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형의 섬 소록도 2007/09/05 18:16 | 추천 0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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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 연육교
구라탑
천형(天刑)의 섬 소록도(小鹿島)
바람처럼 떠나고 싶었다. 구름처럼 떠다니고 싶었다. 바다 위를 표류하는 조각배처럼 하염없이 흘러가고 싶었다. 그래서 배낭 하나만 달랑 짊어지고 부산을 떠났다. 목적지도 일정도 없이 막연히 호남으로 떠나가 는 버스에 몸을 실은 것이다. 창변으로 스쳐가는 농촌 풍경 속에서 진달래꽃 따먹던 어린 시절을 그리다가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진주를 지날 때에는 까까머리 열일곱 살 소년이 되어 행운의 네 잎 클로버를 찾던 꿈을 꾸었고, 차가 멈춘 순천에서는 현실로 돌아와 여비를 아끼려고 값싼 돼지국밥으로 점심 요기를 했다. 어디로 갈까? 망설이다가 탄 차가 고흥으로 가는 버스였다. 전라남도의 다도해 지방을 둘러보기로 한 것 이다. 발 디딜 틈도 없이 손님을 태운 버스는 벌교읍을 지나자 고흥반도를 가로질러 녹동이라는 조그마한 포구에서 걸음을 멈춘다. 지도상에는 풍남이 수륙 교통의 연락지로 그려져 있는데도, 사실은 그게 아니라 는 주민들의 말에 따라 엉뚱한 곳으로 오고 만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우연하게도 고흥반도의 끝 동네인 이 포구는 산 모양이 노루를 닮았다고 하여 큰 노루 동 네(大鹿洞)라는 이름이 붙은 마을이고, 바다 건너 마주 보이는 섬이 작은 사슴 동네(小鹿洞)라고 한다. 아, 작은 사슴의 섬! 그렇다면 저 섬이 바로 소록도(小鹿島)란 말인가? 팔을 길게 뻗으면 잡힐 듯한 섬이 소록도라는 말을 들은 나는 그곳을 찾아가 보고 싶었다. 왜일까 ? 사회의 저주와 학대에 못 이겨 이 외딴 섬에까지 쫓겨와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찾 아가서 무엇을 어쩌겠다는 말인가. 하지만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는 이미 소록도로 가는 배에 올라타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배를 정박할 수 있도록 편리하게 만들어 놓은 소록도 부두에는 때마침 마이크로 버스가 출발을 서두르고 있었다. 나는 어디까지 가는 차인지도 모르고 출발하려는 버스문에 매 달리면서 함께 타고 가기를 청했다. 그런데, 아 ! "저기 안내소에 가서 허가를 받으면 태워다 드리겠습니다."라고 하는 젊은 운전 기사는 눈썹 이 없었다. 그리고 타고 있는 손님들도 하나같이 눈썹이 없는 사람들뿐이었다. 여기가 바로 소록도였던 것 이다. 안내소를 찾았다. 문을 밀치고 들어서니, 인심좋게 생긴 직원이 누구를 면회왔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면 회할 사람이 없는 나는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그랬더니 직원은 사뭇 노한 목소리로 이곳은 관광지가 아니 니 돌아가란다. 나는 안내원을 잡고 사정을 했다. 그리하여 겨우 까다로운 수속을 마치고는 신분증을 맡겨 놓고 손에 받 아쥔 것이 국립 소록도 병원장이 발행한 소록도 출입증이다. 안내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하얀 탑이 서 있다. 순라탑(殉癩塔)이라고 한다. 여순반란사건과 6.25 사변 때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도 이 섬을 사수한 나환자들의 추모비라고 한다. 6.25 사변의 피해가 이 곳까지 미쳤 으리라고는 나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들은 천형을 받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어쩌겠다고 총부리를 댔 을까 ? 소나무가 울창한 고갯길을 오른다. 황톳길이다. 주검보다도 더 적막한 황톳길을 오르면서 나는 '전라도 길'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삼거리를 지나도 쑤세미 깉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속으로 쩔룸거리며 가는 길 .....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신을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길.
원산에서 형무소를 탈옥하여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자유와 평화를, 그리고 황홀하리만치 아름다운 조국 의 산하를 그렸던 한하운, 그러나 나병으로 말미암아 거처가 없어 동서남북으로 쫓겨다니는 신세가 된 문 둥이 시인. 그리하여 마침내 소록도를 찾아들며 쓴 시가 바로 이 '전라도길'이 아니던가. 얼마나 많은 나환자들이 이 고갯길을 오르면서 이 시를 되뇌었을까. 엄연한 인간이면서도 짐승보다도 못 한 대접을 받으며 살아가던 그들이, 구천에 사무치는 슬픔과 괴로움을 속으로 속으로만 삼키다가 인간 대 열에서 쫓겨나면서, 내 죄가 무엇이냐고 하늘을 향해 통곡하며 이 고갯길을 올랐으리라. 괴로워서 발걸음 을 멈출 때마다 떨어져 나간 발가락 하나씩을 움켜쥐면서 고통과 설움에 피눈물을 흘렸으리라.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꼬부랑 길을 따라 올라선 고갯마루에는 하얀 천주교회가 섰고, 그 앞에는 김대 건 신부와 성모 마리아 상이 고맙게도 마중을 나와서 천형으로 멍든 나환자들의 피맺힌 가슴속에 하느님 의 사랑을 전하고 있었다. 그렇다. 갈기갈기 찢어진 이들의 육신과 마음의 상처를 따뜻하게 어루만져 줄 이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 뿐인지도 모른다. 그 누가 이들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 주었던가. 그 누가 따스한 위로의 말 한 마디 해 주 었던가. 하지만 하느님은 이 천형의 섬에까지 와서 따스한 사랑의 손길을 펴고 있지 않은가. 고개를 넘어서니 병원 관사라는 이끼낀 빨간 벽돌집들이 양지바른 숲속에 자리하고 섰고, 솔숲이 끝나는 그 높은 곳에는 나병원과 간호원 기숙사가 하얀 몸단장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뛰놀고 있는 등성이를 지나고 다시 얼마를 걸어서 찾은 제2 안내소에는 직원이 한 사람뿐이었 다. 이 병원에 근무한 지 20년도 넘었다는 안내원은 타고난 천성이 착해서인지, 아니면 혼자 근무하기가 적적했던지 소록도 병원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 준다. 1916년에 설치된 이 소록도 국립 병원은 150여만 평이나 되는 넓은 부지에 직원들이 사는 건강지대와 환 자들이 사는 병사 지대로 구분되어 있는데, 이 안내소가 바로 그 경계선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이곳을 경 계로 하여 철조망이 쳐져 있었지만, 의학이 발달된 지금은 아무리 심한 나환자일지라도 6개월 정도만 치료 하면 나병균이 활동할 수 없는 음성이 되기 때문에 구태여 분리할 필요가 없어서 철책을 철거해 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도 전국에는 5만여 명의 나환자가 있고, 이곳에만도 2,300명이 수용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300명만 활성이고 2,000명은 음성 나환자들이라고 한다. 너무나 자상한 설명에 감사하며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새하얀 한복을 입은 아주머니가 안내소를 찾는 다. 서로가 아는 사이인 듯 별다른 말도 없이 면회 수속을 마치고 병사 지역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는 그녀 의 예쁘장한 얼굴에는 수심이 서려 있었다. 충청도에서 온 아주머니라고 한다. 부모가 이곳에 수용되어 있어도 찾아오기는커녕 오히려 숨기고 사는 세상인데도 저 아주머니는 이곳에 수용되어 치료를 받고 있는 남편을 위해 달마다 천릿길을 멀다 않고 찾 아온단다. 갖가지 음식을 장만해 와서 남편을 간호하고 가는 아주머니의 그 지극한 정성에는 병원 직원들 도 감탄을 한단다. '가장 곤란하나 가장 본질적인 것은 생(生)을 사랑하는 것이다. 괴로울 때도 사랑한다는 것이다.....' 한 하운이 황톳길 책의 서두에 육필로 적어 놓은 이 글귀처럼, 저 여인은 괴로워도 사랑때 문에 천형의 길을 가는 사랑하는 이의 나병을 고치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신념처럼 '나병은 고칠 수 있다.'라고 쓰인 커다란 표지판을 뒤로 하고, 여인이 밟고 간 숲속의 길 을 따라 병사 지대로 발걸음을 옮기다가 조그마한 공원에서 발을 멈췄다. 그런데 어쩌면 이렇게도 정성들여 가꾸어 놓았을까 ? 미카엘 천사상을 중심으로 한 조그마한 공원에는 갖가지 꽃과 나무들이 너무나 탐스럽게 가꾸어져 있고 커다란 바위에는 한하운의 시 '보리피리'가 새겨져 있었다. 세상에 이보다 더 정성이 깃든 공원이 어디에 또 있을까 ? 그들은 백번을 씻고 천번을 다듬어도 저주스 럽기만 한 자신의 얼굴 대신 온 정성을 다하여 이 나무들을 가꾸었을 것이다. 그 옛날 어여뻤던 처녀 시절 에 거울 앞에 앉아서 화장을 하던 꿈을 꾸면서 자기의 분신처럼 가꾸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언젠가 병마의 사슬에서 풀려날지라도 지울 수 없는 육신의 상처 때문에 고독한 이 섬에서만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 이들은 인정이 얼마나 그리울까 ? 친구도 형제도 사랑하는 사람의 정마저도 저주로 변해 버린 이 참담한 현실 앞에서 인정에 목말라 흐느끼는 사람들. 그래서 바닷가 조약돌을 주워모아 '모 정(母情)'이라 새겨 놓고 그 앞에 꿇어앉아 하염없이 기도를 드리고 있는 사람들. 그러다가 허공을 향하여 목멘 소리로 불러보는 이름은 '어머니!' 그렇다. 이들에게 변함없는 사랑을 주는 사람은 오직 어머니뿐이다. 하지만 고향으로 달려가 얼싸안고 어머니라고 불러볼 수도 없는 이들은 어머니가 그리울 때마다 저 멀리 고향 하늘을 바라보면서 '보리피리' 노래를 부르리라.
공원을 벗어나자 환자들의 주택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어떻게 생활하고 있을까? 호기심과 두려운 마음으로 찾은 그들의 주택은 나의 선입감을 여지없이 짓뭉개 버렸고, 말없이 일에만 열중하고 있는 그들 의 모습을 보고선 내가 오히려 당황하고 있었다. 비록 눈과 코가 짓뭉개지고 손가락과 발가락이 떨어져 나갔으며 팔과 다리가 뒤틀렸을지라도 그들은 부 지런히 일을 하고 있었다. 각자가 자기의 힘이 닿는 대로 돼지도 기르고 유휴지를 개간하여 과일나무며 갖 가지 농작물을 재배하고 있었다. 사회에서는 인간 이하의 천대만 받아오던 그들이지만 이곳은 그들만의 꿈의 낙토를 건설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웃끼리 서로 도우며 살아가고 있었고, 교회에 모여 앉아 함께 찬송가를 부르고 있었다. 성 다니엘 신부가 생각난다. 네덜란드 사람인 그는 27세의 젊은 나이로 미국 하와이 나환자 마을에 찾아 가서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일생 동안 그들을 위해 봉사하다가 결국에는 나병에 걸려서 49세 때 운명을 하면서 "나는 참으로 행복하게 살았다."라는 유언을 남긴 그는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가. 그런데도 나는 처절한 고통 속에 살아가는 그들의 손이라도 한번 잡아보기는커녕 따스한 말 한마디 남기 지 못하고 돌아서다니.... 하지만 마음속으로만은 천번도 더 외쳤다. "하느님이시여! 천국이 있다면, 진정 천국이 있다면 내세에는 이 한센씨 병자들을 천국에서 태어나게 하 시옵소서! 그리하여 구천에 사무친 이들의 원한을 풀어주시고 울음마저 잃어버린 얼굴에 밝은 웃음을 주 시옵소서! " (보건법률 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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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변하기전의 소록도를 그린글이군요.저도 몇년에 한번씩 찾아가는 곳인데 그 공원 여름 햇빛받아 반짝이던 초록잎들이 늘 마음에 살아있습니다.
필 뉠리리 보리피리 불며 문둥이 시인 한하운 찾아간 소록도 앞 녹동항에서, 문득 남인수 <애수의 소야곡.> 들으며 새악시 젖가락 장단에 밤새 마시고싶던 생각 납니다.
잊혀저 있는 분들의 삶을 조명해 주시고 같이 아파하시는 선생님은 진정 천사가 아닐까요? 세세하게 넘 잘 알려주심에 가슴아프면서도 찡해 옵니다 궂은곳에서 봉사하시는 분들의 모습을 보면 나는 뭘하고 살았을까? 부끄럽습니다 선생님 넘 잘봤습니다.
그곳을 찾은것만도 존경스러워요.좋은글과 사진 감사해요 아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