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믹테크 2호 (97년10월)에 실렸던 박흥용 선생의 인터뷰 마지막 부분입니다.
엄청난 장문이고 스크롤의 압박이지만 좋은 말씀이고 읽어두면 뼈가되고 살이 될겁니다.
중간에 잡지때기가 정말 효과가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이 계신분들께 좋은 말씀도 있습니다.
웬만한 질문은 거의 다 드린것 같습니다. 긴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드리고 마지막으로 만화를 시작하려는 만화가 지망생들에게 조언과 격려 한마디를 부탁합니다.
만화를 그리기 위한 복잡한 지도는 만들지 마실 것!!
너무 상세하고 복잡한 안내책을 가지지 말라는 말입니다. 단순하면 단순할 수록 좋습니다.
한 꼬마가 자기가 사는 동네에서 옆동네로 찾아가는데 동네 약도만 있으면 됐지 세계지도가
무엇에 필요하겠습니까? 만화가가 되기 위한 첫걸음의 단계를 나름대로 설정하고
그 단계를 차근차근 순차적으로 밟아 나가라는 이야기입니다.
가령 자기가 생각하기에 뎃생력이 떨어진다면 뎃생을 위한 훈련을 첫단계로 정하고 그 외의
다른 무엇도 생각지 말고 뎃생에만 매달리라는 것입니다.
그런 훈련을 통해 어느정도 첫단계의 계획이 달성되었다고 판단되었을 때
다음 단계의 계획을 세우고 또 그 계획에 매달려 정진하고.... 그런 단계를 순차적으로
밟아가며 자신의 계획과 목표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것만이
프로만화가가 되는 지름길입니다. 너무 광범위한 계획과 이상은 발전은 커녕
오히려 만화가가 되는 것을 포기하게끔 만드는 결과까지 초래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일본에 갔을 때 우리나라 만화계의 원로이신 김용환 선생님을 만나뵙고
좋은 만화를 그리는 방법을 여쭈었더니 '계속그려!'란 한마디만 하시더라고요.
비록 단 한마디만을 하셨지만 그 한 마디 안에 만화를 그리는 모든 방법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많이 보고, 많이 쓰고, 많이 그리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많은 연습량을 제대로 운용하려면 체계적인 연습방법을 나름대로
마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벙어리가 되지 않기 위한 훈련을 해야 합니다.
언어 확장을 하기 위한, 제대로 된 어휘력의 구사를 위한 훈련을 말하는 것이죠.
저 같은 경우는 국어사전을 독파하고 있는데 틈날때마다, 예를 들어 화장실에 앉아 있는
시간을 이용해서 그 두꺼운 국어사전의 아무페이지나 펼칩니다. 그리고 쭉 나열되어 있는
단어들을 훑으며 그 단어들의 의미를 머리속에 입력시키는 것이죠. 작품에는 많은
등장인물들이 있고 그 인물마다 말하는 투라든가 즐겨 쓰는 어휘라는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작가는 그러한 설정을 각 캐릭터에게 부여해 주고 그 설정에 맞는 어휘를 구사해 주어야
하는데 작가가 그런것에 대한 어휘력 훈련이 되어있지 않아서 무관심하게 되면
그 많은 등장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개성들이 모두 말살되어 버립니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 일자 무식꾼과 대석학이 어떤 한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
장면을 가정해 보죠. 분명 둘 사이에는 엄청난 대화의 갭이 있을 겁니다.
그 갭을 작품을 읽고있는 독자들에게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요인이 다름아닌
다양한 어휘력의 구사인데 작가가 이런 점을 등한시하고 그저 자신이 생활하며 늘 쓰던
말투로 글을 쓰다간 그 많은 등장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개성들이 모두 말살되어 버립니다.
이것은 곧 인형극에서 인형을 조종하는 사람이 인형을 조종하며 대사를 읊는 모습과
마찬가지로 캐릭터들이 생명력을 잃고 작가 혼자서 조종하는 꼭두각시로 전락하고 마는
결과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한작품의 그 많은 글들을 써가다가 보면 머리 속에서
아련히 의미는 떠오르는데 그 의미에 걸맞는 단어가 영 떠오르지 않아 고생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러한 여러가지의 난점을 극복하기 위한 훈련입니다.
그리고 국어사전과 같은 방법으로 대백과사전을 보는데 그것은 다양한 스토리를 쓰는데
필요한 소양을 기르기 위한 훈련입니다. 무엇을 찾아야겠다는 의지로 보는 것이 아니라
국어사전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 페이지나 보는 것입니다. 비록 자신의 만화방향과
상관없는 지식일지라도 그런 방식으로 뇌리에 심어 놓은 지식이 언제 어디서 효과를
발휘하게 될지 모르는 일이거든요. 백과사전에 나와있는 지식들이 전문적인 자세한 지식은
아니지만 그런 지식들의 개념 정도만 파악하고 있더라도 후에 헌팅작업을 할 때 큰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 훈련들을 시작할 때 부터 해야 합니다. 그리고 만화가가 되고난 후에도
끊임없이 해야하고요.그림에 관한 훈련은 따로 왕도가 없습니다. 수없이 많은 연필을 깍아야 하고 수없이 많은잉크병을 비워야 하는 것이죠. 어차피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을 그리는 것이기 때문에
인체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필요로 합니다. 많은 사물들이 있지만 인체만큼 묘사가 어려운
피사체는 없습니다.자연스러운 인물을 그리려면 계속되는 인체묘사의 연습을 해야만 하는데
그 과정에서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그려야 할 대상의 문제입니다.
평생 옆에서 모델을 해 줄 사람이 없는 한 나름대로 인체에 대한 자료들을 구비해야 합니다.
저 같은 경우에 제일 좋은자료는 사진입니다. 여자를 그리기 위해서는 여러 여성잡지에
나와있는 모델들의 사진을 자료로 하고 남자의 경우엔 스포츠 잡지나 신문등 여러 매체를
이용합니다. 그 자료들을 토대로 계속 그려야 합니다. 먼저 운동감이 없는 모델들의
사진을 그리는 것으로 시작을 해서 어느정도 인체의 구조를 파악하고 난 후 그 다음에
스포츠지의 인물들을 그려야 합니다. 처음부터 인체구조 즉, 근육이나 골격의 구조를
모르는 상태에서 격렬한 운동감을 표현하려고 하는 것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죠. 사람들 마다 개인차는 있겠지만 아무 생각없이 몇 백, 몇 천장의
사진을 끈기있게 2년 정도 모사하다 보면 인체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하게되는
틀이 잡힙니다. 물론 뎃생의 기본은 알고 시작해야겠죠. 어쨌든 이러한 작업을
'마네킨 작업' 이라고 하는데 그 마네킨 작업으로 인해 왠만한 동작이나 인물의
운동감표현에 자신이 붙으면 이제는 그리는 인물에 생명력을 불어 넣어 주는 훈련을
해야합니다. 그 훈련의 가장 좋은 방법은 크로키입니다. 이미 인물을그리는 것에
이력이 나있는 상태이므로 움직이는 인물을 그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정도로
그림을 그리는 손에 스피드가 붙어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크로키를 통해 순간포착, 어떤상황에서든 원하는 포즈를 포착해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길러집니다. 이 크로키는 감각을 잃지않기 위해서라도 펜을 꺽을 그 순간까지
계속 해야만 합니다. 자, 이제 인물에 대한 표현능력이 상당 수준 향상되었으므로
그 능력을 베이스로 만화적인 약화작업을 합니다.
캐릭터 창출의 단계에 다다른 것이죠. 이미 근육, 골격, 표정, 나아가서 의상까지
사람의 외형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에 대해 많은 것을 파악하고 있는 상태임으로
자신의 취향에 맞는 만화적 캐릭터를 만드는 것은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울 것입니다.
즉 여러 단계를 각고의 노력으로 거쳐 기본적인 토양이 마련된 결과인 것입니다.
밀알을 심고 밀을 수확해서 밀을 빻습니다. 빻아서 만들어진 밀가루에 물을 부어
반죽을 만든 상태가 바로 기본적인 토양이 마련되어진 것이죠.
이제 각고의 노력의 결과로 그 반죽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게 된 것이죠.
앞에서 말한 스토리를 쓰기 위한 훈련, 제대로 된 그림을 그리기 위한 훈련을 통해서
만화를 그리기 위한 분비가 어느 정도 되어 있는 상태인데 이제 두 훈련의 결과를
합체시켜야 합니다. 그 두 원소를 접목시키는데 사용되는 도구인
연출을 또 공부해야 합니다. 간혹 처음 만화를 시작하는 지망생들이
착각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만화를 그저 '이야기가 있는 그림' 정도로만
인식하는 것이죠.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연출이라는 요소가 꼭 필요합니다.
단순히 이야기 전개를 위해 해당그림만 나열해 놓는 것이 아니라 연출을 꼭 해야만 하는
당위성이 있는 것입니다. 왜 연출이라는 요소가 필요한 것인지,
연출의 당위성이 무엇인지 옛날에 봤던 영화의 한 장면을 예를 들어
설명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6,70년대의 영화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한밤중에 승용차를 타고 달리고 있습니다.
둘은 연인 사이인 듯 차를 달리는 도중에도 서로 살을 부비는 등 애정표현을 하지만
자꾸 차창 밖으로 눈치를 살피는 것이 아무래도 불륜의 관계같습니다.
누구한테 별장을 빌렸는지 목적지를 향해 빨리 가고픈 마음에 안달을 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그런 조급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두 남녀의 심리상태를 나타내려는 감독 나름의
연출의도인 듯 싶습니다. 이윽고 차는 별장에 도착했고 둘은 방안으로 달려 들어가
옷을 벗기 시작합니다. 자, 드디어 중요한 순간! 옷을 벗은 남녀가 껴안고
침대 위로 쓰러집니다. 그런데 갑자기 카메라가 뒤로 쭉 빠지며 난데없이 아스팔트를
파헤치고 있는 굴착기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당시의 영화심의 탓인지 아니면 정사장면을
상징적인 방법으로 표현한 것인지 어쨌든 직접적인 정사장면을 피해 굴착기를
등장시킨 것은 감독의 의도인 것만은 확실한데 여기서 연출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단순한 이야기 그림이라면 굴착기 같은 장면을 삽입하는
수고는 하지 않고 정사장면을 직접묘사했겠죠? 그러니까 이 영화는 '연출'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빈약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연출이 아니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앞에서 말한 당위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를 이렇게 바꿔보기로 하죠. 둘이 차를 타고 갑니다.
저 멀리 목적지인 별장이 보이는데 한가할 줄 았았던 도로가 밀려있는 차로
꽉 막혀 있습니다. 더욱 더 조바심이나는 두 남녀. 기어가듯 움직이는 자동차
앞유리를 통해 '공사중'이란 표지판이 보입니다. 공사현장을 지나는 차의 옆으로
굴착기로 땅을 헤집는 인부가 보이고 잠시 인부와 눈을 마주칩니다.
그 때 까지 관객은 공사장의 굴착기에 대해 별다른 의식을 하지 못합니다.
공사장을 지나친 남녀가 별장에 들어가고 침대에 쓰러지는 순간 그 굴착기가 등장한다면
그 때서야 관객은 굴착기의 역할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그러한 복선을 깔지 않은
상태에서도 굴착기가 등장한다 해도 관객은 굴착기가 의미하는 바를 짐작은 하겠지요.
그러나 설득력과 작품의 완성도로 보았을 때에는 많은 점이 모자랍니다.
이 것은 미리 굴착기에 대한 복선을 깔아 놓은 결과이므로 왜 정사장면에 굴착기를
등장시키는 연출을 했는지가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연출을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당위성을 주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영화의 연출을 예로 든 것이지만 연출은 만화 영화의 그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만큼 연출이 만화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말해 주기도 하는 것이죠.
앞에서도 말했듯이 연출공부를 위해서는 만화든 영화든 많이보고 연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항상 객관적인 입장에서 자기 작품을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하는데
'백지'를 준비하는 것으로서 그 안목을 기를 수 있다는 것은 이미 밝힌 바있습니다.
만화를 구성하는 스토리, 그림, 연출의 3가지 요소에 대해 간략하게 나마 방법을 제시했는데
이것이 만화가 지망생들에게 작으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고
다시한번 말하지만 절대로 너무 광범위하고 복잡한 지도는 만들지 말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
으로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