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모더니즘
예술학과 정숙경
포스트-모던'이란 단어
포스트'는 어떤 의미인가?
-모더니즘의 결과로서의?
-모더니즘의 여파로서의?
-모더니즘의 후산으로서의?
-모더니즘의 발전으로서의?
-모더니즘의 부정으로서의?
-모더니즘의 거부로서의?
포스트모던은 이러한 의미들 중 몇 개 또는 모두가 혼합 내지 결합된 의미로 사용된다. 그것은 모더니즘의 지식을 함축하고 그 의미를 거부하고 모호하게 만든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서구에서1960년대부터 처음 논의되기 시작하여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걸쳐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문학, 예술, 광고, 건축, 정치학 등에서 널리 논의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용어에서 접두어인 '포스트'는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이후'란 뜻과 '벗어남', '반'이란 뜻을 갖는다. 모더니즘 이후에 나타나는 현상을 말함과 동시에 비판과 단절을 의미한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논리적 연장이며 계승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적 반작용이며 단절이다.
모던이란 단어는 라틴어 'modo-바로 지금'에서 나왔다. 모던이란 서구의 현대를 주도해 온 사상적 흐름인 계몽주의적 전통, 또는 이성 중심주의적 태도를 가리킨다. 그리고 '포스트모던' 은 이러한 계몽주의적, 이성중심주의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를 가리키는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이성 자체에 도전한다는 점에서 이성을 비판해서 이성의 본래 모습을 되찾자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급진적인 반 이성주의이다.
서구에서 계몽주의는 인간 주체와 이성을 세계의 중심에 두고 이성에 의해 세계와 그 본질을 완전하게 인식할 수 있고 그러한 인식에 바탕을 두고 이성적인 사회를 건설하여 자연과 억압적 사회제도로부터 해방된 미래를 제시한다. 그런데 이런 믿음에 포스트모던 입장에 선 이들은 인간 주체 이성 역사의 진보 등이 모두 신화에 불과하며 실제로는 이성이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억압해 왔다고 주장한다.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포스트모던을 보는 몇 가지 입장을 살펴보면,
포스트모더니즘의 극단적 두 입장--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입장은 다소 극단적으로 긍정적인 견해와 부정적인 견해의 두 가지로 요약된다.
부정적 견해: 상품화와 저속한 대중문화로 특징지어지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문화적 논리, 또는 다국적 자본주의시대에 제국주의적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이 새로운 시장 개척을 위하여 만들어낸 지배 이데올로기의 한 형태로 파악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기껏해야 서구에서 직수입된 유행에 지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세계적이고 일반적인 문제에 관한 추상적 명제에 지나지 않으며, 세계도처에서 일어나는 일상적 갈등이나 부분적인 문제에 대하여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삶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특수하고 부분적인 문제를 교묘하게 호도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현재를 공고히 하여주는 역기능을 담당하다.
--문화적 현상을 사회 경제적 현상과 동일시하는 과오, 이해하기 어려운 외국이론에 대한 지적 콤플렉스--
긍정적 견해 : 이들의 관점에서 보면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동안 모더니즘이 높이 쌓아올린 성곽이나 미로에서 벗어나는 일종의 돌파구나 탈출구에 해당되는 셈이다. 특히 '국부성의 정치학'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이들 이론가들은 인종이나 성별 또는 종족적인 차별화를 극복할 수 있는 획기적인 전략으로 간주한다.
--추상적 이즘이나 주의의 힘을 너무 순진하게 신봉하는 과오를 범한다.--
현대의 서구 사상적 흐름에서는 이런 계몽주의를 옹호하는 입장과 그것을 비판적으로 지지하는 입장, 그것을 거부하는 입장이 나뉜다. 먼저 생시몽은 역사를 인간정신의 진보로 보는 관점을 따르는데 그는 이러한 진보가 산업 사회에서 실현된다고 보았고 여기에서 과학적 지식이 억압적 권력과 계급 적대를 소멸시키는 기초라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은 산업 사회와 후기 사업 사회 이론가들인 파슨즈, 아롱, 벨, 뚜렌느 등에게 이어진다.
맑스의 경우 서구 부르조아 사회가 그 자체로 이성적인 것이 아니고 계급지배의 한 형식이라고 보는 점에서는 앞의 입장과 구별되지만 이 사회를 변화시켜 그것에 숨겨져 있는 고유한 가능성을 발전시켜 이성적인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보는 점에서는 전자와 같은 기반을 공유한다.
그런데 니체의 경우는 다르다. 니체는 이성을 권력, 지배의 형식으로 본다. 그래서 그는 이성적 사회, 착취 없는 사화가 가능하지 않으며 그것은 바로 억압적 사회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런 하고는 프랑스의 후기구조주의자들-푸코, 데리다, 들뢰즈--에게 유사하게 재현된다.
그에 따르면 언어와 개념은 대사의 이미지를 그것과 아무 관계도 없는 인간의 낱말로 고정시키고 개념화 해서 그것이 마치 대상 자체인 것처럼 여기는 데 불과하다고 본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언어와 개념은 원래 다양하고 무한하게 운동하는 것을 고정시키고 단순화하고 불구로 만든다. 인간은 이러한 개념, 언어가 가리키는 것이 그것의 본질, 진리라고 오해하므로 항상 말과 개념에 의해 길을 잃고 헤맨다. 니체는 이러한 관점을 통해 진리라고 불리는 모든 것이 가상임을 지적하고 이것을 '권력을 향하는 의지'로 설명한다. 초월적이고 보편적 ,논리적 ,체계적 주장들은 자기의 권력의지를 자리로 포장한 것이다.
여기서 잠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관계를 잘 이해하기 위해 푸코의 에페스테메-주어진 어느 한시기에서 인식론적 형상과 과학, 그리고 형식화된 체계를 만들어 낸는 언술적 실천을 결합하는 여려 관계들의 총체적 집합-를 살펴보자
그는 두 번에 걸쳐 에피스테메의 급진적 단절이 있었다고 주장하는데 그가 구분한 에페스테메는 '전고전주의적', '고전주의적' '현대적' 에피스테메이다.
현대적 에피스테메는 가시적 표층 뒤에 숨어 있는 불 가시적인 심층구조를 탐색하려는데 그 특징이 있다 이러한 탐색에는 당연히 인간의 삶의 조건에 대한 관심이 수반되게 마련이다. 이 시대에 이르러 인류학이나 심리학 또는 사회학과 같은 행동과학이 그리고 언어학이나 생물학 또는 경제학과 같은 분야가 중요한 학문 영역으로 발전된 것은 이러한 까닭이다. 포스트모던 에피스테메에서는 무엇보다도 인간학의 탈신비화가 가장 중요한 범주로 작용한다. 인간학의 자기비판적 기능을 강조함으로써 종래의 지식과 학문에 도전하는 반과학적 입장을 천명하였다. 포스트모던에 이르러 중심적 학문 영역으로 대두한 정신분석학이나 문화인류학, 그리고 구조주의 언어학에서 잘 드러나듯이 푸코가 '타자'라고부르는 것이 이제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즉 그 동안 의식이 억압하여온 무의식과 잠재의식, 중심부 문화의 그늘에 가리운 채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하던 주변문화, 그리고 표층구조에 묻혀온 언어의 심층구조등이 새로운 가치와 중요성을 부여받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좁은 의미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20세기 후반의 문학과 예술에 나타난 새로운 사조나 경향을 기술하는 개념이며, 넓은 의미에서는 20세기 후반을 특징 짓는 일종의 시대정신이며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1.문학과 예술을 포함한 문화적 현상, 2.철학적 현상 3.신학적 현상 4.역사적 현상. 5.사회적 현상 6.경제적 현상 7. 정치적 현상, 8.자연과학적 현상 등에서 논의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문예적 개념으로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다름 아닌 건축에서였다.
'바우하우스 계획'이라는 극도로 기능주의적이고 경제성, 순수성을 특징으로 하는 인터내셔널 스타일의 모던 건축 양식에 대한 비판적 반작용으로 시작되었다.
문학의 경우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에 대한 일종의 비판적 반작용에서 시작되었다. 19세기중엽부터 서구 문학을 풍미한 리얼리즘에 대한 비판적 반작용으로 시작된 모더니즘은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그리고 리얼리즘 다음에 나타난 문학과 예술전통이나 사조 또는 이론이다. 모더니즘은 바로 그 이전에 서구를 풍미하던 리얼리즘에 대한 비판적 반작용이었다. 모더니즘은 바로 이러한 객관성과 정확성을 표방하는 리얼리즘에 대한 의식적 단절로 시작되었다. 무엇보다도 삶의 실재를 상대적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모더니즘은 예술가의 주관적 의식을 중시하고 더 나아가 예술의 자기목적성을 강조한다. 그런데 이러한 모더니즘은 제 2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이후, (1940년대 말)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었던 전통이나 인습에 대한 도전은 이제 오히려 그 자체로서 일종의 전통으로 굳어져버렸다. 바꾸어 말해 모더니즘은 '대항문화'의 위치에서 '전통문화'의 그것으로 자리바꿈 하였던 것이다. 주제적인 측면에서는 여전히 가부장제적인 권위에 의존하고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체제 유지적이며 순응적인 특성마저 보이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도전과 비판적 반작용에서 생겨난 산물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인 것이다. 문학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기본 입장을 거의 대부분 받아들여 그것을 더욱 극단적인 방법으로 발전시킨다. 모더니즘의 슬로건은 "모든 것을 새롭게 하라"이며 그것은 포스트모더니즘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또 다른 공통점은 불확정성이나 비결정성이다. 이러한 비결정성이나 불확정성에서 비롯되는 편린화나 파편화 현상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에 걸쳐 공통으로 나타나는 중요한 현상이다. 이밖에도 다분히 비정치적이고 비역사적인 특성을 지닌다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차별성
그러나 이러한 유사점이나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과는 변별적으로 엄격히 구분된다. 우선 텍스트의 독창성이나 창조성을 인정사지 않는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흔히 '상호 텍스트성'이라는 용어로 표현되는 이러한 현상은 다른 문학 텍스트들과 맺고 있는 상호관련성을 중시한다. 과거에 존재하여 있는 작품들을 다시 결합하고 배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작품은 이전에 이미 씌어진 다른 작품에서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모더니즘에서는 비판적이고 풍자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패러디가 주로 사용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파스티슈(혼성모방) 이 주로 사용된다.-
둘째 포스트모던 문학은 탈장르화나 장르 확산 현상의 특성을 지닌다. 창작과 비평, 허구와 사실, 문학과 역사 사이의 경계선이 이제 그 의미를 상실하였다. 이제 탈장르화는 문학을 넘어서서 학문과 학문사이에서도 마찬가지 어서 문학과 역사, 철학은 인문학이라는 이름 아래 통합된다.
셋째 포스트모던 문학은 자기 반영성을 강조한다. 작품이 창작되는 과정 그 자체를 작품의 중심적인 주제로 즐겨 삼는다.
넷째 포스트모던 문학은 대중문학에 남다른 관심을 보인다. 다분히 엘리트주의적이고 고답적인 입장을 견지하던 모더니즘은 대중문학에 대하여서는 이렇다 할 만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구조주의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포스트구조주의는 주로 철학 이론과 관련하여 사용하는 개념이다. 1960년대 말엽부터 대두되기 시작한 포스트구조주의가 가장 잘 대변한다. 해체주의를 포함한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중요한 면에서 큰 차이점을 보여주면서도 본질적인 면에서 몇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실제를 편린적이고 이질적이며 다원적인 것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따라서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무정형적인 특성을 지닌 실제를 파악하기란 거의불가능한 일이다. 그들은 본질뿐만 아니라 그것을 파악하는 주체에 대해서도 매우 회의적인 태도를 보인다. 또한 이제까지 철학자들이 어느 한 핵심적 이론에 기초하여 삶의 현상을 총체적으로 설명하려 했던 '거대 이론'으로 번역하는 '메타-내러티브'도 붕괴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역사학에서도 잘 드러난다. 20세기 중엽까지만 하더라도 객관주의 역사 이론이 역사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헤겔로부터 시작하여 레오폴트 랑케를 거쳐 최근 페르낭 브로델을 중심으로 하는 아날학파에 이르기 까지 전통적인 역사학에서는 총체성이 무엇보다도 중시하였다. 다시말해 역사 기술도 일종의 과학적 방법론에 따라 과학적 엄밀성과 객관성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객관주의적 역사 이론은 20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점차 도전을 받기 시작였다. 미국의 역사학자루이스 고르초크는 <역사의 이해>에서 "역사는 삼차원적이다. 즉 그것은 과학과 예술, 그리고 철학의 성격을 지닌다"고 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대두되기 이전에도 지암바티스타 비코에게서 역사 기술에 있어 언어가 차지하는 비중을 강조하고, 순환론적 시간관을 주장하는 점이 보였지만, 본격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이 대두하게 된 것은 20세기 후반의 일이다.
문학이 '허구의 역사화'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듯이 역사는 이제 '사실의 허구화'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흔히 '포스트모던' 역사학자 또는 '해체주의적' 역사가로 부르는 역사이론가 가운데에서도 미국의 역사이론가 도미니크 라카프라와 헤이든 회이트는 특히 주목할 만하다. 역사이론을 정립하는 데서 이 두 이론가들은 한결같이 프랑스에서 처음 시작한 해체주의에서 큰 영향을 받고 있다. 라카프라는 <역사와 비평>에서 역사는 문학과 마찬가지로 언어를 매체로 삼고 있으며 이렇게 언어를 매체로 삼고 있는 한 불가피하게 텍스트와 관련을 매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념과 관련하여 그는 "과거는 텍스트와 텍스트화된 잔존물, 곧 회고록, 보고서, 출판된 저서, 기록 보관소, 기념물 등의 형식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는 다른 저서에서도 역사는 텍스트 자체는 아니지만 텍스트적 형식을 통하지 않고서는 우리에게 전달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화이트 또한 전통적인 역사이론에 깊은 회의를 보인다. 특히 그는 자크 데리다와 그의 이론을 문학에 도입한 미국의 해체주의들과 마찬가지로 언어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인다. 19세기 유럽의 역사를 다루는 저서 <메타역사>에서 그는 한마디로 역사적 저술을 '서사적 잔문 언술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언어적 구성물'로 파악하나다. 그에 따르면 모든 역사는 "일정한 양의 자료, 이 자료를 설명하는 이론적 개념, 그리고 그 자료를 제시하는 서사적 구조"를 서로 결합하기 마련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 이 책의 '역사적 상상력'이라는 부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역사 기술을 문학이나 예술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간주한다.
더욱이 화이트헤드는 언어의 수사적 특성에 주목한다. 문학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말할 것도 없고 역사 기술에서 사용하는 언어조차 비유와 수사성에 오염되어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이렇게 언어가 수사성과 비유에 오염되어 있다고 한다면 객관적으로 역사를 기술한다는 것은 아예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과 다름없다. 그리하여 화이트는 해체주의적 역사방법론에 따라 마르크스와 지그문트 프로이드, 그리고 톰슨과 같은 서구의 대표적 사상가들의 저서들을 해체시키고 있다.
부록: 용어설명
포스트 모던 이론의 계보학
포스트모던 이론은 언어에 집착했던 금세기의 산물이다. 아주 중요한 20세기 사상가들인 버트란드 럿셀,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마틴 하이데거 등등은 분석의 초점을 마음 속의 사상에서 생각이 표현되는 언어로 이동시켰다.
철학자이건 논리학자이건, 언어학자이건 기호학자이건 간에 그들은 모두 한 가지 점에서 의견의 일치를 보이는 듯한 언어탐정들이다. "의미가 담긴 사고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헤 그들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언어의 구조입니다."라고 답변한다.
포스트모던 이론은 스위스의 언어학 교수인 페르디낭 드 소쉬르(1857-1913)에 의해 수립된 형식 언어학의 일파인 구조주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구조주의
소싀르 이전의 언어학은 어원적 의미를 발견해 내기 위해 언어의 역사적 기원을 추적하다가 수렁에 빠져 옴짝달싹 못하는 경향을 보였다. 소쉬르는 그 대신 언어의 의미를 한 체계의 기능으로 간주했다.그는 자문했다. 언어학의 일관성있는 대상을 혼란스러운 언어 용법으로부터 어떻게 분리할 수 있을까?
소쉬르의 견해에 의하면 언어적 의미를 전달하는 총체적인 세트는 (과거, 현재, 미래 모두에 동일하게)발음이 가능한 최소 단위인 음소로부터 효과적으로 생성된다.
음소(音素)란 대조되는 서로 다른 의미를 나타내는 음성 시스템에서의 최소 단위이다.
일례로 cat(고양이)라는 단어에는 /c/,/a/,/t/라는 3개의 음소가 있는데, 이 음소들은 mat, cat, cap등과 최소한의 차이를 보이며, 이러한 개개의 음소들은 문법적으로 또는 구문적으로 결합되어 의미를 생성하여 개개인의 생각을 표현하는 공통부호인 언어로 사용되어 확장된 대화 내지는 담론을 가능케 한다.
의미화는 기호를 만들기 위해 기표와 기의를 함께 묶는 과정이다. 기호는 기호화 체계를 벗어나면 의미가 없어지는 관계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항 모형(The Binary Model, ,이항 대립)
소쉬를는 포스트모던 이론에 결정적인 이항모형을 선사했다. 언어는 이항대립의 조작부호로 기능을 발휘하는 기호체계이다. 우리는 이미 하나의 이항대립을 보았다. (기의/기표) 또 다른 중요한 이항대립은 다음과 같이 작용하는 통합체/계열체이다.
통합적인 관계(인접 또는 걸합으로 불리운다) : 한 문장에서 언어적 요소간의 선형적인 관계
계열적인 관계(선택 또는 대치로 불리운다) : 한 문장의 요소와 구문적으로 바꿔넣을 수 있는 다른 요소간의 관계
언어의 비유법 : 은유와 환유
외면상 이와 같이 단순한 대치와 결합이라는 이항대조는 고도의 복잡성을 야기하고 언어의 상상적인 사용. 다시 말해서 의미심장한 허구의 가능성을 설명해 준다고 말할 수 있다.
실례 : 계열적 대치는 문자 그대로는 사실이 아닌 묘사인 은유(隱喩)("힘의 탑"."눈부신 실수")를 생성할 수 있는 유사성의 인식과 관련된다. 통합적 결합은 환유(換喩)(사물 자체 대신에 그 사물의 속성이나 부속물로 이름짓기 : 왕권을 뜻하는 "왕관",경마를 뜻하는 "잔디")나 대유(代喩)(부분으로 전체를 이름짓기:국토를 뜻하는 "들")를 생성할 수 있는 인접성의 인식과 관련된다.
기호학
소쉬르와 야콥슨의 이항질서는 텍스트 이외의 다른 "담론들"로 확장되어 응용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기호학(부호, 기호, 흔적 또는 장조를 뜻하는 그리스어 semeion에서 파생함)의 영역이다.
소쉬르는 구조언어학이 기호학의 일부였다고 제안함으로써 문화 자체를 기호체계로 분석하는 길을 열어놓았다. 여기서 기호학은 인간행동이 의미를 나타내고 따라서 기호가 되는 것을 가능케 하는 다양한 문화적 관습들의 체계들을 연구하는 기호의 일반과학이다. 언어의 자의적이고 관습적인 성질은 특히 분명하기 때문에 언어학은 기호학의 모형이다.
구조주의 인류학
클로드 레비-스트로스(1908년생)는 소쉬와 슬라브계 언어학자인 로만 야콥슨과 N.S트루베츠코이에 뒤이어 1950년대 후반에 문화의 기호학을 체계화한 구조주의 인류학을 발전시켰다.
언어는 사고를 허용하는 체계이다. 사고는 인간주체(문화 속에 위치함)와 사고의 대상인 환경(자연)간의 상호작용 속에서 발생하는 "체계의 생산"이다.
이항주의
자연 ◀ ▶ 문화
(비인간) (인간)
그러므로 언어는 우리로 하여금 (1)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고 (2)상징에 의해 재현된 우리의 환경을 범주화하는 것을 허용하기 때문에 사고가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토템들은 사고를 위한 상징들로 "저기밖에" 있는 것을 지정한는 (분리하는) 범주들, 즉 이분법적 분류들이다.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과 그 이유)
결혼할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과 그 이유)
사고는 이런 의미에서 문자그대로 사회를 (재)생산하고 있다.
이분법인 인간/비인간이 토템 신앙에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가?
포스트 구조주의
우리는 구조주의와 롤랑 바르트(1925-80)의 "포스트" 구조주의와 같은 기술적인 언어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미 1920년대에 메타 언어로서의 논리의 한계에 직면했다.
특권이 부여된 또는 "메타" 언어적인 입장은 언어 자체에 의해 창조된 신기루이다. 구조주의와 기호학 그리고 의미의 수수께끼로부터의 해방을 약속한 다른 형태의 메타 언어들은 다시 언어로 되돌아올 뿐이고, 출구가 없어서 그 결과 인간이성 자체에 대해 상대주의적이거나 심지어는 허무주의적인 관점이라는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포스트구조주의의 한 부파인 해체구성(Deconstruction)은 "모든 것을 상대화"한다는 비난을 종종 받았다. 해체주의란 무엇인가?
구조주의에 대한 간략한 비판 구조주의적 분석의 이점은 부정학 수 없다. 그러나 부정적인 단점들도 있다.
1. 탈물질화와 형식주의
소쉬르의 언어체계는 물적 근원들을 제거한다. 또한 그것은 생물학적인 단계에서조차 "무의식적인"동기를 가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탈-심리화한다.
소쉬르가 "심층구조"를 말하고 있지만, 이것들은 프로이드의 무의식과 전혀 관계가 없다. 구조주의적인 분석은 증후군-기원들, 원인들과 치유책들-의 견지에서 사고하는 마르크스나 프로이드의 "심층적"읽기에 대립되는 추상적인 "표면적"읽기이다. 구조주의는 그러한 "의학적인" 야망에 가치를 두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야콥슨은 실어증의 물적(신경학적)근원과 현실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그의 분석은 실어증을 탈물질화하고 형식화하는 경향이 있다.
구조주의는 추상적화라는 비차원적인 공간을 공식적인 탐구 영역으로 개척했으며 세계의 전반적인 생활을 설명하고자 추론 규칙에 존족으로 의지한다는 점에서 철학("사고에 대한 사고")과 닮았다.
구조주의는 초합리주의의 방향으로 한층 더 나아갔다. 구조주의는 "의미"가 이항대립에 기초한 안정되고 독립적인 체계를 구성하는 시간을 초월한 보편적인 구조들에 의해 유지되는 과정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체계의 요소들인 기표들은 상호 관계에서만 의미를 갖게 된다. 즉 개념사물 또는 행동에 관계없이, 기표와 기의의 관계는 자의적이고 순수하게 관습에만 토대를 둔다.
2. 인간적인 것을 형식화하기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 유명한 자기정체성에 대한 데카르트의 증거는 구조주의에서 어떻게 되는가?
서구적 논리와 철학의 초석인 단일한 인간주체인 나는 의미화하는 언어사용자로 용해된다. "나"는 의미가 아니라 사용에 의해 의미를 부여받고 은유나 환유와 똑같은 방식으로 생성된 언어적 허구이다.
구조주의는 언어사용의 주체인 개인이 어떻게 동기를 부여받는지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체계의 논리는 언어를 사용하는 주체의 이유들을 완전히 초월하고 회피한다. "그의 개인적인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라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어떻게 "개인적인 생각"이 체계화되었는가?
3. 비역사적
구조주의는 비역사적이고, 좀더 정확하게 말해서 무역사적이다. 그 분석은 역사적으로 무엇이 존재하건 (원칙상) 유효하다. 이 태도는 역사적 기원과 동기들을 포기하는 태도와 일맥 상통한다. 이러한 구조주의의 엄격한 추상적 지성의 특징들로 인해 구조주의는 전형적인 모더니즘으로 -또한 포스트모던으로의 순간적인 뒤집기로-규정된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모던은 불가피하게 포스트모던이 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1960년대의 구조주의의 전성기를 살펴보면서 이러한 해프닝을 목격할 수 있다.
해체구성
가장 영향력있는 포스트모더니스트이자 철학자인 지크 데리다(1930년생)는 합리적 사고는 서구전통 전체에 대항하여 홀로 "해체구성주의적"전쟁을 벌여왔다. 특히 데리다는 "현존의 형이상학"에 의해 지배된다고 간주한 서구철학의 중심가설인 이성을 주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서양철학자의 창시자인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헤겔로부터 비트겐슈타인과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철학 역사는 끊임없이 말씀 중심적인 추구였다. 말씀 중심주의(Logocentricism)란 그리스어 로고스(Logose)에서 왔고, 그 뜻은 "내면적 생각이 표현되는 말" 또는 "이성 자체"이다.
데리다는 의미의 확실성이라는 본질주의적인 개념에 대항하여 구조주의의 중심적인 통찰력-즉 의미는 기호 안에 내재하지도 않고 기호가 지시하는 것에도 없고 순전히 기호간의 관계로부터 생겨난다.-을 동원한다. 그는 여기에서 「의미의 구조들은 (이것 없이는 그 어느 것도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 관찰자를 포함하고 관련시킨다.」라는 급진적으로 "포스트 구조주의적"인 함축적 의이를 도출해낸다. 관찰하는 것은 상호작용하는 것이어서 구조주의자들이나 다른 합리주의자들의 "과학적인"초월적 입장이한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구조주의의 통찰력은 이 정도까지는 정확하였다. 그러나 이성화된 모든 것이 항상 보편적이고, 시간을 초월하고 안정성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았다. 모든 의미나 정체성(우리 자신의 것을 포함시켜)은 잠정적이고 상대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코 철저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이전의 상태로 항상 돌아갈 수 있고, "무의미한 상태"로 또 다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권력/지식의 구조
역사가 미셀 푸코(1926-84)는 권력과 정당화의 문제들에 아주 직접적으로 관심을 가진 포스트모던 이론가이다. 그는 통제에 앞장서는 , 다시 말해 사회적으로 정당화되고 제도화된 사고체계로서의 지식이라는 특이한 관점에서 권력을 다룬다. 푸코는 처음에는 지식에 대한 그의 논구를 인식소의 "고고학"이라고 불렀다. (인식소라는 말은 "이해하고, 확실하게 알고, 믿는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epistomai에서 왔으며, 진짜 지식과 가짜 지식을 구분하는 것과 관련된 지식의 입증이론이란 말을 낳았다)
푸코가 생각한 인식소는 "어쨌든" 각 역사적 시기를 지배하게 되는 가능한 담론체계이다 그는 인식소가 지식과 진리로 간주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규정하도록 하는 바로 그 "어쨌든"이라는 말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푸코는 역사를 선형적인 것, 즉 의미가 통하는 얘기를 하고 있는 필연적인 사실들의 연대기로 보고자 하는 우리의 관습적인 기대를 완전히 전복시키고 있다. 그 대신 그는 역사 안에서 그리고 역사를 통해서 억압되고 무의식적 상태로 놓여있는 기저들, 즉 질서의 부호들과 가설들, 사회가 정체성을 얻게 만드는 인식소를 정당화하는 배제구조들을 밝혀낸다.
자아의 허구성/사고 체계가 어떻게 형성되는가
프랑스 정신분석학자인 쟈크 라캉(1901-81)은 정통적인 국제 정신분석협회로부터 추방당한 후에 "프로이드로 돌아가기"운동을 선도했다. 라캉의 글은 애매모호하기로 악명이 높은데, 라캉은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인 스테판느 말라르메(1842-98)의 불가해한 문체를 모델로 삼고 있다. 그리고 그는 또한 고의적인 초현실주의적 도발에 다시 귀기울인다.(1930년대의 그의 초기 작품들이 초현실주의 잡지인 「미노토르」에 실렸다)
프로이트가 인간의 리비도에 관심을 가진 반면, 라캉은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구조화되고 사회질서에 삽입되는가를 설명하고자 소쉬르의 언어학을 차용한다.
라캉은 정신에 대한 프로이트의 고전적인 삼위일체인 이드, 자아와 초자아를 인간의 심리적 성숙단계를 나타내는 상상계, 상징계, 현실계의 구조로 대치한다.
상징적 질서
상징적 질서란 친족 관계, 의식, 성별, 역할 그리고 언어 자체와 같이 어린이가 태어나 들어가게 되는 기존의 사회구조체계를 가리킨다.
상상계에서 가정된 자기 정체성은 어머니-어린이의 "근친상간"괸계를 금지하는 아버지의 영역인 상징적 질서에 의해 궁극적으로 구성된다.
언어는 아버지, 다시 말해 남근의 가부장적 질서에 속한다. 남자 어린이는 자신을 남근적 권력과 동일시함으로써 아버지와의 오이디푸스적인 "살인적"갈등을 해결한다. 남자 어린이는 기의적 영역에서는 남근 또는 성적 권력을 대표하는 기표인 남근을 소유하기 때문에 갈등을 해결할 수 있다. 언어에서 권력의 위치는 상징적 질서를 부과하는 남근이다.
포스트 모던 페미니즘이란 무엇인가?
포스트모더니티에서의 페미니즘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사이에 인위적으로 구성된 논쟁을 강조한다. 이 논쟁은 자유주의 (모더니스트)페미니즘을 급진적(포스트모던)페미니즘으로부터 구분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모더니티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그것은 해방을 위한 합리주의적인 움직임으로, 본래 미국과 프랑스의 혁명적인 계몽주의 이상에서 고무되었고 1792년 메리 울스톤크래프트의 「여권옹호」에 의해 고전적으로 형성되었다.
호전적인 페미니즘은 울스톤크래프트 시대 이래로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딜레마를 인식하게 되었다.
하나는 : 인간평등주의로 가는 자유주의 노선에서 남성과 공존하기 또 하나는 : 급진적인 분리주의 노선에서 남성과 대립하기. 두 번째 노선은 여성들의 공동체주의, 급진적 레즈비언주의와 남성들이 모두 본질적으로 성폭행자라고 극단적으로 규정하는 안드레아 드워킨에 의해 정의되었다. 그러나 두 노선 모두 본래 모더니즘적이고 모던 대 포스트모던의 대립을 조심하지 않았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고정된 성별의 범주들을 넘어서 주체에 대한 해체구성적인 개념을 통해서만이 시작된다.
이야기의 종말
모든 종류의 해방주위자적인 정치활동은 한 세대의 역사적 업적이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는 일직선의 목적론적 시간 모델을 갖고 있다. 용의주도한 자기주장 행위들은 이상화된 목표의 실현을 향해 나아간다는 모더니즘의 역사 모델 또한 같은 맥락이다.
철학을 호전적인 정치로 전환하는 데 성공한 이래로 계몽주의는 인간 해방이라는 "거대 서사"내지는 메타 서사를 써서 자기 정당화의 신화를 유지 해왔다.
료따르는 포스트모던 상황을 "모든 메타 서사에 대한 의심"이라고 정의내렸다. 메타 서사들은 정치적이거나 과학적인 다양한 계획들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는 보편적, 절대적, 궁극적인 진리라고 추정된다 .그 예로 노동자의 해방을 통한 인간 해방(마르크스), 부의 창조(아담 스미스), 생물의 진화(다윈), 무의식적인 정신의 지배(프로이트)등이 있다.
료따르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10년 전인 1979년에 이러한 의심을 발표했고 그리고 거의 하룻밤 새에 사회주의라는 거대한 서사가 총체적으로 와해되는 것을 목격했다.
구조주의: 레비 스트로스, 바르트, 라캉 등 여러 프랑스의 학자들의 텍스트 분석 방법론들을 통틀어 일컫는 말. 이것은 대체로 텍스트의 독립성을 가정하고, 텍스트에 쓰인 언어가 배태하고 있는 의미 생성의 규칙 내지는 언어가 내포하는 관계들의 일반적 문법(이것은 언어학의 구문법과 다른 말이다.)을 밝히려는 시도였다. 소쉬르는 구조주위라는 말을 쓴 적이 없지만 구조주의자들은 소쉬르의 <기표/기의>, <랑그/파롤>, <공시 구조/통시구조>, <계열체/통합체> 같은 개념을 가지고 텍스트에 내재하는 관계들의 망을 분석 기술해 왔다.
기의: 기호의 두 요소(기표/기의) 중 하나를 가리키는 말로 소쉬르의 용어이다. 기의는 기호 속에 담겨 있는 추상적 개념을 가리킨다. 예를 들면 이 책의 제목 <기호의 우리, 우리의 기호>에 쓰인 <우리>라는 기호는 두가지 기의를 가지고 있다. 기의는 <의미>, <뜻>등으로 이해해도 된다. 또 기호는 기호의 추상적 내용에 해당된다.
기표: 기호의 두 요소(기표/기의)중 하나룰 가리키는 말이다. 소쉬르는 이것을 음성 이미지를 가리키는 말로 한정해서 사용했지만, 후에 맣은 기호학자들이 그 뜻을 넓혀 매우 광범위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이 말의 기본적인 뜻은 <의미있는 운반체>라는 것이다. 소쉬르에 의하면 기의와 기표눈 항상 기호 안에 함께 들어 있으며 결코 독립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개념적으로만 분리가 가능할 뿐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이런 불가분리성에 동의하지 않는 것 같다. 신 the God 은 기표를 가질 수 없고, 기의로만 존재한다고 바르트는 생각한다.
담론: 아주 간단히 말해서 담론은 어떤 의미나 관념을 언술로 바꾸는 행위를 말한다. 담론은 겹겹이 포개진 긴 문장들로 되어 있다. 그러나 실재로 담론은 매우 복잡한 개념이다. 담론이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을 가정하고 이루어진 기호학적 틀이자 메커니즘이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가정되었기 때문에 담론은 사회 기호학적이다. 담론은 구조적 측면과 과정적 측면이 있다. 구조적 측면은 말하는 사람의 담론이 이야기들, 신화들, 텍스트들을 자세히 설명하는 데서 나타난다. 푸코는 담론이 이야기체나 텍스트를 상세히 설명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힘의 행사를 은연중에 이데올로기적 과정이라고 본다.
랑그 : 언어의 형식적 체제를 가리킨다. 소쉬르의 용어로 <파롤 parole>과 대립되는 개념이다. 랑그와 파롤은 언어의 두가지 다른 면이다. 파롤은 언술처럼 랑그를 실생활에 이용하는 언어 행위이며 과정이다. 이에 비해 랑그는 파롤이 점차 규범화되어 이루어지는 언어의 추상적 체제이다. 따라서 랑그는 계열적이고 파롤은 통합적이다. <파롤>을 볼 것.
메타언어: <언어를 위한 언어>, 즉 언어를 의미있게 체계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필요한 언어를 메타언어라고 한다. 이것은 실제 담론에 사용된 언어보다 한 차원 높은 평면에 존재한다. 예를 들면, 교수가 강단에 서서 <내 말을 잘 들으십시오>라고 주위를 환기시키는 것은 메타언어의 차원에서 한 것이다. 교수의 실제 강의는 담론에 속한다. 메타언어가 제 구실을 못하면 강의를 제대로 진행할 수 없다. 또한 메타언어는 이론을 세우는 언어이고, 분석을 하는 언어이며, 비판을 위한 언어이다.
신화: 신화는 통상적으로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가리키는 말이나 또한 잘못된 관념이나 사상이 담긴 담론을 비꼬는 말로도 쓰인다. 그러나 기호학에서는 그와는 정반대의 뜻으로 신화라는 말을 사용한다. 많은 신화학자들은 사람들이 눈으로 직접 볼 수도 없고 말로 잘 표현할 수도 없는 어떤 불가해한 것이나 이러한 신화를 억지 설명이라고 이해하는 게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는 기본 틀로 이해한다. 바르트는 신화를 담론에 채용되는 <특수한 언술>이라고 정의한다. 신화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정의는 <기의들의 고리>이다. 이 정의에 근거해 볼 때 신화들은 우리 주변에서 무수히 만들어지고 있다.
신화소: 레비스트로스는 신화의 기본적인 최소 단위 문장들을 신화소라고 부른다.
이원항 또는 이항대립: 서로 상쇄될 수 없는 역관계(때로는 모순관계)에 있는 상호 배타적 개념들의 쌍. 예를 들면 <음/양>, <큼/작음>, <진실/허위>, <자유/억압>, <나감/돌아옴>등. 텍스트에서 이러한 이원항들을 찾아내는 수속을 <계열적 분석>이라고 한다.
텍스트: 이것은 문필적 텍스트에 국한된 개념이 아니고, 커뮤니케이션의 모든 산물(글로 씌어진 것,말로 된 것, 그림으로 그려진 것 등)을 통틀어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고, 이런 것들 하나 하나를 일컫는 일반적 용어이기도 하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텍스트로 본다. 예를 들어 TV프로그램, 영화, 시, 화장한 얼굴, 몸치장 등. 텍스트는 담론과 대비되는 개념으로도 이해된다. 텍스트는 기호들이 어떤 코드에 입각해서 통일성을 이룬 구체적인 기호학적 체계를 가리킨다. 텍스트가 구조적임에 비해 담론은 과장적이다. 담론은 텍스트를 배태한 채 수행되는 기호학적 과정이다.
텍스트상호성: 텍스트들이 인용, 모방, 언어 절도등에 의해 설 뒤섞이는 상태를 지칭하는 말, 펩시콜라의 상표로 쓰이고 있는 태극은 우리 나라 태극기의 노른자위를 표절한 것으로서 텍스트 상호성의 한 예이다. 텍스트상호성은 오늘날 지구 전역에 확산되고 있다.
파롤 : 개인들이 처한 상황에서 언어를 실생활에 사용하는 구체적 고정의 산물을 가리킨다. TV뉴스에서 들은 것이나 본 것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말로 설명하는 것이나 손짓 발짓으로 VYGUS하는 것은 파롤이다. 파롤은 이처럼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에 쓰이기 때문에 사회적이다. 이에 비해 랑그는 순전히 추상적 체계이다.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랑그가 아닌 파롤을 배운다.
참고문헌
서양의 지적운동 1, 2
반철학으로서의 철학 임규정 외 1994 지성의 샘
포스트모더니즘과 철학 김혜숙 1995 이화여자대학출판부
포스트모더니즘 리차드아피냐네시 이소영 역 1996 아이콘총서
문화연구와 문화이론 존 스토리 박모 역 1994 현실문화연구
103인의 현대사상가 김우창 외 1996 민음사
포스트 모더니즘 ( Post Modernism )
포스트 모더니즘 ( Post Modernism )
포스트 모더니즘은 지난 20세기에 걸쳐 서구의 문화와 예술, 삶과 사고를 지배해온 모더니즘에 대한 반동으로서 60년대 중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후기 모더니즘은 하나의 통일된 사조나 운동은 아니지만, 그 중심적 동기는 모더니즘을 통해 수립된 고급 문화와 저급 문화의 엄격한 구분, 예술의 각 장르간의 폐쇄성에 대한 반발이다.
포스트 모던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쓴 것은 건축 비평가들이었는데 이는 1960년대까지 유행하던 엄격한 사각형 형태의 양식에 대한 반발로 나온 건축물에 대해 쓴 말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포스트 모던'적 경향이 분화되지 않은 과거의 예술을 소생시키려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다른 시대, 다른 문화로부터 양식과 이미지를 차용하는 예술은 모두 '포스트 모던'의 자격을 얻는다.
포스트 모더니즘 작가들은 작품의 유기적 통일성을 부정한다. 그들은 통일성이나 일관성보다는 오히려 편리성이나 임의성 또는 유희성을 더욱 설득력 있는 예술적 원리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니까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작품은 '잘 빚어진 항아리'가 아니라 오히려 '산산조각으로 깨어진 항아리'에 해당되는 셈이다. 그런가 하면 프로이트가 말하는 '억압된 거들의 복귀 현상'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포스트 모더니즘은 모더니즘과 매우 적대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동안 가부장적인 모더니즘의 권위 아래에서 주변적인 위치밖에는 차지하지 못하면서 억압되었거나 무시되어 온 것들이 포스트 모더니즘에 이르러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인정 받으면서 부상되기 시작하였다. 다시 말해서 포스트 모더니즘은 무엇보다도 주변적인 것들의 부상이라는 점으로 특징 지을 수 있다.
기성 문화에 반기를 드는 청년 문화를 비롯한 반 문화, 고답적이고 엘리트적인 고급 문화에 대항하는 대중문화, 제1 세계나 제2 세계의 문학에 도전하는 제3 세계의 문학, 가부장적 남성중심주의에 항거하는 페미니즘 문학 등이 바로 그것이다. 궁극적으로는 모두 탈중심화 脫中心化 나 탈정전화脫正典化 현상에서 비롯되는 이러한 현상은 포스트 모더니즘에 이르러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한마디로 말해서 포스트 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논리적인 연장이며 계승인 동시에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적 반작용이며 단절이다.
한편으로 포스트 모더니즘은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을 포함한 모더니즘의 기본 원리를 논리적으로 계승하여 극단적으로 발전 시킨다. 비록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모더니즘에서 발견되거나, 또는 그동안 모더니즘에서 거의 무시되거나 소홀히 간주되어 오다시피 한 것들이 포스트 모더니즘에 이르러서는 핵심적인 지배소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와는 정반대로 모더니즘에서는 핵심적인 지배소로서 기능을 담당해 온 것들이 포스트 모더니즘에 이르러서는 주변적인 위치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그 핵심적인 지배소로서는 네 가지가 있는데, *상호 텍스트성 *탈 장르화 혹은 장르 확산 *자기 반영성 *대중 문화에 대한 관심등이 있다.
포스트 모더니즘이 그동안 장르와 장르 사이의 '경계선을 넘는' 작업에 큰 관심을 보여 왔다고 한다면, 그것은 또한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사이의 '간격을 좁히는' 작업에도 적지않은 관심을 보여 왔다. 사실상 포스트 모더니즘이 처음으로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은 다름아닌 대중 문화와의 관련성에서 였으며, 지금까지도 그것은 여전히 대중 문화와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포스트 모더니즘이 모더니즘과 구별되는 중요한 차이점 중의 하나는 고급 문화와 대중문화 사이에 놓여 있던 커다란 장벽을 허물어 버렸다는 데에 있다. 힐튼 크레머가 말하는 이른바 '속물들의 복수' 현상이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 하였다. 이러한 '억압된 것의 복귀' 현상은 문화 영역의 경우 그 동안 무시되어 왔거나 소홀히 취급받아 온 장르들이 새롭게 가치를 인정받는 데서 가장 잘 나타난다. 예를 들어 일부 특권층만을 위한 난해한 엘리트 예술보다는 더욱 대중적인 팝 아트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경우이고 문학에서도 마찬가지 경우이다. 한마디로 점잖은 전통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며, 가식적이지 않은 인간성에의 희구이며, 자연인 인간의 모습을 찾고자 하는 몸부림의 운동이다.
포스트 모더니즘 미술가들의 또 다른 주된 특징은 모더니즘적 문화와 사고 방식이 세워놓은 엄격한 지배의 틀을 거부하는데 있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소통이 불가능한 정치, 문화, 전문화의 영역을 깨뜨리고, 삶과 문화의 경계를 무너뜨리기 위해 예술에 정치와 이데올로기를 끌여 들여 비판적으로 다룬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알기 위해서는 모더니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서구에서 근대 혹은 모던(modern) 시대라고 하면 18세기 계몽주의로부터 시작된 이성중심주의 시대를 일컫는다. 종교나 외적인 힘보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믿음을 강조했던 계몽사상은 합리적 사고를 중시했으나 지나친 객관성의 주장으로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도전 받기 시작하였다. 니체, 하이데거의 실존주의를 거친 후 포스트모던 시대는 J.데리다, M.푸고, J.라컨, J.리오타르에 이르러 시작된다. 니체와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은 이들은 계몽주의 이후 서구의 합리주의를 되돌아보며 하나의 논리가 서기 위해 어떻게 반대논리를 억압해왔는지 드러낸다.
'데리다' 는 어떻게 말하기가 글쓰기를 억압했고, 이성이 감성을, 백인이 흑인을, 남성이 여성을 억압했는지 이분법을 해체시켜 보여주었다. 푸고는 지식이 권력에 저항해왔다는 계몽주의 이후 발전논리의 허상을 보여주고 지식과 권력은 적이 아니라 동반자라고 말하였다. 둘 다 인간에 내재된 본능으로 권력은 위에서의 억압이 아니라 밑으로부터 생겨나는 생산이어서 이성으로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라간은 데카르트의 합리적 절대자아에 반기를 들고 프로이트를 귀환시켜 주체를 해체한다. 주체는 상상계와 상징계로 되어 있고 그 차이 때문에 이성에는 환상이 개입된다는 것이다. 리오타르 역시 숭엄(the Sublime)이라는 설명할 수 없는 힘으로 합리주의의 도그마를 해체한다. 따라서 철학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대의 도그마에 대한 반기였다.
문화예술의 경우는 시기구분이 좀더 세분화된다. 19세기 사실주의(Realism)에 대한 반발이 20세기 전반 모더니즘(Modernism)이었고 다시 이에 대한 반발이 포스트모더니즘이다. 사실주의는 대상을 그대로 옮길 수 있다는 재현(representation)에 대한 믿음으로 미술에서는 원근법을 중시하고 어떻게 하면 실물처럼 그릴까 고심했다. 문학에서는 저자가 객관적인 실재를 그릴 수 있다는 믿음으로 스토리가 인물을 조정하여 원근법과 같은 효과를 나타내었다. 이런 사실주의는 20세기에 들어서 베르그송의 시간의 철학·실존주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등 객관진리, 단 하나의 재현에 대한 회의가 일어나면서 도전 받는다. 대상은 보는 자의 주관에 따라 다르다는 전제도 미술에서는 인상주의로부터 시작되어 입체파 등 구상보다 추상으로 옮아가고 문학에서는 저자의 서술 대신 인물의 서술인 독백(‘의식의 흐름’이라고도 함)형식이 나온다.
모더니즘은 혁신이었으나 역설적으로 보수성을 지니고 있었다. 재현에 대한 회의로 개성 대신에 신화와 전통 등 보편성을 중시했고 피카소, 프루스트, 포크나, 조이스 등 거장을 낳았으나 난해하고 추상적인 기법으로 대중과 유리되었다. 개인의 음성을 되찾고 대중과 친근하면서 모더니즘의 거장을 거부하는 다양성의 실험이 포스트모더니즘이었다. 따라서 철학에서는 모던과 포스트모던 상황이 반발의 측면이 강하지만 예술에서는 연속의 측면도 함께 지닌다. 비록 이성과 보편성에 의지했지만 이미 재현에 대한 회의가 모더니즘(현대성)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미술에서는 추상 대신에 대중성을 띄고 다시 구상이 등장하였다. 그런데 팝아트처럼 같은 대상을 여러 번 찍어 ‘다르게 반복하기’를 선보이는 경우, 모나리자 등 친숙하고 고유한 원본을 패러디 하여 ‘다양한 재현들’을 선보이는 경우, 예술가의 권한을 축소한 미니 멀 아트 등, 단 하나의 절대재현을 거부한다. 문학에서는 인물의 독백이 사라지고 다시 저자가 등장하는데 더이상 19세기 사실주의와 같은 절대재현을 못 한다. 작가가 자신의 서술을 되돌아보고 의심하는 자의식적 서술(메타 픽션), 현실과 허구의 경계 와해, 인물과 독자에게 선택권을 주는 열린 소설, 보도가 그대로 허구가 되는 뉴저널리즘, 작가의 권한을 최소화한 미니멀리즘 기법 등이 쓰인다. 영화와 연극 역시 사실주의의 패러디로서 환상적 기법, 자의식적 기법을 사용한다. 무용에서는 토슈즈를 신었던 19세기 발레에서 맨발의 자유로움과 기법을 중시한 모더니즘, 그리고 다시 운동화를 신는 포스트모던 댄스로 대중성과 개성이 중시된다. 서사(narrative), 기호학 등 비평이론의 경계와해는 공연예술에서 탈 장르로 나타난다. 포스트모던 건축은 기능주의 적이고 중앙집권적인 밋밋한 건축에서 장식과 열린 공간을 중시하고 분산적이며 옛것에 현대를 접합시킨 패러디가 유행한다.
개성·자율성·다양성·대중성을 중시한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이념을 거부했기에 탈 이념이라는 이 시대 정치이론을 낳는다. 또한 후기산업사회 문화논리로 비판받기도 한다. 산업사회는 분업과 대량생산으로 수요에 의해 공급이 이루어지던 시대이다. 이제 컴퓨터·서비스산업 등 정보화시대에 이르면 공급이 넘치고 수요는 광고와 패션에 의해 인위적으로 부추겨진다. 빗나간 소비사회는 때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실험적이고 긍정적인 측면을 무력하게 만들기도 한다. 탈 이념, 광고와 패션에 의한 소비문화, 여성운동, 제3세계운동 등 포스트모던시대의 사회정치현상은 한국사회와도 무관하지 않다. 미술·건축·무용·연극에서는 실험과 저항이 맞물려왔고 80년대 말 동구권의 사회주의 몰락과 문민정부의 출현은 한국 문학과 예술에도 포스트모던 바람을 일게 하였다. 근대나 현대는 서유럽에 비하여 짧고 급속히 이루어졌기에 시민의식과 기술산업사회가 균형을 이룰 수 없었다. 서유럽과 한국사회를 똑같이 볼 수 없는 여러 상황에 의해 한국사회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영역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인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서구에 존재하는 하나의 시대정신(Zeitgeist), 인식소(Episteme), 또는 패러다임(Paradime)의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이론적 지주로 알려지고 있는 이합 핫산(Ihab Hassan)은 1987년에 발행한 '포스트 모던한 전망 속의 다원주의'라는 저서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여덟 가지로 정리한다.
① 불확실성(Indeterminacy)
경제학자 갈브레드가 2차 대전 이후의 서구세계를 '불확실성의 시대'로 규정지은 것처럼 과학분야에서도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Karl Heisenberg)의 「불확실성의 원리」, 토마스 쿤(Thomas S. Khun)의 「패러다임」, 폴회이에르 벤드의 「과학의 다다이즘」등이 대두되면서 사회 각분야에서 상대주의적이고 불확정적인 세계관이 주류를 이루었다.
"과학은 근본적으로 무정부주의적 사업이자 무정부주의는 법과 질서의 대안보다 훨씬 인도적이며 발전을 고무시켜 준다."고 주장하고 자신을 "변화와 실험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영역에서조차도 즐거운 실험을 착수할 준비가 되어 있는 신 다다이스트"라고 주장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특정한 유파가 아니라 사회의 주류를 이루는 사조의 견해, 그리고 문학과 미술 등 예술 전반에 걸쳐 개방성, 해체, 반항, 변용, 다원성, 이단의 정신 등의 불확정적인 이론들을 전부 포괄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② 단편화(Fragmentation)
포스트모더니즘은 사회적, 인식론적 종합을 거부하고 총체성을 오명으로 여긴다. 리오타르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논하는 유명한 글의 결론 부분에서 "총체성에 선전 포고를 하자. 제시할 수 없는 것에 증인이 되자, 차이를 활성화하여 차이의 명예를 구해내자"고 주장한다.
확신, 차이, 변증의 시대가 되며 몽따지 수법, 꼴라쥬 등의 기법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은유와 환유가 중요시되고 역설, 배리, 병렬결합이 자주 등장하는 정신분석적 시대가 도래한다.
③ 탈 경전화(Decanonization)
리오타르는 현대사회를 지배담론(Masternarrative)의 탈 권위와 붕괴의 시대라고 지적하며 그 대신 소수의 담화이며 언어게임의 이질성을 보존하는 소설화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서구의 전통적인 형이상학 체계인 진리, 주체, 초월적 이성 등을 거부하고 규범과 경전에 대한 도전은 엘리트주의, 남성우선주의를 부인할 뿐 아니라 대중의 참여와 비평을 유도하며, 대중문화, 여성문화, 민중미술, 제3세계의 예술, 소수민족 예술, 노동자 예술, 이방인의 문화에 대한 관심 등의 대중 예술이 주류를 이루게 한다.
④ 재현 불가능성(Unrepresentability)
장르가 붕괴되고 혼합되는 양상을 보일 뿐만 아니라 많은 작가들이 모방을 거부하고 예술의 한계를 추구하며 소모를 즐기고 침묵 속에 존재하면서 예술고유의 재현(Representation)양식을 문제시하여 반리얼리즘의 성격을 가른다. 리오타르는 동시의 상황은 재현이 불가능하다고 보고 거기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헤겔의 변증법적인 종합적 분석대신 구대 불가사이를 인정한 칸트의 '숭고미(Sublime)'의 개념을 증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현대 기술 문화의 무형태성, 공해, 절대 등의 본질은 본질적으로 재현할 수 없는 것으로 향해 가는 것이며 좋은 형식들이 주는 위안을 거부하고 새로운 재현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⑤ 혼성모방(Hybridization)
풍자적, 조롱적 모방, 우스운 모방을 포함하는 것으로 장르의식의 붕괴와 혼합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이것은 다원적이고 확산적이며 논리를 무시하는 유동적인 현상황에 맞추기 위한 전략으로 문학에서는 '뉴 리얼리즘', '논픽션 소설'등으로 나타나서 허구와 사실이 두드러지게 배합됨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특성은 전통에 대한 다른 개념을 보완하다. 지속과 단절, 고급 문화와 저급문화가 혼합되고 현재 속에서 과거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확장시키게 된다. 다원적인 현재 속에서 모든 형식들은 현재와 현재가 아닌 것, 같은 것과 다른 것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 변증법적으로 작용하여 현재와 과거의 동시성을 획득할 뿐만 아니라 공간 상호성 즉 병렬적, 수평적, 평등적 공간의 확산을 통한 공동체 의식도 얻게 된다.
⑥ 대중주의(Populism)
고급문화와 본격 모더니즘에 대한 적대감이 역력히 드러나며 대중문화에 대해 관심을 보인다. 마르쉘 뒤상의 기성풍 이론은 예술의 기존 관념을 깬 것으로 '이미 만들어진' 즉 주변의 흔한 대상물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창조하였고 앤디워홀은 스프깡통, 브릴로 상자, 슈퍼맨 만화 등 대중적인 사물을 이용하여 혼합 모방기법을 연출하였다. 또한 화가인 라우센버그에게서 재미있는 것은 도시의 상업적인 추함에 영원성과 자연의 불변성을 부여한다는 점이다. 그는 도시 일상의 재료들을 즐겁게, 그리고 전적으로 수용한다. 그에게는 도시의 추한 면은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새로운 방식으로 이 세상을 볼 수 있도록 우리의 의식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다.
⑦ 행위(Performance)와 참여(Participation)
포스트모더니즘은 직접 행위와 대중의 참여를 유도하며 행위로 연출되기를 기대한다. 예술은 행위를 통하여 시간, 공간, 또는 사람들에 의해 변화되고 완성된다.
요즈음은 예술의 여러 가지 경향을 관통하는 인식들은 '놀이'라는 개념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많은 예술가들이 엄격한 통제와 인간관계의 틀을 버리고 우연의 작용을 신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예술에서도 구도보다는 과정이 더 중요한 것이 되었고 존재하고 의미하기보다는 작용하게 된다고 볼 수 있다.
⑧ 보편내재성(Immensity)
앞서 지적한 불확실성의 분산은 거대한 확산을 이룬다. 보편 재재성의 경향은 율동, 상호작용, 의사소통, 상호의존, 상호침투 등의 잡다한 개념들에 의해 드러나는데 이러한 개념들 속에서 가치관의 세계화, 보편화 경향을 찾아낼 수 있다. 이러한 개념은 이미 아놀드 토인비의 영혼화, 어비 다드로즈의 개념화, 빅 인스트홀러의 무상화, 칼 마르크스의 역사화 한 자연 등의 개념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와 같이 상징을 통해 인간의 정신자체를 일반화하려는 정신적인 능력이 점점 커지고 있고 인간은 새로운 통신수단과 전자매체들 그리고 새로운 기술을 통해 의식과 정신의 끊임없는 확장을 경험한다.
최초에 발행된 <포스트모더니즘 Postmodernism>에서 마이클 뉴만(Michael∼Newman)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요 창조방법을 다음과 같은 여덟 가지로 분류한다.
트랜스아방가르드, 저자의 죽음, 알레고리, 도취와 불가사의, 모조, 패러디, 브리콜라주(Bricolage)등 또한 어떤 학자들은 패러디(린다 허치언), 모조 (보드리야르), 차용 (레오 스타인보그), 그리고 혼성모방 (프레드릭 제임슨)등을 주요 창조방법이나 특성으로 내세우기도 한다 이 점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보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창조전략을 정리하면 재현, 패러디, 이중 코드, 전도된 아방가르드 등으로 구분된다고 볼 수 있다.
① 재현(representation)
포스트 모던 세계에서는 삶이 재현에 의해 완전히 매개되어 있다. 근.현대를 지나면서 세계는 인공위성, 컴퓨터 출현으로 벤야민이 말한 '기계적 복제의 시대' 를 훨씬 앞지를 만큼 고도로 발전되어 왔다. 이에 대해 현대문화가 내재적으로 재현과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정도로 재현의 위기상태에 놓여 있다는 논의가 있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데리다의 재현으로부터의 '도피 불가능성'과 푸코의 인식론 속에 밀착되어 있는 전통적 재현에 관한 비판을 통해 알 수 있듯이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재현은 불가피하다고 보여진다.
포스트모던의 재현은 리얼리즘처럼 소박하고 낙관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리얼리티는 어떻게 의미될 수 있으며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는지를 문제시한다. 즉 그것은 리얼리즘을 말소시키거나 지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의식적으로 재현의 존재의미를 일깨우는 것, 다시 말해 리얼리즘을 분해하여 재창조하는 것이지 리얼리즘에 직접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포스트모더니즘 전략들은 매체를 투명명료성과 언어와 세계간의 혹은 기호와 관련 물과의 자연적이고 직접적 결합을 추구하는 리얼리즘적 재현을 비판하는 것을 전제조건으로 삼는다. 물론 이 같은 전략은 모더니즘에서도 발견된다. 하지만 모더니즘의 경우, 매체의 능력과 의미체계의 자기충족성을 더욱 강조함으로써 의도적으로 지시대상에 치명을 가하기 위한 것이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목적하는 바는 역사적으로 입증된 양자의 힘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리얼리즘의 투명성과 모더니즘의 반성적 반응을 비본성화시키는 일이다. 그리고 이것이 포스트모더니즘 재현의 불협화음적 책략이 된다.
이처럼 리얼리즘의 현실반영, 모더니즘의 자율성을 문제시하고 '비교조화(dedoxifing)'하면서 포스트모더니즘 재현은 예술과 세계의 새로운 가능성에 주목한다. 터부시 되어오던 전략들을 소환하면서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재현의 패러디와 재차용(reaappropriation)을 받아들인다. 다시 말해 재현의 역사 자체를 예술의 담론과 세계의 담론 사이에 놓인 경계선이 포스트모던 이론과 실천 속에서는 상호 침범되는 현상을 볼 수 있다.
② 패더디(parody)
패러디(때로는 아이러닉한 인용, 혼성, 모방, 차용 또는 상호 텍스트성)는 포스트모던의 지지자나 반대자를 가릴 것 없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요체로 간주되어 왔다. 실제로 많은 예술가들은 패러디에 관심을 기울여 재현의 역사를 보여주기 위한 방식으로 과거의 이미지들을 발굴해 내는 행위에 주력해왔다. 솔로몬 거더우(Solomon Godeau)의 표현처럼, 뒤샹의 모더니즘적 'ready-made' 는 이제 포스트모던의 'already-made'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 예술을 패러디화하는 것은 '향수' 때문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 현재의 표상들이 과거로부터 유래되었으며, 지속성과 차이를 함께 지닌 이념적인 결과로서 유래되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패러디는 또한 예술적 독창성과 유일무이성 그리고 자본주의의 소유권, 재산권에 관한 개념들 같은 인본주의적 관점을 검증한다. 패러디(어떤 복제의 형식과 더불어)에 의해 희소성이 있고 유일하며, (상업적으로)가치 있는 진품성은 여지없이 의문시된다. 이것은 예술이 이제 그 자체의 의미나 가치를 잃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패러디 작품은 '재현의 정치학' 을 전제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주장이 포스트모던 패러디에서 공인된 관점은 아니다. 지배적인 해석은 포스트모더니즘이 과거 형식들을 자유롭고, 장식적이며, 반역사적인 방식으로 인용할 수 있게 만들뿐만 아니라 이것이야말로 각종 이미지들이 범람하는 현사회의 가장 적절한 문화적 모델이 될 수 있다는 입장이다.
패러디를 '재현의 정치학'이라고 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핼 포스터(Hal Foster)에 따르면, 혼성모방 (pastiche) 은 신보수주의적 포스트모던의 '전형적 기호'가 되어왔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과거의 맥락과 연속성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상호 모순적인 '예술작품과 생산양식'을 허황되게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린다허치언은 포스트모던 패러디는 그것이 인용하는 과거 재현물의 맥락을 부정하지 않으며, 우리가 오늘날 불가피하게 과거와 유리되어 있음을 환기시키기 위해 아이러니를 사용할 뿐이라고 반박한다. 현재는 과거의 지속이며 다만 거기에는 역사가 빚어낸 아이러닉한 차이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포스트모던 패러디에는 모순적 형식들을 일거에 해결하지 못하지만, 그러한 모순을 밝히는 힘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한 모순은 재현의 힘과 한계를 동시에 일깨워주는 작품 속에서 발견된다. 다시 말해 허치언은 역설적으로 자신이 반대하는 리얼리즘 관습에 의존하여 재현의 복합성과 그 밑에 깔린 정치성을 나타내는 것을 포스트모던 패러디라 말하면서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재현의 정치학'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③ 이중 코드(plural coding)
이중 코드는 주로 건축분야에서 사용되는 전략적 특성이긴 하지만 그 일반적인 원리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보다 구체적으로 부각시키므로 그것이 어떠한 전략인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포스트모던 건축에서는 다원적인 상징적 차원들을 재 도입하고 부호체계를 혼합시키며, 지방 특유의 언어들과 지역 전통을 도용하는 행위들을 선호하게 되었다.
젠크스(Charles Jencks)는 건축가들에게 두 방향, 즉 '서서히 변화하는 전통적인 부호체계와 한 이웃이 갖고 있는 특수한 민족적 의미라는 방향 하나와 빠르게 변화하는 건축상의 유행과 전문주의의 부호체계라는 또 다른 방향을 향하여' 동시에 바라볼 것을 제시한다. 즉 젠크스는 민족적인 것과 국제적인 것, 의미와 유행, 전통적인 것과 새로운 것의 괴리를 좁힐 수 있는 예술의 방식을 모색했던 것이다.
포스트모던 건축에서 가장 뚜렷하고 빈번하게 나타나는 이러한 다원주의 형식은 과거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인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모더니즘 예술이 고전적인 것을 추방하면서 과거와의 단절을 꾀하는 데 고무되었다면,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은 역사적 스타일과 기법을 복원하고 재창조하는 새로운 의지를 보여준다. 젠크스의 말을 빌리면, 이것은 건축언어의 상대성에서 진일보한 결과라고 한다. 즉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에서 주목을 끌어왔던 다양한 형식의 부활주의 속에서, 우리는 건축의 동시적 맥락뿐만 아니라 일시적이며 동시적 맥락을 충족시키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젠크스는 현대적인 것과 고전적인 것, 기능적인 것과 장식적인 것, 가시적인 것과 대중적인 것의 조화를 기대하면서 그가 말한 '진보적 절충주의'의 시대를 보다 낙관적으로 전망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진보적 절충주의'속에는 "다른 종류의 의미들이 정신과 육체 같은 상반된 기능을 추구하면서 상호 관계하고 상호 교호할 수 있도록"하는 다가치성이 내포된다고 설명하였다.
이중코드는 맥락에의 관심과 역사에의 관심을 의미심장하게 엇물리게 한다. 젠크스의 이중코드가 역사적 이원성을 일원화시킨다면, 케네스 프램턴 (Kenneth Frampton)은 맥락의 이원성을 극복하는 방안을 제시한다.
케내스 프램턴은 '비판적 지역주의(critical regionalism)'라는 글 속에서 문화적 차이가 국제적인 건축문법의 획일성으로 사라지는 경향을 저지하는 건축을 구상한다. 프램턴에 따르면 '비판적 지역주의'란 모던 건축 빌딩 형식에 반대하거나 그 속에서 지역적 특수성을 발전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하여 프램턴은 이런 지역주의 형식을 산업 사회 이전의 모델이나 빌딩 설계 방법으로 회귀시키는 단순한 과거에의 동경 행위와 조심스럽게 구별짓는다. 그에 따르면 이 지역주의는 '비판적'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새로운 것과 전통적인 것을 새롭게 결합시키는데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특수한 지역성의 언어는 모더니즘 속에서 일찌기 발견된 것이라 할지라도 지역 전통은 물론이고 지역의 풍토나 지질에 관한 문제를 감안한 새로운 것과 전통적인 것의 이중 코드를 나타냄으로써 생산될 수 있다고 말한다.
젠크스와 마찬가지로 프램턴은 현대예술의 추상을 전통적으로 서구 합리성 인식론적 규율과 결합되었던 시각의미의 야만적 지배를 가져다준 결과로 파악한다. 그리하여 그는 '읽히는' 빌딩을 확산시키고, 빛과 어둠, 뜨거움과 차가움의 세기를 조절하는 등 의미의 범위를 넓히는 '저항의 건축'을 강조했던 것이다.
④ 전도된 아방가르드
모더니즘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이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처럼 아방가르드에 대한 포스트 모던적 태도는 상반되게 나타난다. 하나는 철저하게 아방가르드를 거부하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아방가르드의 전략과 이상을 실질적으로 재포착하고 고도화시키려는 입장이다.
본래 아방가르드의 개념은 모더니즘의 핵심이다. 그러나 모더니즘에 관한 많은 설명들은 아방가르드의 초점의 범위를 미리 앞질러 가버렸다. 러시아 구성주의자들은 미적 형식에서 이념적 물질적 계기를 발전시켰고 미술에 있어 창조를 "제조"로 작가를 "생산자"로 대체하는 개념과 기능의 적극적인 변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아방가르는 점차로 미학과 정치적 영역의 분리, 즉 초기의 아방가르드의 정치적인 도전들이 예술가 개인의 형식적 실험의 제한된 탐구로 떨어져 분리의 입장으로 후퇴했다. 이 같은 정치적 영역과 문화적 영역의 의도된 분리의 정당화는 키치, 대중문화를 철저하게 거부하는 양식으로 전개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러한 양상을 비판하며 아방가르드가 경멸해온 대중문화에 대해 귀족적으로 거리를 유지해온 태도를 가차없이 버린다. 이것은 귀치와 대중문화의 수용을 의미한다.
앤디워홀과 로이 리히텐스타인 같은 팝작품이 그 예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아방가르드는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전략적으로 수용된다. 19세기 후반구의 예술적, 사회적 편견에 대해 구체적 방식으로 대응하려는 태도가 문화적으로 점차 보편화되면서 아방가르드의 의미는 혁신적 의도를 지닌 예술 조류를 지칭하는 의미가 점차 뚜렷해지기 시작한다. 레나토 포지올리(Renato Poggiloi)는「아방가르드의 이론」이란 저서에서 아방가르드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첫째, 적극적 행동주의(Activism) - 행동, 다이너미즘, 전진, 탐험정신
둘째, 대립의식(Antagonism) - 역사적 사회적 기본질서에 대한 대립의식, 반전통주의
셋째, 허무주의(Nihilism) - 파괴성, 유치함, 극단적 행동
넷째, 불안(Agonism) - 낭만적 불안, 긴장, 희생, 정신적 패배주의
다섯째, 미래주의(Futurism) - 미래의 예술에 대한 예견이나 예고
위의 특성들 중에서도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보여지는 몇 가지의 특성들과 공통적으로 보인다. 특히 대립의식은 모더니즘에 저항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상당부분 공통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또한 아방가드로와 숭고미의 결합을 요구한 리오타르 역시 모더니즘 에너지의 개개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종국의 모더니즘이 아니라 발생기의 상태에 있는 모더니즘이며 이러한 상태는 지속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세잔 피카소, 칸딘스키, 클레, 몬드리안, 말게비치, 뒤샹과 같은 아방가르드 작가들에 의해 고양론 모더니즘의 원리에 대해 탐구하면서 "아방가르드의 실제적 진행은 모더니티의 가정들을 파고드는 탐색의 길고, 완고하고, 고도로 책임 있는 노동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다원화되고 있고 대중문화는 그러한 사회에서 커다란 위력을 나타내고 있다. 이제는 대중문화를 인위적인 입장에서 거부하는 식의 태도는 지양되어야 할 때이다. 대중 매체에 의해 문화가 형성되고 소멸된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매스미디어의 발달은 아방가르드의 본래적 의미를 퇴색하게 했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리얼리즘과 재현성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인다는 점에서 또한 모더니즘과 매우 유사한 입장을 갖는다. 리얼리즘의 여러 특징 가운데서도 특히 모방이론에 근거하는 재현성은 모더니즘을 리얼리즘과 구별짓는 가장 중요한 특징중의 하나이다. 낭만주의 전통에 입각한 작품을 가리켜 '아름다운 거짓말'로 간주하던 리얼리즘의 작가들은 객관적으로 모방하거나 반영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예술적 목표로 삼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재현성에 대한 회의는 모더니즘보다 포스트 모더니즘에 이르러 한결 더 첨예하게 부각되기 시작했다.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은 리얼리스트들과는 달리 자연이나 우주 또는 삶의 실재에 대하여 그렇게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지 않다.
실제 세계보다는 오히려 창조된 세계를 더 중시하는 그들은 실제가 예술적 창조에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이렇게 포스트 모더니즘이 보여주는 반리얼리즘적 입장과 비재현성에 대한 강조는 무엇 보다도 자기 반영성, 그리고 그것에 기초한 메타 픽션에서 잘 나타난다. 흔히 포스트 모더니스트 들로 범주화되는 대부분의 작가들은 이러한 자기 반영적 메타픽션을 매우 중요한 쟝르로 간주한다. 그러나 자기 반영적 실험성이 모든 사람들에게 다 환영받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칭찬보다는 오히려 비난의 대상이 되어 왔다. 로버트 올터는 [부분적인 마술]에서 포스트 모더니즘의 극도의 실험성을 가리켜 '자유'가 아니라 '방종'에 해당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은 "모더니스트들이라는 거인에서 태어난 난쟁이 후예들로서 삶으로부터 등을 돌린 채 자신의 예술을 통한 일종의 예술적 자위 행위의 희열에 탐닉해 있다"고 주장한다.
기성 전통과 인습에 대한 심각한 도전과 강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모더니즘은 권위나 중심에 대한 갈망을 완전히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그것은 20세기 현대에 만연되어 있는 혼돈과 무질서를 제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권위나 중심에 의존 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모더니즘은 형식이나 기교면에서는 매우 급진적이고 때로는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내용이나 주제면에서는 여전히 보수주의적인 입장을 견지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모더니즘이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는 이중적이고 양면적인 성격이다.
모더니즘의 경우 문학을 비롯한 예술 장르는 마치 군대의 계급이나 천사의 계급 조직처럼 서로 엄격히 구분되어 있었다. 그러나 포스트 모더니즘에 이르러 이러한 장르에 놓여 있던 높은 장벽이 무너지고 각각의 장르가 서로 혼합되고 결합되기 시작 하였다. 레슬리 피들러가 말하는 이른바 '경계선을 넘고 간격을 좁히는'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탈장르화' 또는 '장르확산'으로 잘 알려진 현상이다.
고급 예술이 지향하는 진지성과 엘리트주의적인 특성을 비판하는 동시에, 그동안 구체적인 일상적 삶으로부터 괴리되어 있던 예술을 삶 속에 끌어들이고자 한 포스트 모더니즘 작가들은 '예술을 삶 속에 통합시키는 것'을 가장 중요한 심미적 목표로 삼았다. 특히 맨 선두에 서서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사회질서를 수립하는 일종의 예술적 게릴라에 해당되는 임무를 수행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는 아방가르드의 특성과 같다. 그래서 포스트 모더니즘을 '네오 아방가르드 '라고 부르기도 한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논리적 계승이며 발전인 동시에 그것에 대한 비판적 반작용이며 단절이고, 야누스처럼 두 개의 상이한 얼굴을 지니고 있다. 21세기를 눈앞에 둔 '문지방에 선' 시기에 살고 있는 우리는, 19세기를 마감하는 분수령에서 매슈 아놀드가 느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한 세계는 이미 사멸되고 다른 세계는 아직 새로이 태어나기에는 무력한 두 세계" 사이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개성·자율성·다양성·대중성을 중시한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이념을 거부했기에 탈이념이라는 이 시대 정치이론을 낳는다. 또한 후기산업사회 문화논리로 비판받기도 한다. 산업사회는 분업과 대량생산으로 수요에 의해 공급이 이루어지던 시대이다. 이제 컴퓨터·서비스산업 등 정보화시대에 이르면 공급이 넘치고 수요는 광고와 패션에 의해 인위적으로 부추겨진다. 빗나간 소비사회는 때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실험적이고 긍정적인 측면을 무력하게 만들기도 한다. 탈이념, 광고와 패션에 의한 소비문화, 여성운동, 제3세계운동 등 포스트모던시대의 사회정치현상은 우리사회와도 무관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