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4장 8-10절. 듣고 배운 바를 실천하라
1.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무한히 사랑하시고 기뻐하시기 때문에, 이 사랑과 기쁨을 받은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역경을 당해도 항상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사람과의 관계에서 까다로운 사람에게도, 모든 사람에게 대해서 관용하고 용서와 사랑으로 대하면, 구원의 기쁨과 사랑을 잃지 않고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모든 사람에게 관용과 사랑으로 대하려면, 대인관계에서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2. 오늘은 대인관계를 넘어서, 모든 일을 해나갈 때, 구원의 기쁨과 행복감을 잃지 않기 위해서, 성도가 지혜롭게 행해야 할 여러 가지 사항을 자상하게 가르쳐주시는 내용입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항상 기뻐하고 행복감을 가질 수 있는 비결도 이처럼 대인관계와 대물 관계를 잘 해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자신의 처세법을 배우라고 권면합니다.
이렇게 지혜롭게 처신하면, 앞의 7절에서도 말씀한 대로, 평강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거라는 말씀입니다.
3. 그래서, ‘듣고 배운 바를 행하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 성도들에게 성도로서 예수님을 모시고 참되고, 경건하고, 옳으며, 정결하게 살아서, 사람들에게 사랑과 칭찬과 덕담과 기림을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4:8.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Finally, brethren, whatever is true, whatever is honorable, whatever is right, whatever is pure, whatever is lovely, whatever is of good repute, if there is any excellence and if anything worthy of praise, dwell on these things.
끝으로 형제들아
Τὸ λοιπόν, ἀδελφοί,
the finally, brothers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ὅσα ἐστὶν ἀληθῆ, ὅσα σεμνά,
whatever is true, whatever honorable,
동사(ἐστὶν)는 현재형입니다(is).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ὅσα δίκαια, ὅσα ἁγνά,
whatever right, whatever pure,
무엇에든지 사랑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받을 만하며
ὅσα προσφιλῆ, ὅσα εὔφημα,
whatever lovely, whatever admirable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εἴ τις ἀρετὴ καὶ εἴ τις ἔπαινος,
if any virtue, and if any praise
‘기림’(ἔπαινος)이란 칭찬(praise)을 가리킵니다.
이것들을 생각하라.
ταῦτα λογίζεσθε·
these things think on
‘생각하라’(λογίζεσθε)는 현재 명령형으로서(think on) 계속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1. 먼저 주의해야 할 것은 오늘의 말씀을 율법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8절에 말씀한 대로, 경건하고 옳고 정결한 생활을 해야만, 평강의 복을 누린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먼저 하나님께서 주시는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서와 기쁨과 평강을 예수님 안에서 얻었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 평강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평강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 아무리 경건하고 옳고 정결하다고 해도, 이런 인간의 노력으로 참된 평강을 얻지는 못합니다.
참된 평강은 우리가 비록 불경건하고, 옳지 못하고, 정결치 못해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평강입니다.
그러므로, 8절은 이미 하나님께서 주신 평강을 지키기 위한 처세법이지, 이런 처신을 해야 하나님의 평강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2. 그러면, 과연 하나님의 평강을 지키기 위한 처세법이란 어떤 것들일까요?
(1) 무엇에든지 참되며
생각과 말과 행동이 참된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모심으로 우리 마음에 사랑과 용서와 평안함이 있는데, 거짓을 말하게 되면, 이 평강에 손상이 됩니다.
그런데, 인간의 본성에는 근본적으로 진실이 없습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거짓된 존재입니다.
예레미야 17장 9절에는 만물보다 거짓된 것은 인간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참되시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3:4.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실 때만이 모든 면에서 참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참되시고 진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모실 때, 우리의 생각과 언행이 진실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모신 참된 생활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참된 생활입니다.
예컨대, 참말이라고 해서, 모두 다른 사람에게 덕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4장 15절에는,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신 성도들은 말을 할 때도 이웃에게 덕이 되고 은혜가 되는 말을 하게 됩니다.
에베소서 5장 4절에는,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음속에 예수님을 늘 모심으로써, 언제 어디서나 무엇을 하든지 참되고, 이웃에게 사랑과 덕이 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세상 사람들은 여러분 안에 계신 예수님을 믿게 될 것입니다.
(2)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성경에서 경건이란 은혜 받은 상태를 가리킵니다.
히브리어의 ‘경건’이란 말이 “חָסִ֪יד: 헤시드”인데, 은혜받은 상태라는 뜻입니다.
즉, 우리 인간의 본성과 수양으로써는 경건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단지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심으로써만 가능합니다.
즉, 육신의 소욕대로 살아가는 삶은 불경스러운 것들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살면,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들이 맺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살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예수님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칭찬과 존경과 사랑을 할 것입니다.
오늘 8절에서 “사랑하며 칭찬할 만하다”는 것과 “덕”이 있다는 것과 “기림”이 있다는 것이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이처럼 성도가 예수님을 마음에 모심으로써, 경건한 삶의 모습이 나타나면, 불신자들이 칭찬과 덕행을 예찬하다가 저들도 예수님을 믿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언제 어디서나 무슨 일을 하시든지,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심으로, 예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여, 불신자들이 존경 속에서 예수님을 믿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는,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3) 무엇에든지 옳으며
사람은 본성상 의로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죄인이고, 불의한 존재들입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3장 10절에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불의한 상태는 예수 믿은 후에도 동일합니다.
우리 자신에게는 의로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살면, 의로운 생각과 마음과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로마서 1장 17절에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하신 말씀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바로 내 뜻대로 살지 않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의 아름다운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따라서 살아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심으로 생각과 마음과 언행이 늘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를 맺는 향기로운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할 때, 세상 사람들은 성도님들을 칭찬하고, 덕을 기리고, 예찬하고,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또한 복음 전도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4)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우리 인간은 본성상 온갖 더럽고 추한 생각과 감정과 언행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의 의는 하나님 보시기에 더러운 옷과 같다고 했습니다.(이사야 64:4)
단지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살 때만이, 용서와 사랑과 정결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우리 개인의 노력과 수양으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이 더러움을 씻을 수 없습니다.
어떤 성도는 자신의 추하고 더러운 마음을 정결케 하고자, 금식하고, 세상을 보지 않고, 산속에 들어가 살고, 심지어 가시밭에 딩구는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혹은 오리겐(Origen)이라고 하신 분은 자신의 성적 기관을 잘라버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은 그런 금욕적인 방법으로는 더러움과 추한 마음을 씻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결케 되는 길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심으로써만, 우리의 마음이 정결하게 되고, 비둘기같이 흰 눈같이 정결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심으로,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7. 위와 같이 성도들이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심으로써 참되고, 경건하고, 옳으며, 정결한 삶을 살면, 다음에 나오는 대로, 사람들에게 사랑과 칭찬과 덕과 기림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5절.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6절.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7절. 무슨 덕이 있든지,
8절. 무슨 기림이 있든지
(1) 이것들은 성도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참되고, 경건하고, 옳고, 정결하게 살아갈 때, 사람들에게 사랑과 칭찬과 덕이 있다 하고, 기림을 받는 것을 뜻합니다.
‘기림’(ἔπαινος: praise)이란 도덕적으로 인정이 되어서 칭찬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들이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 살면,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성령의 열매를 맺어 살면, 윗분들에게 칭찬을 받습니다.
또, 성도님들이 성령의 열매를 맺으면서 살아가시면, 일반인들이 덕이 있다고 칭찬을 합니다.
마음이 덕스럽고, 말도 덕스럽고, 행동으로도 먹을 것도 나누어 주고, 힘든 일도 도와주는 덕스러운 삶을 살게 됩니다.
사람이 처음에는 외모가 잘생긴 사람을 좋아할지 몰라도, 오래 사귀다 보면, 덕 있는 사람이 좋습니다.
잠언 31장 29절에서도, 남편이 아내를 칭찬하기를 “덕행 있는 여자가 많으나 당신은 여러 여자보다 뛰어난다”고 칭찬을 했습니다.
(2) ‘기림’이 있다는 뜻은 아래 사람들이 존경하고 높이 추앙한다는 뜻입니다.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계신 성도가 마음속에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가면, 아랫 사람들이 그 덕망을 존경하고 추앙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회적 신분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아래 사람들에게 존경 받지 못하고, 멸시를 당하는 불행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성도는 불신자들처럼 권세를 부리지 않고, 예수님처럼 섬기고 사랑하고 용서하며 살기 때문에, 마음속으로부터 존경과 추앙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의 마음대로 자행자지 하지 마시고, 언제 어디서나 무엇을 하든지, 마음속에 예수님을 모시고 삶으로써, 참되고 경건하고 옳고 정결한 그리스도의 덕을 나타내셔서,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고, 칭찬받고, 덕스럽다는 말을 듣고, 기림 받으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것들을 생각하라”는 말씀은 사람들에게 사랑과 칭찬과 존경을 받게 될 때, 자기가 잘나서 그렇다고 생각지 말고, 예수님을 모시고 살았더니, 성령님의 열매가 맺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자칫 잘못하면, 사랑과 칭찬과 존경을 받을 때, 예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자기가 잘 나서 그런 줄 알고, 믿음에서 떠나 자기중심이 되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래서, 잠언 27장 21절에는,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시련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앞에서 모든 성도들에게 원칙적인 성도의 아름다운 생활에 대해서 설명했고,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바울 자신의 가르침과 모범을 통해서 배우라고 교훈합니다.
4: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The things you have learned and received and heard and seen in me, practice these things, and the God of peace will be with you.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ἃ καὶ ἐμάθετε καὶ παρελάβετε καὶ ἠκούσατε καὶ εἴδετε ἐν ἐμοί,
what also you learned and you received and you heard and you saw in me
직역하면 ‘또한 너희가 배우고, 받고, 듣고, 내 안에서 본 것’이란 뜻입니다.
‘배우고, 받고, 듣고, 본’(ἐμάθετε καὶ παρελάβετε καὶ ἠκούσατε καὶ εἴδετε)이란 동사들은 모두 부정과거로서(learned, received, heard, saw) 과거에 확실히 배웠고, 확실히 받았고, 확실히 들었고, 확실히 본 것을 뜻합니다.
행하라.
ταῦτα πράσσετε·
these things practice
직역하면 ‘이것들을 행하라’는 뜻입니다.
‘행하라’(πράσσετε)는 현재 명령형입니다(practice).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καὶ ὁ Θεὸς τῆς εἰρήνης ἔσται μεθ’ ὑμῶν.
and the God of the peace will be with you
‘계시리라’(ἔσται)는 미래형입니다(will be).
1. ‘평강’(εἰρήνη: peace)이란 내적으로 마음이 평안한 것과 외부적으로 건강이나 물질이나 자녀와 사업 등이 평안한 것을 가리킵니다.
특히 내적인 평안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예수님 안에서 평안한 것과 사람들 관계도 성령님 은혜로 평안한 것을 가리킵니다. (에베소서 2:17-18)
본 절은 한글 성경처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으나 ‘너희는 배우고 받고 듣고 내게서 본 바를’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즉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바울의 행실을 본 대로 본받아서 행하라고 권고한 말씀입니다.
바울은 앞에 3장 17절에서도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말과 가르침만 따르라고 하지 않고, 자신이 보여준 것을 실천하라고 했습니다.
즉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에게서 <배우고 받은> 것을 실천할 뿐 아니라, <듣고 본>대로 실천하기를 원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교리적인 교훈보다 직접 사도들과 지도자들의 언행을 신앙생활의 표준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지도자의 설교는 따르고, 지도자의 행동은 따르지 말라는 것은 잘못된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 결과 축복을 ‘평강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모든 일이 영육간에 평안하고 형통하게 해주시는 큰 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2. 오늘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서 주신 참된 기쁨과 평강 속에서, 비록 감옥생활을 할지라도, 행복감을 누리는 자신의 삶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이런 복음 신앙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빌립보 성도들에게 “너희는 내게서 배우라”고 합니다.
그런데, 배우는 태도는 우선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받고”라고 했습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냥 듣고 흘려버리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음에 있어서, 어쩌다 한 번 듣고 받은 것이 아니라, 자꾸 반복해서 들으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듣고”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교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교제는 책이 아니라, 교사 자신입니다.
그래서, 교사는 가장 중요한 교육 자제라고 합니다.
진정한 교사는 예수님이시고, 교사 자신은 가장 중요한 교육 자제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 사도는 빌립보 성도들에게 “내게서 본 바를 행하라”고 합니다.
3.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
4장 7절에서는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께서 평강으로 지켜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평강의 하나님이 늘 함께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마음만 평안한 것이 아니고, 가정과 직장과 모든 생활과 교회도 평안해집니다.
아무쪼록, 예수님 모시고, 평강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가정과 교회와 직장이 평안하시기를 축원합니다!
4:10.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But I rejoiced in the Lord greatly, that now at last you have revived your concern for me; indeed, you were concerned before, but you lacked opportunity.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Ἐχάρην δὲ ἐν Κυρίῳ μεγάλως
I rejoiced however in Lord greatly
직역하면 ‘그러나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했다’는 뜻입니다.
‘기뻐했다’(Ἐχάρην)는 부정과거로서(I rejoiced) 아주 크게 기뻐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ὅτι ἤδη ποτὲ ἀνεθάλετε τὸ ὑπὲρ ἐμοῦ φρονεῖν·
that now at last you revived the for me to mind
직역하면 ‘이제 마침내 나를 위해서 생각하는 것을 너희가 다시 회복했다는 것’을 (내가 크게 기뻐한다)란 뜻입니다.
‘생각하는 것’(φρονεῖν)은 현재 부정사형 동사이고(to mind), ‘회복했다’(ἀνεθάλετε)는 부정과거로서(you revived) 전격적으로 회복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ἐφ’ ᾧ καὶ ἐφρονεῖτε,
wherein which also you were concerning
직역하면 ‘이것을 역시 너희가 계속 생각을 했다’는 뜻입니다.
‘생각은 하였으나’(ἐφρονεῖτε)는 미완료과거로서(you were concerning) 계속 생각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기회가 없었느니라.
ἠκαιρεῖσθε δέ.
you were lacking opportunity however
직역하면 ‘그러나 너희가 계속 기회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기회가 없었느니라’(you were lacking opportunity)는 미완료과거로서(you were lacking opportunity) 계속 기회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1.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다시 싹이 난다는 것’은 빌립보 교회가 이전에 여러 번 헌금을 했다가 사정상 중단했다가 다시 헌금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즉 빌립보 교회는 이전에 바울에게 여러 번 선교헌금을 보냈습니다.
빌립보서 2:25. 에바브로디도는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
고린도후서 11:9. 마게도냐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했음이라.
그런데 한 동안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되고 가이사랴에서 2년 투옥되고, 로마에 투옥된 것 때문에 헌금 전달이 중단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다시 빌립보 교회가 바울에게 선교헌금을 보냈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성도들이 말씀 전파하는 주의 종들을 위해서 헌금하는 것은 합당한 일입니다.
갈라디아서 6: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하라.
구약에서도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인들에게 십일조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민수기 18:21.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이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예수님께서도 복음 전도자에게 대접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대접하는 것이고, 상을 잃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40-42.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다시 싹이 난다’는 단어(ἀνεθάλετε)는 ‘다시 번창하다, 다시 살아나다’( flourish again, revive)는 뜻인데, 이것은 빌립보 교회가 경제적인 형편이 다시 번창해서, 바울에 대한 선교헌금을 할 생각이 다시 살아났다는 뜻입니다.
2. 바울은 감옥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평강과 기쁨을 누리면서 살고 있으면서도, 또 한 가지 크게 기뻐하는 이유를 말합니다.
그것은 빌립보 성도들이 바울을 위해서 사랑의 헌금을 한 것 때문이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 사도가 사도행전 16장에서 빌립보 교회를 세운 직후 사도행전 17장에서 데살로니가로 전도하러 갈 때, 선교헌금을 보냈고, 또 데살로니가에서 전도하고 있을 때도 선교헌금을 보내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사도행전 18장에 기록된 대로, 고린도 전도를 일 년 반 동안 하고 있을 때, 실라를 통해서 선교헌금을 보내주었습니다.
이처럼 빌립보 교회는 바울 사도의 선교를 위해서 여러 번 선교헌금을 보내왔는데, 한동안 선교헌금을 중단하였습니다.
즉, 52-53년의 고린도 전도 이후, 제 3차 전도여행을 하면서 사도행전 19장에 기록된 대로, 에베소에서 3년간 전도하고 있을 때도, 선교헌금을 보낸 적이 없었고, 이제 예루살렘에서 체포되고 가이사랴에서 투옥되고 로마 감옥에 갇혀서 3년째 되던 해인 63년이 되어 빌립보서를 기록하기 직전에 고린도 전도 이후 꼭 10년 만에 다시 선교헌금을 보내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서,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라”고 했습니다.
한동안 바울을 잊어버린 듯하던 빌립보 교인들이 10년 만에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 사도를 간절히 생각하여, 선교헌금도 보내오고, 또 간병사와 같은 에바브로디도를 보내왔던 것입니다.
바울 사도에게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때는 에베소 3년 전도 기간과, 가이사랴에서 2년간 감옥살이하던 때와, 또 로마 감옥에서 3년간 감옥 생활하던 때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초창기에 그토록 바울 사도를 위해서 애절하게 사랑과 헌금을 보내주던 빌립보 교인들이, 10년 동안 바울을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 동안 빌립보 교회가 경제적인 어려움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빌립보 교회는 다시 바울에 대한 감사와 사랑과 헌금을 회복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바울은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3. 하나님 아버지도 죄인이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시고, 누가복음 15장의 아버지도 집 나갔던 탕자가 돌아올 때, 집 안에 있는 아들보다 더 기뻐했습니다.
이와같이, 과거에 뜨겁게 사랑하다가 떠나 가버린 성도가 다시 신앙을 회복하고, 하나님과의 뜨거운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그동안 주님을 소홀히 하고, 뜨거운 사랑의 관계를 잊고 있었습니까?
오히려 다시 첫사랑을 회복하고, 하나님과의 사랑을 회복하면, 더욱 뜨거운 사랑의 신앙생활이 회복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옛사랑을 회복하셔서, 크게 기뻐하는 행복한 생활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