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박물관 아카데미] 동아리 두번째 활동
1.장소 : 북촌일대 및 한옥역사관
2.시간 : 03월 16일(목) 13시30분
3.참여 회원 :김병추,김창영,문난희,
박병옥,송호출,오관석,정정옥,조병규,
최병규,최정란,최현숙(가나다순)
4.활동내용 :
회원간 인사-- 서울공예박물관 교육동 전망대 휴식공간(안동별궁터)-한국근대불교문화기념관-조선어학회터-윤보선 가옥-백인제 가옥-유심사터.북촌갤러리-석정보름우물-한옥역사관-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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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아카데미 동아리에서는 북촌일대 한옥역사관에서 두번째 활동이 있었습니다.
이번 북촌일대 탐방은 팀장님께서 준비하신 12p분량의 자료집으로 참여회원들이 앉은 순서대로 한단락씩 먼저 읽고 팀장님의 後 보충설명 형식으로 1시간 넘게 이론공부를 하며
-첫째:북존은 왜 권세가들의 터전이
되었을까?
-둘째:갑신정변의 주역들이 북촌 도련님인 까닭은 무엇일까?
-셋째:3.1운동의 주역들은 왜 북촌에 모여 살았을까?
-넷째:정세권은 누구인가?
-다섯째: 북촌의 흥망성쇠 이유는 무엇일가?에 대한 주목할 점을 인지한 후 탐방에 나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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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옛 '안동별궁 터' 인 만큼 서울공예박물관의 높은 담장은 색깔의 다름으로 옛 돌과 지금의 돌이 어우러져 있씀을 알수 있습니다.이를 살펴보며 윤보선 길 31‐6길을 걸어 한국근대불교문화기념관으로 향해 볼까요?
1. 한국근대불교문화기념관
(재단법인 선학원)
선학원은 일제강점기에는 항일 '민족불교의 성지'로 광복 후에는 왜색불교를 청산하는 '정화불교의 산실'로 현 '대한불교조계종의 모태'라고 합니다.
1934년 설립된 선학원은 현재 조계종 1만2천여 명 스님 중 선학원 소속은 1300여 명으로 추산될 정도로 상당한 규모이며,
조계종 안의 또다른 종단이라할 만큼 거대한 조직입니다.서울 종로구 안국동의 중앙선원을 비롯해서 서울칠보사.부산해운정사.대전 복전암.대구서봉사 등 전국에 5백30여개의 분원(사찰)을 갖고 독립적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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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윤보선 家
윤보선 전 대통령의 장남인 윤상구씨가 거주하고 있어 들어가 구경할 수가 없는 이 가옥은
윤보선 전 대통령이 살았던 집으로, 고종 7년(1870)에 건립되어 윤보선 전대통령의 부친 치소(致昭)공이 1910년경 매입한 것입니다. 윤보선 전 대통령은 7∼8세경에 이곳에 살기 시작하였으며 대통령으로 재직할 당시에도 청와대가 아닌 이곳에서 집무를 했고, 1910년 이후에는 박영효가 일본에서 귀국하여 잠시 머물기도 했지요.
이 집은
서울의 상류민가로서 비교적 넓은 대지 안에 바깥사랑채, 안사랑채, 안채, 대문 및 행랑채, 창고 등을 갖추고 있습니다. 각 건물은 외형상으로는 한옥같이 보이나 세부적인 것은 중국 청나라 말기 수법을 보이는데요.
이는 윤보선 전 대통령이 상해 임시정부 시절 중국에서 보고 느낀 중국적인 양식을 가미한 것으로 거주 당시의 특징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합니다.
● 아래의 GIF파일은 윤보선 家 내부입니다.
감상해 보시고 바로 근처 조선어학회 터로 발길을 옮기겠습니다.
3. 조선어학회 터
이곳은 주시경(1876~1914)선생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1908년 국어연구와 발전을 목적으로 창립한 국어연구 학회의 맥을 이은
조선어학회가 있던 곳입니다.
일본은 민족말살 정책을 시행하기 위해
조선어 교육을 모두 폐지하고,
일어를 사용하게 하며 창씨개명을 강요했습니다.
이처럼 일본이 우리의 역사와 민족정신을 말살하려 하자,
1931년 조선어학회는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선어학회의 역사는1921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국어학자 주시경의 제자인 이희승과 최현배, 장지영, 이윤재 등이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 '조선어 연구회'를 조직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한지 480년을 맞이했던 1926년 음력 9월 29일을 '가갸날'로 정하고 기념식을 개최했습니다.
주로 국어에 대한 연구와 강연을 했으며
1927년부터 '한글'이라는 잡지를 펴내고,
1929년에는 '조선어사전'을 편찬하기 시작합니다.
이어 1931년 1월,
명칭을 '조선어학회'로 바꾸며
한글을 지키고 연구하는 데 앞장서는 등
일본의 식민지배 정책에 맞서
더욱 활발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그러던 중 1942년 10월, 일본이 조선어학회를 해산시키고
관련 인사들을 체포하는 '조선어학회 사건'이 발생합니다.
일본은 어떤 학생이 쓴 일기장의 '오늘 국어(일본어)를 한마디 썼다고
선생님한테 꾸지람을 받았다'는
내용으로 트집을 잡아 학생을 혼낸 정태진 선생을 체포합니다.
일본은 조선어학회 사전편찬위원이었던
정태진 선생을 매우 모질게 고문했으며,
결국 정선생에게 조선어학회는 민족주의 단체로 독립운동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는
거짓 자백을 받아냈습니다
이를 빌미로 일본은 1943년 4월까지
조선어 학회 33명을 검거해 고문을 자행했고 학회원 중 2명이 고문 끝에 사망하게 됩니다.
이로써 조선어학회는 활동을 중단하게 됐지만, 해방 후 1945년 9월 8일,
일본에게 빼앗겼던 원고가 서울역 창고에서 발견되면서
최초의 우리말 사전인 '큰 사전'을 다시 편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1947년부터 1957년까지 총 6권의 '큰 사전'을 펴냅니다.
우리 민족의 얼이 담긴 우리 말을 지켜내지 못했더라면 오늘날 우리의 역사는 어땠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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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학회 터 탐방 후 정독도서관을 뒤로하고 내리막 길을 따라 백인제 가옥으로 이동 하겠습니다.
4. 백인제 가옥
북촌 가회동에 위치한 백인제 가옥은 근대 한옥의 양식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는 대표적인 일제강점기 한옥입니다.
복촌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2,460재곱미터의 대지 위에 당당한 사랑채를 중심으로 넉넉한 안채와 넓은 정원이 자리하고 가장 높은 곳에는 아담한 별당채가 들어서 있습니다.
전통적인 한옥의 아름다움을 유지하면서도 근대적 변화를 수용하여,건축 규모나 역사적 가치 면에서 북촌을 대표하는 건축물입니다.
●● 아래의 영상은 이곳 영상실에서 상영중인 것으로 백인제 가옥의 변천사와 특징들을 감상해보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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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제 가옥을 보고 나오는 길에 반가운 최병규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일행과 같이 재동초교 후문쪽 골목길을 지나며 락고재, 舊 서울시장공관의 숨은 이야기를 필두로 계동길을 향해 동행하며 해설을 해주셨습니다.
5. 배렴 가옥
계동길로 나와 언덕길을 향해 걸으면 아담하고 귀여운 한옥 한 채가 나옵니다.
화가 배렴(1911~1968)이 1959년부터 생애 말년까지 살았던 집으로 배렴이 살기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영상민속학자이며 국립민속박물관 설립자인 송석하(1904~1948)
가 살았던 곳이지요. 그는 1937년에 이곳에 입주하면서
조선민속학회의 사무실로도 사용했다고 하네요.
특히 이 가옥은 ㄱ자형 안채와 ㄴ자형 바깥채가 마주보는 튼ㅁ자형 한옥이며 1936년에 지었다고 추정합니다.
배렴 사후 여러차례 소유주가 바뀌었다가 2001년 서울주택공사가 매입 후 2016년까지 게스트하우스로 사용하다가 현재는 문화예술공간으로 시민에게 개방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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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유심사 터. 북촌갤러리
배렴가옥을 나와 우측 골목 초입에는 3.1운동 유적지 유심사 터와 그 골목 위에는 북촌갤러리가 있습니다.
최병규 선생님 지인(무술영화배우 왕호 님)을 우연히 만나 모두 다같이 북촌갤러리로 향했습니다. 주인장인 서양화가 필봉 임춘택 화가의 작품감상과 휴식을 취하고 기념사진도 촬영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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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의 쉼을 끝내고 다시 계동길로 나와서 석정보름우물터로 가보겠습니다.
7. 석정보름 우물터
북촌주민들의 중요 음수원이던 석정보름우물은 15일 동안은 맑고 15일 동안은 흐려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1797년 중국에서 압록강을 건너온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인 주문모 신부가 1801년 새남터에서
순교하기전까지 계동 최인길의 집에 숨어 지내면서 조선 땅에서 첫 미사를 봉헌할때 이 우물물로 세례를 준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자 그럼 이 우물터 옆을 지나 골목길 좌측에 위치한 한옥역사관으로 이동해 볼까요?
8. 한옥역사관
북촌한옥역사관은 종로구 계동 4길 3에 있으며, 한옥을 개조한 공간에서 북촌 역사를 살펴 볼 수 가 있습니다.
1920~1930년대 ''조선집''이라 불린 소형 한옥과 이를 공급하면서 당시 ''건축왕''이라 불렸던 기농 정세권 선생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한옥역사관의 전시는
북촌민족문화의 방파제, 전통한옥과 도시형 한옥, 기농 정세권 등 세 개의 주제로 구성되어있습니다.
북촌, 민족문화 방파제
1920년대 들어 일제는 한양 남쪽에 살고 있던 일본인의 생활권을 북쪽으로 옮기고있었는데요.
이에 맞서 정세권은 '일본인들이 종로에 발붙이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는 신념으로, 익선동을 시작으로 지금의 북촌마을인 가회동, 삼청동 일대를 조선집 마을로 만들었습니다.
그가 세운 ‘건양사’는 성북동, 혜화동, 창신동, 서대문, 행당동 등지로 조선집을 확대하였고,
그의 사업은 경제적인 것이었겠지만 더 중요한 건 문화적 의미였습니다. 조선집은 비록 국권은 침탈되었으나 일상을 지켜내고 있다는위로이자 자긍심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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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한옥과 도시형 한옥
정세권이 지은 집은 전통적인 한옥과 여러 면에서 달랐습니다. 우선 기존의 양반집을 5, 6개로 쪼개 도시형 조선집을 지었는데요. 지금의 도시재생과도 비슷한 시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집을 짓는 재료도 달랐습니다. 전통 한옥은 기둥과대들보, 서까래 등 크고 좋은 목재를 사용해 세심하게 다루는 과정을 거쳐 지었습니다.
반면에 이 새로운 집들은 규격화된 목재를 사용해 비용을 절감하고, 서까래 길이를 짧게 해 처마 길이는 줄이는 대신 함석 차양을 달아 비바람과 햇빛을 피하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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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집 짓기, 조선물산운동, 조선어학회 지원까지
그가 한옥을 지어 ‘집장사’만 한 것은 아닙니다. 1920년, 시작됐다가 한풀 꺾여있던 조선물산장려운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섰지요.
그는 소비중심 운동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조선물산 생산자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조선물산 생산과 소비를 장려하며 기관지를 발행하였으며, 낙원동에 조선물산장려회관을 지을 땅을 기부하고 건물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정세권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조선집 짓기,조선물산운동, 신간회 지원 등을 거쳐 그는 조선말(한글)에 주목했어요.
당시 일제는 내선일체를 내세우며 우리말과 한글을 탄압하고 있었고 그런 와중에 ‘조선어사전’ 편찬에 들어간 조선어학회에, 맘 놓고 일할 수 있는 2층 양옥을 지어 기증한 것도 바로 그였습니다.
정세권은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경찰서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이듬해에는 대부분의 재산을 (서울 자양동 일대 )몰수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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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역사관 탐방을 마치고 계동
길에 있는 여러 상점들 중 가장 오래된 문구점인 중앙상회(중앙고교 정문 옆,since1960)를 끝으로 박물관아카데미 3월 활동을 마무리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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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마무리
* 성심을 다해 해설해 주신 최정란, 최병규선생님
* 바쁘신 일정 중에도 한시간 넘는 이론 학습에 참석하신 열정 오관석, 정정옥선생님 반가웠습니다.
* 끝까지 탐방길 지키신 인내와 의리의 송호출 선생님 반갑고 수고하셨습니다.
* 신입회원 김창영선생님 첫 탐방 같이해서 행복했고 예전부터 우리팀이었던것 같았어요.
* 박병옥선생님 탐방 당일날 바로 저희 팀원 돼심에 다시 한 번 환영합니다.
* 최현숙 선생님 길가에 있는 가게로 달려가 일행들에게 고소하고 맛있는 즉석간식(붕어빵) 안겨주심에 감사드리구요
* 든든하고 우리팀의 기둥같은
김병추, 조병규선생님 덕분에 즐거운 시간보냈습니다.
●다음 4월 탐방은 안양사,김중업건축박물관에서 건강한 모습으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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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문난희
-옮긴이:문난희
첫댓글 나날이 깊이 있게 발전하여 나아가는 박물관 아카데미 회원들의 모습들을 접하니 감동이 앞섭니다. 올려주신 내용, 감사하는 마음으로 잘 읽어 보았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윤보선가 는 고종 때인 1870년경에 민대감이 지은 집으로 안채, 안사랑채, 바깥사랑채(산정채), 대문채, 별당, 광채, 부속채 등을 포함한 민가로써는 최대 규모인 99칸의 대저택으로 건축되었다. 이후 고종이 민대감의 집을 매입하여 일본에서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돌아왔으며 영혜옹주와 혼인한 금릉위 박영효(1861-1939)에게 하사하여 머물게 하였다. 이후 한차례 주인이 바뀌었고 1910년대에 윤보선 전 대통령의 부친 윤치소(1871-1944)가 매입하여, 이후 4대째 윤씨 일가가 살고 있다. (윤보선 가옥, 문화원형백과 한국의 고택, 2008, 한국콘텐츠진흥원)
5. 배렴 가옥 설명 내용 중 일부 오류가 있어 바로 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국립민속박물관 설립자는 송진하' 가 아니고 '국립민족박물관' 석남 송석하 선생이 맞습니다.
1945년 '국립민족박물관'으로 설립하였다가 '1979년 '국립민속박물관'으로 개칭합니다.
네네 회장님 감사합니다.
맞습니다.~오타가 있었네요~정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