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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빙글리 츠빙글리의 종교개혁(2) 가톨릭 주와의 전쟁과 루터와의 성찬론 논쟁
코람데오 추천 4 조회 293 24.06.26 07:49 댓글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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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24.06.26 09:13

    첫댓글 인용된 글의 저자가 전쟁 이야기 사이에 루터와의 성찬론을 배치했군요. 이는 츠빙글리의 인생이 카톨릭은 물론이고, 카톨릭이 아닌, 재세례파나 루터 등과도 갈등하는 외로운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나마 칼빈의 후계자들인 칼빈주의자들에게 고마운 것은 칼빈주의자들이 츠빙글리의 신학 및 츠빙글리 후계자들과 화합하고 연합을 했다는 것입니다.

    칼빈주의자들의 동조가 있기 전 츠빙글리는 마치 서부 영화의 장고 처럼 혼자서 양 측 또는 세 측(카톨릭, 재세례파, 루터파)과 홀로 싸운 것입니다. 고원무립 상태에서 분투한 츠빌글리의 치열한 삶에 경의를 표합니다.

  • 작성자 24.06.26 10:32

    좋은 댓글에 공감하며 감사드립니다.

  • 24.06.26 16:02

    츠빙글리의 삶의 핵심에 대한 좋은 댓글에 매우 공감합니다.

  • 24.06.26 09:13

    슈비츠 Schwyz

    요약: 스위스 중부에 있는 주. 무오타 강과 질 강 계곡들이 이곳을 가로지른다. 최대도시는 주도인 슈비츠와 순례 중심지인 아인지델른이다. 주로 낙농지역으로 이 주의 갈색 소가 유명하며, 직물업·가구제조업 같은 공업활동이 슈비츠 시와 취리히 호에 집중되어 있다.

    ... 1386년 젬파흐에서 오스트리아를 누르고 승리한 후 슈비츠는 국경을 크게 확장했다. 종교개혁에 반대하여 카펠 전투(1531)에 참가했는데, 이 전투에서 스위스의 종교개혁 지도자 울리히 츠빙글리가 패배했다. 1798년 헬베티아 공화국의 일부가 되었고, 1803년에는 독립 주로서의 지위를 다시 찾았다. 1845년 존더분트(가톨릭 분리주의자 연맹)에 합류했다(→ 카펠 전쟁).

    출처: Daum 백과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12s4378a

  • 24.06.26 16:11

    츠빙글리가 패배한 카펠 전투가 일어난 지역으로 스위스와 종교개혁의 역사에서 나름 의미를 갖는 것 같습니다.

  • 24.06.27 07:56

    @노베 공감합니다.

  • 24.06.26 09:01

    카펠 전쟁 Kappel Wars

    요약: 스위스의 종교개혁기에 일어난 2차례의 전투(1529, 1531).

    그 이름은 취리히 주와 추크 주 사이의 접경지역에 있는 카펠 수도원에서 따온 것이다.

    첫번째 전투는 루체른·우리·슈비츠·운터발덴·추크 등 스위스 연방 내 5개 가톨릭 주들이 크리스티안 동맹을 결성하면서 발생했다. 이들 5개 주는 취리히가 공동지배지역(common lordships : 스위스 연방에 의해 공동으로 통치되는 영토)에 프로테스탄트를 확산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었다. 그러자 취리히가 크리스티안 동맹을 공격하기 위해 원정군을 파견했다. 그러나 양측간의 전투는 미미한 정도에서 그쳤으며 1529년 6월 26일 카펠에서 휴전이 조인되었다.

    이어 가톨릭 주들이 오스트리아와의 동맹관계를 단절하고 공동지배지역에 종교적 자유를 인정하기로 하는 내용의 협정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연방 내 5개 가톨릭 주들은 사실상 프로테스탄티즘이 투르가우(공동지배지역 가운데 하나)에서 강요되고 있다고 여겼으며, 이에 따라 1531년 10월 취리히에 갑작스런 선전포고를 했다. 황급히 소집된 취리히 군대는 이외르크 괼들리의 지휘 아래 전투에 임했으나

  • 24.06.26 09:02

    그해 10월 11일 카펠 전투에서 패했으며, 취리히의 프로테스탄트 지도자 울리히 츠빙글리가 죽었다.

    11월 24일 제2차 카펠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이 조약은 논란이 되어왔던 공동지배지역 전역에 걸쳐 가톨릭측의 입장을 지지하는 내용이었다.

    출처: Daum 백과

  • 작성자 24.06.26 11:18

    @장코뱅 카펠 전투에 대해서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어 좋네요. 물리적 충돌에서는 가톨릭이 승리했지만, 전체 결과는 개신교의 승리로 돌아간 것 같습니다.

  • 24.06.26 16:13

    @코람데오 네, 공감합니다.

  • 24.06.26 09:13

    헤센 주
    ---------------

    헤센 Hessen

    요약: 독일 중서부에 있는 주. Hesse라고도 함

    ... 15세기에 들어와 2차례 분할되기도 했으나 헤센에서 가장 위대한 통치자였던 필리프(1509~67 재위)가 재통일했다. 필리프는 1526년 루터교를 헤센에 소개했으며, 이듬해 마르부르크에 유럽 최초의 개신교 대학교를 설립했다. 필리프는 헤센을 헤센카셀·헤센다름슈타트·헤센라인펠스·헤센마르부르크로 분할해 자신의 네 아들들에게 주도록 유언했다. 라인펠스와 마르부르크는 1583, 1648년에 각각 다른 두 지역에 흡수되었다(→ 헤센다름슈타트, 헤센카셀).

    출처: Daum 백과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25h0542b

  • 24.06.26 16:18

    유럽 최초의 개신교 대학교가 헤센에서 설립되었군요. 종교개혁의 성과 중 하나로 보입니다.

  • 24.06.26 09:14

    합스부르크가

    합스부르크 가(독일어: Haus Habsburg) 혹은 오스트리아 가문은 유럽 왕실 가문들 중 가장 영향력있던 가문 중 하나이다. 1438년부터 1806년까지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는 연달아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나왔다. 특히 오스트리아의 황실을 거의 600년 동안 지배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하 아래 링크 참조

    https://ko.wikipedia.org/wiki/%ED%95%A9%EC%8A%A4%EB%B6%80%EB%A5%B4%ED%81%AC%EA%B0%80

  • 24.06.26 16:20

    중학교 사회, 고교 세계사는 물론이고 종교개혁과 유럽 역사에 단골로 등장하는 왕가입니다. 베르사이유의 장미에 나오는 마리 앙트와넷트도 합스부르크 출신이지요.

  • 24.06.26 16:32

    츠빙글리의 숭고한 삶과 종교개혁의 역사에 대해 좋은 포스팅을 올려 주셔서 유익하다고 생각합니다.

  • 24.06.26 16:43

    네,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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