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해전과 김억추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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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억추장군은 1584년 명종 3년 11월에 강진군 작천면 박산리(양지쪽)에서 출생하셨다. 장군은 어려서부터 의협심이 유달리 강하고 여력(근육의 힘)이 강했으며 힘이 장사였다. 일찌기 무과에 급제하여 순창현감을 맡고 있을 때였다.
때는 1592년 선조 25년 4월 평화로운 이 땅에 왜군 15만 대군이 쳐들어 왔다. 이른바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이다. 조정에서는 신립과 이 일을 순변사로 왜군의 진로를 막게 하였으나 상주와 충주에서 크게졌다.
그후 왜군은 가는 곳마다 우리진지를 짓밟고 성을 함락시키니 선조 임금은 하는 수 없이 의주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이때 김억추장군은 어명을 받고 피난을 가는 어가(임금이 탄 수레)를 호위하고 평양에 이르렀다. 가는 길을 대동강이 가로 막았다. 장군은 대동강에 도화작전의 주사대장(임금이 거동할 때 다리를 놓는 일을 맡은 임시벼슬)과 평양 방어사(벼슬이름)가 되어 활약하였다.
한편 전국 방방곡곡에서는 나라를 구하고자 의병과 승병이 궐기하여 관군을 돕거나 혹은 단독으로 왜군과 대항해 싸웠다. 옥상의 싸움에서 관군의 주력부대가 왜군의 갑작스런 공격을 당하여 나라가 위태로울 때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옥포, 당항포, 부산포, 한산도 해전에서 왜군을 크게 무찔렀다.
그러나 어찌하오! 이순신 장군은 이와 같은 큰 업적에도 불구하고 원균의 모함으로 죽음을 겨우 모면하고 권율장군의 휘하에서 백의 종군하였다. 한편 이순신 장군을 쫓아내고 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의 해군함대는 왜군에게 크게 패하여 남은 배는 겨우 12척밖에 되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다시 이순신 장군을 불러 3도 수군통제사로 제 임명하여 왜군을 무찌르도록 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12척의 배를 정비하고 군사를 모아 전렬을 가다듬어 임전태세를 갖추었다. 그리고 전국에 방을 써 붙였다.
이 무렵 전라우수사로 있던 김억추 장군은 이순신 장군의 격문을보고 진도로 들어가 이순신 장군과 전략을 협의하였다. 1597년 9월 15일 이순신 장군은 수 많은 왜선이 어란포를 향해 오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진을 벽파진으로부터 우수영으로 옮기고 적이 오기를 기다렸다.
장군은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았다.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하였고, 또한 사람들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려워 할 수 있다는 말이 있오. 만일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규율대로 시행 추호로 용서치 않겠소.' 장군의 각오는 비장했다.
1597년 9월 16일 이름 아침 '적선이 수효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우리 진으로 향해 오고 있습니다.' 정찰병이 황급히 보고했다. 장군의 출전명령이 떨어졌다. 12척의 배는 일제히 닻을 올려 바다로 나갔다. 133척의 왜선이 일제히 우리 배를 애워쌌다. 여러 장수들은 스스로 낙심하고 회피할 꾀만 냈다.
그러나 김억추 장군만은 배를 타고 왜선 가까이 쳐들어가며 짓자 총통, 현자 총통을 마구 쏘았다. 군관들이 화살을 빗발처럼 쏘니 그 많은 적의 무리도 어쩔줄 모르고 우왕좌왕했다. 그러나 김억추 장군배가 겹겹으로 적에게 포위되었다. 지켜보던 다른 장수들은 겁에 질렀다. 이순신 장군은 '약함을 보여서는 안 된다. 모두 나와서 겨레를 위해 죽음으로써 싸워야 한다. 자 돌진!' 하고 외치면서 전격명령을 내렸다. 우리 수군은 각자 죽기를 맹세하고 용감하게 싸웠다. 김억추 장군도 얼굴엔 짐승가면의 금 투구를 쓰고 몸엔 2중의 금 갑옷을 입고 양쪽 귀에 구리로 만든 귀걸이를 달고 좌우 손으로 창과 기를 잡고 크게 호령하며 돌진했다.
적장 한 명이 그의 화살을 맞고 바다로 쓰러졌다. 또 한발도 2명의 적장을 동시에 관통시켰다. 바다는 피로 물들었다. 바다 위엔 시체들이 둥둥 떠다녔다. 그 중에 비단 옷을 입은 시체도 있었다. 우리 수군에 투항한 왜인 군사가 비단옷 입은 시체가 왜장 마타시의 시체라고 했다. 우리 수군은 마타시의 시체를 건져 토막토막 잘라 돛대 위에 매달았다. 왜군들은 저희들이 대장선이 완전히 깨어지고 저희 대장의 시체가 돛대 위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는 사기가 완전히 꺾여 아우성을 치면서 다투어 도망치기 시작했다. 거기에 조류도 그들에게 불리해지기 시작했다. 우리 수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고, 나라와 겨레를 구하겠다는 결의는 더욱 굳어갔다. 우리 수군은 총 공격을 시작했다. 달아나던 왜선들은 이순신 장군이 미리 물 속에 쳐놓은 철 책에 걸려 물 속에 엎어졌다. 결국 우리 수군은 12척 밖에 안 되는 병력으로 11배가 넘는 133척의 왜선을 크게 물리쳐 명량해전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처럼 우리는 수군이 크게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이순신 장군의 뛰어난 지략과 충성심도 컸겠으나 그 보다는 전 장병의 일치단결과 우리 김억추 장군의 숨은 공로의 결과가 아닌가 싶다. 김억추 장군은 명량해전에서 이처럼 큰공을 세워 선조 임금으로부터 상을 받고 부철 을 하사 받았으며 후에 경상도, 충청도 병사를 역임하였으며 제주목사도 지냈다.
(부철 = 임금이 장군께 내려준 쇠로 만든 도끼) 또 임금은 호성공신에 봉록하시고 병조판서를 증 하셨다. 그리고 시호를 현무공이라 하였고, 정종 임금 때에는 금강 사를 세워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이처럼 김억추 장군은 나라가 위태로울 때 우리나라를 지킨 명장이었으니 우리 고장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첫댓글 저의 직 조상이라선지 어찌 기분이 쁘듯하네 -
명량해전 12척 중 한 척에서 왜놈과 싸우시고 커다란 승리를 거두시어
우리나라를 위기에서 구하신 위대하신 장군 중 한 분이십니다.
이 분들이 왜의 침략을 막아주셨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순신 장군의 위대한 승리가 있기까지
이 분들의 숨은 공로가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의 우리나라를 있게 한 참으로 크나큰 역할을 했음을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할 역사로
후손에게 길이 알려야 하리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