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자민 프랭클린 자서전]
전기 분야의 성과를 인정받아 케임브리지에서 석사 학위를
한동안 나는 아메리카 체신장관 밑에서 회계 감사원으로 있으면서 여러 개 우편국을 관리하고 직원들과 책임자를 견책하는 일을 하다가 1753년 장관이 사망하면서 영국 체신장관의 명으로 윌리엄 헌터 씨와 공동으로 그 후임에 올랐다. 그때까지 아메리카 우편국은 영국 우편국에 이익금을 한 푼도 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가 우편국에서 이익을 내면 1년에 600파운드를 받기로 되어 있었다. 이윤을 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개선 작업이 필요했다. 그러려면 어쩔 수 없이 초기 비용이 들어가야 했기 때문에 처음 4년간 900파운드가 넘는 돈을 빚냈다. 하지만 이 돈은 곧 회수되었고 우리는 아일랜드 우편국의 세 배가 넘는 수입을 올릴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영국 정부가 아무 이유 없이 나를 해임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얘기하기로 하겠다. 아무튼 경솔한 처사 이후 영국 우편국은 단 한 푼도 받지 못했다!
그해에 우편국 일 때문에 뉴잉글랜드에 가게 되었는데, 그곳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자발적으로 수여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전에도 코네티컷 주의 예일 대학으로부터 비슷한 학위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대학교에 다니지 않고도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자연가확의 전기 분야에서 이룬 성과와 발명을 인정받은 결과였다.
영국과 식민지 각 주의 반대에 부딪힌 식민지 연합체 구성안
1754년에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다시 전쟁이 벌어졌고, 각 식민지 대표들은 상무장관의 명령을 받아 올버니 시에서 회의를 열었다. 여섯 종족의 인디언 추장들을 만나 어떻게 영토를 수비할 것인지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이 명령을 받은 해밀턴 지사는 주의회에 이를 통고하고 회담에 참석하는 인디언들에게 줄 적당한 선물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의장인 노리스 씨와 나를 윌리엄 펜 경의 처남인 토머스 펜 씨와 비서관 피터스 씨와 함께 펜실베이니아 주 대표로 임명했다. 주의회는 이 임명을 승인하고 선물을 준비하면서도 펜실베이니아 밖에서 회의가 열리는 것을 탐탁지 않아 했다. 우리는 6월 중순경에 올버니 시에서 다른 대표들을 만났다.
올버니로 가는 동안 나는 국토방위를 비롯해 그 밖의 중요한 공동 목표를 이루기 위해 각 식민지들이 하나의 정부 아래 연합한다는 계획을 구상해보았다. 그리고 이 계획을 문서로 작성해 뉴욕을 지나는 길에 만난 제임스 알렉산더 씨와 케네디 씨에게 보여주었다. 공공사업에 관해 식견이 높던 두 사람은 내 계획안에 적극 찬성했다. 나는 그들의 반응에 용기를 얻고 계획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나중에 보니 다른 대표들 중에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여럿 있는 듯했다. 연합체 구성 여부의 문제가 먼저 제기되었는데, 이는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다음에는 각 주에서 한 사람씩 위원을 뽑아 위원회를 만들고 몇 개의 계획안을 심의하고 보고하기로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내 계획안이 채택되어 몇 가지 조항을 수정한 다음 보고되었다.
이 계획안에 따르면 연방 정부는 영국 국왕이 임명하고 지지하는 총독의 통치를 받으며, 각 주에서 임명된 대표자들이 모여 최고 위원회를 선출하기로 되어 있었다. 인디언 문제와 함께 이 문제에 대한 토론이 의회에서 매일 열렸다. 많은 반대와 난관이 있었지만 결국 다 해결되었고 계획안은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이 계획안의 복사본은 영국 상무부와 각 주의 의회에 전달되었다. 그런데 이 계획안의 운영이 묘하게 흘러갔다. 각 주의회는 연방 정부에 지나치게 권력이 집중된다고 반대했고, 영국에서는 지나치게 민주적이라고 반대했다.
그래서 상무부는 이 안을 승인하지 않았고 국왕에게 보고하지도 않았다. 대신 좀 더 효과적으로 목표를 이룰 대안을 제시했다. 각 주의 지사는 주의회의 일부 의원들과 회의를 열어 군대 모집이나 요새 건설 등을 결정하고 여기에 소요되는 비용은 영국 국고에서 빌려 쓴 다음 나중에 영국 의회의 아메리카 과세 법안에 따라 상환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때 내가 제출했던 안건과 그것을 지지하는 이유는 내 정치 논문에 기록되어 있다.
그해 겨울에는 보스턴에 머물면서 두 가지 안건에 대해 셜리 지사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대 우리가 나눈 이야기의 일부도 같은 논문에 기록되어 있다. 영국과 각 주가 정반대 되는 이유로 내 안건에 반대하는 걸 보면서 내 안이야말로 진정으로 중도적인 것이 아닐까 싶었다. 내 안이 채택되었더라면 양쪽 모두 만족했을 거라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각 주가 연합했더라면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해졌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영국에서 군대를 보낼 필요도 없었을 테고, 당연히 아메리카에 세금을 부과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며, 그로 인한 유혈 전쟁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이런 실수는 늘 있어왔다. 역사는 국가와 군주들의 잘못된 판단으로 차고 넘친다.
세상을 둘러보라, 자신의 행복을 아는 자가 얼마나 적은지
안다고 해도 행복을 추구하는 자가 얼마나 적은지!
대개 위정자들은 당장 처리해야 할 일들에 치여 새로운 계획을 구상하고 실행하는 수고를 하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최고의 법안도 지혜로운 점검과 판단으로 채택되기보다는 상황에 밀려 어쩔 수 없이 채택되곤 한다.
펜실베이니아 지사는 내 안을 주의회에 보내면서 찬성 의견을 덧붙였다. “아주 명료하고 설득력 있는 안건이라 판단됩니다. 꼼꼼하고 신중하게 검토해주시길 요청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어느 한 의원의 모략으로 주의회는 내가 출석하지 못한 날을 택해 내 안을 상정하고는 검토도 하지 않고 부결시켜버렸다. 이처럼 불공정한 처사를 보면서 얼마나 억울했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