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내 아버지였으면 좋겠다
이 순 화
갑자기 비가 내리면 우산 가져올 사람이 없어서 비 내리는 날을 싫어했다. 비닐 봉투를 머리에 쓰고 뛸까? 우수에 찬 듯 담담하게 걸어갈까... 아니면 비가 그칠 때 까지 기다릴까. 이런 생각을 해야 하는 내가 싫었다. 학교수업 마지막 시간에 내리는 비는 교실 창문을 흔들고 복잡한 것을 싫어하는 내 마음에도 상처를 냈다. 나는 브랜드 옷을 안 입어도 귀티가 나고 제사상에 올려지는 크고 싱싱한 사과를 안 먹어도 영양실조에 걸리지 않는다. 굿이 많은 돈을 벌려고 나를 혼자 두지 않아도 되는데 내가 가족을 필요로 할 때는 가족들이없다.
학교도 시커멓고, 내 마음도 시커멓고, 다른 아이들은 벌써 하교한 후 텅 빈 학교에서 교실을 나와 비 내리는 운동장을 바라보고 있는데 멀리서 ‘빵빵’ 경쾌한 클랙슨 소리가 들렸다. 학교 정문을 지나서 빨간 티코 한 대가 미영이와 내 앞에 섰다. 그리고 미영이 아버지는 차에서 내리시더니 미영이와 나를 차에 태웠다. 괜찮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지만 빨간 티코는 뒤뚱거리며 시골 진흙 길 웅덩이를 힘차게 밀어내면서 우리 집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미영이 아버지는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학교생활이 어떤지 물으셨고 가는 길에 도로 간판이 나오면 모양과 숫자에 관해서도 설명해 주셨다. 미영이 아버지는 미영이뿐 아니라 나까지 상대하느라 질문을 했다가 퀴즈도 냈다가 하면서 일상생활의 기본상식을 알려주려고 노력하셨고, 허허벌판에서 119에 신고할 때 어떻게 자기 위치를 알리는지에 대해서는 시뮬레이션까지 했다. 나는 너무 재미있어서 차를 타고 시내에서 시골집까지 간 거리보다, 차를 타고 내린 그 시간이 오히려 길게 느껴졌다. ‘다른 가족들은 이런 대화를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친구네 가족의 인격이 한층 높게 느껴졌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밥상머리 교육을 미영이 아버지에게 배운 것이다.
내가 고2가 되었을 때 대학입학시험에 논술시험이 도입되었다. 바뀐 교육정책이 학교와 수험생들에게 혼란이 되지 않도록 모든 방송사는 일제히 논술시험 준비에 대한 보도를 냈다. 신문 사설을 읽고 감상문을 쓰는 것이 도움이 된다면서 야단법석인 학부모님들을 안심시키고 달랬다. 사회현상에 민감하지 않은 우리 부모님은 곧 그 대상자가 될 나와 뉴스를 같이 듣고 있는데도 ‘잘 하겠지.’ 하고 나를 믿는 건지, 아님 포기를 한 건지, 아무 말이 없었다. 가축도 울타리는 쳐주고 키우는데 우리 집은 나를 너무 방목해서 자유롭다 못해 놀다 지치는 기분이 들었다. 미영이는 학교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 때마다 공책을 신문사설 스크랩북으로 만들었다. 아버지가 일주일에 신문사설을 하나씩 읽고 감상문을 쓰는 숙제를 내줬다고 입이 댓 발 나와서 불만을 나에게 토로했다. 미영이 아버지는 딸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이놈의 가시내가 누구 염장 지르려고 일부러 그러나...하면서,사실 행복에 겨워 참새처럼 조잘대는 미영이가 얄미웠다.
학생이었을 때 나는 치맛바람을 일으키는 엄마를 두거나 명품을 쓰는 친구는 부럽지 않았는데 생일에 딸에게 기초 화장품을 선물할 줄 아는 센스쟁이 아버지를 둔 미영이는 부러웠다. 대부분 아버지들은 아이들을 엄마가 잘 챙기겠거니 하고 무심하거나, 여자들이 많은 곳은 부끄러워서 피하시는데, 미영이 아버지는 어떤 것이 딸에게 필요한지, 요즘 학생들의 트랜드가 뭔지, 유심히 관찰하셨다. 불편함이 없도록 아버지가 챙겨주셔서 막힘없이 일을 해결하는 미영이를 보면 부모님께서 얼마나 딸을 사랑하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값비싼 화장품 세트를 부러워한 것이 아니라 딸의 의견에 귀 기울이고 사랑과 관심을 쏟는 아버지가 부러웠다. 나는 친구 아버지처럼 다정다감한 아버지를 가지고 싶었다.
간절하게.
미영이 아버지처럼 해 줘 안 그러면 미영이 집에서 살 거야. 라고 말하듯이 나는 공휴일이고 명절이고 우리 집에 있지 않고 많은 날을 미영이 집에서 보냈다. 아버지도 할아버지에게 부드럽게 마음을 전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는데 느닷없이 친구 아버지처럼 사랑을 표현해 달라고 떼쓰는 딸을 아버지는 감당하지 못하셨다.
그해 추석이었다. 미영이 아버지는 집에서 담근 술을 꺼내 잔을 채우시면서 말씀하셨다. “순화야! 명절에 우리 가족들만 먹는 술이란다. 이제 곧 졸업이구나! 순화 아버지도 순화를 사랑하신단다. 우리 얼굴이 다 같지 않듯이 사랑하는 방법이 다를 뿐이야.”
가족에게 다정다감한 미영이네 아버지를 동경하는 마음이었기에 내 행동이 민폐를 끼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나를 가족으로 인정해 주시고 상처가 되지 않게 말씀하시는 미영이 아버지를 보니 그동안 막무가내였던 내 행동에 얼마나 불편하셨을까 싶은 생각이 비로소 들었다. 나도 우리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 한 적은 없다. 다만 미영이 아버지가 나의 아버지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계시는 내 아버지와 미영이 아버지를 비교하면서, 부족한 면만을 들추고, 우리 가족을 위해서 쉬는 날 없이 일하시던 아버지를 원망한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날 나는 왜소한 아버지의 모습이 생각이 나서 한없이 눈물을 흘렸지만 그래도 미영이 아버지가 내 아버지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버릴 순 없었다.
첫댓글 이순화 선생님의 이 작품, 입선 수상 축하 드립니다. 열심히 공부하시고 노력 하시더니 그 결과가 있네요.
어디 주최 응모 하신지는 몰라 제가
댓글 못남깁니다.
수상 축하드립니다.~^^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물값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분 이듯이 시간과 노력을 보상받는 것 같아 글을 쓰는 동기와 의욕이 생겨서 기분이 좋아요. 더 좋은 글을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글 쓰시는 달란트가 많으신 분이시군요. 수상도 축하드립니다.
이순화 선생님, 좋은 작품으로 수상까지 하셔서 너무 좋네요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