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오래도 살았다>
80년 전 한성부 시절, 그러니까 일제시절에는 성북구는 없었다. 동대문구에 속했다가 1949년에야 비로서 성북구로 분구되었다. 성의 북쪽에 있다하여 성북구로 구명을 붙였다.
4대문은 아시다시피 남대문, 동대문, 서대문, 북대문(숙정문)이라하는데,
4대문 중 남대문,동대문, 서대문은 다들 알고 있지만 북대문은 어디있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
나도 성북동산 능선의 이 좁은 성문이 북대문이라 불리우는건 모르고 자랐다.
이 문은 삼청동 감사원 앞길로 업힐 라이딩을 한참하면 정상에서 성북동가는 차길로 이어진다. 그 옆에 신축된 성곽을 끼고 150여미터 오르면 북대문이 나온다. 지금 체대 건너편 방이동으로 옮겨간 보성고등학교 위 뒷산이 북대문 성벽과도 마주친다.
몇해 전 북대문 성곽 바로 위쪽에서 박원순 시장의 주검이 발견되어 난리가 난 곳이기도 하다.
북대문은 종로구 삼청동과 성북동을 잇는 문으로 이런저런 이유로 통제 되었었다.
< 옛날 성북동 농사꾼들이 수확물을 지게에 잔뜩 얹어 지고 힘겹게 산길을 올라온다. 북대문에 이르면 이마에 흐른 땀을 옷소매 끝으로 딲는다. 그리고는 삼청동으로 부지런하게 내려가 장판에 끼어든다.>
100년 전 성북동 농부의 모습을 나름대로 그려보니 정말 세상이 천지개벽을 한건 맞다.
우리 정달자들도 아하지기를 앞잡이 시켜 이 대문 옆길을 통과해 성북동으로 가서 삼청각 옆 만두집ㅡ빵공장에서 점심을 먹은 적이 있다.
농부들이 지게를 지고 성을 넘은 시절과 쫄바지에 잔거타고 성을 넘은 여인들이 사는 오늘과는 거반 100년의 시간이 건너 뛰었다.
그 시절 농사꾼들과 오늘의 정달자님들을 스틸컷으로 찍어 붙여 올리면 1세기가 같이 가는 작품사진이 나올텐데!
이 북대문성밖 마을 중에 성북동이 그 때도 있었고, 지금도 있다는 설명을 길게 적었다ㅈㄷㅡㅡ.
나는 일제시대에 태어나 걸음마를 시작해서 이 동네에서 반평생 가까운 세월을 보냈다, 어느새 50이 훌쩍 넘어 대학생 아들을 둘이나 둔 내 아들도, 내 외동딸도 성북동에서 태어났다. 아마도 내가 성북동을 무지 사랑헸던가 아니면 엉딩이가 무거워서 일까.
<번지수없는 비둘기마을>
성북동하면 독립운동을 하다 옥고를 치뤘던 고 김광섭 시인(1904-1977)이 1968년도에 월간문학지에 발표한 <성북동 비둘기> 라는 시가 떠오른다.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비들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돈다. 후략>
시인이 성북동산ㅡ엄밀히 말하면 북한산 내린줄기지만 ㅡ 돌깨는 소리를 들으실 때 거기 살았던 나도 같이 들었다. 성북동 회장님촌을 만들려고 산자락 돌깨는 소리였다.
결국 북대문 아래 세칭 달동네 , 성북동 217번지 주민들은 정부가 주는 보상비 몇푼과 대토 받은 땅을 받아 들고 아무 연고도 없는 성남시 수정구나, 양천구 신정동으로 뿔뿔히 흩어져 떠나 갔다.
내 초교 동창들의 절반 가까이는 이 달동네에 걸쳐 살았다.
참고로 내 출생지 지번은 길상사 아래 2XX 번지인데 지금은 헐고 집을 지어 찾지못하고 왔다.
부촌과 마주본다는 이유로 뜬금없는 날벼락을 맞았다고나 할까!
이 후 달동네 마즌편 산의 절반이 회장님들 집터로 까 뭉게지고 어마 어마한 대 저택들이 성북동 지번을 받고 지어졌다. 어느 대통령 형님, H 그릅 회장 일가들, 호주 대사관 , 멕시코. 독일, 네델란드 대사관저 등 수백채가 있다. 참 최근에는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를 부른 가수 이승철씨도 그 동네 주민이 되었다.
이래서 내가 어릴때 잡았던 가재, 깨구락지, 피라미 후손들이 살던 계곡들이 몽땅 사라진거다. 중학생 형들은 바위를 들쳐 가재를 잡고.초등생인 우리 애들은 물통을 들고 쫄쫄 따라만 다녔었다. 이 골짜기에 남겼던 나의 , 우리 애들의 추억들도 묻혀지거나 돌깨는 소리에 실려 성북동 하늘로 날려 갔을거다. 그바람에 성북천의 발원지도 덮어졌다.
김광섭 시인이 당신 가슴에 금이갔다 라며 아파했다.
아마도 그래서 지금 내 나이 만큼도 못버티시고 서둘러 떠나신가 보다. 시인이 6년간(61-66년) 사시던 집터 자리에는 지금 표지석만 남아있다.
부촌 마을에서 창문을 열면 달동네가 눈에 들온다. 이 산동네를 서둘러 철거한 이유는 성북동 신부자촌에 외국 대사관이나 관저가 많이 있어 망신스럽다는 거였다. 실제 성북동 산에는 30개에 달하는 외국대사관이나 관저가 있고 대사관로라는 도로명도 있다. 부자들에게 눈엣 가시였던 달동네 아직도 일부 남아있다.
영조시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성북동을
<북저동 혜화문밖 북쪽에 있는 데 복숭아꽃이 유명해 도화동이라
불리었으며 고관대작에서 일반 시민들에 이르기까지
발길이 끊기지 않은 명소였다. 동 가운데 복숭아나무를
별려 심어서 봄철에 복사꽃이 한참 피면 도성 사람들이 다투어
나가서 놀며 구경한다. 민간에서는
도화동이라 부르며 - 중략- 늦은 봄철마다 노는 사람들과 거마가 가득찬다.> 라고 도화동이라 하고 풍광을 적었다.
당시 이들이 넘어 다녔던 문은 산위의 북대문이 아니라 혜화동과 삼선교를 연결하는 암사고개 정도의 언덕위에 만든 동소문이 였을거다. 성북동에서 잔거를타고 내려와 삼선교 4거리에서 우회전 하면 오른쪽 언덕길에 동소문이 보인다.
그런데 6.25 전쟁 중 복숭아 나무들은 다 땔감으로 베어 썼는지 싹쓸이가 되었다. 민둥산이 된거다. 헌데 나는 어릴 때 복숭아 나무를 본 적이 없다.
이 아름다운 계곡에 역사적 보존가치가 있다 없다 하여 말 많은 <성락원>이라는 별장이 있는데 이 집을 구경하러 담넘어 들어갔다 경비원에게 붙들렸었다. 그 날 오부지게 혼나고 나왔다.
그때가 초등학교 졸업반 때였나, 아마도 1957-8년으로 기억된다.
그때 웅어리진 내 어린 마음에 결심을 했다. 내 커서 큰 돈 벌어 이 집을 살거라고 맹세를 했건만...ㅎㅎ
살면서 돈은 쬐끔 벌었지만 대부분 이 세상 저 세상 구경하러 돌아다니며 쓰고, 애들 비싼 유학비 대느라 쓰고,
그래도 그냥 남의 신세 안지고 자전거 타며 그럭저럭 살고 있으니 다행이다.
광석님이 소풍을 마치시고 떠나시던 1977년 나도 성북동을 떠나 좋아하는 노래
<O Sole Mio>를 배우려고 아예 그곳으로 가버렸다. 귀국해서도
거의 생의 절반을 보낸 성북동을 간 적이 없었다. 그 후에도 네번이나 이삿짐을 싸서 배로 실어 보냈기 때문에 시간도 없었다. 그러다가 할배가 되어
정달자님들과 잔거를 타고 가니 어찌 감회가 깊지 않을까.
북악 스카이 웨이에서 정릉 방향으로 오다 <곰의 집> 직전에서
성북동으로 급경사로 내려 오면 눈 앞에 큰 저택들이 보인다. 이들 저택사이로 난 길의 경사도는 겁나게 깎여있다.
다시 말하지만 내 출생지는 성북동이다. 70 여 년전 여름에 비가 오면 성북천에는 계곡물이 넘처 흐른다.
내 또럐 사내 애들은 벌거숭이되어 물탕질을 하고, 엄마 들은 빨래를 하고,
캄캄한 한 밤중이 되면, 속옷 만 걸치고 물목을 하며 입아구놀이를 하셨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일년에 서너번 밖에 못가는 목욕탕 대신 개천탕에서 본전을 뽑으신거다.
겨울에는 성북천이 얼면 중학생 형들을 따라 철사를 낀 나무 썰매를 타고 안암천까지 내려갔다.
이렇게 나는 비둘기가 사라진 성북동에서 유년. 청년, 신혼을 보냈기에 성북구 일이라면 모르는 거 빼고는 다 안다.
지금 성북천은 전부 복걔천이 되어 성북구청까지 덥혀있고, 덕분에 우리 달자님들은 안암천 자전거길을 거쳐 청개천 자전거길로 접어든다. 그러니 내가 얼마나 감회가 새로워겠나!
< 그때는 성북구가 참 별 볼일 없었는데 >
일년에 서 너번 정달자에서 즐겨 달리는 남산. 북악 스카이웨이, 성북동, 삼선교, 안암천, 청계천 코스를 달릴 때 마다 내가 살던 동네를 지난다. 지금 초, 중.고생 자녀들을 둔 부모들이나,
두었던 부모들은 교육의 특지라는 강남 8학군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거다.
내가 초등학교 다니는 시절에도 있었다. 지금은 강건너 강남으로 옮겨갔지만
내 초딩시절에는 종로구가 교육특구였다.
성문안 학교와 성문밖학교로 구분됐다. 분명 빈부차이, 플러스 실력 차이기 있었다.
어린 시절 나도 학교를 성안에서 다니고 싶어 어머니를 졸라 성안에 있는 학교로
옮겨 달라고했다. 혜화동 사는 지인한테 부탁해서 복잡한 전입과정을 거쳐 성북에서 혜화초등학교로의 전학에 성공했다.
요즘 고위 공직자들의 위장전입과 비숫한 불법이였다.
내가 전학가서 석달 쯤 다녔을까!
이 명문(?) 초등학교에 갑자기 학생들 실거주지 조사가 나왔다.
아마도 지체높은 어느 학부모가 자녀의 질적저하(?)를 우려해서 민원을 넣었던가 보다.
결국 나는 내가 다니던 성밖 초등학교로 되돌아가는 슬픔을 안았다.
참 정달자 제이슨님이 이 학교 출신이다.
어쨌던 나는성북초교를 졸업하고 명문 k 중학교에 응시했으나 떨어졌다.
고등학교 때 재 응시했으나 또 떨어지 다시 다녔던 중학의 고등학교로 다시 돌아왔다,
대학도 S 대학교 응했으나 또 떨어지고 결국 나는 2차 대학을 갔다.
단 한번도 1차에 붙어본적이 없다. 2차 인생의 딱지를 못 때고 사회로 나왔다.
그러나 이 경험을 통해 많은 친구. 지인들을 얻었고 새로운 경험도
쌓아서 오지락을 넓혔다.
내가 살던 성북구에서는 5대 공립학교중 하나로 경동중고등학교가 유일한 명문학교였다.
그외 기억나는 학교로는 성북중고등학교(현 홍대 사범대 부속고), 강문(현 용문). 서라벌
그리고 삼선. 경동 등이고, 멀리 안암동 대광 등이 있었다.
그리고 성벽 하나를 경계로 걸어서 5,000보 내외 거리에 경신, 동성. 보성 등이 있었다.
반 백년이 흐른 지금 희안하게 이 들 학교 출신들이 한국 연예계를 주릅잡았거나
전설 또는 대부들이 되어있다.
성북 중고 출신은 우리나라 올림픽 최초 권투 은메달리스트 송순천. 미들급 세계참피온 김기수.
강세철씨 아들 철권 허버트강(엄청 나를 따름), 영화배우 이덕화 등이 배출되었다.
강문(현 용문) 출신으로 백일섭, 조영남이, 영화배우 최지희 누나 동생 수부,
한 참 후배 한석규, 국민 MC 유재석 등이 배출되었다.
그리고 서라벌 출신으로는 나훈아, 이계인. 김흥국. 조민기 등이 졸업했다.
그리고 경동출신으로는 야구계의 원로 백인천 형 그리고 국민가수조용필 등 이 나왔다.
경신 출신으로는 축구선수 차범근이 나왔고, 보성은 7080 가수 김세환이 나왔다.
혜화동 로타리에 붙은 동성 출신으로는 김수환 추기경. 염수정 추기경. 연예인으로는 안성기가 있다. 벽계수는 신부가 되고 싶었는데 룸펜 벽계수와 역마살 낀 김선달 DNA 가 있어 포기했고 대신 신자 요셉으로 남았다. 지금은 요셉은 어디가고 벽계수만 남아있다.
하튼 이들 연예인들 중 서너 명은 나하고는 친구들이고, 서너 명은 후배들이다.
백일섭, 조영남은 친구. 영남은 강문고 밴드 부 시절 내 친구가 밴드 마스터
여서 소개를 받았다. 안성기는 끈질기게 내길을 따라다닌 학교 후배이고,
내 출생지는 성북동이지만 본적지는 조용필과 차범근과 같은 경기도 화성시 서산이다.
그러니 이들은 모두 고향 후배나 진배없다.
조용필과 안성기 경동 중학 동창 인연으로 1982년 삼성동 모 행사장에서 처음 만나 소개 받았다.
이제 돌아 보니 모두가 귀한 인연들이었고 언제 또 만날지 모르는 막연한 인연들이다.
그러나 지금은 나한테 진짜 소중한 인연은 현재 만남이 이어지는 인연이다.
달자님들?
한 세월을 풍미했던 친구들도 벌써 고인이 되어 있거나 세상 구경 마치고 떠날때 남길
짐보따리를 챙겨 놓고 누워있다. 나는 지금 어디 쯤 와있고 무엇을 챙겨 놓았나.
내가 주변에 연예인, 음악인, 특히 성악가들이 많은 건 6년 넘는 세월을 그들과 같이 보냈고, 그리고 천성이 오지락이 넓어서 일 뿐 내 실제 먹고 사는 일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
하지만 노래도 불러보고, 남들 노래도 시켜보고, 이들이 노는 무대 마련도 해줘보고, 하고픈 건 다 해보았다고나 할까!
그리고 15년 전에 잔거 타는 놀이터도 만들어 신나게 놀았고, 이젠 그 덕에 성북동 언덕빼기를 끝머리에 붙어 따라 다닌다.
<무슨 미련이 더 남아 있을까>
2002 월드컵 성공개최 기원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공연 후 리셉션(2002.2.1)
첫댓글 왕년에 누구는 금송아지 안키워 봤나라고 식상해 하시는 분들도 계시고, 또 뻥이야 하시는 분도 계실 것 같고 해서 몇장 인증 사진을 올렸습니다. 역시나 했더니 역시나고,혹시나 했더니 혹시나 군요..
이런 저런 이유로 사진은 딱 한장만 남기고 내렸습니다. 마음이 편히군요.
이 사진은 2002년2.1세종문화회관대극장 3300석을 꽊 채운 공연을 했습니다.
합창단 단장으로 공연을 기획하고 출연했던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열린 리셉션 사진입니다.
이 후 150여 단원과 소피아에서 소피아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했습니다.
여기까지~~~
즐거운 성탄 보내시기 바랍니다
그 성북동 비들기쉼터를 얼마전에 다녀왔습니다
다솔감초님 무지 오래만입니다.
그동안 잘지내셨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