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고마나루 명승길
우아하고 세련된 백제문화의 향기를 따라 걷다
백제는 서기 475년 고구려에게 수도 한성이 함락되고, 제21대 국왕인 개로왕이 살해되는 비운을 겪게 된다.
이로써 백제는 한성을 떠나 지금의 공주인 웅진으로 천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구려에 쫓긴 백제는 금강이 북쪽을 가로막고 있는 강변 둔덕에 공산성을 쌓고 그 안에 왕궁을 앉혔다.
수도를 옮긴 백제는 문주왕, 삼근왕, 동성왕, 무령왕을 거쳐 성왕 6년(538년)에 부여로 다시 천도할 때까지 64년 동안
웅진시대를 영위했다. 이후 백제가 신라에 패망하여 백제의 흔적들이 지워지고, 통일신라 이후로도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백제의 문화유적은 많이 사라졌지만 공산성과 송산리고분군만은 웅진시대 백제의 영혼을 후손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고마나루명승길’은 백제의 숨결을 느끼며 걷는 길이다. 공주에 도착하자 금강이 반갑게 맞이한다.
금강 너머로 낮은 산줄기를 따라 구불구불 이어지는 공산성은 우리에게 백제의 혼을 전해준다.
고마나루명승길 걷기는 국립공주박물관 옆 한옥마을에서부터 시작된다.
2010년 9월 개촌한 공주 한옥마을은 깔끔하고 단정하다.
언제보아도 우리 한옥은 주변 산과 곡선미를 띤 지붕이 조화를 이루어 포근한 느낌을 준다.
이곳 한옥마을은 숙박촌으로 활용된다. 22동의 한옥에서 숙박을 할 수 있고,
세미나 같은 행사를 할 수 있는 다용도실까지 갖추고 있어 단체연수도 가능하다.
한옥마을사무소 뒤편에는 옛 충청감영이 있다. 충청감영은 조선 초에 충주에 설치했다가 1602년(선조 35)에 공주 공산성으로 이전하였다.
이후 충청감영은 1653년(효종 4)에 당시 관찰사 강상연이 지금의 공주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 자리로 옮겼다.
한일합방 이후 20여 년 동안 충청남도 도청으로 쓰였던 충청감영은 1932년 도청이 대전으로 이전된 후 대부분의 건물이 철거되었고,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은 선화당과 동헌․포정사문루뿐이다. 충청감영 입구에는 ‘충청도포정사(忠淸道布政司)’라 쓰인
편액이 붙어 있는 포정사문루(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93호)가 의젓하게 서 있다.
지금의 선화당(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92호) 건물은 1833년(순조 33)에 지은 것으로,
공주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 자리에서 1937년 옛 국립공주박물관 자리로 옮겨져 박물관 진열실로 사용되다가
1992년 국립공주박물관이 신축되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임금의 덕을 드러내어 널리 떨치고 백성을 교화하는 건물임을 뜻하는 '선화당(宣化堂)'이라는 현판이 앞면 중앙에 걸려있다.
선화당은 조선중기 수법이 남아있는 조선 후기의 관아 건축으로 그 모습이 웅장하다.
선화당 앞쪽에는 공주목의 관아인 동헌이 있다.
동헌은 감영(관찰사영)인 선화당의 위풍당당한 모습에 비하면 약간 왜소한 편이다.
옛 충청감영을 나와 국립공주박물관으로 향한다.
국립공주박물관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하기 위해 건립된 박물관이라 해도 무리가 아닐 정도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이 주요 전시물을 이루고 있다. 현재 국립공주박물관에는 무령왕릉과
대전․충남지역에서 출토된 국보 18점, 보물 4점을 포함한 40,000여 점의 문화재가 보관되어 있다.
1971년 공주시 송산리고분군에서 발굴․조사된 무령왕릉에서는 18종 4,600여점의 유물이 나왔으며 그중 12점이 국보로 지정되었다.
무령왕릉실로 들어가니 무령왕릉 발굴과정을 소개한 사진과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가장 먼저 우리를 맞이한 것은 묘지석(국보 제163호)이다. 무덤 속 주인공이 무령왕릉임을 알 수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이 묘지석 덕분이다. 무령왕릉의 입구에서 널방에 이르는 통로에 놓여 있었던 묘지석에는
'영동대장군백제사마왕'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사마왕은 무령왕의 생전 이름이다.
무령왕릉에는 잡귀를 물리치고 무덤을 지키는 상상의 동물인 석수(국보 제162호)가 뭉툭한 코에
툭 튀어나온 눈을 하고 입을 벌린 채로 묘지석 뒤쪽에서 버티고 있었다.
그 석수 앞에서 사람들은 신기한 듯 눈길을 멈춘다.
계속해서 만나게 되는 유물은 금이나 은으로 만든 세공품들이다.
국보 제154호와 제155호의 무령왕 금제관식(金製冠飾)과 무령왕비 금제관식은
아름답고 우아한 불꽃 모양으로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탄식을 자아내게 한다.
무령왕 금귀걸이(국보 제156호)와 왕비 금귀걸이(국보 제157호), 왕비의 소장품인 용장식 은팔찌(국보 제160호)를 보면서도
백제인들의 우아함과 세련미, 정교한 금세공 기술에 감탄한다.
금제뒤꽂이(국보 제159호), 금제목걸이(국보 제158호)와 청동거울(국보 제161호)에서도 백제문화의 화려한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금과 은 같은 금속제품은 그렇더라도 1,50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썩지 않고 남아 있는 목제품은 신비할 따름이다.
U자 모양의 머리받침(국보 제164호)과 W자형의 나무발받침(국보 제165호)이 그것이다.
국보나 보물로 지정되지 않았더라도 백제문화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수많은 유물들과 교감하면서 나는 백제의 후예로서 자부심을 느낀다.
박물관 밖에는 대전․충남지역에서 출토되거나 산재해 있던 석조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대통사지출토 석조다. 석조란 돌을 파서 만든 큰 물통으로, 이 석조는 백제 성왕 5년(527)에 세워진 대통사지에 있었던 것이다.
통일신라시대의 사각형 석조와는 달리 이 석조는 원형이다. 백제문화 특유의 우아한 조형미를 지닌 이 석조는 발견된 장소의 이름을 따서 각각 중동석조(보물 제148호)와 반죽동 석조(보물 제149호)로 불리고 있다.
그밖에 박물관 건물 앞 야외에는 한쪽이 깨지거나 상륜부가 없어져버린 석탑이며
머리가 떨어져 나간 부처상, 소박한 모습의 민불, 받침돌만 남은 석조물 등이 세월의 무상함을 알려주고 있다.
우리는 국립공주박물관을 출발하여 무령왕릉이 있는 송산리고분군으로 발길을 돌린다.
국립공주박물관 뒤쪽의 둔덕 같이 낮은 송산(130m)을 넘는다.
임도에는 저물어가는 가을이 아쉬운 듯 낙엽이 쓸쓸하게 나뒹굴고
낙엽을 밝고 걷는 길손들의 마음에는 충만감이 넘쳐흐른다.
낙엽을 떨군 나목 사이로 공산성이 가깝게 다가오고, 길은 송산리고분군으로 이어진다.
공산성에 왕궁이 자리를 잡고, 왕이 승하하면 왕궁에서 건너다보이는 이곳 송산 자락에 묻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송산리고분군은 백제 웅진 도읍기간에 재위했던 왕과 왕족들의 무덤으로 무령왕릉을 포함해 7기의 무덤이 모여 있다.
고분은 동북쪽 위편에 1호분부터 4호분까지 4기의 고분이 자리를 잡았고,
서쪽 아래편에 5,6호기와 무령왕릉이 위치해 있다.
무령왕릉은 우아하고 세련된 백제문화의 진수를 보여주는 유물이 대량으로 출토된 고분으로, 1971년 발굴되었다.
무령왕릉의 발견은 획기적인 사건이었지만, 그 출발은 그야말로 우연이었다.
1971년 7월 무령왕릉 옆에 있는 6호분에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도랑을 파고 있었는데, 한 인부의 괭이 끝에 벽돌이 걸렸다.
그것이 바로 무령왕릉 앞면 벽 모서리였다. 이렇게 발견된 무령왕릉은 다른 고분들과는 달리 도굴되거나 전혀 훼손되지 않은 채
우리에게 고스란히 자기모습을 드러내 주었다. 우리나라 고분은 조성연대나 이름을 써넣지 않은 것이 일반적인데,
발굴된 고분에서는 묘지석이 있어서 무령왕릉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무덤은 왕과 왕비의 합장묘로서 왕비가 무령왕보다 3년 뒤인 526년에 타계하자 3년상을 치르고 이곳에 함께 묻었다.
왕과 왕비의 나무 관과 시신은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삭아 없어지고, 주로 금동제 유물과 일부 목제만 남아 있었다.
무령왕릉은 땅을 파낸 후 벽돌을 쌓아 방을 만든 후 긴 연도 안쪽 방에 부부를 합장한 묘다.
무덤 안의 벽돌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고, 벽돌무덤은 중국 남조의 무덤양식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여
두 나라가 활발하게 교류했음을 알 수 있다. 무령왕릉은 1998년까지 관람객에게 공개됐으나 이후 보존 차원에서
출입을 금지시키고 있다. 대신 송산리고분모형전시관을 통하여 무령왕릉과 5, 6호분을 재현해 놓았다.
송산리고분군 정문을 나와 도로를 따라가면 황새바위성지에 닿는다.
‘성지 황새바위’표지석이 있는 후문을 따라 야외성당으로도 활용되는 황새바위 광장에 오른다.
공주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동산 위의 황새바위 성지는 예로부터 황새들이 많이 서식하여 황새바위,
또는 목에 커다란 항쇄 칼을 쓴 죄수들이 이곳에서 처형당했다고 하여 항쇄바위로 불렸던 곳이다.
황새바위 주변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천주교 신자가 순교한 곳으로 1980년 황새바위 성역화사업을 위해
주변 땅을 매입하고 1984년부터 본격적으로 성지를 조성하였다. 현재 공식적으로 알려진 순교자 숫자만 해도 248위에 달하며,
그중에는 10살짜리 어린이도 포함돼 있다.
황새바위 광장에는 원형의 제단이 주위보다 약간 높게 조성되어 있고, 투박한 돌로 만든 12기의 비석이 세워져있다.
이 비석에는 황새바위에서 처형된 순교자의 이름과 나이가 적혀있다.
황새바위 광장을 지나니 ‘십자가의 언덕’이다. 두 그루의 느티나무 주변에 각각 2단으로 쌓은 낮은 축대 앞에
수많은 십자가와 고난 받는 예수상들이 놓여있다. 이곳 ‘십자가의 언덕’은 옛 소련 시절 리투아니아인들이
자유를 갈망하면서 올랐던 리투아니아 십자가의 언덕을 본떠서 만든 것이란다.
십자가의 언덕 앞 성모광장에 서니 공주시내와 공산성의 모습이 가슴에 안겨온다.
‘빛의 길’이라 이름붙인 계단을 내려서자 작은 ‘순교의 광장’에 13.8m 높이의 ‘순교탑’이 우뚝 서 있다.
순교탑은 순교자들이 받은 칼을 맞댄 형상이다. 순교탑 건너편에는 12사도를 상징하는 돌기둥이 있고,
그 옆으로 순교자 248위의 이름을 새겨놓은 ‘무덤경당’이 자리를 잡고 있다. 순교탑과 무덤경당은 1985년 건립되었다.
순교자 광장에서 ‘천국의 문’을 통과하여 계단을 내려간다. 이렇게 황새바위 성지를 걷는 길은 순례길이다.
황새바위 성지를 나서는데 성모마리아상이 상처받고 고난 받는 자를 다 품어 안으려는 듯 두 팔을 벌리고 있다.
황새바위 성지순례를 마치고 고개를 들어보니 제민천 건너에서 공산성이 손짓을 한다.
<제민천>
공산성 입구 도로에는 두 개의 아치를 그린 백제무령왕릉연문이 서 있고, 그 문 사이로 공산성 금서루가 고개를 내민다.
공산성 매표소를 지나 공산성 출입문 역할을 하는 금서루로 올라가는데, 47기의 송덕비가 도열한 채 길손을 맞이한다.
공주시 곳곳에 흩어져 있던 비석들을 모아놓은 것으로 충청감영과 공주목 관리들의 송덕비가 대부분이다.
공산성 서문인 금서루(錦西樓)는 성안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훼손돼버렸는데,
1859년 편찬된 <공산지(公山誌)>등의 문헌기록과 동문조사자료 및 지형적 여건을 고려하여 1993년 복원하였다.
금서루를 통과하여 공산성 안으로 들어간다.
우리는 성곽을 한 바퀴 돌기위해 금서루로 올라가 성곽길을 걷기 시작한다.
가슴에 안겨오는 성곽은 곡선을 그으며 이어지고, 금서루와 봉우리 위에 우뚝 서 있는 공산정은
구불구불 이어지는 성곽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이 된다.
고구려에 쫓긴 백제가, 황급히 금강이 휘감아 흐르는 웅진의 공산에 궁터를 잡고 천도를 하였으니
64년의 웅진시대가 이곳에 열린 것이다. 공산성은 시대마다 불리는 이름이 달랐다.
백제시대에는 웅진성, 고려시대에는 공주산성, 조선시대에는 쌍수산성으로 불리다가 지금은 공산성으로 불린다.
<금서루에서 남쪽 성곽을 따라가다가 본 공산정>
공산성과 송산리고분군은 부여, 익산에 분포된 백제역사유적과 함께 2015년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공산성(사적 제12호)은 총길이 2,660m로 동서남북에 네 개의 문루가 있고, 동서가 길고 남북은 짧다.
백제 때에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으나 조선중기에 석축으로 새로 쌓았다.
산줄기를 따라 부드럽게 이어지는 성곽길은 두런두런 얘기하며 걷기에 안성맞춤이다.
혼자서 백제의 향기를 맛보며 걷기에도 더없이 좋은 길이다.
금서루에서 쉬엄쉬엄 성곽을 따라 올라가니 넓은 공터가 나온다. 백제의 왕궁지로 넓은 터와 인공적으로 만든 둥그런 백제연못이 남아 있다.
남향을 하고 있는 왕궁터는 공주시가지와 금강, 송산리고분군을 모두 조망할 수 있는 곳에 위치해 있다.
왕궁지 북쪽 언덕위에는 쌍수정이라 불리는 정자가 있다.
1624년 조선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머물다가 평정 소식을 듣고 나무 두 그루에 벼슬을 내렸던 자리에 정자를 짓고
그 이름을 쌍수정(雙樹亭)이라 하였다. 쌍수정 아래에는 인조가 공산성에 머물던 5박6일간의 내용을 새긴 쌍수정 사적비가 있다.
왕궁지에서 오른쪽으로 내려서니 공산성 남문인 진남루(鎭南樓)가 기다리고 있다.
진남루는 1971년 기존 건물을 해체하여 복원하였다.
성곽 주변에는 주로 참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고, 성곽 아래로 공주의 구시가지가 내려다보인다.
진남루를 지나니 동문인 영동루(迎東樓)가 기다리고 있다.
영동루는 무너져 없어진 것을 1980년 발굴조사를 통하여 문터 양쪽에서 원래의 문을 지탱하던 돌을 발견하고,
공산지의 기록을 근거로 2층 3칸의 누각을 복원하였다.
<공주 고나마루 명승길-2>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