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실록 55권, 숙종 40년 8월 9일 무인 2번째기사 1714년 청 강희(康熙) 53년
송조 육현을 문묘 대성전 안에 승배하다
송조 육현(宋朝六賢)을 문묘(文廟) 대성전(大成殿) 안에 승배(陞配)하였다. 도국공(道國公) 주돈이(周敦頤)는 위공(魏公) 복상(卜商)의 아래에 봉안(奉安)하였고, 예국공(豫國公) 정호(程顥)는 영천후(穎川侯) 전손사(顓孫師)의 아래에 봉안하였으며, 낙국공(洛國公) 정이(程頤)는 도국공 주돈이의 아래에 봉안하였다. 그리고 신안백(新安伯) 소옹(邵雍)은 예국공 정호의 아래에 봉안하였으며, 미백(郿伯) 장재(張載)는 낙국공 정이의 아래에 봉안하였고, 휘국공(徽國公) 주희(朱熹)는 신안백 소옹의 아래에 봉안하였다. 전우(殿宇)는 개조(改造)하지 않고 상탁(牀卓)과 교의(交椅)의 제도를 약간 줄여서 추이(推移)해 봉안하였으며, 평명(平明)에 진하(陳賀)하고 반교(頒敎)하였다. 임금이 숭릉(崇陵) 능 위에 석물(石物)을 파손(破損)한 작변인(作變人)을 아직 체포하지 못하였다 하여 특교(特敎)를 내려 좌우 두 포도 대장(捕盜大將)을 추고(推考)하게 하고, 다시 신칙(申飭)을 더하여 꼭 체포하라고 하였다.
○陞配宋朝六賢於文廟大成殿內。 道國公 周敦頣奉於魏公 卜商之下, 預國公 程顥奉於穎川侯 顓孫師之下, 洛國公 程頣奉於道國公 周敦頣之下, 新安伯 邵雍奉於預國公 程顥之下, 郿伯 張載奉於洛國公 程頣之下, 徽國公 朱熹奉於新安伯 邵雍之下。 殿宇不爲改造, 而稍殺床椅之制, 推移奉安, 平明陳賀頒敎。 上以崇陵陵上石物作變人, 尙未譏捕, 下特敎, 命推考捕盜兩大將, 更加申飭, 期於必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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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55권, 숙종 40년 7월 22일 신유 1번째기사 1714년 청 강희(康熙) 53년
사과 이이만의 송조 육현을 승배(陞配)하는 일에 대한 상소
사과(司果) 이이만(李頤晩)이 소를 올려 송조 육현(宋朝六賢)의 승배(陞配)하는 일을 논하기를,
"문묘(文廟)의 제도는 모두 황조(皇朝)의 전례(典禮)를 모방하여 사성(四聖)061) 은 전(殿) 안에 종향(從享)하고, 십철(十哲)은 좌우에 나누어 배향하였는데, 이는 모두 공문(孔門)에서 친히 배워 승당 입실(陞堂入室)062) 한 사람들로 예로부터 지금까지 감히 가감(加減)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동무(東廡)·서무(西廡)에 열향(列享)한 제현(諸賢)의 좌차(坐次)는 한결같이 세대(世代)의 선후를 따라 그 위차(位次)를 정한 것이니, 이 어찌 후대에 감히 의정(議定)할 바이겠습니까. 비록 《고사촬요(考事撮要)》가운데에 기록된 바를 보더라도 정백자(程伯子)와 소강절(邵康節)은 한유(韓愈)의 아래에 있고, 주염계(周㾾溪) 이하 사현(四賢)은 범영(范寗)의 뒤에 있으니, 도덕(道德)의 고하(高下)를 추론(追論)하여 위치를 변경할 수 없음이 명백합니다. 다만 이 육현(六賢)의 학문과 도덕은 십철(十哲)에 견주어 혹 말할 만한 등차(等差)가 있는 것은 아니겠으나, 모두 동무·서무에 배열(排列)하고 대성전 안에 오르지 못한 것은 어찌 세대(世代)가 현격하여 친히 성문(聖門)063) 에서 배운 자와 차이가 있어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묘(聖廟)의 사전(祀典)은 지극히 엄중하여 오직 한결같은 마음으로 공경하고 옛 전장(典章)을 따를 뿐입니다. 어찌 감히 새로운 규식(規式)을 세워 경솔히 옛 전장을 고칠 수가 있겠습니까. 또 생각건대 조종조(祖宗朝) 이래로 3백 년 동안 명현과 거유(巨儒)가 많지 않은 것이 아니었으나, 일찍이 이런 논의가 있었음을 듣지 못했는데, 오늘날에 이르러 갑자기 이러한 거조가 있으니, 신은 그것이 과연 예제(禮制)와 의리에 합당한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풍문으로 듣건대 지난해 여러 신하가 헌의(獻議)한 일이 있다고 하는 데, 성묘(聖廟)의 막중한 전례(典禮)에 대하여 황조(皇朝) 이전에 없었던 제도를 어찌 한때의 의논으로 가볍게 변경하여 후세(後世)의 비난을 초래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인하여 대신(大臣)과 재신(宰臣) 및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에게 다시 순문(詢問)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이제 이 육현(六賢)을 대성전 안에 승배(陞配)하는 것은 예제(禮制)와 의리에 합당하니, 진실로 사문(斯文)의 경사이다. 어찌 그 사이에 다른 의논을 용납할 수 있겠는가. 성명(成命)을 내린 지 이미 30년이 지났으니, 내가 바야흐로 지금까지 천연(遷延)한 것을 불만스럽게 여기는 바이다. 그대의 상소 가운데에 또한 ‘육현의 학문과 도덕은 십철에 견주어도 말할 만한 등차가 있는 것이 아니다.’고 하면서도 억지로 이의(異議)를 세우니, 이는 또한 홀로 무슨 뜻인가. 작년에 저 청나라에서도 주자를 승배(陞配)하는 거조가 있었으나 이의가 없었는데, 이런 저지(沮止)하는 의논이 도리어 우리 나라에서 나오니 지극히 개탄할 일이다."
하였다.
[註 061]사성(四聖) : 안회(顔回)·증삼(曾參)·공급(孔伋)·맹가(孟軻)를 말함.
[註 062]승당 입실(陞堂入室) : 마루에 올라 방으로 들어간다는 뜻으로, 순서를 밟아 차근차근 학문을 닦으면 결국 심오한 경지에 들어감을 비유한 말.
[註 063]성문(聖門) : 공자의 문하(門下).
○辛酉/司果李頣晩上疏, 論宋朝六賢陞配事曰:
文廟之制, 悉倣皇朝典禮, 四聖從享於殿內, 十哲分配於左右, 是皆親炙孔門, 陞堂入室之人。 從古及今, 未敢增損, 而東、西廡所餟食諸賢坐次, 一循世代先後, 定其位次, 此豈後代之所敢定議者哉? 雖以《攷事撮要》中所錄者見之, 程伯子、邵康節, 在於韓愈之下, 周濂溪以下四賢, 列於范寗之後, 則固未嘗追論道德高下, 變定其位次也明矣。 顧此六賢之學問、道德, 方諸十哲, 未或有等差之可言, 而其竝列廡位, 不躋殿內者, 豈非世代懸遠, 有間於親炙聖門之人而然耶? 聖廟祀典, 至嚴至重, 惟當一意敬遵, 率由舊章而已。 何敢創立新規, 輕改舊章哉? 且念祖宗朝以來, 三百年間, 名賢、宏儒, 非不多也, 曾未聞有此等議論, 而至于今日, 猝有是擧, 臣未知其果合於禮制、義理耶? 側聞曩歲, 有諸臣獻議之事云, 而聖廟莫大之禮, 皇朝以前所無之制, 豈可以一時義起, 率爾更變, 以貽後世之譏議乎?
仍請更詢於大臣、宰臣、三司諸臣, 答曰: "今玆六賢之躋配殿內, 允合於禮制、義理, 而實是斯文之慶也。 寧容異議於其間耶? 成命之下, 已過卅載, 予方以至今遷就爲歉然矣。 爾疏中亦曰: ‘六賢之學問、道德, 方諸十哲, 未或有等差之可言’, 而强爲立異, 抑獨何哉? 昨年彼中有朱子陞配之擧, 而未有異議。 此等沮戲之論, 反出東國, 極可慨惋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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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55권, 숙종 40년 8월 5일 갑술 1번째기사 1714년 청 강희(康熙) 53년
여러 신하들과 황당선 출몰의 일·송조 육현을 승배하는 일·진상의 일·고 상신 윤방 일 등에 대해 의논하다
사간(司諫) 유숭(兪崇)이 앞서 논계(論啓)한 일을 진달하고, 또 논하기를,
"송조 육현(宋朝六賢)의 승배(陞配)는 진실로 사문(斯文)의 큰 경사이니, 어찌 다른 의논을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부사과(府司果) 이이만(李頤晩)이 감히 이론(異論)을 세우고 한 소장(訴章)을 올려 이르기를, ‘새로운 규례(規例)를 세우는 것은 홀로 《주례(周禮)》를 준수(遵守)하는 의리에 어긋남이 있다.’고 하면서 드러나게 비난하는 논평을 가하며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으니, 지극히 해괴합니다. 청컨대 삭탈 관작(削奪官爵)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당에 소론(疏論)한 바가 지극히 근거가 없었다. 파직하라."
하였다.
司諫兪崇陳前啓, 又論: "宋朝六賢陞配, 實是斯文之大慶, 寧容他議, 而副司果李頣晩, 敢生異論, 投進一疏以爲: ‘創立新規, 有違於獨秉《周禮》之義’, 顯加譏評, 略無顧忌, 誠極駭惋。 請削奪官爵。" 上曰: "當初疏論, 極無據。 罷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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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55권, 숙종 40년 7월 11일 경술 2번째기사 1714년 청 강희(康熙) 53년
좌의정 김창집 등이 임금 병환의 회복을 축하하는 진연의 일·사원(祠院) 훼철의 일 등을 의논하다
좌의정(左議政) 김창집(金昌集)·판부사(判府事) 이이명(李頤命)·우의정(右議政) 김우항(金宇杭)·예조 판서(禮曹判書) 민진후(閔鎭厚)·호조 판서(戶曹判書) 조태구(趙泰耉)가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의 환후가 평복(平復)된 경사가 있다 하여 진연(進宴)을 청하고 여러 신하들도 누누이 진달하였으나, 임금이 처음에는 윤허하지 않았다. 김창집이 말하기를,
"도성의 백성들이 ‘이번 진연(進宴)에는 비록 각기 재물을 내어 연수(宴需)를 돕는다 해도 사양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하니, 민정(民情)을 대략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마지 못해 따르고 연수는 힘써 절약하라고 하였다.
당초에 임금이 명하기를,
"여러 고을의 사원(祠院) 가운데 조정(朝廷)에 품의(稟議)하지 않고 임의로 창립(創立)한 것은 그때의 방백(方伯)·수령(守令) 및 수창(首倡)한 유생(儒生)을 모두 논하여 벌을 주라."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민진후(閔鎭厚)가 평안도의 이문(移文)을 가지고 아뢰기를,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 조사하여 훼철(毁撤)하는 일이 있어야 마땅하다고 하였으나, 신은 혹시라도 시끄러운 일이 있을까 염려하여 우선 그대로 두었습니다. 평안도에는 이미 이문한 것이 있으니, 어떻게 처리하여야 하겠습니까."
하자, 김창집은 말하기를,
"사람의 수효가 많다 하여 분간(分揀)함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김우항·이이명은 청하기를,
"유지(宥旨)049) 전의 일로써 그 죄를 분간하고, 임의로 세운 사원은 훼철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그 가운데 정주(定州)의 주자 서원(朱子書院)과 평양(平壤)의 홍익한(洪翼漢) 서원은 김창집과 민진후의 말로 인하여 훼철하지 말도록 명하였고, 의주의 강감찬(姜邯贊)과 임경업(林慶業)의 사우(祠宇)도 승지(承旨) 권수(權𢢝)의 진달로 인하여 한결같이 그대로 두게 하였다. 무안(務安) 김권(金權)의 서원에서 임의로 유계(兪棨)를 추향(追享)하였기 때문에 민진후의 진달로 인하여 처음에는 감사(監司)는 추고(推考)하고 수령은 파직하도록 명하였다가, 또 유지(宥旨) 전의 일이라 하여 모두 논하지 말라고 하였다.
민진후가 또 말하기를,
"양주(楊州) 유생(儒生)이 예조(禮曹)에 정장(呈狀)하여 향교(鄕校) 가운데 백(白)·숙(叔) 두 정자(程子)의 차서가 바뀌었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이로 인해 태학(太學)에 물어보았더니, 태학에서도 또한 그러하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연전에 승출(陞黜)할 때 서무(西廡)에서 척출(斥黜)된 위패(位牌)가 동무(東廡)보다 많아서 차례로 올라갔으므로, 동서(東西)를 아울러 그 차서를 헤아린다면 과연 선후(先後)가 도착(倒錯)되어 일이 매우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금년 가을 석채(釋菜)를 기다려 서울과 외방(外方)을 아울러 바로 잡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임술년050) 에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의 말로 인하여 송조 육현(宋朝六賢)051) 을 승무(陞廡)하여 배향(配享)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풍년을 기다려 거행하기로 하였습니다. 이 일이 지금까지 천연(遷延)된 것은 흉년으로 인한 듯한데, 설령 풍년이 들더라도 어찌 대성전(大成殿)을 개조(改造)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여러 차례 석전제(釋奠祭)에 참여하여 일찍이 보았는데, 십철(十哲)052) 의 위패(位牌)를 모신 교의(校椅)가 자못 컸으니, 지금 만약 그 제도를 조금 줄인다 해도 협착(狹窄)하여 용납하기 어려운 데에 이르지는 않을 듯합니다. 청컨대 본관 당상(本館堂上)으로 하여금 상세히 살펴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옳게 여겼다.
[註 049]유지(宥旨) : 임금이 죄인을 특사(特赦)하던 명령.
[註 050]임술년 : 1682 숙종 8년.
[註 051]송조 육현(宋朝六賢) :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명도(明道) 정호(程顥)·이천(伊川) 정이(程頤)·안락(安樂) 소옹(邵雍)·횡거(橫渠) 장재(張載)·회암(晦庵) 주희(朱熹).
[註 052]십철(十哲) : 공자(孔子) 문하(門下)의 열 사람의 학행이 뛰어난 제자. 안연(顔淵)·민자건(閔子騫)·염백우(冉伯牛)·중궁(仲弓)·재아(宰我)·자공(子貢)·염유(冉有)·자로(子路)·자유(子游)·자하(子夏).
○左議政金昌集、判府事李頣命、右議政金宇杭、禮曹判書閔鎭厚、戶曹判書趙泰耉, 請對入侍。 以上候平復之慶, 請進宴, 諸臣縷縷陳白, 上始不許。 昌集曰: "輦下之民以爲: ‘今番進宴, 雖使各出財力, 以助宴需, 有不可辭’ 云, 群情大可見矣。" 上勉從之, 令宴需務從省約。
初, 上命諸邑祠院, 不稟朝廷, 而自創立者, 其時方伯、守令、首倡儒生, 竝論罰。 至是閔鎭厚, 以平安道移文, 陳白曰: "諸議以爲宜有査問毁撤之擧, 而臣或慮紛紜, 姑置之矣。 平安道則旣有文移, 何以處之乎?" 昌集曰: "不可以人數之多, 有所分揀。" 宇杭、頣命, 請以宥旨前事, 分揀其罪, 而所擅立祠院則毁去, 上從之。
其中定州 朱子書院、平壤 洪翼漢書院, 則因昌集、鎭厚之言, 命勿毁, 義州 姜邯賛、林慶業祠宇. 亦因承旨權𢢝所達, 使之一體仍存。 務安 金權書院, 則擅爲追享兪棨, 故閔鎭厚陳白, 初命監司推考, 守令罷職矣, 又以宥旨前事, 竝勿論。
鎭厚又言: "楊州儒生呈禮曹, 鄕校中伯叔兩程子, 易其次序爲言, 臣因此問于太學, 太學亦然。 蓋向年陞黜時, 西廡見黜之位, 多於東廡, 次次轉陞, 故竝東西而計其次序, 則果爲倒舛, 事甚未安。 趁今秋釋菜, 京外竝宜釐正。" 又曰: "壬戌因先正臣宋時烈之言, 有宋朝六賢陞配從享之命, 而令待年豐擧行矣。 此事至今遷拖, 似因歲飢, 而設令豐登, 何可改造大成殿乎? 臣屢參釋奠祭, 嘗見十哲位所奉校椅頗大。 今若稍減其制, 似不至狹窄難容。 請令本館堂上, 審察稟處。" 上竝可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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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55권, 숙종 40년 8월 6일 을해 1번째기사 1714년 청 강희(康熙) 53년
강화 유수 김진규의 송조 육현을 승배하는 일에 대한 논의. 이에 대한 예조의 복주(覆奏) 내용
강화 유수 김진규(金鎭圭)가 송조 육현(宋朝六賢)을 승배(陞配)하는 일로 본부(本府)의 난편(難便)한 사세(事勢)를 장계로 진달하기를,
"본부 향교(鄕校)에 송조 유현(宋朝儒賢)으로 양무(兩廡)에 종사(從祀)한 사람은 다만 도국공(道國公)085) ·예국공(豫國公)086) ·낙국공(洛國公)087) ·휘국공(徽國公)088) 네 분인데, 이제 육현(六賢)의 도덕이 서로 비등하다 하여 일체 승배(陞配)하는 거조가 있으니, 서울과 외방(外方)에서 일례로 거행함이 마땅할 듯합니다. 그런데 혹은 육현을 승배하고 혹은 사현을 승배한다면, 참차 부제(參差不齊)089) 함을 면하지 못할 것이며, 만약 전일 양무(兩廡)에 종사(從祀)하지 않은 사람을 전내(殿內)에 추배(追配)한다면 다만 사체(事體)에 미안할 뿐만 아니라, 또한 조종조(祖宗朝)에서 작정한 전례(典禮)에 어긋남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또 향교에 동무·서무를 설치한 것은 원래 오로지 동방(東方) 유현(儒賢)만을 종사(從祀)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으니, 전일에 중조(中朝) 유현을 열향(列享)하고 인하여 동방 유신(儒臣)을 그 아래에 붙이는 것이 진실로 마땅하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숭배한 뒤에는 향학(鄕學)의 양무(兩廡)에 장차 중조 유현은 없고 다만 설총(薛聰)·최치원(崔致遠) 이하 여러 유신만 종사(從祀)될 것이니, 당초 설치한 본의(本意)에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다. 예조(禮曹)에서 복주(覆奏)하기를,
"《대전속록(大典續錄)》에 이르기를, ‘
개성부(開城府) 및 모든 도(道)의 계수관(界首官)090) 을 제외한
그 나머지 주(州)·부(府)·군(郡)의 학(學)은 양무(兩廡) 제위(諸位)의 제향을 면제하고,
현학(縣學)은 전(殿) 위의 10위(位)의 제향까지도 아울러 면제하며,
오직 송조(宋朝)의 염계 주 선생(濂溪周先生)·명도 정 선생(明道程先生)·회암 주 선생(晦庵周先生) 및 신라(新羅)의 홍 유후(洪儒侯) 설총(薛聰)·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과 고려(高麗)의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는 주·부·군의 학에서도 아울러 모두 향사(享祀)한다.’ 하였습니다.
《대전속록》은 성종조(成宗朝)에 이루어졌으니, 그 전에는 향학(鄕學)에서 송조 사현(宋朝四賢)을 종사(從祀)하지 않았음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양현(兩賢)을 한결같이 태학(太學)의 예(例)에 따라 일체 추배(追配)한다면 진실로 전례(典禮)를 바로 잡는 도리에 합당할 것입니다. 비록 조종조(祖宗朝)에서 작정(酌定)한 바에는 약간 어긋나지만, 오늘날 양현을 추배함은 성종조 때 양무(兩廡)에 종사하라는 분부와 더불어 함께 아름다움이 될 것이니, 의리로 헤아려보아도 아마 대단히 미안한 데에 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허다한 주·부·군에서 일제히 승배하자면 구애되는 일이 많을 것이니,
개성부 및 모든 도(道)의 계수관은 태학(太学)과 일체로 거행하고,
주·부·군의 학에서는 다만 앞서 종사(從祀)한 송조 사현을 십철(十哲)의 아래에 승배하여,
현학(縣學)에서는 한결같이 옛 규례를 따라 변동(變動)하지 않음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대신(大臣)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좌의정 김창집(金昌集)은 말하기를,
"예관(禮官)의 복주(覆奏)가 합당합니다."
하고, 판부사(判府事) 이유(李濡)는 말하기를,
"주·부·군의 학은 십철(十哲)의 위패(位牌)가 이미 태학의 제도와 같으니, 육현을 승배함은 참치 부제함이 있어 옳지 못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김창집의 의논을 따랐다.
○乙亥/江華留守金鎭圭, 以六賢陞配, 狀陳本府難便之事勢曰:
本府鄕校, 宋朝儒賢之從祀兩廡者, 只是道國公、豫國公、洛國公、徽國公四位。 今旣謂以六賢道德相等, 有此一倂陞配之擧, 京外似當一例, 而或陞配六賢, 或陞配四賢, 不免參差。 若追配前所不祀兩廡者於殿內, 不但事體之無漸, 亦恐有違於祖宗朝酌定之典。 且鄕校東、西廡之設置, 本非專爲東方儒賢之從祀, 則前之列祀中朝儒賢, 仍附東方儒臣於其下者, 固爲合宜, 而今於陞配之後, 則鄕學兩廡, 將無中朝儒賢, 只祀薛、崔以下諸儒臣, 此於當初設置之本意, 何如也?
禮曹覆奏曰: "《大典續錄》曰:
‘開城府及諸道界首官外,
其餘州、府、郡學, 則免祭兩廡諸位,
縣學則竝免殿上十位,
惟宋朝 濂溪 周先生、明道 程先生、晦庵 朱先生及新羅 弘儒侯 薛聰、(文正侯)〔文昌侯〕 崔致遠、高麗 文成公 安裕, 則州、府、郡學, 竝皆祀之’ 云。
《續錄》成於成宗朝, 則其前鄕學, 不祀宋朝四賢, 可以推知。 今以兩賢, 一體追配, 一如太學之例, 則實合於釐正典禮之道。 雖或少違於祖宗朝所酌定者, 今日之追配兩賢, 可以匹休於成宗朝命祀兩廡, 則揆以義理, 恐不至大段未安。 但許多州、府、郡, 一時陞配, 事多掣肘。
開城府及諸道界首官, 則與太學一體擧行,
州、府、郡學, 則只以前祀宋朝四賢, 陞配於十哲之下,
縣學則一遵舊規, 不可變動何如?"
上命議大臣。 左議政金昌集以禮官覆奏爲當, 判府事李濡以爲: "州、府、郡學, 十哲之位旣如太學之制, 則六賢陞配, 不可有所參差也。" 上從昌集議。
[註 085]도국공(道國公) : 주돈이(周敦頤).
[註 086]예국공(豫國公) : 정호(程顥).
[註 087]낙국공(洛國公) : 정이(程頤).
[註 088]휘국공(徽國公) : 주희(朱熹).
[註 089]참차 부제(參差不齊) : 어슷비슷하여 가지런하지 아니함.
[註 090]계수관(界首官) : 서울에서 각도(各道)에 이르는 본가도(本街道)의 연변(沿邊)이나 도계(道界)에 있는 큰 고을. 대개 한 도에 4, 5개 정도가 있었으며, 도와 군·현을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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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65권, 숙종 대왕 묘지문[誌文]
숙종 대왕 묘지문[誌文]
왕은 강연(講筵)에서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이름을 휘(諱)하였다. 문묘(文廟)에 송(宋)의 주염계(周濂溪)·장횡거(張橫渠)·이정(二程)·소강절(邵康節)·주자(朱子) 등 육현(六賢)을 정전(正殿)으로 올렸으며, 양무(兩廡)의 한(漢)나라 순황(荀況) 이하 열 사람을 내치고 송(宋)의 양시(楊時)·나종언(羅從彦)·이동(李侗)·황간(黃幹) 및 우리 나라의 이이(李珥)·성혼(成渾)·김장생(金長生)을 배향(配享)할 것을 명하였다. 어필(御筆)로 친히 송시열(宋時烈)의 화양 서원(華陽書院)과 송준길(宋浚吉)의 흥암 서원(興巖書院)의 편액(扁額)을 쓰니, 현덕(賢德)이 있는 이를 숭상하여 선비의 추향(趨向)을 통일하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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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재전서 제29권 / 윤음(綸音) 4
평음후(平陰侯) 유약(有若)을 성전(聖殿)에 올려 배향하는 데 관한 윤음 시행하지 않았음
대개 문묘에 배종(配從)하는 데에는 세 등급이 있다. 정전(正殿)에 배향(配享)하는 것이 하나이니, 안자(顔子)ㆍ증자(曾子)ㆍ자사(子思)ㆍ맹자(孟子) 사성(四聖)이 그것이다. 또 동서서(東西序)에 종향(從享)하는 것이 하나이니, 공자 문하의 십철(十哲)과 송조(宋朝)의 육현(六賢)이 그것이다. 그리고 동서무(東西廡)에 종사(從祀)하는 것이 하나이니, 공자 문하의 여러 제자 이하에서 본조(本朝)의 여러 유선(儒先)에까지 이르는 것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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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산집(屛山集)은 이관명(李觀命, 1661~1733)의 문집이다. 이관명의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자빈(子賓)이며, 호는 병산(屛山)이다.
병산집 제12권 / 시장(諡狀) / 좌참찬 민공 시장〔左參贊閔公諡狀〕
閔鎭厚 | 1659 | 1720 | 驪興 | 靜能 | 趾齋 | 忠文 |
공의 휘(諱)는 진후(鎭厚)이고, 자(字)는 정능(靜能)이다.
또 판의금부사와 종묘서 제조를 겸임하였다. 이에 앞서 우암이 송조(宋朝)의 육현(六賢)을 종향위(從享位)로 올릴 것을 청하여 풍년이 들기를 기다려 시행하라고 윤허하였는데, 여전히 시행하지 않고 있어 공이 성상에게 청하여 곧바로 시행하였다. 또 도성과 지방 학교의 양무(兩廡)의 위패 중에 차례가 뒤바뀌고 잘못 써진 것이 많았는데, 석채(釋菜)의 예를 통하여 바로잡으니, 사림이 서로 축하하였다. 질병을 이유로 본직과 의금부에서 체차되었다.
[주-D169] 우암이 …… 윤허하였는데 : 《국역 숙종실록》 7년 12월 14일 기사에 송시열이 상소하여 ‘주돈이(周敦頤)ㆍ정호(程顥)ㆍ정이(程頤)ㆍ장재(張載)ㆍ소옹(邵雍)ㆍ주희(朱熹)는 도학(道學)이 아주 위대하고 공적이 매우 융성한데, 아직도 양무(兩廡)에 있어 최치원(崔致遠) 등과 뒤섞여 함께 있으니, 이것은 매우 불가하다.’고 한 말이 보이고, 8년 4월 22일 기사에 ‘송시열의 의견에 따라 시행하되 상황이 어려우니, 풍년이 들기를 기다려 시행하라’고 한 일이 보인다.
宋時烈 | 1607 | 1689 | 宋聖賚 | 恩津 | 英甫 | 尤庵, 華陽洞主, 南澗老叟, 橋山老父, 尤齋 | 文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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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12권, 숙종 7년 12월 14일 계사 3번째기사 1681년 청 강희(康熙) 20년
문묘 종사에 관한 송시열의 소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송시열(宋時烈)이 종사(從祀)하는 일을 논하면서 두 현신(賢臣)713) 이 무고를 당한 상황을 분변하고, 또 선정신(先正臣) 김장생(金長生)을 아울러 종사하는 반열에 올리도록 청하였다. 그 소(疏)에 대략 이르기를,
"삼가 중신(重臣)들이 말한 것을 보건대, 단지 중국 조정에서 이미 시행하고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이른바 제거할 만하다는 실상도 모두 증거로 끌어들일 것이 있으니, 아무리 잘라 버리고 두들긴다고 하더라도 깨뜨리지 않는 것이 가합니다. 또 우리 나라를 가지고 말하더라도 신라(新羅) 때부터 본조(本朝)에 이르기까지 종사(從祀)한 자가 여덟 사람이나 되는데, 그들이 순수하게 모두 도(道)에게 출발하였다고는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역이 치우치고 기질이 국한되어 큰 안목(眼目)과 큰 역량(力量)으로 드러나게 바로잡지 못한다면, 우선 그전대로 답습하면서 먼 훗날을 기다려야 합니다. 송(宋)나라 조정의 3현(三賢)714) 에 대해서도 말할 만한 것이 없지 않습니다. 주자(朱子)가 창주 정사(滄洲精舍)에서 향사(享祀)하면서 단지 이연평(李延平)715) 만 제사하고 양시(楊時)와 나종언(羅從彦)은 참여시키지 않았으니, 이것이 어찌 까닭이 없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대체로 귀산(龜山)716) 의 학문상 결점은 주자가 여러번 그것을 말하였는데, 이르기를, ‘귀산이 먼저 장자(莊子)와 열자(列子)의 학설을 보았으므로 비록 이천(伊川)을 뵈었다 하더라도 이 생각이 익숙해서 가끔 나타났으며, 나중소(羅仲素)717) 도 이러한 뜻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유의 말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마지막에 말하기를, ‘귀산(龜山)이 불씨(佛氏)에게 당황[張皇]한 형세는 이업(李鄴)이 금로(金虜)718) 에게 당황한 것과 같았다.’고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근래 귀산의 열자설(列子說)을 읽어보니 사람으로 하여금 황공(惶恐)하게 하는데, 무엇 때문에 이와 같이 반대 방향으로 어긋나는지 모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출처(出處)를 논하는 데 이르러서는, 비록 유하혜(柳下惠)719) 의 ‘붙잡아 말리면 그대로 따라 그친다.[援而止之而止]’와 비교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역시 말하기를, ‘귀산의 사람됨은 구차(苟且)스럽다’고 하였습니다. 이때에 녹봉을 받기 위하여 벼슬하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호란(胡亂)720) 에 벼슬을 하였는데, 그것은 대체로 채경(蔡京)721) 에게 나아간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자(朱子)의 의논은 그 억양(抑揚)이 이와 같으니, 창주 정사(滄洲精舍)에서 취사(取捨)한 바가 혹시 여기에서 나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중국 조정에서 이미 귀산(龜山)을 성무(聖廡)에 종사하게 하면서 나씨(羅氏)는 또 참여시키지 않았으니, 틀림없이 그 뜻이 있을 것입니다. 만력(萬曆)722) 갑술년723) 에 주사(主事)가 질정관(質正官) 조헌(趙憲)에게 답한 것도 신을 신고 발바닥을 긁는 것과 같아 의논이 정해지지 못한 듯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오늘날 3현(三賢)을 종사하는 것을 비록 갑자기 취하거나 벌릴 수는 없다 하더라도, 오직 도덕(道德)의 순수하고 결점이 있는 것과 주자(朱子)가 품평[權衡]한 것은 성명(聖明)께서 당연히 알아야 할 것일 뿐만 아니라, 장보(章甫)724) 들은 더욱 정밀하게 그렇게 된 까닭을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간혹 그것을 힐난하는 자가 말하기를, ‘그대가 양시(楊時)와 나종언(羅從彦)에 대해서는 논하는 것이 이와 같으면서 돌아보건대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에게는 어찌 이와 같이 하지 않는가?’고 하기에, 신이 조심스럽게 답하기를, ‘주자(朱子)의 먼저 병이 나았다가 뒤에 병이 든 것과 먼저 병이 들었다가 뒤에 나은 것에 대한 변(辨)725) 이 있는데, 양씨(楊氏)는 바로 앞뒤로 마침내 병이 낫지 않은 사람이며, 문성공은 바로 먼저 병이 들었다가 뒤에 병이 나은 사람이다. 더구나 그가 선학(禪學)을 탐했을 때의 나이는 20세 이전이었으니, 더욱 누(累)가 되기에는 부족하다. 주자가 장횡거(張橫渠)726) 를 칭하기를 늘그막에 불씨(佛氏)와 노자(老子)에게로 도망하였다고 했지만, 오히려 공자(孔子)와 맹자(孟子)의 학통(學統)을 계승하는 데는 방해롭게 여기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간혹 또 말하기를, ‘양귀산(楊龜山)이 불씨(佛氏)에게 빠진 것이 어찌 문성공(文成公)이 입산(入山)한 것과 같은가?’고 하기에, 신이 또 대답하기를, ‘하필이면 귀산이겠는가? 주자가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희(熹)727) 가 일찍 그 사람을 스승으로 삼았었다.」고 하였는데, 그 사람이란 바로 고승(高僧)인 도겸(道謙)이다. 연평(延平)728) 이 일찍이 말하기를, 「원회(元晦)729) 가 처음에 겸(謙)을 따라 개선(開善)에서 거처하였다.」고 하였는데, 겸은 바로 도겸이며 개선은 바로 도겸이 거처하던 절 이름이다. 이미 도겸을 따라 개선에서 거처하였다고 말했으니, 그가 개선사에 드나들면서 왕래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문성공(文成公)이 잠시동안 산사(山寺)에 있었던 것 역시 주자의 초년과 무엇이 다르겠는가?’고 하였습니다.
신은 언제나 주자가 광명 정대(光明正大)하기 때문에 스스로 그의 초년을 말한 것이 이와 같다고 말했으며, 연평(延平)은 질박하고 정성스러운 것으로 마음을 보존하기 때문에 주자를 칭찬하여 말하면서도 비호하거나 과실을 덮어 주지 않았었는데, 오직 주자 문하(門下)의 여러 사람들이 그가 드나들면서 왕래한 연월(年月)을 기록하지 않아 그 사실을 숨기려는 듯한 인상이 있기는 하나, 이 어찌 주자의 마음을 아는 자이겠습니까? 옛날에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 역시 이이(李珥)가 지난날의 일을 숨기지 않은 것을 칭찬하였는데, 이것도 연평의 뜻과 같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또 말하기를, ‘주자(朱子)가 어찌 일찍이 이이(李珥)처럼 형체를 변경하였겠는가?’고 하기에 신이 또 답(答)하기를, ‘그 마음이 이미 〈불씨(佛氏)에게〉 빠져 버렸다면 형체가 변경된 여부(與否)는 논(論)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문성공(文成公)이 형체를 변경하지 않았던 것은 문충공(文忠公) 장유(張維)의 변증(辨證)에 상세하게 갖추어 있으며, 더구나 문성공이 입산(入山)하였을 때의 시서(詩序)를 관찰하면 더욱 금방 분변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고승(高僧)과 문답(問答)할 때 고승이 반드시 조대(措大)라고 일컬었는데, 조대는 바로 사자(士子)730) 에 대한 칭호이다. 만약 이미 형체를 변경하였다면 당연히 같은 무리로 일컬었을 터인데 어찌 기꺼이 조대라고 말하였겠는가? 그러나 문성공을 귀산(龜山)과 비교하여 헤아릴 필요는 없으며 비록 장횡거(張橫渠)와 주자(朱子)의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그와 동떨어지게 다른 점은 보지 못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중신(重臣)들이 차자(剳子)로 논한 바는 이미 중국 조정에서 벌써 시행하는 것이며, 또 선정신(先正臣) 조헌(趙憲)의 의논도 있으니, 무릇 성문(聖門)에 죄를 범하거나 도학(道學)을 전하는 계통에 절조가 없는 자를 제거하는 것이 무엇이 의심스럽겠습니까? 생각하건대 당연히 제거하여야 하는데도 제거하지 않은 자가 있으니, 허형(許衡)이 그런 사람입니다. 문성공(文成公)이 항상 허형이 원(元)나라에 벼슬을 한 것은 비록 절개를 상실한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실수한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신이 일찍이 이것을 성조(聖祖)731) 께 진달하여 아뢰었더니 성조께서 정당(正當)한 의논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청문(聽聞)에 번거로움이 있었기 때문에 비밀리에 근신(近臣)을 시켜서 신에게 편의하지 않다는 뜻을 유시하셨습니다. 지금 올리고 물리치는 거사를 인해서 섞어서 물리친다면 아무런 흔적이 없을 듯합니다. 인해서 생각하건대 안자(顔子)732) ·증자(曾子)733) ·자사(子思)734) 의 부자(父子) 위치(位置)는 하늘의 이치와 사람의 정으로 헤아려 보면 실로 미안(未安)합니다. 만약 중국 조정의 사례에 의거하여 계성묘(啓聖廟)를 지어 안로(顔路)735) ·증석(曾晳)736) ·공이(孔鯉)737) ·맹격(孟激)738) ·정향(程珦)739) ·주송(朱松)740) ·채원정(蔡元定)741) 을 숙량흘(叔梁紇)742) 에게 배향(配享)한다면, 명분도 바루어지고 이치에도 적합하여 일의 체모가 완전하게 갖추어질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함께 의논하여 결정하도록 명하소서.
그리고 또 그윽이 생각하건대, 주돈이(周敦頤)·정호(程顥)·정이(程頤)·장재(張載)·소옹(邵雍)에서 주자에까지는 실로 공자와 맹자의 정통(正統)을 계승하였으니, 그 도학(道學)은 아주 위대하고 그 공적은 매우 융성하여 십철(十哲)743) 의 반열에 두더라도 오히려 굽힌 것이라고 일컬을 터인데, 아직도 양무(兩廡)744) 에 있어 뒤섞여서 최치원(崔致遠) 등과 서로 함께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매우 불가(不可)한 것의 큰 부분입니다. 이 때문에 주자가 죽림(竹林)의 사우(祠宇)에 단지 주돈이·정호·정이 이하 7현(賢)을 공자와 맹자의 도통(道統)에 바로 접(接)했다고 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참여시키지 않았으니, 그의 뜻을 알 만합니다. 더구나 주자는 또 여러 유학자들의 학설을 집대성하여 그 공이 공자 다음가는 데이겠습니까? 이는 당연히 전(殿) 안에 올려서 그 통서(統緖)745) 가 있는 것을 밝혀야 합니다. 그러나 7현(賢) 가운데도 논할 만한 자가 없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소자(邵子)746) 의 학문(學問)은 성도(聖道)747) 에 순수 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자가 일찍이 그것을 말하였으며, 그의 말을 《근사록(近思錄)》에 편입시키지 않고, 그 전(傳)을 연원록(淵源錄)에 열거하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진실로 그렇습니다. 그러나 《대역(大易)》의 이치는 실로 만세(萬世) 도학(道學)의 커다란 근원인데, 소자(邵子)가 천만세(千萬世) 뒤에 태어나 제가(諸家)의 비루한 학설을 쓸어 버리고 바로 복희씨(伏羲氏)의 심법(心法)을 계도(啓導)하였기 때문에 주자가 《계몽(啓蒙)》을 지으면서 한 차례 그의 학설을 인용하였으니, 그의 공이 어느 것이 이보다 크겠습니까? 사마온공(司馬溫公)748) 의 경우는 주자가 그의 공로는 인정하되 그의 학설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또 그의 촉한(蜀漢)을 정통으로 인정하지 않고 위(魏)나라를 정통으로 내세운 책[黜漢帝魏之書]749) 은 춘추(春秋)의 대의(大義)에 크게 어긋나며, 분수에 넘치는 짓을 하여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의 구실(口實)이 되기 때문에, 주자가 일찍이 세상에 노연(魯連)750) 과 같은 이가 없음을 개탄하였으니, 그 뜻을 알 만합니다. 이연평(李延平)은 비록 지적할 만한 결점은 없다고 하더라도 그의 말이 매우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 두 현인(賢人)은 정자(程子)·주자와 함께 같은 조목으로 올릴 수는 없을 듯합니다. 아울러 의논하여 결정하시기를 빕니다. 또 가만히 생각하건대, 면재(勉齋) 황씨(黃氏)751) 는 실로 주자의 학문을 적통(適統)으로 전수한 사람이며, 또 그가 편찬한 《통해속서(通解續書)》는 크게 성도(聖道)에 관계되니, 그의 공로가 《상서(尙書)》752) 를 집전(集傳)한 것에 밑돌지 않는데, 홀로 구봉(九峰) 채씨(蔡氏)753) 와 함께 향사(享祀)함을 얻지 못하였으니, 어찌 사문(斯文)754) 의 잘못된 의식이 아니겠습니까? 아울러 의논하여 결정하시기를 빕니다.
신이 가만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주자가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바로잡아 고치지 않은 것이 없지만, 유독 예서(禮書)만은 늦게야 비로소 뜻을 두어 임금에게 주청하여 비성(秘省)과 태상(太常)에 있는 여러 서적을 빌려주도록 빌고 학도(學徒)들을 빈 관사(官舍)에 불러 들였으며, 또 종이·기름·촛불·돈과 쌀, 그리고 글씨를 베껴 쓰는 사람을 청하고 끝마치는 것을 살펴서 헤아려 위로하고 칭찬하였습니다. 그가 경서(經書)를 해석할 때에는 일찍이 이러한 주청이 없었는데 유독 이 책만 이와 같이 한 것은, 진실로 예의가 가다듬어지면 국가도 가다듬어지고 예의가 어지러워지면 국가도 어지러워지기 때문이니, 그것이 천하(天下)와 국가에 관계되는 것이 이와 같으므로 번거롭고 외람됨을 혐의스럽게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자가 갑자기 벼슬에서 물러났기 때문에 그의 주청도 결국은 올라가지 못하고, 사사로이 학자(學者)와 상세하게 의논하여 증거를 대어 결정하였었는데, 성과를 절반도 거두지 못하고 돌아가면서 그것을 황면재(黃勉齋)에게 부탁하였으므로 황면재가 계승하여 완성시켰습니다. 그가 완성시킨 것 중에는 진실로 일찍이 품(稟)하여 결정한 것도 있으며, 또한 미처 품하여 증명하지 못한 것도 있는데, 이것이 바로 주자가 이른바, ‘마침내 천고(千古)의 한(恨)을 이루었다’고 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고(故)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이 정자(程子)와 주자의 학통(學統)을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에게서 얻어서, 이미 그 학설을 모두 물려받아 마음에 징험하고 몸에 체득한 연후에야 주자께서 한(恨)스러뤄하던 바를 개탄하고, 만년(晩年)에는 오로지 예서(禮書)에다 뜻을 두었는데, 그것은 대체로 황면재의 글에도 오히려 유감스러운 점이 있어 다시 상의하여야 할점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편찬한 《상례비요(喪禮備要)》·《가례집람(家禮集覽)》·《의례문해(疑禮問解)》·《예기기의(禮記記疑)》 등의 책은 매우 세밀하게 분석하여 물을 담아도 새지 않을 정도이므로 국가의 전장(典章)과 사가(私家)의 경례(經禮)와 변례(變禮)에 모두 절충(折衷)하는 바가 있되, 한결같이 정자와 주자의 학설을 주장하였기에 비록 다른 길로 추향하는 집안이라도 준용(遵用)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그 공로가 많다고 말할 만합니다. 대저 정중(鄭衆)과 두자춘(杜子春)은 단지 《주례(周禮)》의 글을 주석(註釋)한 것으로 오히려 성무(聖廡)755) 의 향사(享祀)에 참여되었는데, 더구나 문원공(文元公)은 동방(東方)의 예가(禮家)를 대성(大成)한 데이겠습니까? 지난해 유생[章甫]들이 신(臣)에게 말하기를, ‘문원공은 사문(斯文)에 공로가 있는데, 종사(從祀)하는 의논이 아직도 아무런 반응이 없으니, 이것이 어찌 그만둘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고 하기에, 신이 그들을 만류하기를, ‘그 말이 비록 공변된 마음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온 나라가 같은 내용의 말을 한 연후라야 백세(百世)토록 미혹(迷惑)되지 않을 것이다’고 하고, 겸해서 또 양현(兩賢)756) 에 대한 주청도 아주 끝나지 않았으니 모름지기 차례를 두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였더니, 그 논의가 마침내 중지되었습니다. 이제 양신(兩臣)의 종사(從祀)는 이미 윤허를 받았으며, 신이 외람되게 통변(通變)에 대한 질문를 받았습니다. 신이 만약 이러한 즈음에 단지 좋아하는 데 아첨한다는 혐의만 돌아보고서 끝내 전하(殿下)를 위하여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면, 신이 지난날에 그것을 중지시켰던 것이 사림(士林)의 무궁(無窮)한 한(恨)이 되지 않을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리고 문득 신이 중신(重臣)들의 차자(剳子)에 깊이 느낀 바가 있습니다. 기해년757) 이후부터 조정의 신하들이 크게 쓸모가 있는 말로 성지(聖志)를 보필하여 성취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대로 그럭저럭 지낸 것이 문득 성고(聖考)758) 〈시대의〉 15, 6년을 경과하였으니, 지사(志士)들의 한(恨)이 간절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제일의(節一義)의 의논을 다시는 벼슬아치와 유생[搢紳章甫]들 사이에서 듣지 못하였으니, 이와 같다면 점차로 이적(夷狄)과 금수(禽獸)의 지역으로 들어가지 않는 이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지금 중신(重臣)의 차자(剳子)에 제하(諸夏)759) 운운(云云)한 여덟 자(字)가 있는데, 이것은 바로 주자(朱子)가 이른바 비록 벙어리와 귀머거리와 절름발이와 앉은뱅이라 하더라도 백배의 기운을 더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전하(殿下)에게 바라는 바 또한 깊고도 큽니다. 삼가 빌건대, 더욱 성학(聖學)을 힘쓰시고 더욱 천리(天理)를 따르도록 힘쓰시어 세상의 도의가 더욱 올라가고 백성들의 생활이 더욱 나아지도록 하여 성조(聖祖)760) 와 신고(神考)761) 의 크신 뜻과 크신 업적을 이룩하소서. 이와 같이 한다면 참으로 유교(儒敎)를 숭상하고 도리(道理)를 소중하게 여기는 실질적인 성과가 될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금번의 일이 비록 한 시대의 이목(耳目)을 새롭게 할 수는 있다고 하더라도 한 바탕의 형식으로 돌아가는 데 지나지 않을 것이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양신(兩臣)의 종사(從祀)에 대해서는 신이 일찍이 성조(聖祖)의 하문[下詢]하심을 받고서 ‘학식(學識)이 몽매한데 어찌 감히 망령되게 의논할 수 있겠습니까?’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실을 날조하여 남을 욕하는 것은 분변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신이 일찍이 김수항(金壽恒)과 서로 의논하여 소(疏)를 기초(起草)하였었는데, 그 당시 성명(聖明)께서 시기하며 미워하는 자들의 정상(情狀)을 환하게 관찰하셨기 때문에 올리지는 않았습니다. 대체로 그 당시에 영남(嶺南)에서 비답(批答)을 위조한 변고가 있었으며, 또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을 헐뜯고 배척하는 것을 인해서 주자(朱子)의 학설도 아울러 배척하였기 때문에 성조(聖祖)께서 매우 놀라와 하고 개탄하셨습니다. 가만히 듣건대 이번에도 다시 한 차례의 소장(疏章)으로 여러 사람의 귀를 현혹(眩惑)시켰으니, 그 때의 소본(疏本)을 혹시라도 찾게 하셔서 예감(睿鑑)에 한 번 거치신다면 앞뒤의 곡절(曲折)을 빠짐없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답(剳)하기를,
"계성묘(啓聖廟)에 대한 일은 일찍이 선조(先朝)의 성명(成命)이 있었지만, 잇따라 흉년을 만나게 되어 아직도 거행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일으키면 더구나 적합한 시기가 아닌데 거론한다는 혐의가 없지 않으니, 진실로 천천히 의논하여 처리하는 것이 적당하다. 그 나머지 다른 조건은 아울러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대신(大臣)과 유신(儒臣)에게 의논하여 품지(稟旨)해서 처리하도록 하겠다. 그리고 소(疏)의 끝부분에 진술한 것은 말이 매우 적절하니, 마음에 두고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당시의 소본(疏本)도 후사(喉司)762) 로 하여금 찾아서 들이게 하여 살펴보겠다."
하였다.
○領中樞府事宋時烈論從祀事, 辨兩賢臣被誣狀, 且請以先正臣金長生竝陞從祀之列, 其疏略曰:
伏見重臣所言, 非但中朝之所已行者, 其所謂可去之實, 皆有證援, 則雖謂之攧撲, 不破可也。 且以我東言之, 自新羅訖本朝, 從祀者多至八人, 而未能保其粹然皆出於道。 然而地褊氣局, 未有大眼目、大力量, 出而釐正, 則姑將因循沿襲, 以俟在後之百世也。 至於宋朝三賢, 亦不無可言者。 朱子於滄洲之祀, 只祀延平, 而楊、羅則不與焉。 此豈無所以而然耶? 蓋龜山學問之疵, 朱子屢言之, 有曰: "龜山先看莊、列, 雖見伊川, 此念熟了時發出來, 羅仲素亦有此意。" 如此等說, 不勝其多, 而終曰: "龜山之張皇佛氏之勢, 如李鄴張皇金虜也。" 又曰: "近讀龜山 《列子說》, 令人惶恐, 不知何故如此背馳也。" 至論其出處, 則雖比於柳下惠 "援而止之而止。" 然亦曰: "龜山做人苟且。" 是時未免祿仕, 故胡亂就仕, 蓋謂就之於蔡京也。 朱子之論, 其抑揚如此, 滄洲所取舍, 無乃或出於此耶? 然中朝已以龜山祀於聖廡, 而羅氏又不與焉, 則必有其意。 而萬曆甲戌, 主事之所答於質正官趙憲者, 亦似隔靴而瓟痒, 恐未得爲定論也。 臣意以爲, 今日三賢從祀, 雖不可遽爾取舍, 而惟其道德之醇疵, 朱子之權衡, 則不惟聖明之所當知, 其在章甫, 尤不可不精察其所以然也。 或有詰之者曰: "爾於楊、羅則所論如是, 而顧於文成公 李珥, 何其不如是耶?" 臣謹答曰: "朱子有先瘳後病; 先病後瘳之辨, 楊氏是先後終不瘳之人也, 文成公是先病後瘳之人也。 況其耽禪之歲, 是弱冠之前, 則尤不足爲累。 朱子稱, 張橫渠晩逃佛、老, 而猶不害於承孔、孟之統也。" 或又曰: "龜山之溺, 豈如文成之入山乎?" 臣又答曰: "何必龜山? 朱子嘗自說: ‘熹嘗師其人。’ 其人卽高僧道謙也。 延平嘗曰: "元晦初從謙, 開善處下工夫。" 謙卽道謙, 開善卽道謙所居寺名也。 旣曰從謙 開善處, 則其出入往來於開善可知。 然則文成之暫游山寺, 亦何異於朱子之初年哉? 臣每謂: "朱子光明正大, 故自言其初如此, 而延平以質慤存心, 故稱道朱子, 亦不掩護回互, 而惟朱門諸人, 不記其出入往來年月, 有若諱之者然, 是豈知朱子之心者哉? 昔文純公 李滉亦稱李珥之不諱前事, 是亦延平之意也。 或又謂: "朱子何嘗變形如李珥哉?" 臣又答曰: "其心旣已沈溺, 則變形與否, 非所論也。 然文成之不爲變形, 備悉於文忠公 張維之辨證。 況以文成入山時詩序觀之, 尤可立辨矣。 其與高僧問答也, 其僧必稱措大, 措大乃士子之稱。 若已變形, 則當以等輩稱之, 豈肯謂之措大哉? 然文成公不必較量於龜山, 雖以張、朱事言之, 未見其懸殊也。 至於重臣箚所論, 旣有中朝之所已行, 又有先正臣趙憲之論, 則凡其得罪於聖門, 不槪於道統者, 去之何疑? 惟其當去而未去者, 亦有其人, 許衡是也。 文成公常謂衡之仕元, 雖非失節, 是失身也。 臣嘗以是陳白於聖祖, 則聖祖謂之正當之論, 而惟其有煩聽聞, 故密使近臣, 諭臣以難便之意矣。 今因陞黜之擧, 混行斥去, 則似無痕跡矣。 仍念, 顔、曾、思之父子位置, 揆以天理人情, 實爲未安。 若依中朝例, 作啓聖廟, 而以顔路、曾晢、孔鯉、孟孫、程珦、朱松、蔡元定配於叔梁, 則名正理得, 事體完備, 伏乞竝命議定也。 又竊念, 周、程、張、邵以至朱子, 實繼孔、孟之正統, 其道甚大, 其功至隆, 班之十哲, 猶爲稱屈, 而尙在兩廡, 猥與崔致遠等相竝, 此甚不可之大者。 是故, 朱子於竹林之祠, 只以周、程以下七賢, 直接孔、孟, 而餘人不與, 其意可見也。 況朱子則又集群儒之大成, 而其功亞於孔子者耶? 此宜陞諸殿內, 以明其統緖之所在也。 然七賢之中, 亦不無可論者。 或謂邵子之學, 不純於聖道, 故朱子嘗言之, 而其言不編於《近思錄》; 其傳不列於《淵源錄》, 此則誠有之矣。 然《大易》之理, 實萬世道學之大原, 而邵子生千萬世之後, 掃去諸家陋說, 而直啓伏羲之心法, 故朱子作《啓蒙》也, 一用其說, 其功孰大焉? 惟溫公則朱子許其功, 而不許其學。 又其黜漢帝魏之書, 大有乖於《春秋》之義, 而或爲僭亂者之口實, 故朱子嘗慨然於世無魯連, 其意可見也。 延平則雖無可指之疵, 其言不甚較著。 此二賢者, 似不得與程、朱同條而共陞也, 竝乞議定焉。 且竊念, 勉齋 黃氏, 實爲朱子之適傳, 又其所編《通解續書》, 大有關於聖道, 其功不下於《尙書集傳》, 而獨不得與九峰 蔡氏同祀者, 豈非斯文之欠典耶? 竝乞議定焉。 臣因竊有所獻焉, 朱子於經書史書, 無不釐正, 而獨於禮書, 晩始有志, 至請於上, 乞借秘省、太常諸書, 招致學徒於空閑官舍, 又請紙札、油燭、錢米、寫手等, 候其結局, 量支犒賞。 其於解釋經書之時, 未嘗有此請, 而獨於是書如此者, 誠以禮治則國治; 禮亂則國亂, 其有關於天下國家如是, 故不嫌其煩猥矣。 然而朱子遽爾去國, 故其奏不果上, 而私與學者, 詳議證定, 功未半而易簣, 托之黃勉齋, 勉齋踵而成之。 其所成之中, 固有曾稟定者, 亦有未及稟證者 此正朱子所謂遂成千古之恨者也。 是以, 故文元公 金長生得程、朱之學於文成公 李珥, 旣盡受其說, 驗之心、體於身然後, 慨然於朱子之所恨者, 晩年專意於禮書, 蓋以勉齋之書, 猶有可憾, 而不無更商者故也。 其所纂《喪禮備要》、《家禮集覽》、《疑禮問解》、《禮記記疑》等書, 毫分縷析, 置水不漏, 使國家典章, 私家經變, 皆有所折衷, 而一主於程、朱之說, 雖趨向異塗之家, 無不遵用, 其功可謂盛矣。 夫以鄭衆、杜子春只以註釋《周禮》之文, 而尙與聖廡之享。 況文元公東方禮家之大成耶? 頃歲章甫間, 有謂臣者曰: "以文元公之有功斯文, 從祀之論尙寂, 此豈非不可已者耶?" 臣止之曰: "此說雖出於公心, 然擧國同辭, 然後可以百世不惑。 兼且兩賢之請, 尙未了當, 亦須有次第。" 其論遂止。 今兩臣從祀旣蒙允, 而臣猥承通變之問, 臣若於此際, 只顧阿好之嫌, 而終不爲殿下一言, 則臣之止之於前日者, 安知不爲士林無窮之恨乎? 抑臣於重臣之箚, 深有所感。 粤自己亥以後, 朝臣未能以大有爲之說, 輔成聖志, 故因循荏苒, 奄遇聖考十五六年, 則志士之恨, 於是爲切。 自是第一義之論, 不復聞於搢紳章甫之間, 如此則幾何其不漸入於夷狄禽獸之域耶? 今重臣之箚, 乃有諸夏云云八字, 此正朱子所謂, 雖喑聾跛躄, 亦增百倍之氣者也。 其所望於殿下, 亦深且大矣。 伏乞益懋聖學, 益勉天理, 使世道益升, 民生益遂, 以成聖祖、神考大志大業也。 如此則眞可以爲崇儒重道之實效, 不然則今玆之事, 雖新一代之耳目, 不過爲一場文具之歸, 豈不惜哉?
又曰:
兩臣從祀, 臣嘗承聖祖下詢, 臣對以學識顓蒙, 何敢妄論, 而惟其誣衊, 則不可不辨。 故臣曾與金壽恒相議草疏, 而其時聖明, 洞察媢嫉者之情狀, 故不果上。 蓋其時有嶺南僞批之變, 又因毁斥文簡公 成渾, 而竝斥朱子說, 故聖祖深加駭歎矣。 竊聞, 今者復有一番疏章, 眩感群聽。 當日疏本, 或賜宣索, 一經睿鑑, 則前後曲折, 想無遺照矣。
上答曰: "啓聖廟事, 曾有先朝成命, 而連値凶歉, 尙未擧行。 此時興作, 尤不無時屈擧贏之嫌, 固當徐議處之。 他餘條件, 竝令禮官, 議于大臣、儒臣稟處, 而疏末所陳, 言甚剴切, 可不留心而體念哉? 伊時疏本, 亦令喉司, 覓入省覽。"
[註 713]두 현신(賢臣) :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가리킴.
[註 714]3현(三賢) : 양시(楊時)·나종언(那從彦)·이동(李侗)을 가리킴.
[註 715]이연평(李延平) : 이동(李侗)의 호.
[註 716]귀산(龜山) : 양시의 호.
[註 717]나중소(羅仲素) : 나종언의 자(字).
[註 718]금로(金虜) : 금나라를 가리킴.
[註 719]유하혜(柳下惠) : 노(魯)나라 대부(大夫)인 전금(展禽).
[註 720]호란(胡亂) : 금나라의 침입을 가리킴.
[註 721]채경(蔡京) : 송(宋)나라 휘종(危宗) 때의 대신(大臣).
[註 722]만력(萬曆) : 명(明)나라 신종(神宗)의 연호.
[註 723]갑술년 : 1574 선조 7년.
[註 724]장보(章甫) : 선비.
[註 725]변(辨) : 문체(文體)의 한 가지.
[註 726]장횡거(張橫渠) : 송나라 때 유학자인 장재(張載).
[註 727]희(熹) : 주자의 휘(諱).
[註 728]연평(延平) : 이동(李侗).
[註 729]원회(元晦) : 주자의 자(字).
[註 730]사자(士子) : 선비.
[註 731]성조(聖祖) : 효종(孝宗)을 가리킴.
[註 732]안자(顔子) : 안회(顔回).
[註 733]증자(曾子) : 증삼(曾參).
[註 734]자사(子思) : 공급(孔伋).
[註 735]안로(顔路) : 안자의 아버지.
[註 736]증석(曾晳) : 증자의 아버지.
[註 737]공이(孔鯉) : 자사의 아버지.
[註 738]맹격(孟激) : 맹자의 아버지.
[註 739]정향(程珦) : 정자(程子)의 아버지.
[註 740]주송(朱松) : 주자의 아버지.
[註 741]채원정(蔡元定) : 채침(蔡沈)의 아버지.
[註 742]숙량흘(叔梁紇) : 공자(孔子)의 어버지.
[註 743]십철(十哲) : 공자(孔子)의 문하(門下)의 뛰어난 제자 열 사람. 곧 안연(顔淵)·민자건(閔子騫)·염백우(冉伯牛)·중궁(仲弓)·재아(宰我)·자공(子貢)·염유(冉有)·자로(子路)·자유(子遊)·자하(子夏)를 가리킴. 공문 십철(孔門十哲).
[註 744]양무(兩廡) : 동무(東廡)와 서무(西廡).
[註 745]통서(統緖) : 한 갈래로 이어온 계통.
[註 746]소자(邵子) : 소옹을 가리킴.
[註 747]성도(聖道) : 성인이 가르친 도덕.
[註 748]사마온공(司馬溫公) : 사마광(司馬光).
[註 749][黜漢帝魏之書] : 《자치통감(資治通鑑)》을 가리킴.
[註 750]노연(魯連) : 제(齊)나라 고사(高士)인 노중련(魯仲連).
[註 751]황씨(黃氏) : 황간(黃幹).
[註 752]《상서(尙書)》 : 서경(書經).
[註 753]채씨(蔡氏) : 채침(蔡沈).
[註 754]사문(斯文) : 유교(儒敎)를 가리킴.
[註 755]성무(聖廡) : 문묘를 가리킴.
[註 756]양현(兩賢) : 이이와 성혼을 가리킴.
[註 757]기해년 : 1659 현종 즉위년.
[註 758]성고(聖考) : 현종(顯宗)을 가리킴.
[註 759]제하(諸夏) : 중국 본토에 있는 모든 제후국.
[註 760]성조(聖祖) : 효종(孝宗)을 가리킴.
[註 761]신고(神考) : 현종을 가리킴.
[註 762]후사(喉司) : 승정원(承政院)을 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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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13권, 숙종 8년 4월 22일 기해 1번째기사 1682년 청 강희(康熙) 21년
문묘에 종향하는 사람의 승출을 의정하다
국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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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묘(文廟)에 종향(從享)하는 사람의 승출(陞黜)을 의정(議定)하였다. 처음에 임금이 송시열(宋時烈)의 소(疏)에 따라 대신(大臣)·유신(儒臣)에게 물었는데, 김수항(金壽恒)·김수흥(金壽興)은 다 의논하기를,
"송시열(宋時烈)의 말이 다 옳고 송조 오현(宋朝五賢)은 전내(殿內)로 올려야 하겠으나, 성묘(聖廟)의 간살을 먼저 넓히지 않으면 옮겨 모실 수 없고, 인력도 큰 일을 쉽사리 일으키기 어려우니, 문득 의논할 수 없을 듯합니다. 면재(勉齋) 황씨(黃氏)096) 는 주문(朱門)의 적전(嫡傳)인데, 종사되지 못한 것은 참으로 사전(祀典)에 흠결이니, 이제 양시(楊時)·나종언(羅從彦)·이동(李侗) 세 현인(賢人)과 동시에 같이 향사(享祀)하면 대저 누가 안 된다 하겠습니까? 허형(許衡)은 본디 명유(名儒)이고, 이번에 출향(黜享)을 청한 데에는 뜻이 있으므로, 반드시 말을 다하여 이목(耳目)을 번거롭히지 않더라도, 오직 성명(聖明)께서 시세를 헤아리고 의리를 헤아려 처치하시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김장생(金長生)은 세교(世敎)에 공이 있으므로 함께 제사하여도 부끄러울 것이 없으나, 종사(從祀)는 중전(重典)이니, 모의하는 것이 반드시 넓어야 하고 처치하는 것이 반드시 심밀(審密)해야 합니다. 그런 뒤에야 사체(事體)가 더욱 중해질 것이니, 우선 뒷날을 기다리는 것이 사전(祀典)을 중히 여기는 도리에 맞겠습니다."
하고, 정지화(鄭知和)는 말하기를,
"허형의 출향을 청한 데에는 뜻이 있으나, 뒷날을 기다려서 번거롭지 않게 하는 것이 사의(事宜)에 맞을 듯합니다. 김장생의 종사(從祀)는 사론(士論)이 다 같아지기를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하고, 민정중(閔鼎重)은 말하기를,
"성묘(聖廟)의 사전(祀典)은 심밀히 처치하여 지극히 삼가지 않아서는 안되겠으나, 이제 명의(名義)가 바른 것으로 논한다면, 대성(大聖) 이하의 위판(位版)을 고쳐 쓰는 것이 첫째 일이므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주돈이(周敦頤)·정호(程顥)·정이(程頤)·장재(張載)·소옹(邵雍)·주희(朱熹) 여섯 현인[六賢]을 전내(殿內)에 승부(陞祔)하는 것을 어찌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겠습니까? 제유(諸儒)를 혹 그대로 두고 혹 출향하는 것으로 말하면, 김수항의 의논이 선유(先儒)의 정론(定論)을 상고한 것이니 중도에 맞을 것입니다. 양시(楊時)의 흠으로 말하면, 주자(朱子)가 배척한 말이 한둘이 아니나, 연평(延平)097) 을 제사하는 글에는 연원(淵源)이 비롯하여 온 데가 있고 학문을 창도(倡導)한 공이 있는 것으로 허여하였으니, 종향(從享)하게 하여도 종주(從周)의 의리에 무방하겠습니다. 나종언(羅從彦)은 양시(楊時)만큼 현저하지 못한 듯하니, 우선 뒷날을 기다려 다시 더 헤아려야 하겠습니다. 허형(許衡)은 처신을 잃었으므로 나머지는 말할 것도 없겠으나, 주자(朱子)를 숭상하여 육씨(陸氏)098) 에 물들지 않았고, 그 논저(論著)가 세교(世敎)에 보탬이 있으므로, 오징(吳澄)과 동시에 출향하면 피차가 맞지 않으니, 참작하는 방도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채침(蔡沈)·황간(黃榦)은 경기(經紀)를 도운 공이 다를 것이 없으므로, 이제 와서 뒤미처 거행하는 데 다시 무엇을 망설이겠습니까? 우리 동방의 예학(禮學)이 정숙(精熟)하여진 것은 김장생(金長生)에 이르러서 다시 유감이 없어졌고, 그 글을 읽고 그 예(禮)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으니, 성묘(聖廟)에서 제사하는 줄에 오른 것으로 말하면 이 사람을 두고 누구가 되겠습니까?"
하고, 이상진(李尙眞)은 말하기를,
"주자(朱子)는 양시(楊時)·나종언(羅從彦)에 대하여 그 흠만을 말하지 않고 칭찬한 곳도 많습니다. 유상(儒相)이 이 말을 한 것은 그 승부(陞祔)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한 것이 아니라, 위로는 성학(聖學)099) 을 강구할 때에 이런 말이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하고, 아래로 장보(章甫)100) 가 도(道)에 뜻을 두는 처음에도 경계할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일 뿐입니다. 이것이 그 차자(箚子) 가운데의 본의(本意)이니, 이제 다시 의논할 것 없겠습니다. 허형(許衡)은 학술(學術)에 흠이 없는 것만을 취하고, 또 성조(聖祖)의 유의(遺意)에 따라 우선 그대로 두는 것이 의리에 방해되지 않을 듯합니다. 여섯 현인[六賢]을 전내에 올리는 것은 참으로 지당한 논의입니다. 의논하는 자는 혹 묘우(廟宇)를 넓히기 어렵다고도 하는데, 이것은 본디 그러하나, 그 사리(事理)를 보아야 할 뿐이고, 그 거조(擧措)가 어렵고 쉬운 것은 논할 것 없으니, 의논하여 정할 수만 있다면 때를 기다려도 무방하겠습니다. 면재(勉齋) 황씨(黃氏)도 함께 올라야 하겠고, 김장생은 그 학문과 공이 세교(世敎)에 보탬이 있는 것이 면재(勉齋)보다 못하지 않으나, 사체가 중대하니, 익히 강구하고 심밀히 처치해야 하겠습니다."
하고, 이상(李翔)은 말하기를,
"한(漢)·당(唐) 이래로 성묘(聖廟)에 배향(配享)된 자가 매우 번잡하였는데, 이제 조가(朝家)에서 바로잡아 천고(千古)의 흠결을 크게 씻거니와, 회맹(懷孟)의 누추한 선비도 바로잡는 가운데에 들어 있으므로, 흔적(痕迹)이 없어져 더욱 다행할 듯하나, 우리 동방의 종사(從祀)된 여덟 사람[八人] 가운데에도 의논해야 할 자가 많으니, 오늘 바로잡기를 바랍니다. 양시(楊時)·나종언(羅從彦)은 신(臣)이 일찍이 《중용서(中庸序)》에서 스승의 설(說)에 어그러지고 불가(佛家)·노가(老家)에 젖은 말들을 보았고, 또 《중용혹문(中庸或問)》에서 거론한 여러 설이 어르거진 것을 보았으며, 그 밖에 여러 글에 흩어져 보이는 것이 한둘이 아닙니다. 주자(朱子)가 귀산(龜山)101) 을 장황한 금로(金虜)102) 사람에 견주기까지 하였고, 창주(滄洲)의 향사(享祀)도 양시(楊時)·나종언(羅從彦)에 미치지 않았습니다. 양시·나종언이 이미 종사(從祀)되었다면 전례를 따라서 고치지 않아도 혹 괜찮겠으나, 이제 와서 뒤미처 거행하는 것은 어떠할는지 모르겠습니다. 다섯 현인(五賢)을 전내(殿內)에 올려 배향하는 것은 사리에 당연한데, 시기가 좋지 않은 때에 큰일을 일으킨다는 까닭만으로 곧 봉행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것이 옳은지 신은 모르겠습니다. 계성묘(啓聖廟)는 인정과 예법[情禮]에 비추어 본 것이 상세하다 하겠습니다. 김장생(金長生)은 우리 동방의 예학(禮學)이 중국보다 더 앞서게 하였으니, 사업의 융성한 것이 어떠합니까? 함께 제사[腏食]하자는 의논에는 말을 달리할 사람이 없으니, 성명(聖明)께서 헤아리시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고, 박세채(朴世采)·윤증(尹拯)은 외람되어 감히 의논 올릴 수 없다는 뜻만을 아뢰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송조(宋朝) 다섯 현인[五賢]을 전내에 올려 배향하는 일은 송 영부사(宋領府事)가 상소한 사연에 따라 시행하되, 지금은 큰 일을 쉽사리 의논하기 어려울 듯하니, 풍년이 들기를 천천히 기다려서 거행하라. 면재(勉齋) 황씨(黃氏)는 양시(楊時)·나종언(羅從彦)·이동(李侗) 세 현인[三賢]과 마찬가지로 올려 배향하라. 허형(許衡)은 흠결이 없지 않더라도 문득 출향(黜享)하면 듣기에 번거로움이 있을 것이니, 우선 거론하지 말라. 문원공(文元公)103) 의 학문과 도덕이 고명(高明)한 것은 내가 환히 아는 바이다마는, 문묘(文廟)에 종향(從享)하는 것은 사체가 지극히 중대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제 문득 배향할 수 없는데, 대신(大臣)의 수의(收議) 가운데에 우선 뒷날을 기다리자고 하는 것도 매우 마땅하니, 먼저 다섯 현인[五賢]을 배향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註 096]황씨(黃氏) : 이름은 간(榦).
[註 097]연평(延平) : 이동(李侗)의 호(號).
[註 098]육씨(陸氏) : 이름은 구연(九淵).
[註 099]성학(聖學) : 임금의 학문.
[註 100]장보(章甫) : 유생(儒生)의 딴 이름이니, 여기서는 선비를 말함. 공자(孔子)가 장보관(章甫冠)을 썼으므로, 후대에 유생(儒生)들이 장보관을 많이 썼음.
[註 101]귀산(龜山) : 양시(楊時)의 호(號).
[註 102]금로(金虜) : 금(金)나라를 천하게 부르는 말.
[註 103]문원공(文元公) : 김장생(金長生)의 시호(諡號).
○己亥/議定文廟從享人陞黜。 初, 上以宋時烈疏, 問于大臣、儒臣, 金壽恒、金壽興議皆曰: "時烈言皆是, 而宋朝五賢, 宜陞殿內, 而聖廟間架, 不先恢拓, 則無以推移奉安, 事力又難, 輕擧鉅役, 恐不可遽議。 勉齋 黃氏, 朱門嫡傳, 不得從祀, 誠爲欠典。 今若與楊、羅、李三賢, 一時同享, 夫誰曰不可? 許衡固是名儒, 而今玆請黜, 意有所在。 雖不必索言以煩耳目, 惟在聖明, 量時度義而處之。 金長生有功世敎, 腏食無愧, 而從祀重典也。 謀之必廣, 處之必審, 然後事體尤重, 姑俟他日, 恐合重祀典之道。" 鄭知和言: "許衡請黜, 意有所在, 而以俟他時, 不至有煩, 恐合事宜。 金長生從祀, 宜待士論之僉同。" 閔鼎重言: "聖廟祀典, 不可不審處而致愼。 今若論以名義之正, 則自大聖以下位版改題, 乃是第一事, 最宜先擧周、二程、張、邵、朱六賢, 陞祔殿內, 豈容少緩? 至於諸儒之或仍或黜, 金壽恒之議, 有稽先儒定論, 庶幾得中。 若夫楊時之疵病, 朱子之斥言非一, 而祭延平之文, 以淵源之有自, 倡學之有功許之。 許令從享, 無妨於從周之義。 羅從彦比楊似未較著, 姑俟他日, 更加商量。 許衡旣失身, 餘無足言, 而尊尙朱子, 不染陸氏, 且其論著, 有補世敎。 若與吳澄一時竝黜, 彼此不倫, 宜有斟酌之道。 蔡、黃翼經之功無異, 到今追擧, 更何遲疑。 我東禮學之精熟, 至於金長生無復餘憾, 讀其書、見其禮, 可知其人。 躋聖廟俎豆之列, 舍斯人其誰?" 李尙眞言: "朱子於楊、羅, 不獨言其疵病, 亦多稱許處。 儒相之爲此言, 非謂其陞祔之不可, 只是上而要聖學講究之際, 知有此論, 下而章甫志道之初, 亦知所戒。 此其箚中本意, 今不必更議也。 許衡只取學術之無疵, 且遵聖祖之遺意, 姑爲仍存, 恐不害義。 六賢陞殿, 誠是至論, 議者或以廟宇恢拓爲難, 此固然矣。 惟當觀其事理, 不必論擧措難易。 苟能議定, 則待時亦無妨也, 勉齋宜竝躋。 金長生其學其功之有補於世敎, 無讓於勉齋, 而事重體大, 宜熟講審處。" 李翔言: "漢、唐以下, 配聖廟者太雜, 今朝家釐正, 一洗千古之累。 至於懷孟陋儒, 亦在釐正之中, 似無痕迹, 尤可幸。 吾東從祀八人中, 可議者亦多, 亦欲望釐正於今日。 楊、羅則臣嘗見《中庸》序, 悖師說、淫佛老等語, 又見《中庸或問》所擧諸說之悖及他, 散見於諸書者, 殆非一二。 朱子至比龜山於張皇金虜之人, 滄洲之祀, 又不及楊、羅。 設令楊、羅已爲從祀, 則因循不改, 猶或可也, 到今追擧, 未知如何。 五賢之陞配殿內, 事理當然。 只以時屈擧贏, 未卽奉行, 臣未見其可也。 啓聖廟, 求之情禮, 可謂委曲。 金長生使吾東禮學遠邁中朝, 事業之隆, 爲如何哉? 腏食之議, 人無異辭, 惟聖明量度。" 朴世采、尹拯只陳僭猥, 不敢獻議之意。 上敎曰: "宋朝五賢陞配殿內一款, 依宋領府事疏辭施行, 而此時巨役, 似難輕議, 徐待年豐擧行。 勉齋 黃氏竝與楊、羅三賢, 一體陞配。 許衡則雖不無疵累, 而遽爾黜享, 有煩聽聞, 姑勿擧論。 至於文元公學問道德之高明, 予所洞知。 而第念, 文廟從享, 事體至重, 今不可率爾陞配。 大臣收議中, 姑俟後日云者, 亦甚得宜。 先配五賢宜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