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안에서 문안 합니다.
매월 첫째주 화요일과 셋째주 화요일은 구조분석 방법론을
함께 연구 할수 있도록 하신 성령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목사님들께서 동참하시여 성서의 깊은 성찰이 있기를 기도 하겠습니다.
많은 은혜 받으시고 하나님만 자랑해 주세요.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는 것을 아주 좋아 하세요.
주제절
외울 말씀 2장 6-7절이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로마서 2장 1-5절 【유대인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2: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1 그러므로 남을 심판하는 사람은, 그가 누구이든지, 죄가 없다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남을 심판하면서 똑같은 일을 하고 있으니, 결국 남을 심판하는 것은 바로 자기 스스로를 정죄하는 것입니다.
2: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네가 변명할 수 없음은 남을 판단하는 그것으로 네 자신을 정죄하는 것이니, 이는 남을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하기 때문이다.
직역: 그러므로 네가 핑계할 수 없다. 오! 사람아 그사람을 판단하는 모두여 왜냐하면 네가 그것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네가 스스로를 정죄한다. 왜냐하면 네가 그 사람을 판단하는 같은 일을 실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2:1 Διὸ ἀναπολόγητος εἶ,
그러므로 핑계할 수없다 네가~이라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2단)
ὦ ἄνθρωπε πᾶς ὁ κρίνων·
오 사람아 모두여 그(사람) 판단하는 (분사: 현재 능동태 호격 2단)
ἐν ᾧ γὰρ κρίνεις τὸν ἕτερον,
으로 그것 왜냐하면 네가판단하는 그 다른사람을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2단)
σεαυτὸν κατακρίνεις,
너 스스로를 네가 정죄한다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2단)
τὰ γὰρ αὐτὰ πράσσεις ὁ κρίνων. (분사: 현재 능동태 주격 2단)
그 왜냐하면 같은 일을 네가 실행한다 그(사람) 판단하는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2단)
주해
▣ 그러므로 - 전후 문맥으로 보아 이 접속사가 어떤 부분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지 분명하지 않다. 혹자는 이 접속사가 앞에서 설명된 이방인들의 부도덕한 행위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어떤 학자는 본절 전체를 1:20과 같이 삼단 논법식으로 재구성하여 다음과 같은 사상적 전개로 이해하고자 했다.
(1) 다른 사람의 행동을 너는 판단한다.
(2) 너도 똑같이 그 행동을 한다.
(3) '그러므로' 너는 너의 행동을 정죄하는 것이고, 너도 핑계치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은 종종 어떤 문장을 다른 주제로 전환하고자 할 때 별 의미 없이 접속사를 사용하여 주의를 환기시키는 문법 구조를 사용한다. 바울도 이와 같이 이방인의 죄악상을 폭로하는 주제로 전환하는 시점에서 별 의미없이 이 접속사를 사용하였다.
▣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 '판단하는'의 헬라어 '크리논'은 하나님의 '판단'(크리마)과는 구분되는 것으로서 '의심한다', '헤아린다', '구별하다' 라는 뜻으로 사용되며 본절에서는 인간이 그 이웃에 대하여 편견을 가졌다는 의미로 쓰여졌다. 한편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을 지시하는지의 문제는 의견이 분분하다.
(1) 혹자는 이 부류의 사람을 스스로 남을 규탄하고 지도하며 판단하는 입장에 있다고 생각하는 '많은 선생' 이라고 주장한다.
(2) 또 혹자는 '판단하는 사람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스 호 크리논' 가운데 '파스' ('모든')를 강조하여 '남을 판단하는 모든 사람'이란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를 포함하며 판단하는 일을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자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본장 전체의 흐름으로 보아 본절의 이 말은 율법을 받고 자랑하면서 율법에 따라 살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을 칭하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할 것 같다. 물론 유대인이라는 구체적 표현이 나타나지는 않지만 당시 유대인들의 삶이 이웃을 판단하는 교만한 삶이었음은 사실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가장 적합한 대상이라는 견해를 마치 이방인은 이 부류에서 제외된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은 또 다른 오해를 발생하게 할 것이다.
▣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 바르트는 하나님께 핑계할 수 없는 부류에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사람도 포함시킨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비록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더라도 유한한 인간이며 시간에 속한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인간은 제한되고 연약한 존재로 항상 죄악 가운데 그 영향권 아래 살아가므로 누구든지 하나님께 핑계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바르트의 주장대로라면 핑계치 못할 자의 범주에 바울 자신도 포함되므로 바울 역시 또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있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따라서 본 절은 신앙에서 떠난 유대인들을 향한 바울의 책망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유대인이 하나님의 율법을 받아 이방인보다 더욱 밝은 계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며 살았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께 핑계할 수 없는 것이다.
▣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은 판단력이 무능해졌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의를 이룰 능력도 무력해졌다. 그렇기에 남을 판단하는 자는 자신이 자신을 정죄하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정죄함이니'로 번역된 헬라어 '카타크리네이스'는 '카타'('...에 반대하여')와 '크리노'('구별하다, 판단하다')가 합쳐진 '카타크리노'의 현재 직설법 2인칭 단수 동사로서 '세아우톤'('너 자신을')과 함께 쓰여 스스로를 죄있다고 판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혹자에 의하면 이 '정죄'는 남을 저주했을 때 분만 아니라 용서했을 때도 받게 되는데 그것은 자기 자신이 판단의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 이 표현은 유대인들이 범하는 잘못이 이중적인 성격을 띠고 있음을 보여 준다. 즉 그들은 이방인과 똑 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으면서도 뻔뻔스럽게 다른 사람의 잘못을 신랄하게 정죄하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좀 더 간략하게 나타내자면 '어두움과 위선'이 될 수 있겠다. 이와 같은 바울의 논리는 예수의 가르침에 근거 한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2: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2:2 "b)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이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공정하게 내리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b. 당신은 이렇게 말합니다 를 넣어서 읽을 수 있음)
2:2 이런 일을 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임한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다.
직역: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이 이런일들을 실행하는 그사람 위로 진리를 따라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2:2 οἴδαμεν δὲ ὅτι τὸ κρίμα τοῦ θεοῦ ἐστιν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우리가 알고있다 그러나 것을 그 심판이 그 하나님의 있다는 (동사: 직설법 완료 능동태 1복)
κατὰ ἀλήθειαν ἐπὶ τοὺς τὰ τοιαῦτα πράσσοντας.
따라서 진리를 위로 그(사람) 그 이런일들을 실행하는 (분사: 현재 능동태 목적격 복수)
주해
▣ 하나님의 판단 - 여기서의 '판단'(크리마)은 공의의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심판 또는 정죄를 의미한다. 사람이 스스로 하는 판단은 항상 한계가 있고 상대적이지만 하나님의 판단은 절대적인 표준이므로 모든 범죄자에 대해 심판과 정죄를 내리심이 당연하다. 이러한 하나님의 판단(심판)은 종말에 궁극적으로 이루어지는데, 어느 누구도 그의 심판에서 제외되거나 특권을 부여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진리이시므로 그의 절대적인 공의 성취하시기 때문이다.
▣ 진리대로 - 이 말에는 심판의 순결성과 외모를 취하지 않으시고 인간의 내면을 감찰하시어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공의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 우리가 아노라 - 본절에서 바울이 사용한 1인칭 복수 '우리'와 1:5에서의 '우리'는 그 지시하는 바가 각기 다르다. 즉 본절에서는 수신자와 바울 자신을 같은 공동체로 여기고 '우리'라고 하고 있고, 1:5에서는 복음을 전하는 바울 일행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거기서는 송신자들을 의미하고 있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2: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2:3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을 심판하면서 스스로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을 줄 생각합니까?
2:3 이런 일을 하는 자를 판단하면서 같은 일을 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직역: 이것을 또한 같은일을 행하며 이런일을 실행하는 사람아 오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아
너는 하나님의 심판을 필할것이라 너는 생각하느냐?
2:3 λογίζῃ δὲ τοῦτο,
너는생각하느냐 그리고 이것을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ὦ ἄνθρωπε ὁ κρίνων τοὺς
오 사람아 그(사람) 판단하며 그(사람) (분사: 현재 능동태 호격 2단)
τὰ τοιαῦτα πράσσοντας
그 이런일들을 실행하는 (분사: 현재 능동태 목적격 복수)
καὶ ποιῶν αὐτά,
또한 행하는 같은일들을 (분사: 현재 능동태 호격 2단)
ὅτι σὺ ἐκφεύξῃ τὸ κρίμα τοῦ θεοῦ;
것을 너는 필할것이라 그 심판을 그 하나님의 (동사: 직설법 미래 중간태 3단)
주해
▣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행하는 사람아 - 바르트는 본절을 매우 실존주의적으로 해석한다. 즉 그는 판단하는 일이 어떤 체계나 사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하며, 그러한 체계나 사상에서 나오는 선행은 인간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있어서 체계적인 사상은 복음의 생동력을 잃게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이성을 통해 체계적인 사상을 통합하고자 했던 헤겔에 정면 도전한 키에르 케고르의 실존주의적 신앙 노선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체계적인 사상을 고집하면 복음의 생명력을 상실하게 되는 것은 교회사를 통해서 입증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논리와 사상의 체계에만 집착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극단적으로 사상의 체계를 부정해서도 안 된다. 전자의 경우는 기독교를 논리의 체계 속에 질식(窒息)시키게 하며, 후자는 신비 주의에로 흐르게 하기 때문이다. 오직 기독교는 복음의 진리를 왜곡시키지 않는 범위에서 체계를 지님과 동시에 복음의 생명력을 지녀야 참 종교로서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 예수의 가르침 중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재물 바치는 것을 빙자하여 자기 부모를 부양하고 공궤(供饋)할 책임을 회피했다. 이러한 그들의 행위는 종교라는 허울 아래 '하니님'을 이용하여 자신의 명예나 이익을 추구하고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한 행위인 것이다. 이 같은 이들은 겉모습과 말을 그럴 듯 하지만 속마음은 이미 부패해서 회칠한 무덤과도 같이 양면성을 갖고 있었다. 이와 같은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의 공의로운 심판을 결코 피할 수 없다. 설령 그 사람이 유대인 중에 유대인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정죄적 선언을 피할 수 없다. '피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크프세'는 '사라지다' 또는 '도망가 안전한 곳을 찾다'(행 19:6)라는 뜻이 있고, '에크퓨고'의 미래중간태이다. 죄인이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숨을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2: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2:4 더구나 하나님께서 인자하심을 베푸셔서 사람을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풍성하신 인자하심과 관용하심과 오래 참으심을 업신여기기까지 한다니, 될 말입니까 ?
2:4 아니면,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고, 그분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오래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는 것이냐?
직역: 혹 네가 그의 인자하심과 풍성함을 그리고 관용하심과 오래참으심을 멸시하느냐?
너를 회개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그 하나님의 인자하신 것을 알지못하느냐?
2:4 ἢ τοῦ πλούτου τῆς χρηστότητος αὐτοῦ
혹은 그 풍성함을 그 인자함을 그의
καὶ τῆς ἀνοχῆς καὶ τῆς μακροθυμίας καταφρονεῖς,
그리고 그 관용 과 그 오래참음의 네가 멸시하느냐?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2단)
ἀγνοῶν ὅτι τὸ χρηστὸν τοῦ θεοῦ
알지못하면서 것을 그 인자하신것은 그 하나님의 (분사: 현재 능동태 주격 2단)
εἰς μετάνοιάν σε ἄγει;
으로 회개로 너를 인도하신다는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주해
▣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멸시하느뇨 - '인도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게이'는 현재 직설법 3인칭 동사로서, 하나님의 지속적이고 적극적인 행동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 이방의 우상숭배와 부도덕, 그리고 남을 판단하는 어떤 자들의 교만을 지켜보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방향을 전환하여 마음과 태도를 바꾸기를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속성, 곧 '인자하심' 때문이다. 본절에서 '인자하심'은 거듭 사용되어 중요한 사상임을 보여 준다. 본 구절의 '인자하심' (크레스토테토스)은 하반절의 '인자하심'(크레스톤)과 의미상 별차이는 없지만 특히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미하며, 보다 포괄적이고 근본적인 뜻을 갖는다. 이는 또한 부모가 자녀를 대하는 것과 같은 성품을 시사한다. 그러나 유대인들을 포함한 모든 죄인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이용하여 오히려 자기의 의를 자랑할 뿐더러 그의 오래 참으심을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수단으로 생각했다. 더 나아가 인생들은 악한 일을 행함에도 속히 징벌을 행하시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너그러움을 이용하여 악을 행하기에 담대하였다. 본절에서 이와 같은 죄인의 태도는 '하나님을 멸시하는'(카타프로네이스) 것이라고 지적된다. 유대인의 교만과 이방인의 부도덕은 같은 죄악으로서 하나님을 깔보거나 업신여기는 방자한 행동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풍성함을 멸시하는 죄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죄인들 가운데 나타나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며 동시에 복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이 복음이 바로 죄인들에게 주어졌다.
▣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기에 죄를 범할지라도 그 죄에 따라 공의의 심판을 받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든지, 아니면 자기들이 죄를 범해도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심판을 내리시지 않기에 자기들의 행위가 하나님의 뜻에 별로 어긋나지 않는 것으로 착각했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을 무시해 버렸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도 소홀히 여겼다는 말이 된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완악한 심령에 대하여 바울은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5절)이라고 표현했다. 한편 본절의 '용납하심'(아노케)은 잠시 쉬는 것을 의미하며 '자제'의 개념을 지닌다. 본절에서는 '너그러움'을 뜻하며 구체적으로 '징벌의 지연'을 뜻한다. 또한 '길이 참으심'(마크로뒤미아)은 '어떤 충격에도 곧바로 반응하지 않음'을 뜻한다. 이 두 단어는 '인자하심'(크레스톤)과 합해져서 심판을 연기하여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하나님의 성품을 시사한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2:5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2:5 그런 사람은 완고한 마음과 회개하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진노를 터뜨려 의로운 심판을 하실 그 날을 앞에 두고, 자기가 받을 진노를 스스로 쌓아 올리고 있습니다.
2:5 다만 너의 고집과 회개하지 않는 마음 때문에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나타날 그 날에 너에게 임할 진노를 쌓고 있다.
직역: 또한 너의 완고함을 따라 너는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진노의 그날에 진노를 드러나게 쌓는도다.
2:5 κατὰ δὲ τὴν σκληρότητά σου
따라 또한 그 완고함(고집)을 너의
καὶ ἀμετανόητον καρδίαν θησαυρίζεις σεαυτῷ
그리고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너는 쌓는도다 네 자신에게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2단)
ὀργὴν ἐν ἡμέρᾳ ὀργῆς
진노를 에 날 진노의
καὶ ἀποκαλύψεως δικαιοκρισίας τοῦ θεοῦ
그리고 드러나게 의로운 심판의 그 하나님의
주해
▣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 - 인간이 갖고 있는 완고함이나 회개치 않는 마음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상반된 대조를 보인다. '회개치 아니한'의 헬라어 '아메타노에톤'은 하나님의 권고적인 회개를 뜻하는 '메타노이안'과 부정접두사 '아'의 합성어이다. 이는 하나님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개조되거나 변화되지 않는 마음을 뜻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거부하는 반항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이러한 반항은 빛에 대한 거부로서 온순하고 순종적인 마음을 잊어 버린 완고한 행동이다. 또한 '고집'에 해당되는 헬라어 '스클레로테타'는 '완악', '완고' 또는 '잔인'을 뜻하는 '스클레로테스'의 목적격으로서 영적으로 경화(硬化)되거나 딱딱하게 굳어버린 상태를 의미한다. 이들 두 단어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와 함께 자주 사용되었으며 본절에서는 서로 연결되어 서로의 의미를 보다 선명하게 밝혀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죄인은 자기의 고집과 회개치 아니하는 마음으로 인하여 스스로 하나님의 진노를 쌓고 있는 것이다.
▣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 '진노의 날'을 A.D. 70년 예루살렘이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 포위되어 함락되던 것과 반드시 연관지을 필요는 없다. 1절에서 본절까지의 내용이 하나님을 거역한 유대 민족 전체에 대한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으나, 6절부터는 개인의 행위에 따른 심판이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다. 따라서 본절은 민족적인 심판에 대한 언급이라기보다는 개인의 행위에 대하여 보응하는 마지막 심판으로 이해해야 한다. 한편 '그 날'(헤 헤메라)은 종말론적인 용어로서 '주의 날' . 곧 심판의 날을 가리킨다. 16절에 언급 된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은 구체적으로 마지막 심판 날을 가리키므로 본절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로마서 2장 6-11절 【하나님 심판의 보편성】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2: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2:6 하나님께서는 c) "각 사람에게 그가 한 대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c. 시62:12,잠24:12)
2: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의 행위대로 갚아 주실 것이니,
직역: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그의 행위들을 따라 갚아 주실 것이다.
2:6 ὃς ἀποδώσει ἑκάστῳ κατὰ τὰ ἔργα αὐτοῦ·(인용구절: 시편62편 12절, 잠언24장 12절)
하나님이 갚아주실 것이다 각사람에게 따라 그 행위들을 그의 (동사: 직설법 미래 능동태 3단)
주해
▣ 그 행한대로 - 심판의 기준이 되는 '행함'은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행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생각하는 바까지도 포함한다. 본절에서의 '행함'은 특히 인간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었으며 또한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지 않은 상태에서 많은 선을 베풀었을지라도 그의 선행이 아무 쓸모없는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관련을 맺었으나 그 믿음에 따른 행위가 없으면 그는 구원을 얻을지라도 상급은 없다. 그러므로 본절은 인간이 하나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서부터 시작하여 모든 행위에 그 보응을 받게 된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 보응하시되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도세이'는 '아포디도미' 의 미래 직설법으로 좋거나 나쁜 의미의 모든 보상을 뜻한다. 따라서 본 구절에 의하면 믿는 자에게는 선한 상급이 주어지겠지만, 불신자는 그 형편에 따라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심판은 누구도 예외가 있을 수 없는 공정한 것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2: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2:7 참으면서 선한 일을 하여 영광과 존귀와 불멸의 것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2:7 참고 선을 행하면서 영광과 존귀와 멸망하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실 것이나,
직역: 한편 참으며 선을 따라 행하는 자들에게 영광과 존귀와 썩지아니함을 찾는 영원한 생명을,
2:7 τοῖς μὲν καθ᾽ ὑπομονὴν ἔργου ἀγαθοῦ δόξαν
그 (자들에게) 한편 따라 참으며 행위의 선을 영광과
καὶ τιμὴν καὶ ἀφθαρσίαν ζητοῦσιν ζωὴν αἰώνιον,
그리고 존귀 와 썩지아니함을 찾는 생명을 영원한 (분사: 현재 능동태 여격 복수)
주해
▣ 참고 선을 행하여 - 본문을 보면 바울이 6절에서 언급했던 '행위'가 단순히 율법적인 차원의 것만을 의미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참고 선을 행한다'는 것은 성도가 영광의 면류관을 향해 끊임없이 달음박질 해나가는 것으로 이해되는데 이는 이신 칭의의 가르침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선'은 율법이 요구하는 것 이상이며 오직 하나님을 믿는 성도만 그 믿음에 따라 하나님과 이웃에게 '선'을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와, 포도나무 비유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성도의 선행이란 예수를 떠나서는 있을 수 없으며 오직 그와 연합된 가운데서 비롯될 수 있다. 즉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이 성령을 따라 사는 것이며, 그렇게 될 때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 가운데 선이 나온다. 그리고 이 열매는 낙심하지 않고 참고 인내하며 행할 때 거두게 된다.
▣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 - 이것들의 본질은 영생이며, 그것들이 나타나는 장소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즉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을 누리며 사는 성도에게 주어지는 특권을 이 세 가지로 표현했다. 따라서 여기서 언급된 '영광'은 하나님의 속성과 관련되어 나타나는 '영광'과는 다른 것으로서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게 될 때에 나타나게 될 변화를 가리킨다. 그리고 성도가 얻게 될 그 '영광'은 '존귀한 것'이며 결코 '썩지 아니하는 것'이다.
▣ 영생으로 하시고 - 영생(조엔 아이오니온)은 항상 궁극적인 구원으로 표현되었다. 유대교도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을 준다는 것을 가르쳤으나 그들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고 율법을 행함으로 생명얻기를 원했다. 그러나 율법을 행하면서 썩어질 육체의 증표(證標)를 구하는 자들에게는 영생이 허락되지 않았다. 영생은 언제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만 찾을 수 있으며 또한 그를 믿는 자들에게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한편 본절에서 영생은 6절에 기록된 '하나님의 보응'의 목적격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8절의 '노와 분'이라는 말과 대조를 이룬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심판이라는 개념보다 생명이라는 개념이 더 중요하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부터 승리하시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후 그를 따르는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과 영생을 소망하며 다시 오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는 삶을 보장받고 있기 때문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2: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2:8 이기심에 얽매여서 진리를 거스리고 불의를 따르는 사람에게는, 진노와 분을 내리실 것입니다.
2:8 이기적이며 진리를 순종하지 않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실 것이다.
직역: 다른 한편에서 이기심에 진리에 불 순종하며 불의에게 순종하게 되는 자는 진노와 분노가 있을 것이다.
2:8 τοῖς δὲ ἐξ ἐριθείας
그 다른한편 에서 이기심에
καὶ ἀπειθοῦσιν τῇ ἀληθείᾳ πειθομένοις (분사: 현재 수동태 여격 복수)
이에 불 순종하며 그 진리에 순종하게 되는 (분사: 현재 능동태 여격 복수)
δὲ τῇ ἀδικίᾳ ὀργὴ καὶ θυμός.
또 그 불의에게 진노 와 분노가(있으리니)
주해
▣ 당을 지어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이스 여스 에리데이아스'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구절이다. 왜냐하면 '에리데이아'가 '보수(報酬)에 얽매인 고용인'이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 '에리도스'에서 파생되었다면, 본절은 '이기적인 욕망이나 야망을 가진 자들에게'라고 번역될 수 있고, '다툼'이나 '논쟁'의 의미를 가진 헬라어 '에리스'에서 나왔다면, '논쟁하는 자들에게'로 번역될 수 있기 때문이다. 빌 1:16에서의 '에리데이아'는 분명히 '에리스'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빌 2:3에서는 '다툼'이라는 의미보다는 오히려 '이기적인 욕망'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외 갈 5:20이나 약 3:14 등에서는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내포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본절은 단순히 '당을 지어'로 번역되면 바울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가 분명히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것은 두 가지 의미를 모두 합쳐서 '이기적인 욕망을 따라 논쟁에 가담하는 자들'로 이해하는 편이 좋다. 즉 진리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없어 어떤 분쟁이 일어나면 항상 쉽게 발뺌할 수 있거나 이익이 되는 편에서는 자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 민중들 사이에서 나타나던 공통된 특징이었다.
▣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 - 진리와 의는 상호 보충적인 관계로 쓰여진 반면 진리와 불의는 상반적인 관계로 쓰여졌다. 진리로 자기들의 생활을 다스리지 않고 강퍅하게 회개치 않는 마음으로 자기의 의를 좇는 자는 결국 불의에 순종하는 자로 나타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진리와 불의의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기 때문이다. 진리에 대한 불순종은 불의에 순종하는 것이며 또한 붕의에 순종하는 것은 궁극적인 영원한 의를 포기하는 행위이기에 그들에게 주어질 것이라고는 하나님의 분노 외에 아무것도 없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분노는 불신앙에 따른 적극적인 불순종에 대하여 발생하는 것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하시려는 궁극적인 구원을 거부하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보응은 더욱 가증될 것이다. 바울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라고 같은 말을 반복한 것도 그들에게 임할 진노의 강도를 보다 명백하게 나타내고자 한 것이라고 할수 있다.
▣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 '노'에 해당하는 헬라어 '뒤모스'는 보통 '분노'로 번역되지만 '진노'(오르게)와 특별한 구별 없이 사용될 수 있다. 바울이 유사한 의미를 가진 두 단어를 같이 사용한 것은 일종의 중복어법으로 하나님께서 불순종하는 자들에 대하여 무시무시한 진노로 보응하시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2:9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2:9 악한 일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먼저 유대 사람을 비롯하여 그리스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환난과 고통이 있을 것이요,
2:9 악을 행하는 모든 사람의 혼에게 환난과 고통이 있을 것이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이고, 또한 헬라인에게이며,
직역: 악한 일을 힘써 실천하는 모든 사람의 영혼 위로 환란과 고통이 (비참함)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 사람이고 둘째는 헬라 사람이라.
2:9 θλῖψις καὶ στενοχωρία ἐπὶ πᾶσαν ψυχὴν ἀνθρώπου
환란 과 고통이(있으리니) 위로 모든 (영)혼을 사람의
τοῦ κατεργαζομένου τὸ κακόν,
그 힘써 실천하는 그 악한일을 (분사: 현재 중간태/수동태 속격 단수)
Ἰουδαίου τε πρῶτον καὶ Ἕλληνος·
유대사람 둘다 첫째는 과 헬라사람
주해
▣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 '각 사람의 영'(파산 프쉬켄 안드로푸)이라는 표현은 사람의 영혼과 육체 중 '영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울은 '영'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쉬케'를 '사람'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또한 전후 문맥상 '사람'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고데의 견해에 따르면 9절과 10절의 구성은 7절과 8절의 대조적 구성을 거꾸로 재배열 시킨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볼 때 '각 사람'이라는 말과 '각 사람의 영'이라는 말은 동일한 의미로서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 따라서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이라는 표현 역시 악의 계획을 추진하는 사람들에게 임할 보응의 보편성(6절)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은 선을 행하는 각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 행한대로 하나님의 판단을 받게 된다.
▣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 8절에 언급된 '노와 분'이 심판자이신 하나님 편에 속한 것이라면 본절의 '환난과 곤고'는 하나님이 발하신 '노와 분'으로 인하여 약한 자에게 내려지는 결과이다. 그리고 이 두 단어는 선을 행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상급인 '영광과 존귀와 평강'과 반대되는 것이기도 하다. 혹자는 '환난'은 외적인 것으로 '곤고'는 내적인 것으로 설명한다.
▣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 본 구절은 다음 10절에서도 반복된다. 구원이나 은혜와 마찬가지로 심판과 형벌에 있어서도 유대인이 우선적이다. 언약과 약속에 따른 복이 유대인들에게 먼저 주어졌듯이 그 복을 거절한 데에 대한 형벌도 유대인들에게 우선적으로 적용된다. 왜냐하면 우선적인 특권을 부여한 자에게 거기에 상응하는 책임을 묻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한편 본절에 언급된 '헬라인'은 모든 이방인을 대표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2:10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2:10 선한 일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먼저 유대 사람을 비롯하여 그리스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을 것입니다.
2:10 선을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을 것이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이고, 또한 헬라인에게도 있을 것이다.
직역: 그러나 선한 일을 실천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광과 존귀와 평안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 사람이고 둘째는 헬라 사람이라.
2:10 δόξα δὲ καὶ τιμὴ καὶ εἰρήνη
영광 그러나 과 존귀 와 평안이(있으리니)
παντὶ τῷ ἐργαζομένῳ τὸ ἀγαθόν,
모두에게 그(사람) 실천하는 그 선한일을 (분사: 현재 중간태 수동태 여격 단수)
Ἰουδαίῳ τε πρῶτον καὶ Ἕλληνι·
유대사람에게 둘다 첫째는 와 헬라사람에게
주해
▣ 영광과 존귀와 평강 - 7절에서도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이 나왔으나 본절에서는 '썩지 아니함' 대신 '평강'이 언급되었다 혹자는 이것을 '하나님과의 화목'으로 이해하기도 하며, 또다른 학자는 보다 넓은 의미로 해석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의 모든 축복 속에서 새롭게 변화된 영혼과 육체로 영원히 즐거워하며 충만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구원'이라고 설명한다. 어떤 의미이든 바울은 악한 자에게 형벌로 내리시는 '환난과 곤고'(9절)에 대조를 이루는 용어로서 '평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그 결과가 상반되는 것을 보여준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2:11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2:11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함이 없이 대하시기 때문입니다.
2:11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직역: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함이라.
2:11 οὐ γάρ ἐστιν προσωπολημψία παρὰ τῷ θεῷ.
아니함 왜냐하면 이라 사람의 외모를 취함이 그 하나님 께서는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주해
▣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 본절은 앞 부분(1-10절)과 그 다음에 이어지는 부분을 이어주는 다리의 역할을 하는데, 문자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불공평도 없으시다', 또는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편애도 없으시다'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심판은 편파적(偏頗的)인 것이 될 수 없다. 이 사실은 '하나님의의로우신 판단'이라는 (5절) 구절이 이미 증명한 바 있다. 하나님의 판단 기준은 특권이나 지위가 아니라 사람이 행한 일들의 성격이 어떠한 것이냐의 문제이다. '사람을 외모로 취한다'(프로소폴렘프시아)는 개념을 히브리적 사고에서 온 것으로서 재판관의 편견이나 편애를 지시하는 의미로 쓰여졌다. 하나님은 편견이나 편애가 없어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외형상 유대인에게 우선권을 부여한 사실과 모순을 이루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유대인 역시 그의 행한대로 판단받으며, 오히려 그들에게 있어서는 우선권이 부여된만큼 악행에 대하여 더 큰 환난과 곤고를 당해야 한다. 유대인이기 때문에 편견과 편애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특권을 주장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라도 그분의 선하신 뜻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 오직 공의로우신 그분만이 판단받는 자들의 다양한 입장을 고려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로 있다.
로마서 2장 12-16절 【하나님 심판의 기준】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2:12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2:12 율법을 모르고 범죄한 사람은 율법과 상관없이 망할 것이요, 율법을 알고 범죄한 사람은 율법을 따라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2:12 율법 없이 죄를 범한 자는 모두 율법 없이 망하고, 율법 안에서 죄를 범한 자는 모두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을 것이다.
직역: 왜냐하면 누구든지 율법없이 죄를 지으면, 역시 율법 없이 미래에 망할것이다.
그리고 누구든지 율법 안에서 죄를 지으면, 율법을 통해 미래에 심판을 받을 것이다.
2:12 Ὅσοι γὰρ ἀνόμως ἥμαρτον,
누구든지 왜냐하면 율법없이 죄를 지었으면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복)
ἀνόμως καὶ ἀπολοῦνται,
율법없이 역시 망할 것이다 (동사: 직설법 미래 중간태 3복)
καὶ ὅσοι ἐν νόμῳ ἥμαρτον,
그리고 누구든지 안에서 율법의 죄를 지었으면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복)
διὰ νόμου κριθήσονται·
통해 율법을 심판을 받을 것이다 (동사: 직설법 미래 수동태 3복)
주해
▣ 본절에서 바울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요지는 율법을 받지 못한 이방인이든지 율법을 받은 유대인이든지 누구나 자신들의 죄로 인해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순복했느냐 하지 않았느냐 하는 문제이다.
▣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 '율법 없이'(아노모스)라는 말은 부사로서 신약성경에서는 여기서만 사용되었다. '율법 없이'(아노모스)의 명사형 '아노미아'나 형용사형 '아노모스'는 대개 '불법'이나 '범법'을 의미한다. 그러나 본절의 경우에는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즉 '아노모스'는 14절의 '타 메노몬 에콘타'('율법을 갖지 아니한')와 같은 의미로 해석되어야 하는 바, 계약을 맺어 율법의 기준에 따라 살기로 약속한 일이 없는 자들, 곧 씌어진 율법을 받지 않은 이방인들로 이해되어야 한다.
▣ 율법 없이 망하고...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 바울은 율법 없이 범죄한 자들은 '망한다'(아폴룬타이)라고 서술하고 율법 아래서 범죄한 자들은 '심판을 받으리라'(크리데손타이)고 서술한다. 이 두 단어는 모두 수동태로서 하나님의 능동적인 보응이 있을 것을 시사한다. 율법을 받지 아니한 이방인들은 우주 만물과 양심에 나타내신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파멸된 것이며(1:20), 율법을 받은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잘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순종하지 않았으므로 율법의 기준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특별히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게 된다는 주장은 매우 중요한 사상이다. 바울은 율법을 자랑거리로 여기지 아니하고 죄인들을 정죄하거나 규제하는 수단에 불과한 것으로 정의하였다. 그러나 율법은 심판의 기준이 되는 것이고, 율법 자체가 멸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율법 아래서 범죄한 자들은 이 율법을 기준으로 심판받아 멸망에 이르게 될 것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2: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2: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오직 율법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의롭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2: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라 율법을 행하는 자가 의롭다 하심을 얻을 것이다.
직역: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듣는자들이 의로운 사람들이 아니다.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들이 미래에 의롭게 될 것이다.
2:13 οὐ γὰρ οἱ ἀκροαταὶ νόμου δίκαιοι παρὰ [τῷ] θεῷ,
아니다 왜냐하면 그 듣는자들이 율법의 의로운 사람들은 앞에서 그 하나님
ἀλλ᾽ οἱ ποιηταὶ νόμου δικαιωθήσονται.
오직 그 행하는자들이 율법의 의롭게 될 것이다 (동사: 직설법 미래 수동태 3복)
주해
▣ 율법을 - 12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율법'(노모스)은 관사가 없이 사용되었다. 공인 본문에는 정관사 '투'가 '노무'('율법의')앞에 있는데, 대부분의 고대 사본( A. B)에는 이 관사가 생략되어 있다. 그런데 '노모스'('율법')에 관사가 붙고 안 붙고에 따라 약간의 의미상 차이가 있다. (1) '노모스' 앞에 정관사 '호'가 붙으면, 거의 대부분 모세 율법을 의미한다. (2) '노모스' 앞에 관사가 붙어 있지 않으면 대부분의 경우 모세의 율법이나 율법의 특정한 조문(條文)을 의미하기 보다는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서 추상적인 법 개념을 의미한다. 즉 인간의 양심 속에 주어진 법이나, 자연적 계시 속에 나타난 법이나 어떤 순종을 요구하는 일반적인 개념의 법을 가리킨다. (3) 특수한 경우로서 관사가 생략되어 있으나 모세 율법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하는 경우이다. 이는 헬라어 문법상 이미 알려진 어떤 확실한 개념을 보다 선명하게 나타내거나 그 단어의 본래적 개념을 강조하고나 할 때 관사를 생략하는 용법으로서 율법의 특수한 의미를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로 쓰인 경우가 있다. 만약 본절을 관사없는 사본을 따라 해석한다 하더라도 '율법'은 12절의 '율법'과 같은 것으로서 모세의 율법을 뜻하는 특수한 경우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 유대인들은 율법을 받았을 뿐 아니라 익히 배우고 들어서 잘 알게 되었다. 이것은 그들의 자랑거리다. 그렇지만 이 지식은 그들을 심판에서 제외시킬 수 있는 힘이 될 수 없다. 율법을 들었으면 행해야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율법이 의의 법칙일지라도 그것을 행하는 사람만이 그것으로 인해 살리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본절은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원리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범죄할 수밖에 없는 죄인(3:23)이라는 사실을 부각시키기 위해 이 논리를 전개하고 있을 뿐이다.
▣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 본서에서 '의롭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카이오데손타이'가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단지 자신들이 율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의롭게 되리라고 생각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문제가 달랐다. 글자 그대로 보면 '의롭게 된다'는 것이 율법을 행하는 자에게 해당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보다 근본적인 기준과 목적은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 속에서 찾을 수 있다. 바울은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보시는 판단에 의하여 칭의가 결정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2: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2:14 율법을 가지지 않은 이방 사람이, 사람의 본성을 따라 율법이 명하는 바를 실천하면 그들은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됩니다.
2:14 율법이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들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된다.
직역: 왜냐하면 이방인들이 율법을 가지지 못한 때에 율법의 일들을 본성으로 행하게 된다면,
이 사람들은 율법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서 그자신들에게는 한 율법 그들이다.
2:14 ὅταν γὰρ ἔθνη τὰ μὴ νόμον ἔχοντα
때에 왜냐하면 이방인들이 그 못한 율법을 가지지 (분사: 현재 능동태 주격 복수)
φύσει τὰ τοῦ νόμου ποιῶσιν,
본성으로 그(일들을) 율법의 행하게 된다면 (동사: 가정법 현재 능동태 3단)
οὗτοι νόμον μὴ ἔχοντες ἑαυτοῖς εἰσιν νόμος·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복)
이사람들은 율법을 못하면서 가지지 그자신들에게 그들이있다 한 율법이 (분사: 현재 능동태 주격 복수)
주해
▣ 이방인이 본성으로 -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본성을 따라 부분적으로 행할 수 있을지 모르나 완전히 행할 수는 없으므로 이방인 역시 죄인일 수밖에 없다. 간혹 이방인도 율법의 행위를 수행하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논리를 펴는 자들이 있으니 이들은 바울이 전개하는 논리의 흐름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자들이다. 비록 본절이나 앞절(13절)에서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을 만족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표현하였지만 계속되는 바울의 논리는 어느 누구도 율법의 요구대로 완전히 순종할 수 없기에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무엇보다도 본절은 율법을 받았다고 자랑하는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받은 것 자체가 아무런 의미도 없음을 보여 주고 있으며, 이방인들도 양심의 법칙을 따라 율법이 요구하는 바 행위를 할 때가 있음을 가르침으로써 유대인들이 저지르는 어리석음을 경고하고 있다.
▣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 인간은 그 본성에 심어진 양심과 생각 때문에 스스로 하나님의 율법에 직면하게 된다. 즉 인간들의 본성 속에 존재하는 도덕적 성향은 하나님의 일반적 계시에 의하여 생긴 것으로서 명령하거나 금지하는 양심의 소리를 수반한다. 이방인들은 유대인의 율법과 동일하지는 않지만, 그들은 본래적인 양심의 법을 따라 일반 계시의 도움을 받아서 하나님의 계시를 유비적(類比的)으로 받는다. 그러나 그들의 율법은 궁극적인 구원을 보장하지 않는다. 이방인이 갖는 양심의 법은 간혹 모세 율법과 비슷한 법과 규례를 가질 수 있으나, 율법의 궁극적인 의미에는 전혀 도달할 수 없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2: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2:15 그런 사람은 율법이 요구하는 일이 자기의 마음에 적혀 있음을 드러내 보입니다. 그들의 양심도 이 사실을 증언합니다. 그들의 생각들이 서로 고발하기도 하고, 변호하기도 합니다.
2:15 이런 사람들은 그들의 양심이 증언하여 그들의 생각들이 서로 고발하기도하고 변명하기도 하여 자기의 마음에 기록되어 있는 율법의 행위를 보여 준다.
직역: 이런 사람들은 자기들 마음들 속에 쓰여진 율법의 행위들을 보여 줍니다.
그들의 양심과 함께 증거하며 그 생각들 사이에서 서로를 고발하며 혹은 또한 변명하며
2:15 οἵτινες ἐνδείκνυνται τὸ ἔργον τοῦ νόμου
이런사람들은 보여 줍니다 그 행위를 그 율법의 (동사: 직설법 현재 중간태 3복)
γραπτὸν ἐν ταῖς καρδίαις αὐτῶν,
쓰여진 속에 그 마음들 자기들의
συμμαρτυρούσης αὐτῶν τῆς συνειδήσεως
함께 증거하며 그들의 그 양심과 (분사: 현재 능동태 소유격 단수)
καὶ μεταξὺ ἀλλήλων τῶν λογισμῶν κατηγορούντων
그리고 사이에서 서로의 그 생각들(의)이 고발하며 혹은 (분사: 현재 능동태 소유격 복수)
ἢ καὶ ἀπολογουμένων,
혹은 또한 변명하여 (분사: 현재 능동태 소유격 복수)
주해
▣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 '양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네이데시스'는 문자적으로 '함께 안다'라는 의미로서 본절에서는 '함께 증거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쉼마르튀루세스'와 함께 쓰여 사람의 마음속에서 연대적으로 증거하므로 율법처럼 증인으로서 그 역할을 감당한다는 뜻으로 쓰여졌다. 양심은 인간이 마음속에서 자신의 행동을 살피면서 때로는 자신을 정죄하기도 하며, 율법과 일치한 행동에 대하여는 스스로 선한 증거로 인정하기도 하는 인간의 '바른 인식의 주체'인 것이다. 칼빈은 양심을 정의하면서 '합리적인 행위에 대하여서는 변호하며 악한 행실에 대하여서는 고발하고 유죄 선고를 내리기도 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이러한 양심은 타락한 인간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도덕적 성품을 보여준다. 그러나 양심에 화인 맞은 자들은 계속해서 죄 가운데 자신을 방치하여 스스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는 거짓 속에서 멸망으로 나아간다.
▣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 이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여러가지 생각이 갈등 상태에 놓여 있음을 보여 준다. 즉 사람이 어떤 잘못을 범했을 때 그 행위가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한쪽에서는 그것을 합리화시키려는 생각이 일어난다. 이러한 갈등이 반복되는 상태가 모든 사람의 내부에 존재한다. 이것이 곧 인간의 양심에 새겨져 있는 율법적인 요소인 것이다.
▣ 율법의 행위 - 율법에 따르는 행위로 해석되기 보다는 율법적인 요소가 인간의 양심 가운데 활동하며 그것이 행위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어떤 행위를 통해 양심의 갈등을 느낀 후에 이전보다 나은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 '율법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2:16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2:16 이런 일은, 내가 전하는 복음대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사람들이 감추고 있는 비밀들을 심판하실 그 날에 드러날 것입니다.
2:16 이런 일은 내가 전한 복음대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에 있을 것이다.
직역: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내가 전한 복음을 따라 사람들의 은밀한 것들을 그날 안에 그때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
2:16 ἐν ἡμέρᾳ ὅτε κρίνει ὁ θεὸς
안에 그날 때에 심판하신다 그분 하나님께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τὰ κρυπτὰ τῶν ἀνθρώπων κατὰ τὸ εὐαγγέλιόν μου
그 은밀한것들을 그 사람들의 따라 그(전한) 복음을 내가
διὰ Χριστοῦ Ἰησοῦ.
통하여 그리스도 예수
주해
▣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 본 구절은 문자적으로 '내 복음을 따라'(카타 토 유앙겔리온 무)로 번역될 수 있다. 이 말은 바울 자신이 전파한 복음을 근거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이야기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바울은 '내 복음'이란 표현을 취했는데, 이것은 협소한 의미로 사용되어 '이신 칭의'의 교리에 대한 것이 아니라 바울이 전파한 모든 내용을 가리킨다. 초대 교육 교부들은 이것을 '누가복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으나여기서는 바울의 전파 내용 중 종말론적인 설교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바울이 본절에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바울은 '내 복음'이란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복음'의 출처가 자기 자신인 것처럼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는 바울의 사도적 권위와 깊이 연관되는 표현으로 바울 자신이 예수께로부터 사도로 세우심을 받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다는 인식을 드러내 주며 자기가 그 복음을 위해 택정함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부르심에 대해 전인격적으로 반응한다는 뜻에서 복음을 자신의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 이 용어가 원문에서는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라는 구절 뒤에 따라 나오지만, 굳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진 복음과 연결지을 핑요는 없다. 오히려 본 구절은 하나님의 심판이 하나님의 단독 사역이 아니라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음을 나타내고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복음이 성취되어 인간들에게 주어졌듯이 그 복음으로 인한 심판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실행되는 것이 정당한 절차일 것이다. 예수께서도 심판날 왕권을 가지고 오실 것을 말슴하셨다.
▣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 심판날에는 감추인 것이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드러나게 된다(고전 4:5).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외식을 신랄하게 비판하신 것도 어떤면에서는 마지막 날에 있을 심판에 대한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 앞에서는 선하게 행동하고 선한 말을 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중심을 보시기에외식하는 자들의 마음과 생각을 심판날에 남김없이 드러내실 것이다.
▣ 그 날이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헤메라'는 문장 맨 앞에 위치하여 강조적으로 사용되었다. 바티칸 사본에서는 정관사 '헤'가 표기되어 있는데 문법상으로는 맞는 듯하다. 그러나 이처럼 정관사를 생략하는 것은 바울의 서술 방법 중 하나이다(12절). 더욱이 5절에서 '그날'에 대해 언급하면서 정관사를 사용했기 때문에 굳이 이를 사용하지 않아도 의미가 통하고 본절에서는 내용 자체가 마지막 심판 날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으므로 생략한 것 같다.
로마서 2장 17-29절 【유대인의 죄】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2:17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2:17 그런데 스스로 유대 사람이라고 하면서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2:17 네가 스스로 유대인이라 하고, 율법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자랑하며,
직역: 그런데 만일 네가 유대 사람이라고 이름을 부르고 또 율법을 의지하며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자랑하며,
2:17 Εἰ δὲ σὺ Ἰουδαῖος ἐπονομάζῃ
만일 그런데 네가 유대사람이라 이름을 부르고 (동사: 직설법 현재 중간태 2단)
καὶ ἐπαναπαύῃ νόμῳ
또 의지하며 그 율법에 (동사: 직설법 현재 중수디 2단)
καὶ καυχᾶσαι ἐν θεῷ
그리고 자랑하며 안에서 하나님 (동사: 직설법 현재 중수디 2단)
주해
▣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으나 본절 첫머리에 '이데'('보라'), 혹은 '에이 데'('그러나 만약')가 있다. 흠정역(KJV)이 번역한 공인 본문은 전자를 취하지만, 대부분의 사본들과 비교적 오래된 사본들( A, B, D, K, )은 후자를 취하였다. '에이 데'는 직설법과 함께 사용되어 실제로 발생될 수 있는 상태를 가정하는 조건절을 갖는다. 따라서 본절의 '에이'('만약')는 20절까지 조건문으로 취한다.
▣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 '칭하는'의 헬라어 '에포노마제'는 '이름을 붙이다' 또는 '칭함을 받다'라는 뜻을 가진 '에포노마조'의 현재 조건문으로 그 의미는 '유대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여기서 '유대인'(유다이오스)은 '히브리인'(헤브라이오스)이나 '이스라엘인'(*, 이스라엘리터스)이라는 용어와 구별된다. 히브리인이라는 호칭은 언어 군(群)의 개념을 강조하고 있고, 이스라엘인이라는 호칭은 구속사적인 개념을 강조하는데, 유대인이라는 호칭은 헬라인이나 이방인들과 상대되는 개념으로서 모세 율법을 중심으로 형성된 종교 공동체로서의 특성을 반영한다.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 유대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부여받은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 특권을 자랑할 뿐 아니라 그 특권을 받지 못한 이방인들을 경멸하기도 했다. 이러한 우월감이 하나님께 감사하며 순종함으로 나타났으면 하나님께 칭찬을 받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나, 그들은 특권만을 중요하게 여기며 그에 따르는 책임을 무시했다. 그들은 제사장 나라에 걸맞는 거룩한 백성으로서의(출 19:6) 특권을 유지하려면 '언약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있음을 무시했다. 그들은 율법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자랑한다고 내세웠으나 실상은 율법의 요구에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하면서 그들이 부여받은 특권만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이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모습은 세례 요한의 책망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2:18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2:18 그분의 뜻을 알며 율법으로 가르침을 받아서 옳고 그른 것을 분간할 줄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2:18 율법으로 가르침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직역: 율법으로 부터 가르침을 받으며 보다 뛰어난 것들을 입증하며 또 하나님의 뜻을 알고,
2:18 καὶ γινώσκεις τὸ θέλημα
또 알고 그 (하나님의) 뜻을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2단)
καὶ δοκιμάζεις
그리고 입증하며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2단)
τὰ διαφέροντα κατηχούμενος ἐκ τοῦ νόμου, (분사: 현재 수동태 주격 3단)
그(것들을) 보다 뛰어난 가르침을 받으며 부터 그 율법으로 (분사: 현재 능동태 목적격 복수)
주해
본절에서는 유대인들이 율법을 통해서 얻게 된 유익이 언급되어 있다.
▣ 하나님의 뜻을 알고 -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길은 하나님께서 친히 계시해 주셔야만 가능하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서 여러 모양으로 계시하셨기에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달리 하나님의 뜻을 아는 백성이 되었다. '하나님의 뜻'은 구체적으로 '구원 계시'를 가리키지만 좀더 폭넓게 하나님의 섭리까지도 포괄할 수 있는 용어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구원 계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를 통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계시된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생활이 요청된다.
▣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 본 구절에 대해서는 해석자들마다 약간씩 견해가 다르다. 예를 들어 틴델은 '선악에 대한 경험을 가지는 것'으로 해석하며, 모펫은 '종교에 있어서 생동력있는 것에 대한 의식을 가지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또한 영역 성경중에서 이 구절을 '도덕적인 구분에 대한 지식을 가지는 것'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이러한 해석상의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칼빈은 선한 것을 받아들이는 것과 선악을 구별하는 것을 동시에 인정한다. 이러한 해석은 메튜 헨리같은 주석가도 동의한다. 그렇지만 본문이 뜻하는 바는 칼빈의 첫번째 견해에 더 접근해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본절은 유대인들이 단순히 선악간에 판단한다기 보다는 율법의 선한 교훈을 인정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통해 선한 것을 인정한다는 사실은 그 선을 옳은 원리로 받아들였다는 의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믿음으로 율법에 따르는 선한 삶을 살지 않은 어리석음을 저질렀다. 이러한 어리석음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한' 이방인들의 어리석음과 동일하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2:19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2:19 그런데 그런 사람일수록 스스로 눈먼 사람의 길잡이요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의 빛이라고 생각합니다.
2:19 또한 너는 눈먼 자의 인도자이고, 어둠 속에 있는 자의 빛이며,
직역: 또한 너는 맹인들의 길을 인도하는 사람이고 어두움 안에 있는 사람의 빛이라고 네 스스로 믿고 있다.
2:19 πέποιθάς τε σεαυτὸν ὁδηγὸν εἶναι τυφλῶν, (부정사: 현재 능동태)
너는믿고있다 또한 네스스로를 길을인도하는사람 이라는것을 맹인들의 (동사: 직설법 완료 능동태 2단)
φῶς τῶν ἐν σκότει,
빛이라고 그(사람의) 안에(있는) 어두움에
주해
▣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 본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본문을 부산 구문의 형식으로, 직역하면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양을 가지고서'가 된다. 이에 대해 칼빈은 이유를 나타내는 분사 구문으로 이해하여 '지식과 진리의 모양을 가지고 있으므로'라고 해석했다. 그리고 영역 성경 중에서도 이 구절을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를 사용하여 번역했다(NIV). 이러한 해석은 본문의 흐름상 적합하다고 본다. 한편 '지식'과 '진리'는 특별한 의미상의 구별 없이 중복어법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한다. 그리고 '규모'에 해당하는 헬라어 '모르포시스'는 '모양'이나 '외모'를 뜻하지만 외적인 모양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참된 표현'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혹자는 '모르포시스'를 '본질'(휘포스타시스)과 같은 의미로 해석하기도 했다. 간혹 학자들 중에는 '모르포시스'를 유대인들의 '외식'과 같이 '과장된 외형'이나 '경건이 없는 겉 모양'으로 이해하기도 하나 이러한 해석은 본문의 성격상 적합하지 않다. 본문에서는 유대인이 율법을 통해 가진 지식이나 진리가 거짓되다든지 알맹이가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유대인들이 율법을 통한 참된 지식의 본질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식을 좇지 않고 자기 임의대로 행하는 것을 책망하는데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 - 성경에서 소경과 어두움에 있는 자는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눈이 먼 상태에 있다는 것은 어둠 가운데서 헤매이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여기서도 바울은 역시 중복어법을 사용하여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내용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어두움에 있는 자들의 빛'이라는 표현은 이방인을 향한 유대인들의 사명을 시사한다. 유대인들은 토라를 자기의 등불이라고 생각한 것처럼 토라를 소유한 자신들이 이방인들에게 등불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사명마저도 자신들의 특권을 자랑하는 도구로 삼고 말았다. 오늘날 성도들도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라고 고백하면서 빛된 삶을 살지 못한다면 유대인들처럼 말씀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자랑하려 하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 스스로 믿으니 -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결정적인 잘못은 특권을 부여받은 자들이라는 자기 만족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부울은 갈라디아서에서도 유사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본절과 같이 행함 없는 자랑을 위선이라고 폭로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갖지 못한 특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 특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 특권으로 말미암아 더 큰 행악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들은 자기의 신념을 신뢰하였을 뿐만 아니라 부패한 인간의 도덕적 무능력에 지나친 기대를 가짐으로 인하여 아무것도 아닌 초라한 가운데서 자신을 속이는 잘못을 범하였다. 또한 율법주의자들은 그 이웃들에게 자신도 질 수 없는 무거운 짐들을 지우는 반율법적인 잘못을 범하였으며 더 나아가 그들의 신념은 자신을 속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결과를 초래함으로 인하여 스스로 하나님의 징계를 초래하고 말았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2:20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2:20 율법에서 모든 지식과 진리의 근본을 터득하였다고 하면서, 스스로 어리석은 사람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으로 확신합니다.
2:20 어리석은 자의 교사이고,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고 있다. 이는 네가 지식과 진리의 구체적 표현을 율법 안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직역: 어리석은자들의 교사이고 어린아이들의 선생이라고 지식과 그 형식을 가지고서 진리의 율법 안에 있다.
2:20 παιδευτὴν ἀφρόνων, διδάσκαλον νηπίων,
교사를 어리석은자들이 선생을 어린아이들의
ἔχοντα τὴν μόρφωσιν τῆς γνώσεως
가지고서 그 형식을 그 지식 과 (분사: 현재 능동태 목적격 2단)
καὶ τῆς ἀληθείας ἐν τῷ νόμῳ·
그리고 그 진리의 안에(있는) 그 율법에
주해
▣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아이의 선생 - 영적으로 '이리석은 자'와 '어린아이'는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어린아이'가 영적인 의미에서 상징하는 바가 '연약한 존재' 또는 '어리석은 존재'로 나타난 점으로 미루어 보아 본 구절도 앞절과 마찬가지로 중복어법에 의한 강조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한편 '훈도'란 용어는 헬라어 '파이듀테스'로 보통 '선생'으로 번역되는 헬라어 '디다스칼로스'와 동일한 의미를 지니지만, 좁은 의미에서 '파이듀테스'는 잘못을 범할 때 채찍질도 가하는 '엄한 선생'을 가리킨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2:21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2:21 그렇다면, 그런 사람이 남을 가르치면서도, 왜 자기 자신은 가르치지 않습니까 ? 도둑질을 하지 말라고 설교하면서도 왜 도둑질을 합니까 ?
2:21 그런데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너 자신은 가르치지 않느냐? 도둑질하지 말라고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직역: 그러면 이 사람아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자신을 가르치지 않느냐?
이 사람아 도둑질 하지말라고 전파하는 네가 도적질을 하느냐?
2:21 ὁ οὖν διδάσκων ἕτερον σεαυτὸν οὐ διδάσκεις;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2단)
그(사람아) 그러면 가르치는 다른(사람을) 네 자신을 아니하느냐 가르치다 (분사: 현재 능동태 호격 2단)
ὁ κηρύσσων μὴ κλέπτειν κλέπτεις; (부정사: 현재 능동태)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2단)
그(사람아) 전파하는 말라고 도적질하는 것 네가 도적질하느냐? (분사: 현재 능동태 호격 2단)
주해
▣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 이 질문은 유대인들의 형식적인 삶에 대하여 다음에 계속되는 네 가지 질문을 유도하기 위한 대표적인 의문문이다. 그리고 이 질문은 유대 랍비들의 문헌에서 자주 발견되고 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자신들만이 율법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진리를 알고 있다고 자부했고, 이 점은 주님께서도 인정해 주신 바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문제는 자기들이 가르치는 바를 자신들은 지키지 않으면서 의로운 체 하는 그들의 외식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유대교 지도자들은 여호와 신앙을 형식적인 종교로 전락시킨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그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행동으로는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처럼 나타내 보이지만, 실상 그들의 심령은 전혀 하나님과 무관하며 단순히 형식적이고 외면적인 종교 지도자에 불과했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2:22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2:22 간음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왜 간음을 합니까 ? 우상을 미워하면서도 왜 신전의 물건을 훔칩니까 ?
2:22 간음하지 말라고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혐오하는 네가 신전의 물건을 훔치느냐?
직역: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자여 네가 간음을 하느냐? 우상들을 가증히 혐오하는자가 네가 신사의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2:22 ὁ λέγων μὴ μοιχεύειν μοιχεύεις; (부정사: 현재 능동태)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2단)
말하는 자여 말라 간음하지 네가 간음하느냐? (분사: 현재 능동태 호격 2단)
ὁ βδελυσσόμενος τὰ εἴδωλα ἱεροσυλεῖς;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2단)
가증히(혐오)여기는 자여 그 우상들을 네가 신사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분사: 현재 능동태 호격 2단)
주해
▣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 '간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모이큐오'는 히브리적 표현에서 '영적 간음'이나 '우상 숭배'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본절에서는 우상 숭배를 따로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영적 간음'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바울은 의도적이며 구체적인 사실을 선명하게 표현하면서 그들 가운데서 실제로 행해지고 있는 온갖 음행과 간통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율법주의자들은 가장 엄격한 율법을 종교의 원리로 삼고 있었지만, 그들의 도덕적 기준은 여전히 부패한 인간 본성의 심연에 머물러 있었다.
▣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 앞에서 언급된 '도적질'과 '간음'이란 용어를 비추어 볼 때 바울은 십계명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대인은 십계명에 따라 우상을 가증스럽게 여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나 우상을 위해 만들어진 것을 탐내어 도적질했다. 신사(神社) 물건을 도적질 한 것이 악행인가에 대해서 성경이 명백히 가르치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따지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본절에서 바울은 그러한 행위가 죄인지 죄가 아닌지에 대해서 논하고자 이 질문을 내놓은 것이 아니라 가증스러이 여기는 우상 제물을 탐낸, 우상 숭배 이상의 죄악을 폭로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신명기에서는 이 문제를 암시적으로보여주면서 그 행위가 죄가 된다고 교훈하고 있다. 즉 신명기는 우상들에 입힌 은이나 금을 탐내어 취하지 말라는 말씀과 함께 그 금지의 이유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일로 인해 올무에 빠질 것이 염려되기 때문인 것을 들고 있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2:23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2:23 율법을 자랑하면서도, 왜 율법을 어겨서 하나님을 욕되게 합니까?
2:23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하여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직역: 네가 율법 안에서 자랑하는 율법을 통하여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을 네가 욕되게 하느냐?
2:23 ὃς ἐν νόμῳ καυχᾶσαι,
네가 안에서 율법 자랑하다 (동사: 직설법 현재 중간태 수동태 2단)
διὰ τῆς παραβάσεως τοῦ νόμου τὸν θεὸν ἀτιμάζεις·
통하여 그 죄를 범함으로 그 율법의 그 하나님을 네가 욕되게 하느냐?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2단)
주해
학자들 사이에는 본절을 의문문으로 해석하느냐 평서문으로 해석하느냐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평서문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24절에서 헬라어 원문상 24절에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가 사용되고 있으므로 본절은 그 접속사를 유도할 만한 이유를 묻는 의문문이 되든지 아니면 그 이유를 유도해 내는 평서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본절은 이유를 묻는 의문문의 성격을 띠지 않았으므로 이유를 유도해 내거나 확정을 나타내는 평서문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게 생각할 근거는 본문 가운데서 발견할 수 없다. 오히려 24절의 접속사 '가르'는 21절에서 23절까지에 언급된 다섯 가지 질문을 하게 된 근거를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본절은 내용상 앞에서 언급된 네 가지 질문의 형식과 잘 부합될 뿐 아니라 특히 21절에 언급된 첫번째 질문을 보다 구체화시켜 대비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 나머지 세 가지 질문을 요약한 질문도 된다. 따라서 본절은 의문문으로 해석하는 편이 본문 이해에 더욱 도움이 된다.
▣ 율법을 범함으로 - 이말은 유대인들이 범한 잘못들이 곧 율법을 범한 행위임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21절에서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는 질문의 내용이 율법을 범하고 있는 사실에 대한 것임도 본절에 잘 나타나고 있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2:24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2:24 성경에 기록된 바 "너희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모독을 받는다" 한 것과 같습니다.
2:24 기록된 바와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가운데서 모독을 받는다." 하였다.
직역: 왜냐하면 그것이 성경에 기록된 것 같이 너희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 가운데 모독을 받는다.
2:24 τὸ γὰρ ὄνομα τοῦ θεοῦ
그 왜냐하면 이름이 그 하나님의
δι᾽ ὑμᾶς βλασφημεῖται ἐν τοῖς ἔθνεσιν,
때문에 너희를 모독을 받는다 가운데 그 이방사람들 (동사: 직설법 현재 수동태 3단)
καθὼς γέγραπται.
같이 그것이 기록되었다 (동사: 직설법 완료 수동태 3단)
주해
▣ 기록된 바와 같이 - 이 표현은 본절이 사 52:5의 인용구임을 시사해 준다. 이렇게 함으로써 바울은 이사야 선지자의 권위를 내세우는 동시에 자신의 논리를 더욱 확고히 정당화시킬 수 있게 되었다. 비록 바울이 이사야 선지자의 직접적인 선포를 간접적인 내용으로 변형시켰으나 내용상으로는 동일한 의미를 유지하고 있다.
▣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 당시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을 마치 하나님과 동일한 인격을 소유한 거룩한 백성인 양 취급했다. 그것은 실제로 그들의 삶이 고상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들의 지나친 자랑에 이방인들이 속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방인들이 바울이 고발한 것과 같은 유대인의 범죄함을 발견한다면 유대인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도구가 되고 말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자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자들임을 바울은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2:25 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
2:25 율법을 지키면 할례를 받는 것이 유익하지만, 율법을 어기면 받은 할례는 할례를 받지 않은 것으로 되어 버립니다.
2:25 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네가 율법을 범한 자이면 너의 할례는 무할례가 된다.
직역: 왜냐하면 율법을 네가 실행하게 된다면 할례가 참으로 유익하다. 그러나 만일 네가 율법의 위반자가 된다면,
너의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다.
2:25 Περιτομὴ μὲν γὰρ ὠφελεῖ ἐὰν νόμον πράσσῃς· (동사: 가정법 현재 능동태 2단)
할례가 참으로 왜냐하면 유익하다 율법을 네가실행하면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ἐὰν δὲ παραβάτης νόμου ᾖς,
만일 그러나 위반자가 율법의 네가되다면 (동사: 가정법 현재 능동태 2단)
ἡ περιτομή σου ἀκροβυστία γέγονεν.
그 할례가 너의 무할례로 되었다 (동사: 직설법 완료 능동태 3단)
주해
▣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 바울은 유대인들의 가장 큰 자랑거리인 율법과 함께 또 다른 자랑거리인 할례의 문제로 주의를 환기시키면서 자신이 의도한 복음의 본질에 한 걸음 더 접근하고 있다. 유대인을 이방인과 구별시키는 유일한 기준은 율법이지만 표식은 할례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지금까지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들어 논리를 전개해 왔지만, 이제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의 자랑거리요 표식인 할례 문제를 거론함으로써 더욱더 유대인들이 변명할 수 없도록 만들고 있다. 여기서 '율법을 행한다'는 것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좇는 것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하나님의 편에 서 있을 때 유대인들의 할례가 그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 것이지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형식적인 할례 의식에 그치며 이는 그들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계속 유지시킬 수 있는 신적인 힘을 상실케 하고 만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게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고 경고했던 것이다.
▣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 - 유대인들은 할례 자체가 의의 조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조건, 구원의 조건이 되는 것으로 오해했다. 실제로 유대교의 전승에 따르면 '게헨나(지옥) 문 옆에 앉았을지라도 할례받은 사람은 아무도 지옥에 떨어지지 않도록 아브라함이 책임을 져 준다'는 내용의 교훈이 있다. 이와 같이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할례가 다른 어떤 의식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형식적인 유대인들의 할례는 무할례와 같다고 선포한 것은 혁명적인 선언이었다. 이러한 바울의 선포로 인해 유대인의 자랑은 쓸모없는 것으로 변하게 되며 형식적인 신앙에서 실제적인 신앙으로의 결단이 요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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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2:26 그러므로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 율법의 규정을 지키면, 할례를 받지 않아도 할례를 받은 것으로 여김받지 않겠습니까?
2:26 그러므로 무할례자가 율법의 요구를 이행하면, 그의 무할례가 할례로 여김을 받지 않겠느냐?
직역: 그런즉 만일 무할례자가 율법의 법령들을 지키게 된다면, 그의 무할례가 할례로서 되어질 것이 아니냐?
2:26 ἐὰν οὖν ἡ ἀκροβυστία τὰ δικαιώματα τοῦ νόμου φυλάσσῃ,
만일 그런즉 그 무할례자가 그 법령들을 그 율법의 지키게 된다면 (동사: 가정법 현재 능동태 3단)
οὐχ ἡ ἀκροβυστία αὐτοῦ εἰς περιτομὴν λογισθήσεται;
아니냐 그 무할례가 그의 (으)로서 할례 되어 질 것이다 (동사: 직설법 미래 수동태 3단)
주해
▣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제도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 본절은 25절에서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사실로 그 반대적인 상황을 다루고 있으며 그 내용에 있어서는 14절과 유사한 사상을 가진다. 즉 '그런즉'(운)이라는 접속사는 앞절과 반대되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으며 앞절과 관련하여 논리적으로 타당한 귀결을 유도하고 있다. 한편 바울의 논리에 의하면 만약 무할례자라 할지라도 율법에 언급된 요구 사항들을 준수한다면 무할례가 오히려 할례로 간주될 수도 있다. 즉 유대인과 같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생후 8일 만에 시행되는 할례를 통해 언약 백성의 규례인 율법을 이행하리라고 서약하는 것을 그 이방인은 할례를 통한 서약은 하지 않았지만 실제적으로는 행했기 때문이다. 한편 '제도'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카이오마'(는 개역 성경의 번역과 같은 의식적인 측면보다는 오히려 언약적 측면이 강한 단어이다. 즉 이 단어는 일차적으로 '사람에 대한 의'라는 개념을 가지며 14절에서의 '율법의 일'과도 연결되는 개념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율법의 요구' 정도가 적당한 번역이다. 이러한 언약적 의미는 '지키면'(퓔랏세)이라는 동사에도 반영되어 있다. 이것은 '맡겨진 물건 등을 철저히 보호하다'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주의 깊게 지키며 보호하는 태도를 보여 준다. 뿐만 아니라 본절에 사용된 시제와 법도 현재 가정법으로서 지속적이며 습관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태도를 암시한다. 이러한 언급은 동시에 당시 유대인들이 이러한 율법의 요구에서 멀리 떠나 있었음을 고발하는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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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7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
2:27 그리고 본래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라도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사람은, 율법의 조문을 가지고 있고 할례를 받은 사람이면서도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정죄할 것입니다.
2:27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지킨다면, 의식법의 문자와 할례를 소유하고도 율법을 범한 너를 심판하지 않겠느냐?
직역: 또한 본성에 의하여 무할례자가 율법을 이행하면 법조문과 율법을 통하여 위반하면 너를 할례자가 판단할것이다.
2:27 καὶ κρινεῖ ἡ ἐκ φύσεως ἀκροβυστία
또한 판단할 것이다 그 의하여 본성에 무할례자가 (동사: 직설법 미래 능동태 3단)
τὸν νόμον τελοῦσα σὲ τὸν διὰ
그 율법을 이행하면 너를 그 통하여 (분사: 현재 능동태 주격 단수)
γράμματος καὶ περιτομῆς παραβάτην νόμου.
법조문 과 할례를 위반자 율법
주해
▣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판단치 아니하겠느냐. - 26절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며 25,26절을 포괄하는 진술이다. 특권 없는 자가 의무를 온전히 이행할 때 특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의무를 행치 않는 자의 결점이 두드러진다는 일반적인 원리가 여기에서도 적용되고 있다. 한편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이라는 표현은 '본래'와 '온전히'를 상호 대비시키면서 이방인의 구원을 이중적으로 강력하게 암시하고 있다. 또한 '온전히 지키면'에 해당하는 헬라어 '텔루사'는 '끝'을 뜻하는 '텔로스'와 연관된 동사로 '끝까지 지키다', 즉 '완성하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인간이 율법을 완전하게 준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본구절이 자구적인 의미에서 율법의 완전한 준수를 뜻한다기보다는 성육신(成肉身)하시어 스스로 율법을 온전히 이루신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믿음의 도(道)가 반영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즉 본절은 이방인이라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율법을 온전히 지킨 것과 같은 효력을 갖는 상황을 전제한 것이다. 또한 '의문과 할례'라는 표현은 12절부터 유대인과 이방인의 비교에 사용된 두 가지 항목들을 요약적으로 진술해 준다. 여기서 '의문'(그람마)은 일차적으로 '문자'란 뜻을 갖고 있으나 본절과 같이 '율법'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 용례는 29절과 고후 3:6에도 나온다. 또한 본문에서 '가지고'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디아'로서 본문을 표면적으로 볼 때에는 '의문과 할례'가 마치 무할례자가 유대인을 판단하는 도구인 것처럼 여겨지나 실제로는 이 말이 유대인에게 걸리어 유대인이 의문과 할례란 이 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는 상황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초대 교회의 할례 논쟁에 대하여는 갈 2장 자료 노트를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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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2:28 겉 모양으로 유대 사람이라고 해서 유대 사람이 아니요, 겉모양으로 살에다가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할례가 아닙니다.
2:28 표면적인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며, 표면적 육신의 할례도 참 할례가 아니다.
직역: 왜냐하면 보이는 것으로 유대사람이 유대인이 아니요. 육체 안에 할례가 보이는 것으로도 아니라.
2:28 οὐ γὰρ ὁ ἐν τῷ φανερῷ Ἰουδαῖός ἐστιν
아니요 왜냐하면 그 으로 그 보이는것 유대사람이 그가 이다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οὐδὲ ἡ ἐν τῷ φανερῷ ἐν σαρκὶ περιτομή,
도 아니라 그 으로 그 보이는 것 안에 육체 할례가
주해
▣ 대저. - 본절과 29절은 유대인들의 잘못을 책망한 2장의 전체 내용을 결론짓는데, 바울은 이를 위하여 '그러므로'라는 종결적 의미의 접속사로 주의를 환기시킨다.
▣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하나님이 주신 고귀한 율법을 가지고 있으며 언약의 표로 할례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외적 요소만으로는 진정한 유대인이 될 수 없다. 한편 '표면적'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토 파네로'는 '외관상' 정도의 의미이다. 이렇게 바울이 외관상으로만 유대인의 모습을 갖고 있는 유대인의 허위와 위선을 지적함으로 진정한 유대인과 그렇지 못한 유대인으로 유대인을 구분하는 것은 그의 서신에서 자주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육적 유대인들은 구원받은 무리라고 할 수 있는 참 이스라엘의 공동체에 소속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바울이 강조한다는 데 있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2: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2:29 오히려 속이 유대 사람인 사람이 유대 사람이며, 율법의 조문을 따라서가 아니라, 성령을 따라서 마음에 받는 할례가 참 할례입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칭찬을 받습니다.
2:29 오직 내면적인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의식법의 문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마음에 받은 할례가 참 할례이다. 이런 사람은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을 받는다.
직역: 오직 속으로 숨겨진 유대 사람이 유대 사람이며, 할례가 마음의 영혼 안에 법조문에 있지 아니하니라.
사람들로 부터 칭찬이 아니요. 다만 하나님께로 부터 있느니라.
2:29 ἀλλ᾽ ὁ ἐν τῷ κρυπτῷ Ἰουδαῖος,
오직 그 으로 그 숨겨진 유대사람이
καὶ περιτομὴ καρδίας ἐν πνεύματι οὐ γράμματι,
그리고 할례가 마음의 안에 영혼 아니하니라 법조문에(있지)
οὗ ὁ ἔπαινος οὐκ ἐξ ἀνθρώπων ἀλλ᾽ ἐκ τοῦ θεοῦ.
아니요 그 칭찬이 아니요 부터 사람들로 다만 부터 (있느니라) 하나님께로
주해
▣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 '이면적'(엔 토 크륍토)이란 '숨겨진'이란 뜻으로 인간의 내적 부분, 즉 영혼의 측면을 말한다. 참 이스라엘은 의문의 율법을 가지 며 육신의 할례를 받고 혈통적 아브라함의 자손됨을 자랑하는 표면적 유대인이 아니라 이렇게 영적으로 유대인이어야 한다.
▣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 이 표현은 마음 가죽을 베고 마음에 할례를 행하여 육신이 아닌 마음에 언약을 기록하라는 구약에 나오는 새 언약의 예언을 연상케 한다. 이처럼 진정한 할례란 육체에 흔적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그가 받은 언약의 은혜를 기억하며 율법을 준수하고 내적인 생활에 충실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할례는 '마음에' 받는 것이다. 바울은 이를 보다 강조하기 위하여 '마음'이란 말과 동의어로도 사용될 수 있는 '신령'(프뉴마)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다.
▣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 진정한 유대인이 받을 칭찬은 인간에게서 나와 종교적 허영심을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한편 '유대인'이라는 이름은 구약의 '유다'로부터 따온 것인데, '유다'는 히브리어 '야다'에서 나온 것으로 '찬양'이라는 뜻이다. 이 유다라는 이름이 지어질 때나 야곱의 임종 시 그가 예언했던 것처럼 진정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만 찬양을 돌리며 그에게서만 칭찬을 기대해야 한다.
첫댓글 저도 오랜 시간동안 로마서를 집중하면서 얻은 건데 구조를 통해서 분별하는 방식이 전체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더군요
서론/ 1:1-17 복음은 아들의 죽음과 부활로 성경의 약속으로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고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것임
칭의/ 1:18-5:11 복음이 필요한 이유는 죄들을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음으로 의롭다함 얻음 구약도 동일함
성화/ 5:12-8:4 그리스도와 연합으로 죄의 법에서 그리스도 예수안의 생명의 영의 법으로 해방의 믿음에 이름으로 거룩하게 됨
영화/ 8:5-39 영에 속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육신을 따르지 않고 영을 따르는 실행으로 만 승리하여 영광을 받음
주권/ 9:1-11:36 하나님은 절대적인 주권을 통해 이스라엘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방식이 이방인도 동일하게 대하심
실행/ 12:1-15:13 하나님과의 관계와 교회생활과 사회와 이웃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복음전도의 사명의 실행과 보상
결론/ 15:14-16:27 복음의 완성과 사명 이 신비의 계시인 복음을 위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일꾼들과 교회의 비밀
이는 제가 로마서를 연구한 칭의 성화 영화에 관한 삼중구조를 중심한 방식입니다.^^
아멘
죄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세가지 심판으로 받을 형벌
1. 진리대로 심판하심 2:2
2. 율법대로 심판하심 2:12
3. 복음으로 심판하심 2:16
죄들은 죄인이기에 범하는 악한 일들로 죄의 열매가 죄들이고 이 죄들은 하나님의 진노로 인하여 반드시 심판으로 정죄 즉 유죄판결로 형벌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