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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봉계(元鳳溪)
당골, 내당 2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 마을유래
1) 당골(堂谷) : 해발 550m의 고지대에 자리한 원봉계 마을은 전라북도 무주로 가는 길목이다. 북서쪽의 삼봉산[1,254m]이 무주와 경계를 이루며, 동쪽은 대덕산, 초점산에 이어지는 거대한 산줄기로 막혀있다. 서쪽 산기슭에 마을이 형성되어 동쪽으로 입구가 나 있으며, 고지대로부터 차례로 양지담, 웃담, 아랫담이라 하고, 이웃한 내당은 샛담[새터]이라 부른다. 마을 앞으로는 대덕산에서 발원한 황강천이 지방도 1089호선[고제로]을 따라 흐른다. 북으로는 원기, 남으로는 봉산리 와룡 마을과 접하며, 동쪽의 땀내기재를 넘으면 웅양면 신촌리로 통한다. 마을로부터 정남 방향의 면 소재지[봉산리]와는 약 7km의 거리가 있다. 본 마을인 원봉계는 옛날 ‘당곡(堂谷)’이라 하였고 지금도 ‘당골[땅골, 당꼴]’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신라시대에 절이 있어 마을 근처 골짜기 마다 불당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절이 없어지고 엄씨가 처음 마을을 열었으며, 1710년경부터 성주(星州) 이씨(李氏)와 진양(晋陽) 하씨(河氏)가 들어와 지금까지 살고 있다. ‘당골’이 ‘원봉계(元鳳溪)’로 불리는 것은 1837년 이 마을에서 태어나 동학농민전쟁 때 공을 세웠다는 봉서(鳳棲) 하종호(河宗浩)의 호에서 비롯된 것이라 한다.
2) 내당(內堂) : 내당은 한국전쟁 후 시행한 난민정책 사업으로 미국 정부와 기독교재단의 지원을 받아 조성된 마을이다. 1960년 경 토지 300여 평에 집을 지어 약 50여 세대에게 제공하였다 한다. 당초에는 당골 안쪽에 있어‘안당골’이라 부르다가, 이를 한자어로 표기하여‘내당(內堂)’이 되었다. 1970~1980년대까지는 배추 등 고랭지 채소와 인삼을 재배하였으나 이후로 사과를 경작하여 특산물로 소득을 올리고 있다. 거창군에서도 2011년 내당 마을 위편에 ‘거창사과테마파크’를 조성하여 이곳이 거창사과의 주산지임을 알리고 있다.
□ 산천지명
◦ 삼봉산(三峰山) : 고제면 봉계리와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덕지리 사이에 위치한 산이다 (고도 : 1,254m), 덕유산에서 산줄기가 북동쪽으로 이어져 삼봉산이 되며 북동쪽에 대덕산이 있다. 산 남사면에 150여 년 전에 창건되었다고 알려진 금봉암이 있다. 삼봉산은 덕유산이 시작되는 첫머리에 있어 덕유 원봉이라고 한다. 『거창군사』에 의하면 거창의 진산으로 봉우리는 3개이며, 가뭄이 들 때면 삼봉산 금봉암에 있는 용머리 바위에서 기우제를 올렸다고 한다. 『세종실록지리지』(거창)에 “삼봉산은 현 북쪽에 있다.”라고 하여 일찍부터 거창의 중요한 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여지도서』(거창)에도 “관아의 북쪽 50리에 있다. 무주부 대덕산에서 서쪽으로 뻗어 나온 산줄기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해동지도』(거창)에 우두치 서쪽, 무주와의 경계에 삼봉산이 묘사된 것을 비롯해 『조선지도』(거창), 『대동여지도』(17첩 3면) 등에 부의 경계에 산이 표기되어 있다. 산 지명은 봉우리가 3개인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 땀내기재 : 마을 앞 동쪽 내 건너 2km가 넘는 긴 잿길이다. 웅양면 신촌리로 통한다.
◦ 산막골 : 삼봉산 밑 마을 서쪽의 큰 골짜기, 동학혁명 때 움악을 짓고 피난했던 곳이다.
◦ 산재골 : 마을 뒤 북동쪽 100m에 있다. 섣달 그믐날 산제를 지내던 곳이다.
◦ 매봉산 : 마을 서쪽 뒤 200m에 있다. 옛날 매 사냥 하던 곳이라하다.
◦ 독메산 : 마을 서쪽 150m에 있는 산봉우리로 벌통같다 하여 벌봉산이라고도 한다.
◦ 돌배나무골 : 마을 동쪽 400m 어귀에 돌배나무가 있었는데 30년 전에 없어지고 그앞 계곡을 배나무정이라 한다.
◦ 정자목 : 마을 남동쪽에 있는 둘레가 7m나 되는 느티나무다. 마을 사람들이 쉬는 곳이기도 하다.
◦ 두둑길 : 마을 동쪽 600m 앞 시냇물 가에 있다. 논 5마지기의 두둑길로 길이가 600m나 되며 길다고 하여 진배미길이라고도 한다.
◦ 거머골 : 마을뒤 북서쪽 삼봉산 밑의 긴 골짜기를 말하며 옛날 쇠를 녹이는 가마솥을 걸었다하여 가마골 이라 한다.
□ 마을의 문화자원
◦ 영모재(永慕齋) : 원봉계 마을 북서쪽 100m 지점 매봉산 기슭에 있다.
관찰사 하형을 기려 진양인 하한기(河漢耆)의 묘비가 있는 산기슭에 후손 하진식(河晉植)의 주선으로 1964년 세운 하씨들의 종실로 목조와가인 제각과 목조함석지붕의 종실로 구성되어 있다. 재각 뒤에 단종 폐위에 벼슬을 버린 선조를 위하여 불이사(不二祠)를 지었다.
영모재는 세로방향으로 긴 직사각형의 대지에 대문과 재실 그리고 사당을 일렬배치하고 담장을 둘렀는데, 대문과 재실은 축선상에 배치하였으나 사당은 축선에서 좌측으로 약간 벗어나 있다.
좌·우의 담장에 붙여 두 개의 계단을 시설하여 사당에 올라가도록 하였고 내삼문은 두지 않았다.
담장은 최근 들어 시멘트 담장으로 교체된 것으로 보인다. 담장 앞쪽에 꾸민 화단에는 키가 낮은 나무들이 심어져 있고 대문의 옆에는 충효전가(忠孝傳家)라고 쓴 비가 세워져 있는데 배열된 건물군은 배경이 되는 뒷산과 멋있는 조화를 이룬다.
영모재는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규모로 전면에 퇴칸을 둔 전퇴집이다.
실의 구성은 좌로부터 방-방-마루-방의 순으로 배열하였는데, 이 지역에서 보이는 칸을 조절하여 방의 크기를 다르게 하는 수법은 쓰지 않았으므로 방의 크기는 모두 같다.
방에는 벽장 등 바깥쪽으로 돌출되는 시설은 전혀 하지 않았고 마루도 현재는 정면에 문을 달고 반자로 상부를 막는 등 완전히 방으로 개조하여 사용하고 있다.
기단은 외피 전체에 시멘트를 발라놓아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높이로 볼 때 자연석을 2~3단 정도 쌓아 조성한 것으로 보이며 좌측 두 번째 칸의 전면에 1단의 계단을 시설하여 기단면에 오르게 하였다. 초석에도 시멘트를 발라놓았다.
기단 위에는 사각형의 크고 넓적한 돌들로 초석을 놓고 기둥을 세웠는데 초석의 크기와 높이는 어느 정도 일정하며 그 위에 시멘트를 발라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크기는 비슷해 보인다.
기둥은 모두 각기둥을 사용하였다. 건물의 규모에 비할 때 단면의 크기는 건물의 규모에 비해 다소 약하며 기둥을 비롯한 목부재에는 모두 약하지만 붉은 색이 칠해져 있다. 인방재는 정면에서 상인방과 하인방만을 쓰고 있는데 정면에서 문의 위·아래틀로 사용되고 있다.
건물 전체에 중인방은 사용하고 있지 않고 양측면과 배면에는 하방과 창방만을 시설하여 상부하중에 대한 기둥의 부담이 매우 큰데, 아마 최근에 보수하면서 기둥 사이를 모두 벽체로 처리한 것으로 보인다. 가로재의 버팀이 없는 건물은 벽체가 일부를 부담을 하기는 하지만 상부하중이 모두 기둥에 쏠리게 되므로 건물의 쇄락속도가 아주 빠르게 된다.
그나마 단면의 크기가 다소 큰 기둥을 사용한 것은 다행한 일이며 문선을 제외한 벽선 등 벽체에 세우는 세로부재는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문은 정면과 청방간에만 시설하고 좌·우측면과 배면에는 문이 전혀 시설되어 있지 않은데 이 또한 최근 보수 시에 정면 칸을 제외한 3면을 모두 벽체로 처리하면서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마루부분을 방으로 만들어 상부에 반자로 막아버렸고 방에도 모두 반자를 시설하여 상부의 가구형식을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지붕의 구조가 합각형식이며 전면에 퇴칸을 둔 전퇴집인 점을 고려하면 가구는 인근의 다른 재실들과 같은 형태인 5량 구조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고 툇보를 연결한 대들보 위에 각대공을 세워 구성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처마는 서까래만 쓴 홑처마에 지붕은 합각지붕인데, 처마의 앙곡과 지붕의 마루곡들은 다소 두어 건물의 형태는 안정되어 보인다.
사당인 불이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규모로 전면에 퇴칸을 둔 일반적인 형식으로 사당의 격식에 맞도록 정형의 기단을 시설한 위에 원형으로 다듬은 초석을 놓고 원기둥을 세웠다. 기둥은 아랫부분은 화강석을 원형으로 다듬어 사용하였고 윗부분에 원형의 목재를 써서 기둥을 세웠다.
사당 건물답게 주칸도 어칸이 협칸보다 크게 하였고 문은 정면에만 시설하였는데 정면 3칸의 문은 모두 아랫부분에 굽널을 끼운 격자살문으로 쌍여닫이 형식이다.
가구는 5량으로 툇보와 결구한 대들보 위에 각대공을 세워 마룻대를 받고 마룻대 위에 사다리꼴의 판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게 하였다.
공포는 익공살미를 하나만 쓴 초익공 형식이며 익공의 위에는 대들보에 붙인 봉두를 올려놓았으며 건물의 전체에는 단청을 올려 장식하였다.
처마는 서까래 위에 부연을 올린 겹처마이며 지붕은 박공형식으로 좌·우측 박공면에는 풍판을 달아 비바람을 막게 하였다.
◦ 영춘대(迎春台) : 마을 동쪽 어귀에 있다. 경신(1920)생 갑계가 하병길(何炳吉)의 주선으로 세웠다.
◦ 구은대(九隱台) : 마을 북동 1km에 있다. 하태홍(何泰洪), 이조혁(李祖赫) 같은 아홉 벗이 놀던 곳에 대를 쌓았다.
◦ 모계진양하공지묘(慕溪晋陽河公之墓) : 마을 입구에 일제강점기 고제면장을 역임한 하태욱(河泰郁)을 기리는 비가 있다. 2001년에 건립하였다.
◦ 느티나무 : 수고 27m, 둘레 6.7m의 느티나무는 1980년대까지 당산제를 지냈던 마을신앙의 대상으로, 그 수령이 약 650년에 이르며,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이 느티나무 아래에서 옛 선비들이 시를 짓고 풍류를 즐겼는데, 이를 기리기 위해 2008년 ‘고제유계유적비(高梯儒契遺蹟碑)’를 세웠다.
◦ 하종호(河宗浩 : 1837~1898) : 본관은 진양(晉陽)이고, 자는 성중(聖仲), 호는 봉서(鳳捿)이다.
하종호는 정유년(丁酉,1837) 12월 8일에 거창 고제면 봉계리에서 태어나서 1892년 62세로 별세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성품이 총명하였으며, 도량이 깊고 넓었고, 스스로 노력하여 공부하여서 사랑하고 공경하는 도를 알았다. 중년에 큰 형님이 별세했기에 조카 6명까지 자기 자녀같이 기르고 교육시켰다. 위선(爲先)사업에 힘쓰고, 여러 종인을 설득해서 계(契)를 만들어 목족과 육영에 힘을 쏟아 지금까지 그 영향이 미치고 있다.
하종호는 갑오년(1894) 동학소요 때, 거창부사로부터 통수(統首) 임무를 받아 밖으로 이를 방어하고, 안으로 수습하면서 세 아들과 함께 창의(倡義)하여 군사를 모아 도마현에서 동학도를 방어했다. 이곳은 영남과 호남의 통로로 만약 이곳이 무너지면 경상우도는 모두가 위태로운 지경에 놓이게 된다.
이때 무풍에 머물고 있던 동학도(東學徒)가 고개를 넘어오지 못한 것은 그의 방어계책의 힘이었다. 난이 평정되자 고을 선비들과 용사들은 경상감사에게 여러 차례 포상을 건의하였다. 이에 감사가 답하기를 “하통수(河統首) 부자의 노력은 영․호남에서 모두가 알고 있는 바로써 경상우도가 안전하였던 것은 이 사람의 힘이다. 그러나 끝내 임금의 은의(恩義)를 입지 못한 것은 아까운 일이다”라고 하였다. 후에 주민들이 비석을 세워 칭송하기를 호남과 영남 사이에서 귀화(歸化)하지 않은 사람이 없고, 사람마다 덕을 칭송하고 마을마다 비를 세웠는데 군지, 도지 등에 등재되어 있다.
그는 계미년(癸未,1883)에 지리산을 편답하여 남유기(南遊記)를 남겼고, 병신년(丙申,1896)에 금강산을 유람하면서 서울에서 유숙했다. 이때 당대의 명인(名人) 충정공 민영환, 참찬 정관섭, 승지 한시동, 부사 정대무, 승지 이건용 등과 교유하였다. 무술년(戊戌,1898)에 다시 경기지방을 순유(巡遊)하다가 우연히 병을 얻어 손서 집에서 4월 14일 별세하니 그의 나이 62세였다.
하종호의 부인은 하빈이씨(河濱李氏)이고, 3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태홍, 태흥, 태원이고 딸들은 양성용, 신종우, 이한성에게 출가하였다.
『봉서일고(鳳捿逸稿)』를 남겼는데, 서문은 전 국회의원 신도성씨가 썼고, 서두에는 공의 유묵과 유계유사록, 장자 태홍 씨의 유묵 등이 있다. 권1에는 봉명재원운, 추원재낙성운 등 60여 수의 시가 실려 있고, 서(序)에는 봉명재계안서 등 3편, 기(記)에는 남유기, 잠명에는 주일잠 등이 있고, 권2 부록에는 거창유생청포상정감사서 등이 있는데 만사, 뢰사, 유사, 일화, 행장, 묘갈명 등으로 구성 되어있다.
『봉서일고』 「봉명재계안서(鳳鳴齋契案序)」에 의하면,
“효도하고, 우애 있고 돈독하며, 남을 도운 선행이 있을 때는 상(賞)을 주고, 이와 반대일 때는 책망 등으로 벌을 가하고, 학교에 입학해서 위로 성현을 배우고, 아래로 어짊을 본받으며, 세소응대 등의 기초교육과 과거준비 공부 및 시를 읊고, 교제하는 방법 등을 배우게 하기 위해서 돈과 곡식을 모아 유사로 하여금 처리토록 한다.”
라고 하였다.
그는 52세 때 국운이 기울어짐을 개탄하여 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유계(儒契)를 창설하였다. 유계는 매년 7월 7일 칠석 전후에 4~5동안 백일장과 강학을 개최하였다. 거창부사는 황소 한 마리를 내려서 장려하였는데 무주 일부에서도 참석했다고 전한다.
「주일잠(主一箴)」에서 이르기를,
“인간의 성품은 원래는 곧(直)지만 사물에 접하면 무절제하기가 쉬우니 오직 학문을 통해서 경(敬)을 간직하여 마음을 한곳으로 모아 흩어짐이 없으면 도를 얻을 수 있다.”
고 강조하였다.
고제 유생들이 현감에게 포상을 청하는 글
고제면의 어용인, 신종대, 김순종 등은 삼가 성주에게 하종호 통수(統首)의 포상을 영문(營門)에 청해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본면 통수(統首) 하종호는 나이가 60이 자났는데도 풍우와 밤낮을 불구하고, 세 아들과 함께 군중(軍中)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적과 대치하여 동학도로 하여금 경상도에 진입치 못하도록 하였고, 이들의 동태를 경상도 영문에 보고하여 조처를 취하도록 힘을 다하였으니 포상함이 마땅하므로 이에 현감님께 청원하여 영문에 진달(陳達)해 주시기를 청하는 바이다. 만일 이때 하종호 통수(統首)가 도마현의 요충지를 능히 지키지 못하였다면 영남의 여러 고을은 그들의 큰 희생을 면할 수 없었으니 하통수(河統首)의 공은 크지 아니한가?
◦ 하황식(河黃植) [1923. 12. 2~] : 1923년 경상남도 거창군 고제면 봉계리 당골(원봉계)에서 태어났다.
진주농림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경상남도 농촌진흥원 서무과장 [1966], 경상남도 농정과장 [1968], 의령군수 [1969.08.13. ~1971.08.21.], 진양군수 [1971.08.21. ~1973.07.01.], 합천군수 [1973. 07. 01 ~1974. 08. 01], 거창군수 [1974.08.01 ~ 1975.10.12.], 경상남도 농림국장 [1977], 진해시장[1978.8.2 ~ 1980.7.9.] 등을 역임하였다. 거창군수로 재직시 거창읍 시가지 정비사업, 남하면 무릉-지산간 도로개설 등을 하였다.
□ 마을신앙
◦ 원봉계는 마을 뒤 서북쪽 100m 지점에 있는 깊은 골짜기인 산제골에 있는 상·중·하당에서 산제를 올리고 난 다음 마을 앞에 있는 수령 250년이 되는 느티나무에서 당산제를 올렸는데 산제는 섣달 그믐날 밤에 했고, 정월 초하루가 되면 당산제를 올렸으나 지금은 지내지 않고 있다.
제관은 한달 전에 선정했으며 제기는 당산제 전용 제기를 사용했으며 제물은 제관이 마련했는데 백떡, 조곽, 돼지머리를 올렸다.
3일 전에 당산에 금구줄을 치고, 섣달 그믐날 산제골에 올라 상당에서 쌀알 한낱 한낱을 가려서 밥을 지어서는 제를 올리고 난 다음 바로 밑에 있는 중당과 하당에 계속해서 제를 올린 후 날이 밝으면 당산에서 제를 올렸다 한다.
금봉암의 칠성당 앞의 왕바위 또는 용바위라 부르는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는 옛날부터 가뭄이 계속되면 거창군에서 이곳에다 제단을 차리고 제일 먼저 기우제를 지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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