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와 언어의 조탁(彫琢)
김송배
1. 시는 언어의 예술이다
시는 언어의 예술이다. 물론 문학 자체가 언어를 매개체로 하기 때문에 언어 예술로서의 문학을 말할 수 있겠지만, 시는 고도의 언어 예술이다. 그것은 우리가 시를 쓰거나 이해하고 분석하려 할 때 먼저 그 작품을 구성하고 있는 언어를 살피고 언어를 통한 의식의 흐름을 유추하게 된다. 이 언어는 시를 구성하는 기장 기본적인 요소이다. 작품 전체가 포괄하는 이미지, 은유, 상징, 나아가서 주제까지도 언어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작품의 총체적 의미 파악은 바로 언어의 이해가 필수적이다.
우리가 시를 창작할 때 언어의 결핍을 얼마나 절감하는지 모른다. 공자가 그의 아들 백어에게 시를 공부하지 않고는 남 앞에서 말을 할 수 없다(不學詩 無以言)고 가르친 것처럼 우리는 언어에 대한 별도의 훈련을 거치지 않으면 시를 쓰는데 많은 애로를 직면하게 된다. 오래전 신인상에 응모할 습작 한 편을 퇴고하던 날 밤, 적절한 단어 하나를 찾기 위해 밤을 하얗게 새우면서 국어사전을 뒤적인 적이 있었다. 끝내 찾지 못하고 다음날 우연히 만나게 된 중진 시인에게 물었다. 언어의 고갈을 충전하는 묘안은 무엇이냐고. 그의 대답은 한 마디로 ‘국어사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세 번은 읽은 후에야 시를 쓰기 시작해도 될까 말까’였다.
시인이 되려면 언어의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지만 지적, 인격적으로 또 다른 무엇이 가미되어야 한다는 암시로 받아들여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교훈으로 새기고 있다. T.S. 엘리엇도 시는 근본적으로 언어방법이라고 말했다. 언어에 의해서 시인은 그의 사상과 정서는 물론 그의 직각적인 메카니즘을 포착하고 기록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한편 리처즈는 언어 전달의 총체적 의미 파악을 ‘말뜻’, ‘느낌’, ‘어조(語調)’, ‘의도’의 네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시 문장에서 한 단어 뜻이나 한 행, 한 연, 또는 시 전문에 대한 느낌을 이해하고 화자(話者)나 청자(聽者)들의 어조를 통해 작품 속에 내재된 의도를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冬至ㅅ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 버혀내어
春風 니불 아래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황진이의 시조
강나루 건너서 / 밀밭 길을 // 구름에 달 가듯이 / 가는 나그네 // 길은 외줄기 / 남도 삼백 리 / 술 익는 마을마다 / 타는 저녁놀 // 구름에 달 가듯이 / 가는 나그네.
--박목월의 「나그네」
이 작품들은 일반 통념이나 과학적 사고에서 보면 지극히 비이성적이다. 사실성이 없고 객관적으로도 증명할 수 없다. 어떤 개념이나 의미 전달만을 목적으로 한다면 ‘긴 밤의 시간을 비축했다가 임이 오는 날 모두 소비하겠다’라거나 ‘어떤 나그네가 저녁놀이 덮힌 강나루를 건너 밀밭 길을 간다.’라는 서술로 충분하다. 그러나 시와 언어 사이에는 신비로운 시적 진실과 우주적 진실의 메시지를 내포(內包)하고 있다. 이렇게 시는 언어의 예술임을 자각한 우리의 최초 시인은 정지용이며 이를 되풀이하여 강조한 시인은 김기림으로 알려져 있다.
2. 시인은 언어의 연금술사다
시인은 언어를 직조하는 우수한 기능공이어야 한다. 똑 같은 쇳덩이로 칼을 만들 때 어떤 사람은 겨우 칼의 형체만 거칠고 서투르게 만드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칼날을 비롯하여 칼자루에도 세공을 곁들여 정교한 칼을 만드는 것은 무슨 차이 때문일까. 시인은 마치 마술사처럼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절실한 언어의 훈련이 요구된다. 가령 한 작품에서 어떤 언어가 적합한가, 투박하고 아름답지 못한가, 감각적이며 색채가 있는가, 너무 관념적이며 어둡지는 않는가 등을 식별할 줄 알아야 한다. 대체로 시의 언어는 의미와 음성 그리고 이미지의 세 요소로 구분되어 있다. 우리가 시 한 편을 감상하면서 이러한 복합체의 미묘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언어가 살아있기 때문이다. 언어를 통해 그 작품이 제시하고자하는 빛깔, 음성, 무늬, 감촉, 무게, 리듬 등등의 다양한 감각과 함께 나아가서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까지도 식별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을 가리켜 ‘언어를 좀 다룰 줄 안다’고 한다면 이는 벌써 시인이다. 그는 이미 언어의 성질이나 기능을 이해하고 있으며 언어에 대한 예리한 감수성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반대로 언어에 대한 감각이 없거나 둔감한 사람은 일차적으로 시를 쓸 자질이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 제 아무리 좋은 소재에 아주 훌륭한 착상(着想)을 했더라도 언어의 고갈에 부딪히면 시를 쓸 수 없다는 것은 모두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태어나서부터 우리말을 사용하면서 살아왔는데 왜 언어를 다룰 줄 모르겠는가. 이런 언어로 표현만 하면 될 것이라는 반문이 있을 수 있지만, 시의 언어에는 앞에서 말한 세 가지 요소의 기능이 복합적으로 발휘되어야 한다.
우리는 청록파(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서정 시인들의 언어 조탁(彫琢)을 경험했다. 사실 요즘처럼 국어사전도 흔치 않고 우리말이 체계적으로 정리도 되어있지 않은 시대에서 정련된 우리말로 좋은 시를 창작했다는 것은 그들의 천재성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시의 매력은 언어에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며, 시인은 항상 언어의 마력에 빠져있다. 그러나 우리는 언어의 유희(言弄)를 경계해야 한다. 잡다한 가식의 언어를 나열하거나 미사여구(美辭麗句)를 동원하여 마치 새로운 시세계를 개척한 것처럼 시의 본령을 어지럽히는 경우도 있음에 유의하여야 한다. 더러는 현학적이고 풍자정신의 노출로 독자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환기시키면서 경각심을 촉발하는 역할도 하지만, 어쩌면 건전한 언어의 사용이라기보다는 말의 측면적인 재미와 일종의 관념에서 부리는 말의 장난에 가까워질 수 있는 결점과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3. 시의 언어와 시어는 다른가
우리가 시를 쓸 때 필요한 말을 시의 언어 또는 시어(詩語-poetic diction)라고 한다. 시의 언어는 시에다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언어를 말한다. 어떤 특정한 언어만을 사용해야 시가 되는 이른바 ‘시적 언어’가 아니다. 우선 유치환의「幸福」의 일부를 보기로 하자.
--사랑하는 것은 /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 /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그렇다. 우리 신문학 이후로 일상작인 구어(口語)로 자유시를 써왔다. 일상생활에서 나누는 구어, 그것이 시에 사용되는 언어이다. 그러나 그것을 한 단어씩 떼내어 본다면 아무 색채도 없는 그저 평범한 단어로 돌아가지만, 언어를 조합하거나 그 조합 자체가 각자의 사물에 대한 인식과 시 정신 또는 발상에 따라서 훌륭한 시의 언어가 된다. 그러나 시인은 단순히 현실의 상황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동떨어진 무엇을 기본으로 하여 어떤 창조상의 세계를 언어로 보여주어야 한다. 이것이 앞에서도 말한 이미지를 포괄한 언어, 의미를 나타내는 언어들이다. 이런 언어들을 구사하여 착종(錯綜)시키면서 시인의 감동과 사유를 표현하게 되는데 이를 더욱 깊이 형용하거나 비유, 상징 등의 방법을 사용하여 그 복합적인 내용을 단적으로 생생하게 묘사하는 것이다. 대체로 일상어는 다양한 개념과 통념을 지니고 있다. 가령 ‘꽃 같이 아름답다’는 언어는 아름다움에 대한 일차적인 개념뿐이라서 시인들은 이 때묻은 표현을 깨뜨리고 자신이 감동한 아름다움의 본질을 표현하지 않으면 안된다.
시의 언어는 다양하다. 부드러운 언어의 연결로 복잡하거나 난해한 부분도 시인의 언어 조합이 아니면 적절한 이미지를 살리지 못할 때도 있게 된다. 시인이 직면한 진실에 대해 거짓을 말할 수 없는 시인의 시 정신의 엄격함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시어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시어는 ‘시적 언어’ 즉 시 창작에 사용되는 특별한 단어나 어구(語句)이다. 이렇게 본다면 시의 언어와는 달리 일상어와 구분되져야 할 것이다. 옛날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시어가 따로 존재한다고 믿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결론적으로는 일상어도 시어가 된다는 견해이다. 현대 시인들은 대부분 구어를 사용하고 있어서 이런 측면에서 보면 현대시에서는 이미 시어라는 개념이 없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 시학에서는 시어라는 개념보다는 비유를 시적 본질로 생각하고 이를 탐구하고 있는 경향이다. 어쨌거나 ‘시어는 언어를 초월한다’는 말을 새길 필요는 있다. 언어의 영역을 초월하는 데에 정제된 시어의 참맛이 있고 시의 진실을 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 단순한 아무 단어나 시에 모두 도입할 수도 있지만, 시의 구성 조직과 긴밀한 관련을 가지고 그 시어 하나하나가 우리에게 미래를 지향하는 사물의 이미지를 부각시켜야 한다. 상실된 인간성 회복에 신선한 향기를 주고 만유(萬有)의 사물 본질을 새롭게 파악할 수 있는 심미안을 길러주어야 한다. 실제로 현대시는 시어의 선택에도 대담해졌다. 금기된 언어와 쌍말까지 등장하는가 하면, 너무 의미를 강조하다보니 난해시도 낳게 되었다.
이러한 직설언어이든, 한자어이든, 외래어이든 또는 추상 관념어이든 관계없이 시어가 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언어들이 시 전체의 앞뒤 문맥에 따라 어떤 자리에 놓이고 구체적으로 어떤 이미지로 바꿀 수 있는가하는 언어의 용법에 더 익숙해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해 두고자 한다.
우리가 시는 언어 예술이라고 강조하면서 시인이 자긍심을 갖는 연유도 순수한 우리말인 토착어를 발굴하는 것이나 언어에 함유된 민족의 풍습, 역사 등을 이해는 등 우리말을 갈고 닦아야하는 책무 같은 것도 시인들은 알아야 할 것이다. 미감의 언어로 잘 짜여진 비단폭 같은 시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4. 시인은 언어의 무법자인가
한편, 우리가 시를 읽다보면 국어사전에도 없는 생소한 단어를 대하는 수가 간혹 있으며 어떤 시는 우리 맞춤법에서 정한 띄어쓰기나 문장법 등을 무시한 채 표현된 예를 볼 수 있다. 이를 들어 ‘시인은 언어의 무법자’라는 극단적인 표현까지 나오고 있다. 이는 아마도 시인이 직접 적절한 언어를 새로 만들어 사용하는 것과 때로는 개인의 취향 또는 호흡 조절을 위해서 붙여쓰는 것을 용납할 수 있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는 아직 신조어(新造語)에 대해서는 그렇게 익숙하지가 않다. 그것은 억지로 만든 단어가 독자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질 리도 없고 그 의미의 이해에도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박목월의「靑노루」에서 보는 것처럼 ‘청노루’, ‘청운사’. ‘자하산’ 등이 모두 상상속의 사물이다. 하도 많이 읽어서 그런지 낮설지는 않아 보인다. 박목월은 ‘靑石 돌담’이니 ‘남도 삼백리’, ‘보랏빛 石山’, ‘水晶그늘’. ‘砂礫質’ 같은 상상의 신조어를 많이 구사하고 있어서 특이하다.
김춘수의「꽃」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 그는 내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는 것처럼 한 사물에 시인이 적절하고 아름다운 명명과 의미를 부여했을 때 비로소 그 사물은 시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신조어이든 일상어이든 그 작품에서 가장 적절한 언어의 조합이냐, 그 조합 자체가 시인이 사물에 대한 인식과 시정신의 발상에 효과적이라면 모두 시의 언어로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이는 어떻게 보면 시인은 단순한 현실의 상황을 그대로 말하며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약간 동떨어진 것을 기본으로 하여 어떤 창조상의 세계를 작품에서 보여주어야 하는 시인의 고충이기도 할 것이다. 의미를 나타내는 언어, 이미지를나타내는 언어, 그것들을 구사하고 서로 섞여져서 조합하면서 시인의 감동과 사유(思惟)를 더욱 깊이 형용하거나 비유, 상징 등의 방법으로 복잡한 내용을 단적으로 생생하게 묘사하기 위한 한 방법으로서의 언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한편, 요즘 현대시에서도 간혹 대할 수 있는데 특히 이상 시인은 띄어쓰기를 무시하는 것은 그의 작품 전부가 그러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시의 목적과 시정신적 측면에서 보면 언어의 횡포가 되기 싶다. 간혹 맞춤법에 정한 문장부호를 생략하거나 무시하는 예는 지금도 흔히 볼 수 있다.
이밖에도 ‘때묻은 언어’ 또는 ‘죽은 언어-사어(死語 : obsolete word)'가 있다. 일상어는 다양한 개념과 통념을 지니고 있다. 가령 ’꽃과 같이 아름답다‘라는 형용은 아름답다는 말 그대로 한번의 개념만 줄뿐이지 자기가 느낀 아름다움의 본질은 표현되지 않고 있다. 시인은 과감하게 이 때묻은 표현을 깨뜨려야 한다. 이처럼 시의 언어(곧 시어)도 시대적 변화에 따라 역시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너무나 많이 사용하여 식상하거나 시대에 역행하는 언어들은 자제하는 것이 시의 위의나 시인의 위상에도 품위를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 언어는 시 속에서 우리에게 존재를 보여주는 등불이 된다. 존재의 영역은 존재가 언어를 통해서 나타나는 범위에 국한하는데 가령 캄캄한 밤에 성냥을 켯을 때 성냥불이 비춰주는 그 범위만 환하게 눈에 보일 것이다. 이것은 암흑(또는 無) 속에 나타나는 존재의 모습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시의 언어는 일상생활에서 단순하게 의사를 전달하는 논리적인 기능보다는 정서적인 기능을 중시하는데 모든 사물과 관념의 시적 대상물에 대한 아름다움과 진실을 지적으로 판별하는 것은 물론, 언어가 지닌 음향, 즉 음악적인 미묘한 요소가 결합하고 있어서 신비하고 오묘한 맛이 조화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우리의 일상적인 담론에서도 말하는 주체(화자)가 있고 말하려는 화제가 있으며, 그것을 듣는 청자(聽者)가 있어야 가능하다. 이처럼 시에서도 화자(話者)의 표정과 상황, 그리고 담론(언어)에 따라서 독자(청자)에게 전달되는 시적 메시지가 어떠할까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현대시에서는 이런 화자와 그 어조를 통해서 반어법, 풍자, 역설법 등 다양한 표현기법으로 그 의미적 요소를 이해하려 하지만, 작품 전체를 이야기로 전개하여 주제를 적시하는 경향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 시인이 어떤 사물에 관한 스토리를 전개하여 작품 전체에 포괄되는 의미를 추적하는 작법이다. 이것을 스토리 텔링(story telling)이라고 하는데 소설에서의 주된 기법이지만, 시에서도 많이 적용하고 있음에 유의하게 된다.
여기에서도 누가(화자) 어떤 목소리(어조)로 이야기(주제)를 들려주느냐하는 문제는 현대시와 언어의 불가분적 관계와 그 중요성을 우리는 이해하게 될 것이다. 하물며 하이데거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이 언어 속에 존재의 거창한 문제가 깃들어 있어서 시인의 지적사유에는 낡아 버린 관념어(美辭麗句처럼 非詩的 언어)의 사용을 자제하고 자신의 언어계발에 몰입해야 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그것이 우리 시인들의 숙명적 과제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 자리에 놓일 가장 적합한 언어 하나를 찾기 위해 날밤을 새우는 고충도 감수해야 하는 운명인지도 모른다.*(2024. 10. 서대문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