통성 혹은 정체성(identity)을 의심하는(15절) 유대인들에게 예수께서는 자신의 교훈의 근원이 어떠한 훌륭한 랍비(Moses?)가 아닌 자신에게 사명을 주어 성육신하게 하신 하나님이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예수께서 자신의 사역이나 가르침을 오직 신적 권위에 입각해 행하신 것으로 주장하고 있음은 본서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바이다(18,28절; 요 4:34; 5:23,24,30,37; 6:38-40,44).
7: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의사가 있다면 실제적인 행함과 관계되는 예수의 교훈이 모든 지식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예수가 독단적으로 한 말인지를 분별할 수 있다는 말이다. 사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면 먼저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살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결국 예수의 가르치고 행하신 바가 모두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신 것임을 분명히 깨닫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7:18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의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 여기서 '스스로 말하는 자'는 소위 모세 율법에 정통하여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는 자들인 '율법사'를 이다(눅 5:17; 행 5:34; 딤전 1:7). 염두에 둔 그러나 이들은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보다는 자신의 영광을 구하고 배를 채우는 데 점차 혈안이 되어 갔다. 따라서 본절은 '율법사들의 눈먼 야망'(blinding ambition)과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는 예수의 가르침의 진실됨과 완전성'을 극명하게 대조시켜 준다(Lindars). 한편 예수께선 유대 율법사들(마 22:35; 눅 7:30; 11:45,46)을 가리켜 '스스로 말하는 자' 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그들 스스로는 그들의 모든 지식의 근거는 율법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를 고소하는 근거도 예수가 하나님의 율법을 파괴하는 자라는 사실이었다(23절; 요 5:16). 그러나 실상은 그들이 율법의 정신을 망각하고 율법을 부분적으로 해석하여 사람들에게 올무를 씌웠을 뿐 아니라 이를 스스로의 영광을 취하는 기회로 삼았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그들의 불의를 지적하는 예수의 이 말씀은 이제 예수와 유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하는 '촉매제' 역할을 하게 되는데, 그 새로운 국면이란 다음의 것들이다. ① 유대인들은 예수를 율법 파괴자라고 공격하나 실제로 율법을 파괴하는 자는 오히려 그들 유대인들이라는 것을 밝히는 것과(19절) ② 현재 문제가 되는 율법의 '핫 이슈'(hot issue)인 안식일 문제에 대해 해명하는 기회가 부여된 것이다(21-24절).
7:19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이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 유대교 지도자들은 모세와 자신들을 연관시키며(요 9:28; 마 23:2) 자신들이 모세의 중재를 통해 율법을 받았다는 사실에 큰 긍지를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은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않았다. 먼저 그들은 율법이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신 18:15-22 등)이 성취되고 있다는 사실을 수납하지 않았다(G. Beasley-Murray). 다음으로 그들은 율법을 지킨다고 하여 세부적인 사항들을 추가 규정하면서도 그 근본정신인 의(義)와 인(仁)과 신(信)을 저버리는 과오를 범하였다(마 23:23). 즉 그들은 율법의 일부를 그것도 문자적으로만 지켰으면서도 모든 율법을 지킨다고 자부하였다. 그것은 곧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다"(갈3:10)는 율법의 진정한 기능적 측면과 그 한시성(限時性)을 이해하지 못한 행위였다. 더구나 지금 그들은 예수를 죽이려는 모의를 하고 있으니(1절) 그것은 십계명 중 6계명을 범하려는 짓에 행한다(출 20:13).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 요 5:18에서 이미 시작된 유대인들의 살인 모의와 관련, 그들이 지금도 여전히 그러한 목적을 가지고 있음을 예수께서 신적 통찰력으로 이미 아시고 이를 지적하심으로써 그들이 율법을 범하고 있음을 구체적으로 지적하는 말이다.
7:20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 본장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① 예수에 대해 악의를 가진 유대지도자들(11,15,26,30,32절) ② 각처에서 온 순례객들로 추정되는 예수께 비교적 호의적인 유대인들(12,13,20,31,40,49절) ③ 유대 지도자와 구분되는 예루살렘 주민(25절) ④ 대제사장의 하속들(45,46절)등이다. 이 가운데 본절에 등장하는 '무리'(오클로스)는 ②항의 유대인들인 듯하다. 왜냐하면 이들은 예수를 죽이려는 음모에 대해(요 5:18) 아무 것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Bernard). 하지만 그들 역시 예수에 대해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예수가 자신의 죽음에 대해 근거 없는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있다고 판단하고서 '귀신에 사로잡혔다'고 단언해 버린다. 이 표현은 공관복음서에서 세례 요한과 자신의 차이를 설명하는 예수께 영적으로 무지했던 바리새인들이 퍼부었던 비난(마 11:18; 눅 7:33)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아이러니칼하다(A.T. Robertson). 한편 요한이 이러한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무리들을 혹평하는 것은 어쩌면 반년 후 저들이 예수를 향해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던 사실(요 19:6,15)을 연상한 때문으로 볼 수 있다.
7:2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 여기서 '한 가지 일'이란 예수께서 베데스다 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을 가리킨다(요 5:1-9).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이 이일로 인해 큰 충격을 받고 자신을 죽일 모의를 시작하게 된 사실(요 5:16-18)에 대해 무리들의 관심을 집중하게 하심으로 논의되는 문제를 새로운 국면으로 풀어 가신다. 즉 명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올라온 수많은 순례객들이 미처 알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더욱더 설명이 필요한 이 사건의 핵심은 바로 안식일에 관한 것이었다(요 5:9-18).
너희가 다 이를 인하여 괴이히 여기는도다. - '이를 인하여'(디아 투토)라는 전치사 구는 문법상 ① 본절의 '다우마제테'(괴이히 여기다)를 수식하거나 ② 22절의 '데도켄'(주었으니) 동사를 꾸민다고 볼 수 있다. 전자를 주장하는 학자들은(Bernard, Lenski, Robertson) 본절의 표면적인 문맥상 자연스러움을 선호한 것이고(개역성경, 공동번역, 새번역) 후자는 문법적 상례(常例) 즉 '디아투토'가 대개 새로운 절(節)의 서두에 나오는 법칙(요 1:31; 5:16,18; 6:65; 8:47; 9:23; 10:17; 12: 18,27,39; 13:11; 19:11 등)을 중요시 여긴 것을 염두에 둔 것이다. 이중 어느 쪽 견해를 취해도 상관없는데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괴이히 여긴 것이 단순히 예수께서 병자를 고치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 같은 일을 안식일에 행하셨던 데 있었기 때문이다.
7:22,23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주었으니(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지요 조상들에게서 나나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주느니라. - '할례'(circumcision)는 이방인들과의 구별 및 죄로부터의 정결함을 뜻하며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언약의 표징'으로 주어진 것이다. 창 17:10,11 주석 참조. 이 할례는 생후 8일 만에 행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는 바(창 17:12; 레 12:3) 이를 이행하기 위하여선 안식일에도 할례 주는 것이 불가피하였다. 그러기에 미쉬나(Mishnah)의 네다림(Nedarim)편 3:11에는 랍비 요세(R. Jose)가 말하길 '할례는 엄중한 안식일 규례를 능가하기에 위대하다'라는 언급이 있기까지 하다(Mishnah, Sabbath 18:3; 19:1,2). 이처럼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범할까봐 지극히 세세한 규정들을 지키면서도 반면 이같이 안식일에 할례 베푸는 것은 개의치 않았다. 그러므로 그보다 더 중한, 즉 한 사람의 육신과 영혼을 치유하기 위하여 행한 자신의 안식일의 치료 행위가 정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예수의 논지(論旨)이다. 사실 본래의 언약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행하는 의식적 행위로서의 할례보다는 한 사람의 전인(全人, 홀론 안드로폰)이 회복되는 일이 더 중요함은 새삼 말할 필요가 없다. 더군다나 안식일은 그날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막 2:27). 한편 예수께서 할례가 모세 이전의 족장들에게서 연원(淵源)했음을 지적하고 있음은 자신의 교훈이 모세보다 더 근원적인 하나님에게 배경을 두고 있다는 주장(16절)을 논증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모세의 율법을 폐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을 전신을 건전케 한 것으로 너희가 나를 노여워하느냐. - '노여워하다'에 해당하는 '콜라테' 동사는 신약에서 한 번만 나오는 단어로서 '담즙, 쓸개'를 의미하는 '콜레'에서 파생한 듯하다. 여격(dative)을 수반하는 이 동사는 예수에 대한 '격렬한 악의'를 적절히 묘사해 준다(A. Robertson).
7:24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하시니라. - '외모로'에 해당하는 '카트 웊신'은 본질적이 아닌 '피상적으로'라는 의미이다(C. B. Williams, A. T. Robertson). 이는 곧 율법의 가르침에 따른 공정한 판단, 즉 '공의의 판단'과는 달리 추상적인 관찰 혹은 편견이나 불의의 뇌물 등을 받고서 부당하게 판결하는 것을 가리킨다(출 23:8). 따라서 본절은 사 11:3의 '메시야의 공의로운 판단 사상'과 삼상 16:7의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는 말씀을 반영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판단의 원칙에서 당시 사람들이 멀어졌음을 지적하는 것이다(신 16:18; 슥 7:9). 한편 '판단하다'는 의미의 '크리노' 동사가 본절에서 두 번 사용되는데,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에 나타나는 현재 명령법(크리네테)은 부정사 '메'(더불어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일을)와 중지할 것을 요구하는 강조적 용법이다(F.Rienecker). 그러나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에서는 사본에 따라 다음에서 보듯 각기 다른 시제가 사용되고 있다. ① 현재 시제(크리네테, P66, B, D, L 등). ② 부정 과거시제(크리나테, W, θ 등). 이중 전자는 공의의 판단이 항상 시행되어야 함을 보여주는 것임에 비해 후자는 특정한 사례, 즉 5장의 안식일 논쟁을 염두에 두고 그것을 올바로 판단하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Morris).
7:25-36 고조되는 배척과 핍박의 열기
앞 단락(10-24절)에서는 초막절 중간에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신 사실을 살펴보았다. 이제 본문은 예수님의 그러한 사역과 관련하여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할 뿐 아니라 체포하고자 한 사실을 보도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은 계속해서 자신의 신적 권위를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영적 무지에 빠져 있던 유대인들이 결코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려고 들지 않고 도리어 왜곡된 율법 해석사에 근거하여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동조하여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 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25-29절). 이와 관련해서는 막 12장 연구자료, '유대인의 예수 배척'을 참조하라. 하지만 이러한 그들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30절). 그러나 이러한 위기 상황 가운데서도 예수는 담대히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기의 죽으심을 예언하신다. 그러나 여전히 유대인들은 예수를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가 유대종교 지도자들의 눈길을 피해서 '디아스포라'(에 9장 연구자료, '디아스포라의 이해' 참조)로 피난 가는 줄로 착각한다(31-36절).
그러므로 이러한 본문은 인간들의 진리에 대한 인식과 모든 경영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잠 16:1). 정녕 우리가 아무리 일찍 일어나서 밤늦도록 수고할지라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아무 것도 성취될 수 없다(시 127:1,2). 따라서 성도들은 마귀의 세력들이 그 어떤 위협과 핍박을 가해와도 우리의 생사화복이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면서 끝까지 담대한 신앙을 잃지 말아야 한다(마 10:28-31; 롬 8:31-39).
7:25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혹 이 말을 하되. - 예수를 죽이려는 유대인 지도자들의 음모에는 직접적으로 가담하지 않지만 그 사실을(요 5:18) 예루살렘의 순례자들(20절의 '무리'에 관한 주석 참조)보다는 더 잘 알고 있었을(Vincent), 이 도시의 상주 거민들을 말한다.
이는 저희가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 예루살렘 사람들도 이미 예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갈릴리 사람들에 비해 예루살렘 사람들이 예수에 대한 면식(面)이 적어서(1절)이와 같이 질문했다고는 볼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의 이 질문은 긍정적인 답변을 예상하는 '확인성 질문'임이 분명하다.
7:26 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아니하는 도다. - 예수를 죽일 혐의를 찾고 있는 당국자들이 예수가 공개적으로 그들을 겨냥한 비난성 발언을 하는데도 예수에게 경고조차 주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무리들은 이처럼 의아심을 나타낸다. 이러한 무리들의 심리 상태는 정치·종교적 쟁점이 된 사태가 조용히 가라앉기를 원치 않고 도리어 부각되어 흥미로운 사건을 유발하기를 원하는 군중 심리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Morris, Bernard). 한편 '저희가 아무 말도 아니 하는 도다'라는 표현은 '침묵함은 시인'(tacit approval)이라는 유대 랍비들의 일반적 태도를 염두에 둔 것이다(Brown).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줄 알았는가. - 전절의 '이는…아니냐'(25절)와는 대조적으로 본 질문은 부정적 답변을 예상하고 있는 것이다. 즉 당국자들이 그럴 리가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전제로 한 질문이다. 한편 '당국자'라고 번역된 '아르콘테스'는 문자적으로는 '치리자'(ruler)의 뜻으로 요 3:27에서는 니고데모에게 적용되었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 특히 '산헤드린 공회의 구성원'을 가리킨다(Brown). 14권 신약 총론, 신약의 사회·문화적 배경, '산헤드린 공회' 참조. 다음으로 '알았는가'에 해당하는 '에그노산'( )은 동작의 개시를 나타내는 제 2 부정과거이다. 그러므로 본절은 요 5:19 이하에 나타나는 예수와 대화하며 시험한 일을 통해 '이제 당국자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알게 되었는가'라는 뜻을 가진다(A. Robertson).
7:27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 사실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갈릴리 지방 나사렛 출신인 것과 그의 가족 관계까지도 잘 알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 말은 올바르다(요 6:42). 그러나 실상 예수께서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로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성육신(成肉身)하신 메시야이심(요 3:16) 에 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이는 저들이 육신의 눈은 지니고 있었으나 하나님의 비밀에 관하여 알 수 있는 영적인 눈을 지니고 있지 못한 탓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 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 - 메시야의 기원에 대해서 당시 유대인들은 다음 두 가지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① 메시야는 다윗의 후손으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사 9:6,7; 미 5:2). 따라서 예수의 출신지가 베들레헴임을 모르고(마 2:1-18; 눅 2:1-20) 갈릴리 나사렛(마 2:19-23; 눅 2:39)으로 알고 있던 유대인들이 예수를 그리스도와 일치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41,42절). ② 메시야는 하늘 구름을 타고 홀연히 임하므로(단 7:13; 말 3:1) 그 누구도 알지 못하게 갑자기 출현할 것이다(바룩의 묵시록 29:3; 제 2 에스드라 7:28; 13:32). 따라서 유대인들은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서 평범한 한 인간으로 출생한 예수를 메시야로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러한 잘못된 메시야 사상을 본서 저자 요한이 어떠한 교정적 설명도 없이 사실대로 기록하는 것은 요한의 독특한 풍자적 문학 기교이다. 즉 너무도 분명히 메시야에 대해서 알고 있는 요한의 독자들에게(공관복음서 등을 통해)이러한 군중들의 어리석은 논란은 터무니없는 우스꽝스러움을 가져다주기에 문학적으로 더욱 극적인 효과를 가지도록 만드는 것이다(Morris). 그러나 이러한 왜곡된 메시야관은 곧 이어 나타나는 예수의 말씀(28,29절)에 의해 강력한 도전을 받는다.
7:28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가라사대. - '외쳐'에 해당하는 '에크락센'은 '부르짖다'라는 뜻으로서, 무리들이 웅성거려 소란한 상황이었으므로 예수께서 목소리를 높이지 않을 수 없었음을 시사해 준다. 그러나 본서에서 요한이 이 표현을 중요한 대목에서 자주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28,37절; 요 1:15; 12:44) 이는 중차대한 영적 진리를 선포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말일 수도 있다.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로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이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는 27절에서 군중들이 말하는 예수의 출신지에 관한 지식을 가리킨다. 하지만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는 말씀은 그것 이상의 것 곧 자신의 신적 기원을 주장하시는 말씀이다. 따라서 이 두 문장을 잇는 접속사 '카이'는 '그리고'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뜻이 된다(A.T. Robertson). 즉 예수께서는 먼저 무리들이 알고 있듯 자신이 나사렛에서 자라셨으며 육신의 부모가 요셉과 마리아라는 사실을 인정하셨다. 그렇지만 저들이 알지 못하는 보다 중요한 사실, 즉 자신이 근본 하나님으로서 성육신하셨다는 '하나님께 속한 비밀'이 있으니 이제 저들로 하여금 이 사실을 믿고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하여 이를 저들에게 일깨워주고 계시는 것이다.
7:29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니라 하신대. - 유대인들이 메시야에 대해 알지 못하는 원인은 결국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임을 '나는 아노니'라는 말씀으로써 보다 강조하고 있다. 17절 주석 참조. 하지만 예수께서는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아는데, 이것은 그의 신적기원('내가 그에게서 났고')이나 신적 사명('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니라')에 있어서 동일하게 그러하다. 이렇게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주장을 통해 자신의 신적 기원을 강조하는 것이나(Bernard) 자신이 아버지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보냄 받은 자라는 주장을 통해 자신의 신적 사명을 강조하는 것은 일관된 요한복음의 중심 주제이다(요 1:18; 3:13; 6:38; 8:29).
7:30 저희가 예수를 잡고자 하나. - '저희'는 모든 예루살렘 사람들(Westcott, Robertson)이라고 보기 보다는(25절) '예루살렘인들 중 예수에게 적대적인 사람들'(31절)이거나 혹은 그들 중에 섞여 있던 유대 지도자들(32절)이라고 보는 것이 좋다(Bernard). 아무튼 이들은 예수의 신적 주장(28,29절)에 대하여 신성 모독행위라고 간주, 즉각적으로 예수를 체포하고픈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저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는데 아마도 유대 당국자들의 공식적인 체포령이 아직 발동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26절).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측면의 이유일 뿐 실상은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때문이었다. 즉 아직은 예수께서 대적들에게 체포당하여 십자가에 달리실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예수를 어떻게 하지 못한 것이다.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 '손을 대는'은 '구금시키기 위한 체포 행위'를 의미하는 관용구이다(마 26:50). 따라서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라는 표현은 청중들이 예수를 잡고자 하는 충동은 가졌으나 공식적인 체포에는 이르지 못한 것을 가리킨다(Barrett).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 모든 일은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이루어지며 특히 인간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철저히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다. 그러므로 구속사역의 주요 전기가 되는 예수 체포의 때도 이미 하나님께서 예정하셨으며 이때가 이르지 않았을 때는 인간적인 충동이 있었으나 이를 실행할 수 없었던 것이다. 6절 주석 참조,
7:31 무리 중에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 비록 많은 반대자들의 반발 가운데의 선포이지만 예수의 사역은 결코 이처럼 무의미하지 않았다. 비록 심오한 믿음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예수께서는 이 초막절 성전 방문에서 자신을 믿기 시작한 많은 수의 초신자들을 얻으셨다. 이들의 믿음을 설명해 주는 '에피스튜산'은 제 2부정과거 시제로 이 시점에 그들의 믿음이 싹트기 시작하였음을 나타내 준다.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 '오실지라도'에 해당하는 '엘데'는 제 2부정과거 시제로서 미래 사건을 이야기하는 문맥에 맞지 않는 시제로 보이나 사실은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예상적(proleptic) 표현이다. 이와 동일한 상황을 표현하는 27절에서는 현재 시제(에르케타이)가 사용되었는데 본절의 부정과거 시제는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사실에 더 많은 확실성을 표명하는 표현이다. 즉 이 예상적 용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신다는 미래적 사실이 너무도 확실하기에 미래가 아닌 현재나 부정과거 시제로 표현하는 히브리인의 특유한 표현법을 따른 것이다. 즉 본 구절의 뜻은 '그가 오실 때에는 언제든지'라는 강조적 의미이다(A. Robertson).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의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 - 당시 전통적인 유대인 메시야관에서 필수적인 요소 중 하나는 '많은 표적을 행하시는 메시야'(사 35:5,6; 마 11:2-5)였다. 그런데 이 문장에서 부정적 답변을 예측하는 부정사 '메'( )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이 예수의 옹호자들은 다른 측면에서는 예수의 메시야됨을 믿지 못하였으나 '표적'(세메이아)의 측면에서만은 예수를 메시야로 시인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표적 일변도의 신앙은 불완전하며 위험스러운 유아기적 믿음이다(요 20:29). 그러나 이처럼 이적을 기초해서 믿는 믿음이 더 성숙한 믿음에 이르는 방편이 될 수 있으므로 이를 무조건 매도하지 않는 것이 요한복음의 한 특징이기도 하다(Morris).
7:32 예수께 대하여 무리의 수군거리는 것이 바리새인들에게 들린지라. - '수군거리다'는 말은 대체적으로 부정적 의미를 지닌다. 12절 주석 참조. 하지만 본절에서는 예수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31절)를 담은 말을 주고받은 것을 가리킨다. 기득권을 계속 유지하려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두려움은 바로 자신들과 입장을 달리하는 예수에 대한 이러한 군중들의 호의적인 수군거림이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를 잡으려고 하속들을 보내니. - 예수에 대해 악의를 가졌던 유대 지도자들의 실체가 지금까지는 다소 익명성(匿名性)을 가진 '유대인'이라는 표현 속에(13,15,26절) 감취어 있었으나 이제 그 실체를 드러낸다. 이들 유대 지도자들 중 바리새인들은 특히 예수에 대해서 강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고 공관복음서가 증거하는 사두개인들(마 16:6)은 '대제사장들'이라는 표현 속에 포함되어 있다. 왜냐하면 대제사장들은 사두개인의 대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제사장들'(아프키에레이스)이라는 복수형이 사용된 까닭은 당시 대제사장직이 구약시대처럼 종신 세습제가 아니라(출 29:1-9)총독의 임명에 따라 바뀌었으므로 현직 대제사장과 더불어 전직대제사장들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서 '대제사장들'이란 표현은 보다 포괄적으로 대제사장들과 입장을 같이 하는 대제사장을 비롯한 그 수하의 무리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14권 신약 총론, 신약의 사회 · 문화적 배경, '유대교 종파' 및 '사회계층' 참조.
하속들. - 본래 이 단어(휘페레타스)는 '아래에'(휘포)와 '사공'(에레테스)의 합성어로 문자적으로는 '밑에서 노젓는 자'라는 뜻이다. 그렇지만 이는 통상적으로 '노예'를 가리켰는데 여기에서는 '성전 경비병'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45절, 요 18:3,12,22; 19:6; 행 5:22,26, A. Robertson).
7:3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 예수 공생애의 연대기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지금의 시점이 예수가 공생애를 마치는 마지막 유월절(요 13:1)까지 불과 6개월밖에 남지 않았다고 본다. 그렇다면 예수께선 자신의 공생애 마지막이 가까왔음을 명백히 아시고 이제 세상에서는 '조금'만 더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셈이다(요 12:35; 13:33; 14:19; 16:16). 이 역시 예수의 신성, 즉 앞일을 다 아시는 전지성(全知性)을 증거해 준다. 다음으로 '돌아가겠노라'에 해당하는 '휘파고'는 '아래로'(휘포), '가다'(아고)라는 말의 합성어로 '물러가다'(retreat)라는 뜻으로 자주 쓰인다(A. Robertson). 본서에서 이 단어는 '아버지께로 가는 것'에 자주 적용되었다(요 8:14,21; 13:3,33,36; 14:4,5,28; 15:16:16:4 등). 이처럼 예수께서 본래 그 나오셨던 곳인 성부 하나님께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그의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증거하는 자기 계시가 아닐 수 없다. 28,29절 주석 참조.
7:34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 지금 자신을 살해하려고 찾고 있는(32절) 적대자들에게 주시는 경고의 말씀이다. 즉 얼마 후 예수께서 하나님께로 되돌아가면 저들은 예수를 만나지 못하므로 저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결국 예수께서 가는 천국에 이르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요 8:21).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끝까지 예수를 대적하는 자들이 받을 최후 심판이 어떠한 것인지를 경고하고 있는 바 그것은 곧 영원한 사망이다(마 25:41-46).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신대. - '나 있는 곳'이란 본래 그리스도께서 누리시던 '하나님과의 영원한 교제의 자리'를(요 1:1-3)말한다(Vincent). 이러한 영광의 장소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적개심을 버리지 아니하며 그에 대한 믿음을 가지지 않는 자들을 위한 처소가 준비되어 있지 않다(요 14:1-3).
7:35 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저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 - 예수의 말씀(33,34절)을 이해하지 못한 유대인들은 이처럼 예수께서 팔레스틴을 떠나는 것으로써 오해하며 조롱기 섞인 대화를 주고 받는다.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 해당하는 '디아스포라'( )는 '뿔뿔이 흩어지다'라는 뜻의 '디아스페이로'에서 유래한 단어로(행 8:1; 약 4:1) 신약에서 세 번 사용된다(약 1:1; 벧전 1:1). 이들의 기원은 B.C. 586년 유다의 멸망 뿐 아니라 B.C. 722년 북이스라엘의 멸망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난리로 인하여 유대인들은 앗수르, 바벨론, 이집트, 소아시아 등지로 흩어졌으며 A.D. 70년 로마에 의한 예루살렘 함락은 더욱더 유대인들을 세계 각처로 흩어지게 만들었다. 이들 유대인들은 신구약 중간기시대(B.C. 400-4)에 알렉산더의 동방 원정 이후로 이미 대부분 헬라화(Hellenization)되었는바 따라서 히브리어에 익숙하지 않은 유대인들을 위한 헬라어 역본 성경의 필요성도 제기되었다. 그 결과 완성된 것이 곧 70인역(LXX)이니(B.C. 150년경 완성) 예수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미 이 성경을 사용하였다. 한편 본국의 순수 히브리인들을 가르치지 못하고 흩어진 유대인들에게로 갈 것인가를 질문하는 유대인들의 조롱은 '헬라인'(투스헬레나스)이라는 표현에서 더 신랄해졌다. 이 '헬라인'은 유대인으로서 헬라어 밖에 말할 줄 모르는 '헬라파 유대인'(행 6:1; 9:29)과는 다른 순수한 이방인으로서의 '헬라인'을 말한다. 즉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디아스포라 가운데서도 가르치기에 실패하고서 이방인들에게로 가서야 일하게 되리라고 조롱한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이러한 조롱은 오히려 훌륭한 '예언'의 성격을 지니고 있으니 참으로 구원의 소식은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들에게까지 전파될 것이었다(행 9:15,16; 롬 1:16). 한편 디아스포라에 대해서는 에 9장 연구자료 '디아스포라의 이해'를 참조하라.
7:36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것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니라. - 예수의 수제자인 베드로도 처음에는 예수의 수난 예고(요 12:33)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니(요 13:37) 영적으로 우둔하기 그지없던 유대인들이 예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7:37-53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
앞 단락(25-36절)에서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잡아 죽이려 한 일에 관하여 살펴보았다. 그에 이은 본문은 7일간 계속되던 초막절이 끝나는 마지막 날의 성회 시(聖會 時)에 있은 일로서 예수의 강화(講話)에 대한 유대 군중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다양한 반응들을 소개하고 있다.
즉 유대인들은 초막절 축제 동안 실로암 연못에서 물을 길어 와서 성전 제단의 서편에 붓는 의식을 거행했는데, 바로 이와 같은 풍습을 배경으로 하여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영원한 생수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선언하셨다(37,38절). 물론 여기서 말하는 '생수'(生水)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후에 강림할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었다(39절).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유대 군중들의 반응은 매우 다양했는데,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선지자들 가운데 하나로 생각했으며 어떤 사람들은 메시야로 확신했다(40,41절). 그러나 많은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다윗의 혈통으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라는 성경의 예언(미 5:2)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갈릴리 나사렛 출신이라는 이유로 오히려 메시야되신 예수님을 배척하고 끝까지 불신앙적 태도를 고집했다(41,42절). 이는 유대인들이 예수의 성장지인 나사렛을 출생지로 오해한 때문이다.
한편 유대 군중들의 견해가 이처럼 분열되자, 예수님께 대한 체포령을 내렸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매우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43-49절). 더구나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가서 구원의 진리를 가르침 받은 적이 있는 니고데모(요 3:1-21)가 산헤드린 공회원으로서의 지위를 앞세워 예수님을 변호했기 때문에 그들은 일단 예수님에 대한 살해 계획을 보류할 수밖에 없었다(50-53절). 이와 같은 사실은 이미 앞 단락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아직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가 완전히 차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사실 예수께서 돌아가신 것은 이때로부터 6개월여 이후 유월절축제의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일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① 성령 충만은 특별한 성도들에게만 허락되는 은사가 아니라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이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믿는 자마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37,38절). 이는 곧 예수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을 뿐 아니라 성령이 그 심령 가운데서 역사하심으로 성령 충만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행 2:1-4,17-20,38). 그러므로 이 같은 사실만 보더라도 예수께서는 영적 갈증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인류를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시고자 하나님께로부터 보냄 받은 '생명의 주'이심을 알 수 있다(요 4:14).
② 진리의 말씀을 배워 깨달은 성도는 마땅히 자신의 신앙지식에 상응하는 영적 진보를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나타내야한다(딤전 4:15). 즉, 처음에 예수님을 찾아올 때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두려워하여 밤 시간을 이용했던(막 3:2) 니고데모가 이제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 예수님을 변호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은 그가 주님께로부터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인 후 변화되었음을 보여주는 신앙의 한 단면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를 믿는 우리들 역시 신앙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갈 5:22-24). 만일 그러하지 아니하면 열매 맺지 못한 나뭇가지가 찍혀 불에 던지움 당하듯 될 것인데 이는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이다(마 7:18,19).
7:37 예수께서는 초막절의 끝 날에 중대한 말씀을 선포하신다. 어쩌면 예수께서 드러나지 않게 이 절기에 참석하신(10절) 중대한 목적도 바로 이 '성령의 생수' 강화를 위한 것일 수 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 이날이 초막절의 제 7일인지 8일인지에 대해서 논란이 있다. 본래 초막절은 7일간이지만(신 16:13) 제 8일은 '쉬는 날'로서 '성희'(聖會)로 모였다(레 23:36). 이 명절 7일간에는 실로암 못에서 물을 길어 와 성전 제단에 붓는 일이 매일 행해졌으나 8일에는 행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 상황을 고려하여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말씀하셨다고 볼 수 있으나 확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 만약에 예수께서 이 말씀을 선포하신 날이 제 8일이라면 이때는 제사장들이 못에서 길어온 물을 제단에 붓는 의식을 중단한 때이다. 이러한 때에 과거 광야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반석에서 나는 물을 마시는 경험(출 17:6,7)을 체험했던 이스라엘의 경험과 연관해 생수에 관한 말씀을 하시는 것은 상황을 이용한 실물 교육으로의 효과가 한층 컸을 것이다. 더욱이 과거에 이스라엘인들이 마셨던 물은 일시적 갈증만을 해결하였던 것임에 반해 예수께선 자신이 영원한 생수의 제공자이심(38,39절)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앞서 예수께서 수가 성 여인과 나눈 대화(요 4:13,14)를 상기시켜 준다. '물'의 상징적 의미에 대해서 본장 자료노트를 참조하라.
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는 말씀과 자구적 일치를 보이는 구절은 구약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예수께선 아마도 '물'에 관한 구약의 여러 구절들과 (잠 1:23; 사 4:4; 58:11; 욜 3:18) 성령을 '부어 주신다'는 구절들(사 32:15; 겔 39:29; 욜 2:28-32)을 염두에 두시고서 자신에 의해 새롭게 전개될 상황을 예언적으로 말씀하신 것으로 추정된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 여기서 '배'는 '사람의 심층부', 즉 '양심'이나 또는 '전인격'을 의미한다(욥 15:35; 잠 18:8). 그리고 '생수의 강'은 '성령 충만'을 의미한다(요 14:16,17; 행 21:4). 그런데 본절이 예수를 가리키는지 아니면 신자를 가리키는지에 대해 논란이 있다. 그러나 39절은 본절이 예수를 믿는 자들에 관한 말씀임을 뒷받침해 준다. 따라서 '그 배'란 '신자의 배'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목마름을 해결한 신자들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즉 본절은 그리스도께서 보내 주실 성령이(요 4:14)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믿는 자들에게 충만하게 임할 것을 의미한다(Brown, Morris). 이는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인해 성취되었다(행 2:1-4).
7:39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 본절은 예수의 말씀(38절)에 대한 요한의 주해이다. '생수'의 뜻이 어떤 곳에서도 설명되지 않아 궁금한 독자들에게 생수는(요 4:10) 바로 '성령'이라고 분명히 일러주고 있다. 실상 '물'(water)을 '영'(spirit)과 관련하여 설명하는 것은 유대적 사상에 익숙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난해한 상징이다(Brown). 히브리인에게 있어서 물은 '부어지는' 것이고(사 65:3) 영의 갈증을 느끼는 자리(the seat of thirst)로 이해되었다(사 29:8). 즉 '영'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네페쉬'는 본래 '목구멍'(throat)을 뜻한다. 따라서 히브리인에게 있어서 갈증을 느끼는 목구멍을 축여주는 물의 기능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영의 갈증을 해결하는 성령의 연상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예수의 말씀은 이러한 유추를 하지 아니하고서는 쉽게 이해될 수 없는 것이었다(J. Audet).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 '영광을 받다'에 해당하는 '에독사스데'( )가 요 1:14에서는 예수의 성육신에 적용된 데 비해 여기서는 그의 죽음에 적용되었다(요 12:16,23; 13:31). 이러한 사실은 이 땅에 오신 예수의 목적이 십자가에 달려 인류 구속 사역을 성취하시므로 이를 계획하신 성부 하나님께 영광 돌림은 물론 자신도 친히 영광 받는 데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요 13:31).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 몇몇 사본들이 '계시지' 대신에 '주어지지'(given)라고 수정하거나, '그들 위에'(on them)라는 부사구를 첨언하여 예수 승천 이후에 성령 강림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처럼 본절에서 요한이 성령에 관해 언급하면서도 예수의 '영광'이라는 미와 연결시키듯이 요한의 성령 이해를 위해서는 그가 본서에서 23회나 사용하는 '영광'과 연관해서 생각해야 할 듯하다(Morris), 십자가 수난과 부활, 승천이라는 일련의 과정에서 그리스도 영광의 극치를 바라보는 요한은, 비록 구약 시대에도 성령께서 활동하셨던 사실이나 그리스도가 이 땅에 계실 때에도 하나님의 영이 내적으로 역사하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요한은 성자께서 이루신 대속(代贖) 사역에 이어 성도의 구원을 이루시고자 이 땅에 강림하셔서 역동적으로 사역하신 성령의 활동에 대하여선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의 일로 단언하는 것이다(S.H. Hooke, Brown, 요 16:7). 즉 요한은 그리스도의 구속 역사를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 비롯된 성령 시대 도래를 위한 전주곡(prelude)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요 14:16-21,26; 16:7-15).
7:40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혹은 이가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 모세에 의해 제시된 하나님의 약속에 의거(신 18:15),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기다리던 메시야로 여겨지던 선지자를 가리킨다. 요 6:14 주석 참조. 하지만 예수를 이렇게 '그 선지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선지자를 메시야와 일치시킨 것 같지는 않다(41절). 다만 예수의 표적을 보거나(요 6:14) 말씀을 듣고서(본절) 감명을 받은 자들은 예수에 대하여 놀라운 능력을 지닌 모세나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 정도로 생각한 것 같다.
7:41 혹은 그리스도라 어떤 이들은. - 예수의 말씀을 듣고 난 청중들 중에는 그 가르침의 깊이와 권위에 놀라 이렇게 예수를 그리스도(호 크리스토스)로 믿는 자들이 생겨났다. 이제 저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어떠한 난관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믿음을 지켜 나가는 신앙의 성장인데 이들 중에는 그러하지 못하고 예수의 죽음과 더불어 낙심하여 믿음을 저버린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는 나다나엘의 의혹(요 1:46)과 더불어 청중들의 이러한 갈릴리 배척 사상은 뿌리 깊은 것이다. 이미 이사야 당시에도 갈릴리 지방은 팔레스틴의 변방들과 더불어 무식하고 사회적으로도 소외된 자들이 살던 땅으로 천대의 대상이었다(사 9:1,2; 마 4:12-16). 따라서 예수를 갈릴리의 나사렛 출신으로 알고 있는 자들이 다윗의 왕통을 이어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날(삼하 7:12,13; 17:15; 시 89:3,4; 렘 23:5; 미 5:2) 메시야와 예수를 일치시키는 것은 불가능 했다. 27절 주석 참조.
7:42,43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가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이 살던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 불트만(R. Bultmann)은 본서 저자가 예수의 출생지를 알지 못했거나 적어도 그의 독자들이 그 출생지에 관해 아는 것을 원치 않았다고 주장한다. 물론 본서에서는 예수의 출생지에 관한 묘사가 본절에서 보듯 청중들의 '오해된 언급'을 통해서만 등장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요한이 예수의 출생지인 베들레헴(미 5:2; 마 2:6)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는 이유는 보다 더 중요한 목적을 위해서이다. 즉 본서 초두에서도 밝히는 대로 하나님이 말씀으로 성육신하셨다는(요 1:1-3) 그리스도의 기원에 관해서 하나님께로부터 감추어진(hidden) 비밀을 언급하는 것이 그의 육신의 출생지를 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요 3:2; 7:28; 8:14; 9:33, G. Beasley-Murray).
예수를 인하여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 '쟁론'에 해당하는 '스키스마'는 '찢다'(tear to pieces)라는 뜻의 '스키조'에서 유래한 단어로 패가 갈리어 논쟁하는 극심한 분열의 상황을 나타내 준다(요 9:16; 10:19). 이와 관련, 우리는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불화하게 하려 함이니'(마 10:34,35)라고 하신 예수의 말씀을 떠올리게 된다. 이는 곧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 간의 갈등 및 대립 관계를 예고하신 것인바 본절의 상황이 바로 이에 해당한다.
7:44 그 중에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 - 30,32절 주석 참조.
7:45 하속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저희가 묻되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 -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잡으러 하속들을 보낸 때는 '명절의 중간'(14절)이고 그들이 돌아온 시점은 명절 끝날(제 7일이든 8일이든, 37절 주석 참조)이거나 그 다음날일 것이다. '명절의 중간'을 초막절 제 3,4일째로 본다면 적어도 하속들은 예수를 잡으러 3일 혹은 4일을 돌아다닌 셈이 된다. 브라운(R. Brown)은 이 수납하기 힘든 기록을 요한복음 자체의 연대기를 무시한 인위적 배열(artificial arrangement) 때문으로 보지만 실상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여 주고 있는 듯하다. 즉 당국자들은 예수를 공개적으로 강제 연행하라고 하속들을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의 체포를 원했으나 명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올라온 수많은 유대인들 중 예수에 대하여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 자들이 많았으므로(12,31,40,41절) 예수를 체포할 때 발생할지 모르는 저들의 폭동은 원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속들은 군중 속에 섞여 있으면서 예수를 체포할 최적의 기회를 노리며 3,4일을 허비했지만(아직 그의 때가 이르지 않아서, 30,44절) 결국 실패하고서 그들을 파견한 자에게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Morris).
7:46 하속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없었나이다. - 산상수훈(마 5-7장)을 듣고 감동받은 사람들은 서기관들이 아니라 오히려 갈릴리의 무식한 군중들이었듯이(마 7:29), 하속들의 대답은 청중들 뿐 아니라 그를 체포하려던 자신들에게까지 대단한 감화를 끼친 예수의 권능 있는 말씀을 강조해 주고 있다(A. Robertson). 한편 하속들이 자신들의 공적 임무도 수행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이 인상 받은 것은 비단 예수의 말씀의 내용 뿐 아니라 그 권위 혹은 기품 있는 자세였을 것이다(Lenski, Morris, M. Dods). 즉 하속들이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에게 구차스러운 변명을 늘어놓지 않고 자신들이 예수께로부터 받은 인상을 그대로 진술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들이 예수의 초인간적인 권위에 압도되었기 때문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C. Barrett).
7:47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 '미혹되었느냐'에 해당하는 '페플라네스데'는 '설득당하다’ 또는 '굴복당하다'는 뜻이다. 이는 당시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예수의 행위나 말씀에 어떠한 평가를 하고 있었는지를 시사해 준다(마 27:63). 즉 그들은 자신들이 고정 관념으로 갖고 있던 율법관을 가지고 다른 교훈을 가르친다고 여겨졌던 예수를 미혹하는 자로 취급했던 것이다. 이처럼 오히려 그들의 많은 율법 지식이 예수에 대한 믿음에의 길을 막았으니(Barclay) 사실을 눈으로 확인한 하속들이 예수에 대해 가진 호의(나아가서 믿음)는 이들 바리새인들의 완악함과 잘 대조된다. 한편 본 구절이 형식적으로 부정의 대답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긴 하나 바리새인들은 내심 하속들 가운데도 벌써 예수를 믿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여기에 그들 당국자들의 더욱 심화되는 고민이 있었다.
7:48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있느냐. - 여기서 바리새인과 당국자들이 구분되고 있는 이유는 '당국자'란 대체로 사두개인들로서 정치적 권력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자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한정하고 싶은 요한의 의도가 반영된 때문이다(Morris). 한편 역시 '부정사' '메'로 시작되는 이 질문은 '아무도 없다'하는 부정적인 답변을 기대하는 것이지만 실상은 예수를 호의적으로 보거나 믿는 바리새인들이 다수(多數) 있었다(50절; 요 9:16; 12:42). 또한 이 질문은 예수를 믿는 무식한 무리(49절)들과는 대조적으로 율법을 잘 아는 지도층은 예수를 믿을 리 없을 것이라는 독선과 편견을 반영한다. 하지만 자신들은 절대 예수를 믿을 리 없다고 자부하는 이들 배타적이고 우월한 소수 정예 그룹은 자신들의 독선적 아성(牙城)이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는 위험을 감지하지 못했다(M. Dods).
7:49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 '율법을 알지 못하는'이란 유대인의 기본적인 가정교육인 '쉐마'(신 6:4) 교육이나 회당 교육을 받지 못한 불학무식(不學無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 대한 철저한 연구와 준수(613개 조항의 계명을 지키려는 노력과 같은) 혹은 율법 해석이나 구전(口傳)에까지 열심인 바리새인적인 자세가 결여된 상태를 가리킨다(Morris). 다음으로 '이 무리'란 ① 명절에 모인 무리들 중 예수에게 호의를 나타내는 자들(12,31,40,41절)이거나(A. Robertson) ②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구분되는 일반 백성들을 가리킬 수 있다(Abbott). 이중 문맥상으로는 전자가 더 타당하나 일반 민중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뿌리 깊은 우월의식에 비추어 본다면 후자도 일리가 있다.
7:50 그 중에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 - 본서에 따르면 산헤드린의 한 사람으로서 바리새인이었을 니고데모나(요 3:2; 19:39) 아리마대 요셉(요 19:38) 등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노출되지 않은 은밀한 예수의 제자였다. 특히 니고데모는 예수의 공생애 동안 줄곧(비록 제한적이기는 했지만) 예수와 관계를 맺어 왔는데 이제 그는 자신의 동료들이 상류층에서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한 사람도 없다고 강변하자(48절) 곧 적절한 반론을 제기함으로 예수를 변호하고 있다(51,52절).
7:51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 - 니고데모의 이 반론 제기로 보아 예수를 처리하고자 한 바리새인들의 중지(衆志)가 법정적 처리의 방향으로 개진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법적 판결이 있기 전에 제시된 증거를 검토하며 증인의 증언을 들어야 한다는 것은 율법이 제시하는 적절한 법적 절차였다(출 23:1; 신 1:16; 17:4). 그러므로 니고데모는 바로 이 점을 주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편 니고데모가 부정사 '메'로 질문을 시작한 것은 '아니오'라는 답변을 기대하는 것이기 보다 심중으로는 자신의 문제 제기가 소용없음을 알고 있었겠지만(A. Robertson) 적어도 자신의 동료들에게 자신의 입장은 분명하게 표명한 것으로 이는 매우 용기 있는 행위라 하겠다(Lenski, Ryle).
7:52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상고하여 보라. - 니고데모의 적법한 논리에 수긍해야 할 궁지에 몰린 바리새인들은 이처럼 다시 한 번 뿌리 깊은 '지역 감정'으로 곤경을 돌파하려 하고 있다. 41절 주석 참조.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 대개의 중요 사본들에는 '선지자'에 정관사가 붙어 있지 않다. 하지만 몇몇 학자들은 요한이신 18:15을 인용한 '모세 같은 선지자'를 자주 언급한 점을 중요시 여겨(40절; 요 1:21) 몇몇 파피루스(P66, P75) 사본들의 증거를 따라 정관사 '호'가 있는 것이 원래의 형태라고도 본다(E. Smothers, R. Brown, R. Bultmann). 그러나 사본 비평상 논란이 되는 구절에서 더 짧은 본문을 택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이고 더우기 중요한 사본들의 일관된 증거로 볼 때 정관사가 없는 본문이 더 가치 있는 것이 사실이다(B. Metzger). 그렇지만 이상의 사실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의 무지 내지는 예수에 대한 종교적 편견이 무마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이 주장하는 대로 성경을 상고하여 보면 그들의 주장이 잘못된 편견에 근거한 것임이 명백해지기 때문이다. 즉 왕하 14:25에서는 명백히 요나 선지자가 갈릴리 지방의 가드헤벨 출신임을 밝히고 있으며 추정하건대, 호세아, 나훔, 아모스, 엘리야, 엘리사 등도 갈릴리 출신이었을 것이다(A. Robertson). 그렇다면 성경에 정통한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의도적으로 자신의 입장 강화를 위해 이를 무시하는 것이 분명하다. 사실상 그만큼 그 당시 갈릴리 사람들에 대한 공공연한 멸시는 일반적이었다. 심지어는 갈릴리 사람들이 얼마나 제대로 말을 못하는 사람들인가를 증거하는 시리즈로 된 문헌이 있을 정도였다(Erub. 536).
7:53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 이는 바리새인들의 논의가 끝나고 난 후 산회(散會)한 정경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한글 개역 성경에는 본절로부터 요 8:11까지가 부호 안에 삽입되어 있다. 이는 사본상의 문제가 있기 때문인데 이에 대해서는 8장 1절 주석을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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