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용선생 경기소리판
* 이 글은 2000년 양정환,전숙희가 공동 제작한 전태용 유작 모음 음반
(예술기획 탑, 1CD, 사가반) 해설서에 실린 '내가 아는 전태용 명인'이라는
원고의 초고이다.
경기 민속악 명인 전태용 조사자료
취재,대담 정리/노재명(국악기록보존연구소장)
전태용 명인의 숨은 발자취를 찾기 위해 그와 교류했던 국악인들의 증언을 들어보았다.
전태용 명인을 주변에서 지켜본 사람들은 과연 그의 음악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떤 사람이라고 말하는지 여기 그 취재 내용을 정리해 보았다.
전숙희 명창이 말하는 아버지 전태용, 경기민요 인간문화재 묵계월 이은주 명창이
말하는 전태용의 경기민속악, 전태용 명인과 절친하게 지냈던 김한국 김점석
명인의 증언 내용이 여기 실려있다. 한결같이 그의 뛰어난 예술성과 따뜻한
성품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본 취재에 응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모쪼록 여기 정리된 증언 내용이 많은 분들에게 전태용 명인의 생애와 음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예전에는 부녀지간에 국악 한다는 게 창피했다.
불과 몇년 전만해도 사회 분위기가 그랬고 그래서
나는 아버지께서 국악 한다는 걸 숨기고 부끄러워 했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를 생전에는 그냥 해금, 피리 악사로만 알았지
그 민요 창의 가치를 잘 몰랐다.
이런 소리도 있으니 한번 해봐라 하고 가르쳐 주시면
나는 무시하고 배우려들지 않았다.
그 일을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후회스럽고 가슴이 아프다.
그런데 어느날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아버지의 <뱃노래>를 듣고서
아, 저렇게 하는 소리도 있구나’ 하고 깜짝 놀랐다.
나는 뒤늦게 아버지의 녹음을 들으면서 방창을 해보는데,
구비구비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부를 수 있을까 하고
도저히 흉내내기가 어려운 신비로운 부분들이 많다.
내가 느끼기에는 피리 연주법과 그 성음을 따서 부르는
피리 성음조’ 창법인 것으로 생각된다.
아버지께서는 <창부타령>과 <노래가락>을 즐겨 부르셨는데,
장단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 소리를 하셨다.
그렇기에 무대에서 흔히 불리는 판에 박힌 경기민요에 비해 자연미가 있다.
아버지께서는 어려서 집 뒷동산의 감나무에 기대어
노래 부르길 즐겨 하셨다고 하는데 집안 어른들의 음악을 어깨 넘어로 듣고
그걸 흥얼거렸다고 한다.
아버지께서는 민요의 경우엔 무속세계에서 자득하신 셈이며,
해금과 피리의 경우 육촌형인 전상현 명인한테 배우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법 없이도 살 분이었고 누구와 다투시는 걸 보지 못했다.
노소동락 하셨고 정이 무척 많으셨다. 돈도 그날 벌면 그날 다 써버리셨다.
한이 너무 많으셨기에 그걸 그날그날 풀고 욕심없이 사셨다.
그리고 자기 색깔을 잊지 말고 자신의 성품대로 순색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바 있다.
본 음반의 발매를 계기로 앞으로 ‘전태용 CD 출반 기념회’와
‘전태용제 경기민요 발표회’를 가질 예정이다.
이 음반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애쓰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1998년 7월 9일 전태용 명인의 딸, 경기민요 전숙희 명창 증언)
전태용 명인은 <창부타령>, <뱃노래>와 같은 민요를 즐겨 불렀다.
그분은 서울 외곽지역의 창법으로 매우 특이하게 불렀는데
나 묵계월이나 안비취 씨, 이은주 씨가 부르는 방식과 다르지만
거부감이 들기 보다는 그분 나름의 예술성이 잘 발휘되어 독특한
매력이 있고 듣기가 아주 좋았다.
1960∼80년대 전태용 씨는 지갑성, 지영희, 김광식, 이충선,
성금연 씨 등과 함께 KBS방송국 전속 국악단 등 민속음악 악사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당시 전태용 씨는 해금과 피리 연주를 맡았는데
내가 음반 취입이나 공연, 방송에서 민요를 할 때 반주악사로
함께 많이 활동하였다. 그 반주 실력은 가히 최고 수준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소리하는 사람이 부르기 좋게 잘 반주해 주었다.
(1998년 8월 11일 경기민요 인간문화재 묵계월 명창 증언)
전태용 씨는 일류 해금 악사였다.
나는 그분이 생전에 민요 부르는 것은 보지 못했다.
그분은 1960년대부터 작고하기 전까지 내가 음반 취입, 공연, 방송에서
민요를 할 때 반주악사로 함께 많이 활동하였다.
요즘 그분의 능숙한 해금 반주가 문득 떠오를 때가 있다.
소리하기가 매끄럽고 편안하게끔 반주를 잘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대명인들이 이제 하나, 둘 다 떠나고 없어 너무도 아쉽고 허전하다.
뒤늦게나마 이렇게 그분이 남긴 음악들이 한데 모아져서 음반화 된다니
기쁘게 생각한다.
(1998년 8월 11일 경기민요 인간문화재 이은주 명창 증언)
내가 전태용 명인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내 나이 5,6세 때다.
당시 나는 잔다리(영종도)에서 그분의 등에 엎혀서 자랐다.
그렇게 우린 첫 만남부터 죽음으로 헤어질 때까지 가족처럼 지냈다.
내가 그분과 음악 교류를 시작한 것은 15,16세 때이고 본격적으로
음악 일을 함께 다닌 것은 군복무를 마친 뒤부터다.
그분과 나는 부자지간이나 친형제 이상으로 절친했기 때문에
그분이 세상을 떠나고 없는 지금 나는 팔, 다리가 떨어져
나간 것과 같은 심정이고 세상 살아가면서 마음이 가장 잘 통했던
사람이 없는 이 공허한 마음이라는 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분은 술을 무척 좋아했는데 인천에서 서울만 오면 가장 친하게 지냈던
나와 오자환 씨에게 전화를 해서 밤새 돈이 다 떨어질 때까지 함께
술을 마시곤 하였다.
술과 그분의 의리에 얽힌 추억이 하나 있는데, 1980년대 일본에 순회
공연을 함께 갔을 때 일이다.
당시 공연단장이 춤 인간문화재 김숙자 씨였는데 일본 순회 도중에
소리를 좋아한다는 어떤 재일교포가 김숙자 씨한테 반해서 못살게
구는 바람에 김숙자 씨가 곤욕을 치룬 적이 있었다.
보다 못한 전태용 명인이 김숙자 씨를 보호해 주고 그 교포를 저녁에
불러내 밤새도록 술을 함께 먹으면서 좋아한다는 소리를 끊임없이 들려주어
그 교포의 정신을 쏙 빼놨다.
그 뒤 자초지종을 다 알게 된 김숙자 씨가 덕분에 혹 뗐다며
전태용 명인에게 고맙다고 인사한 적이 있다.
전태용 명인은 민요를 기가 막히게 잘 불렀고 해금과 피리로도 실력가였다.
그리고 우스게 재담을 잘하여 주위 사람을 늘 웃겼다.
그런 재담 하나에도 멋이 깃들어 있는 예술가였다.
굿판에서 그분은 주로 해금을,
나는 주로 피리를 연주했는데 서로 잘 아는 사이니까
연주도 절로 호흡이 잘 맞았다.
1970년대 후반∼1980년대 후반에 그분(해금)과 나(대금)는 이충선(피리),
정달영(가야금), 김득수(장고) 씨와 같이 단짝으로 공연, 방송 등에서
민요 반주 일을 많이 했다.
(1998년 8월 11일 국악인 김한국 명인 증언)
내가 해금과 피리의 대가 전태용 명인을 처음 만난 것은 내 나이 23세 때였다.
그로부터 5,6년 동안 음악 활동을 함께 하면서도 나는 그분이 민요를
그렇게 잘 부른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런데 어느날 지연화 씨가 굿판 뒤풀이 때 해금을 연주하고 있던
전태용 명인에게 소리 좀 해보라고 권했고 나는 별로 기대하지 않고 들었는데
처음 듣는 그 소리는 정말 기가 막혔다.
그때 들은 민요는 바로 그분의 특기인 <창부타령>이었다.
그 소리를 듣고서야 그때까지 독특하다고만 생각했던 지연화, 이소향 씨의
<창부타령> 스타일의 원조가 바로 전태용 명인이었구나 하고 깨달았다.
그 뒤로 1960년대 후반부터 20여년 동안 나는 전태용 명인의 민요를 시간
나는대로 녹음을 했다.
그 소리에 애착을 가지고 녹음한 것은 우선 듣기에 너무 좋고
또 내가 공부삼아, 그리고 후세에 남기기 위해서 한 것인데
이렇게 음반화까지 되니 기쁘고 보람있게 생각한다.
전태용 명인의 창법은 서울에서 보편적으로 불리는 소리에 비해 엇박,
변조가 너무나도 색다른데 그런 소리를 ‘드렁제’, ‘인천제’라 한다.
전태용 명인의 형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 형은 전태용 명인 보다 더 소리를 잘했다.
그 분들의 가족은 모두 민요를 다 그런 식으로 불렀고
그래서 전태용 명인도 자연스레 그런 창법을 터득했던 것이다.
전태용 명인은 호방하고 열린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무언가에 꽁하거나 집착하는 법이 없고 뒷심이 없었다.
(1998년 7월 4일 국악인 김점석 명인 증언)
2000년5월9일
출처 : 국악음반 박물관 -www.hear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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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태용선생 경기소리판 -유작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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