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제5강
* 각의(覺義)-깨달음의 의미
所言覺義者 謂心體離念 離念相者 等虛空界 無所不
소언각의자 위심체이념 이념상자 등허공계 무소부변
法界一相 卽是如來平等法身 依此法身 說名本覺
법계일상 즉시여래평등법신 의차법신 설명본각
[번역] 말했던 각의(覺義)란 심체가 염(念)을 떠난 것을 말한다. 염(念)을 떠난 모습은 허공의 세계와 같아서 두루하지
않는 것이 없어 법계일상(法界一相)이며 바로 여래의 평등한 법신(法身)이니, 이 법신을 의지하여 본각(本覺)이라고 이름한다.
[강의] 깨달음에는 크게 구별하면 각(覺)과 불각(不覺)이 있고, 각(覺)에도 본래의 깨달음인 본각(本覺)과 깨쳐지기 시작하는 시각(始覺)이 있습니다. 그런데 깨달음 그 자체는 무엇일까요? 우선 깨달음이란 개념부터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깨달음(Bodhi)'이란 깨달아 비추는 각조(覺照) 또는 깨달아 밝은 각명(覺明)을 말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무명(無明)인 불각(不覺)의 반대인 '완전하게 깨달아 밝은 지혜'입니다. 예를 들면 기존의 어두운 상황에서 다른 밝은 상황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한가고 하겠습니다. 즉, '어둡고 모르는 잠에서 깨어나다'의 깸이 바로 깨달음과 유사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깨달음 그 자체'에 대해 논하고 있습니다. '깨달음 그 자체'는 염(念)을 떠난 모습이므로 허공의 세계와 같고 법계와 하나된 모습, 평등한 진리의 몸, 본래 깨달아 있는 밝은 지혜로운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주목해야 할 부분은 '염(念)을 떠난 모습'입니다. 이 부분을 잘 이해하면 깨달음의 정체를 파악하기가 쉬어집니다.
여기서 왜 염(念)을 이야기할까요? 염(念)은 빨리어로 마음집중 혹은 마음챙김·마음이 늘 깨어있는 상태·억념(憶念)을 의미하는 싸띠(sati) 또는 범어로 스므리띠(sm ti)로 초기불교에서부터 매우 주요하게 여기는 수행법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왜 이 염(念)을 도외시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상상(想像)·사유(思惟) 등의 생각의 파편인 상(想, sa j )이란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버려져야할 생각의 모습(nimitta-sa j )의 용어로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금강경}에서는 생각이 관념의 표상이 되어 이루어진 여섯 가지 관념 즉, 아상(我相)·인상(人相)·중생상(衆生相)·수자상(壽者相)·법상(法相)·비법상(非法相) 등을 말하고 있으며, 사물의 특수한 특성과 공통의 특성을 나타내는 자상(自相, svalak a a)과 사물의 공통된 모습을 나타내는 공상(共相, s m ny-lak a a)과 사물이 연기하는 본래의 모습인 공상(空相, nyat -lak a a)과 유식과 화엄에서는 삼상(三相)과 육상(六相)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마음에 표상이 되어 관념화되면 무명(無明)으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초기불교에서는 무명(無明)이란 오온(五蘊)을 자기 몸으로 잘못 인식한 것이라고 하였지만, {기신론}에서는 무명(無明)을 '홀연히 일어난 한 생각'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일부이기는 하지만 초기불교 수행법과 대승불교 수행법과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습니다.
하여튼 여기서 말하는 염(念)은 외부의 사물을 감수하여 상상·사유·관념 등 모든 생각의 모습을 포괄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몸과 마음을 관(觀)하게 되면 상상을 하고, 사유를 하며, 개념화하여 기억하는 등의 생각이 객관적 대상으로 포착됩니다. 그리고 관찰의 대상으로 포착된 상상·사유·관념 등은 염(念)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즉 관(觀)에 의해서 비쳐진 모든 생각은 모두 염이며 허망하게 변하므로 망념(妄念)으로 여겨집니다. 이러한 염은 전찰라(前刹那)에서 후찰라(後刹那)로 변하지만 후찰라로 일어나는 현재 염만이 영상(映像)을 가지고 있으므로 '생각'이라 하며 한 순간으로 영상을 가지고 있기에 '한 생각'인 것입니다.
또한 이 한 생각은 감각과 감정, 의식상의 분별과 사유는 말할 것도 없고, 말나(末那)의 자아의식, 아리야식의 미세한 작용, 움직임 모두 한 생각에 연결됩니다. 나아가 한 생각에 포함되어 있는 내용은 다종다양합니다. 비록 현재 이 순간만이 존재하는 생각이지만 찰라 찰라로 일어나는 한 생각마다 전 우주를 포함하고도 남습니다. 즉 생각은 과거의 경험이 기억으로 재생되며 상상되고 사유 또는 영상화되어 가상의 세계를 이룹니다. 말하자면 체감하는 우리들 실상은 습관적이고 반복적인 추상적 세계에 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염에 의해 거짓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떠나 진리의 눈을 뜨려면 이 허망함 생각을 여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 허망한 생각을 여의는 방법이 수행이요, 본래 무념(無念)·무심(無心)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 본각(本覺)과 시각(始覺)-본래의 깨달음과 최초의 깨달음들
何以故 本覺義者 對始覺義說 以始覺者 卽同本覺 始覺義者 依本覺故
하이고 본각의자 대시각의설 이시각자 즉동본각 시각의자 의본각고
而有不覺 依不覺故說有始覺 又以覺心源故 名究竟覺 不覺心源故非究竟覺
이유불각 의불각고설유시각 우이각심원고 명구경각 불각심원고비구경각
[번역] 왜냐하면 본각(本覺)의 의미란 시각(始覺)의 의미에 배대해서
말한 것이기 때문에 시각이란 곧 본각과 동일하며,
시각의 의미가 본각에 의지하기 때문에 불각(不覺)이 있게 되며
불각을 의지하기 때문에 시각이 있다고 말한다.
또 마음의 근원을 깨달았기 때문에 구경각(究竟覺)이라고 이름하며
마음의 근원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구경각이 아니라고 한다.
[강의] 여기서는 본각(本覺)을 설명하면서 시각(始覺)과 불각(不覺)의 상호관계까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불교가 왜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야 수행의 정점인가를 논하고 있습니다. 본래 깨어있다는 본각(本覺)은 애초에 괴로움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깨어있지 못한 불각은 꿈속에서 헤매는 괴로움의 상태이며, 깨어나기 시작한 시각(始覺)은 괴로움을 비로소 제거해 가기 시작한 깨쳐 가는 마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본래 깨어있다면 깨어 있지 못한 불각(不覺)이 있을 수 없으며, 불각에서 깨어나기 시작하는 시각도 또한 필요 없을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고통이란 불각(不覺)의 현실에 본각이 있다는 것입니다. 깨어있지 못하기 때문에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괴로움을 느끼는 것이고, 꿰뚫어보면 고통이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하여 주체가 없는 것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러한 자각이 바로 고통에서 벗어나 마음이 깨어나기 시작하는 시각입니다. 주체가 없는 고통과 번뇌란 본래 허공의 구름 같아서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면 본각(本覺)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본각에 의지한 시각과 불각의 세 가지 관계는 세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첫째는 현실의 괴로움 때문에 세 가지가 각기 다른 이름을 가지게 됩니다. 둘째로 서로 의지하는 연기(緣起)의 모습이지만 그 개체는 자성이 없어 본래 공(空)하기 때문에 본각을 의지한 불각의 괴로움이 발생하는 한편 괴로움이 소멸하는 시각(始覺)의 길을 보여줍니다. 셋째로 삼자관계가 자성이 없는 본래 공(空)이므로 평등한 한 성품이며 이 평등한 하나의 본질을 깨치고 보면 본래 무각(無覺)이요, 닦아 도달해 보면 무수(無修)요, 증득하고 보면 무증(無證)임을 자각하게 됩니다.
이러한 본각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깨달음이 번뇌에 가려있기 때문에 본각이라고 했고, 다른 하나는 불각(不覺)과 시각(始覺)에 상대해서 세운 말입니다. 이것은 괴로움을 전제로 한 것이기에 처음부터 본각·시각·불각이라 하여 세울 것이 없는 무차별의 차별을 의미한다 하겠습니다. 따라서 이 세 가지의 관계는 중생이 괴로움을 일으킴과 괴로움에서 벗어나 대자유인이 될 수 있는 희망을 주는 근본원리를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다음에 마음의 근원을 깨달았기 때문에 구경각(究竟覺)이라고 말한 것은 마음의 근원을 가리고 있는 무명(無明)인 불각(不覺)을 깨트려 가는 것이 시각이 도달하는 최종단계입니다. 이러한 단계를 인간을 포함한 우주만물의 생주이멸(生住異滅)의 사상(四相)을 들어 설명합니다.
此義云何 如凡夫人覺知前念起惡故
차의운하 여범부인각지전념기악고
能止後念令其不起 雖復名覺 卽是不覺故
능지후념령기불기 수부각명 즉시불각고
[번역] 이 의미가 무엇인가?
저 범부는 지나간 앞의 생각에 악이 일어난 것을 깨달아 알았기 때문에 뒤에 일어나는 생각을 그치게 하여
그것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니, 비록 다시 각(覺)이라고 이름하지만 곧 불각(不覺)이기 때문이다.
[강의] 처음 마음이 깨어나기 시작하는 시각(始覺)의 첫 단계는 악(惡)에 대한 자각입니다. 악(惡)은 착하지 않는 것과는 다릅니다. 악행(惡行)을 나쁜 것인 줄 모르고 하기 때문에 계속 악행하게 되어 그칠 줄 모르는 것을 악이라고 하고, 악행(惡行)의 결과가 괴롭고 두려운 것임을 자각하면 악(惡)이 곧 불선(不善)임을 깨우치게 됩니다. 마음이 깨어나기 시작한 첫 단계는 악행이 고통이고 착하지 않은 것임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상적으로 범부가 깨달은 범부각(凡夫覺)인 불각(不覺)이라 합니다. 분별하는 생각은 머물러 있지 않고 지나가므로 '멸상(滅相)'이라 합니다. 그러나 생각인 의업(意業) 또는 사업(思業)은 탐하는 마음과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은 몸과 입에 영향을 주어서 행동하게 합니다. 나쁜 생각은 몸으로 짓는 살생·도둑질·사음(邪淫, 출가자는 음행)과 입으로 하는데 거짓말·이간질·악담·현혹시키는 말 등 일곱 가지 악한 죄를 짓게 합니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지옥과 아귀와 축생의 세계에 인도된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비록 이런 세 가지 악한 생각에 의해 몸과 입으로 일곱 가지 악한 행을 짓더라도 그것이 착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두려워함은 마치 꿈속에서 자기 몸이 큰물에 떠내려가는 것을 보고, 단지 그것이 꿈속의 형상인 줄을 알지 못하고 실지로 물에 빠져 떠내려가는 줄 알고 크게 두려워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두려움이 생기면 자연히 악행에 대해 뉘우치는 마음이 일어나서 눈·귀·코·혀·몸 등의 다섯 감각기관을 제어하려고 계율을 지키고 몸과 마음을 돌이켜 비추어 보고서 반성합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갈등이나 두려움은 소외감(疎外感)으로 인한 단절에서 비롯됩니다. 이는 모두 대상을 소유하려는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소유욕은 일곱 가지 악행을 일어나게 작용합니다. 소외나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감각기관을 제어하고 선행(善行)을 함으로써 너와 나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이것이 바로 마음에서 진여가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입니다. 즉, 악한 생각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 하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뒤에 일어나는 생각을 그치게 하여 그 생각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라 한 것이며 갈등과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편입니다. 이것이 일곱 가지 악한 업을 자각하고 두려워하는 단계입니다. 악업을 자각한다는 것은 이를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을 동반합니다. 이 노력이 깨달으려는 마음을 발하여 수행의 길로 들어서게 합니다.
이것을 출리심(出離心, nai kramya-citta)이라고도 합니다.
如二乘觀智 初發意菩薩等 覺於念異
여이승관지 초발의보살등 각어념이
念無異相 以捨 分別執著相故 名相似覺
염무이상 이사추불별집착상고 명상사각
[번역] 저 이승(二乘)의 관지(觀智)와 초발의보살 등은 생각의 변화를 깨달아 생각에 다른 모습이 없으니,
이는 추분별집착상( 分別執著相)을 버렸기 때문이며 상사각(相似覺)이라 이름한다.
[강의] 상사각(相似覺)은 악한 행위가 괴로움임을 자각하고 그 악행의 근본원인인 내면의 의식(意識)을 관찰해 들어가는 출리(出離)의 과정입니다. 이러한 이상(異相)란 감각이 사라져 몸이 허공과 같은 경계입니다. 몸이 변화해 가는 추이를 잘 살피면 종내는 몸이 허공처럼 비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걸어갈 때는 새털이나 허공을 밟듯 하면서 움직임만이 관찰되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아직 의식은 남아 있으니 주객의 앎이 일어납니다. 이 의식이 밖으로 향해 대상을 인식하면 탐욕·성냄·어리석음·교만·의심·견해 등 여섯 종류의 근본 번뇌가 순간 순간으로 대상에 따라 달리 일어납니다. 그래서 의식은 이(異)의 모습입니다.
이를 정념(正念)으로 관하면 변화하는 생각, 즉 주객이 상대하여 발생하는 갖가지 거친 심리인 거친 분별의 집착한 모습이 사라지고 주객마저 사라지면서 마음이 깨어나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바른 깨달음과 비슷하다고 하여 상사각(相似覺)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비유하자면 꿈에서 깨지 않은 채로 다시 다른 꿈을 꾸면서 내가 본 것은 꿈이며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알아집니다. 마음의 성품이 총명해져서 꿈속에서 꿈인 줄 알고 두려워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꿈속에서 다시 꿈을 꾸다가 깨어난 것일 뿐이므로 아직 완전히 깨어난 것은 아닙니다. 이때부터 의식의 차원에서 더 깊은 심층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번뇌망상이 미세해지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꿈을 꾸는 것은 대상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됩니다. 꿈속의 일은 꿈에서 깨기 전에는 현실과 똑같습니다. 그러나 꿈에서 깨고 나면 꿈속의 일이 실재하지 않는 허상임을 아는 이 앎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꿈속에서 꿈을 꾸고 그것이 꿈인 줄 안다는 것은 본래 깨어있는 본각(本覺)이 깨어있지 못하다는 불각(不覺)을 만나면 본래 깨어있는 진리의 힘이 발동하여 비로소 깨닫는 시각
(始覺)이 발동하여 깨어있지 못함을 깨트립니다. 이 때문에 핍박하는 괴로움의 영향을 받아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인 본래 깨어있는 본각(本覺)은 바로 진리의 힘인 법력(法力)인 시각(始覺)이 일어나면서 괴로움을 일으킨 깨어있지 못한 마음을 깨트리기 때문에 괴로움이 곧 한바탕 꿈인 줄 알아집니다.
즉 몸과 마음을 관찰하면 몸에 밀고 당기는 움직임, 진동, 소리 등의 무상(無常)함이 관찰되면서 그 무상 속에 고통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 고통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고통의 주체라고 할 만한 자아가 있지 않는 무아(無我)일 뿐만 아니라
몸이 모두 사라져 허공과 같이 텅 비어져서 마치 꿈속에서 귀신을 만나도 두렵거나 공포심이 일어나지 않으니 귀신과 상대되는 '나'라는 것이 모두 허상이어서 잡힐 만한 몸이 없고 그 귀신과 상대할 자아가 없다는 것을 여실히 알아 귀신의 환난에서 벗어남과 같습니다. 즉 몸의 고통은 꿈임을 아는 것이니, 몸에 고통이 일어나더라도 두려움이 전혀 생기지 않게 됩니다. 생각 역시 이와 같아서 한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그 생각에 수반하는 괴로움 또한 자성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이 정도의 경지에 가면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어도 죽음의 공포가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신통(神通)이 생기기도 하는데 여기에서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바로 상사각(相似覺)의 경지입니다. 상사각은 괴로움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 진리를 깨치고자 하는 원(願)을 일으키도록 내적으로 영향을 비치는 훈습(熏習)을 주는 한편 외적으로는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대원인 대비원력(大悲願力)을 내게 됩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이 자각합니다. "나와 중생이 오직 잠 속에서 긴 꿈을 꾸면서 실재라고 그릇되게 알아, 육진(六塵)이란 남녀의 두 가지 모습을 좋아하여 따르거나 싫어서 배척합니다. 이 모두 다 꿈이며 실제로는 자아가 영영 없으니, 어디에 근심과 기쁨이 있고 탐욕과 성냄이 있겠는가"라고 자각합니다. 이러한 깨침의 경지는 성문(聲聞)과 연각(緣覺)·초발의(初發意)보살의 인아집(人我執)이 타파되어 나라는 몸이 공(空)하고 자아란 의식마저 사라져 텅 빈 경지인 보살의 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廻向)의 단계입니다.
如法身菩薩等 覺於念住 念無住相 以離分別 念相故 名隨分覺
여법신보살등 각어념주 염무주상 이리분별추념상고 명수분각
[번역] 저 법신보살 등의 경지는 생각이 주(住)함을 깨달아 생각에 머무는 모습이 없으니,
이는 분별추념상을 여의었기 때문에 수분각(隨分覺)이라 이름한다.
[강의] 여기서 말하는 법신보살의 수분각(隨分覺)은 초지 이상의 보살경지입니다. 앞서 소개한 '달라지는 모습인 이상(異相)'의 여섯 종류의 거친 생각은 밖의 대상을 인식하여 일어난 것입니다. 의식의 거친 번뇌가 다 사라져 안팎이 텅 빈 상사각(相似覺)의 경지에서 더욱 미세한 심층으로 생각을 바르게 하여 관찰해 들어가면, 대상도 대상 따라 일어나는 생각도 없어지는 경지가 나타납니다. 여기서부터 의식의 차원이 아닌 자아 중심적 잠재의식인 말나식(末那識)과 순수한 무의식인 아리야식의 세계로 들어선 것입니다. 아리야식에는 세 가지 모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주객이 나누어지지 않는
업(業)의 모습인 업상(業相)'과 '주관인 능견(能見)의 모습인 전상(轉相)'과 '객관인 경계의 모습인 현상(現相)'이 그것입니다.
자아의식인 말나식이 '능히 보는 주관의 모습'을 가진 아리야식을 자기의 '자아(自我)'라고 착각하고, '경계인 객관의 모습'을 가진 아리야식을 '내 것'이라고 인식하여 머물러 있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아치(我癡)·아애(我愛)·아만(我慢)·아견(我見)의 심리를 일으키기 때문에 '주상(住相)'라고 하고 그래서 자아의식이라 합니다. 이 같은 말나식의 자아관념을 정념정지(正念正智)의 수행에 의하여 깨뜨리면 부분적이나마 자신이 무아(無我)의 법신(法身)임을 깨닫는 수분각(隨分覺)을 이룹니다. 이러한 수분각은 자아관념인 나와 내 것이란 본래부터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것으로, 나 이외의 불멸의 실체를 믿는 법아집(法我執)까지 사라진 경지입니다. 그러나 아직 법계가 하나라는 진리를 모르는 데서 일어나는 '최초 한 생각'은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비유하면 꿈속의 꿈에서 깨어났으나 아직 꿈꾸고 있는 것은 상사각(相似覺)의 경지라면 꿈꾸고 있는 최초의 한 생각이라는 꿈을 꿈이라고 알고서 머리를 움직이고 손을 흔들어 애써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려고 하는 것은 수분각(隨分覺)의 경계이고 십지보살의 단계입니다.
如菩薩地盡 滿足方便 一念相應 覺心初起 心無初相 以遠離微細念故
여보살지진 만족방편 일념상응 각심초기 심무초상 이원리미세념고
得見心性 心卽常住 名究竟覺 是故脩多羅說 若有衆生 能觀無念者則爲向佛智故
득견심성 심즉상주 명구경각 이고수다라설 약유중생 능관무념자즉위향불지고
[번역] 저 보살의 경지가 다하여 방편을 만족시켜서 일념이 상응하여 마음이 처음 일어남을 깨달으니 마음에 처음 모습이 없다. 미세한 염(念)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에 마음의 본성을 볼 수 있게 되어 마음이 상주하는 것을 구경각(究竟覺)이라고 이름한다. 그러므로 경(經)에서 "만약 어떤 중생이 무념(無念)을 관할 수 있다면 불지(佛智)에 향하게 된다"고 말하였다.
[강의] 생각이 일어나는 처음의 모습은 앞의 말나식이 아리야식을 나와 내 것으로 삼아 머무는 모습인 주상(住相)인 수분각(隨分覺)보다 더욱 미세해집니다. 주관과 객관이 나누어지기 이전의 업식(業識)이 생기는 최초의 한 생각이 일어나므로 '생상(生相)'이라고 합니다. 이 발생하는 모습인 생상(生相)은 꿈과 같이 자체의 성품이 없어 텅 빔입니다. 생상(生相)이 꿈이므로 주(住)·이(異)·멸(滅)이 꿈인 것은 당연합니다. 이러한 미세한 생각을 깨뜨려서 최초의 한 생각이 영원히 사라지면, 삶의 근거이자 상주(常住)하는 마음의 본성이 꿈에서 벗어나 나타나는데 이를 구경각(究竟覺)이라고 하였습니다.
구경의 깨달음인 구경각(究竟覺)이란 무명(無明)인 불각(不覺)을 깨트려 가는 시각(始覺)이 불각에 작용하여 무명인 불각이 사라지는 순간 시각이 곧 본각(本覺)이라는 것을 아는 이것이 바로 구경의 깨달음입니다. 이를 의상대사는 초발심시변성정각(初發心是便成正覺)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여튼 구경의 깨달음을 이루는 과정을 '일념(一念)이 상응하여 마음이 처음 일어남을 깨달으니 마음에 처음 모습이 없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염인 일념(一念)은 불각의 무명이 최초로 일어나는 마음을 깨트리기 시작하는 시각입니다.
이 일념의 시각이 불각의 무명을 깨트릴 수 있는 조건은 마음의 근원인 본래 깨어있는 본각과 상응이 되어야 가능합니다. 이 때 일념의 시각은 무분별의 지혜이며 이와 상응하는 본각은 공(空)·무아(無我)·무상(無相)의 법인 진여(眞如)입니다. 그래서 일념상응은 시각과 본각이 상응하는 것을 말하며, 이 상응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구경의 깨달음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념상응은 아직 불각의 근본무명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불각의 무명이 시각에 의해 깨트려지면 시각과 본각의 상응이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시각과 본각이 본래 하나인 각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각과 본각이 하나임을 무념(無念)이라 하며 이를 돈오(頓悟)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돈오(頓悟)란 망념(妄念)이 한순간에 사라져 일체 모든 것에 소득(所得)이 없다는 것을 자각한 마음을 말합니다. 즉, 깨닫는 마음이 일어날 때에 망(妄)이 사라지면서 진(眞)이 나타나는 순간이 돈(頓)이고 깨침의 순간이요 깨닫는 과정이며, 마음에는 애초에 모양이 없다는 것이 진(眞)이 완전히 나타나 망(妄)이 전무(全無)한 무념(無念)이고 깨치고 보면 깨달음도 없는 깨달음입니다. 이것이 홀연히 일어난 생각이 흔적도 없이 다 사라진 경지입니다.
비유하면 완전히 잠에서 깨어나 꿈에서 인연(因緣)을 돌이켜 보면, 물이나 떠내려간 몸이나 모두 존재하지 아니하여 오직 본래대로 잠자리에 고요히 누워 있었다는 것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대승육정참회}에서는 "긴 꿈을 관(觀)하면 여몽삼매(如夢三昧)를 얻는다"라고 하였습니다. 무생(無生)의 지혜를 얻어 이 꿈에서 깨어나면 본래 유전(流轉)된 것이 없이 일심(一心)이 일여(一如)의 잠자리에 누워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안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꿈에서 깨어보니 본래부터 고요한 잠자리에 누워 있었다는 것을 아는 이 구경각(究竟覺)을 부처님의 지위라 합니다.
又心起者 無有初相可知 而言知初相者 卽謂無念
우심기자 무유초상가지 이언지초상자 즉위무념
是故一切衆生 不名爲覺 以從本來 念念相續 未曾離念
시고일체중생 불명위각 이종본래 염념상속 미증이념
故說無始無明 若得無念者 則知心相生住異滅 以無念等故
고설무시무명 약득무념자 즉지심상생주이멸 이무념등고
而實無有始覺之異 以四相俱時而有 皆無自立 本來平等同一覺故
이실무유시각지이 이사상구시이유 개무자립 본래평등동일각고
[번역] 또 마음이 일어난다 것은 애초의 모습을 알 수 없어서,
처음 모습을 안다 말하는 것은 곧 무념을 일컫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일체중생을 깨달은 이라 이름하지 못하는 것은
본래부터 생각 생각이 상속하여 아직 망념을 떠나 본적이 없기 때문에 비롯함이 없는 무명이라 하는 것이다.
만약 망념이 없다면 심상의 생주이멸(生住異滅)을 알게 되어 무념(無念)과 같기 때문에
그래서 실로 시각의 차이가 없어지게 된다. 왜냐하면 사상(四相)이 동시에 있어서
모두 자립함이 없으며 본래 평등하여 동일한 각(覺)이기 때문이다.
[강의] 본문의 내용은 망념을 깨쳐 가는 시각(始覺)이 곧 본래 깨어있는 본각(本覺)과 같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생(生)·주(住)·이(異)·멸(滅)의 네 가지 염은 앞에서 보았듯이 꿈에 비유되었습니다. 꿈은 영상(影像)이며 영상은 허망하기에 몽념(夢念)이라 합니다. 또한 영상은 주관과 객관이 상대했을 때 일어나고 사라짐을 반복하므로 망념이라 합니다. 망념의 가장 미세한 것이 생(生)하는 모습입니다. 처음 일어나는 염을 깨치게 되면 처음 일어나는 염이 사라져서 무념(無念)이 됩니다. 이 무념은 시각과 본각이 일념상응한 결과이며 구경의 깨달음인 구경각(究竟覺)이며 시각과 본각이 같은 것임을 말합니다.
망념(妄念)이 무념(無念)이 되는 과정이 바로 수행입니다. 시각과 본각이 본래 평등하여 동일한 각(覺)인 경지는 관(觀)이 아니면 깨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관하는 것에도 기본과 순서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대상의 변화를 관하는 것이 기본이며 출발점입니다. 첫째로 대상의 변화를 관하는 것에서 비교적 쉽게 행할 수 있는 것이 몸의 변화를 주시하면서 관찰하는 것입니다. 몸의 변화는 호흡에서 느끼는 것이 빠릅니다. 이때 호흡의 출입을 자연스럽게 관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의도적으로 호흡을 길게 하거나 들이쉬고 내쉬는 중간에 잠시 멈추는 것은 모두 몸의 건강을 위한 양생기공(養生氣功)이나 단학(丹學)에서 하는 것이고, 호흡의 변화를 관찰함으로써 존재의 본질을 꿰뚫어 생사(生死)의 고통에서 해탈하기 위한 관법(觀法)에서는 인위성을 배제하고 몸의 변화를 자연스럽게 관찰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둘째로 변화의 관찰에서 주관과 객관이 구분되는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주객의 구분은 집착에서 벗어나는 지름길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주객이 구분되어 있는지를 의식하지 않으면 모릅니다. 그러기에 대상에 몰입되어 자신을 망각하고 희노애락(喜怒哀樂)을 경험하면서 육체적 정신적인 갈등(葛藤)과 회의(懷疑) 등의 온갖 괴로움을 겪습니다.
셋째로 주객의 구분을 잘 알게 되면 대상을 받아들이는 마음에 동요가 적어집니다. 주객관계를 명확하게 알면 객관인 대상의 변화에 주관이 별 영향을 받지 않게 됩니다. 즉 대상의 충격이 가해질 때 받아들이는 마음은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는 감수작용이 일어납니다. 더 나아가서 이 감수작용에 의하여 여러 가지 심리가 일어나거나 지속됩니다. 그러나 인식되는 대상은 즐겁다, 괴롭다, 또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다는 감수작용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즉 희노애락의 파도가 일어나더라도 고통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갖가지 심리에 동반되는 고통이 객관화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넷째로 이렇게 알게 되면 주객 사이에 일어나는 갖가지 심리현상이 모두 마음의 작용이고 장난임을 알게 됩니다. 모든 경계의 주체가 마음이라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괴로움과 즐거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는 심리에 만일 감정적 요소나 견해나 의도적 요소들이 첨가되면 탐냄·성냄·어리석음·의심·교만·왜곡된 견해와 이에 수반하는 번뇌 따위가 생겨나게 됩니다. 이러한 심리들은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괴로움을 일어나게 합니다. 이러한 심리의 특징은 명칭을 붙일 수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모두 영상이며 마음이라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다섯째로 이러한 마음의 영상(影像)이 무엇으로부터 일어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살펴보는 방법은 바로 '첫째로 대상의 변화를 관찰하는 것'입니다. 즉 이 변화는 심리현상인 영상의 변화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변화를 두려워하고 변하면 고통스러워합니다. 대상의 변화는 과거·현재·미래로 구분하여 보면 과거는 지나가 버려서 없고 미래는 오지 않아서 없습니다. 현재도 끊임없이 변하므로 변화를 알면 실망하여 대상을 소유하려고 잡고 놓지 않으려는 집착의 마음이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영상의 마음이 곧 '자아(自我)'이고 '내 것'으로 여기고 있다가 마음의 작용인 생각이나 영상이 변하는 것을 체험함으로써 '나'와 '나의 것'이 영상이고 허상임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生)을 좋아하고 사(死)를 싫어하는 심리가 있기 때문에 변화 즉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하고 못함으로써 갖가지 갈등과 오해 등이 생겨 괴로움 속에 빠집니다.
이와 같이 심리작용인 망념(妄念)이 영상을 가지고 있지만 시간적으로 변한다는 것을 관찰하면 생(生)·주(住)·이(異)·멸(滅)의 망념이 타파되어 가는데 바로 무상(無常)·고(苦)·공(空)·무아(無我)의 법인(法印)이 체득됩니다. 이러한 법인이 체득되는 가운데 처음은 번뇌망상이 거칠고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다가 미세해 지면서 작아지고 적어집니다. 가장 미세한 염은 바로 생주이멸 가운데 생(生)인 근본무명(根本無明)의 일념(一念)입니다. 최초로 일어나는 염을 관(觀)하여 깨트리는 것이 곧 구경의 깨달음이며 염이
완전히 사라지는 무념(無念)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생주이멸은 지(止)를 통해 안정된 마음의 상태에서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관(觀)함을 통해 모두 현재 한 순간만 존재하므로 일념(一念)이며 또 주객이 상대하여 생기는 것으로 주객은 동시(同時)이므로 생주이멸도 각기 동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시는 관하여 보면 자립이 불가능함을 알고 변하고 공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생주이멸은 본래 평등하여 동일한 각(覺)이며 무념(無念)이고 무심(無心)입니다.
그러면 이상의 내용을 다시 정리해 보면 각(覺)에는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상사각(相似覺)·수분각(隨分覺)·구경각(究竟覺)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시각(始覺)의 4단계를 말씀드려 중생이 온갖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하는 부분을 살펴보았습니다. 마음에는 온갖 층이 있지만 대개 네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시각·청각·미각·후각·촉각 전오식(前五識)과 의식(意識)과 말나식(末那識; 자아의식)과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보고 듣는 등 모든 경험을 유실하지 않고 포함하고 갈무리하여 나타내는 아리야식(阿梨耶識)입니다. 이것을 정념(正念)으로 차례로 관(觀)하여 심층으로 들어가면 망념(妄念)은 생(生)·주(住)·이(異)·멸(滅)의 네 가지 모습인 사상(四相)을 보이고 있으며 거친 번뇌에서 점차 미세한 번뇌에 이르러 최종 무념(無念)의 구경각을 이룬다고 하였습니다.
깨달아 가는 과정에서 최초의 깨달은 의식인 시각(始覺)을 긴 꿈에서 깨어나는 과정으로 비유하였습니다. 원효성사의 {대승기신론소}와 {대승육정참회}에서는 망념의 네 가지 모습을 꿈속의 생각인 망념(妄念) 또는 몽념(夢念)으로 비유합니다. 그래서 망념의 사상(四相)을 차례로 깨쳐 소멸해 나가는 과정을 꿈을 꾸다가 꿈에서 깨어나는 것으로 설명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인생의 방황이라는 긴 꿈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몽관(夢觀)이라 하고, 괴로움의 꿈에서 깨어나는 네 단계를 범부각(凡夫)의 시각, 상사(相似)의 시각, 수분(隨分)의 시각, 구경(究竟)의 시각이라고 하며 마음이 처음으로 꿈에서 깨어나기 시작하는 시각(始覺)에 비유하였습니다.
이를 보살의 계위에 배대하면 십신(十信)위를 범부의 시각, 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廻向)의 삼현(三賢)위의 보살을 상사의 시각, 십지(十地)의 법신보살을 수분의 시각, 지(地)가 다한 보살을 구경의 시각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범부가 처음으로
멸상(滅相)을 깨달아 악한 생각이 없어지고, 다음에 삼현위의 보살이 이상(異相)의 아공(我空)을 깨달아 아견(我見)이 없어지며,
그 다음에 십지의 법신보살이 주상(住相)과 법공(法空)을 깨달아 법집(法執)을 없애며, 구경에 지위가 다한 보살이 생상(生相)을 깨달아 근본무명(根本無明)이 없어지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다음에는 본각(本覺)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공부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