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진과 윤심덕의 죽음에 관한 논의
박일훈
1. 들어가며
2016년 8월 11일 오전 11시 장부다리 휴게소에서 필자는 두 사람과 합류했다. 한 분은 이 지역 환경지킴이 조기석 선생이고 다른 한 분은 시인(필명, 손수진)이기도 한 무안문화원 손순자 사무과장이다.
일행은 휴게소에서 막걸리와 포에 약간의 음료를 구입하고 한 차에 올라탔다. 월선리 마을 쪽으로 잠시 들어가다 보니 <극작가 김우진 초혼묘>라고 쓰인 이정표가 눈에 들어온다. 이어서 조기석 선생의 안내에 따라 임도를 타고 한참을 구불구불 비탈길로 산중턱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200m 정도를 걸어 올라가야 한단다.
절기는 바야흐로 삼복더위의 한 중간, 게다가 한낮에 김우진의 초혼묘를 찾아가는 일행은 아마 제정신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 글을 쓰자면 우선 이 일부터 해야겠다고 작심한 필자였다. 더욱이 올해는 김우진 극작가가 돌아가신지 딱 90주년이 된다. 그 사건이 1926년 8월 4일 발생했으니 말이다.
사실 전에도 한 번쯤은 꼭 들러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저 아래 국도 옆에 세워진 이정표 하나만으로는 도저히 산속에 있는 김우진의 초혼묘를 찾을 길이 없다. 이유야 어쨌든 이 지역 사람들이 조금은 무심한 탓이고 지자체 역시 관심 없기는 매한가지인 모양이라는 생각이 뇌뢰를 떠나지 않는다. 그래도 우리나라 극작가 중 대표적인 인물이 아닌가.
드디어 일행은 김우진 초혼묘에 도착했다. 위치는 청계면 월선리 산 169번지 언저리로 추정됐다. 우리는 준비해간 막걸리를 각자 한 잔씩 올리고 절을 했다. 묘 앞으로 멀리 운남 앞바다와 압해도가 한 눈에 들어왔다. 손 과장은 즉석에서 김우진을 추모하는 내용의 자작시 한 수를 낭송했다.
회산, 연꽃 만나러 가는 길
김우진 초혼묘라 써진 화살표가 자꾸 눈에 박혔다
달빛 청정한 밤
우연처럼 만난 사내하나 옆자리에 태우고 찾아가려 했던 곳
끝내 가지 못하고 까마득히 잊고 살다가
문득, 묻고 싶어지는 것인데
그곳에는 정녕
잡은 손 놓을 일 없는 것인지
사내의 빈 무덤에 술을 따르고
사의찬미라도 목 놓아 부르고 싶은 날
삼나무 숲엔 웅웅 바람이 일고
은사시 나무 흰 뼈들이 몸을 떠는 동짓날
끝내 놓아 버린 손 하나
눈에 박히고, 가슴에 박히고
살 속 깊이 박혀서
정강이에 묻어 온 도깨비바늘처럼
자꾸 살을 찌르는 것인데 ―손수진 <사내의 빈 무덤에 술을 따르고> 전문
2. 사건의 경위
(1) 사건 발생
김우진과 윤심덕의 생존설을 제기하기도 한 <삼천리>(1931년 1월호, ‘불생불사의 악단 여왕 윤심덕’)에 게재된 기사에 따르면 사건 당일의 분위기는 다음과 같다.
1926년 8월3일 밤 11시 시모노세키 항. 관부연락선 도쿠주마루(德壽丸)가 요란한 기적을 울리며 부산항을 향해 출발했다. 그믐을 사흘 앞둔 여름밤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한 시간이 지나 날이 바뀌자 아스라이 보이던 항구의 불빛마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한증막 같은 객실에서 사람에 부대끼며 비지땀을 흘리던 삼등실 승객들도 피로에 지쳐 차례로 골아 떨어졌다.새벽 4시 도쿠주마루가 쓰시마섬 앞바다를 통과할 때, 갑판을 순찰하던 급사가 일등실 객실문 하나가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손전등으로 안을 비춰보니 승객은 오간 데 없고 짐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꼭두새벽에 문을 열어놓고 도대체 어디 간 거지?’주위를 둘러보니 갑판 위에는 개미 새끼 하나 보이지 않았다. 급사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객실 안으로 들어가 불을 켰다. 여행가방 위에 ‘보이에게’로 시작되는 메모지 한 장과 팁 5원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미안하지만 짐을 집으로 보내주시오. 목포부 북교동 김수산. 경성부 서대문정 윤수선.’급사는 메모지를 움켜쥐고 황급히 조타실을 향해 내달렸다. 얼마 후 밤새도록 승객들의 숙면을 방해하던 둔탁한 엔진 소음이 멈췄고, 도쿠주마루의 모든 객실에는 불이 들어왔다. 사라진 일등실 승객 두 명을 찾기 위해 승조원들과 승객들은 배 안 구석구석을 뒤졌고, 선장은 뱃머리를 돌려 항로 주변을 수색했다.도쿠주마루는 예정시간보다 반나절이나 늦게 부산항에 입항했다. 부산항에서 하선한 승객은 시모노세키 항에서 탑승한 승객보다 두 명이 적었다.
즉, 이 기사에 의하면 관부연락선이 시모노세키 항을 출발한 날짜가 1926년 8월 3일 오후 11시였고 김우진과 윤심덕이 배 안에서 사라진 것을 알게 된 시각이 다음 날인 8월 4일 새벽 4시였다는 것이다. 두 조선인 청춘남녀의 동반자살에 관한 내용은 사건 발생 다음 날인 8월 5일 당시 국내 언론은 물론 일본 아사히신문에서도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지난 3일 밤 11시에 시모노세키를 떠나 부산으로 항해하던 관부연락선 도쿠주마루가 4일 오전 4시경 쓰시마섬 옆을 지날 즈음 양장을 한 여자 한 명과 중년 신사 한 명이 서로 껴안고 갑판에서 돌연히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했는데, 즉시 배를 멈추고 부근을 수색했으나 종적을 찾지 못했다. 승객명부에 남자는 전남 목포부 북교동 김수산(30세), 여자는 경성부 서대문정 2정목 273번지 윤수선(30세)이라고 씌어 있지만 본명이 아니고, 남자는 김우진, 여자는 윤심덕으로 밝혀졌다. 관부연락선에서 조선 사람이 정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현해탄 격랑 중에 청춘남녀의 정사’, <동아일보> 1926년 8월5일자)
따라서 후술하는 김우진과 윤심덕의 생존설을 부정한다면 두 사람의 기일은 8월 4일일 가능성이 크다. 3일 밤 11시에 출발한 배였으므로 1시간 이내에 두 사람이 바다에 투신했다고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때까지는 갑판에 아직 잠들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터이고 두 사람이 바다에 투신했다면 목격자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위의 동아일보 기사와 같이 ‘서로 껴안고 갑판에서 돌연히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는 표현은 사실과 다를 수 있고 게다가 사건 발생의 시각이 새벽 4시란 말도 근거가 없는 얘기이다. 결국 아무도 목격자가 없었으므로 투신 당시의 상황은 결코 알 수 없는 일이며, 두 사람이 없어진 것을 승무원이 알게 된 시각이 새벽 4시였다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배가 도착 예정 시간보다 반나절 늦게 부산항에 입항한 것은 사실일 것이므로 당시 관부연락선은 두 사람의 시체라도 찾을 요량으로 선내는 물론 쓰시마 섬 부근을 수색했다는 것은 분명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종적을 찾아내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 보면 김우진과 윤심덕은 갑판에 아무도 없는 때에 나와 동반자살을 감행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온당하며, 그 시간대는 4일 0시에서 4사이라고 보아야 한다.
다만 호사가들이 위의 동아일보 기사와 같이 대부분은 조선 사람의 처음 있는 정사(情死) 사건이라는 관점에서 흥미본위로 이야기를 만들어냈을 뿐이다. 두 사람의 여행가방 위에는 메모지와 팁 5원 이외에 김우진이 그의 가족 앞으로 쓴 유서가 있었다고 하지만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일설에 의하면, 김우진은 두 통의 유서를 남겼다. 한 통은 선장 앞으로 쓴 글로 소지품을 불태워달라는 내용이었고, 다른 한 통은 동생 김익진에게 쓴 글로 “여자의 사랑 앞에 만사가 사라졌다. 자식 교육만은 네가 책임져 달라.”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당시 사건이 유족들에게는 불명예스러운 일이기도 하였기에 특히 김우진 가(家)에서는 끝까지 사건의 진상 파악을 위하여 시체라도 찾으려고 현상금(500원)을 걸고 백방으로 노력했으며, 그 과정에서 생존설이 등장하기도 한다.
사고 발생 이틀 후, 윤심덕이 사고 직전 오사카 닛토(日東)레코드에서 27곡을 녹음한 사실이 알려졌다. 원래 계약은 26곡을 녹음하는 것이었지만, 윤심덕은 이바노비치의 왈츠곡 ‘다뉴브 강의 잔물결’에 자신이 가사를 붙인 노래 한 곡을 더 녹음하자고 제안했다. 윤심덕이 노래하고 동생 윤성덕이 피아노로 반주한 그 노래가 바로 ‘사(死)의 찬미’다.
‘사의 찬미’가 포함된 윤심덕의 유고 음반은 사고 발생 일주일 후부터 오사카를 시작으로 일본과 조선 전역에서 대대적으로 발매됐다. ‘사의 찬미’는 일본에서 발매된 최초의 조선어 노래였다. 정사 사건에 관한 사회적 관심에 힘입어 윤심덕의 음반은 전대미문의 판매고를 올리게 된다.
(2) 김우진과 윤심덕
김우진은 목포 백만장자 김성규의 장남으로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전도유망한 극작가였으며, 윤심덕은 당대 최고의 소프라노로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던 음악가였다. 김우진과 윤심덕은 둘 다 1897년생으로 동갑내기였지만 성격이나 가정환경은 판이했다. 가난한 집 둘째딸로 자란 윤심덕이 쾌활하고 대범했음에 반해 부잣집 맏아들로 자란 김우진은 예민하고 신중했다.
김우진은 7세 때 어머니를 잃고 고독한 유년시절을 보내면서 어려서부터 문학에 뜻을 두게 된다. 하지만 남달리 아들을 사랑한 아버지는 엄격한 유가적 법도에 따라 장남인 그를 가르쳤으며,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해 김우진이 가업을 잇기를 바랐다. 김우진은 목포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목포심상고등소학교를 다니다가, 1915년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일본 구마모토농업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문학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졸업 후 1919년 와세다 대학 영문과에 입학해 희곡을 배우게 된다.
김우진은 1916년 잠시 귀국해 정점효와 결혼했으며, 와세다대학 재학시절 도쿄에는 간호사로 근무하는 일본인 애인이 있었다. 영문과 졸업을 한 해 앞둔 1923년 열애 중이던 일본인 간호사가 백혈병으로 사망하자, 그해 여름방학 김우진은 목포 본가에서 지내며 죽음이 앗아간 실연의 아픔을 달랬다고 한다.
반면 윤심덕은 평양 순영리에서 아버지 윤석호와 어머니 김씨 사이의 1남 3녀 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윤심덕이 태어나자 곧 진남포로 이사했으며, 부모는 모두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아버지 윤석호는 나물장사를 하고 어머니 김씨는 병원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힘겹게 살았지만 네 자녀를 모두 훌륭히 교육시켰다. 맏딸 윤심성은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경상북도 안동으로 출가했고, 막내딸 윤성덕은 이화학당을 졸업한 후 모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윤심덕의 남동생 윤기정은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도쿄음악학교와 오하이오대학에서 성악을 공부했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아래의 기사들처럼 다른 이야기들도 전해지는데, 윤심덕의 집안이 부호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떨어지는 기록들이다. 하지만 서른 살이 되도록 윤심덕의 혼사가 번번이 깨어졌고 윤심덕이 가까운 친구들에게 가족들이 자신을 차별한다고 털어놓았음을 미루어볼 때, 윤심덕에게는 남모를 어떤 사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윤심덕은 살뜰한 동무들과 마주 앉았을 때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인지 또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 나의 아버지는 친아버지가 아니란다. 그래서 우리 집에서는 딸 셋 중에 나에게만 제일 박하게 대해. 이런 기막힌 노릇이 있니…”하고 커다란 두 눈에 하염없는 눈물이 그렁그렁하여지며 목이 메는 듯한 목소리로 가끔 말하는 일도 있었다 한다.
(‘김윤 양인이 정사하기까지 4’, <동아일보> 1926년 8월9일자)
윤심덕씨는 듣건대 원래 평양 어떤 기생의 따님이라고 합니다. 그 기생은 딸을 낳고 생각다 못해 자기 동네에 사는 어떤 큰 부잣집의 후원 소나무 밭에 갓난애를 눈물 머금고 버렸습니다. 아이 우는 소리를 듣고 그 집 사람이 쫓아 나와 생후 한 달밖에 안 된 여자아이를 거두어 친부모같이 귀애(貴愛)하며 길렀습니다. 친부모같이 주어다가 기른 이가 바로 윤성덕씨의 어머니라 합니다. 그래서 윤성덕씨와 윤심덕씨는 자매가 된 것이라 합니다.
(‘가인춘추’, <삼천리> 1932년 7월호)
아무튼 윤심덕은 그녀가 열네 살 되던 해에 가족이 다시 진남포에서 평양으로 이사하자 평양 숭의여학교로 전학했다. 평양에 이주한 이후 어머니 김씨는 미국인 여의사 홀 부인이 운영하는 광혜여의원에서 일했다. 그러한 인연으로 홀 부인은 윤심덕의 후견인이 되었다. 의사가 되는 게 어떻겠느냐는 홀 부인의 권고에 따라 윤심덕은 숭의여학교를 졸업한 후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에 편입했다.
하지만 윤심덕은 의사가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평양여고보에서 공부를 마치자 서울에 올라와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에 편입했다. 졸업 후 잠시 1년 정도 교편을 잡기도 하였으나, 1915년 윤심덕은 총독부 관비유학생에 선발돼 일본 유학을 떠났다. 아오야마가쿠인(靑山學院)을 거쳐 도쿄음악학교 성악과에 입학했다. 윤심덕은 도쿄음악학교에 입학한 최초의 조선인이었다.
(3) 두 사람의 인연
김우진과 윤심덕의 첫 만남은 1921년 여름 고국에서 이루어졌다. 윤심덕은 여름방학을 이용해 김우진, 홍난파, 조명희 등 30명의 청년들과 함께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 노동자 단체 동우회의 운영비 모금을 위한 고국 순회공연에 나섰던 것이다. 이 동우회 순회공연에서 그들은 비로소 서로 상대방을 알게 됐다.
하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김우진은 이미 목포에 아내와 딸이 있었던 데다 도쿄에서 일본인 간호사와 사랑에 빠져 있었다. 6척(180cm) 장신의 ‘왈녀’ 수준의 선머슴 같은 윤심덕에게 큰 관심을 보일 리 만무했다. 그리고 윤심덕 역시 동우회 순회공연단에 참여한 다른 청년과 친밀한 관계였던 터라 김우진에게 관심을 가질 겨를이 없었다. 따라서 두 사람의 운명적 조우가 서로 첫눈에 반할 정도의 사랑으로 승화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음 기사는 윤심덕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윤심덕은 사범과를 우등으로 졸업했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으니까 훈도라는 명예로운 사령장을 받아가지고 여러 동무들의 부러움을 받으며 고향으로 부임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강원도 원주로 발령이 났다. 낙심했으나 상사의 명령이라 할 수 없이 부임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한 학기 만에 더 오지인 횡성으로 전근명령이 내려왔다. 심중에는 불만이 쌓였고 가슴 속에 타오르는 명예욕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 해 여름방학 때 윤심덕은 경성여고보 동창회에 참석했다가 내빈으로 초대된 하세카와 교장과 세키야 학무국장을 만났다. 윤심덕은 학무국장에게 다짜고짜 달려들어 멱살을 붙들고 “나를 무슨 죄로 시골구석으로 쫓아 보냈느냐. 나는 있기 싫어 흥!”하며 억지를 썼다. 좌중은 모두 웃었다. 국장도 교장도 웃고 말았다. 이 모험이 효험이 있어 그의 전근지는 횡성에서 춘천으로 변경되었다.
(‘윤심덕의 일생’, <신민> 1926년 9월호)
여하튼 1924년 도쿄 유학을 마치고 금의환향한 윤심덕은 성악가로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윤심덕이 독창자로 나서지 않는 음악회가 없을 정도로 출연요청이 쇄도했다. 하지만 독창자로 나선다고 수입이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관비유학생이 귀국하면 관립학교 교사로 임용되는 것이 관례였지만, 몇 달을 기다려도 교사 발령이 나지 않았다. 윤심덕은 조선 최고의 성악가로 이름을 날리면서도 정작 생계를 걱정해야 할 만큼 어려운 지경에 내몰렸다.
그런데 그즈음 김우진은 도쿄음악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으로 돌아온 윤심덕에게 동생들과 함께 목포로 놀러 오라며 편지와 차표 석 장을 보냈다. 윤심덕은 윤성덕, 윤기성을 데리고 목포로 내려와 김우진의 집에서 조촐한 가족음악회를 열었다. 윤성덕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소프라노 윤심덕과 바리톤 윤기성이 노래를 불렀다. 김우진은 아내와 함께 윤심덕 남매를 극진히 대접했다는 것이다.
사건 발생 후 12년이 지난 어느 날 동생 윤성덕이 언니 윤심덕을 그리워하며 쓴 아래의 편지글을 보면 김우진과 윤심덕의 관계를 미루어 추측할 수 있다.
언니! 지금 생각해도 눈에 선합니다. 수은정 오쿠다 사진관 2층에서 김우진 군과 공허한 살림살이를 꾸미고 지내며 가끔 남창을 열고 두 분이 나란히 앉아 길거리를 내다보던 형용이 지금도 눈앞에 선합니다. 아마 지금은 천국의 창을 열고 두 분이 나란히 고해(苦海)를 내려다보고 계실지도 모르지요.
(‘다한한 윤심덕’, <삼천리> 1938년 11월호)
수은정 오쿠다 사진관은 당시 종로 3가에 위치했다고 한다. 그러나 두 사람이 동거한 연도와 기간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1925년 초에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이용문 스캔들’이 대중에 널리 알려지자 윤심덕은 불가피 하얼빈으로 도피생활을 떠나야 했으므로 이 기간 동안은 두 사람의 동거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용문은 대한제국 내장원경과 대한천일은행 은행장을 지낸 이봉래의 아들로서 대한제국 정삼품 장례원 전례를 지낸 인물이다. 당시 경성 을지로 일대에 3만여 평의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였으며, 소문난 호색한이었다고 한다.
윤심덕이 한창 성악가로서 명성을 얻고 있을 때 그에게는 큰 고민거리가 생겼다. 남동생 윤기정이 미국에 유학을 가려고 운동하여 이미 여행권까지 나왔으나 다만 여비가 없어서 떠나지 못했던 것이다. 윤심덕은 동생의 여비를 변통해 주려고 각처로 애를 많이 썼지만 선뜻 돈을 대겠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 이용문이 동생의 여비를 자기가 부담하겠다며 모월모일 돈을 내어주겠으니 자기 집으로 오라고 했다. 약속한 날짜에 윤심덕은 돈을 받으러 이용문의 집을 찾아갔다. 윤성덕이 함께 가자고 했으나 윤심덕은 굳이 자기 혼자서 다녀오겠다며 동생을 떼어놓고 혼자서 갔다. 윤심덕이 다녀간 날 이용문의 계좌에서 600원이 인출되었다.그 밖의 사실에 대해서는 더 말하지 않고 독자의 상상에 맡기거니와 이후로 윤심덕의 행동이 달라진 것은 사실이다. 그때 세상에는 윤심덕이 시내 모처에서 이용문과 살림을 하느니 어쩌느니 하고 소문이 자자했지만, 이것도 양편에서 절대 비밀에 부치는 일이라 오직 독자의 상상에맡기고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 다만 윤심덕이 자기 일신의 안락을 위하거나 허영에 눈이 어두워 이용문과 가깝게 사귄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뿐인 자기 남동생을 미국에 유학 보내려는 정성으로 이용문과 가깝게 지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석일은 악단의 명성 윤심덕 5’, <동아일보> 1925년 8월7일자)
한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김우진은 1926년 6월 2년 동안의 목포 생활을 청산하고 집을 나왔다. 가업을 더 이상 돌보지 않고 예술에 전념하겠다고 선언하자 부친은 잘 가라는 말조차 하지 않고 맏아들을 내쫓았지만, 모친은 생활비에 보태 쓰라고 3000원을 마련해주었다.
그런데 실은 김우진은 윤심덕이 1925년 6월 하얼빈에서 돌아오자 광무대에서 상설 공연을 하는 토월회에 입단할 것을 수차에 걸쳐 권유했다. 김우진은 내심으로 조만간 목포 집을 나와 윤심덕과 극장을 차려 함께 운영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당시로서는 여성이 무대에 선다는 것은 마치 기생 같다는 오해를 불러올 소지가 다분했다. 하지만 김우진의 설득에 마침내 윤심덕은 집안의 만류를 따돌리기 위해 대구 일갓집에 간다는 핑계를 대고 집을 나와 여관에서 기거하게 됐다. 윤심덕이 공연에 출연한다는 광고가 나가자 이용문과 염문을 뿌려 하얼빈까지 달아난 뻔뻔스러운 여자 얼굴이나 보자고 관객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바로 이 즈음, 즉 윤심덕이 토월회에 입단한 시기가 김우진과 윤심덕이 동거한 때와 일치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러다가 1926년 7월 초순 윤심덕은 김우진을 먼저 도쿄로 떠나보낸다. 그리고 윤심덕도 그해 7월 하순 음반 취입과 미국 유학을 떠나는 동생 배웅을 위해 오사카로 건너갔다. 윤심덕은 닛토레코드에서 27곡을 취입한 후 도쿄에 있는 김우진에게 전보를 쳤다.
‘당장 달려오지 않으면 죽어버리겠소.’
1926년 8월3일, 윤성덕이 미국행 배를 타기 위해 요코하마로 떠나자, 윤심덕은 도쿄에서 황급히 달려온 김우진과 함께 시모노세키로 가서 관부연락선 도쿠주마루에 탑승했다. 그 후 윤심덕과 김우진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4) 생존설
김우진과 윤심덕의 생존설은 두 사람이 정사한 직후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됐다. 두 사람 모두 시체가 발견되지 않았고 윤심덕의 유서는 아예 없었으며, 김우진의 유서는 일반에게 공개되지도 않은 터여서 가족이나 사람들이 그렇게 믿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정작 두 사람의 생존설을 확대 재생산한 것은 호사가들과 언론이었다. 두 사람의 정사 덕분에 엉뚱한 사람이 돈방석에 앉았으니 호사가들이 입방아를 찧을 만도 했으리라.
윤심덕이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녹음한 ‘사의 찬미’라는 레코드는 수만장이 팔려 음반회사가 갑자기 부자가 되었다는 말만 들어도 전 조선을 풍미하던 비상한 인기를 능히 추측할 수 있지 않은가.그런데 최근에 이르러 어디서부터 시작된 소문인지 윤심덕이 애인과 현해탄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는 것은 한낱 능청스러운 연극에 지나지 않고, 지금 산자수명(山紫水明)한 이태리 나폴리에 생존해 있다는 풍문이 떠돈다. 그러나 과연 윤심덕이 이태리에 살아 있다 하면 3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이 흘렀으니 그 동안 한 번이라도 그의 집에 서신이라도 띄웠을 것이련만 그도 없다 하니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윤심덕이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었든지 아직 안 되었든지 어쨌든 거친 인생의 행로를 걸어온 그의 고달픈 영혼에 안일한 행복이 있기를 바라는 바이다.
(‘일시 소문 높던 여성의 최근 소식’, <조선일보> 1928년 1월10일자)
그러던 중 1930년 12월 김우진의 동생 김철진과 김익진이 총독부에 수색원을 제출하자 한동안 잠복했던 김우진과 윤심덕의 생존설이 또다시 수면으로 떠올랐다.
생존설은 ‘김우진과 윤심덕이 관부연락선 도쿠주마루에서 현해탄에 몸을 던져 정사했다는 것은 한낱 연극일 뿐이고, 실상은 도쿠주마루 일등선실 급사를 매수해 정사한 것처럼 위장한 후 나가사키를 거쳐 상하이로 가서 중국인 명의로 다시 이태리로 건너간 후 로마에서 악기점을 경영하면서 단란한 가정을 꾸몄다’고 설명한다.
남의 소문을 잘 알기로 유명한 어떤 소식통은 다음의 세 가지 근거를 들어 윤심덕과 김우진의 정사를 부인하고 아직도 생존설을 주장한다.
첫째, 악단의 여왕이라는 존칭을 듣던 윤심덕의 성격이 본시부터 쾌활해 절대로 자살을 하지 못할 사람인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가 정사했다는 1926년 8월 피아노를 공부하려고 미국에 건너간 피아니스트 윤성덕을 보고 “동생 성덕아! 내가 큰 성공을 하기 전에는 절대로 간 곳을 알리지 않을 터이니 그런 줄 알고 절대로 나를 찾지 말라…”고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간 것. 둘째, 그들의 정사 사건이 있은 후 양가에서 특히 김우진의 집에서 기어이 죽은 사람들의 시체나마 찾고자 부산, 시모노세키 등지에 있는 각 신문지상에 현상금을 내걸고 광고까지 내면서 시체를 찾기 위해 노력했으나 사건 발생 후 5개년이나 지난 금일까지 시체가 발견되지 않은 것. 셋째, 윤심덕의 집안에서는 아직도 칠십 노모가 생존해 있는 관계도 있겠지만 어쨌든 처음부터 두 사람의 사망을 부인해 지금까지 정식으로 발상하지 않은 것 등등.(‘불생불사의 악단 여왕 윤심덕’, ‘삼천리’ 1931년 1월호)
김우진의 두 동생들이 총독부에 수색원을 제출했다는 소식을 접한 매일신보 김을동 기자가 이화여전 음악과 윤성덕 교수를 찾아간다. 다음은 그들이 나눈 대화 중 일부인데, 이를 보면 윤심덕의 가족들도 그녀의 죽음을 수긍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세상 사람들은 벌써 5년 전에 그들을 죽은 사람으로 치고 있는데 선생만 그것을 부인하신다는 말씀이에요?”“나와 가족들은 한 번도 언니가 죽었다는 말을 한 적이 없어요. 언니를 죽은 사람으로 만든 것은 항상 남의 말 하기 좋아하는 세상 사람들이지요.” “그러면 윤심덕씨와 김우진씨가 목하 이태리 로마에 살고 있다는 말은 사실일까요?” “그것은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도 그들의 죽음만은 절대로 부인합니다.” “만일 선생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반드시 살아있을 터인데 이태리에서나 혹 다른 곳에서 그 동안 무슨 소식이나 있지 않았습니까?”“설사 무슨 소식이 있었다 한들 그것을 지금 말할 것 같습니까? 그저 처음부터 언니의 죽음을 부인하고 있었다는 말 이외에 다른 것은 절대로 말할 수 없습니다. 거기 대해서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말 못하는 벙어리이니까요.”
(‘불생불사의 악단 여왕 윤심덕’, <삼천리> 1931년 1월호)
1931년 11월, 이탈리아 주재 일본영사관은 김우진의 유족에게 “로마에는 김우진과 윤심덕이라는 이름을 가진 조선인이 살지 않으며, 동양인이 경영하는 악기점도 없다”고 공식적으로 통보했다. 그렇다고 해서 생존설에서 제기한 바와 같이 두 사람이 과연 중국 여권으로 신분을 가장하였는가에 대해서 확인 작업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김우진과 윤심덕이 1926년 8월 4일 동이 터오기 전에 현해탄에 몸을 던져 동반자살을 감행했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3. 나가며
우리는 김우진과 윤심덕의 동반자살을 놓고 한 가지 의문점을 안을 수 있다. 과연 두 사람은 현해탄에서 정사할 만큼 애틋하게 사랑한 사이였을까.
윤심덕은 김우진만을 사랑한 여인이 아니었다. 오히려 언제나 동시에 여러 사람과 사랑을 나눴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김우진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자식이 있는 유부남이었으며, 더욱이 일본인 간호사를 사랑했다는 기록까지 남아 있다.
물론 전술한 바와 같이 일정기간 동안 두 사람이 동거생활을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 1920년대의 조선사회는 두 사람이 살림을 차린다고 해서 손가락질하거나 뜯어말릴 사람도 없었다. 오히려 ‘제2부인’이라는 용어가 있을 정도로 유부남과 처녀가 살림을 차리는 것은 비록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결코 드문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두 사람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못내 안타까워하여 정사할 이유는 없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죽음을 가장해 로마에서 신분까지 속이고 함께 살 이유도 없었다고 봐야 한다.
이제 글을 마무리 하면서 간략하게나마 당시의 일본의 시대상황과 예술적 풍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김우진과 윤심덕은 일본 다이쇼(大正, 1912년~1926년)시대에 일본 동경유학을 한 신지식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일본 다이쇼시대는 메이지(明治)시대와 쇼와(昭和)시대 사이에 놓여 있다. 메이지시대가 근대통일국가의 건설과 청일전쟁, 러일전쟁의 승리로 민중의 국가의식이 승화된 때였다면, 쇼와시대는 군국주의의 팽창에 따른 제2차 세계대전의 참전과 패전의 영욕을 맛봐야했던 비상시국의 때였다. 그 가운데 낀 다이쇼시대는 근대사에서 유일하게 당시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국가에 대한 의무의식으로부터 벗어나 잠시 민중이 자유를 구가할 수 있었던 때였다. 그러기에 다이쇼시대에 이른바 ‘다이쇼 데모크라시’라는 민중운동이 전국적으로 부흥을 이루기도 했다.
동시에 다이쇼시대는 지식인이 서양사상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갈등을 경험한 시대이기도 했다. 그리고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일본에서는 당시 연애지상주의와 염세주의에 따른 죽음에 대한 찬미현상이 두드러진 사회풍조의 한 단면으로 나타나고 있었다는 점이다.
1920년대 일본 유명인의 정사 사건들 중에는 1921년 11월 평론가 노무라(野村隈畔, 36세)와 그의 수강생이었던 오카무라(岡村梅子, 24세)의 동반자살이 있었고, 1923년 7월 인기작가 아라시마(有島武郞, 46세)와 유부녀 하다(波多野秋子, 30세)의 동반자살이 있었다. 오카무라는 윤심덕과 연령이 비슷하고 같은 도쿄음악학교 출신이었다. 한편 아라시마의 죽음이 김우진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보는 일본인 견해(川瀨絹, 金祐鎭と尹心德の死, 日本學報 제4호, 1997, p162)가 있다.
다이쇼시대에는 ‘사의 찬미’라는 말이 일반인에게 하나의 풍조로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하며, 죽음은 자살자의 유서 속에서 동경의 세계로 표현되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일본인 문예평론가 와타나베(渡邊凱一)는 그것을 다이쇼시대에 공통되는 ‘낭만주의’라고 표현하고 있다(渡邊凱一, 晩年の有島武郞, 關西書院, 1978, p459). 즉, 죽음으로써 자기완성을 구할 수 있다는 의미를 가진다. 쇼와시대에 이르러 자살 내지는 동반자살이 허무적인 행동으로 받아들여지는 등 평가가 다양해가지만, 다이쇼시대에는 죽음에 대한 감미로운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는 것이다.
윤심덕이 당초 예정에는 없었던 노래, 직접 작사한 ‘사의 찬미’를 자청해서 취입한 연유에는 이러한 당시의 일본 사회풍조가 반영된 것은 아닐까. ‘광막한 황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디이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로 시작되는 애절한 노래를 그녀의 음성으로 이제 다시 듣노라니 가슴이 저미는 아픔을 어찌할 수 없다.
첫댓글 찡한 맘으로 일독했습니다. 참 귀한 자룝니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무안문화원에서 김우진 관련 글을 써달라고 해서 겸사겸사 이번에 자료를 정리해보았을 뿐입니다. 고맙습니다.
무안청계면에 이런분이 누워 계시다시 놀랐습니다 왜 여기에 초혼묘가 있을까요?
김우진 가의 선산은 무안 해제에 있다고 합니다. 아마 선산에 묻히지 못해서 그리 된 것 같습니다.
마지막 불볕더위에 평안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