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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 지방자치시대라고 한다. 지방자치시대는 지역주민들이 자신들에게 맞는 지역발전을 이루어내는 것이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역에 대해 관심과 애정을 갖고,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이에 본지는 안성의 각 마을과 주민들의 바람을 정확히 알고, 주민들이 마을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마을의 올바른 발전방향을 생각하는 계기를 마련하고 안성의 마을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마을 탐방을 연재한다. 이번호에는 대덕면건지리 두번째를 싣는다.
▲ 내건지리 주민들이 모여 3.1 만세운동을 했던 수백 년 된 느티나무.
▲ 외건지리에 남아있는 천주교 공소.
면소재지 마을
건지리는 대덕면사무소가 있는 마을이다. 주민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면소재지 마을’이다. 대부분의 읍면에서 면소재지마을은 관공서를 비롯한 각종 편의시설이 있고, 상대적으로 인구도 많은 그 면의 중심지라는 의미와 함께 주민들은 자부심을 느끼게 마련이다. 그러나 대덕면소재지 마을인 건지리는 면사무소와 파출소는 있지만, 그 외에는 여느 마을과 별 다를 바 없는 모습이어서, 안성사람이 아니면 면소재지마을이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건지리 주민들은 한결같이 교통 편리하고 인심 좋아 살기 좋은 마을이라고 입을 모은다. 38국도가 마을 바로 옆을 지나 교통이 편리하고, 시골다운 인심이 남아있어 주민들 간에 우애 있고, 외지사람도 배척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한편으로 이러한 교통의 편리함이 건지리가 면 소재지 마을답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더욱이 지난 1997년 소규모 행정구역 개편 때는 건지리에 속해있던 마을이 안성3동으로 편입되어 면적도 줄어들고 인구도 줄었다. 그러나 건지리 사람들은 척박한 자연환경 속에서도 그러한 불리함을 딛고 살아온 주민들이 강인하게 일구어 터 잡고 살아온 마을이다.
‘수수 엿’을 만들어 팔아 ‘금쪽같은 돈’ 벌던 마을
건지리(乾芝里)를 주민들은 ‘건지미’라고 부른다. 건지미라는 마을 이름 유래에 대해 주민들은 비가 오지 않고 건조한 마을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했다. 그러했기에 벼농사를 짓기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벼농사를 지어도 물이 별로 들어가지 않는 농사법인 마른논에 벼를 뿌려 농사짓는 건답직파로 지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또 비가 오면 장화신지 않고는 밖에 다닐 수 없을 만큼 질었다고 한다. 이러한 척박한 환경에 대응해 살아온 것이 건지리 주민들의 삶이었다. 내건지리 주민들이 택한 것은 건조하고 척박한 땅에서도 비교적 잘 자라는 ‘수수’였다. 아니 어쩌면 ‘엿’을 만들어 팔기 위해 수수농사를 지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농사이외에는 별다른 수입이 없던 시절, 논농사가 부족한 건지리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또 자식들 공부를 위해 수입원을 찾아야 했고, 그 방법이 엿을 만들어 파는 것이었다.
그것은 한편에서 건지리가 안성장과 지리적으로 위치가 가까워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내건지리 주민들이 만들어 판 것은 ‘판데기 수수 엿’이었는데 그 만드는 과정이 이야기만 들어도 고된 일이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주민들이 설명해 준 것은 먼저 수수로 밥을 만들고 엿기름을 넣고 삭힌 다음, 짜서, 다시 불에 고아서 수수엿을 만든다고 했다. 이 과정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렇게 힘들게 만든 엿은 콩가루를 깔고 그 위에 부어 안성장에 내다 팔았다고 한다. 수수엿은 입에 달라붙지 않고 맛도 좋아 사탕 같은 것이 귀한 시절 인기 있는 주전부리였다. 그렇게 만들어서 내다 팔아 내건지리로 들어오는 돈은 벼농사로 돈을 벌기 힘든 건지리에서는 “외지서 들어오는 금쪽같은 돈”이었다. 그걸 알아서 였을까? 내건지리 아이들은 부모님이 힘들게 만들어 먹으라고 주는 수수엿을 먹지 않고 길가에서 팔아 학용품을 샀다고 했다.
천주교 신자들이 옹기 만들어 팔던 동네
내건지리에서 엿을 만들어 팔았다면, 외건지리에서는 옹기를 만들어 팔았다고 한다. 외건지리에서 옹기를 만들어 팔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외건지리의 흙이 옹기를 만들기에 적합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앞에서 이야기했지만 외건지리는 물이 귀한 동네이기는 했지만 비가 오면 장화를 신고 다니지 않으면 안될 만큼 땅이 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주민들의 증언이 시사하는 것은 이러한 토질이 옹기를 만들기에 적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뒷받침 하는 근거중 하나가 보개면 양복리에서 만들던 옹기의 재료인 흙을 건지리에서 가져왔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이 지면을 통해 보개면 양복리를 소개하면서 언급한 적이 있지만 당시 안성에서는 양복리 옹기공장이 유명했을 뿐만 아니라 숫자도 많았다.
그런 양복리에서 건지리 흙을 가져다가 썼다면 건지리 흙은 옹기를 만들기에 적합한 흙이었던 것이다. 양복리와 건지리가 비슷한 것은 또 있는데, 마을주민들에 의하면 양복리처럼 건지리도 처음에 옹기를 만든 것은 천주교 신자들이었다는 증언이다. 외건지리에서 옹기를 언제부터 만들어 팔았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주민들은 마을에 천주교 신자가 들어와 살던 100여년 전부터로 기억하고 있었다.
구포동 성당이 지어지기 전이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대덕면사무소 회의실 자재로 만든 공소
김동우(73세)씨에 의하면 할아버지 때에 미산리 ‘검은쟁이’라는 곳에서 박해를 피해 외건지리로 이사해왔는데, 마을 주민 절반이상이 천주교 신자였고, 그 신자들이 옹기와 질그릇을 만들어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는 것이다. 이렇듯 천주교 신자들이 많아지자 외건지리에도 공소(公所, 본당보다 작은 주임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지역신자들이 모이는 예배소)가 있었다고 한다. 이 공소에는 외건지리 신도뿐만 아니라 내리 등 다른 마을 신도와 심지어 양성에서도 일부 신도가 와서 함께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김동우씨의 증언에 의하면 1.4후퇴 뒤인 1951년에 지은 것이라고 하는데 예배는 드리지 않지만 지금도 건물은 남아 있었다. 당시 공소는 대덕면 사무소 회의실을 뜯어다가 그 자재로 지은 것이라고 하는데, 당시 앞장선 사람은 마을의 부자였던 김만복이라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1.4후퇴가 있기 전인 1950년에 발간된 “안성대관”에 이미 외건지리에 공소가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로 미루어 외건지리 공소는 훨씬 전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김동우씨가 말하는 공소는 개축한 것이거나 신축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자연을 존중하는 토속적인 신앙과 믿음도 이어지고
그런데 이렇듯 천주교 신자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건지리 사람들의 심성에는 우리 고유의 토속적인 신앙과 믿음이 이어지고 있다. 건지리는 대덕산과 가까운 마을이고, 내건지리에는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고, 물이 귀한 동네라 공동우물이 있었지만, 우물제사나 산제사를 지냈다는 기억은 들을 수 없었다.
그런데 건지리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옹기공장은 약 10여년 전에 완전히 문을 닫게 되는데, 주민들이 이야기하는 그 사연이 이채롭다. 마을 주민들에 의하면 외건지리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옹기공장이 오래되어 새로 짓기 위해 장비를 동원해 기존 시설들을 없앴다고 한다. 그런데 그곳에 하루만 더 있으면 용이 되어 승천할 이무기가 있었는데, 장비에 깔려 죽고 말았다고 한다. 당시 그 이무기가 흘린 피가 낭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천주교 신자였던 옹기공장 주인은 이를 아랑곳하지 않았지만, 결국 새로 만든 공장은 옹기를 만들기 위해 불만 때면 비가 와서 제대로 된 옹기를 만들 수 없어 결국 10여년 전에는 문을 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언뜻 믿기 힘들지만 마을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고, 또 한편에서는 오래된 것에 대한, 또 미물이라 할지라도 존중해야 한다는 토속적인 신앙과 믿음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해 외건지리 사람들은 대덕산이 훼손된 것에 대해서도 “이름 있는 명산이었는데 이를 훼손한 것은 최대 실수”라며 아쉬워하고 안타까워했다.
3.1 만세운동 벌였던 마을
건지리에서는 3.1운동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안성 시의원과 대덕농협 조합장을 역임한 내건지리 김상묵 노인회장(70세)에 의하면 내건지리에서도 3.1만세운동을 했다는 이야기를 어른들로부터 들었다는 것이다.
내건지리 주민 수십 명이 마을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수백 년 묵은 느티나무에 모여 만세를 불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 더 이상의 자세한 증언을 들을 수 없었는데, 이 증언이 시사하는 것은 안성의 3.1만세운동이 지금까지 알려진 것 이상으로 광범위하게 안성전역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이 지면을 통해 널리 알려진 만세운동이외에 일죽면 장암리의 만세운동 등을 소개한 적이 있는데, 우리 스스로 있었던 사실조차 방치해버려 망각하고 안성 3.1운동의 의의를 훼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하게 된다.
식민지 시기 설움에 대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고 나왔는데 위생 점검 나와서 집에 먼지 있다고 트집 잡아 강제로 면사무소 등을 청소시키던 일이며, 해방되고 가장 좋았던 것은 공출을 하기 위한 가마니를 안 만들어도 되는 일이었다는 이야기였다.
또 민족최대의 비극인 한국전쟁과 관련해서 면소재지 마을인 만큼 비극적인 증언도 들을 수 있었는데, 인민군이 점령하다 후퇴하기 직전 10여명의 주민을 학살했다는 이야기였다. 그 주민들이 건지리 사람들인지, 대덕면 사람인지, 어디에 묻혔는지 등 자세한 이야기는 들을 수 없었는데, 그 중 한사람은 경찰이었다는 증언만 들을 수 있었다.
소방도로 개설되고 느티나무 보호수 되었으면
주민들로부터 각골, 당성골, 상나무골, 들무쟁이, 장성배기, 미터굴 고개, 재너머, 너멍굴, 여드레 보, 웃골, 응골, 부엉바위 등 여러 지명을 들을 수 있었는데 장성배기는 장승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고, 부엉바위는 부엉이가 많이 울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했다.
마을이 언제 형성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듣지는 못했지만, 마을에 최소한 300년 이상 된 느티나무(어떤 주민은 500년은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정도는 되지 않았겠느냐고 이야기했다. 안성군지(1990년)에는 370여년 전에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건지리는 원래 내건지리, 외건지리, 삼건지리 등 3개 마을이었으나 삼건지리는 지금은 안성3동의 신건지리가 되었고, 대신 사람이 살지 않던 ‘안골’에 공장과 아파트가 들어오면서 마을이 형성되어 지난해부터는 상건지리가 되어 별도로 이장을 뽑는다.
내건지리는 달성 서씨와 밀양 박씨, 경주 김씨가 비교적 많이 사는 편이었고, 외건지리는 각성받이 마을이었다. 내건지리는 옛날에는 30여 세대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연립과 빌라 등 들어서서 130세대에 이르고, 외건지리는 옛날에 50-60호였는데 지금은 200세대, 상건지리는 옛날에는 사람이 안 살았지만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서 70세대가 넘는다고 했다.
주민들은 꽃길 가꾸기, 폐품 모으기는 물론이고 국도변 마을이니 만큼 자발적으로 나서서 마을 앞 38국도를 청소하는 등 단결이 잘되고 깨끗한 마을이라는 자랑을 했다. 그러나 외건지리 주민들은 마을에 소방도로가 없어 화재로 인한 불편함이 있다면서 소방도로가 개설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이야기했고 내건지리 주민들은 유서 깊은 느티나무가 보호수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이야기했다.
▲ 외건지리 주민들, 왼쪽부터 김동우(73), 송기창(68세), 박창득 노인회장(76세),
한상록(63세),김영찬 노인회 총무(66세), 전정일(75세).
▲ 내건지리 주민들 왼쪽부터 도재석(80세), 최봉순(81세), 전금옥(65세),
박보배(76세), 모화자(78세).
▲ 천주교 신자인 김동우씨와 전정일씨가 옹기공장을 안내했다.
뒤로 보이는 곳이 옹기공장터, 지금은 다른 용도로 쓰이고 있다.
▲ 김상묵 내건지리 노인회장(70세).
▲ 박창득 외건지리 노인회장(76세).
▲아파트와 공장이 들어선 안골, 입구에 유언호 선생 묘가 있고,
멀리 대덕산이 보인다.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지난 해 한마음대회때 충문공 묘소를 참배하였지요.
우리 일가들의 집성촌인 옥정리를 소개한 글쓴이의 스토리텔링을 전개하는 글 솜씨가 전문가 답다고 느낌니다. 충문공에 대한 서술에서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고 그 당시의 정치적 상황까지 이해하고 옳 바른 평가를 하면서도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아니하는 안목이 돋보이는 글쓴이는 본문에서 “지방자치시대는 지역주민들이 자신들에게 맞는 지역발전을 이루어내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역에 대해 관심과 애정을 갖고,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며 이에 안성의 각 마을과 주민들의 바람을 정확히 알고, 주민들이 마을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마을의 올바른 발전방향을 생각하는 계기를 마련하고 안성의 마을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
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마을 탐방을 연재한다고 언급”하였는데 저도 제가 태어나서 자란 고향마을에 대한 이야기 소재(스토리텔링)로 삼아 한 번 작성하고 싶은 의욕이 생깁니다.
대덕면 건지리에서 과수원을 하시는 충문공의 직손이신 안성 아저씨가 “충문공 학술대회 자료를 지참하고 사진을 찍으신 장면에서 정겨움을 느낌니다.
안성에 인물이 많다고는 하지만 정조묘정에 배향되시고 안분자족(安分自足 : 분수를 알고 스스로 에게 만족할 아는 자세)한 삶으로 참 선비의 표상으로 사셨던 충문공에 대하여는 안성시주관으로 현창을 해야 한다고 개인적인 생각을 해 봤습니다.
우리 일가님들의 집성촌에 대한
좋은 자료를 올려 주신 자문위원님께 감사드립니다..........
글 내용의 특성상 집성촌 소개방으로 옮기겠습니다...
안성 성준대부님께서는 남다르시지요. 숭조사상이 강하시고 훌륭한 가통을 지키시려는 의지는 배움을 낳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글을 쓰신 들풀님과 이를 발견하여 카페에 올려주신 자문위원님께 감사드립니다..동일인은 아니신지요?
약 2년전에 안성신문 인가 안성자치신문 에서 동내용을 읽던중 유척기 유명건 유직기 유언집을 문화유씨로 잘못기재 되어있어 신문사측에 연락 즉시 수정한 생각이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