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부 객망리 강씨 문중에 내려왔나니, 이제 주인을 심방함이니라.” 하시고 "시속에 ‘아무 때 먹어도 김가가 먹을 밥’이라는 말이 있나니 대저 무체(無體)면 무용(無用)이라. 서(西)는 금(金)인 고로 김(金)씨에게 주인을 정하였노라.” 하시니라.(道典 2:15) |
* 김(金)씨에게 주인을 정하였노라!
■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
왕건의 성은 "왕(王)"이고, 이름은 "건(建)" 인가?
왕건(王建) 집안은 원래 성이 없었다.
왕건은 이름일 뿐이다.
고려시대 이전에는 왕족과 극소수의 대귀족만 성을 가졌고,
나머지 사람들은 성 없이 이름만 있었다.
유력한 호족의 집안이었던 왕건(王建)조차도 성이 없었나 봅니다.
왕건의 "왕"이라는 성은 왕건이 성공한 다음 이름 앞의 "왕"을 성으로 삼은 것일 뿐이다.
<고려사>에도
왕건의 아버지는 용건(龍建), 나중에 융(隆)으로 고쳤다.
할아버지는 "작제건(作帝建)"으로 기록되어 있다.
* (雲註): 왕건의 성씨관련 자료 찾아지는대로 올리지요.
왕건의 이야기가 나온김에
무덤 이야기가 생각 나네요.
우리의 머릿 속에는 한반도 반도사관에 의식이 갇혀 있답니다.
서서히 노력해서 밝혀 보시길 바랍니다!
우리민족이
한반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으로 오게되는~
와야만 하는, 뭔가가 있었나 봅니다.
물론, 이곳
한반도는 예전부터 부도(符都)의 땅으로 신성시 되어왔던 곳으로 생각됩니다.
* 환단고기를 위서니 뭐니 하는 자들도 있지만~
환단고기 속에 고이 간직되어 있는
" The Sound, Word of Heven !", " 그 한얼님의 소리, 말씀~!"
환단고기의 역사부분의 기록은
북방 위주로
엄청나게 왜곡 축소된 기록이라는 점을 상기시켜 드립니다.
우리민족의 성씨는
강(姜)씨 와 더불어
김(金), 이(李), 박(朴), 흐름에,
뭔가의 Key(커~이, 可以)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1942년, 중국 쓰촨성(四川省) 성도(成都)에서
일본군의 공습을 피하기 위해 주민들이 방공호를 파다가 우연히 무덤 하나를 발견하였다.
그 크기가 매우 거대해 예사롭지 않은 무덤이라고 판단한 주민들은 계속 발굴하기 시작했고
발굴 결과 이 무덤은 길이가 무려 80m나 되었으며
그 안에 안치된 묘실도 15m가 넘었다.
묘실에는 12위의 역사상이 늘어서 있고
동서, 남의 3방에는 24위의 각종 악기를 연주하는 기생상이 새겨져있는데 각각의 그림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1961년에 이 무덤은 중국의 보호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조사 결과 이 무덤은 왕건묘로 밝혀졌다.
그러나 당시 왕건의묘는 한반도에는 없고 대륙에만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고려 태조왕건이었다.
이를 증명하듯 맨 처음에 이 무덤은 왕건(王建)의 묘였지만
곧 이 무덤이 한국인에까지 알려지자 영릉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해서 중국은 고려 태조왕건의 이미지를 철처히 감추려 하고
그 존재를 중국의 역사에 편입시키려 하고 있다.
<사진>.(출처)
왕건(王建 847∼918)의 출생지는 <구 오대사(舊 五代史)>에서 밝힌 것을 보면, 진주(陳州) 항성(項城)이다. 여기서 진주 항성이란 땅 이름 자체가 한국땅이 아니다. 그럼 진주 항성이 어디인지 살펴보기로 한다. 진주는 춘추전국시대 때 진(陳)나라이다. 특히 북주(北周 AD.557∼581년) 나라가 있었던 곳이다.
진주는 현재 중국 대륙에 있는 하남성 항성현 동북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양현(陽縣)이다. 양현은 희양군이자 진주부(陳州府)라고 한다. 진주는 하남성 낙양에서 동쪽으로 산동성 접경지대에 있는 개봉(開封)시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왕건이 자랄 때 이름은 우충(于忠)이다. 왕건의 자는 약천(若天)이라고,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에 기록돼 있다. 왕건은 송악군 사람이라고 되어있다. 왕건(王建)이 태어난 고향이 진주 항성현이고, 도읍한 곳은 송악군이다. 송악군은 오늘날 중국의 성도(成都)이다. (율곤 이중재)
중국은 "전촉왕 왕건묘"라고 하는데
현지에서는 토속 거주민들은 "가우리(Gāolí 高麗) 왕건묘" 라 부른다.
사천성 성도(成都 청뚜) 시내의 영릉로에 왕건묘가 위치하며
전촉왕 왕건묘라고도 하고 입구에는 영릉이라 표기되어 있다.
10세기 초 혼란기에 성도를 중심으로 전촉(前蜀:903~925)을 세운 왕건의 묘로 영릉(永陵)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러나, 고려 태조 왕건의 묘로서 왕건이란 인물은 대륙에서 오직 하나이다.
적사암으로 만든 묘실은 전실과 중실, 후실로 나뉘고, 전 길이 23.4㎝로 관좌양측에는 12위의 역사상(力士像)이 늘어서 있고, 동. 서. 남의 3방에는 24위의 각종 악기를 연주하는 기생상이 새겨져 있다.
악기를 연주하는 동작의 특징을 보면 각각의 그림이 각기 다른 자태와 조형의 미를 보여주며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왕건의 묘는 1942년에 발굴되었고 1961년 국무원에 의하여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중 하나로 지정되었는데 무덤의 길이는 80m정도에 15m높이로 묘실이 남아 있다 .
<왕건 묘의 위치>- 구글 지도 (보기)
우리들의 성씨는 가장 중요한 조상들의 유산으로 그 중요성을 우리가 거의 잊고 있는 부분이다. 성씨의 생성에 관한 학자들의 주장은 기원전 2천년 경으로 보고 있는 것 같은데 대게 중국의 성씨 기원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이론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타당하다.
첫 째 한웅 제사 왕조가 치우와 헌원의 전투로 끝나고 헌원이 화하족(신강성에서 발원하여 황하일대에서 농사를 짓기 시작한 지금의 한족의 모태)과 더불어 한문을 기반으로 농경문명을 일구기 시작했고조선은 단군 왕조가 들어섰으나 몽골 족에 의한 우랄 알타이어와 제사 문자가 보편화되지 못해 중원에서 그 기운이 쇠퇴하는 시기에 있었다. 중국에 성씨가 생기기 시작한 시기는 한문이 생기기 시작한 이후(기원 전 25세기) 5백년이 지난 후 왕조에 의한 한문 성씨의 선택이 가능한 때였다.
둘째 단군조선이 쇠퇴하는 따라서 군웅이 할거하는 시기에 왕조의 토대를 잡기 위한 성씨의 선택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중국의 성씨는 왕조의 조속 기간과 그 맥을 같이 한다. 그래서 헌원과 최초 황하 농경민족의 후손으로 보이는 수, 당의 왕조인 이씨가 3억5천만으로 가장 많고(심지어 귀화한 유대인도 개봉의 청진사 송대 비문을 보면 성씨가 이씨로 되어있다.
그 다음에는 자신이 제사장(王)의 자손이라고 해서 왕씨인데 그 수가 1억8천만이다. 그 다음이 장씨 류씨 천씨 등인데 모두 1억이 넘는다. 서기2천년 중국의 성은 무려 4.400 종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일본의 성씨는 보통 두 글자로 학자들에 의하면 한반도에서 건너간 성씨만 해도 32%에 달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성씨는 2010년 현재 1975년도 인구조사 성씨 분포도를 근거로 김씨가 전체인구의 21.9% 이씨가 14,9% 박씨가 8.5% 최씨가 4.8% 이 4대 성이 총인구의 반을 차지하고 있다.
한국 성씨[姓氏]의 유래[由來]
성씨의 발생 근원은 정확한 기록이 없어 상세히 알 수는 없으나 대략 중국 성씨 제도의 영양을 받아 고조선[古朝鮮]시대에 왕족[王族]에서부터 사용한 것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다. 고대 씨족사회로 접어들면서 그 집단을 통솔하는 지배자가 나타나는데 통솔에 필요한 정치적 기능을 부여함에 있어서 다른 씨족과 구별하기 위한 호칭[呼睨]이 성 [姓]으로 나타나고 점차적으로 지방 세력이 중앙귀족화 되면서 다수의 부족을 통솔하기 위한 칭호이며 정치적 신분을 표시하는 중요한 의미로 나타났다.
따라서 성[姓]은 초기에 왕실[王室]이나 귀족[貴族]에서만 국한되어 사용하다가 국가에 공이 큰 공신[功臣]들이나 귀화인[歸化人]들에게 세거지역[世居地域]이나 강산. 명칭을 따서 사성[賜姓]을 하면서 확대되어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일반 서민들의 성씨사용은 과거제도[科擧制度]가 발달되는 고려 문종[文宗:1047]이후에서부터 보편화 되었으며 상민[常民]과 노비[奴婢]를 포함한 모두가 성을 된 것은 조선 말 개혁정치가 시행되면서 부터이다.
삼국사기 제13권 고구려 본기1[三國史記濟13권 高句麗本紀1]에고구려 시조 주몽[朱蒙]은 고구려를 건국하고 고씨[高씨]를 자기 성으로 하였으며 건국공신[建國功臣]인 재사 에게는 극[克]씨를 .무골[武骨]에게는 중실[仲室]씨를. 묵거[默居]에게는 산실[山室]씨를 사성한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 23권 백제본기1[三國史記23券百濟本紀1]에는 백제의 시조 온조[溫祖]가 부여계통에서 나왔다 하여 부여[扶余]씨로 하였으며 신라시조 혁거세[赫居世]는 기원전 57년경 양산[陽山]기슭 나정[蘿井]옆에 있는 숲에서 표주박 같은 커다란 알에서 탄생 했다 하여 표주박 박[朴]씨를 성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고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金閼智]는 65년 탈해왕 9년에 금성[金城] 서쪽 시림[始林] 숲 속의 금함[金函]으로부터 나왔으므로 김[金]씨라 하였으며 .가야국 시조인 수로[首露]도 42년 [신라 유리왕 19년] 금관국[金官國] 북쪽 귀지봉 [龜旨峰]에 떨어진 6개의 황금알 [卵]에서 나왔다 하여 김[金]씨라 하였다.
삼국사기 제 1권 신라본기[三國史記 第1券 新羅本記]에는 신라 3대 유리왕 9년 [서기32]년 에 6부를 개정하여 알촌 양산촌[閼川 楊山村;양부 장 알평 [謁平]에게는 이[李]씨를 돌산 고허촌[突山 高墟村]장 소벌도리[蘇伐都利]에게는 최[崔]씨를 .무산 대수촌[茂山 大樹村;점량부]장 구례마[俱巤馬]에게는 손[孫]씨를 .취산 진지촌[嘴山珍支村;본피부]장 지백호[智佰虎]에게는 정[鄭]씨를. 금산 가리촌[金山加利村;한기부]장 기타[祇陀]에게는 배[裴]씨를 .명활산 고야촌[明活山高耶村;습비부]장 호진[虎珍]에게는 설[薛]씨를 사성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주장을 믿지 않는다. 고조선과 삼국시대를 거쳐서 혈통을 생명처럼 중히 여기던 각각의 왕조들이 함부로 성씨를 결정했을 리 만무하다. 그리고 현재 한국의 성씨분포가 중국의 그것과 확연히 다를까? 사실 필자가 한국의 역사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된 동기 중 큰 부분이 왜 한국에는 신라 성씨(박, 김, 최. 윤, 설, 정, 이, 강씨)들이 가장 많고 고구려 성씨인 고(高)씨는 적고, 백제의 성씨인 사(沙), 연(延), 협(俠), 직(玗), 국(鞠), 목(沐), 묘(描). 여(余)씨는 거의 없는가? 그리고 고려 왕조는 400년이 넘었는데 왜 지금 한국에 거의 없는가? 그래서 한반도는 신라가 오래 점령했고 백제와 고구려는 중국에 있었으며 고려도 중국일 것이라는 추론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 다음에는 그 동안 정리 된 민족의 역사를 통해 이들 성씨가 나타난 줄거리를 구성해 본다.
우선 신라의 박(朴),석(昔), 김(金) 3 왕성(王姓)과 육부 촌장의 성인 이(李)씨, 최(崔)씨, 손(孫)씨,정(鄭)씨, 배(裴)씨, 설(薛)씨가 한국에 많은 것은 이해가 간다. 우리나라의 주성(主姓)인 박,(朴), 석(昔), 김(金), 최(崔)씨들은 언제 어디서 경주로 왔을까? 우선 이 질문에 대해 살펴보자. 김부식(金富軾)이 지었고 이병도(李丙濤)가 주석한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신라 양산(陽山경주)에 모인 사람들은 고조선(古朝鮮)의 망인(亡人:피난민)들이라고 했다. 이들의 성씨는 박, 석, 김씨와 최, 설, 배, 정, 손, 이씨인데 한단고기(桓檀古記)와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의 천문관측 기록(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을 근거로 볼 때 이들은 모두 고조선(古朝鮮)의 진한(辰韓: 辰朝鮮)인들이 양자강 중류에서 천문을 관측하다가 춘추전국시대에 진시왕에게 나라가 망한 후 약 700여년이 지나 500년 경 반도로 와서 다시 천문관측을 한 것으로 판단된다.(관련 근거: 놀라운 점은 기원전 201년 이전 신라의 일식 16개에 의한 관측자의 위치는 양자강 유역이었고 787년 이후 신라에서 기록된 일식 9개의 관측자 위치는 한반도 남쪽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위의 성씨들은 한문이 생성된 이후 생성된 고조선인들의 성씨이고 고조선의 발상지는 천산(天山: 탱그리 산)이므로 이들은 모두 북방민족계열이다. 2009년 KBS에서 흉노와 한나라의 관계 특집을 방영하면서 흉노 왕 선우의 아들 김일제가 신라 김씨와 합류했다고 한 바 있다. 또 태종무열왕 거북비문에 자신을 소호금천(小昊金天)씨의 후예라고 기록한 것으로 미루어 그가 치우와 싸운 황제 헌원(치우와 사촌 간)의 아들이건 아니건 몽고계열 북방민족임이 틀림없다. 이를 근거로 한문 성이 생기기 이전 김씨의 성은 무엇일까? "늑대와 함께 춤을"이라는 영화를 생각해 보면 해답은 간단하다.
박(朴)씨는 나무 옆에서 점치는 사람(제사장)으로 고대의 제사장들 부류에서 나왔고 따라서 구석기, 신석기 시대의 제정일치시대를 주관한 환인조선 시대에 제사장 혈통에서 따온 성씨이며
김(金)씨는 골드(Gold) 이 아니고 쇠 김(金)인 점으로 미루어 세계최초의 철강문명을 기반으로 중원의 관경을 개척한 한웅(桓雄)천황인 치우(蚩尤)의 혈통에서 따 온 성씨로 보인다. 신라의 나머지 성씨 즉 석(昔)씨는 후손이 번창하지 못했다는 설이 있으나 필자의 판단에는 처용가의 주역인 점으로 미루어 신라로 온 페르시아(Persia)계 사람으로 보인다 최씨, 윤씨는 김씨와 함께 낙랑 등 고조선 북방계 제후국의 왕의 성씨였을 가능성이 있고 나머지 설, 이, 정, 손씨들도 고조선의 성으로 보인다. 특히 김씨는 중국에 거의 없고 박씨는 전혀 없는 점이 특징이다.
그 다음에 우리가 주목해야할 성씨는 이(李)씨이다. 경주 5성 중에도 보이고 황하 세속 농경 세력의 주력으로 수(隨),당(唐)의 왕조에도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막조선(莫朝鮮: 馬韓) 출신으로 자칭 선비족으로 보이며 "나무 밑에서 낳은 아들"이라는 뜻의 한문 성씨이며 이들은 말을 타고 숲과 초원에서 살던 사람이 중국에 와서 농사를 짓던 성씨로 보인다.(雲註: 여기에서 말하는 이씨는 경주(慶州) 이(李)씨 이다.)
따라서 한반도 민족은 현재의 성씨분포가 보여주듯이 김씨. 이씨, 박씨들의 나라이며 몽골계 단일민족임이 틀림없다.
특히 상기 성씨들을 모계로 두지 않은 한국인은 거의 없으며 "한 다리 건너 모두 친척이다, 서울 가서 돌을 굴리면 맞는 사람은 모두, 김씨, 이씨, 박씨이다"라는 말까지 있다. 바로 이 부분이 우리들이 잊고 있는 조상들의 유산의 가장 큰 비밀이고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한단고기 1만년의 모든 비밀을 물려준 민족이 우리이고 이 책을 후손에게 불려주는 이유이다.
우리나라의 김씨가 가지고 있는 비밀은 이 외에도 있다. 기원전 40세기 수메르 시절의 설형문자 점토판이 지금의 시리아 우가리트 지역에서 발견되었는데 이 점토판 내용 중에 "나는 수메르의 왕, 왕 중 왕" 이라는 글이 발견되었고 이 내용을 해석한 서양학자들은 왕 중 왕으로 번역했으나 실제 우랄알타이어 음으로 표현하면 "나는 수메르의 김씨, 김씨 중의 김씨" 였다. 2002년 나의 스승이신 전흥상 목사(고신)님께서 현지에서 탁본해온 것을 지금 나도 가지고 있다. 또 이 수메르의 신화에는 우리의 환웅신화에서 나오는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 뇌사(雷師)가 나온다.
여기의 김(金)이라는 우리말에서 서양의 왕인 킹(King)이라는 명사가 나온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한단고기 삼성기 전 하권의 12 연방 중 하나인 수밀이국 개척이 동두 철액으로 중원을 개척한 환웅 시대인데 연대를 소급해서 기록한 것이 아닌가 한다. 고비사막의 흑피옥과 요하인근의 지하의 반 쯤 탄 벼(군량미)발굴로 미루어 환웅시대를 단군기원 기원전 2.096년에다 환웅시대 1.565년을 합한3.661·년 보다 더 멀리 잡을 수도 있겠다.
여하튼 이러한 우리 성씨들의 유래를 통해서 왜 카터 코벨 박사(미국인 일본역사 전문가)에 의해
한국인이 유엔 유네스코에 의해 현대 문명 인류의 시원(始原)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는지 알만 하다.
출처: <7만년 한국민족사> 차우정님글 (링크)
* 소호금천씨(少昊임금 金天氏)가 인류문화 최초로 황금덩어리를 사람의 형상처럼 만들고 이를 “하느님의 형상”으로 느끼라 하였으며, 또한 하늘에 제사를 드렸다는데서 유래하였다.
금(金)씨란 본시 황금(Gold)의 상징이었으며, 황금으로 빚은 황금덩어리는 황금불상(黃金佛像), 금불(金佛), 금천(金天) 즉 하느님(God)이었고, 금씨(金氏)는 제왕(帝王)족이었고, 제왕 족은 금(金)덩어리를 후손에게 전수하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에 금(金)을 전수받은 이는 “임금(金)”의 금(金)으로 불러져왔었으며, 임금이 존재하는 수도를 금성(金城)이라 했다.
예로부터 지나(支那:China)족 들은 금(金)을 금이나 김으로 발음하지를 못하고 ‘징’과 ‘낑’ 사잇소리를 내곤했다 한나라와 신제국시대에 통해 동방문화를 접하게 되었던 영어문화권에서는 금(金)을 King(징 또는 낑·킹)으로 받아들이게 되는데, 결국 왕권의 상징은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의 금(金)에서 킹(King)으로 보급되어 전 세계의 모든 왕(임금)이 킹(金·King)으로 표준화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다행이라고 본다.
따라서 영어문화권에서는 아시아 동북부민족을 퉁구스(Tungus)족이라고 부른다. 이는 동호(東胡:퉁후)족 즉 동이족인데도 지나(支那 : China)족들의 혀가 돌아가질 않아서 ‘동호’를 ‘퉁후’라고 발음했기 때문에 영어문화권에서는 퉁구스(東胡·퉁후·Tungus)로 전해졌었다. 금(金) 역시 금천(金天·Gold·God·하느님)과 황금(Gold) 그리고 임금(金·King·왕)과 김(King)씨로 자리 잡은 지 오래되었다.
지금 우리는 왕조 조선 때문에 금(金)씨를 김씨라 하고, 영문표기를 Kim으로 하고는 있지만, 유럽제국과 남미제국 그리고 쿠바에 사는 금씨의 누대(累代) 이민후세 종친들은 김씨(金氏)를 King으로 불러주기 때문에 King으로 사용하는 후손들도 있다. 이미 자신들의 혈통인 성씨를 King(金)으로 확정하여 자손대대로 전수하는 후손들도 아주 많다는 사실을 확인 한 바 있다.
(출처: 한단가리)
* (雲註): 부연해서, 경주(慶州) 이(李)씨 이야기를 해야하는데 자료 만나기가 어렵군요.
경주(慶州) 이(李)씨는 조상대대로 현실 정치에 관여하는걸, 영(靈)적으로 터부시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를 볼진대, 아마도 당골나무(木)의 아들(子),
즉 제사장의 아들로 생각하는 바이다. 주위에 경주이씨 분들 성격을 한번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주태백이 초월자들이 많을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가짜들도 많지만~^^.
박제상의 부도지로 인해 박씨가 제사장의 혈통이었다고 생각하는 것, 또한 부정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중고(中古) 이래로, 이(李)씨, 박(朴)씨는 제사장 계열이고,
강(姜)씨, 김(金)씨는 왕(王)족 계열로 보인다.
강(姜)씨는 인류 최초의 성씨로
증산(甑山) 상제께서 강(姜)씨 문중으로 오시게 된 내력의 말씀이 계십니다.
* 하루는 종도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세상에 성(姓)으로 풍(風)가가 먼저 났었으나 전하여 오지 못하고 사람의 몸에 들어 다만 체상(體相)의 칭호로만 쓰게되어 풍신(風身) 풍채(風采) 풍골(風骨) 등으로 일컫게 될 뿐이오 그 다음에 강(姜)가가 났었나니 강가가 곧 성의 원시(原始)라 그러므로 이제 개벽시대를 당하여 원시로 반본(返本)되는 고로 강(姜)가가 일을 맡게 되느니라(대순전경 3:47) |
* 서천서역대법국(西天西域大法國) 천개탑(天開塔)으로 내렸다가 경주용담(慶州龍潭)구경하고 모악산(母岳山) 금산사(金山寺) 삼층전(三層殿)에 삼일(三日) 유연(留延)하고 고부객망리(古阜客望里) 강씨문(姜氏門)에 탄생(誕生)하여 경자(庚子)에 득천문(得天文) 신축(辛丑)에 대원사도통(大願寺道通) 임인(壬寅)에 상봉(相逢) 계묘춘(癸卯春)에 동곡(銅谷)에 들었노라(속수전경) |
* 상제님께서 임인(壬寅 : 道紀 32, 1902)년 4월 13일에 전주 우림면 하운동(全州 雨林面 夏雲洞) 제비창골 김형렬의 집에 이르시니라. 이 때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심회를 푸시고 형렬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이제 말세의 개벽 세상을 당하여 앞으로 무극대운(無極大運)이 열리나니 모든 일에 조심하여 남에게 척(隻)을 짓지 말고 죄를 멀리하여 순결한 마음으로 정심 수도하여 천지공정(天地公庭)에 참여하라. 나는 조화로써 천지운로를 개조(改造)하여 불로장생의 선경(仙境)을 열고 고해에 빠진 중생을 널리 건지려 하노라.” 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나는 본래 서양 대법국(大法國) 천개탑(天蓋塔)에 내려와 천하를 두루 살피고 동양 조선국 금산사 미륵전에 임하여 30년 동안 머물다가 고부 객망리 강씨 문중에 내려왔나니, 이제 주인을 심방함이니라.” 하시고 “시속에 ‘아무 때 먹어도 김가가 먹을 밥’이라는 말이 있나니 대저 무체(無體)면 무용(無用)이라. 서(西)는 금(金)인 고로 김(金)씨에게 주인을 정하였노라.” 하시니라. 이로부터 형렬의 집에다 식주인(食主人)을 정하고 머무르시면서 도문(道門)을 열어 천지공사를 행하실 때 형렬에게 신안(神眼)을 열어 주시어 신명(神明)이 모이고 흩어지는 것과 어명(御命)을 받드는 모습을 참관케 하시니라. 형렬이 모시면서 보니 밤이면 상제님께서 기거하시는 방에서 ‘웅웅웅’ 하고 벌이 나는 듯한 소리가 나더라.( 道典 2:15) |
* 인류 최초의 성씨는 태호 복희(太昊伏羲氏)의 풍(風)씨 이었으나
전하여 내려오지 못하고 다만 "풍신(風身) 풍채(風采) 풍골(風骨) 등으로 일컫게 될 뿐이오"
다음 성씨가 염제 신농씨(炎帝 神農氏)의 강(姜)씨 인바,
강씨문(姜氏門)에 탄생(誕生)하게 되셨다는 말씀 입니다.
* 다른 성씨는 어떻게 되느냐고 하실텐데
대부분의 성씨는
상기의 강(姜)씨, 김(金)씨와 이(李)씨, 박(朴)씨에서 갈라져서 나온 성씨이고
아니면 새로 생긴 성씨 일 것 입니다.
물론, 풍(風)씨 계열로 보이는 진주 소씨 문중 들도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 아직은 성씨들을 정리해서
말 할 수 있을 정도의 자료가 확보된 것도 아니고
또한, 제가 그럴 수 있는 경지가 아니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