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장 백인살막(白刃殺幕) 1 호화로움의 극치를 보여 주는 대전이었다. 은은한 향내를 풍기고 있는 침향목 가구에는 옥으로 만든 갖가지의 장식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한쪽 벽에는 비단으로 만든 재신(財神)의 족자가 휘황찬란하게 걸려 있었다. 그 족자 속에는 재백성군이라 불리는 풍요의 신이 2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서 있었다. 그런 재신의 뒤에는 황금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그 나무의 가지들은 황금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나무 밑에는 금과 은이 가득 찬 요술상자가 놓여져 있었다. 하지만 그런 대전에 부는 바람은 싸늘하기 짝이 없었다. 꽝! 간단한 주먹 놀림에 자단목으로 만들어진 원탁이 힘없이 부서져 나갔다. "감히 그 놈이 탈출을 했단 말이냐?" 호천중은 크게 분노했다. 호천중의 발 밑에 꿇어 엎드린 하후량은 사시나무 떨 듯 몸을 떨었다. "죄……죄송합니다. 모……모두가 저의 불찰입니다." 하후량의 두려움은 극에 달해 있었다. 만금장의 총관으로 있으면서 그는 호천중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평소에도 조그마한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호천중이 아니던가? 하지만 이번 사건은 보통의 실수가 아니었다. 정말이지 목숨이 100개가 된다 해도 살아남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고 만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학일사가 탈출한 것이었다. 하지만 더욱 가공스러운 사실은 그가 혼자서만 탈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아아! 이제 끝났다. 장주는 날 살려 두지 않을 것이다.' 하후량은 정신이 아뜩해지는 절망감을 맛보아야 했다. 하지만 호천중은 그가 절망으로 인해 쉽게 죽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어떻게…… 어떻게…… 그 자가 감히 탈출을……. 더구나 그녀를 인질로 삼고 탈출할 수 있단 말이냐? 하후량!" 엄청난 분노 때문에 호천중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하후량은 상체를 대전 바닥에 쑤셔 박듯이 움츠렸다. 정말이지 그는 당장이라도 아무런 고통 없이 죽고만 싶었다. 그렇다면 엄청난 고통과 두려움을 당하지 않아도 될 것이 아닌가? "정말이지 뭐라 드릴 말씀이……. 죄……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런다고 사그라들 호천중의 분노가 아니었다. '그 놈이…… 그 놈이 감히!'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부르르 떨면서 혈광이 서린 눈빛으로 하후량을 노려보았다. 학일사. 자신의 뒷조사를 하고 다니던 자가, 아니 자신의 추악한 과거를 샅샅이 알고 있는 그 자가 만금장에서 버젓이 탈출한 것이다. 그것만 해도 분노가 하늘 끝까지 치밀어오를 지경인데 놈은 한 수 더뜬 것이었다. 놈은 어처구니없게도 당숙아를 납치해 달아난 것이다. 아직 혼인은 올리지 않은 처지였지만 당숙아는 엄연히 그의 자부였다. 천하 어디에 내놓아도 한 점 부끄러울 것이 없는 당가문의 금지옥엽이었던 당숙아가 인질이 되어 같이 사라졌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일이었다. '혹시 당숙아가 그 자를 구출해서……?' 하도 어처구니가 없었던 호천중은 이런 의심까지 해 보았다. 하지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그런 가정을 한다는 것 자체가 황당한 것이었다. 사실 호천중에게 있어서 당숙아는 자신의 아들을 구해준 은인과 마찬가지였다. 호천중에게는 호설릉이라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그는 바로 호천중이 천하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자였다. 하지만 호설릉은 호천중을 조금도 닮지 않았다. 부친과는 달리 강직하고 품성이 곧았다. 정말이지 어떻게 호씨 집안에 호설릉 같은 성인(?)이 태어났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호설릉이 언제부터인가 부친의 처세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급기야는 부친에 대한 반항으로 만금장을 뛰쳐나가 가문을 욕하며 술주정뱅이가 되고 만 것이었다. 그런 식으로 부친을 욕하며 자신의 몸과 장래를 망쳐가던 호설릉의 마음을 잡아준 것이 바로 당숙아였던 것이다. 자연히 그는 당숙아에게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호랑이가 아무리 사납기로서니 제 새끼를 미워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말이다. 그는 정신을 차리기 시작하는 자식이 그렇게 대견할 수가 없었다. 또한 호설릉의 마음을 잡게 해준 당숙아에게 더할 수 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호천중이 타인에 대해서 그런 고마움을 느끼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런데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하고 말았으니 어찌 분통이 터지지 않겠는가? 호천중의 분노는 이제 극에 달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장안의 모든 대화성 고수들을 풀어라! 죽여도 좋다. 아니, 죽여 버려라! 그러나 당숙아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손가락 하나 다치게 해선 안 된다. 만금장의 모든 것을 동원해서 그 놈을 잡아라!" 하후량은 이마를 바닥에 찧으며 말했다. "예예! 알겠습니다. 기필코, 그 놈을 다시 잡아들이겠습니다." 호천중은 하후량을 노려보며 쐐기를 박듯 한 마디를 더했다. "하후량! 실패하면 네 모가지가 놈을 대신할 것이다." 시간은 흘렀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경과했으나 학일사와 당숙아의 종적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수백 명의 대화성 고수들이 은밀히 동원되어 장안을 이 잡듯이 뒤졌지만 허사였다. 그들 두 남녀는 그야말로 완벽하게 실종된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 무림에서는 한 가지 경악스런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평화롭기 그지없었던 중원무림에 느닷없이 혈풍이 몰아닥친 것이다. 혈풍을 일으키는 주인공. 그는 다름 아닌 무영천살이었다. 천하제일의 살수로 근자에 새롭게 등장한 그가 느닷없이 일반인의 상식을 뛰어넘는 혈겁을 자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연히 무림의 촉각은 그에게 쏠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은 좀더 분명해졌다. 그의 등장은 철검무정의 도전을 받아들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피에 굶주린 혈신(血神)처럼 중원무림을 휩쓸어갔다. 정도의 정통무맥으로 오랜 역사를 자랑해 온 남궁검가(南宮劍家)가 그의 살검에 멸문지경을 당했다. 뿐만 아니라 마도의 신흥방파인 천공문(天空門)이 그의 검 아래 숱한 사망자를 내고 말았다. 강남무림에서 협도의 대명사로 불리던 자천검객(紫天劍客), 패도의협(覇刀醫俠) 등이 그의 검 아래 목을 내놓고 붉은 피를 흘려야 했다. 가히 공포의 혈풍이 아닐 수가 없었다. 마침내 중원무림의 총본령이라 할 수 있는 대화성에서도 더 이상은 좌시하고 있을 수 없게 되었다. 대화성은 즉각 겁천의 최고 척살령인 천혈첩(天血帖)을 중원 전역에 내리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혈풍을 일으킨 장본인인 무영천살을 잡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보다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그가 누군가를 죽이는 것을 보았다는 사람은 여럿 있었다. 하지만 그가 어디로 떠났는지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무영천살은 머리만 보이고 꼬리는 감춘 신룡인 양 감쪽같이 모습을 감추는 것이었다. 그 와중에 무림인들의 관심은 크게 두 갈래로 갈라지고 있었다. 첫째는 대화성이 그를 잡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둘째는 무슨 이유로 무영천살이 그토록 무자비한 혈겁을 자행하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물론 그 의문 속에는 철검무정과 무영천살의 대결이 언제 이뤄질 것인가 하는 것도 들어 있었다. 2 "내가 백대 고수에게 도전한 것은 그를 끌어내기 위해서였다. 결국 의도대로 그 자는 나타났다. 그런데…… 그것이 나와의 대결을 위한 것이 아니라니……." 유비옥은 허탈한 듯 중얼거리며 술잔을 집어 들었다. 그의 등뒤에는 나부춘(羅浮春: 원래는 술집 이름이 아니다. 소동파가 혜주에 유배되었던 시절 빚은 술의 이름이 술집 간판으로 쓰인 것이다.)이라 쓰여진 붉은 깃발의 간판이 초가을의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유비옥이 지금 마시고 있는 술은 신선조주(神仙造酒)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가양주(家釀酒)의 일종으로써 3월 3일에 딴 야생의 도화꽃잎 3냥, 5월 5일에 딴 마란화( 蘭花: 들국화의 일종이다) 5냥, 6월 6일에 딴 호마화(胡麻花: 깨꽃) 6냥, 구양절 아침에 길은 물, 춘분날에 만든 누룩에다가 살구씨 100개, 마지막으로 밀가루 10근으로 만든 것이었다. 나부춘의 주인은 이것들을 달걀 크기 정도의 덩어리로 만들어 한 달 보름 동안 종이에 싸서 그늘진 곳에 말려 놓았다가 손님이 원하면 한 덩어리를 항아리에 넣고 물을 부어 술을 만드는 것이다.(이런 술이 명나라에 있었다. 당시의 화가 석전(石田)이 쓴 석전잡기에 보이는 기록이다) 쭈욱! 유비옥은 주루의 문을 등지고 홀로 앉아서 또다시 신선조주를 한 잔 들이켰다. 하지만 유비옥의 행동은 어딘가 이상했다. 무영천살이 나타났다는 것을 알면서 무공을 닦을 생각은 하지 않고 넋두리나 하면서 한가롭게 술을 마시는 것은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서인지 나부춘에는 손님이 없었다. 오로지 유비옥 혼자만 술을 마시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 올 때가 되었는데…….' 빈 술잔을 내려놓으며 유비옥은 내심 중얼거렸다. 술 항아리는 이제 거의 바닥을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그는 다시 항아리를 기울여 술잔을 채웠다. 바로 그때였다. 촤르르……. 주렴이 흩어지는 소리가 그의 등뒤에서 들려 왔다. "……." 유비옥은 술잔을 채우던 손을 멈추고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한 인영이 그다지 깨끗해 보이지 않는 문 앞에 서서 유비옥을 보고 있었다. "……." 묘하게 일그러진 입술자락이 냉소를 머금고 있는 듯 여겨지는 청년이었다. 그때였다. 서서히 청년의 얼굴이 펴지면서 환한 웃음이 피어났다. "오랜만이군." 먼저 입을 연 것은 청년이었다. 찰나지간 유비옥도 환한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비유랑! 어서 오게." 다른 술 항아리 하나가 그들의 탁자에 놓여졌다. "자! 드세나." "그러자구. 드세!" 5년 만에 만난 그들은 재회의 기쁨을 술잔을 나누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들의 만남은 말이 필요 없는 만남이었다. 함께 나누는 술잔 속에는 수만 가지의 말보다 더욱 진한 애정과 관심이 담겨 있는 것이었다. 연거푸 세 잔을 들이마신 비유랑이 풍어(風魚: 겨울에 잉어나 붕어를 비늘은 그대로 두고 내장만 제거한 뒤 소금을 발라서 5일 가량 둔다. 그런 후 파를 비롯한 갖은 양념으로 내장을 뺀 배 안을 채우고 종이에 싸서 바람이 통하는 곳에 말린다. 먹을 때에는 불에 살짝 굽는다) 한 점을 젓가락으로 집으며 단도직입적으로 입을 열었다. "우선 내가 알아본 무영천살에 대해 말하겠다." 유비옥은 대답 대신 비유랑의 빈 술잔을 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정확히 한 달 전 산서성에 처음으로 모습을 나타냈다. 물론 이 사실은 본 대화성의 천혜총이 아니면 누구도 알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 유비옥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천혜총의 모든 정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비유랑의 말은 거의가 사실에 가까운 것이다. 따라서 유비옥에게 그 정보는 무척이나 중요했다. "그리고 이어진 그 자의 피의 행로……. 본총에서는 중요하게 생각하고 예의 주시하고 있다. 그것이 우리에게 크게 필요한 사항은 아닐지 모르지. 하지만 그 자가 다시 등장한 목적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하찮은 것이라도 놓칠 수 없다. 그의 행선지를 따라가다 보면 그 자의 최종 목적을 알아낼 수 있겠지." 말을 마친 비유랑은 다시 술잔을 들이켰다. "역시…… 그 자가 다시 등장한 이면에는 뭔가 흑막이 있기는 있는 것 같군." 유비옥은 술잔을 들며 중얼거렸다. 비유랑이 그의 말을 받았다. "틀림없는 사실이지. 그 동안 본총에서 알아본 바로 그 자가 일으킨 일련의 혈겁들은 모두 청부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것이야." 비유랑의 말은 뜻밖이었다. 유비옥은 검미를 치켜올리며 반문했다. "청부라고?" "그렇다네. 정보를 종합해서 얻은 결론에 의하면 그 자의 혈겁은 틀림없이 청부로 인한 것이란 결론을 내렸네." "으음!" 유비옥은 무거운 신음을 발했다. 그의 마음은 납덩이처럼 무거워졌다. 자세한 내막은 알 길이 없지만 그의 부친 무정검호도 누군가의 청부에 의해서 무영천살에게 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의 청부는 보통 청부가 아니다. 그가 지금까지 행한 혈겁은 개인이 아니라 모두가 일가, 또는 문파를 이룬 세력들이었다. '그렇다면…… 단순한 청부가 아니다. 더구나 놈에게 청부를 맡긴 세력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유비옥은 비유랑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천혜총에서는 무영천살의 정체를 파악했나? 또 그 자의 진정한 목적은?" 비유랑은 고개를 흔들었다. "솔직히 말한다면 본총의 막강한 정보력으로도 그 자에 대해 알아낸 것이 별로 없다네. 그 자는 주도면밀하게 꼬리를 감추고 있네. 아직까지도 무영천살이란 자가 어떤 자인지 짐작조차 못하고 있네. 그러니 그 자의 목정은 두말 할 필요조차 없지." "흠……. 자네의 정보력도 무력화시킬 정도라면 놈은 정말 철저한 인물이로군." 유비옥은 침중하게 중얼거렸다. 비유랑은 수긍했다. "그렇다네. 감히 본총의 정보력을 무기력하게 만들 정도니 정말 대단한 자라 하지 않을 수 없지." "그럼 그에게 청부한 자가 누군지는 알아냈나?" 문득 비유랑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것은…… 정확하진 않지만 대충은 알아낼 수 있었네." 유비옥은 비유랑의 표정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며 반문했다. "확실치는 않지만 감은 잡을 수 있다……. 그 자가 대체 누구인가?" 침묵 끝에 비유랑의 입술이 묘하게 말려 올라갔다. "그 자를 기용한 것은 개인이 아니라네." "그럼 집단에서 청부를 했단 말인가?" 비유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영천살에게 청부한 자들은…… 백인살막(白刃殺幕)이라네." '백인살막?' 유비옥은 검미를 찡그렸다. 그는 지금까지 백인살막이란 이름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들은 대체 어떤 자들인가?" 비유랑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네. 본총이 지금까지 총력을 기울여 알아낸 것은 무영천살에게 청부를 부탁한 자들이 백인살막이란 집단이라는 것뿐이네." 놀라운 일이었다. '천하제일의 천혜총이 총력을 기울여 알아낸 사실이 겨우 그 정도라니…….' 유비옥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섬뜩하군. 대화성의 정보망에도 걸려들지 않는 자들이 있다니……. 이건 도무지 믿을 수가 없군." 비유랑은 술잔을 채웠다. "사실이네. 그들이 얼마나 철저히 모습을 숨기고 행동하는지, 본 천혜총이 그 자들의 이름을 알아낸 것만 해도 정말 우연한 일이었네." "으음." 유비옥은 무거운 신음을 토해내고 말았다. 비유랑은 말을 이었다. "때문에 본총은 물론이거니와 대화성의 모든 이목을 기울여 그들의 정체를 밝혀내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네." "당연히 그렇겠지. 한 개인도 아니고 집단에서 무림을 온통 뒤흔들다시피 하는 청부를 했을 때는 반드시 목적이 있을 테니까. 어쩌면 그것은……." 유비옥은 비유랑을 바라보며 말을 얼버무렸다. 자신의 생각과 비유랑의 생각이 같은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의중을 눈치챈 비유랑이 침중하게 말했다. "놈들이 노리는 것은 무림제패일 것이다." 그 말은 유비옥의 의중을 찔렀다. "그렇다면 대화성에서도 모종의 조치를 취했을 터인데……. 어떤가?" "곧 천혜총주가 직접 무림에 나설 것이야." 유비옥은 흠칫했다. "천혜총주라면…… 천심공자 말인가?" "그렇지. 그는 대화성의 후계자로 지목 받아온 지 오래였네. 그는 보통 인물이 아니야. 비록 막강한 배경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점에 영향을 받아 평가되고 있는 것은 아니네. 아무튼 그가 나섰으니 곧 무영천살과 백인살막의 정체가 만천하에 드러나게 될 것이네." 유비옥은 흥미로운 듯 눈빛을 번뜩였다. "흠! 천하의 기재인 자네가 그토록 칭찬하는 것을 보니 천심공자가 대단하긴 대단한 모양이군." "……." 비유랑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묵묵히 항아리를 기울여 잔을 채웠다. 쪼르르……. 밑바닥에 남아 있던 신선조주가 몇 방울 잔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소리쳤다. "주인장! 여기 한 항아리 더 갖다 주시오." "……."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침묵은 탁자에 새 술 항아리가 놓일 때까지 계속 되었다. "자, 드세나." 비유랑은 잔을 부딪치며 말했다. "그런데 동방예는 어떻게 된 건가?" 유비옥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비유랑은 코웃음 쳤다. "아직이 아니라 오지 않는 것이겠지. 그 자는…… 도대체 마음에 들지 않아. 제 놈이 무슨 독불장군이라고 혼자서 무영천살을 죽이겠다고 우스꽝을 떠는 것인지……." 유비옥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지, 그는 큰소리만 치는 친구가 아니야. 자신감을 지니고 있는 친구라네." "어쨌든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사실이다.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려 오지도 않고. 제기랄! 그 친구 혹시 무영천살의 뒤를 혼자 추적하고 있는 거나 아닌지 모르겠군." 비유랑은 도통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렇진 않을 것이네. 그는…… 조만간 틀림없이 날 찾아올 것이다." 비유랑은 궁금한 눈빛을 던졌다. "자네가 어찌 장담하나?" "……." 유비옥은 신비한 미소를 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비유랑은 더 묻지 않았다. 그들 둘 사이에 어떤 묵계라도 이루어져 있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자네는 어찌할 텐가? 무영천살의 행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 않는가?" 유비옥은 담담히 말했다. "찾아야지. 어쨌든 그 자는…… 내 손에 죽을 자이니." "행적을 알 수 없는데도? 그러지 말고 일단 기다려 보는 것이 어떤가? 그 자의 행적을 알아내면 상대하기도 쉽지 않을까?" 유비옥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무작정 기다릴 순 없네. 최선을 다해 그 자를 찾다보면 언젠가는 꼬리를 잡게 마련이지." 유비옥은 몸을 일으켰다. 비유랑은 급히 품속으로 손을 가져갔다. "이것을 가져가게." "뭔가?" "천하에 퍼져 있는 본총의 정보를 언제 어디서고 알아볼 수 있을 것이네." 비유랑이 건네 준 것은 푸른 옥(玉)으로 만든 패였다. 청옥패의 앞면에는 대화(大華)란 두 글자가, 뒷면에는 천혜(天慧)란 글자가 양각되어 있었다. "이건 청화패(靑華牌)로 날 대신하는 신물이네. 장차 요긴하게 쓸 수 있을 것이네." "고맙네." 유비옥은 패를 갈무리한 후 밖으로 걸어 나갔다. 혼자 남은 비유랑은 술잔을 들고 있었다. 3 기이잉! 밀실의 문이 열리는 소음은 그리 크지 않았다. 침상 뒤편으로 은밀히 나 있는 밀실 안으로 들어선 호천중은 일단 옷매무새를 다시 했다.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가 새삼스럽게 옷매무새를 손 볼 정도라면 그가 만날 사람은 필히 보통 인물이 아닐 것이다. 밀실에서 연결되어 있는 암도(暗道)는 제법 길었다. 암도를 걸으며 호천중은 내심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드디어 시작이다! 나 호천중을 천하제일인으로 만들어 줄 장엄한 대역사가…….' 그렇다. 그 사실은 학일사와 당숙아의 실종이 가져다 준 분노를 잊게 할 정도로 짜릿한 것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전면이 희미하게 밝아지며 하나의 석실이 나타났다. "……." 호천중은 석실로 들어섰다. 석실은 그리 넓지 않았다. 사방 2장 정도의 석실 중앙에 탁자 하나와 의자 2개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석실은 텅 비어 있었다. '아직 오지 않았군.' 그는 의자에 앉았다. 지하 특유의 습기가 깔려 있었다. 호천중은 그 냄새를 결코 좋아하지 않았다. 과거에 겪었던 유쾌하지 않은 기억 때문이었다. 지난날 마공을 익히다 주화입마를 당했을 때의 기억이었다. 물론 누군가의 목숨을 제물로 삼아 주화입마에서 빠져 나오기는 했다. 하지만 그의 의식 깊은 곳에는 당시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래서 나이를 먹어도 지하 석실과 같은 공간이 극도로 싫은 것이었다. 호천중은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눈을 지그시 감았다. 대략 1각쯤 지났을까? "……!" 호천중은 석실 안의 공기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느끼고는 눈을 떴다. 그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언제 들어왔던 것일까? 그의 맞은편에 한 인영이 서 있었다. 그를 본 순간 호천중의 가슴은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물론 그를 처음 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매번 그를 대할 때마다 드는 공포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또…… 기척도 없이 나타났다. 만약 이 자가 날 죽이고자 마음만 먹었다면!' 호천중은 자신도 모르게 이마에 흐른 진득한 땀을 훔치며 일어섰다. "오셨구려, 앉으시오." 호천중의 태도는 깍듯하지도, 그렇다고 무례하지도 않았다. 적당한 거리를 둔 모습이었다. "……." 인영은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호천중이 지금까지 기다린 사람은 흑포를 입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얼굴까지도 검은 면사로 가리고 있어 용모를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면사 사이로 반짝이는 두 눈동자만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호천중은 그가 뱀처럼 차가운 심장을 지녔을 것이라 단정했다. '모든 것을 죽여 버린 눈빛이다. 처음에도 그러했지만…… 만나면 만날수록 두려워지는 사람이다.' 이것이 호천중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지금까지 그는 자신이 무림에 알려지지 않은 고수라 자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눈 앞의 흑포인을 대하게 되면 그의 자부심은 금세 사라지곤 했다.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흑포인이 풍기는 기도는 점점 더 그를 두렵게 할 뿐이었다. 탁! 흑포인은 한 권의 붉은 책자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읽으시오." 흑포인은 짧게 말한 후 팔짱을 꼈다. 호천중은 책자를 들며 물었다. "무엇이오?" "조만간 위대한 역사가 시작될 것이오. 그 때를 대비해 호 장주에게 필요한 사항이 기재되어 있으니 모두 읽고 암기해 두시오." 흑포인의 음성은 얼음장처럼 싸늘했다. 도무지 인간의 입에서 나온 것 같지 않았다. 호천중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다른 것은?" "없소. 일러준 대로 행하기만 하면 되오." 호천중은 책자를 집어 들었다. 그다지 두껍지 않은 책자였다. 그는 책장을 넘겼다. "……!" 책을 읽던 그는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것은 제어할 수 없는 흥분 때문이었다. 그는 가까스로 뛰는 가슴을 눌렀다. '드디어…… 드디어 시작이다. 그토록 고대하던 기회가 마침내 온 것이다.' 호천중은 내심 환호했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는 불안감이 없지 않았다.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되면 평생 씻을 수 없는 오욕을 당할 뿐 아니라 가문이 멸문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대화성은 물론이거니와 중원을 배반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과연…… 모든 것이 이들의 말대로 이루어질까? 그리고 내가 이 일을 성공시킬 수 있을까?' 기대와 불안, 희망과 근심이 복잡하게 그의 얼굴에 투영되었다. 분명한 것은 그가 이미 배를 탔다는 사실이다. 강 한가운데로 떠나 버린 배에 타고 있는 것이다. "으음……." 호천중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 나왔다. 흑포인은 차갑게 말했다. "장주가 진 부채는 이미 본인이 해결했소. 그 때문에 걱정할 필요는 없어졌소. 그러니 일러준 대로 이행하시오.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장주는 곧 중원에서 제일 가는 부와 영화를 얻게 될 것이오." 흑포인은 몸을 일으켰다. 호천중은 새삼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렇다! 이제는 어쩔 수가 없다. 어차피 저들이 받쳐 주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내가 이룩한 모든 것은 와해되고 말았을 것이다. 더 이상 망설일 게 뭔가? 후후! 이렇게 든든한 배경이 있는 데 뭘 두려워한단 말인가?' 호천중은 마음속에 드리워져 있던 근심의 그림자를 걷어 버리기로 했다. 문득 그는 중얼거렸다. "후후! 이렇게 되면 누남경을 죽인 것도 공연한 짓이 되고 말았군." 그는 피식 웃었다. 그의 웃음에는 일말의 후회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는 천성적으로 그런 위인이었다. 물론 태어날 때부터 악인은 없다는 말이 있듯이, 아주 가끔이지만 그는 혹시 자신이 악마의 피를 받고 태어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럴 때마다 그는 그것을 부정했다. 이유는 자명했다. 자신이 악인이 아니어서가 아니었다. 자신이 악인인지 선인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부정한 것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20년 전부터 시작된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천하의 그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될 자신만의 추악한 과거를 비밀로 간직하게 되었을 때부터. 하지만 그것 또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찌 되었든 지금에 와서 선과 악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유치한 감상일 뿐이었다. 물론 그로 인해 아들인 호설릉이 자신을 경원시하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은 호설릉의 판단일 뿐이지 자신의 판단은 아닌 것이었다. 물론 인간이라면 어느 누구도 과거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는 없는 법이다. '후회하진 않겠다. 어차피 이렇게 살도록 되어 있는 인생이다. 그렇다면 끝까지 욕망에 충실해 보는 것도 나쁜진 않다. 후후! 아니, 욕망의 불을 지피고 더욱 더 집념을 가지게 되면 그만큼 얻는 것도 많아지지 않겠나.' 호천중은 생각을 끝내고 일어섰다. 흑의인이 돌아갈 태세를 취했기 때문이다. 흑포인은 손을 내저었다. "그럼……." 호천중은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흑포인은 석실에 없었다. 4 "끼랏!" 두두두두……. 만검대를 이끌고 박차를 가하는 잠시랑의 뇌리에 한 여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보름달처럼 고운 얼굴이었다. '후훗! 운향(雲香)…… 조금만 기다려라. 그들을 잡으면 내가 직접 네 머리에 화관을 얹어 주겠다.' 잠시랑은 기분이 좋았다. 만금대회에 참가한 이후 이렇게 기분이 좋은 적은 처음이었다. '크ㅋ! 내 기어코 운향을 내 것으로 만들겠다.' 그가 만검대회에 참가한 것은 오로지 운향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장안에서도 이름난 천애루(天涯樓)의 일급기녀 운향은 잠시랑이 남몰래 연정을 품어온 여인이었다. 잠시랑은 수 차례 그녀에게 자신의 연정을 고백했다. 분명 운향도 그가 싫은 눈치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향은 그의 애간장을 태울 뿐 거절하기 일쑤였다. 몸이 달대로 단 잠시랑은 그녀에게 한 가지 약조를 해 버렸다. 그것은 만금장에서 호위대를 뽑는 대회를 개최하면 즉각 참가하여 우승을 차지한 후 당당히 그녀를 데리러 오겠다고 한 것이다. 그의 보랏빛 꿈은 거의 이루어진 듯했다. 그런데 마가 낀 것이다. 바로 초일사란 작자 때문이었다. 어디서 굴러먹다 온 작자인지 그가 나타나는 바람에 그의 황홀한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이다. 억울하고 분한 노릇이었다. 목전에서 우승을 놓친 그는 고작 몇 푼의 상금에 만족해야 했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인간만사 새옹지마란 옛 성현의 말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반전이 일어난 것이다. '어리석은 놈! 만검대주의 직위를 버리고 야반도주했다니……. 흐흐! 어쨌든 덕분에 네놈만 잡게 되면 내가 그 자리에 오를 수 있게 됐다. 이게 웬 횡재수냐?' 잠시랑은 갑자기 찾아온 행운에 어쩔 줄을 몰라했다. 이제 임무만 완성하면 운향은 틀림없이 그의 아내가 될 것이다. 그녀는 틀림없이 약속을 지키는 여인이기 때문이었다. "끼랏!" 잠시랑은 달리는 말에 박차를 가했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재미납니다.
잼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