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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집 | 문예바다 신인상 수상 작가들 |
세 바퀴
권도희
그 여자들, 나이 들수록 사는 것이 허전해 뭐라도 좀 배워 볼까 싶어 그 평생교육원에 나왔던 거래. 그리고 각자 고른 것이 불교한문반이었어. 몇 주 나가는 사이 교실에서 마주치면 눈인사만 하는 사이였는데, 왠지 서로 끌리더라나. 차츰 말로 인사를 하게 되고, 옆자리에 앉게 되고, 그러다 그날 처음으로 수업을 마치고 카페에 모여 앉았대. 그런데 전에도 여러 번 그랬던 것 같은 기시감이 저마다 들더라지.
어교선魚喬善, 이 여자는 쉰셋 가정주부인데 독실한 불교도야. 자기가 다니는 절의 신도회장을 맡아서 적극적으로 봉사활동을 펴고 살림살이도 돕고 있대. 커트 파마머리에 키는 자그마하고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친근하게 생겼어. 뭐 말로는 다른 신도들에게 좀 아는 체하고 싶어서 공부하러 다닌다는군. 올 때마다 학우들이 입 다실 것을 가져와 나눠 주곤 하지. 그 반은 수업 시작 전에 간단한 의식을 치러. 삼귀의와 반야심경을 봉독한 뒤 한 2, 3분 입정入靜에 든 다음 수업을 시작해. 그때 그 의식을 이 여자가 목탁을 두드리며 주도했어.
윤재희尹載稀는 쉰두 살이야. 긴 머리를 늘 바나나핀으로 올려 묶고 다니는데, 중키에 아주 예쁘장하게 생겼어. 딸 하나 데리고 혼자 산대. 불자긴 한데 제대로 아는 게 없어 공부하러 나온 거래. 말수가 적고 참 조용한 사람으로 앞에 나서는 법이 절대 없어. 그런데 몸을 어찌나 재바르게 놀리는지 교수에게 차 대접하는 일이며 쉬는 시간에 칠판지우개 터는 일이며, 나중 교실 바닥에 떨어진 잡동사니 치우는 일까지 언제 했는지 모르게 다 해치우는 거야. 그리고 누가 볼펜을 찾느라 주머니를 뒤지고 가방을 뒤지고 하면 바로 자기 볼펜을 내밀어 줘. 거의 없는 사람 같으면서 어느 자리에나 꼭 필요한 그런 사람이지.
주여정朱如貞은 마흔네 살 미혼으로 직업이 사진작가래. 가톨릭 교리도 성경공부도 다 해 봤지만, 제 마음이 불교철학에 끌려 단지 학문으로 접근하는 거라더군. 그래서 법당 예절이나 참예 예식도 제대로 모르는 얼치기야. 공부 시작 전 의식 때도 이 여자만 입을 못 벌리고 민망해하며 우두커니 서 있어. 여자치고는 좀 큰 키에 중성적인 느낌이야. 흉한 얼굴은 아닌데 표정이 없어서 딱딱해 보이는 것 같아. 근데 공부는 그 반 여자 열하나 남자 여섯 모두 열일곱 명 중에서 제일 열심히 하는지, 교수에게 질문도 많고 뭔가를 연신 빼곡하게 노트해. 칠십이 넘은 교수는 그 모습이 가상한지, 성가셔하지 않고 언제나 그녀의 질문에 성심으로 답해 주고 이해시켜 주곤 해.
이 세 여자는 자기 취향대로 차를 주문해 마시면서 우리 언젠가 이렇게 모인 적이 있었던 것 같지 않아요? 주여정이 물었고, 맞아요! 어교선이 맞장구를 쳤어. 윤재희는 미소를 물고 고개를 끄덕이고.
각자 간단한 자기소개 끝에 여정이 먼저 입을 열었어.
“난 오늘 오비이락烏飛梨落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슴이 뭉클했어요. 울 뻔했다니까요.”
그건 순전히 우연한 일이었지만 결과가 아주 참담해서 마음에 사무칠 만도 한 일이었어. 글쎄 생각해 봐. 배나무에 앉았던 까마귀가 날아올랐는데, 그 반동으로 때마침 어린아이 머리통만 한 배가 떨어지면서 그 아래 똬리 틀고 볕을 쬐고 있던 뱀의 머리를 내리치고 말았잖겠니. 뱀은 죽어 가면서 이를 갈았어.
“까마귀 네 이놈! 내가 널 가만둘 성싶으냐.”
뱀은 죽어서 주둥이가 길고 송곳니가 날카로운 멧돼지로 태어났어. 어린 멧돼지는 활엽수가 빽빽이 들어찬 산속에서 칡뿌리를 캐기 위해 긴 주둥이로 흙을 파헤치다가 큰 바윗덩이 하나를 뒤로 굴리게 됐단다. 그런데 그 바윗덩이가 굴러가 풀숲에서 알을 품고 있는 꿩의 머리를 덮쳐 버린 거야. 꿩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지. 그 꿩은 바로 전생의 까마귀였단다.
졸지에 죽임을 당한 꿩은 사람 몸을 받고 태어나 사냥꾼이 되었어. 하루는 산을 뒤지다가 먹이를 찾아 어슬렁거리는 멧돼지를 발견했구나.
“너 잘 만났다!”
화살을 메겨 잔뜩 시위를 당겼다 놓았는데 설맞은 멧돼지는 걸음아 나 살려라, 꽥꽥거리며 도망을 쳤어. 사냥꾼은 기어코 멧돼지를 잡으려고 그 뒤를 쫓기 시작했단다.
그 모습을 마침 천태天台 지의智顗 대사가 봤어. 사냥꾼이 대사 앞에 와서 멧돼지가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보았느냐고 묻자, 대사는 사냥꾼에게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어.
“더 쫓지 마시게.”
그러고는 그들의 삼생에 걸친 일을 이야기해 주었어. 사냥꾼은 활과 화살을 분질러 내던지고 더는 살생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산에서 내려갔단다.
“그래서 인연이 귀하고 업業이 무겁다는 거잖아요. 못된 애들이 제 부모에게 ‘누가 낳아 달랬어?’ 하고 악을 쓰며 대드는데, 그건 자식이 전생에 지은 업으로 그런 부모 밑에 태어나는 거지 부모가 자식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네요. 뭐 자식이 부모 전생의 빚쟁이라서 그 빚 받으러 왔다는 말도 있지만.”
교선이 진지하게 대답하자, 재희가 슬며시 웃고는 한마디 덧붙였어.
“오비이락은 우연히 생긴 일이지 작심하고 벌인 일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지의대사가 더 큰 원결怨結과 악연으로 번지지 않게 하려고 해원解冤시켜 준 거지요.”
“난 이참에 제대로 공부해 보려 해요. 늘 시작만 하고 끝을 못 봤었는데, 지금 하는 공부 참 재밌어요.”
여정의 말에 교선이 나섰어.
“그래요, 우리 교수님 정말 대단한 분이거든요. 얼마나 박식한지 무슨 질문을 해도 즉석에서 대답해 주시는 거 봐요! 그분 지식을 따라가려면 우리는 평생 머리 싸매고 공부해도 못 따라갈 거야. 그 얼굴이며 몸매며, 연세가 있으셔도 얼마나 멋져!”
교선이 침을 튀기며 교수를 떠받드는 말에 모두는 웃었어.
그렇게 시작된 그들의 관계는 날로 발전해 갔어. 교선과 여정은 짝꿍이 되어 교실에서는 늘 옆자리에 앉았고, 재희는 맨 뒷자리에 앉아 여전히 그들을 주시했지. 그리고 공부가 끝나면 카페에 앉아 자기들 나름대로 뒤풀이를 하곤 했어. 아마 배움도 배움이겠지만 셋이 만나는 즐거움이 더 컸는지도 몰라.
가끔 여정이 결석하는 일이 있곤 했는데, 그때는 세 사람 단톡에 자기가 가 있는 곳의 풍경 사진과 함께 문자를 날렸어.
― 경치는 좋은데 수업 못 들어가서 기분 꿀꿀. 오늘 공부한 거 꼭 얘기해 주기.
여정이 결석으로 하지 못한 수업 내용을 얘기해 주는 사람은 언제나 재희였어. 핸드폰으로 교수의 강의를 녹음해서 전송해 주고, 칠판 글씨는 사진을 찍어서 전해 주곤 했지. 어찌 보면 여정보다도 재희가 더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이었는지도 몰라. 실력은 확실히 뛰어나지만 좀 어눌한 교수의 말투에도 불구하고 재희는 자기가 이해한 어구를 거의 완벽하게 여정에게 전해 주는 거였어.
무슨 일이든 선동은 여정이 하고, 주도는 교선이 하고, 재희는 조용히 분위기를 잡아 주었어.
* * *
어느 날 중간휴식시간에 재희가 칠판지우개를 털러 나가며 여정에게 쪽지를 쥐여 주었어.
― 수업 끝나고 민들레에서 우리 둘만 만나자.
교선을 제외한 이유가 궁금한 채로 수업을 마친 여정은 교선과 재희보다 앞서 현관 쪽으로 걸으며 말했어.
“나 오늘은 일이 있어 먼저 갈게요. 언니들끼리 차 마시고 가요.”
“그래? 그럼 우리도 그냥 가지 뭐. 나도 마침 볼일이 있어.”
재희가 얼른 대답했어.
교정의 수백 년 묵은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오후의 비끼는 햇살을 받아 싱싱한 초록을 뽐내고 있었어. 그 위용이 아주 장엄하다고 느끼며 여정이 뒤를 돌아보자 재희와 이야기하던 교선이 빠이빠이 하는 거야. 여정은 공연한 죄책감을 느끼며 손을 높이 흔들어 주고 그들이 자주 가는 카페로 뛰었어.
“같이 지하철 안 타냐고 물어서 거짓말하느라 혼났네.”
여정의 아메리카노와 자기 허브차를 들고 온 재희의 말에 여정은 대뜸 물었어.
“그 언니 빼고 우리 둘만 할 이야기가 뭐예요?”
“내가 의논할 일이 좀 있어서…….”
여정은 재희가 운 떼기를 기다렸어. 왠지 긴장해 있는 그녀를 보니 질기게 기다려야 할 것 같았거든.
그때 거리로 나 있는 커피숍 윈도에 얼핏 그림자 하나가 스쳤는데, 여정은 교선을 본 것 같았어.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거야. 에이, 아니겠지. 여정은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다시 재희를 바라보았어.
“있잖아, 우리 교수님…….”
“네?”
느닷없는 교수 이야기에 여정은 깜짝 놀랐어. 전혀 뜻밖의 말이 나와서 말이야.
“교수님이 엊그제 전화를 하셨어. 당신을 따로 좀 봤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교수님 연구실로 찾아뵀었거든. 내가 공부 열심히 해서 기특하고 장하대. 좀 더 깊이 공부해서 법사가 되면 어떻겠냐는 거야. 무슨 공부를 더 해야 할까요, 여쭸더니……. 근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재희는 이미 식어 있는 차를 호 한 번 불고는 입으로 가져갔어. 여정은 그러는 재희를 말끄러미 쳐다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지.
“교수님이 어떻게 아셨는지, 내가 혼자인 걸 아시고는 나와 개인적으로 가까이 지내고 싶으시대. 교수님이랑 내가 꼭 만날 사람이어서 만난 거라는 거야. 전생 인연이 있어서라고.”
“헐!”
여정은 재희의 말이 믿기지 않았어. 뭐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겠지만 칠십이 넘은 분이, 더구나 불교를 강의하는 분이 수강생을 상대로……. 역시 수행修行이 없는 학자일 뿐이어서 그런 걸까.
“그래서요?”
다탁에 놓인 찻잔을 만지고 있는 재희에게 여정이 다그쳤어.
“그날은 너무 놀라서 아무 대답도 못 했어. 얼굴도 달아오르고, 무슨 말을 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나중에 뵙겠다고 하고 그냥 나왔어.”
여정은 말 옮기기도 힘들어하는 재희를 보기가 민망하달까 안타깝달까, 마음이 복잡했어. 재희의 얼굴은 딱히 싫지도 좋지도 않은 표정이었거든.
“어쩔 생각이세요?”
“그래서……. 어떡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서…….”
“제가 뭘 알아야지요.”
누군가를 가슴에 품어 본 적 없는 여정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어. 무슨 그런 당치도 않은 소리에 고민하느냘 수도 없고, 가까이 지내보라고 부추길 수도 없고. 자기 잣대로 세상을 재단하면 안 되는 거잖아. 그리고 재희가 교수와 사적으로 만나고 싶었다면 누구에게 묻고 말고 할 것도 없었을 테고,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면 그날 수업에 안 나왔을 테지. 그런데 수업에 나와서는 여정에게 묻고 있으니 그녀의 마음도 갈피가 안 잡힌다는 얘기잖아. 여정은 순간 재희가 ‘난 이런 여자야.’ 하고 으스대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드는 거였어.
“이런 얘긴 저보다도 교선언니랑 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네요.”
“그게…….”
재희는 숨을 길게 내쉬고는 차로 입술을 축이고 입을 열었어.
“언니에게 교수님은 우상이야. 교수님을 정말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거든. 그런데 내가 이런 말을 하면 그 마음에 큰 상처를 낼 것 같아서 못하겠어.”
여정은 재희가 신중한 사람이라는 걸 새삼 느꼈어. 역시 배려가 깊은 사람이네. 난 아직 세상살이에 어수룩해. 한참 멀었어. 나라면 어떤 일을 의논할 상대가 된다면 무조건 말을 꺼내고 봤을 텐데…….
“난 정말 모르겠어요, 언니. 무슨 경험도 없고, 또 언니 마음도 솔직히 어떤지 잘 몰라서요.”
“난 교수님 강의가 정말 좋아. 그런데 그 이야긴 좀 부담스러워. 그게 다야.”
“거절하고 싶으면 그냥 없던 일로 하고 강의만 들으면 안 될까요? 그러면 알아차리지 않으실까?”
“노인이시잖아. 나 몰라라 강의만 들으면서 마냥 기다리시게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때 두 여자의 심장이 멎을 만한 일이 벌어졌어.
“야, 니들! 뭣들 허는 거여, 시방!”
교선이 얼굴이 벌게서 소릴 지르는 거였어. 그러고는 홱 돌아서서 카페 밖으로 나가 버리는 거야.
두 여자는 너무 놀라 잠시 멍하니 있었어. 뒤늦게 여정이 가방을 챙기며 뒤따라 나가려 하자 재희가 팔을 붙잡았어.
재희가 교선과 통화한 것은 이틀 후였어. 교선이 전화를 받지 않아 끊었다가 다시 하고 또 하고 벨을 세 번 울려서야 통화할 수 있었지.
“언니, 잠깐 내 얘기 좀 들어줄래?”
“뭔데?”
“아이, 퉁명스럽게 그러지 말고……. 미안해 언니, 내가 여정이한테 의논할 일이 있어서 둘만 만났던 거야.”
“둘이 할 얘기가 있다고 하면 내가 이해를 못 해, 안 된다고 그래? 왜 거짓말까지 하면서 날 따돌려? 뭔가 수상쩍어서 내가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다 다시 올라갔어! 그랬더니 둘이 찻집에 앉아 있는 거야. 얼마나 괘씸하던지! 첨엔 그냥 가자, 다시 지하철을 타러 갔는데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열불이 나잖아. 그래서 다시 갔던 거야! 끊어! 내가 들어선 안 되는 이야기니 그 얘길 하자는 건 아닐 거 아냐?”
교선은 자기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 버렸어. 정말 속이 상했었는데, 그나마 재희가 전화를 걸어 사과하니까 기분이 좀 풀리긴 했지. 하지만 속은 여전히 들들 끓는 거였어.
다음 날 재희가 전화를 다시 걸었을 때도 처음엔 교선이 전화를 받지 않는 거야. 잠시 틈을 뒀다가 다시 걸자 그제야 마지못한 듯 교선이 전화를 받았어.
“또 왜!”
불편한 마음이 읽혔지만 쏘아붙이는 목소리는 아니었어. 재희는 만나서 그날 일에 대한 변명이라도 좀 들어주면 안 되겠냐고 했으나 재희는 단호하게 거절하는 거였어.
“알았어, 언니. 그럼 학교에서 보자.”
“그러든지 말든지!”
또 교선 쪽에서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어.
하지만 여정이 전화를 걸었을 때 교선은 의외로 바로 받아 주었어.
“언니, 지금 뭐 해요?”
“흥! 내가 뭐 하면,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화내지 마요, 늙어요.”
“나이 먹으면 늙는 게 당연하지!”
“자연스럽게 안 늙고 생으로 늙으니까 문제죠.”
“왜? 왜 전화했어? 나 바빠.”
“그냥 잘 있는가 싶어서요.”
“잘 있으니 끊어!”
교선은 여정이 얄밉지 않은 건 아니었어. 설령 재희가 단둘만 만나자고 했어도 셋이 가깝게 지냈으니 자기에게 슬쩍 언질은 주었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선머슴 같은 여정이 시침 뚝 떼고 제 볼일로 먼저 가겠다고 한 것에, 그리고 그런 줄로만 알았던 자신에게 화가 나는 거였어.
그러고 이틀 후였을 거야, 아마. 교선은 남편의 부부동반 모임에 갔다가 거기서 뜻하지 않게 재희를 만났어. 재희도 그 모임의 일원이었던 것을 그날 처음 알게 됐지.
“참 괜찮은 여자야.”
남편이 턱짓으로 가리키는 여자를 보니 바로 재희였던 거야.
“어머, 쟤가!”
“누구? 저 여자 알아?”
“평생교육원에서 같이 공부하는 여자.”
“묘한 인연이군. 우리 모임 총무였던 사람 마누라야. 그 총무가 삼 년 전인가 교통사고로 죽었어. 젊은 나이에 딸 하나 데리고 혼자 사는데, 여기 가끔 나와서 저렇게 소리 없이 일을 맡아 하곤 해. 참 장해!”
그러고 있는데 재희가 알아보고 놀랍다는 얼굴로 다가와 아는 체했어.
“어머, 여긴 어떻게…….”
그러면서 교선과 남편을 번갈아 보는 거였어.
“아, 제 안사람입니다.”
교선은 좀 당황했어. 재희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순간적으로 대처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잖니. 반갑다고 하기엔 자기 마음이 아직 앵돌아져 있고, 차갑게 대하자니 남편 보기 쑥스럽고.
“여기서 보네…….”
교선이 엉거주춤 얼버무리자 재희는 그 속을 알겠다는 듯 빙긋 웃고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어. 교선은 평생교육원에서도 자기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궂은일 하는 재희가 은근히 칭찬의 대상이 되는 것에 내심 열등감 같은 것을 느끼곤 했는데, 이 모임에서도 그런 대상인 것에 알 수 없는 질투가 생기는 거였어.
* * *
여정은 수업이 시작되기 한참 전에 교실에 도착해 있었어. 교선이 늘 일찍 오는 사람이라 수업 전에 감정의 매듭을 풀고 싶었거든. 교선이 앉기에 편하도록 책상 밑에 들여져 있는 의자도 반듯하게 빼놓고 책상 위의 먼지도 물휴지로 닦아 놓았어. 그런데 교실로 들어온 교선은 여정의 옆자리에 앉지 않고 석 줄 앞자리에 가서 앉는 거야. 여정이 손짓으로 옆자리를 가리키며 부르자 고개를 돌려 버리는 거였어.
어마, 저 언니 아직 화가 안 풀린 거야? 여정은 속으로 놀라며 교선에게로 갔어.
“제가 이리로 올까요?”
“아니.”
교선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짧게 대답하며 가방에서 교재를 꺼내는 거였어.
여정은 무안해져서 자기 자리로 돌아오고 말았어. 어떻게 교선을 돌려세워야 할지 좋은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면서. 그녀와 사이가 벌어진다고 무슨 곤란할 일은 없지만, 왠지 자꾸 마음이 쓰이는 거였어.
재희가 들어왔을 때 여정이 턱짓으로 교선을 가리키자, 재희는 늘 자기가 앉던 자리에 앉지 않고 교선 옆에 가서 앉는 거야. 그러고는 교선이 화들짝 놀라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히 교재를 꺼냈어.
근데 교선은 잠시 말이 없더니 교재랑 가방을 주섬주섬 들고 자리를 옮겨 앉는 거야! 소갈딱지 하고는, 여정이 생각하고 있는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니? 글쎄 재희가 다시 교선이 옆에 가 앉는 거였어. 여정은 속으로 박수를 쳤어. 자기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묘수였거든.
교선은 고개를 약간 돌려 재희를 한번 보더니 결기를 삭였는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는 칠판을 바라보는 거였어. 교실엔 세 사람뿐이었어.
재희가 등을 돌려 여정에게 손짓했어. 자기들 뒷자리에 와서 앉으라는 거야. 여정은 냉큼 가방을 들고 자리를 옮겼지. 여정이 그들 뒷자리에 가 앉자 재희가 교선의 팔을 잡으며 입을 열었어.
“다 말할게, 언니. 화 그만 내.”
“나 화 안 났어.”
교선이 무뚝뚝하게 말하더군.
“화 많이 난 거 알아. 그만 풀어.”
그때 다른 학우들이 들어오기 시작하고, 교수가 들어왔어. 모두 일어나서 교수에게 합장 예를 갖출 때 재희가 속삭이듯 말했어.
“이따 차 마시면서 얘기해, 언니.”
그녀들의 인사에 응하는 교수를 보며 여정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했어. 저 교수는 열한 명 여자 중 하필 재희의 어떤 면에 끌린 것일까. 그러면서 아닌 게 아니라 자신도 그에 대한 존경심이 절반 이하로 줄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어.
그날의 강의 주제는 ‘방하착放下着’이었단다. 객관적이든 주관적이든 집착하는 마음을 어디에도 두지 말고 내려놓아라, 마음을 허공과 같이 비워 온갖 번뇌와 갈등을 홀가분하게 벗어 버리라는 거였어.
산사의 수행하는 이들이나 할 수 있을 법한 그 일이 속세의 사람들에게 가능키나 해? 그런데 세 여자는 그날 그 강의가 마음에 사무치게 들어앉는 거였어. 별것도 아닌 일에 내가 끄달렸구나, 교선인 마음이 좀 홀가분해졌어. 재희는 이미 모든 걸 내려놓은 사람처럼 머리를 끄덕였고. 여정은 잘은 모르지만 마음을 비운다면 누구와 다툴 일도, 나 잘났다고 내세울 일도, 욕심을 부릴 일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그러면서 교수에 대해 은근히 부아가 치미는 거야. 강의는 저리 그럴듯하게 하면서 정작 그 자신은 노욕老慾을 부리는 게 아닌가 싶었거든.
강의가 끝났을 때 여전히 칠판지우개를 털고 온 재희에게 교수가 무슨 말인가를 했어. 여정은 재희에게 커피숍으로 오라고 하고 교선과 함께 교실을 나왔어.
“차 마시러 가요!”
팔짱을 끼며 여정이 말하자 교선은 마지못한 듯 응하는 거였어.
그들이 커피숍에 거의 다다랐을 즈음 재희가 땀을 흘리며 뛰어왔어.
“교수님이 뭐래?”
교선이 자못 궁금했다는 듯 묻자 재희는 이마의 땀을 손으로 훔치며 들어가서 얘기하자고 했어. 그리고 차를 주문한 뒤 나긋나긋 이야기를 시작한 거야.
“언니, 실은 내가 교수님 이야기 좀 하려고 해.”
그러고는 전에 여정에게 했던 이야기를 시작했어. 그리고 언니가 교수님을 얼마나 존경하는지 잘 알고 있는데 자신의 이야기를 들으면 실망할까 봐 망설였던 일, 여정에게 상의했으나 결론을 얻지 못했던 일, 본의 아니게 언니 마음 불편하게 했던 점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거였어.
“그랬었구나. 난 그것도 모르고……. 날 배려했던 건데, 되레 내가 미안하네.”
“아냐, 언니. 나도 언니 입장이라면 그랬을 거라고 생각됐어. 다 내가 미욱한 탓이야.”
“아니, 내가 미안하다.”
교선은 재희의 손을 잡으며 자못 진지하게 사과했어.
“근데, 난 지금도 교수님을 존경해. 조금도 실망스럽지 않아. 그이도 사람인데 그럴 수 있는 거지.”
“교수님이 뭐라세요?”
두 여자의 모습에 손가락 박수를 치던 여정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재희에게 물었지.
“으응…… 생각해 봤냐구.”
“그래서요?”
“아직은 뭐라 말씀드리지 못하겠다, 다음 주에 답 드리겠다 하고 뛰어왔어.”
재희의 웃는 얼굴이 발그레했어. 교선이 그러는 재희를 보며 말했지.
“인연이면 피할 수 없는 일 아냐?”
“인연이라……면, 나는 남녀관계가 아닌…… 더 좋은 인연으로 가고 싶어.”
재희는 웃으면서 말했지만 그 얼굴에는 단호함이 있었어.
“어떻게?”
“그냥 사제지간으로. 나도 결혼해서 살아 봤지만 남자 여자, 남편 아내가 되면 일상을 부대끼고 살아야 하잖아. 사소한 일로 다투게 되고, 왜 더 사랑해 주지 않느냐 자기가 기대한 것에 대한 배신감으로 상대를 들볶게 되잖아. 난 그런 게 싫어.”
“그럼 오늘 바로 대답하지 그랬어요?”
여정이 곧바로 들이대자 재희는 빙긋 웃었어.
“너무 무 자르듯 거절할 수 없어서 그랬어. 다음 주에 좀 일찍 나오시라고 해서 조용히 말씀드릴래.”
“그래그래, 그게 좋겠다.”
교선은 재희가 썩 괜찮은 여자라던 남편의 말을 내심 긍정하며 그녀를 응원해 주었어. 여정도 재희가 현명하다는 생각을 했지. 참으로 그녀다운 결론을 도출해 낸 것에 박수를 쳐 주었단다.
“있잖아요, 일산에 전생을 보는 기막힌 도사가 있대요. 우리 거기 한번 가 볼래요?”
여정이 제의하자 재희가 생글거리며 물었어.
“뭐가 궁금한데?”
“이것저것 다요. 난 여태 연애도 한 번 못 해 봤잖아요. 실은 남자한테 관심이 없어서이지만. 그래도 지금 내가 왜 시집도 못 가고 이렇게 살고 있는지, 내 짝이 될 인연이 정말 없는 건지 그게 젤 궁금해요. 전생의 나는 무슨 일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무슨 업을 짓고 이생에 이렇게 사는 건지 확실히 알고 싶지 않으세요?”
그러자 교선이 나섰어.
“나도 궁금해. 한번 가 보자. 거기가 어디래?”
교선이 역시 자리를 주도했어. 그렇게 해서 이들 세 여자는 어느 날 전생을 보는 도사를 찾아가기로 했단다.
근데 전생이라는 것도 내생이라는 것도 윤회라는 것을 믿어야 존재하는 세계 아니니? 윤회를 믿지 않는다면 말짱 다 엉터리잖아. 여정이 전생을 궁금해한다는 것은 그녀도 이제 불자가 된 거라는 반증이지. 하지만 여정은 여전히 자기는 아직 불자가 아니라고 못 박곤 했어. 불자라면 마치 어디가 불에 덴 듯 뜨거울까 봐 겁내는 것 같았어.
* * *
여름 햇빛이 싱그러운 초록 잎들을 반짝이게 하는 토요일 오전이었어. 교선이 몰고 온 차에 각자 가벼운 차림으로 올라타고 약간 설레는 마음으로 도사를 만나러 갔지. 도사가 사는 아파트를 찾는 건 쉬웠대. 주소를 입력받은 상냥한 내비게이션이 계속 직진, 삼백 미터 앞에서 우회전, 오백 미터 앞에서 좌회전, 일러 주는 대로 가서 목적지에 다다른 거야.
도사의 아파트 거실에는 대나무돗자리가 깔려 있고, 그 위에 교자상을 앞에 놓은 도사가 베란다 창을 등지고 앉아 있더래. 하얀 모시 한복을 정갈하게 입고 있는 도사는 머리와 눈썹까지 새하얬는데, 그 은발이 어찌나 탐스럽고 섹시하던지, 여정은 달려가서 안고 싶었더란다.
“전화 드렸던 주여정입니다. 안녕하세요!”
셋이 인사를 하자 도사는 눈짓으로 앉으라 하고는 그들을 찬찬히 뜯어보더래. 말없이 뚫어지게 보기만 해서 좀 민망했는데, 도사는 주방에서 얼음을 띄운 수박화채를 내올 때까지 그러고 있더래.
“드시오! 시원하게.”
마침내 도사가 손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는데, 세상에! 그 목소리가 얼마나 카랑카랑한 쇳소린지 셋 다 깜짝 놀랐다는 거 아냐. 그들이 다소 움찔거리며 붙어 앉자 도사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대.
“만날 인연들이 만나서 이렇게 같이 오셨구먼.”
도사의 말에 여정이 나섰어.
“저희가 만날 인연이었어요? 저희가 전생에도 이렇게 셋이 만났던가요? 저희 겉모습만 보셔도 그런 게 보이세요?”
“그럼! 내가 아까부터 주욱 봤잖소. 당신네들 인연도 별스럽구먼.”
여정이 한 무릎걸음 도사 앞으로 다가앉으며 물었어.
“저희는 전생에 뭐 하던 사람들이었나요? 어떤 사이였어요? 자세히 좀 말씀해 주세요.”
도사는 또 그윽이 세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먼저 재희를 향해 입을 열었어.
“그대는 전전생에 농사꾼이었어. 부농이야. 소작인들에게도 후했고, 품앗이하는 일꾼들에게 품삯도 넉넉히 주고, 그저 뭐든 베풀기 좋아했지. 사실은 출가하고 싶어 몸살을 앓는 사람이었어. 늙은 부모가 계셔서 맘대로 못하고 불경 공부하길 즐겼지. 그리고 이 사람은…….”
교선을 가리키는 거였어.
“그대 마누라였어. 음전해서 시부모도 잘 모시고, 삼 남매도 잘 키워 냈지. 그런데 그대가 노상 바깥사람들하고 어울리지 않으면 불경을 읽느라 안사람을 가까이하는 일에 소홀해서 그게 불만이었어. 그래서 홀아비 소작인이었던 저 사람과 정을 통하게 됐어.”
이번엔 여정을 가리켰어.
“예에? 저하고 교선언니가 그런 사이였다구요?”
여정은 소리를 지르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고, 교선은 수박화채를 뜨다 말고 손을 멈췄어. 정말이세요? 그녀들 눈엔 의문이 가득했지.
“어떻게 그런 일이?”
여정이 못 믿겠다는 듯이 말하자, 재희가 옷깃을 슬쩍 잡아당겼어. 다음 이야기를 더 듣자는 거였지.
당시나 지금이나 여자가 외간남자와 바람을 피운다는 자체가 있을 수 없고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농부는 아내와 소작인의 부정을 알고도 내색하지 않았대. 자기가 아내를 자주 안아 주지 못하고 하니, 아니 또 그럴 생각이 별로 없으니 그만 눈감아 준 거래. 그리고 그 사실을 안 지 얼마 안 돼서 아내가 자기보다 먼저 세상을 떴기 때문에 마음 다칠 일이 그렇게 오래 계속되진 않았대. 농부는 자기 식대로 살다가 다음 생에 자기가 그토록 원하던 대로 비구가 되었대.
그 아내는 소작인과 방앗간에서 몰래 만나 정을 통하곤 했는데, 어느 비 오는 밤 그를 만나고 돌아오다가 발을 헛디디고 미끄러져 그만 논으로 거꾸로 처박혔다는 거야. 그 일을 빌미로 허리를 못 쓰며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떴는데, 다음 생에 어느 양반집 딸로 태어나 부잣집으로 시집을 갔대. 부정한 짓을 하긴 했지만, 시부모 봉양을 지성으로 한 공덕으로 그리되었다는 거야. 시집간 부잣집 동네 뒷산에 있는 절이 바로 비구가 거처하는 곳이었어.
소작인은 농부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고 소작료를 내는 홀아비였는데, 그의 아내와 비밀스런 만남을 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대. 그래서 아주 열심히 농사를 지어 농부에게 실한 알곡으로 소작을 바치고, 농부의 크고 작은 집안일에 적극 나서서 거들어 주곤 했다는구나. 나름 속죄하며 살다가 다음 생에 양반집 딸이 시집간 그 부잣집 여종의 아들로 태어났어.
“어머! 그럼 전생에 저는 종이었고, 교선언니는 부잣집 며느리, 재희언니는 스님이었네요?”
여정의 말에 다른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어.
“인과응보란 원인이 있기 때문에 결과가 나타나는 거요. 자네들 세 사람의 인연이 거기서 끝난 게 아니지. 아직 매듭을 짓지도 못하고 풀지도 못하지 않았는가.”
“예, 선연善緣과 악연惡緣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교선이 독실한 불자답게 도사의 말을 받았어.
“순연順緣도 있소. 이제 그대들이 그 순연을 이루려고 이렇게 만나게 된 것 아닌가.”
농부였던 비구는 절의 방장스님 상좌였는데, 공부를 하면 할수록 머리가 열리고 뭔가를 알겠는 거야. 그래서 신도들에게 자꾸 ‘아는 말’을 하게 됐어. 점쟁이처럼 이런저런 말을 해 주고 방편을 가르쳐 주기도 했대. 자연 신도들이 이 상좌에게 몰려들게 되었는데, 그 일로 인해 그만 방장스님에게 쫓겨나고 말았다는구나. 결국 산에서 마을로 내려오게 되었지.
산에서 내려온 스님은 어려서 난리 통에 부모를 잃어버리고 절에 와서 지내며 상좌가 된 터라 갈 데가 없었어. 절에서 한번 쫓겨나면 다른 절에도 못 가는 거여서 정말 상심이 컸대. 그저 갑갑하기만 한데, 그때 그 동네 양반집 나어린 종이 지게에 나뭇짐을 지고 가다 스님을 동정하는 거였어. 자기가 웃전에 말씀을 잘 드릴 테니 가실 데가 없으면 임시라도 자기 머슴방에서 같이 지내시자고. 그렇게 해서 부잣집에서 이 세 사람이 다시 만나게 된 거야.
양반집 며느리는 자기 집 어린 종이 스님 한 분을 데려오는 걸 보고는 잠시 몸을 피했어. 스님이라도 외간남자잖아. 그런데 동네 산 위 절에 계시던 스님이라는 말에 자꾸만 궁금해지는 거야. 소문에 듣기로 신도들에게 뭔가를 가르쳐 주는 스님이라는데, 자기도 묻고 싶은 게 많았거든. 그래서 어린 종을 불러 스님에게 알아다 달라고 시키곤 했는데, 스님은 그 일로 인해 절에서 쫓겨난 터라 별로 탐탁스러워하지 않았대. 그래도 자기가 기식하는 집 며느님인데 매번 매정하게 거절할 수는 없어서 대답을 해 주기도 했어.
어린 종은 물음을 가져가고 답을 가져오며 며느리와 스님 사이를 왕래했어. 그러면서 글은 못 배워서 책을 읽지는 못했지만 자기도 불법佛法을 조금씩 터득해 가는 거였어.
머슴방에서 겨울을 난 스님은 다음 해 봄이 되자 그 부잣집을 나섰어. 더 이상 폐를 끼칠 수 없었거든. 절에 올라가는 산중턱에 움막을 짓고 그리로 거처를 옮긴 거야. 그러자 이번엔 며느리가 어린 종을 앞세워 스님의 움막을 찾기 시작했어. 양식거리와 밑반찬 등을 챙기고, 한두 벌씩 가사를 지어 가는 거였어. 스님 수발을 들어드리는 일이 그녀 생활의 한 가지 기쁨이 되었지. 전생에 못다 했던 아내의 인연을 그렇게 풀어낸 거야.
그들은 한자리에 앉아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곤 했는데, 어느 날 어린 종이 말했어. 스님, 다음 생이 있다고 들었는데, 저도 다음 생에는 양반가에 태어나 불경을 읽고 부처님 말씀을 공부하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남들처럼 벼슬을 살며 아들딸 낳고 잘살기를 바라진 않습니다, 라고 했어. 천한 신분으로 태어나 온갖 고생을 다 하면서 사는 자신의 생을 한탄한 거야. 그리고 그것이 서원이 되어 이생에 여정이 된 거야.
그러자 스님도 말했어. 다음 생엔 나도 이생에 다 못한 부처님 법을 제대로 공부하면서 수행할 거라고. 그 스님이 재희였어. 전생에 절에서 쫓겨난 업으로 이생에 여자 몸을 받아 고역을 겪는 거였대.
며느리? 그녀는 스님 앞에 합장을 하며 자기도 다음 생엔 정법을 제대로 공부하여 불보살의 길을 가고 싶다고 했어. 남은 생을 남에게 베풀면서 마음수양을 하다 보면 내생에 좋게 태어나지 않겠느냐고 했지. 그가 교선이었던 거야.
“자, 어떻소? 그대들이 이렇게 한자리에 모이게 된 것도 다 전생 인연 때문이오. 이제 그 인연을 순리에 맞게 이끌어 성불하시오!”
도사는 말을 마치고 그 두터운 손으로 상을 탁 내리치더래.
“한 가지 더 여쭤도 될까요, 선생님?”
교선이 앞으로 나앉으며 말했어.
“무엇인고?”
“저희의 다음 생은 어떤 생일까요?”
“지금 이생도 아직 다 안 살았는데 다음 생이 궁금한 게요? 이 몸뚱이라는 건 영혼의 수레요. 한 영혼이 수레를 어떻게 훌륭하게 몰고 갈 것인지는 그 수레를 어떤 길을 선택해서 달리게 할 것인가에 달려 있지. 그대들은 다음 생에도 도반으로 한자리에 모일 게요. 기어이 모두 삭발하고 출가하겠구먼. 단, 이쪽만 여자로 태어날 거요.”
여정을 가리키는 거였어.
“저는 무슨 업으로 다음 생에도 여자로 태어나는 걸까요?”
여정이 실망하는 눈치를 보이며 도사에게 물었지.
“왜, 여자로 태어나는 게 싫소?”
“싫다기보다, 전 남자이고 싶거든요.”
“그건 왜?”
“여자는…… 사회에 나가 남자들과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남자보다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가 많고, 결혼해서 아이도 낳아야 하고, 살림도 해야 하고, 시부모도 모셔야 하고…… 하는 일이 너무 많잖아요. 그냥 혼자서 공부만 하고 싶은데. 이생에 여자인 제가 싫거든요.”
“그댄 결혼 안 했지?”
“네.”
“인생이란, 이건 내 생각인데, 어쨌든 남들 겪는 것은 다 겪어 봐야 완성되는 거요. 그대가 이생애 결혼을 하지 못한 것은 전생에 결혼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야. 다음 생에는 다시 여자로 태어나서 결혼하여 아이를 하나 낳아 놓고 출가하게 될 거요. 그대 업장이 아직 다 소멸되지 않았기 때문에 필시 인간 고력이 따를 터, 이생에 복을 많이 짓도록 하시오. 그리고 그대는…….”
도사가 재희에게 눈길을 주었어. 재희가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리자, 도사는 책상 위를 손가락 끝으로 톡톡 두들기더니 입을 열었어.
“그대는 다음 생에 훌륭한 스승을 만날 것이오.”
“감사합니다.”
“내게 감사할 일이 아니지. 다 그대가 지은 복인데.”
“근데 선생님께선 어떻게 전생과 내생을 보실 수 있게 된 거예요?”
여정이 정말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었어.
“수행하고 참선을 하다 보면 더러 숙명통이 열리기도 하지. 뭐 나한테만 있는 특별한 능력은 아니오.”
그들 셋이 도사의 아파트를 나선 때는 해가 서쪽으로 많이 옮겨 간 뒤였어. 그들은 셋 다 뭔가 아파트에 들어가기 전과는 다른 느낌이었대. 마음이 숙연한 가운데 뭔지 모를 희열이 있고, 그리고 하늘이 유난히 새파래 보이더래.
“믿어?”
운전대를 잡은 교선이 옆자리와 뒷자리의 재희와 여정을 번갈아 보며 물었어.
“난 믿어.”
재희가 먼저 대답했는데, 그 얼굴이 환하더래.
“난 아직 모르겠어요. 믿을 수도 없고 안 믿을 수도 없고……. 근데 왜 우리 처음 카페에 갔던 날 있잖아요. 그날 우리가 전에도 어디서 그렇게 만난 적 있다고 느꼈었잖아요. 그것을 생각하면 안 믿을 수도 없을 것 같아요.”
여정의 말에 두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어.
“뭐, 그냥 재미로 와 본 거잖아. 암튼 우리 열심히 마음공부 하자!”
교선이 차를 출발시키며 목소리 톤을 높였어.
여정은 정말로 다음 생이 있어 자신들이 또 어떤 식으로 엮일는지 알 수 없지만, 만약 그렇다면 다시 중심을 잘 잡는 세 바퀴가 되어 온전히 잘 굴러갈 거라는 생각이 드는 거였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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