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한국 관세음보살 기도영험담 모음(101~110) 101. 6. 25 전쟁터의 아들을 살린 김보운화 보살의 관음기도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울산 동광병원의 이사장으로 있던 박영철 선생을 아들로 둔 김보운화(金寶雲華)라는 보살님이 있었습니다. 불교에 대한 믿음이 독실하였던 보운화 보살은 절에 가는 것을 무엇보다 좋아하였습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다니는 아들이 방학을 맞아 집에 올 때에도, 아들 곁에 있기보다는 절에 가기를 더 좋아하였습니다. 그것이 아들은 싫었습니다. 어머니를 부처님께 빼앗긴 듯 느껴졌습니다. '엄마는 절밖에 몰라. 나보다도 절이 더 좋은가봐.' 마침내 아들은 어머니를 미워하기에 이르렀고, 동시에 절을 싫어하고 불교를 싫어했습니다. 그러다가, 6.25 사변이 일어나자 아들 박영철은 군의관이 되어 7년을 복무했습니다. 그 7년동안 보운화보살은 옆구리를 방바닥에 댄 적이 없었습니다. 낮이건 밤이건 염주를 돌리며 '관세음보살'을 염하였고, 극히 피곤하면 벽에 기댄 채 잠깐씩 눈을 붙였습니다. 그야말로 무섭도록 관음정근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염불 정진한 덕은 그대로 아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아들이 위급한 고비에 처할 때마다 어머니의 외침이 들려와 위기를 면한 것이었습니다. 하루는 박영철 군의관이 막사에서 쉬고 있는데, 어머니의 다급한 음성이 비몽사몽간에 들려왔습니다. "영철아! 어서 막사에서 나와 달려가거라. 어서!" 박영철은 얼떨결에 일어나 막사 밖으로 달려나갔고, 간발의 차로 적의 포탄이 막사 위에 떨어졌습니다. 또 하루는 구급차를 타고 가는데, 바로 옆에서 외치는 듯한 어머니의 큰 소리가 차 안에 울려퍼졌습니다. "영철아, 네가 왜 그 차를 타고 가느냐? 빨리 뛰어내려라, 빨리!" 박영철은 달리는 구급차의 문을 열고 뛰어내렸고, 차는 조금 더 나아가다가 지뢰를 밟아 산산조각이 나 버렸습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 처할 때마다 들려왔던 어머니의 외침! 7년만에 제대를 한 박영철은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울면서 사죄하였습니다. "제가 학교를 다닐 때, 어머니께서는 제 곁에 있는 것보다 절에 가는 것을 더 좋아하는 듯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미워하고 절도 불교도 부처님도 싫어하였습니다. 그런데, 군의관 생활 7년동안, 꼭 죽을 고비를 어머니의 기도 덕분에 여러 차례 무사히 넘겼습니다. 제가 이제껏 살아있는 것은 모두가 어머니의 지극한 정진력 덕분입니다. 어머니! 어머니를 미워하고 불교를 싫어했던 이 못난 자식을 용서해 주십시오." 보운화 보살의 염불은 당신 자신의 수행력을 높여주었을 뿐 아니라 아들의 생명까지 구해주었습니다. 지극한 일심칭명! 보운화 보살처럼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관세음보살은 즉시에 그 음성을 들으시고 해탈을 얻게 해주십니다. 출전: 생활속의 관음경 우룡큰스님저 도서출판 효림 ......................................................................................................................................... 102. 아들을 살린 어머니의 관세음보살 기도 삼성의 이건희 회장의 장인이며 부인 홍라희씨의 아버지인 홍 진기씨는 1940년에 경성제국 법학과를 나온 법조인으로 1958년에 법무부 장관에 취임하였고,4.19 의거때 구속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1961년 12월, 홍진기의 어머니 허씨 부인은 며느리를 불러 말했습니다. "아가야, 미안하다. 모든게 내 책임이다. 이 집안의 며느리로 들어와 남편이 사형선고를 받았으니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느냐? 나 또한 아들이 죽을 목숨이 되었으니 더 이상 살아있는 목숨이 아니다. 냉수 한 그릇을 떠오너라." 며느리가 물을 떠오자 허씨 부인은 쪽진 머리를 푼 다음 가위를 꺼내 머리카락을 잘랐습니다. "이 머리카락은 네가 간수하여라. 그리고, 앞으로 7일동안은 나를 찾지말아라. 나는 이 방에서 나가지 않을 것이다. 만약 죽을지라도 7일이 지난 다음에 이 방문을 열도록 하여라. 7일이 지나 내가 살아있을 때는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허씨 부인은 눈물을 짓고 있는 며느리를 내보내고 문을 닫았습니다. 그리고, 단정히 앉아 관세음보살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닷새, 엿새, ...7일날 정오, 라디오에서 홍진기가 사형을 면했다는 특별뉴스가 흘러나오자 반가움을 주체할 수 없었던 며느리가 허씨의 방문을 열며 소리쳤습니다. "어머님, 아범이 살아났습니다. 사형을 면했습니다." "아, 그래. 이제 다시 내 아들이 되었구나." 그런데, 허씨 부인앞에 놓여있던 물은 처음 그대로였습니다. 물한모금 마시지않고 7일동안 '관세음보살'을 염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오로지 아들을 구하겠다는 일념의 정성과 기도... 사형을 면한 홍진기는 64년 중앙 라디오 방송사장, 중앙일보, 동양방송 사장을 지냈고, 80년 중앙일보사 회장이 되어 86년 죽는 날까지 재직하였습니다. 출처: 마음밭을 가꾸는 불자, 보성큰스님저, 도서출판 효림 .................................................................................................................................. 103. 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로 사업을 다시 일으킨 곽처사 가끔씩 나를 찾아오는 50대의 곽처사는 2006년 위암에 걸려 수술을 받은 다음 불교를 열심히 믿게 되었고, 나는 그에게 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나 금강경 독송을 권하였습니다. 곽처사는 신묘장구대다라니의 발음이 독특하고 음률이 재미있다며 부지런히 외우더니, 49일 기도끝에 대변으로 몸 속의 고름이 몽땅 빠져나오는 꿈을 꾸고 몸이 한결 가벼워짐을 느꼈습니다. 이후 암에서 완쾌되었다는 확신을 얻은 그는 친구들과 동업하여 회사를 차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업이 다 녹지않았음인지 2008년 9월의 리먼사태로 인한 금융위기때 회사가 자금난으로 어려움을 겪게되어 소유하고 있던 지분을 모두 잃게 되었습니다. 이 것만하여도 말할 수 없는 큰 고통이었는데, 더 섭섭한 것은 그 동안 친했던 모든 사람들이 모른 척 등을 돌린 것이었습니다. 곽처사는 다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이루어 달라거나 재기하게 해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도대체 왜 이런 시련이 나에게 오는가? 나를 힘들게 만든 그들을 무릎꿇게 할 방법은 없는가?'하는 기도였습니다. 물론 특별한 발원이 없었기 때문에 간절한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저 신묘장구대다라니를 하루 21편 정도만 외웠습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나자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빈 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 본래 내 것이 어디 있는가? 내가 망한 것은 내가 갚아야 할 빚이요, 사람들이 나에게 모질게 한 것 또한 내 과보가 아니겠는가? 이제부터 참회의 기도를 하면서 새롭게 살아보자.' 과연 기도를 계속하였더니, 자신의 거칠었던 행동과 증오, 분노, 혐오감, 고집, 의심들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고, 헛된 것들을 부질없이 쥐고 살아왔음을 깨닫고 진실한 참회를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에 임하면 그 속에 흠뻑 젖어들었고, 차츰 마음이 환희로와지고 용기가 생기고 긍정적인 기운이 샘솟았습니다. 어느덧 대다라니 기도는 10만 편에 이르렀고, 2011년초가 되자 중견기업체를 운영하던 지인이 '새롭게 세운 중견기업체 사장으로 일해 볼 생각이 없느냐?'고 문의가 들어왔습니다. 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께 감사를 드리며 사장으로 취임한 그는 지금까지 참으로 밝고 성실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직원들을 아끼며 회사를 잘 운영하고 있습니다. 출처: 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법 우룡큰스님, 김현준 저, 도서출판 효림 ............................................................................................................................ 104. 기우는 집안을 다시 세운 대다라니 기도 수년 전, 남편이 직장을 다니다 그만두고, 부산에서 편의점을 차린 40대 중반의 부부가 있었습니다. 처음 시작한 가게치고는 생각보다 잘되어 재미와 보람을 느꼈었는데, 욕심이 생긴 남편이 주위에 있는 편의점을 하나 더 인수하면서부터 힘겨운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편의점을 하나할 때만 하여도 아내인 선행심 보살은 고등학교를 다니는 두 자녀를 뒷바라지할 수 있었는데, 두 개의 편의점을 시작하면서부터는 아이들 한 끼밥도 차려줄 시간이 없을만큼 일에 치이며 살아야했습니다. 그렇다고 가게가 잘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편의점은 둘인데 수입은 반으로 줄어들었고, 두 번째 가게를 낼 때 빌린 빚의 이자를 갚고나면 손에 쥐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두 자녀를 제대로 보살피지 못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에다, 날이 갈수록 몸은 피로에 지쳐버렸고, 돈에 대한 압박은 장사를 하고 있는 삶 자체를 우울하게 만들었습니다. 마침내 2년이 지났을 때 편의점을 처분해야할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고, 남편에 대한 원망은 극에 달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선행심 보살은 불교신행연구원으로 전화를 하여 김현준 원장과 상담을 하게되었고, 김현준 원장은 보살에게 간곡히 말했습니다. "보살님, 현재 보살님 앞에 펼쳐져있는 모습은 보살님 업의 모습입니다. 보살님으로서는 이해가 되지않겠지만, 지난 세상에 지은 업과 현재의 탐진치심이 함께 작용하여 이와같은 현실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곧 지금 전개되고 있는 것들이 거울에 비친 보살님의 모습임을 잊지말아야합니다. 이제부터 장사의 요행수를 바라지도말고, 남편을 원망하지도 말고, 세상을 비관하거나 우울해하지도 마십시오. 그리고, '불보살님을 잘 모시며 살겠다'는 마음으로 기도를 시작하십시오." "무슨 기도를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김원장은 천수경을 외우는지를 물었고, 선행심 보살이 외운다고하자 다짐을 했습니다. "오늘부터 매일 신묘장구대다라니를 3백편씩 백일동안 외우십시오. 절이나 집에서 외울 형편이 되지않을 것이니 장사를 하면서 외우십시오. 3백편은 꼭 외워야합니다." 그 뒤 열흘쯤 지났을 때 보살은 다시 전화를 했습니다. "손님들을 대하면서 외우려고하니 통집중이 되지않고, 3백편을 외우는 것 자체가 힘이 듭니다." "물론 쉽지않겠지요. 아무 일없이 그냥 대다라니만 외워도 5~6시간은 더 걸릴텐데... 이제부터는 계산대 가까이의 잘 보이는 곳에 신묘장구대다라니를 붙여놓고 보면서 외우십시오. 그럼 훨씬 쉽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날부터 선행심 보살은 참으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50일 가량이 지나자 30초면 대다라니 1편을 외울 수 있게되었고, 장사를 하고 손님을 응대하면서도 300편을 외우는 것이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백일기도를 마쳤고 마음은 편안해졌고 가족과 손님들을 웃음으로 대할 수있게 되었습니다. 김현준 원장은 이러한 보살에게 한 차례 더 기도할 것을 권했습니다. "외우는 속도가 많이 빨라졌으니 이번에는 하루에 500편씩 백일기도를 하십시오. 꼭 좋은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선행심보살의 마음은 안정이 되어있었기때문에 모든 것을 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께 맡기고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외우는데 몰두했습니다. 차츰 손님을 대할 때도 대다라니가 잘 외워졌고, 잠잘 때도 잘 외워졌습니다. 보살은 계수기로 횟수를 세었는데, 어떤 때는 하루에 1천편을 넘게 외우는 날도 있었습니다. 마침내 두 번째 백일기도 70일이 되었을 때 근처에 있던 편의점 두 곳이 연달아 문을 닫으면서 손님들이 밀려왔고, 거래처가 개발한 도시락의 인기가 치솟아 매출이 5배나 증가하였습니다. 보살이 감사의 인사와 함께 이 사실을 알려오자 김현준 원장은 말했습니다. "보살님, 기도 중단하지말고 백일기도 잘 마치십시오. 그리고, 앞으로도 '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 잘 모시고 살겠다'는 생각으로 기도하고 가게를 운영하십시오. 틀림없이 나날이 융성해지고 행복해질 것입니다." '안된다'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신묘장구대다라니는 구고다라니(救苦陀羅尼)요, 만원다라니(滿願陀羅尼)입니다. 우리를 고통에서 구해주고 우리의 괴로움을 해결해 주는 구고다라니요, 우리의 원을 성취시켜주고 우리가 구하는 것을 얻을 수 있게해주는 만원다라니입니다. 일심으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외워보십시오. 틀림없이 현증가피를 입어 뜻과 같이 이룰 수 있게됩니다. 출처: 신묘장구대다라니기도법 우룡큰스님, 김현준저, 도서출판 효림 ............................................................................................................................... 105. 꾸준한 기도로 모든 고난을 극복한 감로행 보살 현재 서울 송파구에 살고있는 감로행 보살의 이야기입니다. 첫째는 아들, 둘째는 딸을 둔 감로행보살은 청각장애를 가진 딸이 특수학교를 다니기 시작할 무렵부터, 몸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병원을 찾아가 검사를 하면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하는데도, 늘 힘이 없어 쓰러질 듯하였고, 밥도 제대로 먹을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보살은 우연히 잡지 한 귀퉁이에 실린 신행수기를 읽고 생각했습니다. '아, 기도를 하면 살 수가 있겠구나. 내가 매달릴 곳은 기도뿐이다.' 보살은 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로 가피를 받은 분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본격적으로 대다라니 기도를 시작했다. 그 때가 1995년, 쇠약해질대로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엄마없는 아이들을 만들 순 없다.'는 일념으로 이를 악물고 기도를 했습니다. 하루에 신묘장구대다라니 108편씩을 하루도 빼놓지 않고 계속했습니다. 처음 대다라니 기도를 하던 때, 보살의 머릿속에는 온통 '나는 왜 아픈 걸까?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나?'라는 의문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어린 남매를 제대로 보살피지 못하는 엄마라는 죄책감과 함께 자신에게 일어난 힘겨운 일들에 대한 의문들로 머릿속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평소와 다름없이 머릿속에 가득한 생각들을 품은 채 기도를 올리는데, 눈 한 번 깜빡하는 순간에 한 장면이 보였습니다. 누군가와 악다구니를 쓰며 몸싸움을 벌이고 있는 보살 자신의 모습이 보였고, 상대를 밀쳐 그 사람을 해코지하는 자기 모습을 보았습니다. 바로 그 때 늘 머릿속을 맴돌던 '왜?'라는 의문이 일순간 사라졌습니다. '전생의 그 업보로 내가 이렇게 힘든 고통을 겪게 되었구나.' 이를 깨닫고나자 보살은 맑은 정신으로 기도에 집중을 할 수 있었고, 어디에도 끄달리는 것없이 거침없이 기도정진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온 몸에 열이 오르는 것을 간신히 잠재우고 잠이 들었는데, 검은 형체를 한 사람이 난데없이 달려와 보살의 가슴팍을 누르며 숨도 못 쉬게 콱 누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억센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실랑이를 하다가, 순간적으로 '관세음보살님'을 외치며 힘껏 뿌리치자 검은 형체는 한 쪽으로 내동댕이쳐지며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보살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부처님의 가피를 받고 있다는 생각에 초연해지는 것을 느꼈다고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업장소멸의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몸속에 작은 희망과 용기가 솟아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고 있을 때, 집안에 불행의 그늘이 닥쳐왔습니다. 설계사무소에서 일하던 남편이 어느날 갑자기 휴직하게 되면서부터 가세가 점점 기울기 시작하였고, 청각장애를 가진 딸은 세상의 편견과 맞서며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또 착하기만했던 아들은 딸교육에 신경을 쓰느라 정성을 쏟지않았더니 질이 좋지않은 친구들과 어울려 학교공부를 등한시하며 속을 썩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집안에 우환이 생기자 감로행 보살은 더욱 더 기도에 매달려 어려운 시간들이 빨리 지나가고 가족이 모두 원만해지기를 발원했습니다. 매일 대다라니 108편을 독송하며, 아미타불과 지장보살님께도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묘한 것은 가족에게 꼭 필요한 생활비는 반드시 생겨났다는 점입니다. 남편에게 단편적인 일거리가 생기거나 누군가가 고맙다고 하면서 사례금을 주는 등.... 보살은 잠자는 시간도 아껴가며 기도정진에 온 힘을 쏟았고 , 차츰 신이한 현몽들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기도를 하고 보살앞에서 누군가가 옷을 벗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더럽고 지저분해 보이는 옷들을 하나, 둘 벗기 시작하는데, 자세히 보니 남편이 평상시에 입던 옷들이었습니다. '아, 대다라니 기도로 남편의 업장을 소멸시켰구나.'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 뒤로도 몇 번 더러운 옷가지들을 벗어놓는 남편의 꿈을 꾼 후로 보살의 남편은 설계일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딸이 대학입학 시험을 치기 전에, 감로행 보살은 평소처럼 신묘장구대라나니기도에 열중하였는데, 입시기도가 끝나갈 때쯤, 기저귀를 목까지 길게 차고 앞서가는 딸아이의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기저귀가 너무나 더러웠습니다. 보살은 딸을 뒤쫓아가서 "얘, 이게 뭐냐."하며 기저귀를 쑥 빼주는 찰나에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꿈에서 깨고나서도 어찌나 속이 후련한지 딸아이의 업장소멸을 대신 해준 것 같은 현몽이 참으로 신기하고 묘한 느낌이었습니다. 물론 딸은 대학에 합격하여 열심히 디자인공부를 하였고, 졸업후 청각장애인으로는 드물게도 정상인들이 근무하는 디자인회사에 입사하여 실력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보살은 기도 밖에 모르는 세월들을 우직하게 살아오는 동안, 이루 말할 수없을만큼 많은 부처님 가피를 받게 되었습니다. 아무 이유없이 힘이 빠지고 기력이 쇠하였던 보살은 차츰 기운을 되찾아 불교신행연구원에 자원봉사를 다닐 정도로 몸이 회복되었으며, 건설회사에서 정년퇴직을 한 남편은 지인들의 도움으로 설계 및 감리일을 꾸준히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학교공부에 소홀해 속을 썩이던 큰아들은 마음을 바로잡고 대학원에 진학하여 지금은 한 반도체회사의 본부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늘 가슴에 남던 작은딸 역시 성실한 남편을 만나 예쁜 손녀를 낳고 알토란 같은 가정을 꾸리며 행복하게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두웠던 감로행 보살의 가정에 이런 행복과 희망이 찾아든 이유는 지난 20년동안 한 눈팔지않고 오직 앞만보며 기도했던 결과였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와도 '나는 기도하는 사람이요, 불보살님과 같이 한다.'는 생각을 하면, 없던 용기도 솟아나며 모든 일에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꾸준히 기도하면 '부처님의 가피로 곧 밝은 날이 올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이 가슴가득 차오르게 됩니다. 만약 대다라니를 하여 가족과 자신이 가피를 입었다면 불보살님의 은혜를 갚고자하는 마음, 불보살님을 잘 모시며 살겠다는 결심을 하며 살아야합니다. 한 발 더 나아가 중생구제라는 대원을 향해 정진할 것을 다짐하고 , 대다라니 기도가 가져다 준 행복의 힘을 어려움에 처한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눌 것을 발원해야합니다. 이 감로행 보살처럼, 많은 불자님들이 대다라니 기도를 통하여 업장소멸과 함께 무한한 부처님의 가피로 충만하기를 두 손 모아 축원드립니다. 출처: 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법 우룡큰스님, 김현준 저, 도서출판 효림 ............................................................................................................... 106. 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로 오랜 원혼귀를 천도한 진하스님 다음의 이야기는 속리산 법주사에 실제했던 일로, 대은(大隱, 1899~1980)스님의 젊은 시절에 진하(震河:1861~1926)스님께서 직접 들려주신 이야기입니다. 1800년대 초에 한 궁녀가 법주사로 왔다가 잘 생긴 비구스님을 보고 한 눈에 반하여 짝사랑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궁녀와 스님이라는 신분때문에 혼자서 고민만 하다가, 밤중에 방으로 찾아가서 스님의 품으로 뛰어들어 유혹을 하였습니다. "청정비구가 어찌 여인네와 사랑을 나눌 수 있단 말이오. 썩 물러가시오!" 스님의 단호한 거절에 가슴이 산산이 찢어진 여인은 한을 품고 나무에 목을 매달아 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원혼귀가 된 그녀는 매일 밤마다 스님을 찾아갔고, 얼마뒤 스님은 온 몸이 노랗게 되는 황열병에 걸려 죽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원혼귀는 법주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 뒤로도 얼굴이 잘 생긴 젊은 승려가 오기만하면 노랗게 뜨는 황열별에 걸려 죽게 만들었습니다. 약 백년가까이 법주사 승려들은 황열병에 걸려 죽는 공포에 떨었고, 이것을 막기위해 1년에 한 번씩 각시와 총각놀음의 연극과 함께 큰 재를 베풀었지만 뚜렷한 효험은 없었습니다. 1911년, 당대의 대강사로 유명한 서진하(徐震河)스님이 금강산 신계사에서 속리산 법주사 주지로 옮겨왔습니다. 어느날 스님이 경을 보고 있었는데, 비몽사몽간에 젊은 여인이 가슴을 파고들며 속삭였습니다. "스님과 한 몸이 되고 싶습니다. 저의 원을 풀어주세요." '이상하다. 왜 이런 꿈을 꾸었지?' 그 여인은 비몽사몽간에 여러 차례 찾아들었고, 스님의 얼굴은 차츰 외꽃이 핀 듯이 노래지기 시작하더니 맥을 출 수가 없었습니다. '아하, 여인의 이와 같은 장난때문에 스님들이 황열병에 걸려 죽은 것이로구나.' 진하스님은 곧바로 대웅전으로 나아가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외웠습니다. 잠자고 먹는 시간외에는 끊임없이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외웠고, 그렇게 삼칠일(21일)이 경과하자 그 원혼귀가 말했습니다. "스님, 저는 떠나갑니다. 그 동안의 허물을 용서하소서." 여귀가 떨어져 나갔고, 스님의 몸은 저절로 완쾌되었으며, 그날 이후로 법주사에는 황열병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합니다. 한을 품고 죽은 원혼귀의 보복은 참으로 무섭습니다. 이 이야기에서처럼 황열병에 걸려 죽은 까닭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게되면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됩니다. 다행히 그 귀신이 도력있는 진하스님께로 다가왔기에 스님은 그 까닭이 한맺혀 죽은 원혼귀때문임을 알아차렸고, 곧바로 법당으로 나아가 신묘장구대다라니 21일 기도를 행함으로써 원혼귀를 천도할 수 있었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정말 까닭을 알 수 없는 장애가 찾아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로 그러한 때에 포기하지말고 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를 열심히 해보십시오. 만약 그 까닭이 영가때문이라면 천수관음의 가피로 그 영가는 천도가 될 것이요, 보이지 않는 지난 세상의 업때문이라면 그 업들이 녹아내려 모든 장애가 사라질 것입니다. 출처: 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법 우룡큰스님, 김현준 저, 도서출판 효림 107. 대한불교 조계종의 총무원장을 두 차례 역임하신 영암(1907~1987)스님은 20대 후반에 오대산 적멸보궁에서 백일기도를 하였습니다. 스님은 상원사의 노전에 기숙을 하면서 매일 마지를 지어 산길로 2km 밖에 있는 적멸보궁으로 올라가 공양을 올리고 정진하였습니다. 그런데, 스님이 기거했던 노전방에는 망자의 위패를 종이로 만들어 모셔온 것이 많이 있었는데, 스님은 어느 날 피로에 지쳐 험하게 잠을 자다가 영단을 발로 차버렸고, 영단이 무너지면서 위패들이 떨어져 뒹굴었습니다. 그 다음날 영암스님은 열이 40도나 오르고 너무나 춥고 떨려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학질에 걸린 듯 하였습니다. 대개 학질은 오후에 시작하는 법인데, 이번 학질은 오전부터 춥고 떨려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아, 기도를 하다가 이 무슨 장애란 말인가? 내가 영단을 고의로 무너뜨린 것도 아닌데.... 기도를 중단하고 병원으로 가야하는가? 아니다. 기도를 멈추어서는 안된다. 더욱이 이 것은 학질이라기보다 영가의 보복이 틀림없음이니...' 이렇게 판단한 스님은 죽을 힘을 다하여 적멸보궁으로 올라가서 신묘장구대다라니 1080편을 외웠습니다. 그야말로 죽을 각오로 하루 종일 외웠더니 씻은 듯이 학질증세가 떨어지고 완쾌하여 백일기도를 장애없이 잘 마쳤다고 합니다. 노한 영가의 보복은 생각이상으로 강합니다. 영가는 큰 병을 주거나 각종 장애를 일으켜 사람들을 힘들게 만듭니다. 그러나, 어지간한 영가의 보복은 신묘장구대다라니로 치유할 수 있습니다. 특히 1080편 용맹정진이면 능히 해결할 수 있으니, 꼭 참회하는 마음과 영가를 잘 천도해 주겠다는 자비심을 품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출처: 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법 우룡큰스님, 김현준 저, 도서출판 효림 108. 내가 불러들인 귀신의 천도 덕숭산으로 출가하여 오로지 참선공부에만 몰두한 스님이 있었습니다. 스님은 여러 선방을 찾아다니며 열심히 정진하였습니다. 그러나 참선공부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세월이 흐르자 조급증과 답답함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스님은 지리산 피아골로 들어가 정진하다가, 마음이 답답할 때마다 밖 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어떤 귀신이라도 좋다. 이리 와서 붙어라. 처녀귀신, 총각귀신, 아무 것이나 좋다. 와서 한 번 붙어봐라." 스님은 귀신의 능력을 빌려 무엇이든 시원스럽게 알아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가끔씩 소리치기를 3개월가량 하였을 때, 섬뜩 무엇인가가 다가오는 듯 싶더니 6.25 사변때 죽은 여자 빨갱이 귀신이 붙고 말았습니다. 육신이 없는 영가는 남의 몸에 붙으면 그 몸을 자신의 몸으로 착각하기 마련인데, 그 여자 삘갱이 귀신도 스님의 몸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 낮이고 밤이고 스님을 부려먹기 시작했습니다. 신통한 능력이라도 얻어볼까 하였던 스님의 본래 뜻과는 달리, 몸에 붙은 귀신은 끝없이 괴롭히기만 했습니다. 하루는 머리를 깎는데 귀신이 재미를 느꼈는지 계속 종용하였습니다. "야, 참 재미있네. 또 깎자." 이렇게 시작하면 귀신이 시키는대로 하루에 열 번도 넘게 머리를 밀어야 했습니다. 머리카락도 없는 맨들한 머리에 물칠을 하고 밀고 또 밀고... 또 귀신이 가자고 하는 곳은 어디로든지 가야만했고, 돌아오자고 하면 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 번은 지리산에서 덕숭산까지 밤낮도 없이 며칠을 걸어갔다가 잠깐 앉아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그야말로 스님은 고단하여 살 수가 없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또 빨갱이 귀신은 산속에 숨겨뒀던 공산당의 전단을 파내어 산골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도록 하였으며, 때로는 마을로 내려가 공산당의 주체사상을 스님의 입을 빌어 선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스님은 여러 차례 파출소로 잡혀가서 심한 문초를 당해야만 했습니다. 마침내 스님은 여자 빨갱이 귀신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결심하여 몇몇 스님들께 구병시식(救病施食)을 청했습니다. 그러나, 귀신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고, 나중에는 나(우룡 큰스님)에게까지 귀신으로부터 벗어날 방법을 물어왔습니다. "하루 종일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죽으라고 외우시오. 마음의 긴장을 풀면 안됩니다. 죽으라고 몰아붙여야지 적당히 외우거나 주저주저하면 그 귀신도 면역이 생겨 절대 떨어지지 않아요. 열심히 죽으라고 외우십시오." 그 스님은 그날부터 마지막 각오로 하루 종일 천수다라니를 외웠고, 며칠이 지나자 빨갱이 귀신은 차츰 애처로운 하소연을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스님이 그렇게 기도를 하니까 내가 자꾸 아파. 아파서 못 견디겠어. 스님, 그만 기도해." "나는 스님하고 같이 살고 싶은데 왜 스님은 나를 미워하면서 자꾸 가라고 해? 나를 미워하지마. 나를 보내려고 하지마." "스님, 나 어디가서 누구와 살아야 해? 스님을 떠나면 어떻게 살아?" 이렇게 귀신은 스님의 동정심을 불러일으켜 '가지 말고 있으라'는 말이 나오도록 하려 했지만, 스님은 흔들림없이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외우자, 여자 빨갱이 귀신은 마침내 작별을 고했습니다. "스님, 이제는 그만 가야되겠어. 스님이 계속 기도를 하니 내 몸이 아파서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그리고는 지극히 정성스럽게 삼배를 올리며 한 마디 축원을 남기고 떠나갔습니다. "스님, 부디 공부 잘 하셔서 성불하십시오."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연락조차 닿지않는 이 스님의 체험담을 통하여 우리는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귀신을 부르고 귀신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면 귀신이 찾아들게 된다는 것, 귀신은 사람의 몸을 자신의 몸으로 삼는다는 것, 귀신이 붙으면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움직이게 된다는 섯, 스스로 불러들인 귀신이지만 내보내기는 쉽지 않다는 것,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외우면 귀신이 스스로 견디지 못하여 떠나간다는 것 등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시작되었건 귀신의 장애를 겪고 있다면 스스로가 그 장애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기도를 해야합니다. 그 기도법으로는 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 외에도 광명진언, 지장기도 등이 좋음을 밝혀둡니다. 출처: 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법 우룡 큰스님, 김현준 저, 도서출판 효림 ........................................................................................................... 107. 애착때문에 아들을 괴롭힌 어머니 영가 20년 전, 나의 생질의 남편되는 생질서 원태에게 있었던 일입니다. 그는 아들 다섯, 딸 둘의 7남매를 둔 집안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복이 있고 덕이 있는 분이어서 온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고, 7남매인 아들딸과 사위 며느리 어느 누구도 아버지의 말씀을 거스르거나 '못합니다. 싫어요, 안됩니다'라는 반항 한마디없이 순탄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는 시어머니의 권위를 내세우며 며느리들을 자주 나무랐습니다. 처음 어머니는 맏아들과 같이 살았는데, 날이 갈수록 맏며느리와 자주 부딪혔고, 마침내는 맏아들과 등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욕을 하며 큰아들의 집을 나왔습니다. 둘째 아들의 집으로 거처를 옮긴 어머니는 또 다시 둘째 며느리와 부딪히면서 둘째 아들과 등을 돌렸으며, 셋째 아들집에서 또한 셋째 며느리와 부딪히면서 셋째 아들과 등을 돌렸습니다. 결국 어머니는 넷째 아들인 원태의 집을 찾았습니다. 어머니가 무엇을 어떻게하든 "안됩니다, 못합니다."라는 말은 하지않고, "예, 해보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라고만하는 착한 넷째 아들만은 자신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을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 당시, 넷째 아들 원태의 사정은 매우 좋지않았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B형 간염에 걸려 3년 동안 서울의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다보니 직장을 다니며 저금했던 돈은 물론, 전세금까지 모두 날렸습니다. 그런데, 집도 돈도 기운도 없는 원태로서는 살아갈 길이 막막하던 바로 이러한 원태의 집에 어머니가 오신 것입니다. 어머니는 이러한 아들 곁에 살면서 늘 생각했습니다. "아이고, 저 착한 것이 아프다고 하는데, 내가 만져줘야 할 건데.... 저 어질고 착한 것이 아프다는데, 내가 만져줘야지 ....." 바로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이것이 재앙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얼마 뒤 어머니는 외딴 집에서 넷째 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고, 가족들은 초상을 치렀습니다. 초상을 치른지 7일째 되는 날부터 밤만 되면 원태는 칼로 오장육부를 찢는 것과 같은 고통 속에서 앉지도 눕지도 못하고, 두 손과 두 무릎으로 방바닥을 기어다니며 벌벌벌벌 떨었습니다 더욱이 그 병은 참으로 이상하게 발작을 하였습니다. 낮에는 별로 아프지 않다가 초저녁부터 새벽까지의 밤에는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고, 그것도 1시간에 30분 정도씩, 머리가 아프고 오장육부가 아파 온 방을 기어 다니다가 30분 가량은 수그러들고, 30분은 발작을 하고 또 수그러지는 등, 밤이 새도록 시간대마다 30분 가량의 극심한 고통이 찾아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날이 새면 파김치가 되어 곯아 떨어졌습니다. 그 고통은 어머니의 49재를 마친 뒤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이 사실도 원태의 누나인 비구니가 알게되었고, 어디 가서 물어보니 '7일동안 기도를 해주고, 산소에 가서 시식(施食)을 해주면 괜찮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스님은 다른 비구니스님과 한 분과 함께 7일 동안 열심히 기도를 하고 산소가 있는 성주로 갔습니다. 그날 밤 피곤에 지친 두 스님은 잠에 떨어졌는데, 함께 기도를 한 비구니 스님이 꿈을 꾸었습니다. 하얀 옷을 입은 할머니가 아들의 방문 앞에 서서 이름을 부르며 애절히 호소하는 것이었습니다. "원태야, 원태야, 방문을 열어라, 내가 너를 만져주려고 하는데, 왜 방문을 걸어놓고 못 들어가게 하느냐? 네가 정히 문을 걸어놓고 못 들어오게 하겠다면 하는 수가 없다. 나는 문턱 밑을 파고 구들 밑을 파고 들어가서라도 너를 만져주어야한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할머니는 맨 손으로 문턱 밑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지나지않아 열 손가락이 터져 피가 흐르는데도 할머니는 이를 악물고 파란 독기를 뿜어내며 계속 문턱 밑을 파내려갔습니다. 그 모습이 얼머나 무서웠던지 비구니 스님은 한밤중에 집안의 모든 사람을 깨워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할머니는 아직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아들이 그 집에 있으면 계속 해를 입을 것이니 당장 떠나도록하고, 죽은 할머니에 대한 대책은 따로 세우도록 합시다." 그 말에 따라, 날이 새기가 무섭게 생질녀와 생질서인 원태가 나를 찾아와 방법을 물었습니다. "너희 부부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하루에 천수다라니 21편, 금강경 1편을 꼭 읽도록 하여라. 하루라도 그냥 넘어가서는 절대로 안된다." 그 뒤 부부가 꾸준히 기도하자 원태는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었고, 그들 내외는 꿈에서도 어머니의 모습을 보지않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원태의 손위 형님이나 형수들의 꿈에는 어머니가 자주 나타나 하소연을 했습니다. "원태 내외가 왜 방문을 걸어놓고 나를 못 들어오게 하는지 모르겠다. 너희들이 원태를 만나거든 방문을 열어 내가 들어갈 수 있도록 하라고 일러라." 많은 것은 아니지만 꾸준한 기도의 힘에 의해 어머니가 접근을 못하고 꿈에도 나타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금강경과 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를 한 지 1년 가까이 지났을 때 가족들의 꿈에도 어머니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 이야기에서처럼, 애착이 강한 사람이 죽어서도 애착을 버리지 못해 좋은 곳으로 가지 못하게되면, 사랑하는 가족들이 오히려 너무나 힘든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를 당하였을 때, 신묘장구대다라니를 21편 이상씩 외우면서 '좋은 세상에 태어날 것'을 축원하면, 천수천안관세음보살님과 신중들의 위신력으로 능히 천도를 이루고 새로운 생을 받을 수 있게됩니다. 부디 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를 통하여 나에게 장애를 안겨주는 영가만이 아니라, 부모님등의 은혜로운 사람들을 잘 천도해주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출처: 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법 우룡큰스님, 김현준 저, 도서출판 효림 ...................................................................................................................................... 108. 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로 견성의 기틀을 마련한 백용성 스님 3.1운동 당시 33인의 한 사람이었던 백용성(1864~1940)스님도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외워 큰 경지를 이룬 고승입니다. 유교 집안에서 태어난 스님이 불교와 첫 인연을 맺은 것은 1877년 14세 때의 일입니다. 꿈 속에서 부처님의 수기를 받고 불경을 보기 시작하였고, 남원 덕밀암으로 출가하였으나 부모님의 강한 만류로 집에 돌아와야 했습니다. 그후 2년이 지난 16세때 해인사로 찾아가 화월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정식으로 출가하였으며, 17세 때 의성 고운사의 수월스님을 찾아가서 소년답지 않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나고 죽음은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일입니다. 모든 것은 무상하여 날로 변합니다. 어떻게 생사도 없고 변하지도 않는 '나'의 성품을 볼 수 있습니까?" 그러나 수월스님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하지않고, 먼저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외울 것을 권했습니다. "지금은 숙업이 무겁고 장애가 많아 견성법을 너에게 일러주어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신묘장구대다라니를 부지런히 외우면 업장도 소멸되고 마음도 맑아져서 저절로 길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얼마 동안은 아무 생각말고 대비주만 외우도록 하여라." 수월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스님은 신묘장구대다라니를 10만번 외우기로 다짐했습니다. 9개월에 걸쳐 대다라니를 10만번 외워 마쳤을 때, 스님은 양주 보광사 도솔암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현듯 한 가지 의문이 솟아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산하대지와 삼라만상에는 모두 근원이 있다. 그렇다면 사람의 근원은 무엇인가?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근원은 어디에 있으며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이 의문을 일념으로 생각한지 엿새가 되었을 때 , 마치 깜깜한 방에 등불이 밝혀지듯이 그 근원을 확연히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뒤 용성스님은 '무'자 화두를 꾸준히 참구하여 확철대오하였으며, 일제의 대처불교에 대응하여 대각교운동(大覺敎運動)을 전개하고 역경사업에도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우리는 스님의 깨달음과 모든 활동에 10만독의 신묘장구대다라니가 힘의 원천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을 해야합니다. 신묘장구대다라니는 훌륭한 대자대비의 주문으로 그 능력과 가피력은 참으로 큽니다. 출처: 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법 우룡 큰스님, 김현준 저, 도서출판 효림 .......................................................................................................................... 109. 저는 관세음보살을 친견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6년전 아들이 20살 들던해 불의에 사고로 아들과 이별을 했습니다. 마음을 못잡고 방황하고 있을 때 친구의 소개로 ○○불교대학에 입학 했습니다.천수경을 배우러 다녔습니다. 그런데 법문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머리속에는 삶의 가치도 없고 오로지 아들 생각에 눈물이 마를날이 없었습니다.우연히 절에서 천도재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가슴이 찢어질 듯 아려 왔습니다. 그 후로, 저희 일가는 천도재 보고 눈이 띵띵 부어서 집으로 가는 것이 일과가 되어 버렸습니다. 부처님께서 저를 가엾게 여기셨든지 친구를통해 좋은 선배님을 알게 해주셨습니다.아무도 모르는 이곳에서 선배님들은 저의 힘이었습니다. 며칠 뒤 선배님이 수능 백일기도 한다고 같이 하자고 했어요.마침 둘째 아이가 고3이어서 같이 올리고 백일 기도를 했습니다. 백일을 매일 기도하고 절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저는 너무너무 힘들었습니다. 이제 오늘까지만 하고 내일부터는 다시는 안와야지 하면서 아침이면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또 법당에 와서 머리속이 하해지도록 절하고 기도했습니다.그런데 수능기도는 이름 뿐이고 매일 "부처님!우리아들 불쌍하고 가여운 자식 극락왕생하게 하소서!항상 그 기도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백일기도가 끝나고 둘째 아들은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기도했는데 기대에 못미치는 결과에 실망했는데, 입학식날 아들의 학교에 가보고 아! 이곳이 아들의 적성에 맞는 곳 이구나 라는 것을 느끼게 되고 부처님 감사합니다.관세음보살이라고 인사드렸습니다. 얼마후 먼저간 아들을 위해 천도 백일기도를 올렸습니다. 정말 기가 빠지도록 기도했습니다. 간절히, 아주 간절히 기도하다 울고 또 절하고 눈물 범벅 땀 범벅 아주 힘이 들 때는 부처님 저에게 힘을 주시옵소서 수십 번 외치며 아들의 극락왕생을 빌었습니다. 그렇게 백일 천도기도가 끝이 날 무렵 아침에 사시예불이 시작 되고 관세음보살 정근할 때 눈앞에 백색의 선녀 옷을 입고 아주 고귀하고 우아하고 경이로운 관세음보살님이검은 강보에 아기를 양손으로 세 명을 안고 웃고 서 계셨습니다. 헛 것을 봤나 싶어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습니다. 분명히 저를 보고 웃고 서 계셨습니다. 똑똑히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예불이 끝나고 정신이 없어 아무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뒤로는 이상하게도 그렇게 간절히 아들에게 극락왕생을 빌었던 천도 기도가 하기 싫었습니다. 그리고 그전처럼 아들이 그렇게 간절하게 여겨지지 않고 다른 가족을 위해 내가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주위도 하나씩 보였습니다. 그때는 그 분이 어떤 부처님인지 알지 못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백의관세음보살님이셨습니다. 그 뒤로 아무리 다시 한번 볼려고 애를 써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제가 지금까지도 아무리 둘러봐도 그렇게 자태가 고우시고 아름다운 분은 보지 못했습니다. 말로는 설명을 못할 정도입니다.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끝으로 기도 중에 너무 힘이 들어 모든 투정을 아무 말 없이 웃으면서 받아주고 오늘에 나를 있게 해준 선배님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성불하십시요.나무 대자대비 관세음보살._()_ 출처: 다음 50대이상 불자모임카페 지혜성님글 옮김 ......................................................................................................................................... 110. 병명도 모르는 불치병을 관세음보살 염불로 치유하다. 쌍계사 주지 성조(性照)스님은 정성이 지극하면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을 오래 전 실감했다. 미주지역에서 포교를 할 때다. "병명을 모르니 투약도 할 수 없고 회생가능성은 20%에 불과하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알리라'고 할 정도로 사경을 헤맬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의사를 믿고 편안히 있었는데...' 눈 뜨려면 10여분 용을 써야할 정도로 힘겨울 때 '나는 불제자다. 부처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병원 침상에 누운 채 관음기도를 시작했다. '내가 잠을 자서 뭐하겠나? 죽을 놈이 잠을 자서 뭐하나? 내일을 위해 에너지를 충전하기위해 잠을 자는 것인데, 죽을 놈이 잠은 자서 뭐하나'는 생각이 들어 기도를 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을 부르면서 "저에게 다시 한 번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면 앞으로 더 열심히 수행하겠습니다.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그렇게 밤낮으로 기도하기를 6일 째 기적이 일어났다. 생존가능성이 20%밖에 안된다고 말하던 의사가 나보다 더 좋아하는 것을 보았다. 그 이후 "기도는 결코 헛되지 않다. 절박한 만큼 정성을 다하면 이루어진다. 절실하면 불보살의 가피가 있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출처: 불교신문 2011.01.22. 김선두 기자님 기사중 옮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