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입시가 무엇이길래 (임창순 작가)
1974년부터 1976년까지 중학생이었다. 그당시 중학생들의 가장 큰 숙제는 어느 고등학교를 들어가느냐였다. 즉 명문고등학교냐 비명문고등학교중 하나였다. 난 대전에서 살았으며 대전이 우리나라 5대도시(서울 부산 대구 광주 인천)가 아니었으므로 전기 후기로 나누어 선지원 후시험 제도였다. 그때 5대도시는 1973년부터 선지원 후시험제도를 페지하고 연합고사를 보면 합격자들이 추첨하여 배정된 고등학교를 들어갔다.
중학교 1.2학년 시기는 그냥 그렇저렇 넘어갔다. 3학년 되니 분위기가 확 바뀌었고 담임을 비롯한 교과목 교사들은 학생들이 공부에 전념 하도록 무섭게 다루었고 일찍 등교하여 저녁에 집에 가야했다. 수시로 고입 모의고사를 보아야 했다. 당시 고등학교는 일류 이류삼류로 구분되었다. 상위권 학생들은 일류고등학교로 중위권 학생들은 이류고등학교로 하위권 학생들은 삼류고등학교로 지원하였고 치열한경쟁 결과 떨어지면 후기고입시를 보았고 또 떨어지면 타지역 고등학교로 가던가 1년 재수를 하였다.
학생들의 최고 목표는 일류고등학교를 가는 것이었다. 그것도 전기고교의 일류고중 일류고였다. 그 학교에 들어간 학생들은 지역사회에서도 보이지 않는 대접을 받았고 선배들도 빵빵하여 정계 재계 학계들에서 잘 나갔다. 중학교 평가는 일류고중 일류고등학교에 들어가는 숫자였다. 들어가면 인사차 모교에 와서 후배들에게 이렇게 공부해라고 일러주었다.
나는 공부를 잘하지 못해 이류고교로 원서를 내었고 시험보아 합격하였다. 학생들은 공부보다 노는데 더 열을 올렸다. 물론 하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교사들은 공부하라는 소리만 계속 하였지만, 더 이상 공부 열심히 하라는 소리를 안하기로 하여 포기를 하였다. 어느 교사는 일류고교 들어간 학생들 생각하며 더욱 더 열심히 해야할 것 아니냐고 꾸짖었다. 나도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신통하지 않했다. 그러나 꾸준하게 하였다. 3학년이 되어 계속 매진했고 마침내 원하는 대학에 들어갔다.
대학에 들어가니 같은 과(당시 계열별)에 다니는 학생들을 만나보았더니 중학교 동창들이 많았다. 일류 고등학교 출신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류고등학교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반갑게 맞이해주지 않했고 자기네들 끼리 어울려 다녔다. 친구라기 보다 그냥 룸메이트 관계에만 머물렀다. 그들이 나에게 그래 열심히 공부했구나 우리랑 다시 어울리게 되어 반갑구나 했어야 하는데 그런 말은 없었고 내면적으로는 무시하는 느낌을 들었다. 나보다 더 공부 잘했느냐 그건 아니었다. 물론 잘하는 동창도 있었지만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역사가 짧은 병설 사립 중고등학교였고 중학교도 같은 재단 중학교를 다녔다. 교장도 같은 사람이었다. 인지도가 낮은 고등학교라서 학교측에서는 공부 잘하는 학생들을 유치 하려고 애를 썼다. 중학교 3학년 학생중 가난하고 공부잘하는 학생에게 장학금 주는 조건 제시를 하였고 교사들은 대전 이외 지역 금산 논산 연기 부여 천안에 있는 학교를 다니면서 장학금을 무기로 대대적으로 홍보를 하였다. 그때 같은 반 학생 1명이 지원하였고 수석합격은 부여 모 중학교 출신 학생이 되었다.
중학교 졸업후 동창회라는 것을 한번도 않했다. 이유를 생각했보니 공감대가 없는것과 도시라서 짐작했다 . 졸업후 일류 이류 인문계 실업계(전문계)고등학교로 나뉘어 들어갔는데 동창회가 필요하겠는가. 유유상종이라고 만나봐야 어색하기만 할 뿐이다. 1학년 3월 하교길에 최고 명문고등학교 들어간 동창들이 학교로 들어온걸 보았고 그중 한 학생과 마주쳤다. 서로 인사도 없이 바라만보고 헤어졌다. 그 학생은 같은 반이었고 친하게 지냈다. 학교도 다르니 친구관계가 끝났다고 볼 수 있었다 농촌 중학교는 동문조직이 잘 하고 있다. 한동네에서 어린시절부터 자랐고 같은 초등학교 출신이다 보니 공감대가 있어 어느 고등학교를 가던간에 계속 어울릴 수 있었다.
당시 입시제도는 바로 밑 후배까지는 기존 입시제도로 들어왔고 그다음부터는 연합고사제로 바뀌었다 이후 모교는 더욱 발전하여 많은 대입 합격자를 배출하여 명문고교가 되었다.
나도 학생신분에서 벗어나 사회인이 되었고 많은 시간이 흘러 동창들을 만나보니 중견 사회인으로 선배들중에서는 국회의원 신부 대학교수군 장성 등 다양한 직업으로 그 역할을 잘하고 있다.
몇 달전 개교 50주년 동문 기념식에 갔더니 너무나 가슴이 벅차 올랐고 너무 자랑 스러웠다. 시장 교육감 구청장등 사회 저명인사가 내빈으로 참석 하고 많은 동문들이 자랑스럽게 어울렸다.
중학교 3학년 나이는 15-16세 정도이다. 그래 2류 3류 전문계 고등학교 갔다고 해서 인생의 낙오자로 단정짓는건 위험한 발상이다. 물론 공부 열심히 해서 사회에 나가는 것은 당연하다. 사회에 나와보니 공부만 가지고 사는게 아니었고 다양한 요소가 있다 멀리 내다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같은 동창들중에는 잘나가는 동창들도 많이 있다.
어느덧 내나이 60이 넘었고 추억이다. 이런 글은 쓴다는 것 어리석지만 마음속 응어리가 있기 때문이며 잊어야 하는데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 누구에게 00고등학교 나왔다고 말해봐야 의미 없다. 물론 그들도 마찬가지이다. 고등학교 졸업한지 벌써 42년이 흘렀고 추억만 남아있다. 그들과 아무 관계 없으며 만나기 싫다. 현재 만나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싶을 뿐이다. |
1월달 산문 부문에는 임창순 작가의 '고교 입시가 무엇이길래' 란 한 작품만 카페에 게재되었다. 매번 카페에 올라오는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수필에서 가장 중요한 무형식의 형식을 지키지 않는 점이다. 글이 아무리 좋아도 전개방식에서 서두와 본론과 결론을 지키지 않으면 글을 읽어도 눈에 들어오지 않거나 마음에 차지 않는다. '고교 입시가 무엇이길래'란 작품도 이 점을 간과해서 글을 평이하게 나열하는데 그친 점이 아쉽다.
임창순 작가의 '고교 입시가 무엇이길래'란 작품은 삶을 너무 서열적으로 바라보고 글을 전개한 점이 아쉽다. 비록 고교 시절에는 서열주의로 공부를 했더라도 인생의 결과는 달라진다는 점과 사회는 다양성이 함의된 구조임을 깊게 사유하지 못했다. 즉 고교 시절에는 어쩔 수 없이 서열주의로 공부를 하였더라도 나중에 직업 선택이나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다 성적의 서열과 인생은 어떠하다는 삶의 당위성을 관조적으로 바라보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따라서 이번 1월달 산문 부문의 추천 작품은 없는 것으로 정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수고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