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양동 마을
1. 慶州의 연혁(東京誌에 의함)
新羅의 옛 都邑이다.
漢나라 五鳳 元年(기원전 517년) 朴赫居世가 나라를 세우고 진한 땅에 都邑을 정하고 국호를 徐羅伐이라 하였으니 혹은 斯羅 라 칭하고 혹은 斯盧라 칭하였으며, 후에 新羅라 일컬었다. 脫解王 9년에 始林에 鷄怪(鷄怪: 김알지 탄생 전설)가 있어 이곳을 鷄林이라 했다. 기림왕(基臨王) 10년에 다시 新羅로 고쳐 불렀다. 新羅 敬順王 9년에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니 태조 왕건이 신라를 병합한 다음 옛 新羅 王都 鷄林을 慶州라 이름하고 신라 마지막 왕 김부(金傅: 경순왕의 이름)는 경주사심관을 삼았다. 이것이 경주하는 名稱의 始初이다.
2. 양동의 역사
양동마을은 기록된 것은 없으나 양동 안 心水亭 뒤에 있는 성주산 後 斜面에 기원전 4세기 경에 만들어진 것 같은 적석묘가 약 100여기 도굴된 상태로 있는 것으로 보아 청동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살며 부락을 형성했던 것 같다. 또 삼국사기에 박혁거세 6년에 음집벌국(현재 경주시 안동읍 대동 갑산으로 추정)征服 倂合하였다고 기록된바 그 시대에 양동마을도 함께 신라에 부속되어 신라시대에는 서라벌의 변두리 한촌을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이 간다.
이 마을의 원래명칭은 양좌골(良佐谷) 이였으나 일제시대에 경주군 강동면 良子洞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행정구역상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로 되어있다.
고려중엽 이후 성씨제도가 있게 된 후로는 양동에 가장먼저 입성한 성씨는 오(吳)씨로 전해오고있고 그후 아산 장(蔣)씨가 장태골에 터를 잡고 있었으며 그후 고려말에 풍덕유(柳)씨인 柳 復河라는 萬戶가 지방호족으로 양좌골에 거주하는데 유복하는 여주 이씨인 李光浩의 孫女와 婚姻하여 외동딸(무남독녀)을 1458년 청송에 살던 손소(孫昭 1433~1484. 月城 孫氏)에게 출가시켜 손소가 25세에 처를 따라 양동에 입향하여 書百堂을 짓고 살았으며 월성 손씨들이 양동마을에 世居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었다. 손소는 5남 1녀를 두었고 장남은 처가의 대를 잇기 위해 처가로 가버렸고 둘째아들이 愚齊 손중돈(愚齊 孫仲暾 1464~1529)이 실재 양동 마을의 상속자가 되어 손씨 가문은 이끌게 되었다.
우재 손중돈은 김종직에게서 사사하였고 영남 성리학계의 태두로 추앙받으며, 이조판서등 3조의 판서등 조정 내직중 고위직을 두루 역임한 인물로 부자 2대에 걸친 명문가로 상경종사하면서도 향촌의 기반을 게으름 없이 확고하게 관리하여 씨족 마을로 정착시켰다.
손소의 외동딸에게 영일 장기 옥동에 살고 있던 이번(李蕃 羅州李氏)이 혼인하여 처가를 딸 양동에 입향하였고 그의 맏아들이 조선 18현과 동방 5현인 유명한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1491~1553) 이며 史曹制書와 정승과 같은 반열인 좌찬성을 역임하였고 퇴계에게 학문적 영향을 지대하게 준 대사상가로 추앙을 받고 있다.
□ 손씨 이씨 두문중의 갈등과 협조
愚齊 손중돈(회제 이언적의 외삼촌)과 회재 이언적의 걸출한 인물을 배출한 것은 마을 회고의 영광이기는 하지만 이로 인하여 양동마을의 양씨족의 정착사는 복잡하게 된다.
두 가문은 각 가문나름대로 명예와 긍지와 경제력을 가짐으로서 대외적으로는 서로 협력을 하였으나 내부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갈등과 대립관계를 400여 년간 유지하며 서로 경쟁을 하여 왔다. 어릴 적 부친을 잃은 이언적을 돌보아온 외삼촌 손중돈은 총명한 외조카를 장성할 때까지 부임지마다 데리고 다니면서 자상하게 지도하였고 손소의 유산을 공평하게 배분하여 이언적에게 상속케함으로 경제적 기반을 잡도록 하였다. 손씨 문중에서는 晦齊 학문은 愚齊 손중돈으로부터 전수하였다고 하고 이씨 문중에서는 기초학문은 모르나 심오한 성리학의 사상을 전수받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두 문중의 자존심과 肯志로 인하여 두 씨족간의 경쟁을 과거급제나 고위관직 뿐아니라 건축물을 건축하는 것까지 경쟁함으로 마을 전체의 발전에도 상당히 기여한 것으로 드러난다. 그 결과 아직도 이 마을에는 200년이 넘는 고가들이 30여호 남아 있으며 6․25 전쟁의 격전지였음에도 마을에는 아직 150여호의 고 주택을 보유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 양동의 지리적 위치
양동 마을은 兄山江 변에 위치한 넓고 비옥한 안동평야 동쪽 구릉지에 위치한다. 동쪽에 성주산(109m: 혹은 앞산 또는 안산이라고도 함) 뒤쪽은 주봉인 雪倉山(163m: 혹은 종지봉 “간장종지를 엎어놓은 형상”이라 함)사이의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다.
경주에서 이 마을로 물이 逆水하듯 흘러오는 경주 南川이 마을 初入에서 合流하여 형산강의 主流가 되며 (風水에서 역수형국은 지기의 흐름을 극대화하여 부와 번영의 원천으로 해석된다.)이 마을의 지형은 태극형이며 이 형상을 가진 지형은 마을을 이루기에 명당 중 명당이라고 전하여 지고 있다.
이 마을의 이-손 양가문의 살림집은 대부분 구릉 위에 자리잡았고 하층민인 소작 및 노비들은 큰 기와집 즉 언덕에 위치한 집 아래에 위치한다. 양동의 집들은 예외도 가끔있지만 위계질서를 확실히 지킨 것 같다. 말하자면 마을의 살림집들은 규모가 큰 것일수록 높은 곳에 위치하고, 초가집과 흙담집은 기와집 바로 아래나 낮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3. 양동의 고 가옥
마을의 건물들은 이씨 손씨 주 문중간 건물 입지선정 및 건물 건축에 서로 치열한 경쟁을 하면서 마을을 발전시켰다. 가장 먼저 양민공 손소가 25세에 지은 손씨 대종가 서백당이 안골 깊숙한 언덕에 자리잡았고 그 후에 건축한 이씨 대종가 無添堂은 한 능선 건너 물봉골 중간쯤 자리 잡았다. 두 성씨가 각각 한 골짜기씩 차지하고 宗宅을 건축하였다.
다음은 분가하는 두 성씨의 기차들의 주택들이 위계질서에 따라 건축하였다. 손씨 문중에서 이마을 남쪽 마을 어귀에 觀稼亭을 지었고, 바로 이씨들이 경쟁적으로 작은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香壇을 건축하였다.
두가문의 건축 경쟁의 극치는 양동 어귀에서 바로 보이고 위치한 관가정과 향단이다. 두 집은 지리적 위치와 사회적 위치는 비슷하지만 건축 내용은 판이하다. 두 집은 좁은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위치하고 있지만 방향은 135도 정도 비틀어져 있다. 관가정은 높이를 낮추고 형태를 단순하고 간결하게 하여 다른 집들과 크게 구별되지 않는다. 반면 향단은 돌출한 언덕에 위치하여 시선을 가리는 장애물이 하나도 없이 눈에 바로 웅장하게 들어온다. 특히 3개의 박공면을 강하게 노출시킨 형태는 강렬한 인상을 준다. 지금 양동에는 보물로 지정된 건축물이 3점, 중요민속자료 13점, 경상북도 지방문화재 7점, 향토문화재 7점 등 총 31점의 지정문화재가 있다. 한 마을 단위에서는 가장 많은 문화재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양동의 정원은 자연을 그대로 이용한 집을 둘러싸고 있는 그 자체가 하나의 정원을 이루고 있다. 인위적으로 가꾼 정원은 별로 없다. 언덕이면 언덕, 비탈이면 비탈, 계곡이면 계곡, 그 하나 하나가 정원을 이루고 있는 듯하다. 사대부 집 주위에는 대부분 향나무, 백일홍, 괴나무(회화 나무)가 있다. 원인은 모르지만 전통적으로 양동의 사대부 집에는 꼭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 觀稼亭 (우재 손중돈 선생 고택․보물 442호․1480년대 건립)
관가정은 양동마을 초입 勿峰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아 멀리 오똑한 호명산을 바라보고 있다. 경사지를 넓게 깎아 단을 만들고 건물을 깊숙히 앉힌 까닭에, 관가정의 모습은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다.
관가정은 살림집인 동시에 경관을 감상하기 위한 “정자”이다. 이집은 물* 앞의 虎嗚山을 잇는 자연축을 중심축으로 삼아 건축되었다. 따라서 안마당에서 중문을 열면 앞의 잘생긴 산의 전체 모습이 정확히 중문의 프레임 안으로 들어온다. 그러나 이 이제는 대로 세운 대문채에 가려서 산의 모습이 해체된다. 집의 이름은 “농사짓는 풍경을 보는 정자”란 뜻이다.
관가정은 평면도만 본다면 한국의 집으로는 드물게도 좌우가 거의 대치인 형사이며, 마루면 이차지하는 비율이 연면적의 반을 차지할 정도로 비기능적이다.
이 집을 대표하는 이유는 바로 더 넓은 자연을 감상하기 위함이었고 그러기 위해서 누마루가 필수적이었다. 이 집의 핵심은 바로 이 누마루, 즉 “관가정을 만드는데 있었고, 일상의 살림집과 일상에서 일탈된 정자라는 상반되는 건축 유형을 절묘하게 결합한 복합 건축이다. 사랑채의 형태가 유희적이고 변화무쌍 하다면 옆의 행랑채는 극히 기능적이고 획일적이다. 부엌을 중심으로 3개의 온돌방으로 구성된 4칸이지만, 각 칸에 두짝 살창을 달아 그 입면은 모두 동일하다. 부엌까지도 방같이 보인다.
관가정 전체를 흐르고 있는 절제의 정신은 구조 틀까지 일관된다. 이 집은 기둥도 높지 않지만, 지붕 틀의 경사도가 완만해 더욱 층고를 낮추고 있다. 20도가 채 안 되는 서까래의 물매는 보통 집의 절반 정도다.
밖으로 드러나는 형태를 최소로 절제하려는 의도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대들보와 서까래 사이에 구조적인 문제가 생긴다. 서까래 아래와 대들보 위 사이의 간격인 가까워서 일반적인 대공을 설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휘어진 대들보를 사용했다. 위로 휘어진 대들보는 대공 없이도 종도리를 걸어서 서까래의 하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극히 구조적인 이유로 사용된 이 부재는 형태적으로는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가져온다.
관가정의 건물은 우재 손중돈 선생의 청백리사상이 많이 표현된 검소하고 절제된 그의 근검절약 정신의 표출이라고 본다.
□ 향단(香壇)(보물 412호․1540년대 건축)
옥산 獨樂堂에서 5년간 은둔생활을 淸算하고 다시 관직에 복귀한 李彦迪은 경상감사의정 부좌찬성 등의 고위직을 역임하면서 고향가족들에 대해 대단한 선물을 안겨 주었다. 자신의 본거지인 이씨 종가에는 무첨당이라는 아름다운 별당을 지어 주었고, 유일한 공생 이언괄을 위해서 향단이라는 대저택을 지어주었다.
향단은 그 터잡기, 좌향 정하기, 규모와 건축적 개념의 설정에 이르기까지 관가정과 대립적이다. 관가정의 안내와는 135도를 틀어서 다른 안대를 택했고, 규모는 관가정의 두 배를 넘는다.
향단의 외관은 대단하다. 위치도 위치지만 일체의 장애물 없이 건물 외관 전체를 노출시킴으로서 마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이다. 특히 전면 지붕위로 노출된 세 개의 박공면은 사대부 가로는 유례없이 표현적인 형태다. 거의 보이지 않는 관가정의 박공면과는 대조적인 의도다. 사랑채 형태도 같은 의도로 파악된다.
집의 기둥은 행랑채까지 모두 원기둥을 사용했다. 관가정은 사랑 누마루에서 사용된 4개의 원기둥을 빼고는 모두 사각기둥을 화려한 복화반과 포대공을 올렸다. 사랑채의 지붕은 부연을 단 겹처마다, 모두 민간 살림집에는 금기시되었던 최고의 장식들이다. 관가정에서 보았던 절네와 규범 대신 과시와 개성이 번뜩이는 형태들이다. 향단의 구조는 매우 복잡하지만, 모든 건물이 하나로 연결되어있다. 몸체는 日자형이고 그 앞에 긴 행랑을 연결함으로써 전체적으로 巴자형의 평면을 이룬다.
이 집의 중심에는 시어머니가 사용하는 안방이 자리잡아 모든 부분의 움직임을 감시할 수 있다. 복합적인 평면구조 보다 동선체계는 더욱 복잡하며 단절적이다. 행랑에 난 대문을 열면 안채의 높은 축대에 맞닥뜨린다. 가급적이면 출입을 하지 말라는 길이다. 반면 부엌 마당으로 통하는 하인들의 통로는 훨씬 수월하다.
안채의 며느리가 기거하는 건너방은 부엌마당으로만 통하게 되어있고, 안방 시어머니의 따가운 감시를 늘 감수하도록 설계 되어있다. 남편이 있는 사랑방으로 접근하려면 이중 삼중의 감시망을 피해서만 가능하다. 이 집 며느리는 자유로운 출입은 불가능하고, 쥐 죽은 듯이 건넌방에만 파묻혀 부엌의 하인들이나 지휘하고 틈나면 안 대청에 앉아 하늘이나 쳐다볼 뿐이다.
관가정은 외부적으로 폐쇄적이고 소박하지만 내적으로는 개방적이며 대단한 경관을 끌어들인다. 반대로 향단은 외적으로 화려하고 웅장하지만 내적으로 갑갑하고 폐쇄적이다.
이 집에 사용된 몇 개의요소들은 전혀 엉뚱한 건축유형에 인용한 것들이다. 부엌마당의 기능과 공간적 관계를 동시에 얻기 위해 고안된 2층 창고는 사찰의 요사채에서나 볼 수 있는 요소를 도입해 적절한 스케일로 변형시켰다. 사랑채 정면에 부각된 박공면 역시 서원이나 향교건축에서 사용하던 형태요소이다. 규범을 무시하고 인습을 거부한 이런 건축적 대담함이 없었다면 향단의 개성과 낭만성을 실패로 끝났을 것이다.
□ 관가정의 合理性과 향단의 浪漫性
건축을 이해하는 두 가지 태도가 있다. 하나는 여러 건물 사이의 기본적인 성질들을 추출하고 그것들을 분류하여 몇 개의 개념적인 캐터고리를 묶어서 이해하는 방법이다. 이 유형학적 개념의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양식”이란 개념이다.
뵐플린은 “5개의 개념대립”을 추출하여 르네상스와 바로크의 양식적 차이를 설명한다. 르네상스의 예술은 명료하고 선적이지만, 바로크는 불명료하고 회화적이다. 제자인 프랭클은 더욱 건축적인 분석에 몰두하여, 르네상스 공간은 가산적인데 비해 바로크공간은 분할 적이라고 지적했다.
흔히 관가정을 르네상스적, 향단을 바로크라 비유한다. 관가정의 논리적 모듈계획, 유교적인 절제와 금욕주의를 르네상스 적으로 보았고, 향단의 격식파괴와 개인적인 개성과 변형을 바로크적인 범주로 인식했다. 두 집의 대립적인 성격을 상식적인 수준에서 이해한 결과다. 관가정이 유교적 절제와 엄격함을 근거로 한다면, 향단은 건축가 개인의 발산된 개성을 근거로 한다. 이런 점에서 관가정이 합리주의라 한다면, 향단은 낭만주의적이다.
□ 양동마을의 주택들
양동마을에는 한창 번성하였을 때는 약 5~6백여 가구가 생활하였다. 그러나 일제 식민시절과 감오경장 이후 노비해방으로 인하여 이곳에 있던 노비들이 다수 떠났고 6․25전쟁동안 안강, 포항 가옥들이 수없이 파괴되었으니 아직 150여호의 고 가옥들이 있다.
□ 무첨당(無添堂) (보물 411호․1500년대 건립)
이 집은 경주 이씨의 대종가다. 동쪽에는 사랑채와 안채, 서쪽에 별당인 무첨당, 그리고 그 사이 높은 언덕에 祠堂領城으로 이루어졌다. 무첨당을 회재 이언적의 맏손자 李宜潤의 호를 딴 것으로 ‘조상을 욕되지 않게 한다’는 뜻이다.
몰봉골 중간 언적 자락에 위치하여 마을 중심에 위치하고 있고, 사랑채와 별당사이 가파른 직선으로 돌계단을 설치하여 사당을 설치해 이 집의 중심임과 대종가임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 서백당(書百堂) -일명 송첨(松籤) (중요민속자료 23호․1458년 건립)
이 집은 손소 양민공이 25세에 건립한 집이다. 집의 이름인 당호는 서백당 또는 송첨이다. 송첨이란 소나무처마란 뜻이고 사랑마당의 아름답고 큰 향나무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이 향나무의 수령은 대충 500년이 넘은 것으로 간주되면 경상북도 기념물이며 양동마을에서는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이곳의 터는 풍수적으로 3현지지라 한다. 즉 임금을 어질게 하는 현자가 3인이 난다고 한다. 이집에서 우재 손중돈과 회재 이언적이 태어나 2현은 벌써 태어났고 1현이 남아서 손씨 가문이 이씨 가문에게 수적 열세에도 이 마을을 떠나지 않았던 이유다.
□ 수졸당(守拙堂) (중요민속자료 78호․1616년 건립)
여주이씨 수졸 당파의 주손집이다. 회재 이언적의 4번째 손자의 호를 따라 이 집의 이름이 수졸당이다. 처음 건립했을 때는 안채만 건립하였다. 그후 100여년 후 사랑채를 건립하였다. 안골 서백당 맞은편 능선 위에 아늑하게 터를 잡았다. 사당으로 향하는 완만한 경사로가 있고 잔디경사로 옆에는 정원이 조성되어 있어 더욱 안온한 감이 있다.
□ 두곡 고택(杜谷 古宅) (중요민속자료 78호․1733건립)
두곡 이의잠의 후손들이 건립한 주택으로 집옆에는 두곡 이의잠의 영정을 모신 두곡 영당과 그를 위하여 건립된 재실이 있다. 두곡영당 뒤 언덕에는 동호정이 건립되어 전망처로서 역할을 한다. 이 4건물은 두동골이라는 작은 골짜기에 위치하여 한무리를 이루어 이 마을 안의 또 다른 마을 같이 보인다.
대문 조금 못미처 반대편 산자락에는 이 마을을 전형적인 노비의 집인 2칸 짜리 흙담 초가집이 자리잡고 있고 대문채 옆 동쪽 골 안에 영당과 재실이 있다. 두곡 고택과 재실사이 언덕길을 갈지자로 조금 올라가면 마을이 훤하게 보이는 동호정이 위치하고 있다.
안채 동쪽 높은 동산을 과실수와 집안의 정원으로 삼아 지세를 자연그대로 잘 이용한 점이 돋보인다.
□ 낙선당(樂善堂) (중요민속자료 73호․1780년 재건)
안골의 북쪽 산등성이에 높게 자리한 집으로 손씨가의 파송가 중 한다. 사랑마당의 안마당과 두마당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정식의 대문채를 가짐으로서 사랑마당이 영역화 되지만 안채 쪽으로 한채의 건물이 철거되어 사랑과 안채의 관계가 조화롭지 못한 것이 흠이다. 이집은 출입문이 유난히 많아 공감체험에 변화가 많고, 특히 협문을 열면 함실 아궁이의 어둡고 입체적인 공간이 연출되며 그사이 골목을 통해 안마당의 밝은 빛이 들어온다. 일반 살림집에서 경험하기 어려운 공간적 체험이다.
□ 상춘 고택(常春古宅) (중요민속자료 75호․1730년 건립)
서백당이 있는 능선을 따라 남쪽 방향으로 이형동 가옥, 사호당, 상춘고택, 근암고택들이 터를 잡았다. 이 집 4채는 능선 위에 자리잡아 멀리서 보면 마치 굳건한 성채와 같다. 집의 형태와 구조는 안동지방의 ‘뜰집’과 같은 ㅁ자형이지만, 안채와 사랑채는 평행으로 놓이는 뜰집과는 달리 한쪽 날개부를 사랑으로 배치해서 안채와 사랑채가 직각방향으로 만난다. 사랑마당 한 쪽 경사지는 계단식 정원을 조성하고 상춘대라 이름 붙여 운치를 더했다. 작은 규모에 필요한 모든 시설을 배열한 짜임새가 돋보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결한 여유가 배여 있는 집이다.
□ 근암고택(謹庵古宅) (중요민속자료 76호․1780년 건립)
ㄱ자 안채를 담장으로 둘러싸 안마당을 만들고 사랑채는 남쪽에 독립되어 있지만 원래는 상춘 고택과 같이 사랑채가 안채에 직각으로 놓여 안마당을 감싸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0세기초 원래의 사랑채가 없어진 뒤에 현재와 같이 어색한 팔작지붕의 사랑채를 신축하였다. 결과적으로 안채, 사랑채, 곡간채, 대문채 등이 모두 분리되고, 이들을 담장으로 연결한 견형된 형태가 되었다. 사랑채 뒤로 매우 넓은 후원이 조성돼 있다. 근암고택의 뒷동산은 그 가운데서도 백미로 꼽힌다.
□ 사호당 고택(沙湖堂古宅) (중요민속자료 74호․1840년 건립)
이 마을의 중기 주택 가운데 가장 개념이 뚜렷하고 입체적인 변화를 보이는 집이다. ㅁ자 안채에서 사랑채가 병렬로 부가된 모습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ㄱ자 건물 두 개를 중첩해서 만든 집이다.
두 건물군은 바닥 레벨은 변함없지만 그 아래 기단의 높낮이를 노작하여 어떤 부분은 1층, 다른 부분은 1.5층이 되는 입체적 변화감이 풍부하다. 안채나 사랑채가 모두 높은 기단 위에 놓였고, 그 앞의 행랑채 천고를 최소로 낮추었기 때문에 앞산의 항상 대청으로 들어온다.
□ 이향정(二香亭)(중요민속자료 79호․1695년 건립)
마을 초입 동쪽에 있는 진사골에 위치하면서 산길을 따라 원형으로 담장이 인상적이다. 사랑채는 남향안채는 서향으로 서로 직각으로 놓였다. 온양군수를 지낸 이범중이 건립한 고택이다. 안마당은 넓고 안채 바로 앞에 방아 채가 놓이는 등 전체적으로 부농층을 위한 기능들이 고려되었다.
□ 대성헌(경상북도 민속자료 제34호)
이 건물은 18세기 중엽에 세운 주택으로 안채, 사랑채, 행랑채 짜여 있다. 안채는 ㄱ자형이고 사랑채와 행랑채는 ㅡ자형인데 세 동이 모여서 전체적으로 ㅁ자형의 주택을 이루고 있다. 사랑채 대청 앞에는 2카의 팔짝문을 샛기둥 없이 달아, 4짝씩 접어 들어올리게 하였는데, 이것은 다른 건물에서 보기 드문 특이한 구성으로 눈길을 끈다.
□ 양동마을의 정자와 서당
양동마을에는 정자가 10여개 있다. 손씨 가문의 정자 3개와 이씨 가문의 정자 7개가 있다. 더러는 독립되어 있고 더러는 살림집과 복합적인 구성형태를 이루고 있다.
이 마을의 정자는 크게 두 가지 기능을 갖는다. 하나는 자연경관을 즐기는 휴양처로써의 기능이고, 다른 하나는 가문의 인사들이 모일 수 있는 회의장소로서의 기능이다. 두기능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건물 안에 융합된다.
특히 부속 행랑채를 갖는 것은 양동마을 정자들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 수운정(水雲亭)(주요민속자료 80호․1582년 건립)
우재 손중돈 선생의 손자 청허 손엽이 건립한 정자로 양동 물봉골 넘어 설창봉에서 한줄기 갈곡을 사이에 두고 있는 능선 중턱에 홀로 있는 경관이 아름다운 정자다. 정자의 전면은 모두 계자난간을 두르고 마루면을 띄었기 때문에, 출입은 뒷면으로 돌아야 정자에 오를 수 있다. 이런 형식은 경주지역의 전형적인 정자형태다.
□ 심수정(心水亭)(중요민속자료 81호․1560년 창건, 1917년 중건)
역동적인 내부공간과 상징적인 경관을 가진 정자다. 기존에 있던 3그루의 나무를 손상하지 않고 세워져, 세 그루의 회화나무와 건물이 조화롭게 일치한다. 대청의 넒은 빈 공간은 확실하게 구획되지 않은 채 ‘비워 있음’ 그 자체가 내부공간의 주축을 형성한다.
그래서 이 누마루의 이름이 ‘함허루(함허루: 허함이 가득 차고 잠긴다는 의미)’다. 자료= 이재호 바른역사찾기 시민모임 대표
http://yangdong.invil.org/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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