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교회 성도들에게!
오늘부터 드디어 프랑스 대혁명을 살펴보기 시작하려고 합니다. 혁명의 와중에 엄청난 피를 흘렸고 에피소드도 많았고 가지가지 인간상들이 나타났던 프랑스 대혁명! 이 파란만장하고 드라마틱한 프랑스 대혁명을 어떻게 그려낼지가 조금은 두려워지지만 하여튼 재미있게 쓰려고 노력할 예정이니 흥미있게 읽어주기들 바랍니다.
[ 프랑스 대혁명의 의의 ]
서양사에는 중요한 뜻을 갖는 연대가 여럿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던 1789년이야말로 가장 의미가 있는 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 해 이후에 비로서 자유와 평등이 정치적으로 실현되었을 뿐 아니라 혁명이 압제에 대한 효과적인 해결 방안이란 점이 또한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은 프랑스 역사에 대해서는 물론이거니와 그 밖의 다른 나라의 역사에 대하여도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스웨덴, 네델란드, 스위스 등 여러 나라의 민중은 프랑스 혁명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그 예를 따라 자기나라의 사회악과 정치적 모순을 개혁하려고 시도하였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19세기 전체를 통하여 구질서의 고수파와 신이념의 옹호파사이에 투쟁이 계속되었다. 그 결과 유럽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혁명이 승리하였다. 오늘날 프랑스 대혁명이 내세운 자유, 평등, 박애의 표현은 여전히 정치, 사회철학으로서의 생명력을 잃지 않고 민주주의 체제의 기본으로 되어 있다.
프랑스 대혁명은 근세의 역사적 발전의 출발점이며 따라서 거기에 대한 이해는 19세기의 역사뿐 아니라 현대사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전제가 되는 것이다.
이제 프랑스 혁명의 전개과정을 살펴 보기 전에 이 혁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두 사상가, 인간의 이성적인 면을 강조한 볼테르와 이와 반대로 인간의 감성적인 면을 강조한 루소 이 두 사람에 대하여 알아 보고 마지막으로 ‘백과전서파’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 볼테르와 그의 사상 ]
볼테르(Voltaire)는 필명이다. 그의 본명은 프랑스와 마리 아루에였다. 그는 1694년 11월 21일 파리에서 한 공증인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에게서 직접 교육받아온 프랑스와는 1704년 10세의 소년으로서 파리에 있는 예수회파의 루이 르그랑대학에 입학했다. 이 학교에서 그는 주로 문학과 신학공부에 열중했다.
루이 15세 왕의 섭정을 비난하던 프랑스와는 1717년 4월 16일 바스티유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는 감옥에서 처음으로 볼테르라는 필명으로 ‘앙리아드’라는 장편시를 완성했다. 석방되자 그가 쓴 희곡 ‘외디푸스’가 무대에 올려져 대성공을 거두면서 문필가로서의 주목과 환대를 받기 시작한다.
1725년 12월 한 사교장에서 볼테르는 어떤 후작에게 불손한 언동을 보임으로써 결국 영국으로 추방된다. 3년 동안 계속되는 그의 영국생활은 그가 학자로서, 또는 사상가로서 성장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였다. 32세의 나이로 영국에 도착한 볼테르는 일년내에 영어를 완전히 습득하고 당대의 문예사조를 비롯해서 뉴턴, 로크, 흄, 샤프츠베리, 포프 등의 사상에 정통하게 된다.
그가 이때 쓴 ‘철학서한’은 영국인이 누리는 자유에 비교하여 고국의 부패한 귀족들 및 그들과 결탁한 기독교를 신랄하게 비판한 것이다. 이후 프랑스로 귀국한 그는 이 책 때문에 또다시 바스티유에 투옥될 위험에 처한 그는 샤틀레 백작부인과 함께 로렌지방의 그녀의 성으로 피신한다.
이후 샤틀레 부인이 죽을 때까지 두 사람의 애정관계는 변치않고 지속되었다. 볼테르의 생전에는 많은 비극작품으로 17세기 고전주의의 계승자로 인정되었으나, 오늘날에는 간결한 문체의 ‘자디그’나 ‘캉디드’ 등의 철학소설, 그리고 문명사적 관점에 따른 역사 작품이 더 높이 평가된다.
한편, D.디드로, J.J.루소 등과 함께 백과전서 운동을 지원하였으며, 백과전서파의 한사람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한 그는 종교적 관용, 뉴턴 과학의 보급, 언론의 자유 등을 위해 저술하는 한편 이신교(전통적인 기독교의 교리 대부분을 거부하고 종교를 이성과 합치시키려는 움직임인데 모든 종교의 형식주의와 불관용의 중지를 주장하였다)를 선전하였다.
그는 수많은 역사, 희곡, 팜프렛, 에세이, 소설 등을 썼으며 약 10만 통의 서간을 통해서 합리주의의 복음을 퍼뜨리고 구체제하의 사회악을 폭로하였다. 볼테르는 체계적인 정치이론을 갖지 않았으나 93권이나 되는 그의 저술의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견해에 의하면 근본적으로 국가란 지배자 개인의 영광과 야욕을 위해서가 아니라 백성의 필요와 희망을 충족시키는 하나의 도구로써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볼테르의 이상적인 정부형태는 지식수준이 높은, 정선된 제한된 수의 투표권자들의 집단에 의한 대의민주제였으나 실제의 기존정부형태 중에서 그가 좋다고 생각한 것은 현명하고 정의롭고 그리고 전권을 갖는 가부장적인 왕, 즉 계몽군주에 의한 정부였다. 이 점에서 볼테르는 모든 계몽사상가들과 같이 시대의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온건한 개혁자에 불과하였다.
[ 루소와 그의 작품 ‘고백록’ ]
18세기의 사상가 가운데 장 자크 루소만큼 수수께끼 같은 인물은 없을 것이다. 프랑스의 위그노계(신교도)의 스위스인 루소는 제네바에서 태어났으며 가정교사, 급사 등의 일에 이르기까지 여러 종류의 직업을 전전하면서 유럽 각지를 유랑한 사람이었다. 그는 당시대의 이성존중의 풍조에 반항하여 이성보다 감정과 본능이 더 중요한 인간행위의 동기임을 가르치려고 하였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라는 그의 철학은 그의 작품’신 엘로이즈’와 ‘에밀’에서 계속 강조되었다. ‘신 엘로이즈’는 낭만적인 소설인데 인위적이며 퇴폐적 문명을 비판하고 단순, 소박한 생활로 되돌아 갈 것을 주장하였다. 교육사상을 밝힌 ‘에밀’에서 루소는 교육의 목적이 지식의 주입보다도 개인의 잠재능력과 개성을 계발시키는 데 있다고 주장하였다.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라는 주장은 당대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흄, 페인, 헤르더, 칸트와 같은 사상가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루이 16세(프랑스 혁명 때 단두대에서 목이 잘린 왕)의 왕비 마리 앙뜨와네뜨(그녀 역시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다)조차 베르사이유 궁전안에 농가를 짓고 소젖을 짜거나 시녀들과 함께 고기잡이를 할 정도였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의 서두에서 “사람은 태어날 때 자유로우나 현재는 어디서든지 쇠사슬에 매여 사는 것을 본다”라는 말로 필요악으로서의 사회를 논하였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프랑스 혁명의 성서라 불렸으며 프랑스 혁명의 모토(현재 프랑스 국기인 빨강, 파랑, 하얀 색깔은 이를 나타내고 있다)인 ‘자유, 평등, 박애’의 표어도 거기서 뽑아낸 것이었다.
루소는 영원한 行者였다. 인생의 전반은 스스로 방랑했고 후반은 쫓기어 유랑했던 浪者였다. 루소는 걷고 있지 않으면 생각이 안 되는 사람이었다. 걸음을 멈추면 생각도 멈추었다. 그는 ‘고백록’에서 ‘정신을 움직이려면 육체를 움직이고 있어야 했다’ 또 ‘나는 혼자 여행을 하며 걷던 때만큼 생각이 잘 되고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때는 없었다’라고도 했다.
그 긴 도보 여행의 길은 곧 ‘고백록’의 길이다. 장 자크 루소의 ‘고백록’은 자전문학의 원전이다. 그는 이 자서전에서 자신을 대담하게 표출 시킴으로서 그 자아의 해방으로 그를 낭만주의 문학의 선구자가 되게 했다. ‘고백록’은 루소가 자부한 대로 인간연구의 고전이 되었고 이런 것은 전무후무하리라던 루소의 예상과는 달리 뒷날 많은 모방자들의 고백문학을 낳게 했다.
‘고백록’은 루소의 탄생에서부터 시작하여 1765년 그가 스위스 땅을 떠나던 53세 때까지의 기록이다. 2부로 나뉘어 각 부마다 6권씩 도합 12권으로 되어 있고 청년시절까지의 제1부는 밝고 희망적인데 반해 제2부는 박해에 쫓겨 어둡고 침울하다. 루소의 가장 고달픈 망명시대인 1764-1770년 사이에 쓰여져 사후에 출판되었다.
루소는 고향 제네바를 떠나 안시(알프스 연봉이 병풍친 프랑스 남동부의 아름다운 호반도시)에서 시계 조각의 견습공 노릇을 하다가 16세 때인 1728년 그의 일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바랑스 부인을 만나게 된다. 바랑스 부인은 눈매가 부드럽고 살갗이 눈부시고 목덜미가 매력적인 28세의 미인이었다.
”나는 도착했다. 바랑스 부인을 만났다.이 시기가 내 성격을 결정했다”라고 그는 ‘고백록’에서 감격적으로 썼다. 루소는 다시 안시를 떠나 스위스 일대와 파리 등지로 1,500km의 도보여행을 한 끝에 1731년 안시 남쪽 샹베리에서 바랑스 부인과 재회했다. 이 두 사람은 이곳에서 동거를 시작한다. 12세 연상의 여인의 사랑의 고백을 받고 그의 애인이 된 것이다.
자연 속의 독학자이던 루소는 이곳에서 문학, 철학, 과학에 관한 책들을 열심히 읽었고 바랑스부인으로부터는 사회인으로서의 예의를 배웠다. 이 곳에 살 때 루소의 일과 중의 하나는 아침 일찍 산보하는 일이었다.
’매일 아침 해뜨기 전에 일어나 근처의 과수원을 지나서 아름다운 길로 올라간다.이 길은 포도밭위에 있으며 등성이를 따라 샹베리까지 뻗어 있다’-고백록 제 6권에서,
루소는 다시 샹베리를 떠나 15년간의 긴 방랑 끝에 돌아와 바랑스 부인을 마지막으로 만났다. 바랑스 부인은 이미 늙어 있었다. 바랑스 부인이 죽자 6년 후인 1768년 루소는 바랑스 부인의 무덤을 찾아왔다.
루소는 파리에서 50km 북쪽인 에르므농빌에서 죽었다. 루소에 심취하여 그를 간청해 모셔왔던 지라르댕 후작의 城館에서였다. 루소는 여기에서 자연과 재회했다. 매일 숲을 산보하며 ‘고백록’의 속편이라고 할 수 있는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을 썼다. 루소는 다른 날처럼 일찍 일어나 산보를 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아침을 먹은 뒤 기분이 언짢다고 머리를 두 손으로 싸매더니 앉은 의자에서 굴러 떨어졌다.
곁에 있던 아내 테레즈가 일으켜 세웠으나 이미 죽어 있었다. 에르므농빌 근처 장 자크 루소 공원의 숲 가운데에는 호수가 있고 호수 한쪽 기슭에 섬이 있는데 루소는 이곳에 묻혔다.
이후 이곳에 벤자민 프랭클린(미국 독립혁명의 아버지중의 한 사람)이 찾아오고 로베스피에르(프랑스 혁명당시 자코뱅당을 이끌면서 반 혁명인사들에 대한 피의 숙청을 단행한다)가 찾아오고 나폴레옹도 찾아왔다.
나폴레옹은 루소의 사상이 프랑스 대혁명을 주도한 것을 상기하여 “프랑스의 안녕을 위해서는 이 사람이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나았다”라고 루소의 무덤 앞에서 중얼거렸다. 그 무덤이 지금은 텅 비어있다. 섬에 남은 것은 ‘자연과 진실의 인간이 여기 누웠다’고 쓰인 석관뿐이다.
프랑스 정부가 1794년 루소를 위인으로 예우한다고 1794년 유해를 파리의 팡테옹으로 옮겨가 버린 것이다. 루소는 팡테옹의 컴컴한 지하실에 갇혔다.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외치던 루소는 죽어서는 분하게도 자연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 백과전서파 ]
많은 지식인들의 협동작업으로서 혁명전의 프랑스 사회를 과감하게 비판한 획기적인 업적은 ‘백과전서(Encyclopedie)’였는데 그 부제는 ‘과학, 예술, 기술의 합리적 사전’이었다.
디드로(1713-1784)에 의해 1751-1772년에 걸쳐 편찬 된 17권의 본문과 11권의 도판을 가진 방대한 이 사전은 비단 지식의 저장고일 뿐 아니라 전통적인 사회악과 권위에 도전하는 무기였는데 약 20년 동안 발매금지, 발행권 취소를 비롯하여 각종 탄압을 받았다.
그것은 역사상 최초의 백과사전이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진보를 위해 적극적인 힘을 작용한 최초의 백과사전이었다. 그것은 계몽사상 시대의 새 사상을 전파하는 매개체가 되었으며 계몽사상가들의 기념할 만한 업적이었다.
기고자들은 실질적으로 모든 대표적인 계몽사상가들, 예컨대 볼테르, 몽테스큐(‘법의 정신’의 저자), 루소, 달랑베르, 뷔퐁, 튀르고, 케네, 돌바크 등이었으며 그밖에 유명,무명의 과학자,철학자,성직자 등이 해당 항목을 집필하였다.그리하여 이 사람들은 집단적으로 백과서전파라고 불려지게 되었다.
요컨대 프랑스에서는 1750년부터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는 1789년에 걸쳐서 백과전서파의 이성혁명과 루소의 감정혁명이 서로 나란히 진보를 거듭했다.
[ 대혁명의 진행 ]
프랑스 대혁명을 이야기 하자면 먼저 당시 프랑스 사회의 신분제도와 깔끔하게 마무리할 수 도 있었던 혁명을 더욱 확대시키고 급기야는 본인은 물론 왕비도 길로틴에 의하여 목이 잘린 당시 국왕 루이 16세에 관하여 알아보자.
[ 신분 제도 ]
제1신분: 제1신분을 구성하는 성직자들은 총 인국의 0.004%에 지나지 않은 10만 정도에 불과하였으나 전 국토의 10%를 소유하고 거대한 지조를 받고 면세의 혜택을 누렸다. 더욱이 출생, 결혼, 사망, 불온서적 검열, 학교 교육을 장악하고 모든 수확에 십일조를 받는 등 그들이 누린 경제적, 사회적 특권은 엄청났다.
제2신분: 제2신분은 귀족으로서 이들은 교회, 군대, 행정의 고위직을 맡고 있었다.전 국토의 20%를 약 20만에서 25만의 귀족들이 소유하였고 그 토지로부터 세금과 봉건 영주의 영주권으로서 경제 및 경제외적 강제를 행사할 수 있었다.
제3신분 : 제3신분은 혁명을 주도한 시민, 그리고 시민을 뒷받침하여 혁명을 성공하게 도와준 농민, 도시노동자로서 구성되었다. 시민은 상인,수공업자,변호사,문필가,중간 관리들로 구성되었고 평민 출신을 부끄러워하여 어떻게든 귀족들의 생활을 흉내 내는 경향이 있었으나 이들은 계몽사상의 세례를 듬뿍 받은 사람들이었다.
프랑스 대혁명은 바로 이들(제1신분, 제2신분)과 (제3신분과)의 갈등에서 빚어졌고 혁명의 과정에서 이웃 영국과는 달리 엄청난 피를 흘렸고 이어서 나폴레옹의 독재시대를 맞게 된다.
[ 루이 16세 ]
절대왕정에 있어서는 국왕의 인격이 통치의 전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권의 가치는 국왕의 가치로서 좌우되기 때문이다. 루이는 20세가 되던 해인 1774년에 왕위에 올랐다. 그는 착하기는 했지만 아둔하고 무능한 군주로서 절대왕정에 관한 일보다는 취미생활-사냥과 자물쇠 만들기-에 더 관심이 많았다.
1789년 7월 14일 군중이 바스티유 감옥을 공격하던 날도 그는 일기장에다 “아무 일 없었다”라고 썼을 정도였다. 그는 우유부단하여 누구에게나 조언을 요청했다. 나는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물었을 때 리바롤(18세기 풍자작가)은 국왕답게 하시라고 대답한 일이 있었다. 모든 소심자가 그러하듯이 그도 진퇴양난일 경우에는 사람의 마음을 몹시 상하게 하는 분노를 터뜨렸다.
그보다도 그는 항상 기마(사냥)와 철공(자물쇠 만들기)에 지쳐서 정신이 몽롱해 있었다. 그는 즉위할 당시 매우 유능한 인물인 튀르고를 재무 장관으로 삼고 있었는데 사실 이는 루이에게는 대단한 행운이었다. 그렇지만 루이는 즉위한 지 2년 만에 이런 행운을 차버렸다.
튀르고가 옹호한 경제 개혁이 귀족들로부터 심각한 반발을 사게 되자 개혁을 강행하는 대신 튀르고를 해임해 버린 것이었다. 이 때부터 국가 정책이 갈팡질팡하더니 결국에는 국왕의 통제를 벗어나 궁정 신하들의 이해 관계에 좌우되게 되었다. 이러한 왕의 실정에 누구보다도 책임이 있는 인물은 오스트리아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이자 루이의 왕비인 마리 앙뜨와네뜨였다.
허영심 많고 고집스러우며 궁중 오락과 음모를 좋아한 앙뜨와네뜨는 개혁가들과 지식인들, 그리고 평민들로부터 미움을 샀다. 다이아몬드를 선물했다는 이유로 한 추기경을 총애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왕비의 평판은 그야말로 땅에 떨어졌다. 그리고 이 두 사람(왕과 왕비)은 궁중의 농담거리가 되었다.
다음편부터 본격적으로 프랑스 혁명이 진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