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울엉산
아주 먼 옛날 부안군에 계화도산과 형제산이 있었다. 이들은 언제나 다정하게 잘 지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뜻밖의 불행한 일이 생기고 말았다. 바다에 큰 폭풍이 일어나 거센 풍랑이 세차게 일어나더니 마침내 형제가 조난을 당하게 된 것이다. 두 산은 큰 파도에 휩쓸려 여기저기 둥둥 떠다니게 되었다.
얼마 후 거센 풍랑이 가라앉게 되었다. 형 산은 다행히 그 자리에 안착할 수 있었지만, 동생 산은 파도에 밀려서 여기 죽산까지 오게 되었다고 한다. 다정하게 살고 있던 두 형제간에 이렇게 헤어지는 아픔을 겪게 된 것이다. 한 번도 형 곁을 떠나본 적이 없는 동생 산은 자신의 기구한 운명 앞에서 울다 지쳐 버렸다. 어쩔 수 없이 형을 잃은 동생 산이 울면서 이곳 죽산 땅에 안착하고 말았다. 지금도 사람들은 풍랑 때문에 형을 잃어버리고 여기까지 오게 된 산이라고 해서 ‘울엉산’이라고도 한다.
=> 두 산이 형제라고 하면서 이별을 안타깝게 여기는 것은 사람 마음이다.
2) 벽골제
벽골제를 축조한 곳은 원래 바다였다. 그래서 아홉 번이나 제방을 쌓아도 모두 무너져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걱정하고 있을 때 산신령이 나타나서 푸른 뼈로 제방을 쌓으면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마을 사람들은 거의 동시에 같은 꿈을 꾸어 신기하게 생각하고 푸른 뼈를 찾아보기로 했다. 푸른 뼈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 제방공사도 못한 채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곳을 지나던 한 스님에게 푸른 뼈의 정체를 물었더니 그 스님께서 푸른 뼈는 말의 뼈라고 알려 주었다. 마을 사람들은 말의 뼈가 푸른색임을 알고 난 후 말의 뼈를 갈아서 흙에 넣었다. 그리고 그 흙으로 제방을 쌓았더니 제방이 무너지지 않고 잘 쌓이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일로 해서 많은 사람이 이때부터 푸른 뼈를 넣어서 쌓은 제방이라 하여 푸른 뼈 제방, 즉 ‘벽골제(碧骨堤)’라 했다고 한다.
벽골제가 오래되어 보수공사를 해야 했다. 이름난 토목기술자인 원덕랑이 파견되어 공사를 지휘했다. 이때 김제 태수의 딸 단야도 일을 도우면서 원덕랑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그러나 원덕랑에게는 정혼한 월내라는 낭자가 있었다. 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되는가 싶더니 마무리 무렵 그만 둑이 터져 버렸다.
벽골제 부근에 백룡과 청룡이 살고 있는데 심술궂은 청룡이 이기고 나서 둑을 무너뜨렸다는 소문이 돌았다. 살아 있는 처녀를 청룡에게 제물로 바쳐야 한다고 했다. 이런 와중에 원덕랑을 보기 위해 월내낭자가 왔다. 김제 태수는 음모를 꾸몄다. 월내 낭자를 보쌈해 청룡에게 제물로 바치면 공사를 성공할 수 있고, 딸을 원덕랑에게 시집보낼 수 있어서 좋겠다고 생각했다. 김제 태수는 사람들을 시켜 밤중에 월내 낭자를 보쌈해 청룡이 사는 못으로 데려갔다.
낭자를 못에 던지려고 할 즈음 사람들은 낭자가 단야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 김제 태수의 음모를 눈치 챈 단야가 대신 보쌈이 되어 왔던 것이다. 단야는 순식간에 못에 몸을 던졌다. 그 후 보수공사는 순조롭게 끝났고, 원덕랑과 월내 낭자는 결혼하여 잘 살았다 한다.
이런 일이 있은 뒤 이 곳 주민들은 단야의 거룩한 연정을 기념하는 뜻에서 쌍룡놀이를 하게 되었다. 쌍룡놀이를 하면서 벽골제 밑에서 백룡과 청룡이 싸우다가 백룡이 패하는 광경, 단야가 청룡 앞에서 제방의 영원한 보호와 원덕랑의 성공을 빌면서 희생되는 광경을 보여준다.
=> 흔히 있는 바와 같이 생명체를 넣어야 난공사가 제대로 된다고 하는 이야기를 두 가지로 했다. 앞에서 말뼈를 넣었다고 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다. 살아 있는 처녀를 제물로 바쳐야 한다고 한 뒤의 이야기에서는 자연과의 관계가 사람들끼리의 관계로 바뀌어 사연이 복잡하게 얽히고 사랑과 도리의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었다.
3) 용 싸움
김제조씨의 시조인 조연벽(趙連璧)이 어릴 때의 일이다. 꿈에 백의노인이 찾아와 자기는 벽골제를 수호하는 백룡인데, 외지의 흑룡이 습격해 자기 집을 빼앗으려 하니 구원해 달라고 하였다. 이튿날 백룡이 흑룡과 싸울 때 조연벽이 활을 쏘아 흑룡을 죽였다. 그러자 백룡은 조연벽의 후손을 대대로 흥성하게 하겠다고 약속했고, 그 보은으로 조연벽은 이름이 세상에 크게 드러났으며 자손이 번창했다.
=> 용 싸움에 개입하면서 실수를 하지 않아 잘 되었다는 이런 이야기는 아주 드물다.
6) 두 마을의 싸움
김제의 사철산은 옛날 신선들이 구름을 타고 가다가 잠시 쉬어가는 명산이다. 백화가 만발하고 경치가 좋아 산 밑에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그 산위에 한번 올라가 볼 수 있을까 하는 선망의 대상이 되었지만, 산신령님이 엄하게 막아서 올라갈 수가 없었다.
하루는 와룡리 사람들이 모여 우리도 사철산에 올라갈 수 있도록 하여 달라고 산신령에게 청원을 했다. 산신령은 그 말을 듣고 “매년 오월 단오날 하루만은 이 산에 올라와 즐겨라. 그러나 백명 이상은 올라오지 말고 또 산에 올라와 한사람도 오줌을 싸면 안 된다”고 하는 조건부 허락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런 조건이라면 별 것 아니라고 모두들 좋아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쁨도 곧 사라지고 말았다. 항상 와룡리를 시기해 오던 복흥리 마을에서 그 말을 듣고 우리도 사철산에 올라가겠다고 했다. 와룡리 마을 사람들만 해도 이백 명이 넘는데 사백 명이 넘는 복흥리 사람들도 가겠다니 큰일이었다.
한 마을에서 오십명씩 가기로 한다면 해결되겠지만. 와룡리에서 주장하는 선취특권과 복흥리에서는 인구 비례를 내세우니 타결을 볼 수가 없었다. 특히 예전부터 복흥리 사람들은 와룡리 사람을 깔보아 와룡리 사람들은 큰 피해를 당했으니 그런 면에서도 타결될 수가 없었다. 두 마을 사이에 몇 차례 타협안이 오고 갔지만 끝내 해결을 보지 못하고, 마침내 두 마을 사이에 무력 충돌이 벌어졌다.
와룡리에는 청석이라는 장수가 있어서 모든 동민을 통솔했다. 청석은 나이가 이제 겨우 열여섯밖에 되지 않은 어린 사람이었지만, 지혜가 뛰어났고 구척장신에 힘이 항우와 같았다. 어려서부터 복흥리 사람들의 행패에 분격하여 언제든지 복수해야만 한다는 생각으로 멀리 광주 무등산에 들어가 도사 밑에서 무술을 배우고 돌아왔다. 와룡리 사람들이 복흥리 사람들과 무력 대결을 결심한 것도 사실은 청석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복흥리에서도 그런 눈치를 채고 군사훈련에 힘썼다. 특히 복흥리 장수 유청은 손으로 바람을 일으키는 이른바 장풍(掌風)에 특기가 있어 널리 알려진 장수였다.
두 마을 사이에 접전이 시작되었다. 그 때 사철산에 놀러와서 바둑을 즐기고 있던 신선들도 이들의 싸움을 흥미깊게 지켜보았다. 주신인 산신령은 복흥리의 유청 장군에게 호감을 가지고 응원했으나, 아내인 여신은 와룡리의 청석 장군을 응원했다. 그래서 산신령은 유청에게 황룡을 보냈고, 여신은 청석에게 청룡을 보냈다.
싸움이 유청과 청석의 말싸움에서 시작되었다. 유청이 “허허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지 모른다고 와룡리에는 사람이 없어서 저런 계집애 같은 어린 것을 보냈느냐, 나는 저런 애숭이와는 상대할 수 없으니 다른 사람을 보내라.”라도 했다. 그랬더니 청석이 “우리 마을에선 항상 평화를 사랑하는데 너의 마을에선 무엇이 어떻다고 사사건건 우리를 괴롭히느냐, 내 이제 하늘의 뜻에 따라 이 자리에 선 이상 그대들이 엎드려 사죄하지 않으면 단연코 용서치 않으리라”고 했다.
유청은 청석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청석의 낭랑한 목소리에 저력이 있어 귓전을 크게 울리는 것을 보고 무술이 뛰어남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백전백승의 용장 유청도 물러날 사람은 아니었다. 유청은 벽력같은 고함을 치며 손바람을 일으켜 와룡리 쪽으로 보냈다. 와룡리 사람들은 큰 태풍을 만난 듯 비틀거리며 넘어졌다. 청석도 도술을 부려 복흥리 사람들을 쓰러뜨렸다.
그때 구름 속에서 갑자기 빨간 땀방울이 몇 방울 떨어지더니 급기야는 누런 황룡이 쏜살같이 뇌성벽력을 치며 사철산으로 날아갔다. 뒤이어 청룡 한 마리가 날쌔게 황룡의 꼬리를 물고 쫓아갔다. 사철산 봉우리에 황룡과 청룡이 얽혀 격투가 벌어졌을 때 사방 천지에는 핏방울이 비 오듯 쏟아지고, 또 번개와 천둥은 삽시간에 억수같은 비를 몰고 왔다. 잠시 후 황룡이 청룡에게 패하여 축 떨어지더니 커다란 바위로 변했다. 그 바위는 용이 누워 있는 형상이었다. 복흥리 사람들은 모두 땅위에 엎드려 와룡리에 항복했다.
청석은 곧 몸을 날리어 구름을 타고 사철산으로 날아갔다. 그때 천지를 흔드는 무서운 뇌성과 함께 사철산이 와르르 무너졌다. 모든 사람들이 살펴보니 청석이 사철산 봉우리에 꿇어앉아 오줌을 싸고 있었다. 잠시 후 청석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사람들은 모두 앞을 다투어 사철산으로 올라갔다. 바위 위에는 조금 전에 청석이 무릎을 꿇었던 곳에 무릎자국이 패어 있었고 오줌줄기는 희게 굳어져 있었다.
두 마을 사람들은 그때까지 헛된 싸움을 한 것을 후회하며 서로 부둥켜 안고 이제부터 형제처럼 다정하게 살자고 다짐했다. 그 후 지금까지 잘 살아온다.
=> 대단한 이야기에 깊은 뜻이 있다. 신들의 농간에 말려들어 함부로 싸우지 말고 사람들끼리 정신 차리고 평화스럽게 살라고 한다.
*김제 지평선축제의 쌍룡
7) 여우고개
여우고개는 사백여 년 전부터 김제시 용동에 터를 잡고 살아온 진주강씨의 선산으로, 일명 귀비기재로 불린다. 옛적에 강태진이라는 사람이 장도감(場都監)으로 일하면서 장날마다 시장 사용료를 받아 고을 원님에게 바쳤다. 그런데 어찌나 술을 좋아했던지 항상 만취가 돼서 집으로 갔다.
여우고개 중턱을 넘어서 집으로 돌아갈 때 묘령의 아가씨가 나타나 강태진을 유혹해 함께 걸어갔다. 그런데 비석거리까지 같이 아가씨가 찬바람을 일으키며 사라져버렸다. 그 뒤로도 강태진이 술만 취하면 그 아가씨가 나타나서 같이 길을 걷다가 비석거리에만 오면 사라지곤 했다. 마을 사람들이 강태진의 말을 듣고 백년 묵은 백여우라고 알려줬다. 강태진은 그 아가씨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칼을 숨긴 채 술에 취한 척 비틀거리며 여우고개로 향했다. 그 아가씨가 나타나자 칼로 찔렀지만 한쪽 귀만 잘린 채 그 아가씨는 백여우로 둔갑하여 도망쳐버렸다.
그 뒤부터 강태진은 되는 일이 하나도 없고 장도감 자리에서 쫓겨났다. 목구멍에 풀칠을 하기 위해 체 장수가 되어 충청도 어느 고을 농가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그런데 주인의 아내가 아프다고 무당을 불러서 굿을 하고 있는데 자세히 들어보니 “전라도 김제 땅 강태진이란 놈 하는 일마다 망하고 염병이나 앓다가 죽어라” 하며 주문을 외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하도 이상해서 가까이 가보니 그 무당은 귀가 잘린 백여우가 틀림없었다.
강태진이 커다란 방망이로 그 무당을 내리치자 무당은 백여우로 둔갑하며 죽었다. 그 부인도 병에서 나았다. 강태진은 고향으로 돌아와 행복하게 살았고 한다. 속담에 “여우도 돌봐야 잘 산다”는 말이 있는데 여우고개 이야기에서 비롯했다고 한다.
=> 여우 둔갑 이야기를 그리 복잡하지 않게 했다.
8) 홀어미다리
금산면 청도리 마을에 한 과부가 살고 있었다. 부자는 아니었지만 혼자 몸으로 남매를 키운 후 모두 출가시켰으므로 여장부라 했다. 그러나 과부는 나이가 많아질수록 삶의 허무함에 쓸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밭에 씨앗을 뿌리러 가던 과부는 어릴 적 한 동네 살았던 사내를 만나게 되었다. 둘은 오랜만에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사내도 홀아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후부터 둘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서로 정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그 홀아비는 개울 건너 언덕바지에 집을 짓고 혼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과수댁이 만나러 가려면 개울을 건너야만 했다. 매일같이 밤이면 집을 나갔다가 새벽녘에 돌아오는 어머니의 행실을 수상하게 여긴 아들은 어느 날 밤 어머니의 뒤를 미행하여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아들은 어머니가 자식들을 위해 고생해 온 세월이 측은하게 생각되어 모르는 채 덮어주고자 하였다. 그러나 밤마다 개울을 건너느라 젖은 옷을 말리는 어머니의 고생스러움에, 아들은 개울에 징검다리를 놓아주기로 하였다. 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된 동네 사람들은 아들의 효성을 칭찬하며 그 다리를 홀어미다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이런 다리가 여기저기 있어 전통사회가 경색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9) 고잔들
남극엽(南極曄) <남풍 부는 비에)
남풍 부는 비에 누역 삿갓 저 농부야
밭 갈아 밥 먹기는 그 아니 직분인가
고잔들 다 저문 날에 아름답다 농가로다
이런 시조가 있다. 한자어는 한자로 적고 풀이하면 “南風 부는 비에 누역(도롱이) 삿갓 저 농부야, 밭 갈아 밥 먹기는 그 아니 직분인가. 古棧들 다 저문 날에 아름답다 農歌로다”라고 하는 말이다.
=> 남풍은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고, 여름바람이다. 풍요로운 느낌을 자아낸다. 남풍이 불고 비가 올 때 도롱이 입고, 삿갓 쓰고 들에 나가 일하는 모습을 본다. 밭갈이 밥 먹는 것은 농부의 직분이다. 古棧이라는 지명은 여러 곳에 있는데, 작자가 호남 사람이니 전라북도 김제에 있는 고잔이다. 고잔들 다 저문 날에 농사 노래가 아름답게 들린다.
* 금산사 미륵전
8) 남풍 부는 비에 누역 삿갓 저 농부야
밭 갈아 밥 먹기는 그 아니 직분인가
고잔들 다 저문 날에 아름답다 농가로다
이런 시조가 있다. 한자어는 한자로 적고 풀이하면 “南風 부는 비에 누역(도롱이) 삿갓 저 농부야, 밭 갈아 밥 먹기는 그 아니 직분인가. 古棧들 다 저문 날에 아름답다 農歌로다”라고 하는 말이다.
=> 남풍은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고, 여름바람이다. 풍요로운 느낌을 자아낸다. 남풍이 불고 비가 올 때 도롱이 입고, 삿갓 쓰고 들에 나가 일하는 모습을 본다. 밭갈이 밥 먹는 것은 농부의 직분이다. 古棧이라는 지명은 여러 곳에 있는데, 지은이 남극엽(南極曄, 1736-1804)이 호남 사람이니 전라북도 김제에 있는 고잔이다. 고잔들 다 저문 날에 농사 노래가 아름답게 들린다.
*금평저수지와 동심원
* 증산법종교의 영대(강증산 부부의 묘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