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평의 문학과 한시
조 태 성 교수
(전남대학교 어문학연구원)
1. 관정루(觀政樓)와 성임(成任)의 한시
관정루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정인지의 <관정루기>와 성임의 시로 그 모습을 추정할 수 있을 뿐, 현재는 건물도 없고 또 세워진 장소가 어디인지도 구체적으로 확인할 길이 없는 누정이다. 단지 성임의 한시에 의해 대동면 덕산리를 거슬러 신광면 가덕리로 가는 길이 훤히 보이는 곳에 위치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성임의 한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登任非是好遊觀 등임이 노닐면 구경하길 즐기는 것이 아니요
試憩往鞍蹔借閑 가는 말 잠시 쉬어가자 빌리는 것일 뿐
長路北通嘉里驛 긴 길은 북쪽으로 가리역에 통하고
浮雲東接金城山 뜬 구름은 동으로 금성산에 닿아 있네
薰風枕簟紅塵外 훈풍에 베갯머리 삿자리 속세를 벗어난듯
永日簷楹綠樹間 긴 해는 처마 기둥과 푸른 나무 사이에 걸려있네
賴有榴花紅爛熳 석류꽃 붉은 바탕 연이어 빛을 내니
客中聊復一開顔 가는 길 귀 기울여 다시 한 바탕 웃음이네
2. 영파정(潁波亭)과 이안(李岸)의 한시
영파정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수헌(潁水軒) 혹은 관덕정(觀德亭)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함평읍 기각리 구기산 앞자락을 흘러가는 영수천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정자는 처음에 이안(李岸, 1414~?)이 세웠는데, 그의 아호인 ‘영파정(潁波亭)’을 따서 지금의 누정명이 되었다.
이안은 1445년 단조의 퇴위에 항거하여 관직을 버리고 신말주와 함께 향리도 돌아와 이 정자를 세우고 은둔생활을 하였다. 이후 그는 나라에서 불러도 나아가지 않고 유유자적하게 지내면서 강론을 펼치고, 시를 읊었다.
다음은 그가 남긴 영파정을 노래한 시이다.
樓高飛雁平看背 정자가 높으니 날아가는 기러기 등이 보이고
水淨遊鰕細數鬚 물은 맑으니 노니는 새우 수염을 세겠네
영파정은 정유재란 시에 병화를 입고 소실되었는데, 그 후 영파정 옛터에 후손들이 영수정을 세웠다. 그리고 조선 말기에 유지들이 뜻을 모아 중수하였고, 1966년에 관덕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현판에는 당시 여러 인사들이 남긴 시구가 지금까지 남아 있는데, 몇 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참판 오연상(吳淵常)의 시이다.
十里奇無賞 십리들 둘러도 볼만한 곳 없지마는
玆亭慰寂寥 이 정자 여기 있어 쓸쓸함 달래주네
觀魚春水岸 물 맑은 시냇가 고기 구경하면서
立馬夕陽橋 해지는 다리에서 말을 세우네
路八江湖盡 길은 나뉘어 마을마다 다하고
山分郡縣遙 산은 갈리어 여러 고을 나누네
○然京國想 서울의 소식은 막연하기만 하기에
寄與數鴻飄 날아가는 기러기에 몇 자 소식 부쳐야지
다음은 어사 이면상(李冕相)의 시이다.
箕潁無奇賞 기산 영수 볼만한 곳 없지마는
○詩慰○○ 이 정자 시 한수가 외로움 달래주네
樹老掛飄岸 표주박 걸던 언덕 나무도 늙고
流淸牽飮橋 견음교 다리 아래 물도 맑구나
二人如可遇 그 두 분 만일에 만나진다면
千載不○遙 천 년 세월 기다림도 길지 않으리
我來公己化 나는 오고 공은 이미 신선되어 가셨으니
仙○入夢飄 선학이 꿈속에서 날아다니네
3. 이인정(里仁亭)과 안여기(安汝器)의 한시
이인정은 나산면 나산리 대정마을 초입에 세워져 있다. 1649년에 마을의 공동 회합 장소로 이용하기 위해 죽산 안씨가 주축이 되어 건립하였으며, 연못과 함께 당시에 심은 나무들이 400년이 넘은 지금도 울창하게 자라고 있다. ‘이인정’은 공자의 ‘이인위미(里仁爲美)’, 즉 ‘어진 마을에서 사는 것이 아름답다’라는 뜻의 글귀를 따와 이름하였다고 한다.
특히 이 정자는 우리 전통문화의 미풍양속인 ‘인(仁)․의(義)․예(禮)․지(智)’의 정신이 절절히 배어 있다. 이러한 정신은 이인정에서 해마다 행해지고 있는 풍습에서도 알 수 있다. 지역 선비들이 마을의 젊은이들을 모아 시(詩)와 예(禮)를 강론하고 덕업을 권장하며 이웃과 종족간의 화목을 위해 ‘인(仁)’ 가르쳤다.
‘이인정’이라는 현판은 조선시대 명필가 권수암(權遂岩)이 썼으며, 정내에는 나산 출신으로 조선 효종 때 창평 현감을 지냈던 안여기의 시문을 비롯해 대사헌을 역임했던 이언경(李彦經)의 시, 그리고 각종 제영문(題詠文)과 기문(記文) 등이 걸려 있다.
먼저 안여기의 작품이다.
江山佳麗冠南州 강산이 아름답기 남쪽에서 으뜸이라
萬象森羅不盡收 삼라만상 그 경치를 어찌 다 거두우리
垂柳煙消疏影散 수양버들 잎은 지고 성긴 가지 나부껴도
晩荷風動暗香浮 늦게 핀 연꽃은 바람 일어 향기 그윽 풍겨오네
千峰透免長屛然 천 봉우리 고운 산색 긴 병풍 펼치었고
一水淸波碧玉流 한 줄기 맑은 시내 푸른 구슬 흘러 가네
勝會百年咸老小 좋은 모임 오래 오래 노소가 함께 하니
擧盃相樂幾春秋 잔을 들며 서로 즐겨 몇 년 세월 지났는고
다음은 대사헌을 지냈던 이언경의 시이다.
早識名亭在 일찍이 좋은 정자 있음을 알았는데
今從特地遊 이제야 이름난 땅 와서 노니네
池淸開鏡面 연못은 맑아서 거울을 여는 듯
樹老壓欄頭 나무는 늙어서 난간을 누르네
野臾聯鞭集 시골 노인들 잇달아 모여 오고
山盃次第酒 들 밖에서 드는 술잔 차례로 권한다네
醉來移席興 취기가 올라오자 자리 옮겨 노니는데
斜日更遲留 넘어가는 저녁 해 다시 잡아 두었으면
이 시와 관련하여 이인정에 전해오는 전설이 있다. ‘池淸開鏡面 연못은 맑아서 거울을 여는 듯’이라는 구절과 관계가 있는데, 간략히 소개하자면, 마을을 병풍처럼 감싸 안은 옥녀봉에 한 낭자가 살고 있었는데, 이 연못의 물이 너무 맑아 자기의 몸 매무새를 가다듬을 때는 항상 이 연못을 거울로 삼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연못이 수정처럼 맑다는 것을 의미하는 전설이다.
4. 백화정(百花亭)과 정휴동(鄭休東)의 한시
백화정은 월야면 의치리 칠봉산 아래에 자리 잡은 정자로 화정처사(花亭處士)로 불리던 정휴동이 세운 정자이다. 한때 후학을 기르던 글방으로도 쓰였으나, 주로 위국충정을 토로하던 인근 선비들의 담론장으로 쓰였던 곳이다. ‘백화정’이라는 명칭은 당시 나주목사가 현란한 화초와 울창한 수목을 칭찬하면 이름을 붙여 주었다고 한다.
또한 이곳은 조선 말기 대선비였던 기정진(奇正鎭)이 강론을 펼쳤던 곳으로도 유명하여, 그의 <백화정중수기(百花亭重修記)>를 비롯한 수많은 명사들의 글귀가 새겨진 현판이 걸려 있기도 하다.
다음은 정휴동의 작품이다.
一區奭塏三椽屋 높고 정결한 이 땅에 삼 칸 집 마련하여
終老悠之物外遊 속세 떠나 유유히 한평생 마치려네
掠檻淸流鳴玉佩 난간 스쳐 흐르는 물 패옥의 소리인양
擁門翠嶂點螺頭 문 곁에 초록 봉우리 소라처럼 붙어 있네
居同猿塵昑同鶴 잔나비 사람이랑 같은 곳에 학은 분명 나의 시벗(詩朋)
釣有綸竿醑有○ 고기를 못 낚을까 용수 낀 술동이 없겠는가
花石滿庭書讀室 꽃과 돌 뜰에 가득 서책은 방에 가득
山家計活赤云優 산집에 사는 계량이 이만하면 넉넉하리
백화정의 건립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기정진의 중수기에 의하면 원래 초가였던 모양이다. 이 정자를 중수할 때 아홉 칸의 둥근 기둥에 주련을 달고, ㄴ자형 마루와 문을 떼었다 달았다 할 수 있는 간살막이 방이 두 개 있었고, 처마에 차양을 단 아담한 초가였으나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목조 기와 건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하였다.
5. 자산서원(紫山書院)과 정개청(鄭介淸)의 학문
자산서원은 조선 중기 호남 사림의 한 봉우리를 이루었던 곤재(困齋) 정개청(1529~1590)이 1589년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유배지에서 병사하자 그의 문인들이 스승의 신원운동(伸寃運動)을 전개하면서 건립한 서원이다. 이 서원은 광해군대에 엄다면 엄다리 제동 윤암산 인근에 설립하여 숙종대 ‘자산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곤재 정개청은 조선 중기의 문인이자 학자로서 중앙의 정치무대에는 크게 진출하지 않았으나, 호남 사림의 학맥상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매우 큰 인물이다. 특히 광해군대부터 숙종연간에 걸쳐 치열해진 남인과 서인 간의 당쟁에서 논란의 주요 쟁점이 되기도 하였던 인물이다.
그의 자(字)는 의백(義伯), 호(號)는 곤재(困齋)라 하였고, 어려서 일찍 집을 떠나 보성에서 성리학뿐만 아니라 천문, 지리, 복술 등의 잡학에도 힘써 강구하였으며, 이로써 ‘어렵게 학문을 얻었다’하여 호를 ‘곤재(困齋)’라 칭하였다고 전해진다.
이후 산에서 나온 뒤에 상경하여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서 사암(思庵) 박순(朴淳)과 교유하며 10여 년간 수학하였고, 또한 이이(李珥), 이산해(李山海) 등과도 교유를 가졌다. 이후 현재의 엄다면에 정착하여 후학 양성에 전심을 기울이다 주변의 천거로 몇 가지 관직을 거치는 중 서인이었던 박순이 영의정에서 파직당한 뒤 동인들과 친교를 맺게 되었다. 이때 이산해의 추천으로 곡성현감이 되었으나 송강(松江) 정철(鄭澈)을 비롯한 많은 학자들로부터 박순을 배반하였다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러던 중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정여립과 교분이 두터웠다는 이유로 연루되어 유배지인 경원에서 죽었다.
그러나 정개청에 대한 당시의 평가는 매우 판이하다. 우선 서인들의 기록을 보면 그의 집안은 나주의 관속, 즉 미천한 종의 집안이며, 그의 스승은 서경덕이 아니라 박순인데, 스승의 천거로 벼슬을 한 그가 뒷날 스승이 파직당하자 등을 돌리고 동인들과 친교를 맺어 곡성 현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는 그의 신원(伸寃을 주장하는 상소에서 이렇게 반박하고 있다.
“고려 때 귀양가는 사람은 반드시 관아에서 부리게 되었으니, 지금(조선시대)의 향리이며, 높은 벼슬아치는 없었으니 한미하다면 모를까 관속이라 이른다면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박순과는 불과 6살 차이로둘 다 서경덕의 제자로서 학문을 논한 글이 있는데, 어찌 그의 제자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에 대한 평가는 이처럼 판이하다. 박순과의 관계가 그렇거니와 특히 정철과의 관계는 그의 죽음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어 더욱 혼란스럽다. 요약하면, ‘정철이 호남에 머물 때 주색에 빠져 예법을 경시하였는데 사람들이 그에 휩쓸리자, 정개청이 이를 걱정하는 말을 하여 정철의 분노를 샀다. 정개청이 그 때 유행한 청담의 잘못된 습속을 경계하기 위해 절의와 청담에 관한 글(節義淸談辨)을 지었는데, 정철 등이 이를 배절의론(排節義論)이라고 비판하다가 기축옥사 때 그것을 빌미로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정개청은 광해군대에 역적의 누명을 벗었고 그의 사우(祠宇)가 윤암에 건립되었다. 그러나 이후 서인이 집권하면 무너뜨리고 남인이 집권하면 다시 세우기를 반복하는 사태가 계속되었다. 서원이 당쟁의 제물이 된 것이다. 정개청, 이산해 등을 숙청하였던 정철이 실각하여 귀양을 가자 희생자들에 대한 신원운동이 전개되었고 마침내 윤암정사의 터에 그를 봉안하는 사우를 건립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인조반정 이후 서인이 정권을 잡자 정개청의 서원이 공론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훼철을 주장하였다. 조정에서는 이 문제가 논의되었으나, 정개청의 직첩이 환급되고 관작도 내려졌다. 그러나 효종대 다시 정개청 서원의 훼철이 논의되어 결국 1차 훼철이 시행되어 서원의 위판은 모두 불태워지고, 재목은 헐리어 무안현청의 마굿간을 짓는 데 사용되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이후 남인의 중요 인물인 윤선도가 이를 비판하는 글을 올려 결국 남인과 서인의 대립은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결국 남인이 승리하자 정개청의 서원을 복설해야 한다는 논의가 재론되어 숙종대 다시 복설되었다. 서원 복립에 송공한, 그의 학통을 이어받은 호남 사림들은 2년 뒤 사액을 청하는 소를 올렸고, 숙종은 ‘자산서원’이라는 사액을 내렸다. 숙종 6년 서인이 다시 집권하자 다시 서원은 제2차 훼철을 당하였고, 또 재사액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리고 왕의 특명으로 우득록(愚得錄) 3권과 부록 1책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자산서원은 다시 한 번 훼철을 당하게 되는데, 이것이 3차 훼철이다. 이후 서인의 장기집권으로 자산서원은 그 존재가 없어진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다가 영조대 ‘제동사(濟洞祠)’라는 이름으로 개칭하여 중건이 되었으나 또다시 4차 훼철을 당하고, 정조대 다시 세워졌으나,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으로 5차 훼철되었고, 이후 명맥만 유지하여 오다가 1988년부터 복원되기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정개청의 삶과 학문이 오롯이 배어 있는 그의 몇 마디를 소개한다.
凡人聞過惡 不自意於改攻 而徒惡其人之言 甚者或至於怨怒 使之威劫而不能言 嗚呼生且不能以一手盡蓋天下之耳目 況死而逃其公論乎 惑之甚也 余當以此爲戒 喜聞過而遷善乎
- <문과원인(聞過怨人)>, 우득록(愚得錄) 卷之一
무릇 사람이 허물을 들으면 스스로 잘못을 고치는 데 뜻을 두지 않고, 한갓 그 사람의 말이 너무 심한 것만을 미워하며, 혹 원망하고 노함에 이르러 위협적인 겁을 주어 능히 말을 못하게 하니, 아아, 살아서도 한 손으로 천하의 귀와 눈을 다 가리지 못하는데, 하물며 죽었을 때 그 공론이 뻗어감을 어떻게 할 것인가? 미혹이 어찌 이리도 깊은 지, 내 마땅히 이를 경계로 삼아 허물을 들으면 선으로 옮겨 기뻐하리라.
所言雖善 不致思而遽言則妄也 所行雖善 不硏幾而遽動則亦妄也 須是思而後言 幾而後動
- <자경(自警)>, 우득록(愚得錄) 卷之一
말한 바가 비록 착할지라도 생각을 진지하게 하지 않고 서둘러 급작스럽게 말하면 이치에 맞지 않는 망령된 생각인 것이다.
행한 바가 비록 착할지라도 기미를 연구하지 않고 서둘러 급작스럽게 움직이면 또한 망동이 되는 것이니, 모름지기 생각한 후에 말을 하고 기미를 안 후에 움직여야 한다.
謙 謂謙謙君子之謙也 謙則德日新而無驕泰之氣 虛 謂君子以虛受人之虛也 虛則心有主而無胡亂之思
- <겸허설(謙虛설)>, 우득록(愚得錄) 卷之一
겸손하다는 것은 겸손하고 또 겸손해하는 군자의 겸손함을 말한 것이니, 겸손하면 그 덕이 날로 새로워져 오만자긍(傲慢自矜)한 기상이 없게 되는 것이며, 허심, 곧 욕심이 없어 마음이 결백하다는 것은 군자가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남의 허심을 받는 것을 말한다. 허심하면 마음에 지표가 있어서 무지망작(無知妄作, 마음이 일정한 방향이 없어서 사상이 잡다함)할 겨를이 없게 되는 것이다.
다음은 그가 남긴 시 가운데 병자년 팔월 구일에 지었다는 <詠懷三首> 중 첫 수이다.
中秋月色皎如晝 한가위 달빛은 대낮처럼 밝아서
松下幽人伴影時 소나무 아래 거니는 이 그림자도 따를 때
征雁一聲天外遠 기러기 울음 소리 하늘 밖에서 들려오니
箇中心事有誰知 개중에 누구 있어 나의 심사 알리오
6. 월산사지(月山祠址)와 이덕일(李德一)의 문학
월산사는 현재 유허비만이 남아 있는 곳으로 충무공 이순신과 칠실 이덕일(1561~1622)을 제향했던 곳이다. 대동면 향교리 남교에 그 유허비가 남아 있다. 건립될 당시의 이름은 ‘칠실사(漆室祠)’였으나, 영조대 호남의 유림들이 함평 월산에 충무공 이순신을 주벽으로 하여 이덕일을 배향할 것을 건의하여 현재의 장소에 이건하였고, 이 때 사우의 명칭도 ‘월산사’라 개칭한 것이다.
이덕일은 함평 출신의 충절인물로, 자(字)는 경이(敬而), 호(號)는 칠실(漆室)이며, 본관은 함평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열심히 닦아 이름을 떨쳤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로 피난길에 올랐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공은 학문을 그만두고 무예를 닦아 무과에 급제하였다.
그리고 정유재란을 당하여서는 함평민과 피난민들을 모아 의병을 조직하여 고산(孤山, 현 향교리 뒷산의 고산골)과 동막(東幕, 현 신광면 월암리 동막동으로 추정) 등지에서 왜적을 무찌르며 당시 해전에서 고군분투하던 충무공을 도왔다.
이덕일과 충무공의 인연은 전일 충무공이 함평에 머물렀을 때 당시의 폐단과 군사전략을 지어 바친 것이 인연이 되어 공의 신임이 두터웠고, 그의 막하에서 여러 가지 자문을 한 바가 많았다고 한다. 그 후 공은 절충장군이 되고, 곧이어 병조좌랑, 통제영병마절도사가 되었다.
이후 광해군의 난정이 계속되자 낙향하여 은거하다가 인목대비의 폐출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고 그 유명한 <우국가(憂國歌)> 28장을 지었다.
<우국가> 28장 중 몇 장과 그 한역시를 소개한다.
學文을 후리티오 反武을 온 은
三尺劒 둘너메오 盡心報國 호려터니
일도 옴이 업니 눈물계워 노라 (제1장)
辭曰 投筆而起 此何爲些
提三尺劒 報吾君些
吁嗟乎 事無所遂 不覺淚潛潛些
어와 셜운디오 각거든 셜운디오
國家 艱危 알니 업서 셜운디오
아모나 이 艱危 알아 九重天의 오쇼셔 (제6장)
辭曰 心之悲矣 思之愈悲些
國家艱危 知無人些
夫孰能 知此艱危 奏吾君些
힘 홈 나라 爲 홈인가
옷밥의 뭇텨이셔 일업서 호놋다
아마도 근티디 아니니 다시 어히 리 (제13장)
辭曰 彼鬪者 子爲公乎些
食胞安居 無事爾些
嗟嗟乎 莫之能止 復何爲些
이 외나 져 외나 즁의 그만져만 더져두고
올 일 오면 그 아니 죠손가
올 일 디 아니니 그 셜워노라 (제18장)
辭曰 彼可兮此否 姑舍是些
不亦乎樂 當爲爲些
獨惜乎 怠忽不動 維是之嘻些
이덕일의 <우국가>는 당시 식자들 사이에 널리 퍼져 애송되었던 것으로 추측되어 더욱 그 가치를 인정받는 작품이다. 이덕일보다 43년 후에 태어나 병란 후에 두문불출하고 비분강개하며 여생을 마친 송암(松岩) 이연환(李延煥, 1604~1673)의 작품에도 이덕일의 노래가 언급되어 있다. 참고삼아 소개한다.
이거사 어린 거사 잡말 마라스라
漆室의 悲歌를 뉘라서 슬퍼하리
어듸서 濁酒 한 잔 얻어 이 실람 풀가 하노라
7. 이진문(李振文)의 문학
이진문은 광해에서 인조년간에 생존했던 인물로, 무과 주부를 지낸 인물인데, 함평인이다. 그가 관서의 관방에 나가 겪은 일을 기록한 필사본 봉사부군일기(奉事府君日記의 뒷부분에 <경번당가> 14수가 수록되어 있어 일단 그의 작품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아직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학계의 의견이다.
<경번당가>는 모두 14수로 된 연시조로, 정월부터 섣달까지의 시상을 각각 1수씩 읊고, 마지막에 전체 시상을 마무리한 2수를 첨가시킨 월령체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일년 열 두 달, 매달의 세시풍습이나 자연의 변화에 따라 일어나는 임에 대한 그리움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다음은 이 작품의 첫 번째 수(정월령)와 열 두 번째 수(12월령), 그리고 마지막 결사형 수로, 각각 정월 대보름날 달맞이하는 사람들을 보고 달 같은 임을 그리는 마음을, 그리고 한 해의 그 많은 날 동안 임을 볼 날은 어찌 그리 적은 지 한탄하는 마음과 임과의 사이는 지척이 천리라 꿈에도 미치기 어려우므로 차라리 명월이 되어 가는 곳마다 뒤따르겠다는 일편단심을 노래하고 있다.
졍월 한보롬날 가 사하
산 너머 하선애 구롬 소옥글 보다
우리도 님을 두고 비초여나 보고져 (정월령)
섯리 너머드니 도 거의도다
열두 삼 예슌 나리로다
엇지다 하고한 날래 님 볼 나리 져근고 (12월령)
지쳑이 쳘니러니 말라도 간다말가
산고 슈심니 일 미츨손가
하로 명월이 되여 간 죡죡 비최리라 (제14수)
위에서 언급한 유적지와 관계된 인물 외에도 함평이 배출한 걸출한 문인들은 꽤 많은 편이다. 임진란 등을 주제로 하여 약 50수를 제작한 정준(鄭浚), 그리고 기대승의 문하로 약 100여 편의 시를 남긴 정경식(鄭慶植), 244수에 이르는 시를 제작한 김두삼(金斗三), 면암 최익현의 문하에서 무려 550여 수에 이르는 시를 제작했던 김기순(金箕舜) 등이 대표적인 문인들이다. 그러나 아직 이들에 대한 연구는 매우 미진한 편이라 향후의 업적을 기대하며 이 글에서는 제외한다.
<참고문헌>
정개청, 우득록.
목포대학교, 함평군의 문화유적, 1993.
함평문화원, 함평의 문화유적, 1988.
송광룡, 역사에 지고 삶에 이긴 사람들, 2000, 풀빛.
강전섭, 「칠실 이덕일의 <우국가첩>」, 국어국문학,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