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아둔 그 곳, 열두 시간 이야기
서은혜
저녁 일곱 시 이십 분. 다른 지역에서 업무상 교육일정이 잡혀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차를 타고 출장을 다녀왔다. 서른 평 남짓한 집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빌라 꼭대기층 에 있다. 초등학생 막내가 보이지 않았다. 작은방 문을 열어보니 녀석이 불도 켜지 않고 침대 위에 몸을 옹크리고 있다가 나를 보고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퉁퉁 부은 눈이 빨갰다. 부엌에서는 미영이모가 늦게 들어온 나를 위해 밥그릇에 비빔밥 재료를 얹고 있었다. 혹여 아이가 미영이모에게 꾸중을 들었다고 울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엉뚱한 말로 어르고 달래는 일을 저질러서는 안 될 것 같아서 일단 방문을 닫고 조심스럽게 나왔다.
그 사이 중학교 다니는 둘째는 식탁 앞에 혼자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학교에서 축구 하느라 힘들었다며 오늘 있었던 일을 슬그머니 꺼내놓았다. 평소에 말을 잘 하지 않는 사내아이라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너는 운동을 좋아하지도 않는데 경기 팀을 짤 때마다 은근히 인기가 있더라.” 하면서 맞장구를 치자 아이도 덩달아 배시시 웃었다. 낮의 일이 다시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그런 둘째가 대견해서 등을 두들기고 장난도 좀 치는 와중에 방안에서 혼자 울고 있을 막내가 자꾸만 신경 쓰였다. "선생님, 막내한테 무슨 일이 있는 거예요?" "학원 다녀와서 내내 아무 얘기도 하지 않고 저렇게 울기만 하고 있어요. 학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게 아닐까 짐작만 할 뿐이에요. 선생님, 늦게까지 출장 다녀오시느라 고생 많으셨는데 식사부터 얼른 하세요. 막내가 일어나서 밥 먹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아야 저도 마음 놓고 퇴근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선생님, 그렇다. 나는 이 아이들의 엄마가 아니다. 여기는 내 집도 아니다. 여기는 그룹홈이고 나는 여기서 일하는 사회복지사다. 보육사라고도 한다. 그룹홈은 원가족과 함께 살기 어려운 아이들이 가정과 유사한 환경에서 자라도록 만든 사회복지시설이다. 건물을 크게 지어서 몇 십 명씩 공동생활을 하는 아동양육시설과는 모양과 성격이 다르다. 가정과 유사한 형태를 만들기 위해 지역사회 안의 주택이나 빌라, 아파트 등에 간판도 없이 살림을 꾸리고 사회복지사 서너 명이 일곱 명 안쪽의 아이들과 함께 365일 24시간을 쉬지 않고 돌아가며 함께 잠자고 밥을 지어 먹으며 생활한다. 그룹홈에 따라 아이들이 사회복지사를 엄마라고 부르는 곳도 있고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곳도 있는 모양이지만, 여기서는 우리를 이모라고 부르기로 했다. 나는 그중의 한 명이다. 그날 그 시각, 월급에서 떼어낸 돈으로 빚을 갚으며 기거하는 또 다른 집에서는 남편과 내가 낳은 두 딸 아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윽! 딴 집 냄새!”
퇴근해서 집에 들어설 때마다 둘째딸은 나를 끌어안다 말고 이런 소리를 하고는 했다. 그것도 정색을 하고. 내가 그룹홈에서 일을 하고나서 이 년 정도가 될 때까지 아이는 매번 이렇게 반응을 했다. 이박삼일씩 다른 공간에서 먹고 자고 하다보면 그곳의 냄새가 온몸에 배는 모양이었다. “엄마가 돌아올 때마다 다른 집 냄새가 퍼지기는 해.” 대학생이 된 첫째딸이 이 정도로 덤덤하게 대꾸하는 것에 비해 중학생이던 둘째딸의 반응은 늘 사나웠다. 며칠씩 일하고 돌아온 엄마한테 이러기냐고 서운한 마음이 들기보다는, 정말로 바람피고 온 사람처럼 머쓱한 마음이 들고는 해서 나도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그룹홈에서 있었던 이야기는 집에서 절대로 꺼내지 마세요. 나는 하나도 듣고 싶지가 않거든요.”
“난 정말 엄마가 그룹홈에서 일하는 거 싫어하지 않는다니까. 그래도 너무 열심히 하지는 마! 아무래도 엄마는 에너지가 다 닳도록 열심히 할 것 같지만.”
존댓말을 썼다가 반말을 썼다가, 나를 끌어안았다가 떠밀었다가, 둘째가 오락가락하며 말했다.
“그룹홈에서 아이들이 엄마를 ‘이모’라고 부른다고? 다행이네. 아무리 그래도 말이야. 아무도 엄마를 ‘엄마’라고 부르게 해서는 안 돼. 엄마는 어디까지나 우리 엄마니까.”
사춘기 딸아이의 혼란스러운 감정이 꿀렁꿀렁 요동을 치며 나를 뒤흔들고 싶어 했다. 그러나 둘째 딸의 걱정과는 달리 그룹홈 아이들은 나를 엄마라고 부르지 않았다. 심지어 이런저런 사정으로 그룹홈에 처음으로 ‘입소’를 하게 된 아이들은 나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이모’라고 부르는 데에도 엄청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선생님, 아, 아, 이모라고 하려고 했는데…”
“아니야. 호칭은 네 마음이 괜찮아질 때까지 편하게 써도 좋아.”
여자그룹홈에서 일하던 어느 날 저녁이었다. 식사 준비를 도우며 식탁에 숟가락을 놓던 그룹홈의 고등학생 둘째가 눈을 흘기며 끼어들었다.
“뭐야. 집안에서 우리 이모한테 네가 선생님, 선생님 하는 거 듣기 불편해. 당장 고쳐줬음 좋겠어.”
새로 들어온 열여섯 살 아이는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며칠간 어떤 호칭도 사용하지 않았다.
남편과 두 딸 아이는 내가 그룹홈에서 슈퍼스타급 인기를 구가할거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여자 아이들이 사는 그룹홈에서는 이 년 밖에 지내지를 못했고 남자 아이들이 사는 그룹홈으로 옮긴 것도 이제 겨우 일곱 달이 되었을 뿐이다. 그룹홈 경력이 길지 않은 처지라 이모들이 아이를 낳는다고 육아휴직을 할 때마다 잠깐씩 자리를 대신 하는 통에 법인 안에서 부득불 집을 옮겨 다닐 수밖에 없었다. 가정과 유사한 그룹홈 환경에서 일하는 이모들은 사표를 쓰지 않는 이상 아이들 곁을 옮기는 것을 끔찍하게 여긴다. 아이가 거짓말을 한다거나 동생을 때려놓고도 시치미를 뗄 때 꾸지람을 하다 보면 대번 알 수 있다. 아이가 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나는 여자 그룹홈에서 이 년쯤 지내고 나서야 아이가 내 말을 순순히 받아들인다는 느낌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 말로는 도저히 설명하기 힘든, 아이와 나 사이에만 존재하는 어떤 공기였다. 아니, 그제야 단단한 끈 같은 것이 우리 둘 사이를 묶어준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일곱 달 본 나를 보고 아이들이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를 거라 짐작하는 일은 괴이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관계를 생각보다 쉽게 상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 그룹홈에는 나 말고도 두 명의 사회복지사가 더 있다. 사랑을 더 받으려고 아득바득 기를 쓰는 아이들 못지않게 이 세 명의 어른들이 벌이는 보이지 않는 공방전도 장난이 아니다. 어느 이모는 좋고 어느 이모는 싫다, 하며 대놓고 저울질하는 아이 앞에서 어른들끼리 눈물 흘릴 일도 부지기수다. “여기는 정글이에요. 정글.” “맞아요. 이 정글도 보통이 아니죠.” 한참 전쟁을 벌였던 동료와 나눴던 대화다.
인정, 애정, 이런 게 사람을 참 치사하게 만든다. 그 치사함이라면 나도 빠지지 않는다. 갖은 친절과 애정 공세로 아이들의 마음을 싹 다 그러잡을 심산이었다. 아이들과 대화를 나눌 때면, 그간 읽어온 책을 들먹이며 지적인 매력 공세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런데 고등학교 다니는 첫째가 이러는 거다. “이모, 진짜 부담스러워요!” 내가 쓸 수 있는 최고 풀파워로 나섰는데도 매번 밀리는 상황을 보면서 진짜로 도리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호락호락한 아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시간과 비례하는 마음의 크기를 앞지를 그 무엇도 아이들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룹홈에서 일을 시작한 첫 해에는 애들이밥 먹는 식탁에서 등을 돌린 상태로 싱크대를 마주 보며 설거지를 하다가 슬그머니 눈물을 삼켰던 적도 있다. 내가 그래도 집에 가면 얼마나 사랑받는 엄만데. 뭐 이러면서.
밤 아홉시 이십 분. 미영이모도 퇴근하고 없는 시간, 거실에 내려앉은 공기가 제법 고요하고 묵직해지고 있었다. 아이들이 간식 먹느라고 뒤늦게 내놓은 그릇들을 설거지하는 사이 싱크대에 놓아둔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대학생이 된 큰딸 전화였다. “어, 하연아. 무슨 일이야?” “응, 엄마한테 그냥 한번 전화해 봤어.” “에이~ 진짜로 할 말이 없는데 전화했어?” 그 사이 거실에서 중학생인 둘째가 나에게 뭐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뭐라고? 내일 아침에 깨워달라고? 몇 시에? 베이컨이 먹고 싶다고?” 순간 수화기 너머 큰딸이 내 목소리를 주의 깊게 듣고 있다는 느낌이 왔다. 아이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지만 그 이상하고 무거운 정적에서 싸한 기운 같은 것이 전해졌다. 아뿔싸. 집에서는 피곤하다고, 아침 늦게까지 잠을 자고 싶다고, 먹는 건 다들 알아서 챙기라고 소리소리 지르던 내 모습이 생각났다. 서운한 마음이 든 건가. 배신감 뭐 이런 건가. 몰라. 엄마 일하는데 얘는 왜 전화를 걸어가지고. 사람 정신 빠지게.
밤 아홉시가 되면 모두 방에 들어가서 잠을 자기로 했지만, 두 시간 가까이 울음을 터뜨린 막내와 진이 빠지도록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거실에 너저분하게 굴러다니는 세간살이들을 대강 치우고, 부엌 한켠에 치워둔 음식물 쓰레기통을 밖에 내다놓고, 이 방 저 방 숨겨 두었던 게임기를 내놓으라고 윽박지르면서 시시한 농담을 조금 나누는 사이 시간은 자꾸 흘러가고 있었다. 우리끼리 한 달에 한 번 가족회의를 열어서 밤 아홉 시에는 꼭 자도록 하자, 집안 청소도 조금씩 맡아서 돌려보자, 온갖 규칙을 다 세워보아도 어른이 중간에서 우물쭈물하는 사이 규칙이고 뭐고 모든 것이 없는 것처럼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가습기에 물 채운 거 확인하고. 다들 방에 들어가서 이제 자는 거다. 옳지! 이모도 이제 진짜 자러 간다.”
방문을 닫고 하루종일 미뤄두었던 행정업무를 막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아니, 큰 딸한테 다시 전화를 해볼까 말까 고민을 하던 순간이었다. “이모!” “텅텅텅” 막내가 나를 부르며 방문을 두드렸다. “무슨 일이야?” “이모, 저 이빨이 빠졌어요.” 문을 열자 막내가 검지와 엄지 사이에 빠진 이를 집어 들고 나에게 내밀었다. 이가 빠진 자리를 “이~”하고 내밀어 보이기까지 했다. 아래쪽 어금니였다. 그때 나는 그 빠진 이와 이가 빠진 자리를 보고 “우와”하고 탄성을 질러 줄 세상에서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을 뚜렷이 자각하면서 아이를 쳐다보았던 것 같다. 하루종일 미뤄두었던 그 어떤 서류업무들보다 집중해야 할 순간이었다. “밑에 새 이가 나고 있구나. 아프지는 않아?” 깨끗한 거즈를 뭉쳐서 피가 채 마르지 않은 잇몸 위에 꼭꼭 얹어주었다. “꽉 물어봐. 옳지. 이제 이모랑 같이 옥상에 올라가서 빠진 이를 하늘 위로 던져버릴까? 헌 이 줄게, 새 이 다오, 하고 노래도 부르자.” “아니요. 제가 그냥 가지고 있을래요.” 막내가 아직도 퉁퉁 부은 눈을 반달 모양으로 만들어 씨익 미소를 짓더니 이를 싼 휴지 뭉치를 손에 쥐고 방으로 돌아갔다.
‘이모’라는 호칭에 어떤 사명감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룹홈이라는 새로운 형태를 가진 가족의 한 구성원으로서 말이다. 아이가 “이모”하고 불렀을 때 “오이야”하고 대답하는 순간을 좋아한다. 아이와 평생을 함께 할 수도 없으면서 ‘엄마’라고 불리는 건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아이의 보호자이면서도 아이가 어디서나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도록 놔둘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아이가 ‘이모’하고 부를 때의 그 포근하고 끈끈한 거리감을 좋아한다. 그러나 ‘이모’는 잘 모르는 여성을 친근하고 편하게 부를 때, 심지어 야동에서조차 나이 좀 있고 만만한 여성을 부를 때 온갖 다양한 뉘앙스를 담아 사용하는 호칭이기도 하다.
그룹홈에서 일하고부터 블라우스에 스커트, 하이힐, 만년필 챙긴 핸드백을 착용하고 출근하는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사시사철 땀이 나도 금방 마르고 어떤 자세를 취해도 쫙쫙 늘어나는 재질의 티셔츠와 고무줄 바지가 딱이었다. 가방은 늘 백팩을 멨다. 하루나 이틀 묵을 옷가지와 짐들을 들고 다니다보니 어깨끈 넓고 넉넉한 사이즈의 백팩을 메야만 만원 버스든 만원 지하철이든 마음 놓고 다닐 수가 있었다. 아이가 부르면 언제 어느 때고 뛰어나갈 수 있도록 운동화를 신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가끔씩 거울을 볼 때마다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딘가로 추락하는 느낌 때문이었던 것 같다.
직장에서 알고 지내던 사람이 오랜만에 만나 인사하면서 그랬다. 외모가 많이 바뀌었다고, 왜 그런 곳에서 고생을 하느냐고. 나쁜 뜻은 전혀 없는 말이었다. 오히려 애정을 가득 담은 말이었다. 그래서 얼마간은 아팠고 얼마간은 고마웠다. 한마디로 정리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한 사람의 생활상이나 직업은 겉모습으로도 대충 드러나게 마련이다. 사람들이 보자마자 공손하게 말을 걸 것만 같은 의복이라던가 악세사리 같은 것들에 종종 현혹된다. 얼마 전에는 하나에 칠십 만원이 넘는 가죽가방이 사고 싶어서 핸드폰을 붙들고 며칠간 남 몰래 몸살을 앓기도 했다. 소위 전문성 있어 보이는 모습, 가운을 입는다거나 가죽 가방 안에 노트북을 들고 다니며 정장을 빼입고 책상 앞에 앉아 키보드나 두들기는 내 모습을 그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러고서는 아이들과 제대로 생활할 수가 없는 노릇이다. 나를 다 드러내 보이고 몸으로 뒹굴며 깔깔대지 않고서는 아이들이나 나나 기계처럼 공허한 시간만 보내게 될 것이다. 내가 이 일을 좋아하는 이유는, 아이들과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내밀한 관계성에 있다. 찰나로 보일 그 순간의 웃음이 의식도 없이 지어지기까지 징글징글 할만치 하찮아 보이는 시간들을 정성껏 엮어야 한다. 빨래, 청소, 요리, 이야기, 머리 쓰다듬기나 끌어안기 그리고 수많은 발품까지도. 냄새, 온도, 맛, 감촉, 소리, 공간 같은 기초적 요소들을 가장 인간적으로 빚어가야 하는 작업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이 수많은 노동들은 종종 콤플렉스나 혼란, 심지어 수치심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나는 그룹홈에서 아이를 돌보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밥을 지어서 임금을 받는다. 하지만 집에서 두 딸아이를 낳아서 직장을 그만두고 똑같은 일을 할 때는 사회로부터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으로 치부되기도 했다. 칠 년이 넘는 그 시간은 내 이력서에 적을 수 없는 시간으로 남았다. 무보수 노동, 아무 대가 없이 치러지는 사랑의 행위라고 했다. 엄마가 무급에 대가 없는 사랑을 주는 사람이라면, 임금을 받고 돌봄노동을 하는 보육사는 대가를 받는 노동자라서 사랑이 부족한 존재가 되는 걸까. 아니다. 하루 8시간이 아니라 24시간을 근무하는 보육사들은 같은 사회복지계 안에서도 사회복지시설종사자 인건비가이드라인의 적용을 받은 적이 없다. 사랑의 행위는 왜 이렇게 늘, 뭘 받지 않거나 덜 받는 방식으로 증명이 되어야 할까. 그렇다면 소위 사랑의 노동을 하는 나는 왜, 거울을 보거나 누군가를 의식할 때마다 추락하는 느낌이 드는 걸까. 여성이나 약자의 희생과 피해로 굴러가는 가부장제의 폭력성이 주부들을 얌전하게 부려왔던 것처럼, 돌봄노동에 종사하고 있는 누군가를 성실하게 부리는 이 순간들을 더 이상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체성이 패션처럼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면 나는 보육사라는 직업을 선택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을 종종 하기도 한다. 거울을 볼 때마다 불안함에 시달리는 걸 보면 뭐 대단한 걸 성취할 수 있는 자리라서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아이들과의 관계에 놓였을 때의 내가 나는 가장 좋다. 나는 나 하나지만, 어떤 사람과 함께 관계를 맺고 서 있느냐에 따라서 다른 표정을 짓고 다른 말투를 쓰고는 하는데 나는 그룹홈에서 아이들과 있을 때 내 모습을 스스로도 꽤나 편안해 하고 좋아하는 편이다. 아이들 앞에서는 거짓 웃음을 짓지 않아도 된다. 꾸미지 않아도 아이들이 다 받아준다. 그럴 때마다 나는 표현하기 힘든 고마움 같은 것을 느끼고는 한다. 심지어는 아이들이 나를 꽤 괜찮은 사람으로 받아들여줄 때마다 뭔가 이상한 감정이 생기는데, 날마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열망 같은 것이기도 하다. 아이가 나를 마주볼 때의 그 표정, 눈빛, 뭐 그런 것 때문에, 그 순간에 내 마음이 하얗게 빛을 받는 것 같은 그 느낌 때문에 나는 도저히 이 자리를 벗어날 수가 없겠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아이들의 기대가 그리 크지 않기도 하지만 거기에 부합하는 사람으로 계속 살고 싶다는 생각이 날마나 나를 나아가게 만드는 것 같다. 아니, 할 수만 있다면 이 아이들과 함께 보이는 삶 너머의 영역까지 살아가는 동력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욕심까지 품어보기도 한다. 아이들이 날마다 나를 키운다고 해도 크게 다른 말은 아닐 것 같다.
시계를 보지 않았으나 아주아주 깜깜한 밤. 막내는 괜찮을까. 잇몸에 꽂아준 거즈를 갈아주어야 하지 않을까. 괜히 걱정이 되었다. 모니터 앞에 앉아 행정업무를 시작하려다 다시 일어났다. “이게 뭐야. 아직도 안 잤어? 일단 거즈는 새로 갈자. 이번에는 조금 있다가 쓰레기통에 싹 뱉어내고 진짜로 자는 거야.” 녀석이 아직도 안자고 놀다가 들킨 게 민망해서 자꾸만 싱글거렸다. “책상 위에 얹어둔 이 코딱지 같은 것들은 뭐야? 으이구. 이러다가 집어 먹겠다. 이모가 치우고 갈게.” “이모, 안 돼요. 코딱지 같은 건 절대 버리면 안 돼요! 내가 오늘 지우개로 아주아주 오랫동안 정성을 다해서 만든 거란 말이에요.” “알았다. 네 소중한 코딱지들은 그럼 내일 아침에 자리 만들어서 잘 치워두길 바래. 잘 자.”
내 안에 자리잡은 기준으로 아이의 세계까지 함부로 휘젓고 싶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그 '고귀한 것'과 '하찮은 것'을 규정하는 권력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내가 그 기준에 동의한 적이 있는지 제대로 따져본 적이 없었다. 내가 사는 세상이 어떤 곳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판단하고 말하는 사람들 때문에 화가 났던 순간들이 없는 듯이 자고 있다가 아이가 만든 코딱지 같은 것과 함께 일렁일렁 일어났다. 아마도 내가 자꾸만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좋아하는 이유를 나 스스로에게 해명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일이 그렇게 하찮지 않음에 대해서 스스로를 설득해 보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이방 서랍장 위에 올려둔 가습기가 제대로 작동되고 있는지 확인하고 전등 스위치를 다시 내린 뒤 문을 닫고 방을 나왔다.
불 꺼진 거실을 지나 부엌 가스 밸브도, 베란다 창도 모두모두 안전하게 잠겨있는지 확인했다. 큰 아이들이 자는 방문을 열어 가습기도 다시 확인했다. 아이마다 특징이 다 다르기는 하지만 죄다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마다 비염이나 기관지 질환을 앓는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특히 비염이나 기관지 질환은 코로나 증상과 구별이 잘 되지 않기도 해서 집안뿐 아니라 학교까지 들었다 놨다 하며 큰 소동을 벌이고는 했다. 아이들 목에서 컹컹하고 소리가 나지는 않는지 코가 막혀서 이상한 숨소리를 내지는 않는지 늘 체크해야 했다. 시월의 건조한 밤. 가습기라도 틀어놓아야 다음날 아침에 편안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수가 있었다.
밤 열시. 드디어 내 방, 아니 이모들이 기거하는 방으로 돌아와 방문을 닫았다. 이모방이라고도 하고 종종 사무실이라고도 한다. 지금 당장은 나 혼자 쓰는 내 방 같아 보이겠지만 알고 보면 이모들 여럿이 돌아가며 일을 하고 잠을 자는 방이다. 교대로 근무를 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책상도 컴퓨터도 돌아가면서 쓴다. 통상 사무실에서 직원마다 자기 책상과 컴퓨터를 따로 쓰는 방식이 여기에서는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 오늘 내가 이 컴퓨터를 쓰고 나서 다음날 퇴근하고 나면 다음날 출근한 동료가 같은 책상에 앉아 같은 컴퓨터를 쓰는 방식이다. 침대도 마찬가지다. 이모들이 돌아가며 쓰는 책상 왼쪽에는 이모들이 돌아가며 쓰는 침대를 딱 붙여 놓았다. 조금이라도 공간을 확보하려면 무엇이든 다닥다닥 붙여야 해서 안방에는 가구들이 죄다 붙어있다. 물론 침대 위에는 돌아가며 쓰는 이불과 베개를 얹어두었다. 책상 오른쪽 옆에는 각종 회계서류나 공문서철, 법인 등기부등본, 시설안전관리 매뉴얼 같은 행정서류를 빽빽이 꽂아둔 열다섯 칸짜리 책장을 딱 붙여 놓기도 했다.
여자아이들이 사는 그룹홈과 달리 여기서는 이모들이 남자아이들과 화장실을 따로 사용할 수 있도록 화장실 달린 안방을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안방 문을 열면 원목으로 된 싱글침대와 검정색 컴퓨터 모니터와 연필꽂이만 얹어둔 책상, 컬러프린터, 엄청난 양의 서류를 꽂아둔 원목 책장, 그리고 빌라를 지을 때부터 설치를 한 듯한 화이트 펄 하이그로시 붙박이장이 화장실 문과 함께 주르륵 눈에 들어온다. 벽에는 아이들 일정을 기록한 화이트보드와 그룹홈 아동 청소년 권리선언, 사회복지사 선서 같은 인쇄물들이 눈에 띄는 곳마다 붙여져 있다. 책상 맞은편 벽면을 가득 채운 붙박이장 안에는 이불 외에도 철 지난 아이들 옷가지와 각종 문방구, 장난감, 여분의 칫솔과 샴푸 같은 생활용품 그리고 자잘한 후원물품과 행정서류, A4용지 더미 같은 행정물품들이 여느 집들과 조금은 다른 모양으로 자리 잡고 있기도 하다.
오늘은 하루종일 기차를 타고 외지로 출장 다녀온다고 평소와 달리 화장을 하고 외출복 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아직 씻지도 옷을 갈아입지도 못했다. 들어오자마자 막내가 우는 것을 보고 나서 정신이 빠졌던 모양이다. 생각보다 시간이 늦어져서 서류 업무는 씻고 나서 시작해야 할 것 같았다. 너무 늦은 밤에 빌라 꼭대기 층에서 샤워한다고 요란하게 물소리를 낼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기차 놓칠까 봐 교육장에서부터 지하철역이고 기차역이고 할 것 없이 마구 뛰어다녔던 탓인지 따뜻한 물로 씻고 나니까 온몸이 나른해지는 게 이대로 누워서 잠을 자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하지만 오늘 안에 정리해야 하는 기본 행정업무들을 모두 마쳐놓아야만 했다. 지금 기록하지 않으면 중요한 내용들을 빠뜨릴 확률이 높아진다. 그러면 내일 아침에 출근할 동료가 본인이 근무하지 않은 시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어서 아이를 난처하게 만든다거나 아프게 만드는 경우까지 만들 수 있다. 사회복지 서비스라는 것 자체가 사람이 사람에게 무형으로 제공하는 일이다 보니 사회복지 현장의 모든 일을 서류 양식으로 남기는 작업은 중요했다. 그러다 내용보다는 서류 시스템으로 평가받게 되는 웃지 못 할 상황을 종종 경험하기도 하지만, 유사시 아이의 상태를 확인하게 되는 자료가 된다거나 각종 세금과 후원금이 오가는 상황을 증빙할 수 있는 것 역시 행정 서류이기도 해서 절대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밤 열두 시. 아이들이 어떻게 지냈고 이모들이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기록하는 ‘보육일지’, 그룹홈에서 근무자들이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했는지, 특정 용무의 방문자는 없었는지, 아이들이 어떤 용건으로 외출이나 외박을 했는지 등등을 기록하는 ‘운영일지’, 그리고 아이와 따로 시간을 내어 대화를 나눈 내용을 자세히 기록하는 ‘상담일지’ 작성까지 모두 마쳤다. 워낙 익숙한 일들이라 웬만큼 일지 작성을 한다고 한들 몇 시간씩 들이고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눈이 퉁퉁 붓도록 울음을 터뜨린 이유를 어떤 식으로든 호소해보려고 애를 쓰던 막내 얼굴을 떠올리다 보니 머리가 어지러워져서 금세 잠이 들기가 어려웠다.
학원 선생님은 도대체 막내에게 왜 그런 말씀을 하셨던 걸까. 다음 주 직원회의 시간에 막내가 다니는 학원을 옮기자고 의견을 내어 볼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만한 일로 두 시간 동안이나 울음을 터뜨리는 건 심하지 않은가. 막내가 울음을 터뜨린 진짜 이유는 끝내 나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이를테면 친구 문제 같은 것 말이다. 오만 생각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그렇지만 아이가 이렇게 눈물을 흘릴 때마다 학원을 옮기는 식으로 아이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진짜로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그렇구나, 그렇구나, 들어주기만 하고 결론에 이르러서는 네가 알아서 해라, 해버리면 그건 또 무슨 소용일까. 잠이 오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몸이 너무 늘어져서 더 이상 명료한 생각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장롱을 열어서 두꺼운 이불 한 장을 더 꺼내었다. 날이 추워져서 얇은 이불 하나만 덮고 잤다가는 아침에 영 맥을 추기가 어려웠다.
새벽 네 시. 밤새 모기에게 시달렸다. 11월이 다가오면서 날씨가 서늘해지자 산 밑에 있는 그룹홈으로 모기들이 숨어 들어왔다. 밤에 자려고 이불을 덮고 눕는데 모기가 귀에 대고 앵앵 소리를 내었다. 모기를 잡을 기운이 없었다. 그냥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눈을 감았다. 그러다 결국은 깼다. 도저히 가려워서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손이 몇 군데나 물려 있었다. 나도 모르게 이불 밖으로 손을 내민 모양이었다. 가렵거나 말거나 이불을 뒤집어쓰고 다시 잠을 청했는데 또 다시 깨버렸다. 모기가 다른 데를 또 물었던 거다. 보육일지 인수인계 란에 이모방에도 홈매트를 꽂자고 몇 줄 더 적으리라 속으로 몇 번씩 결심을 했다.
여자 그룹홈에서 일할 때였다. 거기서도 찬바람이 불 때가 되면 모기가 기승을 부렸다. 그룹홈에 입소한 지 며칠 되지 않은 네 살 난 막내가 유독 모기에 많이 물렸다. 새벽 한 시쯤 되었던 것 같다. 그날은 막내가 자꾸만 오른쪽 뒤꿈치를 요에다 문지르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낮에는 못 봤던 위치에서 빨갛게 부어오른 자국이 보였다. 발목에 한 군데, 손등에 한군데, 이렇게 두 군데 정도를 물린 모양이었다. 자면서도 가렵다고 칭얼거리는 모습이 하도 고통스러워 보여서 나까지 애가 타고 괴로워졌다. 그래서 찾아낸 방법이 물파스였다. 아이만 들여다보면서 대기하고 있다가 뒤척거릴 때마다 물파스를 들고 빨갛게 부은 상처 문지르기를 반복했다. 녀석도 시원했던지 이내 물파스 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팔다리를 뻗고 잠이 들고 다시 잠이 들고 했다. 그런데 웬걸, 나도 이제 안심을 하고 그만 잠을 자려고 자리를 정리하던 찰나였다. “으앙!” 막내가 뜨거운 물을 덮어쓰기라도 한 것처럼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물파스를 바른 손등으로 그만 눈을 비빈 것이다. 예삿일이 아니라는 예감이 들면서 몸이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얼른 타올에 물을 적셔서 막내를 닦기 시작했다. 이미 이성을 잃은 막내는 몸을 뒤로 휘게 만들어서 온몸으로 분노를 표출했다. 안지도 말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정말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밀어내건 말건 아이를 안고 안심시켜보려고 애쓰다 보니 허리가 막 뻐근해지고 있었다. 허리 통증이라는 게 시작되는 모양이었다. 미안해. 미안해. 아니 안 미안해. 하나도 안 미안해. 하. 정말로 미안해.
너무 답답하니까 모기에 물려서 부어오른 상처마다 입을 가져가 “후후”하고 입김까지 불게 되었다. 어느새 아이가 울음을 그쳤는지 주위가 조용해졌다. 아이가 멀거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게 뭔가 하는 눈치였다. 감동을 좀 먹은 거 아닌가 싶기도 했다. 이후로 내가 상처 부위에 입김을 불기만 해도 막내는 그대로 몸에 힘을 쭉 빼고 잠을 잤다. 그날에 대한 기억이 이후로 별달리 없는 걸 보면 나도 아마 막내 곁에서 몸에 힘을 쭉 빼고 잠을 잘 잤던 모양이다. 그다지 즐겁지도 않은 소란이 희한하게도 내게는 특별한 순간처럼 세세하게 기억되고 있었다. 아이와 나 사이에만 끈끈하게 시작되던 내밀한 순간 중의 하나라서 그런 것 같다. 아마도 내가 그룹홈에서 일하기를 고집하게 만드는 순간 중의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매번 흔들리면서도 서로를 붙들며 간신히 중심을 잡아나가는 순간을 의식할 때마다 그다음 순간을 살아갈 힘 같은 것을 얻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룹홈에서 자는 일은 낮에 하는 일만큼이나 만만치가 않았다. 비단 모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별일 없이 자고 일어난 것 같은 근무일에도 집에 돌아가서 쉬는 날마다 모자란 잠을 보충해야 하는 사람처럼 비실비실하고는 했다.
아침 여섯 시 이십분. 오늘도 여섯 시 이십 분에 알람이 울렸다. 웬만하면 여섯 시 반에 알람을 울리고 싶었지만, 여섯 시반에 아이들을 깨우려면 여섯 시 이십 분에는 꼭 일어나야 했다. 손목에 찬 시계로 진동을 느끼자마자 '으유. 벌써!' 하면서도 달리 방법은 없었다. 약간 뭉기적거리다 말고 몸을 일으켰다. 또 늦으면 변성기가 와서 목소리가 달라지고 사춘기가 와서 가끔씩 어두운 표정을 짓고는 하는 둘째가 "이모 왜 자꾸 늦게 깨워요."하고 말할지도 모른다. 말을 별로 하지도 않는 녀석이 그런 말로 하루를 시작하는 꼴은 당하고 싶지 않다. 그러면 하루종일 미안해서 나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그 착한 아이가 너한테 그간 요청한 게 뭐가 있다고, 아침에 일찍 깨워달라는 그 부탁 말고 뭐가 있었어? 너는 그거 하나도 못 들어주는 거야?" 하고 스스로 또 질책을 시작할 것이다. 진저리가 났다. 눈곱도 떼지 않고 발딱 일어나 걸어서 부엌으로 나갔다. 어젯밤 둘째에게 약속한 베이컨을 굽기 위해서였다. 저번에는 버섯탕수와 부추전을 준비했는데 녀석들이 질색을 했다. 별말도 없이 표정만 일그러뜨리긴 했지만, 아마도 고기나 햄이 없어서였을 것이다.
약간 늦었다. 베이컨 두 봉지를 다 굽고보니 여섯 시 삼십오 분쯤 되어 있었다. 아까 알람 소리를 듣자마자 발딱 일어났어야 했는데. 아마도 내가 알람을 듣고 뭉기적거린 시간만큼 늦어졌을 것이다. 녀석이 또 늦었다고 속상해 하지는 않을까 싶어서 머리가 약간 아득해졌지만, 아무튼 정신을 차리고 둘째를 깨웠다. 아직 어린아이라고는 해도 사춘기에 접어들고 만난 아이라, 만난 지 반 년 정도 밖에 안 된 아이라, 더군다나 왠만한 속내는 혼자 삭히고 마는 아이라, 나는 순하고 성실한 이 아이가 한 번씩 내뱉는 속상한 말들을 그냥 들어 넘기기가 어려웠다.
노크를 한 뒤 방문을 열고, "둘째야 일어나야 된다. 여섯 시반이 넘었다!"하고는 스위치를 켜서 방안에 환하게 불을 켰다. 그리고는 다시 돌아와 구운 베이컨이 담긴 접시를 식탁 위에 얼른 얹었다. 냉장고 안에는 진미채무침에 콩자반, 명이나물, 깻잎찜, 배추김치, 파김치에 심지어 어제 구워둔 전이 있었지만 그냥 다 두었다. 그래도 야채는 먹어야 하니까 시원한 콩나물국 한 대접씩은 퍼 놓았다.
걱정과 달리 둘째는 순한 얼굴을 하고 나왔다. 뽀얀 얼굴이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해서 약간 일그러진 채 화장실로 직행했다. 그동안 나는 식탁을 다 차렸다. 아, 막내가 아직 일어나지 않았구나. "막내야, 일어나야 된다." 막내가 이불로 눈을 가린 채 손가락만 내밀고 뭐라고 뭐라고 시늉을 했다. "으잉? 이게 무슨 말이야? 사? 아니야? 오? 여섯 시 오십 분에 깨워달라는 말이야?" "네. 맞아요." "알았어. 여섯 시 오십 분에 다시 깨워줄게. 조금 더 자거라." 확실히 내가 낳은 자식들과 뭔가가 다르기는 했다. 별 심리적 작용 없이 마구 대하는 행동이 잘 되지를 않았다. 내가 생각해도 더 잘해주려고 애쓴다는 느낌이 확실히 있다.
아침 일곱 시 이십분. 둘째가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집을 나섰다. “다녀오겠습니다.” “오이야.” 그날 아침 여자 그룹홈의 넷째도 이렇게 학교로 나섰다.
“너는 엄마랑 같이 살지 않아?” 친구가 넷째에게 물었다고 했다. 교실 뒤에 있는 학급 게시판에 제각기 ‘세 가지 소원’을 적어서 붙이기로 한 날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넷째는 담임 선생님이 나눠주신 학습 활동지 첫 번째 칸에 ‘엄마와 같이 살고 싶다’하고 막 적던 참이었다. 넷째가 친구를 보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 아이는 옆의 친구에게, 그리고 그 친구는 또 옆의 친구에게 말했다. “쟤는 엄마랑 같이 안 산대.”
넷째는 그때 눈물이 조금 났다고 했다. 왠지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어쩌면 넷째는 “너는 엄마랑 같이 살아?”하고 되묻고 싶은 마음을 꾸욱 눌렀을지도 모르겠다. 친구들의 눈치가 조금 이상했으니까 말이다. 자기 마음을 채 알아차리기도 전에 눈물이 먼저 나오는 상황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약간 어지러운 표정이었다. 다른 아이들과 똑같은 활동지를 작성했을 뿐인데, 아이들이 수군거리고 놀라는 것을 보고 나서 자신이 친구들과는 뭔가 다르고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날 상황은 아이가 눈물을 흘리고 담임선생님이 개입을 하면서 우야무야 끝이 났지만 나는 아직도 그날의 상황을 다시 불러서 다른 상상을 이어보고는 한다. “나 그룹홈에서 살아.”하고 아이가 친구들에게 대답하는 상황 말이다. 그리고 잇따라 “그룹홈이 뭐야?”하고 질문하는 친구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기도 한다. 아직도 궁금증이 채 해결되지 못한 넷째의 친구들은 집에 돌아가 엄마에게 그날 있었던 이야기를 하며 그룹홈이 뭐냐고 다시 질문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엄마들은 아이의 친구가 산다는 그룹홈이 어떤 곳인지 저마다 아는 대로 대답을 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자녀들에게, 친구가 사는 곳이 어떤 곳이라고 대답을 해 줄 수 있을까.
그룹홈에 대해서 처음 들었다고, 더 알고 싶다고 하는 사람들을 가끔 만난다. 그러면 그룹홈은, 여러가지 사정으로 부모와 함께 살 수 없는, 다섯 명 내외의 아이들이 사회복지사들과 함께 아파트나 빌라, 주택에서 통상의 가정과 비슷한 형태로 생활을 하는 아동복지시설이라고 설명을 하면 된다. 그런데 이 단순한 설명이 나는 참 어렵다. “고아원”할 때마다 “아!”하고 쉽게 반응하는 것처럼 “그룹홈” 할 때마다 “아!”하고 쉽게 반응해버릴 사람들을 상상하게 되어서 묘하게 움츠러들게 된다. ‘차라리 사람들이 그룹홈을 모르는 상태가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누구든 아이가 부모와 함께 살지 않는다는 사실에 집중을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룹홈에 대해 너무 모르거나 잘못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 자꾸만 뭘 해명해야만 하는 불편한 상황들을 지켜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끓게 되다가도, 뭐든 설명하려고 하다보면 결국에는 아이의 ‘부모 없음’ 때문에 동정심을 자아내고야 마는 어색한 흐름 때문에 그 어느 쪽으로도 섣불리 나아가지 못하고 중간에 서서 뭘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고 늘 고민만 하게 된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잘못도 없는 아이들이 쉬쉬하며 조용히 숨어서 살아야만 하는 걸까. 이 상태도 그다지 건강하지 못하다는 생각은 여전히 남아있다.
‘보육사’에 대한 생각 역시 마찬가지다. 아이들 곁에서 그림자처럼 없는 존재인 것처럼 기능할수록 제 기능에 충실한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는 한다. 돕는 존재들인 보육사가 아니라, 당사자인 아이들이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주인공으로 활개를 치며 살 수 있도록 말이다. 어쩌면 보육사는 목소리 없는 포지션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더군다나 타인의 고통을 누구보다도 내밀하게 만나야 하는 보육사 같은 사람들이 목소리까지 내고 살면 안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흔히들 그러듯이, 늘 비교되고는 하는 엄마를 떠올려보았을 때 말이다. 제 인생은 없는 듯이 아이들만 바라보며 사는 엄마들의 삶을 보육사들조차 그대로 따라가야 한다는 건 너무 건강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룹홈에서 생활한 지 겨우 2년 7개월째다. 아직까지 그 어느 질문에서도 답은 찾아내지 못했다. 그러나 답이 없기 때문에 나는 그 질문을 더 자주 떠올리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룹홈에 대해서 어두운 이미지를 희석시키기 위해 밝고, 씩씩하고, 희망차고, 뭐라도 하려고 발버둥치는 아이들의 이미지를 그려내려고 애쓰고 싶지는 않았다. 굳이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더라도 조금만 더 일상을 자세히 살펴보려고 애만 쓴다면, 그룹홈의 일상은 통상의 사람들이 겪는 일상과 그다지 다르지가 않다. 내가, 내가 낳은 아이들과 달리 그룹홈 아이들에게 더 친절하게 행동하게 되는 패턴 역시 마찬가지다. 만난 지 7개월 된 가족이 모진 말도 스스럼 없이 던지고 마구 대하는 상황이 나는 더 이상하다는 생각이다. 외려 이렇게 노력하며 다가가다 보면 아이와 나 사이에 그 자잘한 일상들이 쌓여서 그 어떤 가족 못지 않은 추억을 공유하며 끈끈한 관계를 만들어 나갈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아이들의 씩씩한 모습도 쓸쓸한 모습도 어떻게 클로즈업 하느냐에 따라서 일반적이지 않은 모습으로 비치는 것에 대해서 우려할 뿐이다. 조금만 뒤로 물러서서 보면 아이든, 그룹홈이든, 정상가정이든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오늘 이것을 길게 길게 이야기하면서 당신에게 전달할 수 있다면 정말이지 눈물이 날 정도로 기쁠 것 같다.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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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지 <epiic>측으로부터 2023년 1월에 실을, 보육사의 내러티브 논픽션 한 편( 200자 원고지 80매 이상)을 써달라고 부탁을 받아서 쓴 글입니다. 결말 부분에서부터 힘을 제대로 모으지 못해서 안타까움이 좀 있습니다. 그러나 회원분들이 합평을 준비할 시간이 너무 촉박해져서 일단 제출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