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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장 이고니온과 루스드라 사역 및 안디옥 귀환과 제 1차 전도 여행의 종료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넓게는 13:1-21:16까지 이어지는 바울을 중심으로한 전 3차의 이방 전도 여행 일련기사의 연속 부분이다. 그리고 좁게는 13:1-14:28에 기록된 바울을 중심으로한 제 1차 전도 여행 일련기사의 종결 부분이다. 이 바울의 전 3회에 걸친 전도 여행 기사는 과거 철저한 유대주의자로서 열렬히 복음을 탄압하던 바울을 회심시키시고 바로 그를 이제는 정반대로 순교(殉敎)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것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게 하신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를 보여 준다. 또한 사도 바울의 그야말로 생 명을 던진 철저 한 헌신으로 주 예수께서 승천하시면서 명령(commision)과 동시에 약속(promise)으로 남기셨던 말씀 곧 성령이 강림한 후에는 성령의 주도로 주의 사도들이 땅끝까지 이르러 주의 말씀을 중언함으로 복음이 세계 만민에게 전달되리라던 말씀(행 1:8)이 분명히 그리고 강력하게 성취되어 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이런 문맥하에서 전장에서 개시된 바울의 제 1차 전도 여행이 소아시아(Asia minor) 동남부에서 진행되다가 바울의 안디옥 귀환으로 종결되는 과정을 묘사한 본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 1-7절은 이고니온(Iconiun)에서 바을 일행이 유대주의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담대히 사역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자 유대주의자들 및 그와 결탁한 그 지방의 관원들이 마침내 바울 일행을 처형하고자 하여 바울 일행이 이를 피해 그 사역지를 루스드라(Lystra)와 더베(Derbe) 근경으로 응긴 사실을 보도한다. 중반부 8-18절은 루스드라에서 사역하던 중에 일어난 가장 큰 사건, 곧 치유(治癒)의 이적을 행한 바울 일행을 그곳 사람들이 쓰스 곧 제우스(Zeus)와 허메 곧 혜르메스(Hermes)로 오해하여 신으로 섬기고자 하였으나 바을 일행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그 분의 사역자로서의 자신들의 신분을 분명히 밝힘으로써 겨우 제지한 사건이 보도된다. 그리고 끝으로 후반부 19-28절은 다시금 유대주의자들이 현지인들을 선동하여 바을 일행을 핍박하여 심지어 바울이 죽음 직전에까지 처했다가 하나님의 섭리(攝理)로 소생한 후에 극렬한 박해를 피하면서도 이왕에 자신의 복음을 전한 사역지들을 차례로 순방하며 다시금 신앙의 확신과 인내를 촉구한 후 마침내 안디옥 교회로 귀환하여 A.D. 47-49년까지 대략 2년이 소요되었던 제 1차 전도 여행이 종료되었음을 보도한다.
한편 본장 기사에서도 전반적으로 구속사의 시대가 구약에서 신약으로 갓 확산 이전(移轉)된 이 시기에 특히 이 당시의 선민 이스라엘의 후손이었던 유대인의 유일한 종교였으면서도 구약의 일부 내용만을 인본주의적이고도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곡해하여 선민의 후손인 유대인 자신들을 중심한 지상 구원을 주장하던 유대교를 신봉하던 유대주의자들과 신 구약을 온전히 계승하여 예수 안에서의 세계 만민을 위한 구원의 복음을 전하던 초대 교회와의 갈등이 첨예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이에 대하여 개략적인 이해를 갖고 있어야만 본장의 기사도 이해할 수 있는 바 이에 대해서는 제 10장 개관을 참조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이를 전제(前提)한 각 문단의 개별적인 구속사적 의의만 고찰해 보기로 한다.
전반부의 기사에서 우리는 복음이 전해진 지역이 그것에 대하여 의견이 양분된 사실에서 복음이야말로 전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에 대한 진리로서 펼연적으로 세상은 이에 대하여 가부간(可否間)의 자세 결정을 해야 함을 깨닫게 된다. 또한 우리는 전반부 기사에서 한 지역 사람들이 복음 전도자를 핍박하였으나 그들이 사역을 중단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옮겨 계속 복음을 전한 사실을 발견한다. 이는 복음은 그 자체에 영원한 생명력이 있어서(히 4:12) 하나님의 종들의 끝없는 전신(傳信)으로 마침내 땅 끝까지 전달될 것임을 보여 준다. 또한 이 사건은 거시적 관점에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큰 구속사적 경고를 전해준다. 지금 당장은 인간이 자유의지로 그것을 거부하고 심지어 그것을 핍박할 기회까지 갖고 있으나 이것은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미약해서가 아니라 다만 구원의 충분한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일 뿐이다. 오히려 훗날 때가 이르면 오직 그 복음에 대한 자세의 여부에 따라 영생과 영벌을 결정받을 것이다(벧후 3:8-13). 따라서 아직까지 우리에게 구원의 기회가 주어져 있을 때에 복음의 진리에 순복하여 구속사의 대열에 동참해야 할 것이다. 만약 이를 거부하면 어차피 내가 아니어도 땅 끝까지 이를 복음은 나에게서 떠나가고 나얘게는 오직 심판만이 찾아올 것이다. 그럼에도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나에게 향한 복음의 초청을 교만하게 그리고 어리석게 거절하여 마침내 그 복음이 나에게서 옮겨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돌아보자.
중반부의 루스드라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소위 그리이스-로마 신화애 등장하는 신(神)들로 착각하여 섬기고자 하였으나 바울과 바나바가 이를 추호도 묵인하지 않고 자신들과 하나님과의 다른 관계를 밝히며 제지시킨 사건은 우리애게 다시 한번 구속사에 동참하여 하나님의 종으로 사역하는 자는 그 영광과 능력을 모두 다 하나님께 들려야 함을 보여 줄다(고전 10:31; 빌 1:20,21). 이는 구속사의 주채가 하나님 홀로이시며 또한 그 모든 능력과 주권은 모두 다 절대 거룩하신 하나님께로서 나온 것이며 유한하고 죄로 오염된 인간은 다만 도구로 쓰임받은 것이기에 당연한 일이다. 또한 이는 종으로서 자신의 주인에게 영광을 돌리는 선한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오직 그럴 며에만이 전적으로 타락하여 부패한 인간이나 그 역시 피조물(被造物)로서 타락하여 하나넘께 반역하는 사탄과 그 하수인인 거짓된 악련들처럼 거짓 신이 아니라 절대 거룩하신 유일한 신이신 하나님이 여수의 구속의 법과 사락을 퉁하여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다는 참 진리의 복음(롬 5:1-11)이 옳게 전해져서 구원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인 바 이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후반부의 기사 중 먼저 전날 여수의 복음을 믿고 전하는 스데반(Stephen) 집사를 돌로 쳐 죽이던 철저한 유대주의자었던 바울(행 7:55-8:3)이 이제는 오히려 예수의 복음 전도자가 되어 유대주의자들로부터 돌로 쳐 죽임을 당할 지경까지 이른 사실(19절)애서 우리는 실로 예수의 복음은 열린 눈으로 바라볼 때에는 인본주의적인 그 어떤 이념(Ideology)이나 사상들과 달리 진실로 전생명을 바쳐도 아깝지 않은 진리, 참 진리의 말씀임을 실증받게 된다. 또한 바울 일행이 이제 1차 전도 여행 사역을 마치고 귀환하면서 기왕에 주의 제자돌로 삼은 자들을 격려하고 또한 마침내 자신들을 파송시켜 주었던 안디옥 교회애 돌아와 거기 제자들과 다시 함께 유하며 생활한 사실에서 우리는 성도는 성도와 함께 교회를 중심으로 앞선 자가 뒷선 자를 이끌어 주고 또한 교회에서
서로 짐을 나누어 주면서 공동체로 살아가야 할 펼요성을 새삼 깨닫는다(벧전 4:7-10). 예수의 숭천 이후 재림 매까지 이 땅에 택함받은 성도들의 지상(地上)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다. 이의 전반적 이해에 대해서는 그랜드 종합 교리 중 교회론 부분을 보라.
외울 말씀
21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에 돌아서 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행 14:21,22)
이고니온, 루스드라 및 더베 등지에서의 사역
1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2 그러나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3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시니
4 그 성내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좇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좇는 자도 있는지라
5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6 저희가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및 그 근방으로 가서
7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오해한 루스드라 사람들
8 ○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어 앉았는데 나면서 앉은뱅이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9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10 큰 소리로 가로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뛰어 걷는지라
11 무리가 바울의 행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질러 가로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12 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허메라 하더라
13 성 밖 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14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질러
15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함이라
16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17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하고
18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돌에 맞은 바울
19 ○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 밖에 끌어 내치니라
20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안디옥 귀환 및 보고
21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 바 주께 부탁하고
24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가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25 도를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26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 곳은 두 사도의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27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하고
28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본문 & 자료노트
지도-14:7-20 바울의 1차 전도여행 경로
인물연구-14:12. 바나바
행 11장 연구자료 참조
도표-14:1-28, 바울의 연대기
서신서 개론 특별자료 참조
삽화-14:12 쓰스 상이 새겨진 주화들과 달려가는 허메 상
원어연구-14:22 환난을 겪다
여기에 쓰인 헬라어 원문은 '디아‥‥들림세온'이다.
'디아'( )는 전치사로서 본문과 같이 소유격과 결합하면 '~통과하여'(through)를 뜻한다. 이것은 성도에게 있어서 환난이란 종착역이 아니고 잠시 통과하는 과정임을 의미 한다. 그리스도께서 잠시 고난을 받으시고 다시 영광과 존귀로 관쓰신 것처럼(히 2:9). 성도들도 닥친 환난을 통과하고 나면 영원한 상급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환난'에 해당하는 '들립세온'은 '들립시스'의 복수 소유격인데, 이것은 동사 '들리보'에서 파생된 것이다. 그리고 '들리보'는 '분쇄하다' 또는 '짓누르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들라오'에서 유리한 것이다.
그래서 그 문자적인 의미는 '에워싸서 밀다'(막 3:9)이고 비유적으로 '억압하다' 또는 '괴롭히다'라는 의미도 함축하고 있다.
그러므로 '들립시스'는 순전히 외적인 억압 즉, 어떤 잘못에 대한 징벌이 아닌 고의적인 핍박이나 탄압을 가리킨다. 성도들은 때때로 아무런 잘못도 없이 이런 환난을 겪을 때가 있다. 일찍이 시편 기자는 '의인에게는 고난이 많다'고 하지 않았는가?(시 34:19)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한 성도들을 그 고난 가운데 오래 방치해 두지 않으시고 그것을 쉬 통과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고난에 닥쳐도, 비록 그것이 전혀 터무니 없는 탄압이라 하더라도. 결코 좌절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믿음으로 이겨내어 그 시련을 통과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다.
도표-14:12 헬라 로마의 12주신들
이 신들은 소위 우주의 모든 사물과 현상을 배후의 정령들의 활동으로 믿는 정령숭배(Animism)에서 나온 상상의 신들로서 12대 주신만 모아보았다. 한편 행 19:23-41에 나오는 아데미(Aitemis) 여신은 사냥과 달의 신으로서 특히 가정의 수호신으로 여겨졌다.
헬라명; 로마명: 특징
1. 제우스(Zeus); 주피터(Jupiter): 하늘의 신, 모든 신중의 주신(쓰스, 행 14:7,13)
2. 헤라(Hera); 주노(Juno): 여성의 신, 제우스의 아내
3. 데미테르(Demeter); 케레스(Ceres): 농업의 여신, 혼인의 수호자
4. 포세이돈 (Poseidon); 넾툰(Neptune): 바다의 신, 지진의 신
5. 하데스(Hades); 플루토(pluto): 지하 세계의 신
6. 아레스(Ares); 마르스(Mars): 전쟁과 농경의 신(행 17:22)
7. 헤파이스토스(Hephaistos); 불칸(Vulcanus): 불의 신, 장인(匠人)의 신
8. 디오니소스(Dionysos); 바커스(Bacchus): 술의 신, 잔치의 신
9. 아프로디테(Aphrodite); 비너스(Venus): 미와 사랑의 신
10. 헤르메스(Hermes); 메르쿠스(Mercurius): 전령의 신(허메, 행 14:12)
11. 아폴로(Apollo); 아폴로(Apollo): 목축과 테양의 신
12. 아테네(Athene); 미네르바(Mineva): 지혜의 여신, 풍요의 신
지도-14:21-28 바울의 1차 전도 여행 귀환 경로
도표-14:19-28 본서에 나타난 주요 전도자들
1. 열두 사도(1:22,26; 5:41,42)
2. 흩어진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8:4)
3. 빌립(8:4-40; 21:8)
4.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11:20)
5. 바울(13-28장)
6. 바나바(13-14장)
7. 마가(15:36-41)
8. 실라(15:40-18:23)
9. 디모데(16:1-3)
10. 누가(16:10-18:22)
11. 아볼로(18:24-28)
12. 에라스도(19:22)
14:1-7 이고니온과 루스드라 및 더베에서의 전도 사역
유대인들에 의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쫓겨난 바울과 바나바(행 13:44-52)는 이고니온으로 가게 되는데 본문은 바로 그 이고니온에서의 복음 전파를 소개하고 있다. 본문을 보면 이고니온에서도 복음을 영접하는 무리와 박해하는 무리로 나누어 반응을 보이는데(1,2,4절) 바울과 바나바는 유대인들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장기간을 체류하며 복음을 전한 것 같다(3절).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극심해지는 핍박으로 인해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끝내는 루가오니아 지방의 루스드라로 피할 수밖에 없게 된다(5-7절). 이처럼 바울 일행이 가는 곳에는 반드시 유대인들의 박해가 뒤따랐고 유대인보다는 이방인들이 복음에 더 적극적이었다.
이러한 본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바울과 바나바의 복음 전파 방법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주로 유대인의 회당에서 전도하였다. 이는 복음을 효과적으로 많은 사람에게 전달하고 유대인에게 먼저 복음을 전달한다는 전도의 원칙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당시 회당은 유대인 10여명 이상이 살고 있는 곳에는 어디에나 있었고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들 가운데서도 유대교에 관심이 있으면 많이 모였다. 따라서 회당은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에 매우 적합했고 또한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하기에 적절했던 곳이었다. 또한 주님께서는 바울과 바나바에게 표적과 기사를 행하는 능력을 주셔서 은혜의 말씀이 증거되도륵 하였다(3절). 이러한 사실들은 전도와 선교에 있어서도 주님이 주신 지혜와 능려으로 효과적인 복음 전파의 방법과 기술을 개발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사실을 교훈해 준다.
둘째는 복음을 받는 무리들의 반응이다. 이는 복음을 영접한 자들과 불순종한 자들로 나누어 나타난다. 일단의 유대인들도 복음을 듣고 주를 영접하기는 했지만 복음을 영접한 자들의 대부분은 이방인들이었다. 반면에 복음에 불순종한 자들은 유대주의적 편견과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던 유대인들이었다. 이들은 복음을 단순히 배척한 것이 아니라 극심하게 핍박하였으며 이방인들을 사주하여 선동하기도 했다.
이는 복음은 누구에게나 차별이 없으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들의 마음 상태에 따라 그 열매의 있고 얼음이 결정됨을 보여 준다. 한편 바울과 바나바는 여기서도 박해를 피하여 루스드라 지방으로 옮겨 갔는데 이것은 박해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선교 전략상 예수 그리스도의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마 10:23)는 교훈을 지혜롭게 실천한 것이다. 따라서 사도들은 박해를 피해 지역을 옳겨 다니면서 오히려 복음을 더욱 널리 전파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의 어려움과 박해가 있을 때에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지혜릅게 처신하는 분별력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엡 3:12; 빌 1:10; 히 11:38).
14:1 이고니온에서. - '이고니온'(Iconium)은 오늘날 코냐(Konya)로 불리는 곳으로 비시디아의 안디옥으로부터 남동쪽으로 약 120km에 위치하고 있다. 이 도시는 갈라디아, 브루기아 지방의 가장 동쪽에 위치한 곳으로서, B.C. 3세기 이후 실루기아, 갈라디아의 왕들에 의해 지배를 받다가 B.C. 25년에 갈라디아가 로마의 통치를 받게 됨에 따라 로마 제국에 합병된 곳이다. 그리고 루스드라와 더베와 같이 갈라디아가 루가오니아 지방으로 나누어질 때, 루가오니아의 수도가 되었는데, 당시 이곳은 여러 개의 주요 도로들이 만나는 교통 중심지로 그 중요성이 비시디아의 안디옥을 능가했으며 유대인을 비롯한 여러 민족이 모여 살던 곳이었다. 이고니온의 위치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노트 '바울의 제 1차 전도 여행 경로'를 보다 참조하라.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 여기서 '함께'(카타 토 아우토)라는 말은 '같은 방법으로'라는 뜻으로서 이것은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의 안디옥에서와 같은 방법으로 유대인의 회당에서 전도했다는 것(행 13:13-48)을 가리킨다(Bruce, Ramsay). 즉 바울과 바나바가 이고니온에서도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간 것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을 택해 효과적인 전도를 하려는 의도와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리지 않고 전도하려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러한 그들의 전도 방법은 에베소의 두란노 서원 전도 때까지 계속되었다(행 19:9).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 사도들의 전도로 이고니온에서도 복음을 들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많은 수가 복음을 받아들였다. 즉 '허다한'이란 말을 통해 우리는 비시디아의 안디옥에서처럼(행 13:43,49) 이곳에서도 분명히 많은 전도의 성과를 거두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여기서 회당 안에 있던 '헬라인'은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을 가리킨다.
14:2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 - 이는 바울과 바나바가 전한 복음을 믿지 아니하는 유대인들' 을 가리킨다. 여기서 '순종치 아니하는'(아페이데산테스)이란 말은 단순한 불신 이상으로서 반항하며 적대하는 태도를 가리킨다(Lumby).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 본서 전체를 통하여 우리는 복음전도자들과 성도들에 대한 핍박은 거의 모든 경우에 있어서 유대인들로부터 일어났다는 사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행 13:45,50). 이고니온에서도 그러한 상황은 예외가 아니었다. 하여튼 여기서 '형제들'은 기독교로 개종한 자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악감을 품다'(카코오)는 '악을 행하다', '학대하다'는 뜻으로서 신약 성경 중 유일하게 이곳에만 쓰였다. 한편 베자 사본(D)에는 '회당의 책임자들과 관리들'이란 말이 덧붙여져 있는데, 이것은 이방인들을 선동하여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는 데 있어서 유대인 회당장들이 누구보다도 앞장섰음을 나타내 준다(Robertson).
14:3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 누가는 바울과 바나바가 박해와 핍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고니온을 떠나지 않고 그곳에서 오랜 기간 동안 계속해서 담대히 복음을 전했음을 밝히고 있다. 헬라어 원문에는 접속사 '그러므로'(운)가 서두에 부가되어 있는데, 이것은 유대인들에 의해 그때 일어났던 박해 때문에 도리어 두 사도가 그곳에서 더욱 담대히 복음을 전파하였음을 알려 준다. 또한 두 사도가 복음을 전할 때에 '주를 힘입어' 했다는 것은 저들이 성령의 능력을 덧입은 가운데 주를 의지하며, 주가 주신 사도적 권위에 입각하여 복음을 전파했다는 것을 나타내 준다.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 표적(signs)과 기사(wonders)는 '이적'을 가리키는 동의어이다. 다만 그 의미 차이를 세분하자면 '표적'은 이적의 목적적 측면, 즉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과 권능, 영광 등을 나타내 주는 것이 곧 이적임을 강조해 주는 단어이다. 그리고 '기사'는 이적의 특성, 즉 자연적인 법칙을 거스려서 발생하는 특이한 사건이 곧 이적임을 강조하는 단어이다. 행 2:19 주석 참조. 그런데 하나님께서 두 사도에게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심은 그들의 복음 전도 사역을 뒷받침해 주는 하나님의 확실한 보증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러한 기적들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능력을 확인시켜 주는 증거가 되었다고 증언하고 있다(갈 3:5). 이에 관해서는 요 6장 자료노트, '이적의 목적'과 행 2:4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시니. - 복음이 '은혜의 말씀'으로 지칭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선언하는 말씀'이라는 뜻이다(행 20:24,32). 사실 율법이 죄를 규정하고 정죄하는 의문의 규제임에 반해 복음은 죄에 대한 용서와 구원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말씀이다(갈 3:10-14).
14:4 그 성내 무리가 나뉘어. - 복음 전파에 대하여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자들과 그렇지 아니하는 자들이 나타나는 것은 오늘날에도 목격할 수 있는 현상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한다'(눅 12:51)는 예수님의 말씀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유대인을 좇는 자도 있고. - 이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어떤 자들은 유대인들과 함께 하고'란 뜻이다. 그러므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비시디아의 안디옥에서처럼(행 13:50) 이번에도 이방인을 선동하여 자기들 편으로 끌여들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사도를. -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처음으로 바울과 바나바를 가리켜 '사도'(apostle)라고 부르고 있다. 사실 '사도'란 명칭은 예수님을 따라다녔고 그분의 선교 사역에 동참했으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목격한 12제자를 가리키는 제한된 용어였다(막 6:30; 눅 6:13; 행 1:2,26; 2:37). 하지만 여기에서 누가는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전도를 위해 특별히 보냄을 받았다는 포괄적인 의미에서 '사도'란 명칭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바울 또한 자신을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사도'가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고전 15:9-11), 예수의 형제인 야고보(갈 1:19), 빌립보 교회의 사자 에바브로디도(빌 2:25), 실라와 디모데(살전 2:6), 아볼로(고전 4:9) 등을 가리켜 '사도'라고 부르고 있다. 사도에 관한 전반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행 1장 자료노트 '사도의 이해'를 보다 참조하라.
14:5 관원들. - 공동번역은 이를 '그들의 지도자들'로 번역하고 있다. 이는 이고니온 성의 통치자 및 그 수하의 관리들을 가리키는 듯하다. 따라서 바나바와 바울을 박해하는 데에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선동에 휩쓸린 정치 지도자들도 합세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역시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경우와 흡사하다(행 13:50).
두 사도를 능욕하며. - '능욕하며'(휘브리사이)란 말은 '무례하게 모욕하다'는 뜻으로, 복음을 멸시하고 거부하던 자들이 두 사도에 대해 지닌 적의로 가득찬 마음 상태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아울러 이 말은 지금까지 은밀하게 두 사도를 배척하고 반대하던 자들의 행동이 이제 두 사도에 대해 노골적이고 공개적으로 핍박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 간음하다 잡힌 여자와(요 8:3-5) 스데반의 경우(행 7:58)에서 보듯 사람을 돌로 치는 것은 신성 모독자(레 24:11-14), 우상 숭배자(신 13:6-11), 성 범죄자(신 22:22-27) 등에 대하여 가하던 유대인의 형벌이었다. 이로 볼 때 바울과 바나바에게 돌을 던지려 했던 계획은 유대인들이 주동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즉 여기서 '달려드니'(호르메)라는 말은 저들이 실제적으로 바울과 바나바를 공격했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거부하던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사도들을 폭행하기로 결정한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공동번역은 이를 '움직임을 보였다'로 번역하고 있다.
14:6 저희가 알고 도망하여. - 바울과 바나바가 적대자들의 악한 계획을 눈치챈 이상 무리하게 그들과 충돌하거나 일부러 그들에게 돌을 맞거나 매를 맞아 거동 불능의 상태에 처할 필요는 없었다. 왜냐하면 저들은 주께로부터 받은 이방 선교 사역의 막중한 사명을 최후의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감당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직은 복음 전파를 위해 순교할 시기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저들은 이고니온을 떠나 다른 곳으로 피신했는데, 이는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마 10:23)고 하신 예수의 가르침을 기억나게 해주는 행동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진실한 하나님의 일꾼은 복음 전파에 있어 영웅심이나 만용 같은 경솔한 행동을 피하고 하나님께서 맡겨두신 일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자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명령하실 때에는 기꺼이 순종하여 필요하다면 죽음까지도 감수하는 사람이 또한 진정한 하나님의 일꾼인 것이다.
루가오니아. - 소아시아의 중남부 지방으로서 서쪽으로는 브루기아와 비시디아, 동쪽으로는 갑바도기아, 그리고 북쪽으로는 갈라디아, 남쪽으로는 타우루스(Taurus) 산맥을 접하고 있는 지역이다. 한때는 마게도냐에 지배당하기도 했으나 A.D. 1세기경에는 루가오니아의 대부분의 지역이 로마의 속주(屬州)인 갈라디아 영토에 통합되어 버렸다.
루스드라와 더베. - 루스드라(Lystra)는 이고니온에서 남쪽으로 약 45km 위치한 곳이다. 이곳은 더베와 같이 타우루스 산악 지대의 고원에 위치하고 있어 물사정이 좋지 않고 황량했지만, 목초지로는 적합한 곳이었다. 이곳은 디모데의 고향이기도 했다(행 16:1). 다음으로 더베(Derbe)는 루스드라 동남쪽 약 30km 지점에 위치한 로마 황제의 변방 도시로서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의 이름을 따라 '글라우디오 더베'라고도 불리웠다. 이곳은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의 종점으로 바울과 바나바는 여기에서 다시금 루스드라, 이고니온, 비시디아의 안디옥을 거쳐 버가에 이른 후, 거기서 배타고 선교 출발지인 안디옥으로 되돌아간다(19-28절). 루스드라와 더베의 위치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노트, 지도를 보다 참조하라.
14:7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 바울과 바나바가 단순히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폭행당할 것을 두려워하여(5,6절) 루스드라와 더베로 피신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본절을 통해 명확히 밝혀진다. 어디까지나 그들은 기회가 닿는 대로 구원의 복음을 널리 전하고자 무모한 충돌을 피해 새로운 선교의 터로 옮겨온 것이다. 즉 여기서 '복음을 전하니라'(유앙겔리조메노이)라는 말은 미완료 시제로서 그들의 복음 전도 활동이 그침이 없이 계속적으로 건행되었다는 것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이와 같이 신실한 하나님의 일꾼은 그가 처한 장소가 어느 곳이든지 그에게 부여된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책임감 있는 자세를 보이기 마련이다.
14:8-18 루스드라에서의 사건
앞단락에서는 바울과 바나바의 이고니온과 루스드라 및 더베에서의 사역을 살펴보았다. 이어 본문은 이고니온에서 유대인들의 박해를 피하여 루스드라에 온 바울과 바나바가 그곳에서 복음을 증거할 때 발생한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을 보면 루스드라에서의 복음 전파는 바울이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고치자 루스드라 사람들이 바나바와 바울을 그들이 섬기는 쓰스(제우스)와 허메(헤르메스) 신으로 오해하게 되는데(11-13절) 이를 바울과 바나바가 자신들은 신이 아닌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설명하면서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14-18절).
루스드라는 본래 퇴역한 로마 군인들의 집단 거주지로 조성된 곳으로 소수의 헬라인으로 구성된 엘리트 계층을 제외하고는 지적 수준이 낮고 미신적 경향이 짙은 도시였다. 또한 유대인의 세력도 미약하여 유일신 개념에 대해서는 이해가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여튼 이곳 주민들의 대부분은 헬라의 신 쓰스와 허메를 섬기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그들이 섬기는 허메와 쓰스신으로 오해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이곳의 홍수설화에 의하면 쓰스와 허메가 인간의 모습으로 이 지역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빌레몬과 바우시스라는 가난한 부부만이 이들을 환영하고 다른 사람들은 배척하므로 분노한 이들이 그 부부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홍수로 멸망시켰다고 한다. 이러한 설화를 잘 알고 있었던 주민들은 바울의 이적을 보고 바울과 바나바가 인간의 모습으로 재현현한 쓰스와 허메일 것이라고 생각하여 숭배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자신들의 이적이 성령의 능력인 것을 잘 알고 있었던 바울과 바나바는 경배의 대상이 되기를 당연히 거부한다. 그리고 바울은 이것을 계기로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절대적인 신으로서의 하나님을 소개함은 물론 루스드라 사람들로 하여금 우상 숭배를 버리고 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촉구한다.
이러한 본문에서 우리는 바울의 능숙한 선교 전략을 보게 되는데, 이는 바울이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었던 유대인들에게는 그들에게 적합한 메시야관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였던 반면(행 13:33), 미신적 사고에 물들어 있는 이방인들에게는 창조주 하나님을 전파하여 바른 신지식을 갖고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한 것이다(행 17:2). 아무튼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 만드신 만물에 그의 능력과 신성을 분명히 나타내 보이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속성과 영광을 무시하고 자신의 허망한 욕심에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는 어리석은 죄악을 행하고 있다(롬 1:19-23). 그러나 진실한 성도들은 우주와 만물의 창조주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하고 하나님께만 참된 영광과 찬양을 드려야 할 것이다(히 11:3).
14:8 루스드라에 …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 루스드라와 관련하여서는 유대인들의 회당에 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당시 이곳에는 유대인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따라서 본절에 언급된 앉은뱅이는 이방인인 것 같다. 그런데 이 자는 행 3장에 나오는 예루살렘의 앉은뱅이와 많은 유사성을 보인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치유한 것 같이 여기서 바울이 앉은뱅이를 고치는 기사가 부각되어 있는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은 곧 베드로의 사도직과 대등한 바울의 사도 직분을 입증함으로써, 베드로가 유대인의 사도임에 비해,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동등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누가의 의도이다. 아무튼 날 때부터 불구였던 희망 없는 앉은뱅이를 치유한 사건은 루스드라의 사람들에게 보다 효과적으로 전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발을 쓰지 못하는'(아뒤나토스 토이스 포신)이란 말은 신약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일반적으로 '불가능한'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마 19:26). 그러나 본절에서 누가는 의사란 직업적 특성상(골 4:14) 의학자들이 흔히 사용하는 '육체적으로 무기력한'이라는 의미의 이 단어를 사용하여 자연 상태에서는 앉은뱅이의 치료가 불가능한 상태임을 강조하고 있다.
14:9 말하는 것을 듣거늘. - 바울이 말하는 것을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 경청하는 앉은뱅이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어쩌면 이 앉은뱅이는 이미 바울이 이고니온에서 행했던 기적(3절)에 관해 소문으로 들어알고 있었을런지 모른다. 아니면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그리고 그분의 여러 치유 기사와 이적 기사에 관하여 말하는 바울의 설교를 통하여 자신도 치유될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더욱 말씀을 열심히 듣고 있었을 것이다.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생긴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부분이다(롬 10:17). 한편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본서에서도 믿음을 비단 영혼 뿐 아니라 육신의 치유를 받는 중요한 전제 조건으로 강조하고 있음을 볼 때, 여기서 '구원'이 1차적으로 앉은뱅이의 육체적 불구 상태가 온전히 회복되는 것을 가리킨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아울러 이로써 앉은뱅이는 하나님의 살아 역사하심을 의심지 않고 믿어 영적으로도 구원함을 얻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을 것이다.
14:10 큰 소리로 가로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 에브라임 사본(C)이나 베자 사본(D) 등과 같은 일부 믿을 만한 사본에는 본절 초두에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네게 말한다'는 기록이 삽입되어 있다(Calvin). 그런데 바울이 실제적으로 이렇게 말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경 전반에서 사도들이 모든 기적을 행함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의지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존귀를 드러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행 3:6; 5:40,41). 한편 바울이 '큰 소리로' 앉은뱅이에게 일어설 것을 명령한 것은 이제 복음의 능력을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공개적으로 보여 주기 위한 의도로 이해할 수 있다. 아니면 앉은뱅이에게 용기를 북돋워주기 위하여서 일 수도 있다.
그 사람이 뛰어 걷는지라. - 비록 일반적인 관점에서는 앉은뱅이에게 일어서라고 한 명령이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였을지 몰라도 앉은뱅이가 순종하고자 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능력을 주심으로 그는 일어서 걷게 되었다. 여기서 '뛰어 걷는지라'(헬라토 카이 페리에파테이)는 말은 부정과거와 미완료 시제의 복합으로 앉은뱅이가 단 한 번에 일어서서 계속 걸어 돌아다니는 생생한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즉 이는 바울의 명령과 거의 동시에 즉각적인 회복의 이적이 일어난 것이다.
14:11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 '루가오니아 방언'이 갑바도기아인들이 사용하던 종류의 언어인지 아니면 켈트족이 사용하던 것과 같은 언어인지는 분명치 않다(Hervey). 그러나 헬라와 로마의 통치를 겪은 루가오니아 지방 사람들은 자신들의 본 방언 외에도 헬라어나 라틴어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 선교 사역에 있어 로마 제국 통치하의 전역에서 공통적으로 통용되고 있던 헬라어를 사용하였다. 하지만 바울이 행한 기적을 목격한 루스드라 사람들은 너무 놀라 자신들도 모르게 자기들의 방언으로 말했던 것이다. 따라서 바울과 바나바는 처음에 그들이 말하는 것(12절)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곳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제사를 드리려고 준비할 때야 비로소 그들이 말한 내용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들의 행동을 만류했을 것이다(13-15절).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 이것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신들이 사람과 같이 되어 우리에게 내려 오셨다'는 뜻이다. 루가오니아 지방 사람들은 대대로 고대 그리이스 로마(Greek-Roman) 신화에 심취해 있던 사람들로서 다음과 같은 신화를 신봉하고 있었다. 즉 옛날에 쓰스(Zeus)와 허메(Hermes) 두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이웃 지역인 브루기아(Phrygia)를 방문했을 때 아무도 이들을 맞이하지 않았으나 빌레몬과 바우시스라는 한 부부가 이들을 환영하여 자기들 집으로 맞이한 순간 저들의 집은 신전으로 변해 저들은 그 제사장이 되었지만 두 신을 박대한 마을은 홍수로 잠겼다는 신화이다. 당시 루스드라에 쓰스, 즉 제우스의 신전이 있었다는 사실은 이곳 사람들이 얼마나 이러한 미신적 신앙에 몰두해 있었는가를 잘 보여 주는 대표적 증거이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가 기적을 행하자 그같은 신들이 다시 자기들에게 온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14:12 바나바는 쓰스라…허메라 하더라. - 쓰스와 허메는 제우스( )와 헤르메스( )의 헬라식 표기이다. 이 중 제우스는 로마 신화의 쥬피터(Jupiter)에 해당하는 바 세상을 분담하여 지배하는 다른 신들을 관리하고 다스리는 주신(主神)이다. 그리고 헤르메스는 로마 신화의 머큐리(Mercury)에 해당하는 바 제우스와 마이아(Maia) 사이에서 태어난 제우스의 아들로서, 신탁을 전달하고 대변하는 제우스의 전령이었다. 한편 바울이 바나바보다 더 지도자적인 위치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기적을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루스드라인들이 바나바를 쓰스(제우스)라 부르고 바울을 허메(헤르메스)라 부른 것은 바울보다 바나바가 나이가 많았고 더 근엄해 보인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이를 통해 우리는 자기들의 목전에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기적과 그 말씀의 능력을 보면서도 자기들의 생활 속에 만연된 우상 숭배의 습관 때문에 이를 미신적으로 해석하는 루스드라 사람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14:13 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 루스드라 사람들은 그들의 종교 의식에 따라 신에게 제사를 드릴 때는 황소를 바쳐야 했다. 그리고 '화관'(花冠)은 때로는 산 제물의 머리 위에 씌워졌고, 때로는 종교적 의식에서 예배자들이 자기의 장식물로 사용하였는데, 양털과 리본으로 멋지게 장식된 것이었다(Lumby). 그런데 쓰스 신당 제사장들 역시 루스드라 성읍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바울과 바나바를 쓰스와 헤메라고 생각하여 제사드리고자 한 것이다.
대문 앞에. - 이곳이 신당 대문 앞인지, 성문 대문 앞인지 아니면 바울과 바나바가 기거했던 집의 대문 앞을 가리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론(異論)이 많다. 하지만 당시 상황으로 보아 성문 앞으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루스드라 성읍의 경우, 제우스 신전은 성읍 사람들의 소동을 보고 그곳 신전의 제사장들이 곧 달려올 수 있는 성문 바로 밖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회당이 없는 루스드라에서 전도할 때 바울과 바나바는 보다 효과적인 복음 전도를 위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성문 안쪽 광장이나 공터에서 설교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8절 주석 참조.
14:14 옷을 찢고…소리 질러. - '옷을 찢는' 것은 어떤 일을 보거나 들은 데 대하여 혐오, 거부, 공포감을 표하거나 극심한 수치와 비애 등에 잠겼음을 나타내는 유대인들의 상징적 행동이다(창 37:29; 수 7:6; 스 9:3; 마 26:65). 두 사도는 자기들을 신으로 숭배하려는 것에 대해서 극단의 당혹감을 표현하면서 필사적으로 말리고 있는데, 이것은 헤롯이 하나님의 명예를 가로챘던 불경스런 태도와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행 12:23). 여기서 '뛰어 들어가서'(엑세페데산)란 말은 '펄쩍 뛰어 앞으로 나갔다'는 뜻이며, '소리 질러'(크라존테스)라는 말은 비탄함과 공포에 사로잡혀 '큰 소리 내다'는 뜻이다. 이는 두 사도가 하나님의 거룩한 신성을 모독하는 자들의 행위를 얼마나 혐오하고 두려워했는가를 잘 묘사하고 있다.
14:15 우리도 너희와…사람이라. - 이것을 직역하면 '우리도 너희와 같이 평범한 속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으로서,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했던 말(행 10:26)과 유사하다. 즉 바울과 바나바는 자기들이 신적 존재가 아님을 분명히 밝힘과 아울러 인간의 경배를 받으실 분은 오직 하나님 뿐이심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 헛된 일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 '이 헛된 일'이란 문자적으로 '무익한 것'을 뜻하는데, 이는 쓰스와 허메를 숭배하는 루스드라인들의 우상 숭배 행위를 가리킨다. 바울과 바나바는 루스드라 사람들에게 자기들이 신이 아님을 선포하며, 그들이 숭배하던 헛된 우상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만이 진정으로 가치있고 사람이 행해야 할 마땅한 도리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본절에서 우리는 비시디아의 안디옥과 이고니온의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며 복음을 전했던 것(행 13:16-41)과는 달리 이곳 루스드라의 이방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먼저 가르치는 바울과 바나바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두 사도가 복음 전도에 있어 유대인과 이방인의 종교적 심성의 근본적 차이를 깊이 통찰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유일성과 영원성을 잘 알고 있는 유대인들에게는 그의 아들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증거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지만, 이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이방인들에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먼저 증거하는 것이 효과적인 복음 전파를 위해 선행되어야 할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두 사도는 하나님의 천지 창조부터 시작하여 그분의 주권과 권능과 속성에 관하여 저들에게 자세히 가르쳤던 것이다.
14:16 하나님이 지나간···묵인하셨으나. - 이 말씀은 하나님이 자기의 뜻을 완전히 계시하시기 전의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허물치 아니하셨다'(행 17:30)는 말씀과 같은 의미로서,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기 전까지는 그들의 사상과 관습, 행동 등을 용납하셨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사도들을 통해 명백히 계시해 주셨으니 더 이상 우상 숭배 등과 같은 저들의 허탄한 행위를 용인치 아니하실 것이었다.
14:17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사도 시대 이전에 살았던 이방인들에게는 구원의 목적, 방법을 통하여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특별 계시를 허락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깨서 특별 계시를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을 심판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성경의 근본적 진리를 왜곡하여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완전히 무시한 발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를 통하여 자신의 신성을 계시하셨을 뿐만 아니라(시 19:1,2) 보다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모든 인간이 자연을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일반적 진리를 나타내셨기 때문이다(롬 1:18-23). 그러므로 이방인들 또한 하나님의 심판의 당위성을 피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 일반 계시라고 부르는데, 본절은 바로 이와 같은 사실을 뒷받침 해주는 것이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사항은 그랜드 종합 교리 서론, '일반 계시'를 참조하라.
하늘로서 비를…만족케 하셨느니라. -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신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인간에게 온갖 자연적 혜택을 베푸셨다. 그러므로 자연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구약 성경의 주요 주제 중의 하나다(창 8:22). 그러나 이곳 루스드라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쓰스(제우스)가 비를 다스리고 허메(헤르메스)는 식량을 분배하는 신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므로 바울과 바나바는 이러한 자연적 혜택이 온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일반적인 사랑의 결과임을 일러줌으로써 저들의 잘못된 미신적 신앙을 깨우치고 있는 것이다(마 5:45).
14:18 이렇게 말하여⋯⋯ 못하게 하니라. - 잘못된 종교적 열정에 가득찬 군중들의 행동을 억제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지만 마침내 두 사도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논리 정연하게 증거함으로써 그들의 잘못된 행동을 만류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미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증거하여 그들의 잘못된 신앙과 행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이 하나님에 대하여 절대적 신앙을 지니고있으며 또한 말씀에 대한 깊은 묵상과 기도를 통한 경건 훈련이 선행되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엡 6:10-18).
14:19-28 안디옥 교회로의 귀환
앞단락(8-18절)에서는 루스드라에서의 복음 전파 사실을 살펴보았다. 이어 본문은 바울과 바나바의 제1차 전도 여행(B.C. 47-49년)이 마무리되는 장면이다. 이러한 본문을 보면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의 바울과 바나바의 복음 전파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유대인들이 루스드라에까지 쫓아와 무리를 선동하여 바울을 돌로 치는 사건이 나타난다. 이 사건은 고후 11:24,25에서 바울이 그의 고난을 회상할 때 다시 언급될 만큼 바울에게 큰 고통을 주었는데 유대인들이 바울이 죽은 줄 알고 성 밖에 버릴 정도였다(19절). 하지만 바울은 정신을 차린 후에 다시 성 안으로 들어가는 담대함을 보여 주었다(20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으로 바울과 바나바는 더 이상의 전도 여행을 계속하지 못하고 이튿날 더베로 가서 복음을 전한 후에(20,21절) 원래의 파송지인 수리아에 있는 안디옥 교회로 귀환하게 된다(22-28절).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들이 개척한 교회들을 돌아보고 성도들에게 고난 가운데에서도 용기를 잃지 말 것을 권면하는 동시에(22절) 장로들을 택하여 그들로 교회의 치리를 대신케 함으로써 교회를 굳건히 하였다(23절). 결국 바울이 출발지인 안디옥으로 귀환함으로써 1차 전도 여행의 모든 여정을 미치게 되는 바 바울의 1차 전도 여행 여정에 대해서는 행 13장 연구자료를 참조하라.
한편 바울은 안디옥 교회에서 전도 보고를 통하여 이방인 전도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음을 강조한다. 즉 이방인에 대한 전도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를 보고하여 계속해서 전도해야 될 것을 가르친 것이다. 이것이 발판이 되어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에서 제 2차 선교 여행을 준비하였고 안디옥 교회는 이방 전도의 중심지로서 그 위치를 굳히게 된다.
이상의 본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게 된다.
① 복음 전도자는 세상의 어떠한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명을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죽음과 위기를 겪으면서도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중시했으며 죄수의 몸이 되기를 자처하면서까지 복음을 증거했다(행 20:23,24; 엡 6:21).
② 선교는 교회의 최대 사명으로 모두 성도가 심혈을 기울여 수행해야 할 과제라는 것이다(마 319,20; 눅 24:47; 행 1:8).
14: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 바울과 바나바를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쫓아내는 데 앞장섰던 유대인들(5절; 행 13:50,51) 이 두 사도의 전도 활동을 방해할 목적으로 두 사도를 계속 따라다니며 괴롭혔음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이렇게 집요한 유대인들의 적대 행위는 당시 바울과 바나바의 복음 전파에 있어 얼마나 큰 걸림돌이 되었는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아마도 이러한 경험을 통해 바울은 자신 또한 개종하기 전에는 이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인 박해를 위해 예루살렘에서 다메섹까지 좇아간 열광적인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했을 것이다(행 9:1,2).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 '초인하다'는 말은 '설득하다' 또는 '선동하다'는 뜻이다(공동번역). 자기들의 종교적 열정을 억제치 못하고서 바울과 바나바에게 제사를 드리려 하다가 실패하여(11-18절) 허탈감에 빠진 루스드라 사람들을 유대인들이 선동하기란 매우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즉 저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가리켜 제우스 종교의 뿌리를 흔드는 술사(術士)라고 비방하여 루스드라 사람들의 가슴에 적개심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한편 여기서 바울만이 돌에 맞은 이유는 전도 활동에 있어 바울이 지도자적인 위치에서 설교를 하고 이적을 베풀었기 때문에 바나바에 대해서는 그들이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탓으로 보인다. 후에 바울이 고후 11:25에서 '한 번 돌로 맞았다'고 언급한 것은 이 사건을 가리키는 것 같다.
성 밖에 끌어 내치니라. - 스데반은 돌에 맞기 전에 유대인들에 의해 성밖으로 끌려갔는데(행 7:58), 이것은 죄인을 죽일 때에는 성 밖에 끌어내어 죽이도록 규정되어 있는 유대인들의 율법 조항 때문이었다(신 17:5). 그러나 바울의 경우 그같은 규정을 무시하고 먼저 돌로 치고나서 죽은 줄로 알고 성 밖으로 끌어 내쳤다는 것은 바울에 대한 그들의 악감정이 얼마나 조급하고 큰 것이었는가를 잘 나타내 준다.
14:20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 여기서 '제자들'은 바울과 동행했던 수행원 뿐 아니라 그의 전도를 받고서 기독교로 개종한 루스드라 성읍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돌에 맞아 성 밖으로 내던져진 바울이 걱정되어 그의 주변에 모였다. 아울러 그들은 바울의 최후를 확인한 후 그의 장례를 치루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Bengel). 한편 훗날 바울 자신의 증언에 따르면 이 무리 가운데는 당시 15살 가량의 젊은이였던 디모데가 함께 있었던 것 같다(딤후 3:11).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 - 돌에 맞아 죽었던 것 같은 바울이 일어났다는 것은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매우 놀라운 일이었을 것이다. 원어상 '일어났다'(아나스타스)는 표현은 바울이 갑작스럽게 일어났다는 것을 나타내는데, 이는 바울이 하나님의 특별하신 돌보심 덕분에 비록 중상은 당했어도 정신을 잃지 않고 몸을 가눌 수 있었음을 뜻한다. 한편 이처럼 죽을 고비를 넘긴 바울이 다른 곳으로 피신하지 않고 다시금 성읍으로 들어간 것은 복음 증거를 위해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바울의 순교적 자세와 의지를 나타내 준다. 6절 주석 참조.
14:21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 복음 전도에 여념이 없던 바울과 바나바는 다시금 더베(6절)로 돌아와(20절) 열심히 복음을 전파했는데, 이곳에서는 비교적 큰 반대에 부딪치지 않고 성공적으로 사역을 수행할 수 있었다. 이는 아마도 루스드라에까지 뒤따라와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하던 자들 중 상당수가 바울이 죽은 줄로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19절). 한편 여기서 '제자로 삼고'(마데튜산테스)라는 말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위하여 그들을 가르치고 양육하는 사도들의 구체적인 행동을 잘 표현한 것으로서, '모든 사람을 제자 삼으라'(마 28:19)는 예수님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한 저들의 삶의 자세를 증거해 준다.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 자기들을 박해한 곳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매우 힘들고 위험한 일이었지만 바울과 바나바, 두 사도는 이처럼 기꺼이 그러한 길을 택하였다. 즉 당시 더베의 동쪽에는 '길리기아의 문'(Cilician Gates)이라는 골짜기가 있어서그곳을 지나가면 바울의 고향인 다소에 쉽게 갈 수있었고, 그곳에서 배를 타면 전도 여행의 출발지인수리아 안디옥에 빠른 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Robertson).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굳이 처음에 왔던길을 되돌아가는 편을 택한 것은 자신들로부터 처음으로복음을 받은 이래 이제 핍박과 환난 중에 있는 성도들을위로하고 격려함으로써 복음의 지속적인 진보를 나타내고자 하는 사명감과 바램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편 여기서 '안디옥'은 바울과 바나바를 파송했던 교회가 있는 수리아 안디옥과는 구분되는 비시디아 안디옥을 가리킨다. 비시디아 안디옥에 대해서는 행 13:14 주석을 참조하라.
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 이미 복음을 영접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을 더욱 강건하게 양육하는 것은 두 사도가 마땅히 담당해야 할 일이었다. 여기서 '굳게 하여'(에피스테리존테스)라는 말은 신약 성경 중 본서(행 15:32,41)에만 나타나는데, 이는 '강하게 하다', '안정시키다'는 뜻으로서 핍박과 환난 중에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끝까지 신앙의 인내를 하도록 격려한것을 가리킨다.
우리가…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 당시 루스드라, 이고니온, 비시디아의 안디옥 등 갈라디아 지방의 교인들은 점증되는 핍박에 동요하여 믿음을 저버릴 수 있는 소지가 있었다(갈 3:1). 이러한 성도들에게 바울은 고난과 환난을 겪어야만 했던 자신의 선강제 경험을 바탕으로 성도에게는 필연적으로 핍박이 따르며 그것을 굳건히 이겨야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마귀의 종된 세상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므로 또한 예수께 속한 자들을 미워하고 핍박한다(눅 6:22). 따라서 성도들은 그같은 환난을 이상히 여길 것이 아니라 도리어 더욱 예수를 의지하는 가운데 신앙의 인내를 하여야 하는 것이다(약 1:2-4). 한편 여기서 '우리'라는 말은 한 시대의 특정한 성도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에 걸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성도를 가리킨다(딤후 3:12). 이를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에 동참하는 성도가 당연히 감당해야 할 고난의 깊은 의미를 깨닫고 우리의 믿음을 보다 굳게 세우는 경건의 훈련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14:23 장로들을 택하여. - 성도들의 지속적이고 올바른 신앙 생활과 그 조직의 연대를 위해 지도자를 세우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장로를 세우는 것은 교회 제도의 시초로서 교회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여기서 '택하여'(케이로토네산테스)라는 말은 '손을 들어 투표하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것이 장로의 선출에 있어 성도들의 선택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두 사도의 선택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일곱 집사의 경우와 같이(행 6:5,6) 성도들이 선택하고 두 사도가 안수한 것으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편 '장로'란 직분과 역할에 대하여서는 행 11:30 주석에서 비교적 상세히 다루었으니 참조하라.
금식 기도하며…부탁하고. - 성도들 가운데 장로를 세우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따라서 두 사도는 전도 여행을 떠나기 앞서 금식과 기도로써 준비했던 것(행 13:3) 처럼 이번에도 장로를 택하는 일을 위해 그리하였다. 그리고 나서 두 사도는 세움을 받은 장로들이 견고한 믿음 안에서 성도들을 잘 돌보도록 부탁하였던 것이다.
14:24,25 비시디아 가운데로…내려가서. - 두 사도는 계속 복음을 담대히 전하면서 다시금 처음 왔던 길을 되돌아 갈라디아 지방의 최남단 지방인 비시디아(행 13:14)로 가서 이 지역을 북에서 남으로 가로 질러 밤빌리아(행 13:13)로 갔다. 특히 그들은 버가에서 잠시 여행을 중단하고 그곳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곳은 전에 그들이 머물렀던 지역이지만 요한 마가가 돌아간 사건도 있고 해서 효과적인 전도사역을 못했던 곳이다(행 13:13,14). 그러므로 이제 돌아가는 길에 이곳에서 집중적으로 전도한 것이다. 한편 앗달리아(Attalia)는 버가의 서남쪽으로 약 20km의 거리에 위치한 항구 도시로서, 이 곳은 버가모의 왕이었던 앗달루스 2세(Attalus II, B.C. 159-138)가 건설하여 자신의 이름을 붙인 곳이다. 이곳은 지정학적으로 애굽과 수리아 지방으로 곧장 진출할 수 있는 중요한 항구이기도 하다.
14:26 거기서 배타고 안디옥에‥‥부탁하던 곳이라. - 마침내 두 사도는 제 1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자신들을 선교사로 파송한 수리아 안디옥 교회(행 13:1-3)로 돌아왔다. 두 사도는 2년여(A.D. 47-49)에 걸친 전도 기간을 통해 약 2천km의 거리를 여행하었는데, 그 결과 그곳에 거주하는 유대인과 많은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직접 들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특별히 여기서 '은혜'란 구체적으로 성령의 능력과 효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이 두 사도의 파송에 있어 그 방법과 결과를 모두 하나님의 돌보심에 전적으로 맡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4:27 교회를 모아. - 바울과 바나바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던 안디옥 교회 사람들은 그들이 돌아오자 그 전도 결과를 알기 위해 이처럼 특별히 교회의 공식적인 모임을 가졌다. 이러한 사실은 두 사도의 파송 후 그 동안 복음의 세계적 전파를 위하여 기도로써 성원하며 또한 그 가능성과 당위성에 대해서 그들이 맡은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 준다.
하나님이 함께‥‥여신 것을 고하고. - 안디옥 교회에 돌아온 두 사도의 선교 보고는 매우 놀라운 것으로서 그들은 하나님이 사역 중에 자신들과 함께 하며 권능을 베풀어 주신 일과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의 길을 활짝 열어주신 것에 대하여 말했다. 여기서 '고하고'(아넹겔론)라는 말은 미완료 시제로서 두 사도가 매우 오랜 시간 동안 자세히 선교 활동과 그 성과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아울러 '문'이라는 말은 바울이 자주 사용하는 은유적 표현이다(고전 16:9; 고후 2:12; 골 4:3). 즉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이 열렸다'는 것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실제적으로 전파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해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뜻한다.
14:28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 안디옥 교회가 시작한 이방인을 위한 복음 전파가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옴으로써 이제 안디옥은 초기 복음 전도 활동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다. 그리고 바울과 바나바, 두 사도는 이 곳에서 다시 새로운 전도 여행을 구상하면서 약 1년 정도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Hervey, Earle, Whitela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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