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과 전망
도시 지향, 자유, 민주, 반지성주의
이은봉
도시 지향과 첨단 지향
사람들은 이제 농촌보다 도시를 더 좋아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이제 사람들은 농촌보다 도시에서 더 많이 산다. 물론 이는 근대에 들어선 이후부터의 일이다. 사람들이 농촌보다 도시를 더 좋아하고, 농촌보다 도시에서 더 많이 사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으리라. 생활의 편리 때문일 수도 있고, 돈을 벌기 쉽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한편으로는 당대 첨단의 의식이 작동하는 곳이 도시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첨단의 의식은 첨단의 예술을 만들고, 첨단의 과학을 만들고, 첨단의 삶을 만든다. 첨단의 삶이란 무엇인가. 오늘날 첨단의 삶은 해체된 가족의 고독한 외톨이, 부모도 형제도 없이 사는 혼밥과 혼술의 삶이기 쉽다. 혼밥과 혼술의 삶은 과잉 분출되는 개인의식의 산물이라고 보아야 옳지 않을까.
사람은 사람 및 자연과 완전히 분리된 채 살아갈 수 없다. 사람은 늘 사람 및 자연과 관계하면서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렇다. 유일자, 곧 단독자가 아닌 것이 사람이다. 유일자, 단독자는 사람이 아닌 신(神), 곧 여호와 하나님밖에 없다. 유일자, 곧 단독자라고 불리는 여호아 하나님인 신(神)은 다른 신들과 관계하지 않고도 홀로 존재한다. 여호아 하나님인 신(神)은 다른 신들과의 관계를 통해 외로움을 달래야 하는 존재가 아니다. 다른 신들과는 관계하지 않더라도 여호와 하나님인 신(神)은 끊임없이 사람들과 관계하고, 자연들과 관계한다.
여호아 하나님인 신(神)이 사람을 향해 단독자로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그가 수많은 사람 및 자연과 관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늘 사람 및 자연과 관계하고 있는 것이 여호아 하나님인 신(神)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은 오직 그와만 관계하며 살 수 없다. 여호와 하나님이 늘 사람 및 자연과 관계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은 사람 및 자연과 완전히 분리된 채 살지 못한다. 사람은 끝내 사람일 뿐 단독자인 여호아 하나님이라는 신(神)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첨단의 개인으로 사는 것은, 나아가 해체된 가족의 고독한 외톨이로 사는 것은 온전한 정신건강을 갖게 하기 어렵다. 인간의 미래가 여호아 하나님으로서의 신(神), 곧 유일자, 단독자를 꿈꾸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꿈이 인간의 미래를 행복하게 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근대성이라는 이름의 파편화된 자아의식이 끊임없이 앞 세대의 전통을 부정하며 형성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아무런 반성 없이 수용하거나 추수해서는 안 된다. 끊임없이 새것을 지향하고 추구해온 것이 인간이라고 하더라도 그때그때 만들어지는 새것 의식이 구체적인 인간의 삶에게, 인간이라는 생명체에게 바른 도움을 주는지 어쩌는지를 상세하게 따져봐야 한다.
대부분의 어른들은 결혼을 기피하고, 출산을 기피하는 젊은이들을 걱정한다. 그러한 가운데에도 엉성하고 불완전한 대로 가정이나 가족을 꾸미는 젊은이들이 있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의 가족 안에 추구하는 미니멀리즘(minimalism)은 기존의 기성세대들에게 적잖은 의구심을 갖게 한다. 제대로 된 가구도 없고, 식탁도 없고, 비품도 없는 집안, 아주 깨끗한 집안을 만들려는 것이 지금의 젊은 부부들이 좋아하는 미니멀리즘이다. 최대한 장식이나 꾸밈을 제거해 가장 본질적인 요소만을 탐구하려는 예술 사조를 집안에 구현하려는 것이 요즘의 젊은 부부들이라는 것이다.
젊은 부부들이 추구하는 이러한 미니멀리즘이 농촌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도시 중심의 삶의 형태라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기존의 것을 부정하고 새것을 지향하는 이러한 의식 또한 실제로는 근대성의 구현과 무관하지 않다. 여기서 말하는 근대성의 구현이 개인의식의 성숙과 맞물려 존재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개인의식의 성숙을 근대성이 구현되는 구체적인 실제라고 하더라도 그것의 실천이 공동체의식의 파괴나 해체에 기여한다면 반성이 필요하다. 결국 개인의식의 성숙은 개인의식의 과잉을 낳기 쉽다. 개인의식의 과잉이 인간성의 파괴나 사망으로 귀결되기 십상이라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개인의식의 성숙이 자본주의의 성숙과 맞물려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정당한 사회의식 혹은 합당한 공동체의식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으면 바른 길을 가기 어렵다. 개인과 가족, 개인과 사회, 개인과 공동체, 개인과 국가의 성숙은 항상 동시적으로 이루어질 때 인류의 미래, 곧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미래와 손을 잡을 수 있기 마련이다. 강조하거니와, 공간적 존재인 사회적 삶과 시간적 존재인 역사적 삶은 언제나 상호 연쇄되는 가운데 성숙해갈 수밖에 없다.
자유
개인과 사회가, 개인과 국가가 서로를 지속적으로 성장시켜 나가기 위해 가장 긴요하게 요구되는 가치는 ‘자유’이다. ‘자유’는 본래 근대적 것이다. 자본주의의 성숙과 더불어 사람들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가치가 ‘자유’라는 얘기이다. 따라서 자유는 사랑, 평등, 평화 등의 가치와 언제나 상응하며 자리할 수밖에 없다고 해야 옳다. 근대적 가치 일반이 국가공동체를 단위로 하여 실현된다면 사랑, 평등, 평화의 가치와 상응해 존재하는 ‘자유’ 또한 그와 다를 리 만무하다. 국가공동체를 구성하는 개별 자아를 전제로 하는 것이 자유이고, 그와 상응해 존재하는 것이 평등, 사랑, 평화라는 것이다.
이 가운데에서도 ‘자유’는 개별 자아를 전제로 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가치로 구현되기 어렵다. 개별 자아의 자유가 억압되지 않아야 국가공동체 전체를 향한 창조적 상상력이 발휘될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자유는 집단이나 공동체의 것이기보다는 개인, 곧 개별 자아의 것이라는 얘기이다. 물론 집단이나 공동체, 국가 의 경우라고 하여 자유를 논의하지 못하거나 구현하지 못 할 것은 없다. 하지만 집단이나 공동체, 국가 등의 자유는 자유라는 말보다는 ‘자주(自主)’라는 말이 적당해 보인다.
여기서 새삼스럽게 ‘자유’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는 까닭은 단순하다. 윤석열 대통령의 새로운 정부가 출발한 이후 ‘자유’라는 말이 또다시 인구에 회자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대통령 취임사’에서 그는 ‘자유’라는 말을 무려 35번이나 반복해 주목을 받은 바 있다. 대통령 취임사에서 ‘자유’라는 말이 강조된 것은 대한민국의 정치체제를 상징하는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하는 과정에 비롯된 듯 싶다. 대한민국의 정치체제가 ‘자유민주주의’라는 것은 덧붙여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대한민국의 역사적 현재로 미루어볼 때 ‘자유’라는 말이 강조되는 것이 다소 생광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 김지하가 ‘타는 목마름으로’ 외치던 ‘자유’는 이미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실현된 지 오래이다. 아직도 국가보안법 등이 엄존하고 있기는 하지만 대한민국 국민들이 느끼는 의식의 현 단계에서는 그러한 정도의 ‘자유’는 이미 충분히 향유되고 있고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5년을 거치면서 국민들 모두가 크게 부족하지 않은 자유를 누려왔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지난 1970년대도, 1980년대도 아닌 지금 이곳 2022년의 국민들로서는 충분히 ‘자유’를 즐기고 있는 단계에 이르러 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지금 이곳에서 누리는 ‘자유’의 단계가 지나칠 정도로 지극한 것은 사실이다. 이는 얼마 전 퇴임한 문재인 대통령의 경상남도 양산군 평산 마을 사저 주변에서 벌이고 있는 뚱딴지같은 사람들의 생뚱맞은 ‘자유’를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다. 물론 이들의 너절하고 지저분한 행동을 참된 자유의 개념과 관련시켜 받아들이기는 못마땅하지만 말이다. 이들의 한심하고 추잡한 행동은 흔히 자유의 왜곡된 모습으로 내세우는 방종에도 미치지 못하는 분풀이나 화풀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야 옳다.
지금의 ‘한국작가회의’는 박정희, 전두환의 군사 정권 때 ‘자유실천문협의회’라는 이름으로 민족민주운동에 앞장을 서온 바 있다. 박정희, 전두환의 군사정권이 억압을 일삼던 그때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에서는 제대로 된 자유, 온전한 자유가 실현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대한민국의 국민들의 경우 1980년의 광주항쟁, 1987년 6월항쟁과 그해 7, 8월 노동자대투쟁, 그리고 2016년의 촛불혁명 등을 통해 어느 정도는 저 자신의 자유를 실현할 수 있게 된 것이 사실이다. 그로 말미암아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등의 민주정부 시절에는 개인의 자유가 특별히 억압된 사례를 찾아보기 어려워진 것이 분명하다.
그러한 이유만으로도 대한민국 국민들의 의식의 현 단계로 볼 때 ‘자유’ 운운하는 일은 다소간 객쩍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여기서 다소간 객쩍어 보인다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들의 의식의 성숙단계와 관련해 이른바 뒷북을 치는 느낌이 없지 않다는 뜻이다. 본래 자유가 온갖 간섭으로부터, 독재로부터, 억압으로부터, 핍박으로부터, 편견으로부터 자율의 모습으로, 독립의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간섭이나 독재나 억압이나 핍박이나 편견의 주체가 국가사회라고 해도 국가사회에 대항해 추구되는 개인의 자유가 의미를 잃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경제적 상위계급에 의해 경제적 하위계급에게* 행해지는 간섭이나 독재나 억압이나 핍박이나 편견에 대항해 이루어지는 개인의 자유도 마찬가지이다. 정작의 개인의 자유는 개인들 사이에서 추구되기보다는 국가사회나 경제적 상위계급에 대항해 추구되는 경우가 제대로 된 의미를 갖기 마련이다. 돌이켜보면 국가사회의의 주체나 경제적 상위계급의 주체가 독재의 형태로 존재할 때 그에 대해 대항해 획득해온 자유는 아무래도 집단의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것이야말로 자유에 계급의식이 작동할 수밖에 없는 근거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논의 더불어 잊어서 안 될 것은 자유가 본래 개인의 것이고, 개인의식을 성숙시키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물론 이때의 개인의식은 책임의식과 맞물려 있는 민주주의 사회의 기초자산이고, 토대자산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책임의식과 함께하는 개인의식은 민주주의 사회를 촉진시키기도 하지만 민주주의 사회라는 바탕이 없이는 성숙되기 어렵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이러한 논의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개인의식의 성숙은 개인의 자유를 바탕으로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개인의식의 성숙과 함께 하는 개인의 자유는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이 국가사회의 주체로 깨어 있지 않고서는 바르게 실현되기 어렵다.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이 국가사회의 주체로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자유의 주체인 개인이, 곧 하나하나의 민(民)이 자신이 속한 국가사회의 주인이라는 의식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민주
민(民)이 주인이라는 의식이 적극적으로 실천되는 국가공동체를 가리켜 이른바 ‘민주주의 사회’라고 한다. 하나의 국가공동체가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일은 인류의 역사 전체를 보더라도 별로 쉽지 않다. 대한민국만 하더라도 죽음을 불사하는 지속적인 투쟁 끝에 이제 겨우 민주주의 사회의 초입에 이르러 있을 따름이다. 문재인 정권 5년을 거치는 동안 지자체에는 주민자치 활동이 겨우 정착되었고, 시민주체의 정치참여, 정책참여, 사회참여 등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지금 이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시민주체의 정치참여, 정책참여, 사회참여 등은 아직도 미성숙한 차원에서 매우 연약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사소한 억압과 핍박만 가해져도 민(民)이 중심이 되어 자율적으로 참여해오고 있는 각종 지방행정은 자칫 파괴되거나 해체되기 쉽다. 시민주체의 여러 참여문화가 아직도 제대로 성숙해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최근 오세훈 시장의 시민참여가 배제된 서울시의 여러 행정을 보더라도 충분히 확인이 된다. 그가 시장으로 취임한 이후 각종 시민 단체가 힘을 잃고 무기력하게 나자빠져버린 것을 익히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민주체의 참여민주주의가 활성화되지 않고 민주주의 사회가 제대로 진전되기는 어렵다. 정치형태로서의 지방자치는 여전하겠지만 자칫 잘못하면 지방자치라는 일종의 구조와 조직만이 방만하게 내던져져 있기 쉽다. 효율성을 빙자한 정부나 지자체의 일방적 통치행위보다는 개별 시민들의 적극적인 정책, 행정, 사회의 참여가 오늘의 민주주의 사회를 진전시키는데 유용하리라는 것이다. 중앙정부이든, 지방정부이든 그것의 주체가 국민이라는 것을 바로 알고, 안 것을 바르게 실천할 때 정작의 민주주의 사회는 가능해지리라.
윤석열 정부의 출현과 더불어 혹자는 이제 비로소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정치체제가 완성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정말 그런가. 민주주의 정치체제의 실현 여부를 되물어볼 때 현 단계의 역사와 관련해 걱정되는 일이 너무도 많은 것은 사실이다. 우선은 대한민국 정부의 임명직 및 선출직 공무원들 중에 검찰 출신이 지나치게 많은 것이 걱정이다. 검찰동일체 원칙이 몸에 밴 검찰 출신의 고급공무원들이 성숙한 개인의식을 전제로 하는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제대로 꾸려나갈 수 있을는지 의심이 든다.
과거제도로 공무원의 자질을 검토하던 조선시대에 비하면 지금 이곳의 공무원들이 한층 더 국민들을 받들고 모시는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정규직 공무원이든 비정규직 공무원이든, 고급공무원이든 하급공무원이든 지금은 국민들과의 관계에서 훨씬 더 하심(下心)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파출소, 경찰서, 동사무소 등 정부기관의 화장실이 공용화장실이 되어 국민들이 그것을 사용하는데 두려움 없어진 것도 민주화의 결과, 곧 민주주의 실현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그만큼 공무원과 시민의 관계가 가까워졌다고 하더라도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 할 때의 ‘민주’는 시민주체의 정치 참여, 정책 참여, 사회 참여, 주민자치 등과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렵다. 정치적 패권의 향배와 관계없이 깨어 있는 시민주체에 의한 정치 참여, 정책 참여, 사회 참여, 주민자치가 보장될 때 역사의 바른 진전은 가능해지리라.
반지성주의과 지성주의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강조한 것 중에는 그밖의 것도 많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가장 큰 원인으로 ‘반지성주의’를 강조한 것도 두루 관심을 끈 바 있다. “반지성주의가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해치고 있다”고 주장한 바 있는 것이 대통령 취임사에서의 그이기 때문이다. 몇몇 언론에서는 그가 대통령 취임사에서 ‘반지성주의’라는 개념으로 비판세력이나 반대세력을 배격하고 있다고까지 피력한 적이 있다.
정말 그럴까. 나로서는 그가 취임사에서 강조하고 있는 ‘반지성주의’가 자신을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세력을 몰아치기 위해 슬로건이라고까지 생각하지는 않는다. 대한민국의 사회현실에서는 얼마간 ‘자유’라는 허명(虛名)의 ‘반지성주의’가 판을 치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돈을 벌기 위해, 이름을 얻기 위해, 주목을 끌기 위해 대한민국 사회 전체는 지금 반지성주의라는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중에서도 돈과 관련된 반지성주의는 더욱 심하다. 돈이 되는데 무엇인들 못할까 하는 마음이 대한민국 전체를 뒤덮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어쩌면 돈주의, 자본주의 자체가 반지성주의를 낳은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때의 ‘반지성주의’가 반이성주의와 궤를 함께하리라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그러니 반지성주의를 비합리주의, 반과학주의라는 말로 바꾸어 받아들인들 어떠랴. ‘반지성주의’는 욕망주의, 감정주의, 신비주의, 비의주의, 무속주의, 비속주의와 개념을 함께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반지성주의를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하면 대한민국사회 전체에 미만해 있는 이념이 그와 다르지 않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살펴보면 ‘반지성주의’는 윤석열 대통령을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세력에 못지않게 그를 옹호하고 지지하는 세력이 갖고 있는 한계를 지적하는 말인 듯도 싶다. 보수우파를 자처하는 유튜버들이 보여주는 온갖 가짜 뉴스의 향연이야 말로 ‘반지성주의’에 가장 접근해 있기 때문이다. 지난 번 대통령선거 때 만들어진 수많은 카톡방에서 오고가는 말들과 영상들도 온갖 반지성주의로 뒤범벅되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차라리 욕설의 방이라고 불러야 옳을지도 모르는 것이 ‘윤사모 중앙’이나 ‘서해안 윤사모’ 등의 카톡방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물론 ‘윤사모 중앙’이나 ‘서해안 윤사모’ 등의 카톡방만이 반지성주의를 확인시켜주는 것은 아니다. 상대적인 차이는 있지만 이재명 후보를 지지하는 카톡방에서도 터무니없는 주장이나 이해할 수 없는 선동이 범람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대한민국 사회가 좀 더 합리적 지성과 함께하려면 일단 먼저 집권당인 ‘국민의 힘’과 새 정부에서 지성을 회복하는 모습을 보여야 마땅하다. 그러나 지금의 집권당 ‘국민의 힘’과 윤석열의 새 정부가 보여주고 있는 여러 행태는 정작의 지성주의나 합리주의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것이 분명하다. 정부의 주요 요직을 전직 검사들로 채워 이 나라를 어디로 끌고 가겠다는 것인지 알기 어렵다.
따져보면 지금 이 나라에 횡행하는 반지성주의는 현 단계 국민들의 정신수준과도 무관하지 않은 듯싶다. 현 단계 국민들의 정신수준이 반지성주의, 곧 욕망주의나 감정주의, 그밖에 신비주의나 비의주의, 무속주의나 비속주의 따위를 전면에 불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대한민국을 구성하고 있는 국민들의 개인의식이 아직까지도 감정 및 욕망이 불러일으키는 반지성의 충동에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고 있다는 것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거대한 자본에 봉사하는 대한민국의 각종 언론들의 각종 기사들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들이 국민들의 깨어 있는 개인의식을 마비시키기 위해 폭포처럼 쏟아내고 있는 온갖 가짜뉴스를 보더라도 반지성주의가 미만(彌滿)해 있는 형편은 잘 알 수 있다.
합리적인 사유, 이치에 합당한 사유, 이성이 작동하는 사유가 판단의 중심이 되지 않고서는 누구라도 반지성주의를 극복하기 어렵다. 누가 무엇을 통해 지금 이곳의 국민들로 하여금 합리적인 사유, 이치에 합당한 사유, 이성이 작동하는 사유를 할 수 있게 할 것인가. 여야의 정치권에게 그것을 기대하기는 아무래도 연목구어일 듯하다. 문화예술운동 및 시민운동의 주체들만이 어렵고 힘들게라도 그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짐작해볼 따름이다.(《세종시마루》 2022년 전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