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남도장군 이방언과 기구한 가족사
▶ 부유하고 학식 높은 양반이던 이방언 장군은 용산면 월림에서 살며 동학농민혁명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장흥 석대들전투 패배 후 체포되어 장흥 장대에서 아들 성호와 함께 처형되었다. 가족은 풍비박산이 되었고 유품 한 점 남지 않았지만, 피신해 일본으로 건너가 살았던 외동딸의 자식들이 70년대 용산을 찾아와 서로 눈물을 흘렸다.
이방언 장군이 저하고 딱 100살 차이에요. 내가 1938년생인디 그분은 1838년에. 그분이 용산면 묵촌에서 태어났는디 중자 길의 외아들로 태어나셨는데. 젊어서 자기 아버지가 잘 살았기 때문에 학자시고, 자기 아버지 호가 묵암(黙庵)이고. 학자시고 또 집안에서 훈학도 하시고 하는 학자이시고 또 살림도 여유가 있는 부호집안의 아들로서. 지금 생각하면 그 기득권을 버리고 왜 동학에 가입을 해가지고 가정을 이렇게 탕진시켜가지고 우리들까지 이렇게 좀 곤란하게 대접도 못 받게 됐는지 참 의문스런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 분이 젊어서 하나 전설적인 이야기 같은 얘기가 있는데 묵촌서, 동네서 묵촌부락에서 호랭이가 나타났다고 동네가 소동이 났어. 소동이 났는데 동네사람들이 피난을 가고 장정들이 쫓아나오고 야단법석이었는데, 이방언 장군 그분이 젊었을 때 나와서 그 호랭이를 다스렸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호랭이를 손으로 어루만지고 길을 들여서 동학농민혁명 때 그 호랑이를 가지고 유일하게 이용을 했다는 그런 전설적인 얘기가 있고. 그 전설적인 이야기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또 동학농민혁명 당시 도르메 라는 들판에서 진을 치고 훈련을 할 때, 부대별로 진지가 달랐을 거 아니요 아마. 어느 부대는 대창부대고 어느 부대는 소총부대고 어느 부대는 머 무기들 별로 틀리는데. 저닉에 달밤에 이 조총, 화승총 부대가 있었는데 그 부대를 갑자기 기상을 시켜가지고, “너희들 나를 쏴라.” 뺑 둘러 자기를 중심으로 뱅 둘러 세와놓고. “이 총을 저닉에 자기 전에 실탄을 전부 장전을 해놓고 자라.” 갑자기 기상을 시켜가지고 자기를 쏘라 그러니까 누가 대장을 쏠 부하가 어디가 있겠습니까. 그래 안 쏘고 그러니까 호통을 치면서 난리를 치니까 할 수 없이, 주위 뺑 둘러 세와놓고 총을 쏘라니까, 자기를 향해서 총을 쏘게 됐어요. 그 둘러 세와놓고 총을 쏘았는데 결국은 실탄을 골반에서 내노면서 깔깔깔 웃더라고 그랍니다. “나는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 그것을 기도문을 외우면 변화무쌍한 도술을 한다.” 하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막 그런 것 같아요. 아믄 실질적으로 그랬겄어요. 인제 자기 전에 실탄을 전부 빼불고 화약만 너놓고 쏘아라 그랬겄지요. 그런 전설적인 얘기가 있고. 대원군과 접선했다는 것은 사실인데. 동학이 남접북접이 갈등이 있어가지고 남접은 서울로 치고 들어가야 한다, 북접은 전투를 해선 안 된다, 하는 갈등이 있었어요. 그래가지고 그 박00 그 냥반이 소위 남접대표로 해가지고 협상을 했는데, 그래가지고 서울로 치고 올라가자 하는 여론이 일치가 되야가지고 공주까지 밀고 올라가지 않습니까? 그리고 대원군을 만났다는 것은 하나의 남접 대표로 해가지고 동학대표를 부르니까 선발되는 것이 이방언 장군. 선발 되아가지고 대원군을 운현궁에서 만나가지고, 그 사이에 빨리 거사를 해서 서울로 밀고 올라 오니라, 하는 밀령을 받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가지고 그 냥반이 뭐 삼대 장군이시 사대 장군이시 전국적으로 그라는데. 여그서 잡혀가가지고 재판을 받을 때 유일하게 살아남았거든요, 사형선고를 안 받고. 그것은 대원군이 아무리 뒷전에 뒷방에 안거서 안겄던 영감이라 할지라도 대원군의 주선이 있었기 때문에 그랬다, 하는 얘기를 내가 직접 그 노인들한테서 듣고, 그래서 이제 그런 얘기가 되었습니다. 풀려나서 내려오셔가지고 어 보성군수 같이. 보성군수는 동학을 협조했다는 누명으로 같이 잡혀가지고 무혐의로 풀려났는데, 보성군수하고 같이 내려왔어요. 그래가지고 장흥을 못 오고 보성, 그때는 장흥이었습니다만은 회천면 이의원 씨댁에 은둔해가지고 있다가 전라감사 이도제의 명에 의해서 다시 재 체포가 돼서 사형을 받았던 것입니다. 회천면 이의원 씨댁에서 잡혀가지고 장흥 장대, 지금 장흥서초등학교 자리에서 화형을 당했죠, 부자이. 성자 호 자기 외아들과 같이 장흥 장대에서 화형, 우지, 나무에 묶어놓고 짚으로 우지를 씌어서 산사람을 불을 질러 죽이는 걸 보고 화형이라 하는데, 화형을 시켰어요. 그러니까 그 후로 동학이 장흥 석대전투 이후로 전부 가족이 뿔뿔이 헤어지고 피난을 댕길 때, 재산은 살림살이사 이 사람이 가져가고 저 사람이 가져가고, 사람이 없으니까, 그 난리가 났고 암것도 없이 되아부럿는데 유품이 남겠어요. 그래서 그 냥반이 입었던 갑옷이 있었는데 6·25 전쟁 전후에 좌익우익 할 때 나로 하면 종형 그냥반이 동석인데, 그 냥반이 잘못돼가지고 유치장 생활을 몇 개월 했어요. 거 갔다와가지고 무서우니까 불을 질러부렀다는, 태와부렀다는 얘기가 있고. 또 최근에 일본에서 자료를, 박명수 교수가 찾은 자료를 보면 석대전투 패전 이후 왜놈들 부대가, 그 때 집은 월림인디 월림리에 이방언 집을 습격을 했어요. 가서 보니까 말 두 필하고 소 세네 마리가 묶어져가 있꼬 사람은 없어서 그넘을 가져왔다. 그것을 할 때 법원이란 말은 교령 외엔 법원이란 말은 안 썼는데, 이 법원댁에를 가서. 그 때 법원은 최시형씨 하나뿐인데 이 법원댁에를 습격을 하니까, 그 눈밭에를 가니까 호랭이 발자국이 있고. 그 마을을 가니까 그런 내용이 기록이 되야 있는데. 말 두 필 소 3마리가 묶어져 있어서 그넘들을 가지고 왔다, 집은 주위를 집은 불 지르고. 그 집만 불 지른 게 아니라 마을 전체를 불질러 부렀어요, 왜놈들이. 월림마을을. 나로 하면 아버지가 갑오생인데, 갑오년에 났는데. 월림서 술리재 골짜기라고 묵촌 뒤에 하고 월림 뒤에 하고 그 사이에 골짜기 있어. 그리 피난을 가는데 그 해 난 아이가 할머니 품에서 아주 울어싸니까, 너 데꼬 갔다 온 가족이 다 죽겠다, 그래가지고 다리 밑에다가 보로 싸서 놔둬부렀어. 우리나 살자 그라고. 그러니까 뒤에 따라간 일꾼들이, 마님 그래선 안 됩니다, 싸가지고 와가지고 그 애기를 살려서 맡은 사람이 있었고, 거 그랬다는 얘기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 (이방언 장군에게 딸이 한 분 계셨다는데….)
일꾼들이 여럿이었는데 영암 시종면에 유씨란 분을. 그 냥반(이방언) 딸이 외동딸이 하나 있는데, 10댓 살 묵어서 그 가정이 뿔뿔이 헤어지고 난 무렵에 오고 갈 데가 없으니까 유씨란 분을 따라가부렸어. 거 이제 우리는 뭐 전연 모르고 있는 사실인데 75년도에 1975년도에 재일교포가 두 분이 우리 큰 집을 찾아왔어요. 한 50대하고 60대하고. 아니 그 냥반들이 나로 하면 고모할머니의 아들들인데, 자기 어머니 얘기를 듣고 여기 외할아버지께서는 그렇게 훌륭한 분인데 그 냥반들 내종간이 외갓집에 그 형제간들이 살았는가 어쨌는가 몰것다, 일본서. 그래갖고 돌아가셨는데 한국을 일부로 나와 가지고 영암서 우리집을, 그때 정종 한 병하고 과일 좀 사가지고 왔든만. 그래 거그서 얘기를 하는 것을 보니까, 그때 우리 백부님이 90살 넘은 백부님이 계셨는데. 그 울고 울면서 하는 얘기가 자네들도 살았다고 말이여, 있었구나. 그 때 얼굴도 모르고 인사말을 하면서 얘기를, 서로가 얽혀진께 서로 얘기를 하니까, 자기에게는 고모 아들들이 살아가지고 왔으니까 얼마나 감격했것어요. 서로 울면서 얘기를 한 기억이 나고. 또 그 분들이 묘 성묘를 하고 일본을 갈 적에 나하고 편지 관계가 몇 년 동안 있었는데, 지금은 돌아가셨는지 아무런 연락도 없고.
자료번호 / 06_12_04_FOT_20160707_LJC_0001
제보자(구술자) / 이종찬(남, 79세, 용산면 묵촌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