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光化門)
서정주
북악(北岳)과 삼각(三角)이 형과 그 누이처럼 서 있는 것을 보고 가다가
형의 어깨 뒤에 얼굴을 들고 있는 누이처럼 서 있는 것을 보고 가다가
어느새인지 광화문 앞에 다다랐다.
광화문은
차라리 한 채의 소슬한 종교(宗敎).
조선 사람은 흔히 그 머리로부터 왼 몸에 사무쳐 오는 빛을
마침내 버선코에서까지도 떠받들어야 할 마련이지만,
왼 하늘에 넘쳐 흐르는 푸른 광명(光明)을
광화문 - 저같이 의젓이 그 날갯죽지 위에 싣고 있는 자도 드물다.
상하 양층(上下兩層)의 지붕 위에
그득히 그득히 고이는 하늘.
위층엣 것은 드디어 치일치일 넘쳐라도 흐르지만,
지붕과 지붕 사이에는 신방(新房) 같은 다락이 있어
아랫층엣 것은 그리로 왼통 넘나들 마련이다.
옥(玉)같이 고우신 이
그 다락에 하늘 모아
사시라 함이렷다.
고개 숙여 성(城) 옆을 더듬어 가면
시정(市井)의 노랫소리도 오히려 태고(太古) 같고
문득 치켜든 머리 위에선
낮달도 파르르 떨며 흐른다.
요점 정리
성격 묘사적, 상징적, 전통적
주제 광화문에 깃든 광명과 평화에의 소망
출전 <현대 문학>(1955)
어휘와 구절
광화문 : 경복궁의 정문으로 조선 태조 4년에 창건되어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나 고종 1년 경복궁과 함께 재건되었음. 일제 때 조선 총독부 건물이 들어서 자리를 옮겼고 6.25 전쟁 때 소실됨. 현 건물은 제 4공화국 때 지은 것임.
북악 : 서울 북방, 즉 경복궁 뒤쪽에 위치한 산
삼각 : 북한산의 다른 이름. 인수봉, 국망봉,백운대 세 봉을 삼각산이라 함
날개쭉지 : 여기서는 광화문의 추녀가 하늘로 날아갈 듯 위로 치켜진 모양을 가리킴.
시정 : 인가가 모인 곳
북악과 삼각이 형과 그 누이처럼 서 있는 : 광화문의 배경을 이루며 나란히 서 있는 북학산과 삼각산을 오누이로 비유(직유법, 의인법)한 것으로 이는 조국 산천에 대한 애착과 사랑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광화문은 차라리 한 채의 소슬한 종교 : 광화문이라는 이름뿐만 아니라 그 자태 역시 평화와 광명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담고 있는 듯이 보인다는 뜻
왼하늘에 넘쳐 흐르는 광명을 / 광화문 ---저같이 으젓이 그 날개쭉지 우에 싣고 있는 자도 드물라. : 광화문의 자태 , 그 가운데서도 하늘을 향해 쳐들린 지붕의 선에는 평화와 광명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깃들여 있다는 뜻이다. 즉, 광화문의 우아한 자태와 기품 속에 그러한 소망이 깃들여 있다는 뜻이다.
그득히 그득히 고이는 하늘 / 윗층엣 것은 드디어 치- ㄹ ㅊ-ㄹ 넘쳐라도 흐르지만, : 푸른하늘의 색감을 물(샘물)의 이미지로 변용시켜 철철 넘쳐 흐르는 것으로 표현하였다. 푸른 하늘의 밝은 이미지를 역동적인 심상으로 전환시키고 있는 공감각적 이미지이다.
지붕과 지붕 사이에는 신방같은 다락이 있어 : '신방'은 순결과 사랑이 충만한 공간을 상징하며 이는 '옥같이 고우신 이'라는 구절과 이어지면서 이 '다락'이 우리가 지향하는 이상적인 삶의 공간임을 암시한다.
시정의 노랫소리도 오히려 태고 같고 : 시적 자아가 광화문에 서린 민족의 혼과 전통을 깊이 호흡하고 ,그 아름다움과 그 속에 깃든 간절한 염원에 깊이 감동되었음을 암시한다
파르르 쭉지 치는 내 마음의 메아리……. : 광화문의 아름다움과 그속에 깃들어 있는 숭고한 평화와 광명의 사상에 감동된 시적 자아의 마음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한 부분이다.
이해와 감상
이 시는 광화문의 아름다움을 민족의 마음으로 본 시이다. '광화문은 차라리 소슬한 종교', '푸른 광명을 날개 쭉지 우에 싣고', '지붕 위에 그득히 고이는 하늘', '신방 같은 다락', '고우신 이' 등의 표현들을 바탕으로 광화문의 미(美)를 다시 음미할 수 있다. 특히 , 이 시에서는 서정주의 시에 서 흔히 볼 수 있는 불교적인 것 , 신선 사상적인 것, 동양적인 것 등이 자취를 감추었다.
이 시는 광화문의 배경에 놓인 너무나도 친숙한 국토와 높고 파아란 하늘, '광화문'이라는 이름에서 연상되는 '광명한 빛' 을 통하여 우리의 전통 사상이 높고 밝고 성스러움을 환기시켜 주고 있다. 특히 지붕의 곡선미에서는 하늘과 광명을 숭상하던 조상의 슬기를 찾아냄으로써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고 있다.
참고 자료
서정주의 삶과 문학
1. 출생 및 성장
1915. 5.18.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질마재 마을에서 출생. 호는 미당(未堂:아직 성숙하지 않았다. 아직 어른이 되지 않았다 는 뜻). 다츠시로 시즈오는 그의 창씨개명시 이름. 일제시대 창씨개명해 근대교육을 받은 아버지 덕분에 비교적 유복하게 학문에 정진할 수 있었다. 마을에서 한학을 배우다 줄포공립보통학교 진학 후 졸업,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에 보결로 입학한 후 2학년 때 광주학생운동 1주년 기념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퇴학당하고 1930년 구속됐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기소유예 됨. 편입한 고창고등보통학교에서도 권고 자퇴당하는 등 학교 생활은 평탄치 못했음. 중앙불교전문학원(동국대 전신)수학(1935-1936). 젊은 시절 정신분열증세를 보인 적도 있었으며, 자살 미수사건도 있었음. 1933년 [동아일보]에 시<그 어머니의 부탁>을, [시건설(詩建設)] 7호(1935.10)에 시 <자화상>을 발표하며 등단.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 당선(1936), 김광균, 김달진, 김동리, 오장환, 이용희, 함형수 등과 시전문동인지 [시인부락]을 창간, 주재. 해방 후 좌우익 대립의 혼란시에 순수문학 또는 순수시라는 개념을 내걸고 우익의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결성(1946), 시분과위원장을 역임하며 당시 문단을 주도한 좌파의 계급문학 또는 경향문학에 반대하여 조선문학가동맹과 맞섬. 남조선대(동아대) 창립시 교수(1946), 동아일보 사회부장 및 문화부장, 정부수립후 문교부 초대 예술과장(1948), 조선대 부교수, 서라벌예대(동국대와 중앙대 문예창작학과의 전신)교수, 동국대 교수(1959-1979) 및 종신교수, 1949년 한국문학가협회 창립멤버로 시분과위원장, 1954년 예술원 창립과 함께 예술원 종신회원으로 추대되었고 한국문협 부이사장(1969-1972) 및 이사장(1977), 한국현대시협회장(1970-1974) 역임. 아세아자유문학상(1955), 대한민국 예술원상(1966), 중앙일보 문화대상 본상(1980)수상. 한국을 대표하는 문인으로 노벨 문학상 후보에 추천(5차례) 됨. 서정주 시전집(2권. 민음사) 출간(1991). 부인 방옥숙(方玉淑)씨 별세(2000.10)이후 곡기를 끊고 맥주로 연명하다 2000.12.24. 13시 서울 강남 삼성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85세). 재미 변호사와 재미 심장 전문의인 승해(升海)와 윤(潤) 두 아들을 둠.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선영에 묻힘. 정부는 12.26 고인에게 금관 문화훈장을 추서함.
2. 활동 및 작품경향
생명파(인생파) 시인으로 사상기조는 영원주의(영생주의), 문화사조상 격정적 낭만주의, 예술관은 심미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전통적 서정세계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토착적인 언어의 시적 세련을 이루었고, 시 형태의 균형과 질서가 내재된 율조로부터 자연스럽게 조성된 점 등이 커다란 문학사적 성과로 평가된다. 생전에 자신의 시세계를 스스로 생명파, 또는 인생파로 규정하고 1949년 「조선명시선」을 편찬하여 ≪시인부락≫과 ≪생리≫의 동인들이 모두 여기에 포함된다면서 이들은 인간 본연성의 회복을 지향하는 휴머니즘을 근간으로 삼고 있다고 말함. 그는 고향의 원초적 서정과 외국의 문학세계의 영향을 받아 30년 대를 풍미한 김기림과 이상의 모더니즘이나 초현실주의를 극복 대상으로 삼는 한편 20년대의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시적 경향과도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니체로 이어지는 신성과 초인정신에 대한 관심, 보를레르와 이백이 강조했던 인간의 질곡과 자연의 시심, 유.불.선의 동양사상과 샤아머니즘 및 전통정신사상을 두루 섭렵하고 광범위한 문학적 체험을 거쳐 김영랑의 순수시와 우리말의 아름다움에 강한 애착을 보이며 민족전통과 정신의 세계를 형상화하였다. 첫시집 <화사(1938)> 에서부터 마지막 15번째 시집 <80 소년 떠돌이의 시(1997)> 에 이르기까지 정열적으로 새로운 시세계를 일궈내 해외에 대표 한국시인으로 소개되고 있으며 '시의 학교', '시인 중의 시인', '큰 시인들 다 합쳐도 미당 하나만 못하다', '시의 정부 (政府) ' , '한국이라는 부족 언어의 주술사' , '시선(詩仙)'으로 불릴 정도로 한국시의 최고 경지를 일궜다는 평을 받고 있는데 이는 동국대 및 서라벌예대 교수로 재직하며 배출한 제자 문인들이 현재 문단의 중추를 이루는 등 많은 시인과 문인제자를 양성 한 몫도 크다 하겠다. 등단 이후 60여년간 미발표작 포함 1천편에 가까운 시를 다산(多産)하였는데 이는 국내에 유례가 없고, 외국에서도 독일의 괴테나 헤르만 헤세 정도가 비견될 정도임. 한국전쟁 후 반공 국시가 더욱 강화되면서 그의 시적 경향이 남한 문학사의 주류로 자리잡았고, 이후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무려 10편 가량의 시가 실리는등 다수의 작품이 교과서에 수록됨으로써 국민의 보편적 정서에도 상당히 깊숙한 영향을 주었으며 한국 문학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소설의 김동리와 비견되는 시문학의 교주(敎主)로 ‘미당 사단’이라는 거대 계보가 형성됐으며 이는 교수시절 기른 이원섭, 이제하, 황동규, 고은, 김초혜 등 수많은 제자와 신춘 문예 등 심사위원으로 등단시킨 문인등이 학계 언론계 및 주류 문단의 중진으로 포진하고 각종 문인협회조직에의 참여와 정권의 비호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이룬 결과였다. 일제 말기 징병을 종용하는 글과 친일시를 발표하는 등의 친일행적으로 반민족 매국친일파로, 해방 직후 친일파를 대거 중용, 정치기반으로 삼는 동시에 반공을 국시로 한 이승만 정권과의 관계, 80년 신군부 등장 이후 전두환(全斗煥) 대통령 후보의 찬조 연사, 대통령 당선축하 축시헌사, 광주항쟁과 전두환정권 수립 와중에 TV방송에 출연해 행한 전두환 (全斗煥) 군사파쇼정권에 대한 지지 발언등의 정치 참여로 일제 및 독재권력 주변을 맴돌며 훼절한 문인이라는 불명예와 “아부와 굴종”이라는 지탄 및 반민중 반민주 친독재 야합인물로 불리는 오점을 남김. 1992년 월간 ‘시와 시학’에 친일행적 시비와 관련, “국민총동원령의 강제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징용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친일문학을 썼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고 공인함. 국내 민주화가 진척되면서 후배들의 따가운 비판 대상이 됐고, 과거의 시 세계도 빛이 바램. 문학교육 현장에서도 부정적 인식이 확산돼 국정교과서에서 그의 시가 잇따라 배제됐으며 검인정 교과서도 일부만이 제한적으로 수록됐다. 이 때문에 자신이 추천한 시인 고은씨 등이 차례로 등을 돌린데 대해 서운함을 털어놓기도 했으며. 그의 와병을 계기로 일부 계간지와 언론이 미당의 부끄러운 과거와 문학과의 상관 관계에 대한 논의를 벌이는 등 그의 평가와 관련해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3. 서정주의 시세계
초기(화사집 - 해방전)
보들레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악의미를 추구하는 악마적이며 원색적인 시풍을 보임. 첫 시집 [화사집(1938)]은 미당의 이러한 제 1기 시세계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토속적인 분위기를 배경으로 한 인간의 원죄의식과 원초적인 생명력을 읊으며 자의식과 관능적 욕구에 몸부림 치는 젊음과 원죄적 세계관을 치열하게 드러냈다.
중기Ⅰ(귀촉도-서정주 문학전집)
인간의 운명적 업고(業苦)에 대한 인식이 동양사상의 영향으로 영겁의 생명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전환됨과 동시에 초기 시의 열정이 한 차원 높게 승화됨. [귀촉도(1948)]는 미당의 두 번째 시집으로 표제시에서부터 동양적인 귀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분열이 아닌 화해를 시적 주제로 함. 이런 변화는 갈등과 화해라는 심리적 변동과, <국화옆에서>, <밀어> 등에서 볼 수 있듯이 토착적 정서와 고전적 격조로의 지향이 크게 작용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초기시에서 보여준 젊음의 열정이 순화되어 한국의 전통 가락과 한의 세계로 전환되기 시작한다.
1950년대 중반 이후: [서정주시선](1956년 간행)의 <풀리는 한강 가에서>, <상리과원> 등에서 민족의 전통적인 한(恨)과 자연과의 화해를, <학>, <기도> 등에선 원숙한 자기 통찰과 달관을 보여주는데 이로써 시인은 원죄나 젊음의 방황을 극복하고 낙천적으로 변모한다. 그 낙천성은 한의 극복과 함께 적당한 체념으로서 원만하게 삶을 끌어안으려는 자세를 나타낸다 하겠다.
중기Ⅱ (신라초-동천)
불교와 토착적 전통의 융화를 바탕으로 한 언어의 조탁. 샤머니즘과 유교, 노장사상 등 폭넓은 동양사상을 탐구하며 초기부터 이어져온 윤회 사상과 인연설에도 눈을 돌린다. 미당의 시는 [신라초]에 이르러 새로운 정신적 경지에 도달한다. 그에게 있어 초월적인 비전의 신화적 거점이 되고 있는 신라는 역사적 실체라기보단 인간과 자연이 완전히 일체가 된 상상의 고향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신라초(1961)]에서 불교사상에 기초를 둔 신라의 설화를 제재로, 영원회귀의 이념과 선(禪)의 정서를 부활시켰으며 생명의 근원적.윤회적 탐구로 나가가려는 그의 노력이 신라의 불교적 세계관으로 천착되어 나타난다.
시집 [동천](1969)에서는 불교의 상징세계에 대한 관심이 엿보임과 동시에 종교나 세계관의 차원을 넘어 사람뿐 아니라 귀신은 물론 전 우주와 공감할 수 있는 시적 깊이와 폭을 지니게 된다.
후기 (질마재신화 이후)
1970년대 고향 질마재의 유년 시절로 회귀하여 또 다른 시 세계를 개척한다. [질마재 신화(神話)](1975)에서 시인은 전통적인 ‘이야기꾼’으로 변모하여 촌락 사회의 일상에서 우리 고유의 전통을 발굴, 질펀한 토속어로 흥미진지하게 이야기함으로써 우리의 이러저러한 삶을 신화적 단계로 끌어올리는 탁월한 능력을 보임. 1977년 이후 킬리만자로에서 남태평양의 조그만 섬까지 세계 곳곳을 떠돌며 그곳의 풍물과 사상, 종교, 철학 등을 시로 담는 한편 1980년대 정치적 굴곡 속에서도 끊임없이 시를 창작한다.
말기
만년의 삶을 왕성한 시작으로 보내며 노익장을 과시한 시인은 세계 여행의 체험과 자연에서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1990년 ‘산시(山詩)’ 창작에 착수하여 세계의 산 이름을 소재로 산의 상징과 의미 그리고 이미지를 형상화한 시집 [세계의 산 시](1990), [늙은 떠돌이의 시](1993년), [80 소년 떠돌이 시](1997년)를 선보이며 청년기부터 간직해온 신화적 상상력을 세계 각국의 지리와 민화 전설로 까지 지평을 넓히는 등 세계 여행 중에 바라본 남의 세계마저도 우리의 신화체계 속에 간단없이 용해시키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된다.
< 자료출처 : http://user.chollian.net/~bioman/ilban/guker/guksa/hyun/jakga/seojungju.htm >
첫댓글 평소 국화옆에서~
서정시로 독자들의 심금을
울려 주었던 미당 서정주님의
명품시 입니다
서정주 시인의 자라온
환경과 약력 존경스럽습니다
나중에 시간 내서
문학기행으로 전북 고창으로
가보고 싶네요
일제시대의 불운의 시절에
평화와 광명을 꿈꾸며
써 내려간 광화문
애잔한 마음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