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빙글리는 프로테스탄트 진영의 선봉에 서서 개혁을 저지하려는 가톨릭 주들과의 전쟁도 불사하였다. 물론 폭력을 사용하면서까지 개혁을 추진하려 했다는 점에서 루터파와 가톨릭 양측으로부터의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츠빙글리와 취리히 시민들은 자유로운 복음 전파와 용병제와 용병제에 따른 연금제도를 철폐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에 개혁을 강력하게 저지하고 나서는 가톨릭 주들과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였다. 처음에는 츠빙글리 진영이 전쟁에서 유리했음에도 불구하고, 2차 카펠 전투에서는 수적 열세를 극복한 가톨릭 주들이 배나 되는 병사들을 동원하여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고, 츠빙글리도 전사하고 말았다.
짧은 생애 가운데 츠빙글리의 개혁은 츠빙글리의 죽음으로 동력을 상실할 만도 했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츠빙글리의 생전에는 개혁운동이 많은 난관에 부딪혔다. 하지만 그의 사후에 후계자 불링거를 통해서, 그리고 제네바의 칼빈과 같은 개혁자들을 통해서 수용되고 큰 힘을 갖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구분선 아래의 내용을 타자 쳐서 올린다.
출처: 조용석, 『츠빙글리, 개혁을 위해 말씀의 검을 들다』(서울: 익투스, 2014), pp. 50~65.
전쟁의 시작
베른 논쟁 이후 위기감을 느낀 가톨릭 주들은 취리히, 베른과 전쟁을 치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무력을 통해서라도 츠빙글리 종교개혁운동을 저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특히 취리히에 대한 가톨릭 주들의 반감은 극에 달했다. 그러던 중 취리히 출신의 설교자 야콥 카이저(Jacob Kaiser)가 가톨릭 주인 슈비츠(Schwyz)에서 처형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1529년 5월 29일). 취리히와 베른은 이 사건을 가톨릭 주들의 선전포고라고 생각했다. 이에 취리히와 베른 소속의 3만 명의 병사들이 9천 명 남짓한 가톨릭 주 병사들과 전투를 벌였다. 가톨릭 주들의 전세가 전적으로 불리한 전쟁이었다. 따라서 이 전투는 츠빙글리 진영의 승리로 장식될 수 있었지만, 베른의 미온적 태도로 인하여 츠빙글리 진영은 더 이상의 공세가 불가능했다. 결국 가톨릭 주를 지지하던 오스트리아가 전세를 판단하고 지원을 포기해 양측은 평화협상에 들어갔다.
츠빙글리는 가톨릭 주를 향하여 로마 가톨릭의 간섭을 받지 않는 자유로운 복음 선포와 용병제에 근거한 연금제도를 철폐할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관철되지 않았고 이에 츠빙글리는 크게 절망하였다.
루터와의 성찬론 논쟁
베른 논쟁을 계기로 츠빙글리는 스위스 연방뿐만 아니라 유럽 대륙 전체에 종교개혁 프로그램을 확산시키려고 시도하였다. 그리고 정치적 후원자를 물색하던 중 독일 헤센 주의 필립 공작(Philipp von Hessen, 1504-1567)을 만나게 된다. 그는 반교황적 정서를 지닌 제후로서 분열된 개신교회 진영의 일치를 통하여 자신만의 고유한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고자 노력하던 중이었다. 16세기 당시 종교개혁운동은 제후 또는 의회라는 정치적 후원자 및 단체 없이는 관철될 수 없었다(중략).
루터는 츠빙글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적 임재를 부정한 그의 신학의 스승 칼슈타트(Andrea Karlstadt, 1486-1541)의 노선에 동조하는 사람, 따라서 성례전의 능력을 부정하는 사람이라고 판단했다. 반면에 츠빙글리는 루터가 아직까지도 로마 가톨릭의 미신적 잔재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라고 폄하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그렇게도 중요한 문제인지 질문한다. 두 사람의 주장은 ‘임재’와 ‘상징’의 대립으로 축약된다. 임재인가, 상징인가? 루터는 중세 봉건 제후들의 정치적 후원을 받는 사람이고, 츠빙글리는 시민의회의 지지를 받는 사람이다. 봉건 제후들은 장원제도(1촌락 1장원의 구조로, 농노는 영주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주는 대신 신변보호를 받고 토지 이용권을 인정받음)를 유지하기 위하여 농민전쟁(1524년 독일 농민들이 일으킨 민중항쟁)이 발발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반면에 스위스의 자치도시들은 독일 지역의 한자(Hansa)동맹 같은 조합이나 부흥한 상업도시는 없었지만, 소규모 상공업자들로 구성된 자치회의가 있었다. 다시 말하면 교황 체제에 반대하는 봉건 제후들은 루터의 공재설을, 제후의 통치에서 벗어난 중세도시들은 츠빙글리의 상징설을 지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중략).
루터의 견해처럼 성찬식에 그리스도의 육신이 임재한다면 성찬식은 화려해질 수밖에 없다. 성찬식은 하나님의 성육신 사건이 반복·재현되는 곳이며, 성육신 사건을 목격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사건을 체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츠빙글리의 견해처럼 그리스도의 구원사건을 상징하거나 이를 기념하는 의식이라면 성찬식은 간소해져야 한다. 성찬이 베풀어지는 장소는 주술적 능력이 지배하는 신적인 장소가 아니라 인간이 일상적 삶을 살아가는 이 세상 한가운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찬식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그리스도를 향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앞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거룩한 삶을 살 것을 맹세해야 한다.
당시 츠빙글리는 신성로마제국의 교황과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를 지지하는 세력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정치적으로 후원하고 있으며, 필립 공작이 이를 반대하는 세력들을 규합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자신의 종교개혁 프로그램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반교황·반오스트리아 세력을 규합하고 있는 필립 공작과 정치적 협력관계를 구축해 나갔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가 마르부르크 종교회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는 교황과 오스트리아에게 저항하기 위하여 프랑스와의 동맹을 추진하기도 했는데, 이는 수포로 돌아갔다. 최종적으로 평가하자면, 츠빙글리는 열정에 비해 외교정치적인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당시 스위스 연방의 정치적 입지에 비해 츠빙글리의 정치적 이상이 지나치게 앞섰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중략).
마르부르크 종교회담이 결렬된 이후 루터와 츠빙글리 양 진영은 각자 행동에 돌입했다. 1530년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 황제는 분열된 개신교회의 일치를 위하여 아우크스부르크 회의를 개최했는데, 이는 실제로 츠빙글리를 배제한 채 루터주의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중략). 츠빙글리는 이에 저항하며 루터주의와 대립되는 자신의 종교개혁 사상을 정리한 「신앙의 해명(Fidei ratio)」을 작성, 발표했다(중략).
루터의 칭의론이 하나님의 은총과 신앙을 통한 율법적 신앙으로부터의 해방을 꿈꾸었다면, 츠빙글리의 하나님 절대주권사상은 신앙생활 속에서 인간적인 것을 배재하는 것을 지향하며 칼빈의 용어를 빌리자면 ‘성화의 삶’을 추구했다. 교리적 개혁을 주장한 루터와 공동체적 개혁을 단행한 츠빙글리의 신학적 강조점이 다른 이유가 여기서 약간이나마 해명될 수 있다. 루터와 츠빙글리의 대립은 이후에 나타난 루터교회와 개혁교회의 대립, 즉 루터주의와 칼빈주의 대립의 시작을 의미한다. 「신앙의 해명」속에는 그가 추구한 하나님 중심주의가 드러나며 루터의 칭의론이 미처 완수하지 못한 로마 가톨릭의 잔재를 소멸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 특히 그는 루터의 공재설이야말로 로마 가톨릭의 흔적을 아직까지도 제거하지 못한 단점이라고 파악했다(중략).
전쟁과 죽음
1530년 초부터 츠빙글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스위스 연방의 종교개혁 완성이라는 목표를 향하여 열정적으로 노력하기 시작했다. 제1차 카펠 평화조약에 따르면, 가톨릭 주들은 자기 영토 내에서 복음의 자유로운 선포를 허용할 의무가 있었다. 츠빙글리는 성경적 설교가 착취적인 연금 수혜자들인 지배계층을 변화시킬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5개 가톨릭 주가 츠빙글리의 종교개혁 프로그램을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취리히를 중심으로 한 프로테스탄트 진영과 가톨릭 주들은 계속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츠빙글리는 5개 가톨릭 주에 대한 전면적인 무장공격을 주장했고, 그의 주장을 프로테스탄트 주들이 수용하면서 제2차 카펠 전투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미 높은 물가로 시달리고 있던 때에 프로테스탄트 진영은 식량봉쇄정책을 실시했다. 츠빙글리의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만일 전쟁이 일어나면 반드시 자기들이 승리하리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봉쇄정책은 실패했으며, 중재협상이 진척되면서 가톨릭 주들은 점점 자신감을 회복해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가톨릭 주들이 행동을 취하기 시작하여, 1531년 10월 9일 취리히에 공식적인 선전포고를 했다. 1531년 10월 11일 3,500명의 취리히 병사들은 카펠 부근에서 거의 두 배에 가까운 가톨릭 주 병사들과 마주했고, 한 시간도 채 되지 않는 비교적 짧은 교전으로 전투는 종결되었다. 25명의 성직자들을 포함한 500명의 취리히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고, 약 100여명의 가톨릭 병사들이 전사했다. 츠빙글리는 이 전투에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다가 전사하고 말았다.
츠빙글리가 전사한 뒤 그의 죽음은 수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루터교회와 로마 가톨릭의 비난이 물밀듯 밀려왔다. 루터는 츠빙글리가 전사했을 때 스위스의 민족적 기질이 매우 호전적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그의 죽음은 폭력적 수단으로 종교개혁을 성취하려 했던 츠빙글리의 계획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생각했다. 당시에 지배적이었던 가톨릭 측의 해석 역시 이 부분에서는 루터와 일치했으며, 이는 츠빙글리의 이미지를 형성하는데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한다'(마 26:52)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의 죽음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합리화하는데 사용되었다.
1531년 츠빙글리의 후계자로 선출된 불링거는 츠빙글리를 추앙하며 이와 같은 비난으로부터 선배개혁자를 보호하고자 노력했다. 이 해에 츠빙글리를 진심으로 따르며 지도자로 생각했던 바젤의 개혁자 외콜람파드 마저도 충격으로 사망했다. 만일 그가 죽지 않았다면 취리히 그로스뮌스터 대성당 주임사제로 청빙받았을지 모른다. 그로스뮌스터 대성당에는 불링거가 주임사제로 부임하여 츠빙글리의 목회사역을 계승했다. 그는 매우 온화한 태도로 주위 사람들을 수용하며 헌신적으로 사역했다. 심지어 불링거는 유산을 전혀 남기지 않고 전사한 츠빙글리의 유족들을 자신의 집에서 살게 할 정도로 전임자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보여 주었다. 츠빙글리에게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로마 가톨릭과의 단절 여부이며, 로마 가톨릭의 종교적 이념과 결합된 용병제도에 대한 입장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가 스위스 연방 내에서 로마 가톨릭의 통치체제를 고수했던 칸톤과의 전쟁을 감수했다는 사실은 그의 평화주의적인 이상이 매우 현실적으로 적용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츠빙글리에게 전쟁은 신앙의 자유와 부조리한 용병제도의 철폐를 위한, 더 나아가 로마 가톨릭의 종교적 이념에 기초한 봉건적 체제에서 해방되기 위하여 취한, 불가피한 물리적 조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츠빙글리 종교개혁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면, 그의 성례전론은 사회의 기독교화를 실현하기 위한 신학적 담론이었다는 사실이 충분히 암시된다. 개신교도에 대한 박해 속에서 참된 신앙의 자유를 수호해야하는 상황이었다면, 성례전에 대한 신앙적 의미를 강조하며 이를 루터 혹은 부써, 칼빈과 같이 교회치리의 수단으로 사용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츠빙글리에게 중요한 신학적·정치적인 과제는 로마가톨릭의 봉건적 이념체제로부터 해방된 시민자치 권력의 수립이었기 때문에 성례전 역시 그에게는 정치적인 의미를 지닌 신앙고백적인 행위로 인식되었다. 한마디로 성례전은 하나님의 은총과 고백의 표시라고 강조한 그의 신학적 입장은 성례전을 은총의 수단으로 이해하는 로마 가톨릭, 그리고 가톨릭의 신학적 전통을 전적으로 포기하지 않았던 루터교회와 격렬하게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첫댓글 인용된 글의 저자가 전쟁 이야기 사이에 루터와의 성찬론을 배치했군요. 이는 츠빙글리의 인생이 카톨릭은 물론이고, 카톨릭이 아닌, 재세례파나 루터 등과도 갈등하는 외로운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나마 칼빈의 후계자들인 칼빈주의자들에게 고마운 것은 칼빈주의자들이 츠빙글리의 신학 및 츠빙글리 후계자들과 화합하고 연합을 했다는 것입니다.
칼빈주의자들의 동조가 있기 전 츠빙글리는 마치 서부 영화의 장고 처럼 혼자서 양 측 또는 세 측(카톨릭, 재세례파, 루터파)과 홀로 싸운 것입니다. 고원무립 상태에서 분투한 츠빌글리의 치열한 삶에 경의를 표합니다.
좋은 댓글에 공감하며 감사드립니다.
츠빙글리의 삶의 핵심에 대한 좋은 댓글에 매우 공감합니다.
슈비츠 Schwyz
요약: 스위스 중부에 있는 주. 무오타 강과 질 강 계곡들이 이곳을 가로지른다. 최대도시는 주도인 슈비츠와 순례 중심지인 아인지델른이다. 주로 낙농지역으로 이 주의 갈색 소가 유명하며, 직물업·가구제조업 같은 공업활동이 슈비츠 시와 취리히 호에 집중되어 있다.
... 1386년 젬파흐에서 오스트리아를 누르고 승리한 후 슈비츠는 국경을 크게 확장했다. 종교개혁에 반대하여 카펠 전투(1531)에 참가했는데, 이 전투에서 스위스의 종교개혁 지도자 울리히 츠빙글리가 패배했다. 1798년 헬베티아 공화국의 일부가 되었고, 1803년에는 독립 주로서의 지위를 다시 찾았다. 1845년 존더분트(가톨릭 분리주의자 연맹)에 합류했다(→ 카펠 전쟁).
출처: Daum 백과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12s4378a
츠빙글리가 패배한 카펠 전투가 일어난 지역으로 스위스와 종교개혁의 역사에서 나름 의미를 갖는 것 같습니다.
@노베 공감합니다.
카펠 전쟁 Kappel Wars
요약: 스위스의 종교개혁기에 일어난 2차례의 전투(1529, 1531).
그 이름은 취리히 주와 추크 주 사이의 접경지역에 있는 카펠 수도원에서 따온 것이다.
첫번째 전투는 루체른·우리·슈비츠·운터발덴·추크 등 스위스 연방 내 5개 가톨릭 주들이 크리스티안 동맹을 결성하면서 발생했다. 이들 5개 주는 취리히가 공동지배지역(common lordships : 스위스 연방에 의해 공동으로 통치되는 영토)에 프로테스탄트를 확산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었다. 그러자 취리히가 크리스티안 동맹을 공격하기 위해 원정군을 파견했다. 그러나 양측간의 전투는 미미한 정도에서 그쳤으며 1529년 6월 26일 카펠에서 휴전이 조인되었다.
이어 가톨릭 주들이 오스트리아와의 동맹관계를 단절하고 공동지배지역에 종교적 자유를 인정하기로 하는 내용의 협정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연방 내 5개 가톨릭 주들은 사실상 프로테스탄티즘이 투르가우(공동지배지역 가운데 하나)에서 강요되고 있다고 여겼으며, 이에 따라 1531년 10월 취리히에 갑작스런 선전포고를 했다. 황급히 소집된 취리히 군대는 이외르크 괼들리의 지휘 아래 전투에 임했으나
그해 10월 11일 카펠 전투에서 패했으며, 취리히의 프로테스탄트 지도자 울리히 츠빙글리가 죽었다.
11월 24일 제2차 카펠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이 조약은 논란이 되어왔던 공동지배지역 전역에 걸쳐 가톨릭측의 입장을 지지하는 내용이었다.
출처: Daum 백과
@장코뱅 카펠 전투에 대해서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어 좋네요. 물리적 충돌에서는 가톨릭이 승리했지만, 전체 결과는 개신교의 승리로 돌아간 것 같습니다.
@코람데오 네, 공감합니다.
헤센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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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센 Hessen
요약: 독일 중서부에 있는 주. Hesse라고도 함
... 15세기에 들어와 2차례 분할되기도 했으나 헤센에서 가장 위대한 통치자였던 필리프(1509~67 재위)가 재통일했다. 필리프는 1526년 루터교를 헤센에 소개했으며, 이듬해 마르부르크에 유럽 최초의 개신교 대학교를 설립했다. 필리프는 헤센을 헤센카셀·헤센다름슈타트·헤센라인펠스·헤센마르부르크로 분할해 자신의 네 아들들에게 주도록 유언했다. 라인펠스와 마르부르크는 1583, 1648년에 각각 다른 두 지역에 흡수되었다(→ 헤센다름슈타트, 헤센카셀).
출처: Daum 백과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25h0542b
유럽 최초의 개신교 대학교가 헤센에서 설립되었군요. 종교개혁의 성과 중 하나로 보입니다.
합스부르크가
합스부르크 가(독일어: Haus Habsburg) 혹은 오스트리아 가문은 유럽 왕실 가문들 중 가장 영향력있던 가문 중 하나이다. 1438년부터 1806년까지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는 연달아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나왔다. 특히 오스트리아의 황실을 거의 600년 동안 지배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하 아래 링크 참조
https://ko.wikipedia.org/wiki/%ED%95%A9%EC%8A%A4%EB%B6%80%EB%A5%B4%ED%81%AC%EA%B0%80
중학교 사회, 고교 세계사는 물론이고 종교개혁과 유럽 역사에 단골로 등장하는 왕가입니다. 베르사이유의 장미에 나오는 마리 앙트와넷트도 합스부르크 출신이지요.
츠빙글리의 숭고한 삶과 종교개혁의 역사에 대해 좋은 포스팅을 올려 주셔서 유익하다고 생각합니다.
네,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