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집현전의 김학사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선원사와 팔만대장경에 대해 알아보았지요. 이번 시간에는 왜 몽골제국은 강화도를 치지 못했는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시작해보도록 하지요.
① 강화도를 치지 못했는가? 치지 않았는가?
유라시아의 많은 나라들이 몽골이 쳐들어오자 무너졌습니다. 버텨낸 나라가 거의 없었지요. 이런 나라들 중 고려가 드물게 수십 년 항쟁을 계속하며 나라를 지켜냈습니다. 물론 고려만 유난하게 수십 년 항쟁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요. 중국(남송), 베트남(쩐 왕조)도 몽골에 대항해 수십년간 항쟁했고 베트남과 이집트(맘루크 왕조)는 아예 승리를 거두어 몽골의 침략의지를 꺾었습니다.
고려의 장기적인 항쟁에 대해 어떤 학자들은 고려의 새로운 도읍인 강화도의 존재에 주목합니다. 몽골군은 고려 전 국토를 짓밟았지만, 고려의 새로운 심장부인 강화도는 한 번도 공격하지 않았(못했)지요. 몽골군이 강화도를 치지 못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최근의 경향은 몽골이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거나 치지 않았다는 설이 다소 강하게 제시되는 편이기는 하지만요.
몽골이 강화도를 ‘칠 수 없었다’는 생각도 다시 여럿으로 나뉘어집니다. 첫째로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는 대로 몽골군에게 수전 혹은 해전에 대한 공포가 있다는 점이고요. 둘째로 중원대륙이나 동유럽, 서남아시아 같은 지역들이 우선이었다는 점입니다. 금나라, 남송, 키예프 공국(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압바스 왕조 등의 경우 말이지요.
앞에서 언급한 이런 ‘주 전선’ 때문에 고려 전선은 다분히 ‘부차적’인 경우입니다. 셋째로 촉박한 일정도 문제였지요. 몽골은 보통 가을에 고려를 침략해들어와서 보통 다음 해 봄에는 귀환해야 했습니다. 수나라나 당나라와 달리 몽골은 추위에 강하고 더위에 취약했으니까 말입니다. 어떻든 몽골은 고려에서 해를 넘기는 장기전을 수행하기에는 불편한 상황이었지요.
넷째로 이 경우는 다른 침략받는 나라들도 마찬가지지만 몽골의 대칸 즉 황제가 자리를 비우게 되는 공위 시대가 있는 경우입니다. 원나라 이전의 몽골은 자동적으로 부자상속이 되지 않는 나라라 이런 공위 시대가 있었고 고려도 이 혜택(!)을 본 적이 있지요. 내부가 어수선한 이 시기에는 몽골의 대외원정이 소극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이런 ‘외부적 요인’만으로는 고려의 수십 년 항쟁을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과연 고려에는 어떤 남다른 점이 있어 몽골에 이토록 저항할 수 있었을까요?
② 강력한 무기인 고려의 지리
몽골의 마형(馬亨)이라는 인물은 고려의 지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저들이 강과 산의 험함을 믿고 바다에 식량을 쌓아 가만히 지키기만 하고 움직이지 않으면, (몽골이) 무슨 계책으로 (고려를) 취할 수 있겠습니까?”
이때가 서기 1269년의 일입니다. 이때는 고려의 전쟁 수행능력이 현격히 떨어져 있을 때였지요. 이런 시기에도 고려의 만만찮음에 대해 마형이 이야기하는 판국입니다. 근거자료는 『원사(元史)』 권(卷) 208 「열전(列傳) 95」이고요. 같은 책에서 마형 외에 마희기(馬希驥)라는 원나라 인물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지금의 고려는 곧 고신라(古新羅)·백제(百濟)·고구려(高句麗) 삼국이 합하여, 하나가 된 것입니다.”(후략)
몽골도 나름대로 고려에 대해 잘 파악한 듯합니다. 한반도의 산악지형과 그것을 활용한 많은 산성들의 존재, 거기서 항전하는 백성들의 의지 등을 말이지요. 몽골이 어디까지 파악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외적의 침입을 막기에 적합한 강화도의 지형조건이나 강화도 정부의 수비 능력도 상당했던 점도 감안 요인입니다. 물론 최씨 무신정권은 비난받아 마땅하지만요.
③ 고려와 조선의 차이
자연환경이 외적을 방어하기에 아무리 유리한 조건을 갖추었다고 해도 지켜내는 일은 결국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원나라(몽골)와 청나라(만주)가 해양민족도 아닌데 결과가 판이하게 달리 나타나는 것은 대체 무슨 이유에서일까요? 아무리 유목민(몽골)과 수렵민(여진·만주)의 차이가 있다고 해도 그들이 육상 위주인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만.
물론 첫 번째와 두 번째 요인은 시대적 상황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요인으로 원나라가 수군 전력 자체가 부족했거나 동원할 상황이 아니었던 반면 청나라는 명나라에서 항복한 수군 전력을 동원할 수 있었지요. 이것이 앞에서 몽골이 강화도를 치지 못했던 이유이기도 할 것입니다. 몽골이 수군을 양성하는 시기는 빨라도 금나라 멸망 시기인 서기 1234년이니까요.
두 번째 요인으로는 원나라와 달리 청나라는 홍이포라는 장거리 대포의 도움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물론 몽골도 비화조나 회회포 같은 그 당시의 첨단무기가 있었지만 자연 그 자체를 극복할 정도는 아니었지요. 청나라의 홍이포도 그런 점은 마찬가지지만 나름대로 성능을 발휘할 여지는 있었습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병기가 발전한 것이지요.
세 번째 요인으로 고려와 조선의 방비 태세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최씨 무신정권의 최우는 사악한 권력자가 맞지요. 인성으로만 보자면 조선 인조보다 하나 나을 것 없는, 아니 훨씬 교활한 집권자가 맞습니다. 다만 같은 악인이라도 최소한도의 통치능력은 있는 권력자와 없는 권력자의 차이라 하겠지요. 조선 인조에게는 그러한 통치능력이 도통 없었습니다.
똑같이 정권 유지에만 혈안이 된 권력자라 해도 최우는 최소한의 준비 정도는 하는 지도자였습니다. 아울러 자존심을 누를 때는 누를 줄도 아는 인물이었지요. 반면 인조는 최우와 달리 ‘정신 나간’ 주장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적어도 강화도 방비만큼은 철저했던 최우에 비해 인조는 큰소리만 쳤지 왕조 아니 정권을 지키기 위한 방비도 제대로 하지 못했지요.
네 번째 요인으로 강화도의 수비환경이 조선 때에 이르러 형편없이 취약해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전란이 많았던 고려와 전란이 적었던 조선을 평면 비교해서 하는 말이 아니고요. 임진왜란 직후 조선 정부에서는 전쟁 중에 떠도는 백성을 안주시키기 위해 농경지 개간에 힘쓰게 되었습니다. 역설적으로 강화도를 침공하기 좋은 요건이 된 것이지요. 이렇게 여러 요인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그 유명한 삼별초 항쟁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