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작가가 들려주는 제주이야기, 그 열한번째 이야기는, <1만 8천 신들의 고향 제주>, <거대한 서사시, 본풀이>에 관한 이야깁니다.
거대한 서사시, 본풀이 (신화)
1만8천 신들이 살고 있는 섬 제주, 예로부터 제주에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신의 이야기, 신화가 많다. 고난과 역경을 통해 신으로 좌정하기까지의 과정이 한편의 서사시처럼 흥미롭게 전개되는 신화를, 신의 뿌리와 내력을 푼다하여 본풀이라 부르기도 한다. 본풀이란, 본과 풀이의 복합명사로, 신의 출생에서부터 신으로서의 직능을 차지하여 좌정하기까지 그 유래와 내력을 해설하는 이야기다. ‘서사무가’, ‘신화’라고도 불리우며 각 마을, 신당과 집안마다 다양한 본풀이가 전해져 오고 있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본풀이는, 크게 일반신 본풀이, 당신 본풀이, 조상신 본풀이로 나뉘어진다. 인간의 기원은 물론 하늘과 땅, 산과 바다, 마을이 생긴 내력, 그리고 희노애락(喜怒哀樂), 생노병사(生老病死)가 모두 본풀이 속에 담겨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일반신 본풀이는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을까? 일반신 본풀이는, 일반적으로 다른 본풀이에 비해 이야기가 길고, 서사적인 구조를 갖고 있으며 다른 지역에서 전래된 본풀이다. 천지, 생사, 질병, 농경, 어로, 빈부 등, 자연과 인간생활의 일반적인 사상을 관장하는 일반신 이야기로, 현재 제주에는 열두 본풀이가 전해져 오고 있다. 그중에서 널리 알려진 것이 ‘이공본풀이’와 ‘세경본풀이’다.
그중에서도 우선 이공본풀이을 간단히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나이 사십이 없도록 자식이 없던 김진국과 임진국은 불공끝에 아들(사라도령)과 딸(원강아미)을 낳았고, 두 집은 사돈을 맺었다. 사라도령과 원강아미는 부부가 됐고, 원강아미는 임신을 하게 된다. 사라도령이 서천꽃밭으로 가게 되자, 징표로 빗을 반으로 꺾어 건네준다. 아들 할락궁이를 낳은 원강아미는 제인장자에게 괴롭힘을 당하다가 죽게 되고 할락궁이는 아버지를 찾아 길을 떠난다. 결국 서천꽃밭에 가서 꽃감관을 하고 있는 아버지를 만난 할락궁이는 빗으로 서로를 확인, 수레멸망악심꽃으로 죄인을 벌하고 환생꽃으로 어머니를 살려내 꽃감관 자리를 물려받고 잘 살게 되었다.
이공본풀이는 인간의 삶과 죽음을 꽃으로 상징하고 해결하는 서사구조로, 여기서 이공은 인간의 운명을 주재하는 신으로 등장한다. 고구려의 주몽신화와 비슷한 이야기로, 일반신 본풀이가 다른 지역에 영향을 받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공 본풀이와 더불어 잘 알려진 일반 본풀이가 있다면, 세경본풀이다.
김진국과 조진국이 결혼했지만, 삼십년이 지나도록 자식이 없다가 자청비를 낳게 되었다. 연못가에서 마주친 자청비와 옥황의 아들 문도령은 서로 반하게 되고, 자청비는 남장을 한 채 문도령과 친구가 된다. 부모님에게 문도령을 여자친구라 속인 채, 둘은 함께 지내게 되고, 문도령이 옥황에 가게 되자 이별하게 된다. 하루는 하인인 정수남이가 자청비를 넘보려 하자, 자청비가 정수남의 귀에 담뱃대를 찔러 죽여 버린다. 어머니에게 정수남이를 죽였다고 하자, 집안 망하게 할 아이라며 쫓아내 버린다. 집에서 쫓겨난 자청비는 우여곡절끝에 문도령을 만나게 되고, 자청비를 병풍뒤에 숨겨 놓고 함께 지내게 된다. 옥황은 자청비를 여러차례 시험해보지만, 자청비가 모두 해결하자, 둘은 결혼에 이른다. 일년이 채 안되어 싸움이 나자, 자청비는 갑옷에 천리마를 타고 다른 나라를 물리친다. 결국 옥황상제의 명에 따라 상세경을 맡은 자청비는 농경신으로 좌정하게 된다. 농경신이 된 자청비는 오곡씨를 갖고 내려와 죽은 문도령을 살리고, 풍요의 신이 되었다.
농경신과 목축신, 생산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는 세경본풀이는 일반신 본풀이중 널리 알려진 이야기로 춘향전처럼 친숙한 사랑이야기라 할 수 있다.
제주에는 일반신 본풀이 뿐만 아니라, 척박한 바람의 땅, 일가(一家)의 무사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신의 이야기도 있다. 바로 집안 수호신의 내력을 푸는 조상신 본풀이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조상신 본풀이가 있다면 <광청아기본풀이>다.
동김녕에 살던 송동지가 진상을 바치고 돌아오던 중, 광청아기와 인연을 맺는다. 송동지를 따라왔던 광청아기가 그만 물에 빠져 죽고 만다. 송동지는 막내딸에게 광청아기의 원혼이 의탁했음을 알고 원혼을 달래준다. 그 후로 송동지 집안은 부자가 되었고, 광청아기를 조상신으로 섬기게 되었다. 여신이 조상신으로 좌정한 사례로, 여상신이 좌정한 사례는 제주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신화적 화소(話素)라 할 수 있다.
고난극복의 과정을 통해 마을 수호신으로 좌정하기까지의 내력을 담은 당신본풀이 또한 주목해야 한다. 일반신 본풀이에 비해 이야기가 짧고, 마을 설촌 등의 토착적 요소를 담고 있다. 그중에 송당계열인 김녕 궤눼깃당 본풀이가 널리 알려져 있다.
금백주와 결혼하여 마흔여섯명의 자녀를 낳은 소천국은 소를 잡아 먹게 되고 결국 이혼하게 된다. 소천국은 아들 송곡성을 무쇠설갑에 담아 용궁에 띄워 버리고, 용왕의 셋째 사위가 된 송곡성은 먹성 때문에 내쫓김을 당하게 된다. 강남천자국의 난을 평정한 송곡성은 개선장군이 되어 제주에 입도하게 되고 송곡성은 우여곡절끝에 김녕의 당신이 되었다. 가난한 백성들인 김녕 사람들은 소 대신 돼지를 잡아 송곡성을 받들어 모셨다. 많은 학자들은 김녕 궤눼깃당 본풀이를 탐라 건국신화인 삼성신화와 맥을 같이한다고 분석하고 있다. 이 신화는 수렵시대에서 농경시대로의 전환은 물론 정착생활을 보여주고 있으며, 선진문물의 전래 등의 화소를 담고 있다.
책이나 드라마, 영화가 없던 까마득히 머나먼 옛날, 지치고 힘든 이에게 웃음과 희망을 안겨주는 드라마가 있었다면, 바로 본풀이, 신화가 아니었을까? 인생의 희노애락, 고통과 좌절, 악과 선, 응징과 자비, 은혜, 그리고 사랑 등이 버무려진 환타지가 바로 본풀이, 신화인 것이다.
21세기 문화가 경쟁력이 되는 시대다. 그리스 신화보다 더 다양하고 풍부한 이야기를 갖고 있는 제주, 본풀이의 주인공들이 소설과 애니메이션, 영화의 주인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날을 꿈꿔보는 것은 너무 지나친 기대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