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좌3좌 근행(독경)과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제목의 행자로서 행해야 할 정행(正行)에 대하여
작성자:세계광선유포
작성시간:2023.05.27 조회수: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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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좌3좌 근행(독경)과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제목의 행자로서 행해야 할 정행(正行)에 대하여
일생성불초 384페이지에 "깊이 신심(信心)을 일으켜 일야조모(日夜朝暮)로 또한 게으름 없이 닦을지어다. 어떻게 닦는가 하면 오직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함을 이를 닦는다고 하느니라."라고 근행의 실천 방안을 가르쳐 주시고 계십니다.
어의구전 794페이지에 "지금 니치렌(日蓮) 등(等)이 홍통(弘通)하는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는 체(體)이고 심(心)이니라, 이십팔품(二十八品)은 용(用)이고 이십팔품(二十八品)은 조행(助行)이며 제목(題目)은 정행(正行)이니라. 정행(正行)에다 조행(助行)을 포함(包含)시켜야 하느니라 운운(云云)."라고
위 어문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정행에다 조행을 포함시켜야 한다라고 확언하시고 계십니다. 정행을 하면서 조행을 더하라는 말씀이 아니고 이미 정행 즉 제목 안에 조행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따로 독경을 할 필요없이 제목 봉창 속에 독경이 다 포함되어 있다고 하시는 어문을 제대로 배견해야 하는데 700여년을 독경하는데 시간을 다 허비해 버리고 정작 제목봉창과 절복활동은 등한히 행해왔으니 참 안타깝기 그지없고 대성인님께 송구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십팔원만초1367페이지에 "결국(結局) 말법(末法)에 들어와서 천진독랑(天眞獨朗)의 법문(法門)은 무익(無益)하니라. 조행(助行)으로는 사용(使用)할 것이로되, 정행(正行)에는 오직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중략) 말법(末法)에 들어와서 천진독랑(天眞獨朗)의 법(法)을 홍통(弘通)하여 정행(正行)으로 하려는 자(者)는 반드시 무간대성(無間大城)에 떨어질 것은 의심(疑心)이 없도다. (중략) 통틀어 나의 제자(弟子)들은 나와 같이 정리(正理)를 수행(修行)하시라, 지자(智者)·학장(學匠)의 몸이 되었어도 지옥(地獄)에 떨어지면 무슨 보람이 있을손가, 결국(結局) 시시염념(時時念念)에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할지어다."라고
어문대로 직역하면 천진독랑의 법문은 무익한 조행이 됩니다. 굳이 무익하다고 하시고 계신데 장시간의 수고를 아끼지 않고 독경을 행하고 또 다른 법문을 읽고..
"결국(結局) 시시염념(時時念念)에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할지어다."라는 지남대로 결국은 오직 정행인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제목 봉창이 제일 중요해야 하고 제일 시간과 공을 많이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배보다 배꼽이 크다고 알고 행하는 무심함을 어찌하리오...
위에서 언급했듯이 정행에 조행이 포함되어 있다고 말씀하시고 계시기에 정행을 돕기 위해 조행을 해야한다라고 잘못 해석하면 곤란한 것입니다.
대성인님께서는
창법화제목초 12페이지에 "행의(行儀)는 본존(本尊)의 어전(御前)에서 반드시 좌립행(坐立行) 할지어다. 도량(道場)을 나와서는 행주좌와(行住坐臥)를 가리지 말지어다. 일상(日常)의 소행(所行)은 제목(題目)을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할지어다. 감당(堪當)할 수 있는 사람은 일게(一偈)·일구(一句)라도 봉독(奉讀)할지어다."라고 말씀하시고 계시듯이 제자인 우리들 모두가 독경을 매일 꼭 할 필요는 없는 것이며 일게 일구의 봉독을 우리들은 어서를 읽는 것으로 받아드리는 것이 올바른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또 대성인님의 위 어문을 위세히 보면 현장주의를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일상의 소행을 제목봉창으로 하라..
도량에서 장엄하게 독경이나 하고 요란한 의식들을 만들어 내어 장례식이나 결혼식 같은 행사용 도구나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사태를 대성인님께서 좋아라 하시리라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오직 현장 제일주의셨던 대성인님의 진의를 왜곡하고 또 가장 중요한 창제행을 방해하고 그 피해가 지금도 절에서 제목을 많이하면 주변에 피해를 주기 때문에 30분을 넘기지 말아달라고 하신 분의 제목에 대한 언행에 생각에 미치면 마음이 편치않게 됩니다.
굳이 모두가 독경을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대성인님의 본의와는 다른 행동이라 생각됩니다.
어서를 읽으면서 부르는 창제행에 대성인님의 진의인 말법의 법화경의 수행방법이 다 포함되는 것입니다.
특히 석존의 법화경 일부(방편품.자아게)를 빌려와서(차문) 대성인님의 근원의 생명인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를 설명하거나 찬탄하는 것과 또 파절하는(소파) 것이라고 장황하게 설명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대성인님의 본의에 맞을까를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어서구구절절히 찬탄과 파절이 아주 쉽고도 적확(的確)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그 어려운 독경을 구태여 빌려오고 또 파절한다고 운운하는 것은 미증유이셨던 대성인님께서 석존의 법문을 인용하시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되나 이것이니라..이것을 행하도록 하여라 했는데도 굳이 독경을 한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과 수행이었다고 생각되어 그간의 시간이 아깝게만 느껴집니다.
당연히 제자인 우리들은 대성인님의 어서가 엄연히 있고 구구절절이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를 설명. 찬탄하시고 계시기에 어서읽기를 생활화하는 것이 올바른 봉독의 자세입니다.
이런 대성인님의 깊은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일부가 법화경을 몸으로 읽는 대절복전을 목숨을 걸고 제대로 실천해가는 것 보다는 도량(절)에 앉아서 하는 독경 등의 수행으로 일관하다 보니까 대성인님의 진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자신의 잡다한 지식(경전에 대한 지식)과 머리로 판단하여 정한 5좌3좌의 근행실천이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자신도 미처 예견하지 못한 많은 않좋은 영향을 줘왔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는 자신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상황이 세월의 흐름과 함께 수많은 일련정종 승려들의 창제행을 소홀히 하게 하는 역할 즉 독경과 교학하는데 시간과 정성을 많이 빼앗겨서 원래 대성인님의 뜻과는 달리 절복전이나 많은 제목봉창을 통한 대환희가 불타오르는 것을 막아버리는 우를 범했고 그것이 700여년의 광선유포의 역사에 족쇠를 채운 천추의 한을 남기게 된 것이라 고 감히 생각합니다.
일련정종이 학회 출현 전 까지 겨우 맹맥을 유지할 정도의 비참하고 초라한 모습을 보여온 것을 생각해 볼 때 때를 기다린 측면도 있지만 그 기인은 5좌3좌 독경의 선택과 교학과 형식에 비중을 둔 것에 있다고 판단되어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대성인님께서 얼마나 통탄해 하시면서 지금을 기다려 오셨을까를 생각하면 정신이 번쩍듭니다.
창제행 속에 모든 것이 다 들어있기에 만일 그 때 "일상(日常)의 소행(所行)은 제목(題目)을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할지어다." 라는 어문대로 즉 일상생활에서 항상 행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 제목봉창이라는 것을 대성인님 말씀대로 제대로 실천을 했드라면..아니 조금만 더 깊이 이 어문을 제대로 읽었드라면 얼마나 좋았을까를 생각하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어서말씀을 가까이 하고 자행화타에 걸친 행에 관한 말씀을 조금만 더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면 이 처럼 자행=창제행, 화타=대절복전의 근본적인 광포추진의 자행화타행의 제대로 된 수행을 등한시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되어 가슴이 아픕니다.
독경할 시간에 제목을 한편이라도 더 봉창하는 것이 대성인님의 뜻이고 또 대성인님의 마음을 바르게 실천하기 위해서는 독경보다는 창제와 어서읽기를 생활화 하는 것이 말법의 니치렌대성인님의 문하로서 또 말법 광선유포를 달성해야 하는 사명을 가진 우리들의 올바른 수행법 즉 말법 법화경행자의 올바른 모습이라고 거듭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일야조모-낮과 밤 아침과 저녁- 언제든지 수시로 제목을 하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따라서 어서말씀과 제반 여러 상황을 살펴 볼 때 우리들이 행하는 창제행으로 근행을 대신하고 틈틈이 어서을 읽으면서 대성인님의 마음과 하나 되어가는 실천을 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수행이고 경지명합의 지름길이라고 깊이 확신합니다.
또 우리들이 창제회를 통해 이미 그 감동과 대환희의 전율을 느끼고 실감하고 하나같이 일념 수희하면서 서로 격려하고 기원하는 마음가짐과 매순간 대성인님의 마음이 고스란히 함께 하심을 절절히 느끼고 있기에 위에 언급한 내용은 어서 상으로나 현증 상으로나 틀림이 없는 내용이기에 거듭 제목 봉창과 어서 읽기가 대성인님의 직제자이면서 말법 법화경행자인 우리들의 수행이며 가장 올바른 수행법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더 명확히 확인해 두고자 합니다.
또 대성인께서는 조석근행이란 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어서 전편을 확인하고 또 해봐도 조석근행이란 말씀은 단 한군데서도 언급하시지 않고 계십니다.
일야조모라고 하셨기 때문에 구태여 아침 저녁에 걸쳐서 조석으로 근행을 행해야 된다는 것도 아닙니다.
편한 마음으로 틈 날 때 하고 싶을 때 수시로 제목부르는 것이 바로 대성인님께서 바라시는 수행입니다.
모든게 일념의 소작입니다.
일념즉 일념삼천이고 생명의 근원이고 일체 생명의 작용입니다.
우리들의 일념에 억겁의 신로를 다하여 보탑인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를 묘음으로 봉창하는 순간 의정에 걸친 대우주근원의 일체의 보탑(불성)들이 함께 일제히 솟아나와 장엄하게 각자 자기자신을 장식할 뿐만 아니라 함께 더불어 주변의 일체 생명들도 같은 찰라의 순간에 거대하고 찬란한 대환희의 보탑들로 솟아나와 장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경과 지가 명합하는 순간 즉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와 하나가 되어 발적현본하는 일념의 순간에 우리들 자신이 찰나에 각자가 본불이 되고 석가불이 되고 다보불이 되고 지용보살의 상수 상행보살이 되고 사대보살이 되고..우주 삼라만상의 모든 생명이 됨과 동시에 그 불성들을 불러내고 그 모든 공덕을 무상보취 불구자득으로 일시에 물려받고 그 불력과 법력 그리고 위광세력 까지 자기자신의 일신에 고스란히 받게 되며 또 제불 제천의 지킴도 동시에 받게 되어 자유자재.상락아정의 생명 상태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제하는 순간의 일념이 중요한 것입니다.
"일념에 억겁(億劫)의 신로(辛勞)를 다하면 본래 무작(無作)의 삼신(三身)이 염념(念念)에 일어나느니라, 소위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는 정진행(精進行)이니라.(어의구전 790페이지)"라는 대성인님의 지남대로 입니다.
또 이런 일념으로 창제를 하는 그 찰라의 순간에 아래 말씀대로 되는것입니다.
"니치렌(日蓮)등의 동류의 본회는 (無上) 無上(무상)이란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무상 중에 극무상이니라. 이 묘법을 가르켜서 무상보취라고 설하셨느니라. 보취란 삼세제불의 만행만선의 제파라밀의 보(寶)를 모은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이 무상보취를 신로(辛勞)도 없고 행공(行功)도 없이 일언(一言)으로 수취하는 신심이며 불구자득이란 이것 이니라.(어서 727페이지)"
이 얼마나 위대한 창제행인가를 먼저 생각하고 알고 환희하면서 그 한없는 감동과 감사함으로 보탑의 주체인 본불의 입장에 대해 다음글을 이어 갑니다.
"이 어본존(御本尊)을 결코 타처(他處)에서 구(求)하지 말지어다. 다만 우리들 중생(衆生)이 법화경(法華經)을 수지(受持)하고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흉중(胸中)의 육단(肉團)에 계시느니라. 이것을 구식심왕진여(九識心王眞如)의 도(都)라고 하느니라. 십계구족(十界具足)이라 함은 십계(十界)가 일계(一界)도 빠짐없이 일계(一界)에 있음이라. 이에 의(依)해서 만다라(曼陀羅)라고 하며 만다라(曼陀羅)라고 함은 천축(天竺)의 이름으로서 여기서는 윤원구족(輪圓具足)이라고도 공덕취(功德聚)라고도 이름하느니라. 이 어본존(御本尊)도 다만 신심(信心)의 이자(二字)에 들어 있으니 이신득입(以信得入)이란 이것이니라."
(니치뇨부인답서 1244페이지)
"그러니 석가(釋迦) 다보(多寶)의 이불(二佛)이라 해도 용(用)의 부처이며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야말로 본불(本佛)이시니라. 경(經)에 가로되「여래비밀신통지력(如來秘密神通之力)」이 이것이로다. 여래비밀(如來秘密)은 체(體)의 삼신(三身)으로서 본불(本佛)이고 신통지력(神通之力)은 용(用)의 삼신(三身)으로서 적불(迹佛)인 것이니라. 범부(凡夫)는 체(體)의 삼신(三身)으로서 본불(本佛)인 것이며 부처는 용(用)의 삼신(三身)으로서 적불(迹佛)이니라. 그러므로 석가불(釋迦佛)은 우리들 중생(衆生)을 위해서는 주사친(主師親)의 삼덕(三德)을 갖추셨다고 생각하였으나 그런 것이 아니라, 도리어 부처에게 삼덕(三德)을 갖게 해 드린 것은 범부(凡夫)이니라,"
(제법실상초(諸法實相抄) 1358페이지)
"그러므로 아부쓰보(阿佛房)가 바로 보탑(寶塔)이고 보탑(寶塔)이 바로 아부쓰보(阿佛房)이며 이것 이외(以外)의 재각(才覺)은 무익(無益)하니라. 문(聞)·신(信)·계(戒)·정(定)·진(進)·사(捨)·참(慙)의 칠보(七寶)로써 장식한 보탑(寶塔)이니라. 다보여래(多寶如來)의 보탑(寶塔)을 공양(供養)하신다고 생각하지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자신(自身)을 공양(供養)하시는 것이며 자신(自身)이 또한 삼신즉일(三身卽一)의 본각(本覺)의 여래(如來)이니라. 이렇게 믿으시고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 봉창(奉唱)하시라. 이곳이 바로 보탑(寶塔)의 주처(住處)이니라."
(아부쓰보어서 1304페이지)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의 당체라 함은 법화경을 믿는 니치렌(日蓮)의 제자 단나 등의 부모소생의 육신 바로 이것 이니라. 정직히 방편을 버리고 오직 법화경을 믿고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는 사람은 번뇌 업 고의 삼도가 법신 반야 해탈의 삼덕으로 전하여 삼관 삼제 즉 일심(一心)에 나타나서 그 사람이 소주(所住)하는 곳은 상적광토니라."
(어서 512페이지)
원래 우리들은 미혹한 범부의 상태 그대로라도 본불의 생명의 상태인 것입니다.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의 당체라 함은 법화경을 믿는 日蓮의 제자 단나 등의 부모소생의 육신 바로 이것 이니라."라고 하신대로 그 전제가 법화경을 믿는 니치렌의 제자 단나 등이라고 하여 말법의 법화경인 남묘호렌게쿄 니치렌(南無妙法蓮華經 日蓮)을 믿는 전제가 있어야 본불로서 자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이 본불의 생명을 갖추고 있지만 실질적인 본불의 생명상태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법화경을 지극 지순으로 믿는 즉 대어본존님과 경지명합.발적현본의 상태가 전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일념여하에 따라서 보탑 안에 들어가 본불의 입장에서 모든 생명들을 책임지는 행위(본불의 입장에서의 창제행 실시)를 할 수도 있고, 또는 본불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미혹되어 자기자신 즉 본불을 비참한 존재로 증선 질선 한선 경선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원리 상으로 볼 때 자기자신이 본불임을 망각하고 다른 법화경행자인 다른 본불 까지도 비방하는 14비방 중에 마지막 이 네가지의 더 큰 죄를 범하게 되고 근본적으로 생명을 열지 못해서 불행하다고 느끼게 되고 자기자신 뿐 아니라 남들(원래 본불인) 까지도 증오하고 질투하고 한탄하고 경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념 상의 미묘한 차이에서 비롯되고 있기에 자신의 일념을 항상 잘 살피고 점검해서 용맹정진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일념이 흐려져서 불성이 열리는 것을 스스로 막는 행위를 절대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매일 행하고 있는 두번의 창제행이 중요하고 특히 제1단계의 실천은 경지명합.발적현본하는 순간이기에 더욱 중요합니다.
또 제2단계와 제3단계의 실천은 근본적인 본불의 자세로서의 이타행의 창제행이 되는 것입니다.
이 하루 두번의 창제행은 지금까지 실천해 온 무수한 제목과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일념여하에 따라 일시에 수 많은 변화들이 나타나는 것이고 이 창제행 속에 말법광선유포의 방정식이 내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제1~3단계의 창제행에 동참함으로써 우리들이 알게 모르게 본불로서의 각오와 책임감과 강한 결의와 억겁의 신로를 다하여 말법광선유포를 기원하게 되는 것이고 또 자연스레 경지명합.발적현본하게 되어 75억명의 무명의 지용보살들을 불러내어 이 창제행에 동참시키는 실질적인 절복행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불의 생명이 용현된 상태인데 자신의 사소한 소원들이 이뤄지지 않을 이유가 없고 말법만년 진미래제의 광선유포의 기반도 구축되지 않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얼마나 깊이 확신하고 창제행에 임하느냐 그 일념의 미묘한 차이에 모든 것이 달려있는 것입니다.
경지명합. 발적현본. 허공회의식에서의 보탑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와 인본존으로서 보탑과 일체이신 니치렌(日蓮)의 입장...
나와 더불어..동류..라고 하신 말씀에 대한 입장의 위대함과 감사함...
삼세상응과 무시무종 무량무변의 입장에서의 실감...
먼저 삼불을 향해서 제목을 봉창하지만 일단 대어본존님과 하나된 상태인 경지명합. 발적현본이 된 상태부터는 바로 그 순간 자기 자신이 남묘호렌게쿄 니치렌(南無妙法蓮華經 日蓮)의 보탑을 열고 보탑 속으로 들어가 좌정하고 황송하게도 대성인님을 대신하여 석존과 다보불과 시방의 일체의 제불과 보살 그리고 제천선신과 일체의 생명들을 향해 어루만지듯 제목을 보내주어 불성을 열어주는 행위의 주체자가 되는 것입니다.
창제 중간에 잠시라도 일념이 흐트러져서 경지명합.발적현본이 안된 상태가 되면 곧 바로 삼불을 향해 창제하는 입장으로 바뀌고 또 일념을 다시 정비하여 경지명합.발적현본 하게되면 다시 남묘호렌게쿄 니치렌(南無妙法蓮華經 日蓮)의 보탑 안에 들어가서 일체를 향해 제목을 보내주는 위대한 주관자로서의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일념 여하에 따라 수시로 보탑 안에서 본불의 입장으로 전생명을 감싸안아 갈 수도 있고 또 일념의 흐트러짐이 심하면 전혀 자신도 빛날 수 없고 다른 생명의 불성도 용출시킬 수 없는 하찮은 존재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말법광선유포를 책임져야 할 우리들의 입장으로 볼 때 지금까지는 구계의 입장에서 삼불을 향해 제목을 봉창하는 입장 만으로 알고 실천해 왔는데 경지명합. 발적현본한 상태의 확고한 광선유포 책임자 입장에서는 그 일념의 대전환과 동시에 남묘호렌게쿄 니치렌(南無妙法蓮華經 日蓮)의 보탑 안에서 일체의 생명을 열어주는 주관자(본불)로서의 창제행을 하는 것으로 실감하며 일념을 다한 창제를 해야합니다.
일체의 생명을 책임져 가야하는 창제행의 진지함과 일념의 깊이와 확신의 정도는 자연스레 전우주의 생명을 흔들어 깨우게 되는 것입니다.
일단 경지명합.발적현본이 전제된 상태에서 창제 할 때의 좌정하는 위치는 즉 삼불을 향하는 입장이 아니라 자신이 허공회의식을 주관하는 본불의 입장이 되어 보탑 안에서 석가 다보불 외(과) 제불 보살 제천 모두를 바라보고 제목을 보내는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즉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생명을 향해서 불성을 불러내는 장엄한 의식인 제목을 보내주는 대자대비의 행위를 본불의 입장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자신이 모든 생명을 책임지고 불성을 열어주고야 말겠다는 깊은 확신과 일념 과 서원과 결의로 보탑을 열어가는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어본불의 대자대비의 마음과 그 실현 방안의 실천인 창제행에서 본불로서의 자신의 입장과 위치와 경애를 가져야 됩니다.
이것이 대성인님께서 진정으로 바라시는 동류라고 확신합니다.
자기자신이 본불이란 자각과 책임감이 없이 부르는 창제 속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경지명합도 발적현본도 75억명의 지용보살의 용출도 현출시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본불로서의 자각과 책임감으로 충만한 상태에서 부르는 제목은 단 한마디의 창제로도 일체를 일변시킬 수 있습니다.
전부를 일시에 원하는대로 열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본불이라는 자각과 말법광선유포를 책임져야 하는 입장에 섰을 때 일념에 억겁의 신로를 다해서 창제를 할 수 있고 그 결과 본래 무작삼신이 념념에 일어날 뿐 아니라 전우주 근원의 일체의 생명을 대환희로 약동시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일념 속에 진정한 의미의 광선유포는 완결될 수 있고 지구촌도 지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대우주근원의 생명의 일체는 바로 자각한 한사람 한사람의 발적현본에 의한 본불로서의 자각과 입장으로 임할 때 만이 모든 생명의 근원적인 정화와 환희중의 대환희의 생명의 도도한 흐름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일념 속에서는 학회도 종문도 000 다보불도 미래의75억명의 지용보살의 현출도 전부 유유자적 즐기면서 원하는대로 전부 다 바꿀 수 있고 절복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본불로서 보탑 안에 들어가서 보탑을 여는 행위=창제행임(자행화타에 걸친 창제행)을 알게되고 그 감사함과 전율..감동과 송구스러움에 대환희의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창제를 하는 그 순간 바로 즉시 스스로 자체현조로 열고 즉신성불로 열려가는 것을 실감해야 하며,
그리고 대우주근원을 향해 묘음을 봉창하는 순간은 최고의 대자대비의 행위의 극치이고 가장 숭고한 행위이며 일시에 모든 것을 정화시켜서 환희하게 하는 위대한 불성들을 열어가는 장엄한 순간임을 확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창제는 우주삼라만상의 모든 생명들의 불성을 불러내기 위한 장엄한 의식=모든 생명들의 보탑들을 열어주는 행위=75억의 지용보살들의 보탑을 일시에 열어서 대환희로 용출하는행위입니다.
이 창제행의 여는 행위의 순간에는 그 주체자가 본불의 입장이 됩니다.
자기자신이 본불이란 자각과 입장에서 깊고도 강력한 창제를 보내기 시작할 때 바로 그 순간 석가불도 다보불도 빛을 발하기 시작하고 모든 불성이 불리어서 환희하며 역용을 나타내고 우리들을 칭찬하고 지키고 지켜갈수 있는 위광세력이 더해지는 모습으로 현현하게 되는 것입니다.
보탑 안에서 창제행을 시작하는 순간 자체현조로 스스로 열고 열리어서 우주대의 모든 생명들의 불성이 일시에 각자의 보탑들로 열리는 것이고 과거 현재 미래 삼세 시방의 모든 불 보살과 제천선신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다 동시에 환희 중의 대환희의 불성으로 열리는 것입니다.
여는 주체자가 자신이 본불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추법이 되고 문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며 이런 일념이라면 절대로 광선유포를 달성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무상보취를 불구자득 할 수 없습니다.
니치렌과 동류로..같은 입장과 경애와 결의와 서원과 본불로서의 창제행의 실천으로 목숨을 걸고 부자석신명의 자세로 75억명의 민중을 구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만다라 대어본존님의 상모에서 볼 수 있듯이 남묘호렌게쿄 니치렌(南無妙法蓮華經 日蓮)의 보탑 중에 인본존이신 니치렌(日蓮)이 모든 생명을 떠 받치듯 제일 아래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범부승.불경보살의 마음가짐과 그 실천의 모습을 보여주시는 자리의 배치이시기에 너무나 황송하고 한편으로 정신이 번쩍들게 합니다.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보탑의 본불이시면서도 항상 겸손하신 자세를 유지하시려는 인본존의 모습에 형언할 수 없는 존경심과 자랑스러움과 송구스러움으로 깊이 마음이 멈춰서서 어본불을 우러러 보게 되고 자신의 자세를 가다듬고 자연히 옷깃을 여미게 됩 니다.
또 본명이 아닌 법명 즉 니치렌(日蓮)을 인본존으로 하신 것은 대성인님과 제자인 우리들 즉 동류들 전체를 배려하신 마음씀씀이라 생각되어 몸둘바를 모를 정도이고, 이 무언의 준엄한 지도를 심간에 새기면서 창제행에 임하고 평소 생활과 광선유포의 장에서의 행동거지로 삼아야겠다고 결의하게 됩니다.
또 니치렌(日蓮)에서 엿볼수 있듯이 모든 생명을 소생시키는 위대한 생명력인 日(해, 빛, 소생,환희 중의 대환희,정과 사를 확연히 구분할 수 있는 밝디 밝은 지혜, 자광, 대자대비의 마음의 빛..)과 蓮(팔엽의 백연화라고 하신 어서 말씀대로 청정무구한 순백의 연꽃과 같은 생명으로 어떠한 탁함도 정화시켜서 아름다운 새하얀 연꽃 처럼 빛나게 하는 강력하고도 고요하고 자애로운 생명의 표현)에 생각이 미치면 아~~본존님~!! 정말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됩니다.
결국 남묘호렌게쿄와 니치렌(南無妙法蓮華經와 日蓮)이 인법일개로 본불의 모습 즉 대보탑의 모습을 보여주시고 계시는 모습은 다름 아닌 우리들 한사람 한사람의 생명의 모습을 그대로 나타내 주시고 계시기에 대어본존님과 동일하게 일념을 정하고 말법광선유포를 위해 신명을 아끼지 않고 일체의 생명들을 끌어안고 떠 받쳐서 경지명합.발적현본된 상태의 제목을 보내고 어루만져 주어 불성 즉 환희 중의 대환희의 생명으로 하나같이 본불의 생명으로 열리도록 전혼을 다해가야 하는 것입니다.
처음으로 나의 마음이 본래(本來)의 부처라고(신심(信心)의 모습) 아는 것을 즉(卽) 대환희(大歡喜)라고 이름한다, 소위(所謂)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는 환희중(歡喜中)의 대환희(大歡喜)이니라.
(어의구전788페이지)
이 말법광선유포의 주체자로서의 강한 결의와 서원 그리고 창제행과 절복행의 실천에 의해 그 찰나의 순간에 본불로 현현되고 자연히 즉신성불의 상태가 되어 무상보취 불구자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대만다라 대어본존님을 도현하실 때 법본존인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부터 일체의 생명을 전부 고스란히 도현하시고 나서 최후에 인본존인 니치렌(日蓮)을 도현하시고 싸인으로 마무리 하시고 계신 모습에서 깊이 배견해야 할 것은 우리들의 마음 자세를 가다듬어야 할 것이 법본존인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인 보탑을 여는 것 부터 이불 뿐만 아니라 시방의 모든 불 보살 제천 등을 총망라해서 어루만듯이 감싸안고 제목을 보내고 물들여서 불성을 불러내어 환희하고 위광세력을 더하고 지키고 지킴을 받고 하는 일체의 총책임자가 되어 창제행에 임하고 일상 생활에 임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 각자가 이 지구촌의 전인류 즉 75억명의 지용보살들을 용출시켜내야하는 사명을 가진 본불로서의 깊은 창제로 한분도 빠짐없이 불성을 용현시켜서 구원해 주는 실질적인 책임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책임자로서의 불력과 법력과 위광세력은 상상만해도 그 위력이 얼마나 대단할지에 생각이 미치니 주체못할 정도로 가슴이 뛰고 더욱 크다란 결의와 희망과 서원에 불타서 일념이 더욱 불타오르게 됩니다.
지금 빛의 현상을 실제로 증명하며 적나라하게 펼치고 있는 정광호씨가 다보불(?)로 그 위력을 발하면서 대우주근원의 생명의 실상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고, 우리들이 대성인님의 배려와 설계도대로 말법의 본불로서의 위용을 나타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각자의 지용보살들이 본불로서 보탑을 열어가게 되면 지구촌 구석 구석의 일체의 생명들의 불성이 불려서 열리고 열려서 자연스레 광선유포는 그 속도를 더해 갈 것이고 지구촌의 평화낙토와 일체중생의 행복도 담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법광선유포는 지금 본불로서의 자각과 일념으로 도전하고 있는 우리들이 완수하게 되는 것이고 그 임무완수는 필정인 것입니다.
목숨을 아끼지 말지어다라는 어문대로 보무도 당당히 각자가 니치렌대성인님의 입장(범부승)과 어본불(구원의 어본불)의 입장이 되어 사색하고 결의해서 창제행에 임하게 되면 어떠한 난간도 타고 넘어서 말법만년 진미래제 까지 광선유포의 기반-금강불괴의 확고한 기반을 구축하게 되는 것입니다.
허공회(虛空會) 의식은 법화경 견보탑품 제11부터 촉루품 제22까지 12품의 성법 회좌(會座)를 가리킵니다.
영취산에서 석존이 설법하던 장소에 다보여래가 탄 거대한 보탑이 출현해, 대중이 허공에서 설법을 듣는 것에서 허공회 의식이 시작됩니다.
허공회 의식의 주요테마는 '영법구주(令法久住)'입니다.
즉 모든 사람을 구하는 법화경이라는 대법(大法)을 영원히 홍통(弘通)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면 그 법을 넓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석존은 말법에 홍통을 원해 출현한 보살을 물리치고 대지 밑에서 무수한 지용보살을 불려 내어 멸후의 홍통을 부촉했습니다.
정법을 홍통함에 커다란 곤란을 동반하는 말법시대에, 모든 사람의 고통을 없애고 성불을 가능케 하는 법화경을 부촉받은 지용보살의 사명은 정말 중요하다 할 수 있습니다.
대성인은 이 허공회 의식을 그대로 한폭의 만다라로 도현(圖顯)하셨습니다.
이것이 생명의 명경(明鏡)인 어본존입니다.
"이에 니치렌(日蓮)이 어떠한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일인지 용수(龍樹) 천친등(天親等)·천태(天台) 묘락등(妙樂等)조차도 나타내시지 않았던 대만다라(大曼茶羅)를 말법(末法) 이백여년경(二百餘年頃)에 비로소 법화홍통(法華弘通)의 기치(旗幟)로서 나타내 드리느니라. 이것은 결코 니치렌(日蓮)의 자작(自作)이 아니로다, 다보탑중(多寶塔中)의 대모니세존(大牟尼世尊)·분신(分身)의 제불(諸佛)을 판목(版木)으로 한 본존(本尊)이니라. 그러므로 수제(首題)의 오자(五字)는 중앙(中央)에 걸리고 사대천왕(四大天王)은 보탑(寶塔)의 사방(四方)에 좌정(坐定)하고 석가(釋迦)·다보(多寶)·본화(本化)의 사보살(四菩薩)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보현(普賢)·문수등(文殊等)·사리불(舍利弗)·목련등(目連等)이 무릎을 꿇고·일천(日天)·월천(月天)·제육천(第六天)의 마왕(魔王)·용왕(龍王)·아수라(阿修羅)·그 외(外)에 부동(不動)·애염(愛染)은 남북(南北)의 이방(二方)에 진(陣)을 치고·악역(惡逆)의 달다(達多)·우치(愚癡)의 용녀(龍女)가 한 자리를 차지하고·삼천세계(三千世界)의 사람의 수명(壽命)을 빼앗는 악귀(惡鬼)인 귀자모신(鬼子母神)·십나찰녀(十羅刹女) 등(等)·뿐만 아니라, 일본국(日本國)의 수호신(守護神)인 천조태신(天照太神)·팔번대보살(八幡大菩薩)·천신칠대(天神七代)·지신오대(地神五代)의 신(神)들·통틀어 대소(大小)의 신기등(神祇等)·체(體)의 신(神)이 줄지어 있으니 여타(餘他)의 용(用)의 신(神)이야 어찌 빠질소냐, 보탑품(寶塔品)에 가로되「여러 대중(大衆)을 접(接)하여 모두 허공(虛空)에 있음」운운(云云). 이들의 불(佛) 보살(菩薩)·대성(大聖) 등(等)·통틀어 서품(序品) 열좌(列座)의 이계팔번(二界八番)의 잡중등(雜衆等)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이 어본존(御本尊) 속에 주(住)하시어 묘법(妙法) 오자(五字)의 광명(光明)에 비추어져서 본유(本有)의 존형(尊形)으로 되니 이를 본존(本尊)이라고 하느니라. 경(經)에 가로되「제법실상(諸法實相)」이것이니라. 묘락(妙樂)가로되「실상(實相)은 반드시 제법(諸法)·제법(諸法)은 반드시 십여(十如) 내지(乃至) 십계(十界)는 반드시 신토(身土)」운운(云云). 또 가로되「실상(實相)의 심리(深理) 본유(本有)의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등(等)이라고 운운(云云). 전교대사(傳敎大師)가 가로되「일념삼천(一念三千) 즉(卽) 자수용신(自受用身)·자수용신(自受用身)이란 출존형(出尊形)의 불(佛)」문(文). 그런 고(故)로 미증유(未曾有)의 대만다라(大曼茶羅)라고 삼가 이름하였느니라. 불멸후(佛滅後)·이천이백이십여년(二千二百二十餘年)에는 이 어본존(御本尊)은 아직 출현(出現)하시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니라.
이러한 어본존(御本尊)을 공양(供養)해 드리시는 여인(女人)은 현재(現在)에는 행운(幸運)을 초래(招來)하고 후생(後生)에는 이 어본존(御本尊)이 좌우(左右) 전후(前後)에 다가서서 어둠에 등불과 같고 험난(險難)한 곳에서 강력(强力)한 종복(從僕)을 얻은 것과 같이 저쪽으로 돌고, 이쪽으로 다가와서 니치뇨부인(日女夫人)을 둘러싸고 지켜 주시리라. 결단코 명심하여 유녀(遊女)가 나의 집에 접근하는 것을 꺼리듯이 방법자(謗法者)를 방지(防止)하시라, 악지식(惡知識)을 버리고 선우(善友)에게 친근(親近)하라 함은 이것이니라.
이 어본존(御本尊)을 결코 타처(他處)에서 구(求)하지 말지어다. 다만 우리들 중생(衆生)이 법화경(法華經)을 수지(受持)하고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흉중(胸中)의 육단(肉團)에 계시느니라. 이것을 구식심왕진여(九識心王眞如)의 도(都)라고 하느니라. 십계구족(十界具足)이라 함은 십계(十界)가 일계(一界)도 빠짐없이 일계(一界)에 있음이라, 이에 의(依)해서 만다라(曼陀羅)라고 하며 만다라(曼陀羅)라고 함은 천축(天竺)의 이름으로서 여기서는 윤원구족(輪圓具足)이라고도 공덕취(功德聚)라고도 이름하느니라. 이 어본존(御本尊)도 다만 신심(信心)의 이자(二字)에 들어 있으니 이신득입(以信得入)이란 이것이니라.
니치렌(日蓮)의 제자단나등(弟子檀那等)·정직사방편(正直捨方便)·불수여경일게(不受余經一偈)라고 무이(無二)로 믿음으로써·이 어본존(御本尊)의 보탑(寶塔) 안에 들어 갈 수 있느니라·미덥고 미덥도다. 어떻게든 후생(後生)을 깊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시라, 결단코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만 봉창(奉唱)하여 부처가 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니라, 신심(信心)의 후박(厚薄)에 달려 있으며, 불법(佛法)의 근본(根本)은 신(信)으로써 근원(根源)으로 하느니라."
(어서1243~1244페이지)
"한 번 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하면, 일체의 불·일체의 법·일체의 보살·일체의 성문(聲聞)·일체의 범왕(梵王) · 제석(帝釋) · 염마(閻魔) · 법왕(法王) · 일월(日月) ·중성(衆星)·천신(天神)·지신(地神)·내지(乃至)·지옥(地獄)·아귀(餓鬼)·축생(畜生)·수라(修羅)·인천(人天)·일체중생의 심중의 불성을 오직 한 마디로 불러 나타내시는 공덕은 무량무변하니라. 나의 기심의 묘호렌게쿄를 본존으로 숭앙하고, 나의 기심 중의 불성·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고 불리어서 나타나심을 부처라고 하느니라. 비유컨대 새장 속의 새가 울면 하늘을 나는 새가 모이면 새장 속의 새도 나가려고 함과 같으니라. 입으로 묘법을 봉창하면 나의 몸의 불성도 불리어서 반드시 나타나시고, 범왕·제석의 불성은 불리어서 우리들을 지키시고, 불보살의 불성은 불리어서 기뻐하심이라."
(법화초심성불초 557페이지)라는 말씀 처럼 말법에 어본존을 향해 제목을 봉창하고 광선유포를 위해 전진하는 우리는 틀림없이 허공회 의식에 참석한 지용보살입니다.
<어의구전>에는 "영산일회(靈山一會) 엄연미산(儼然未散)"(어서 757페이지)이라고 있습니다.
"영산일회(영취산에서 열린 허공회)는 엄연히 아직 흩어지지 않고"라고 뜻입니다.
다시 말해 허공회 의식은 먼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는 지용보살이다'라는 확신에 타올라 행동하는 지금 이곳에 엄연히 계속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말법시대의 민중을 영원히 구하는 법을 유포하겠다고 서원한 사람은 다름아닌 우리입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 자신이 지용보살이라고 자각해 말법시대에 민중을 행복으로 이끌 수 있는 유일한 법인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를 부르고 또 부르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 속에서 모든 숙명이 전환되고 괴로움이 기쁨으로 바뀌는 무한한 생명경애가 열립니다.
우리가 실천하고 있는 사의 일념삼천의 법화경은 주.사.친 삼덕이라는 전인격적인 차원의 생명 연대에 의해 생명을 한 없이 약동시켜 함께 환희의 대드라마를 연출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니치렌대성인님과 함께 공전의 역사를 새기려는 진지한 기원과 실천을 해 간다면 반드시 대어본존님의 우주대의 일념과 나의 일념이 맞물려 제반 분야에서 공헌해 가는 대인재로 우리 본연의 능력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로 대어본존님과 하나가 되었을 때 그것을 함께 느끼고 자신의 생명의 위대함에 ,자신의 성장에 자신도 놀라게 될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우리들도 어본불처럼 동류가 되어 어떠한 환경에서도 한 없이 환경을 변혁시켜가며 살아 있다는 자체가 즐거운 환희 중의 대환희의 삶을 미래 영원히 살아가게 되는 것이지요.
건강이 회복되었다, 몇 십억을 벌었다, 좋은 대학에 다녀 0 0가 되었다도 좋고 공덕이겠지만 우리들은 그런 정도를 얻기위해 신심하는 것은 아니지요.
태산이 우뚝 솟아 오르듯이 우리들의 생명을 한없이 한없이 우주대로 약동시켜 가며 최극의 인생을 만끽할 수 있는 위대한 실천이 말법 법화경행자의 실천이고 우리들이 신심하는 진정한 이유이지요.
일체를 원하는대로 변혁시키는 인간공화의 대 드라마를 생각하고 확신하면 가슴이 뛰지 않을 리가 없지요.
그 모습을 니치렌대성인님께서 보여 주셨고,이제 우리들이 보여 나갈 차례이지요.
.신심의 세계에서 가장 기본은 어본존님이 절대이다라고 확신하는 속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생명도 우주삼라만상도 일체가 어본불의 생명이고 근원이며,함께 생명을 열어 갈 수 있음을 먼저 확신하고 일념을 정하는 속에 진정한 불제자의 길이 열린다고 생각합니다.
환희와 희망과 용기와 도전과 배려와 행복을 마음껏 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끝없이 함께 일념을 공유하며 비상해가는 아름다운 생명의 연대가 대어본존님을 향한 창제행이리라 생각합니다.
아무리 입으로는 광선유포를 외치고 현장에서 회원을 위하는 척 해도 어본불에 대한 확신과 창제로 생명이 한없이 열리지 않는 한 진정한 광선유포도 하늘이 놀래고 땅이 놀래는 결과도 나오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어서를 철저히 읽으며 니치렌대성인님의 일념을 생명으로 체득하는 제목에 먼저 도전해가는 진정한 의미의 말법 법화경행자로서의 기본 중의 기본을 철저히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생명 속에 환희가 폭발하여 생명의 문이 우주대로 열려 미동도 하지않을 신념을 갖고 용기와 도전정신으로 일어섰을 때(진정한 의미로 천사천허유아독존 처럼 혼자 우뚝 섰을 때) 진정한 말법 광선유포의 길이 열린다고 생각합니다.
진지한 기원과 창제...그리고 사명완수를 위한 구체적이고도 현명한 실천으로 지구촌 평화낙토 건설과 전 민중의 행복을 위해 일념을 확고히 정한 상태에서 제목이 많아지면 자연히 어본불의 마음 즉 불계의 한없는 대자대비의 마음을 알게되고 또 대어본존님과 통하게 되어 자신이 올바른 모습으로 우뚝서게 되니것이 니까요.
암튼 어본불을 확신하고 생명의 문을 한껏 여는 상쾌하고 확신에 찬 진지한 기원 속에 진정한 불제자의 길. 불성이 열림을 확신합니다.
요즈음 들어서 우리들이 부르는 제목 한마디의 힘이 얼마나 위대하고 대단한지를 새삼 느끼고 실감하면서 그 감사한 마음에 더욱 용기백배하여 전우주를 아우러는 창제를 행하고 있기에 전부가 우리들이 원하는대로 하나하나 풀려가고 있음을 실감합 니다.
희망과 용기와 환희와 여유와 확신이 넘치는 진지한 창제와 일념, 그 출발 선상에 원대한 광선유포의 길이 열림을 생명으로 느낍니다.
어본불과의 아름다운 생명의 연대 속에 피어나는 민중구제의 드라마를 생각하며 대어본존님을 만남 수 있음에 깊이 감사하며 그 사명의 길을 삼세 영원히 함께 실천할 수 있음에 가슴이 뛰고 온몸이 전율합니다.
시공을 초월한 영원하고도 우주대의 환희 중의 대환희의 생명을 느끼고 실천하려 애써면서 더욱 순수하고 겸허하고 겸손한 자세로 오롯이 다가가려 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 모두 더욱 대어본존님과 하나되어 함께 힘내 가십시다.
너무나 소중한 신심을 만나 어본불을 알고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생명의 근본리듬의 주인공이 되어 이끌어가고 있는 자신의 위대한 도전에 더욱 일념과 경애를 끌어올려 삶을 승리로 장식해가는 대사명의 인생을 살고 살아 가십시다.
허공회의식도 구원부터 어본불에게서 훈련 받아 온 것도 모두 창제행을 하는 순간의 어본불의 당체에 고스란히 녹아 있기에 우리들이 나아가는 순간 순간 마디 마디가 전부 최극의 생명의 용출.발현임을 확신하고 보무도 당당히 서로를 위하고 격려하면서 말법의 법화경행자답게 나아가십시다.
많는 사람들이 신심을 하는 척해도 깊은 차원에서 어본불의 뜻과 정과 사 즉 벌과 이익이라는 진정한 의미의 배려를 생각하지 못했기에 대성인님 입멸 후 오노승은 결국 구원의 어본불을 옆에 모시고 있었느네도 불구하고 석존을 본으로하여 천태류로 흐르고 말았지요.
일련종의 무리들은 대성인을 따르는 척 했지만 생명의 구극인 어본불을 배신하고 불적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생명의 근원인 어본불을 절대라고 믿지 못하고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 처럼 생각하고 행동했기에 우리들과는 달리 지금의 탁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본존님을 배알하는 가장 큰 목적은 매일 허공회의식에 참여하는 것이지요.
경지명합의 모습은 진정한 발적현본의 모습이고 자신을 자체현조하여 가장 위대한 생명인 불성으로 빛나게 하는 장엄한 순간이기도 하구요.
매일의 창제회 즉 허공회의식-생명의 보탑을 여는 것은 생명에 품고 있는 주.사.친 삼덕의 드라마를 연출해 내는 작업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생명에는 불계의 생명이 원래부터 갖추어져 있지만 어본불을 절대라고 믿고 창제하는 가운데 구계 즉 불계의 모습으로 불계의 생명이 열리듯이 무명의 모습도 일 순간 즉 창제행으로 깊이 대어본존님과 하나되는 그 찬라의 순간에 본불과 같은 모습으로 열리는 것입니다.
우주삼라만상의 근원인 어본불을 절대라고 믿고 구원 즉 말법 입장에서 불성을 열고 환희 중의대환희를 실감해 가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허공회의식에서의 서원도 구원부터의 불제자의 길도 어본존 속에 지금 살아 숨쉬게 하는 것이기에 대어본존님과 일념을 어떻게 하나로 하며 신심의 입장에서 어떤 광선유포의 역사를 새겨가는가... 그것은 어본불을 근본으로하여 온 생명으로 부딪칠 때 만이 가능하겠지요.
불법의 구극이 주.사.친 삼덕에 있음은 어본불의 당체를 가만히 응시하며 전혼으로 창제해보면 실감할 수 있지요.
그것은 구원 즉 말법이기에... 본인묘이기에... 중요한 것은 지금의 이 순간의 일념이라 생각합니다.
원래부터 존재되고 있는 일체의 모습은 어본불의 당체에 모두 포함되어 있지만 결국 어본불이 절대라는 확신으로 진지하게 창제하며 일념의 폭을 넓히고 불성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을 때 진정한 경지명합.발적현본의 길에 들어서게 되겠지요.
그리고 진정으로 과거 현재 미래 삼세를 응시하며 우주대의 일념으로 어본존님이 절대라고 믿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고 또 한순간이라도 이런 일념으로 경지명합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느냐가 미래를 결정해갈 것입니다.
진정한 신심은 어본존님을 절대로 확신하며 ... 창제로 허공회의식-생명의 보탑을 용출시키며 언제나 함께하는 어본불을 생명으로 실감하고 과거도 현재도 미래영겁까지도 함께 하며 함께 역사를 만들어 내고야 말겠다는 각오로 전혼을 다하여 도전해 갈 때 진정한 의미의 말법 광선유포를 실현할 수 있는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시간이 갈 수록 더욱 강해지는 법력과 불력 그리고 위광세력으로 볼 때 위대한 말법 광선유포의 진정한 때가 도래하고 있음을 온생명으로 실감하면서 더욱 진지하게 창제행을 실천하고 커다란 서원을 실천.실현해가고자 합니다.
이러한 중차대한 이 때에 낙오하지 않고 함께 할 수 있음에 한없이 감사한 마음이 들고 끝까지 승리의 길을 걷고 또 걸어갈 것을 결의합니다~!!!
*** 허공회의 설법 ***
삼변토전의 의식으로 국토를 청정하게 하고 시방세계로부터 분신의 제불을 불러 모우고 이어서 보탑이 열리고 석존과 다보여래가 나란히 앉고 신통력으로 회좌의 사람들을 허공에 띄웁니다.---허공회 시작
지용의 보살을 불러내어 멸후 홍교의 사명을 기탁하는 의식이 행해진 다음 보탑이 닫혀지고 시방분신제불은 각각 본토로 돌아갑니다.
보탑을 열기 위해 국토를 청정하게 하고 시방의 제불을 불러 모은 것은 이 보탑으로 상징되는 불계가 우주적 보편성을 갖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허공에서 설법이나 의식이 거행되었다는 것은,여기서 교시된 내용이 시간적,공간적인 제약을 초월하는 보편적인 진리임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허공회의 설법에서는 석존의 멸후 누가 법을 넓혀 갈 것인가가 그 중심테마로 되고있는데, 지용의 보살을 불러내어 법을 부촉하고 허공회가 끝나는 것을 보았을 때 지용의 보살에 의한 말법의 홍통이 불법상 얼마나 중대한 일인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대성인은 니치뇨부인답서에
「이에 日蓮이 어떠한 불가사의한 일인지 용수.천친등.천태묘락등 조차도 나타내시지 않았던 대만다라를 말법 이백여년경에 비로소 법화홍통의 기치로서 나타내 드리느 리라.」(어서1243페이지)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성인이야말로 지용의 보살의 상수(上首)인 상행보살의 재탄으로서 출현하셨으며,말법의 민중구제를 위한 삼대비법의 어본존을 법체(法體)로서 건립하신 것은 그 본지(本地)가 구원원초의 자수용보신이며 말법의 어본불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도현하신 어본존에 대해
「 이 어본존은 재세 50년 중에는 8년.팔년 간에도 용출품에서 촉루품까지 팔품에 나타나셨느니라(어서1243페이지)」라고 말씀하신 것은 , 대성인이 도현하신 어본존은 대성인이 임의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석존도 깨달았던 진리 그것을 법화경의 허공회의식으로 나타내었다는 것입니다.
대성인은 말법의 모든 사람이 어본존을 믿고 제목을 부름으로써 허공회의 의식에 열석하여 묘법이라는 생명본원의 고향에 주(住)할 수 있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견대보탑(見大寶塔)이란 우리들의 일신(一身)이며 주재공중(住在空中)이란 우리들 중생(衆生)이 마침내 멸(滅)에 귀(歸)하는 것이니라. 지금 니치렌(日蓮) 등(等)의 동류(同類)가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여 신심(信心)에 주(住)하는 곳이 주재공중(住在空中)이며 허공회(虛空會)에 주(住)하는 것이니라." (어의구전 御義口傳 740페이지)라고 지남해 주시는 대로 입니다.
법화경 방편품에서 설한 제법실상은 ‘제법이 바로 실상’ 즉 지옥계에서 불계까지 십계 중생과 그들이 사는 세계 즉 제법이 모두 묘호렌게쿄 즉 실상의 모습이라고 밝히셨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지옥계, 보살계 등 어떤 경애의 중생이라도 궁극적인 생명의 모습은 ‘묘호렌게쿄’의 존귀한 당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묘법을 신수하고 각지한 사람은 누구나 ‘부처’의 경애를 열 수 있습니다.
이 제법실상의 심오한 이치를 상징적인 모습으로 설해 밝힌 ‘허공회의식’에서는 공중에 뜬 거대한 보탑 안에 석가와 다보 두 부처가 나란히 앉아, 부처의 영원한 생명과 부처를 성불시킨 근원의 대법인 ‘묘호렌게쿄’를 암시합니다.
그때 석존의 제자로서 수많은 보살이 대지에서 출현해, 이 대법을 말법시대에 광선유포할 사명을 받습니다. 이 보살들이 바로 지용보살입니다.
대성인은 몸소 깨달으신 영원한 근원의 대법을 ‘남묘호렌게쿄’라 하고, 홍통과 더불어 허공회의식을 바탕으로 말법의 사람들이 근본으로 해야 할 어본존으로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대성인과 같은 마음으로 광선유포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도 또한 지용보살입니다.
대성인이 맨 처음 부르신 남묘호렌게쿄를 한 사람 또 한 사람에게 불러 전하는 지용보살의 사명이 있는 사람을 넓힘으로써 광선유포는 반드시 실현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더불어 지용보살이 해야 할 구체적인 실천으로 신, 행, 학을 제시하고, ‘행학의 이도’를 강성하게 실천하도록 당부하셨습니다
사람은 어느 때 행복을 느끼는가. 그것은 자신이 중요한 사명을 지닌 다시 없는 존재임을 알고, 그 사명을 열심히 실천해 이루어냈을 때가 아닐까요.
대성인은 당신과 같은 마음으로 광선유포를 위해 투쟁하는 문하는 ‘지용보살’이며, ‘구원부터 석존의 제자’라고 하셨습니다.
‘지용보살’은 멸후의 홍법을 부탁하려고 석존이 불러낸 무수한 보살입니다.
무량한 광명을 내뿜고 지혜는 헤아리기 어려우며, 의지는 견고하고, 위대한 인내력을 지닌 모습이었다고 설합니다.
‘구원부터 석존의 제자’는 부처의 영원한 제자라는 뜻인데, 결론적으로 말하면 말법의 어본불이신 니치렌대성인의 제자라는 말입니다.
“법화경 행자로서 일관하고” “니치렌의 일문이 되어” “니치렌과 동의란다면”이라고 말씀하셨듯 대성인의 가르침 그대로 끝까지 투쟁하며 ‘지용보살’의 사명을 자각하면 내 생명에 위대한 지혜와 저력을 약동시킬 수 있습니다.
불법에서는 때를 최우선시 합니다.
지금 니치렌이 시(時)에 감(感)하여 이 법문을 광선유포하느니라.
(삼대비법품승사 1023페이지)
어떠한 때인가에 따라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이지요.
대원(大願)이란 법화홍통이니라.
(어의구전 736페이지)
법은 스스로 홍통되지 않는다. 사람이 법을 홍통하는 고로 인법이 함께 존귀하니라.
(백육개초 856페이지)
이러한 자의 제자단나가 된 사람들은 숙연이 깊다고 생각하여 니치렌과 동일하게 법화경을 넓혀야 하느니라, 법화경의 행자라고 불려져 버린 것은 이미 불상(不祥)이며 면(免)하기 어려운 몸이로다.
(자쿠니치보어서 903페이지)
말법 시대에 제목을 부를 수 있는 인간으로 태어나 75억명의 인류의 불성을 일깨우는 위대한 창제행에 마음껏 동참하는 행위는 과거원원겁 부터 현재 그리고 미래영겁에 이르기 까지 가장 숭고하고 가장 위대한 대자대비의 행위이기에 우리들은 감사함의 깊이가 더해지고 감동의 깊이가 더해져서 온 생명이 전율하게 됩니다.
75억명의 사람들 중에 우선 자신의 가족을 비롯하여 가까운 인연의 사람들 부터 지구촌 곳곳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들과 미래에 태어날 사람들 까지를 포함하여 한분 한분에게 제목을 보내드려서 그 분들이 전부 환희 중의 대환희의 불성을 용현할 수 있도록 해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들의 창제행은 가장 숭고하고 위대한 행위인 것입니다.
이 행위 즉 제목을 보내드리는 행위의 주체자인 우리들은 환착어본인의 원리대로 제목을 보내드리는 이상으로 더욱 우리들 생명력은 배가 될 것이고 법력과 불력 그리고 제불제천의 위광세력은 더해만 갈 것입니다.
전우주를 포용하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무시무종 무량무변에 걸쳐서 구석 구석에 깊고도 따뜻한 제목을 보내고 또 보내서 모든 생명이 전부 환희 중의 대환희의 근본 리듬에 탈 수 있도록 배려하고 일깨우며 실천해가는 행위를 지속해가는 우리들은 이 세상 어떤 위치의 사람들 보다도 중요하고 가치로운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고 이 모습이 바로 말법의 법화경행자인 지용보살의 본지대로 살아가는 모습이라고 확신합니다.
만일 이 일점에서 벗어나서 그 순수함에 문제가 있는 분과는 어떠한 경우라도 절대로 생명적으로 연대를 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런 탁하고 악한 생명과 교류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순수함을 잃게되고 깊은 차원에서 대어본존님과 경지명합은 불가능하게 되며 또 자신 뿐만 아니라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족과 생활여건 등을 송두리째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마성의 생명은 아주 난처한 입장으로 나가옵니다.
예를들어 부부지간이라든가 형제자매 부모자식지간이라든가 또는 아주 친한 친구 사이나 막역한 지인의 입장으로 다가와서 철저히 상대방의 방심이나 빈틈을 노리는 것이 마성의 습성이기 때문에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대어본존님의 입장에서 판단해야 합니다.
기원을 깊게 해 보면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다 보입니다.
일개 범부인 우리들이 남의 생명상태를 논한다는 것은 자칫 그 파장이 굉장히 크게 작용될 수 있기에 최대한 조심스럽게 그리고 객관적이고 공정한 시각으로 판단하려 노력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소위 말하는 머리로써 하는 판단은 절대로 피해야 하겠습니다.
상대방의 생명상태를 올바르게 판단하기 위해서는 대어본존님의 거울에 비추어보는 수 밖에 없습니다.
올바른 제목을 충분히 부른 상태 즉 대어본존님과 하나로 경지명합된 상태에서 상대방의 생명상태를 바라봐야 올바르게 바라볼 수 있음을 이번에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과거의 순수했든 시절의 생명상태만을 생각하고 또 친하게 지내다 보니 설마 그렇기야 하겠나하는 안일한 마음 등이 생명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 못하고 결국에는 서로가 힘들어지는 경우가 생긴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한번 마성이 준동하면 쉽게 물러나지 않을 것이고 또 수많은 말들로 현혹시키려 갖은 애를 쓸 것입니다.
결국 마성은 머리로써 생각하고 행하기에 그 한계가 불성이 열린 상태에서 바라보면 적나라하게 속샘이 보이는 것입니다. 보지 않으려 해도 자연히 알게 되고 말하는 의도와 그 마음을 꿰뚫어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올바른 일념의 입장에서 전부 고스란히 다 보인다고 해도 믿지 않고 설마하는 생각으로 계속 또 다른 억지주장을 펴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절대로 은혜를 베푼 상대들을 좋게 표현하거나 은혜에 보답하려는 마음은 찾아볼 수 없고 또 은혜를 베푼 사람을 매도하는데 열을 올리는 모습을 보이게 될 것이고, 도리어 아수라 처럼 덤벼들 궁리만 하게 되는 것이 마성의 속성입니다.
마성의 생명이 작용하고 있는 분들을 잘 지켜보시면 앞으로 어떻게 행동하고 처신하는지를 적나라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절대로 화합시키려 하지 않고 서로 이간질 시켜서 자신의 입장과 이익 그리고 생명 연대의 파괴를 본인도 모르는 상태에서 계속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을 수단 즉 이용대상으로 보고 또 반드시 자신의 수하처럼 대하게 되는 것이 마성의 생명입니다.
존경하는 마음이 근본인 상태에서 모든 만남이 이루어져야하는데 이런 소중한 분들을 이용하여 원하는 것을 뜯어내는 대상으로나 시스템을 구축하는 도구 정도로 생각하고 접근하는 비천함을 보이는 것 또한 마성의 속성입니다.
지금 그 마성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고 경악하는 대분분의 사람들은 반드시 돈이나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많은 피해를 실제로 입고 있을 것이고 그 행위를 한 사람도 그것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마성은 탈명자. 탈공덕자. 무자비한 생명으로 괴로움을 뽑아주고 즐거움을 넣어주는 대자대비의 발고여락과는 정반대의 생명 즉 즐거움.행복한 생명을 뽑아버리고 괴로움을 넣어주는 무서운 생명입니다.
이런 류의 생명 상태를 자진 사람들과 가까이 하면 할 수록 괴로움만 더해지고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 처럼 찰싹 달라붙어서 점점 가난하고 유약하고 하는 일 마다 안되게 되고 고통받고 불행하게 됨을 지나온 시간을 더듬어 보면 자연히 알게 될 것입니다.
제육천마왕으로 통칭되는 마성의 생명은 위 아래 할 것 없이 전부가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그 주변에 다가가기만 해도 모든 생명을 비참.처참하게 만들어 버리고 환희 중의 대환희의 생명이 용현될 싹을 근원적으로 제거해 버리는 극악의 생명상태라는 것을 깊이 인식하여 절대로 그런 생명과 교류하거나 가까이 하며 용인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다시한번 더 강하게 말씀드려 둡니다.
깊이 참회하고 또 참회해야 할 중차대한 시기이기에 다시 한번 우리들의 일념을 가다듬는 시간을 이용하여 마성의 본질을 언급하는 것은 더 이상 현혹되지 않을 정도의 생명 상태들이 되어있으니까 더 이상 상대 특히 말법의 법화경행자들을 절대로 얕보지 말것을 바라서입니다.
지금 그 마성에 휘말려 있는 동안은 분명 많은 피해의식을 갖고 상대방을 원망하고 있을 것이기에 그 피해의식을 누가 더 많이 깊이 가져야 하는지 피해를 준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잘 알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인간적인 배려를 생각하고 있는 상대의 마음마져 닫아버리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우리들은 이미 예전의 우리들이 아닙니다.
그 마음을 고스란히 읽을 수 있는 상태의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을 절대로 간과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우리들의 생명의 그릇 크기를 자기의 그릇 정도에 맞추어 비교하는 어리석은 판단은 더 이상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우리들 또한 이 입장에서는 예외 일 수 없으며 첫째도 순수 둘째도 순수 ...스스로 순수하고 남을 존경하고 언행에는 겸허하고 겸손하게 ...이 일점에서 멀어져 있는 생명의 상태에는 언제나 부지불식간에 마성이 치고 들어오게 되어 본인은 물론이고 자신의 가족과 조상 자손까지 한 순간에 나락으로 빠뜨리게 될 것이기에 항상 스스로를 잘 점검하고 반성하고 참회하는 진지함을 잃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순수함과 남을 존경하는 마음과 겸허하고 겸손한 언행...이 일점에 신심을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일점에 자신의 생각과 남을 향한 언행을 적나라하게 펼쳐보면 현재의 자신의 생명의 정도를자연히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 각자는 청정무구한 생명으로 대어본존님께 다가갈 때 진정한 의미의 환희 중의 대환희가 솟아 오르고 살아있다는 자체가 즐거운 절대적인 행복경애 즉 금강불괴의 생명 상태를 언제까지나 유지하면서 유유자적하게 되는 것입니다.
순수함은 불성입니다.
그 불성은 다른 말로는 남을 진심으로 배려하는 것이고 대자대비의 마음으로 깊은 차원에서 위해가는 것입니다.
반대로 탁함은 마성입니다.
다만 나만이 믿을 뿐만 아니라 또 타인의 잘못도 훈계하리라.
(입정안국론 33페이지)
그런데 니치렌이 세상을 두려워해서 이를 말하지 않는다면 불적(佛敵)이 되리라. 따라서 장안대사는 말대의 학자를 간효(諫曉)하여 가로되「불법을 괴란(壞亂)함은 불법 중의 원적(怨敵)이며 자비없이 사친(詐親)함은 이는 그 사람의 원적이니라. 능(能)히 규치(糾治)하는 자는 즉 이는 그의 어버이로다」등 운운.
(오타전허어서 1003페이지)
열반경(涅槃經)에 가로되「만약 선비구(善比丘)가 있어서 법을 파괴(破壞)하는 자를 보고도 그냥 두고 가책(呵責)하고 구견(狸遣)하고 거처(擧處)하지 않으면 마땅히 알지어다. 이 사람은 불법 중의 원적(怨敵)이로다. 만약 능(能)히 구견(○遣)하고 가책하고 거처함은 이는 나의 제자이며 참다운 성문(聲聞)임」운운. 이 문(文)의 중에 견괴법자(見壞法者)의 견(見)과 치불가책(置不呵責)의 치(置)를 깊이깊이 심부(心腑)에 새길지어다. 법화경의 적을 보면서 놓아두고 책하지 않으면 사단(師檀)이 함께 무간지옥(無間地獄)은 의심 없느니라.
(소야전답서 1056페이지)
그 마성은 남을 이용할려는 마음이고 주인과 하인의 관계처럼 대하거나 느끼게 하고 불안을 조성하고 남의 성장을 못보는 생명이기에 항상 발아래에 두려하고 틈만나면 무엇이든 교묘한 언행으로 피해를 입히고 결국에는 생명력을 약화시키고 또 빼앗기도 하는 무섭고도 비열하며 냉혈한 인간성을 보입니다.
그 마성의 사람은 생명으로 가슴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전부를 치밀하게 계산된 상태이거나 습관적으로 머리로 생각하고 처신하기 때문에 자신의 잘잘못을 절대로 모르는 철면피의 모습으로 일관합니다.
정상적인 일념의 분들에게는 그 마성은 유치할 정도의 낮은 수준이기에 전부가 적나라하게 다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마성에 침범되어 습관화 된 생명은 끝까지 자신의 생명을 정화하는 참회 대신에 선한 생명들에게 악감정을 품고 인간이하의 모습을 보이면서 나락으로 떨어져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분들도 언젠가는 다시 본심으로 돌아와 신심을 제대로 하게 되는 것이 말법의 법화경 즉 대어본존님의 위대함입니다.
그 분들이 마성의 생명 상태라고 개인을 미워해서도 안되고 하루 빨리 좋은 생명의 상태가 되어 마성의 권속에서 불성의 권속으로 돌아오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 지구촌에는 무수한 종교들이 있고 찌들대로 찌든 생명들이 넘쳐납니다.
그 생명들을 전부 창제행으로 교화하고자 하는 입장의 우리들이기에 지금 우리들의 불성의 권속 즉 불계군단 만큼은 청정해야 하기 때문에 대어본존님의 계책으로 앞으로도 수많은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설사 당장 눈앞에 보기에는 있을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해도 긴 안목으로 보면 전부 대어본존님의 계책임을 알게되고 전부가 다 최후에는 좋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중생의 마음이 더러워지면 토도 더러워지고 마음이 깨끗하면 토도 청정하다고 해서 정토(淨土)라 하고 예토(穢土)라 함도 토에 둘의 차이가 없으며, 오직 우리들의 마음의 선악에 의한다고 쓰여 있다. 중생이라 함도 부처라 함도 또한 이와 같으니 미혹(迷惑)할 때는 중생이라 이름하고 깨달을 때는 부처라 이름했느니라.
(일생성불초 384페이지)
법화경의 행자는 신심에 퇴전이 없고 몸에 사친없이 일체 법화경에 그 몸을 맡기고 금언과 같이 수행하면 틀림없이 후생은 말할 것도 없고 금생도 식재연명하여 승묘의 대과보를 얻어 광선유포의 대원마저도 성취할 것이니라
(어서 642페이지)
제목의 오자(五字)는 체(體)와 같고 소리와 같은 것이니라
제목을 봉창하는 소리는 시방세계에 닫지 않는 곳이 없느니라
우리들의 작은 소리라 할지라도 제목이라는 대음(大音)에 넣어서 봉창하므로 일대 삼천세계에 도달하지 않는 곳이 없느니라 비유컨대 소음(小音)이라도 조개껍질에 넣어서 불면 멀리 울리는 것과 같고 손의 소리는 작지만 북을 치면 멀리 울리는 것과 같으니라 일념삼천의 대사인 법문이 이것이니라
(어서 808페이지)
법화경은 사람의 모습을 비출 뿐만 아니라·마음도 비추느니라. 마음을 비출 뿐만 아니라·선업도 미래까지도 비추어 보심이 흐림이 없노라.
(신국왕어서 1521페이지)
우리들은 창제행의 깊이를 더하면서 더 이상 어리석지 않게 되었습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환희 중의 대환희의 생명이 24시간 연속되고 있고 그 생명력은 더욱 더 강해지고 자비의 마음은 더욱 깊은 차원에서 배려하고 처신하게 됩니다.
설사 일부에서 우리들의 진심을 오해하고 있다고 하드라도 우리들은 대어본존님 전에 절대로 당당할 수 있음은 진심이 무엇인지를 대어본존님께서 너무도 잘 아시고 명의조람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더욱 순수하고 겸허하고 겸손한 마음가짐과 자세를 견지하여 매 순간 더욱 감사하고 환희로운 행복한 삶을 살고 또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대어본존님은 대경이십니다.
각자의 생명이 청정한 생명인지 탁한 생명인지는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어있습니다.
대어본존님께 부끄럽지 않고 더욱 가까이 다가가서 하나가 되는 삶은 곧 부처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생명에는 환희 중의 대환희의 생명이 계속 솟아납니다.
주변의 상황이나 여건에 상관없이 연속해서 환희 중의 대환희가 계속 솟아나게 되어 있습니다.
불과 몇일 전의 우리와 지금의 우리는 그 생명의 경애차원에서 천량지차가 났음에 놀라게 됩니다.
제대로 창제행에 도전하는 우리들은 이미 전우주의 모든 생명의 책임자가 되어 힘차게 용약환희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어도 최극의 환희 중의 대환희의 생명상태가 되신 분들을 대성인님께서 얼마나 대견해 하시며 칭찬해 주실까요?
또 제불제천은 어떻게 해서라도 광선유포의 대업을 완수하도록 법력.불력의 위광세력으로 철저히 지켜가시지 않겠습니까?
말법 광선유포는 필정입니다.
이 광선유포의 대원에 동참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으려고 결의하고 실천하는 우리들에게 앞으로 얼마나 대단한 일들이 다가올지를 생각하면 그 감사함에 가슴이 뜁니다.
우리들의 일념이 최고조에 달해 있기에 반드시 대어본존님의 계획대로 일들이 착착 진행될 것입니다.
최후에는 모든 생명들이 다 불성이 열려서 대환희하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그 서막을 우리들이 대어본존님과 함께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열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없이 오직 대어본존님과 하나된 경지명합의 창제행으로 보무도 당당히 전진해가면 되는 것입니다.
말법의 법화경행자인 우리들은 니치렌대성인님의 진정한 불제자로서 대자대비하신 그 서원 즉 말법의 일체 중생이 모두 다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를 봉창하여 환희 중의 대환희인 불성을 용현하여 행복한 삶을 구가 할 수 있게 해주시려는 그 마음을 우리들의 마음으로 하여 자행화타에 걸쳐서 실천해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니치렌은 태어났을 때부터·지금껏 일일 편시(片時)도·마음 편한 일은 없었다. 이 법화경의 제목을 홍통하려고 생각할 뿐이니라.
(우에노전답서 1558페이지)
니치렌의 자비가 광대하면 남묘호렌게는 만년외 미래까지도 유포하리라. 일본국의 일체중생의 맹목(盲目)을 여는 공덕이 있으며, 무간지옥의 길을 막았느니라.
(보은초 329페이지)
일본국 안에 오직 한 사람 남묘호렌게쿄라고 불렀노라, 이는 수미산(須彌山)의 처음의 일진(一塵)이요, 대해(大海)의 처음의 일로(一露)이니라. 이인 · 삼인 · 십인 · 백인·일·이지방·육십육개지방·이미 섬 둘에도 미쳤으리라, 지금은 비방(誹謗)하던 사람들도 부르시리라. 또 상일인으로부터 하만민에 이르기까지 법화경의 신력품(神力品)과 같이 일동으로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시는 일도 있으리라.
(묘미쓰상인어소식 1241페이지)
니치렌 한 사람이 남묘호렌게쿄라고 불렀으나 이인·삼인·백인 이렇게 차례로 불러서 전하느니라. 미래도 또 그러하리라, 이 어찌 지용(地涌)의 의(義)가 아니리오. 더구나 광선유포의 때는 일본일동으로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게 될 것은 대지를 과녁으로 하는 것과 같으리라.
(제법실상초 1360페이지)
이러한 자의 제자단나가 된 사람들은 숙연이 깊다고 생각하여 니치렌과 동일하게 법화경을 넓혀야 하느니라, 법화경의 행자라고 불려져 버린 것은 이미 불상(不祥)이며 면(免)하기 어려운 몸이로다.
(자쿠니치보어서 903페이지)
니치렌대성인님의 지남대로 우리들은 지금 이 지구촌에서 광선유포라고 하는 민중구제의 미증유의 생명의 대역사를 새겨가려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행하고 있는 아침 저녁의 창제행에 의해서 이미 75억명의 생명들이 약동하기 시작했고 드디어 한명 한명 연이어 창제행에 동참해서 환희 중의 대환희의 불성을 한없이 용현하게 될 것입니다.
오직 남묘호렌게쿄라고만 봉창하면 멸하지 않는 죄가 있겠는가, 오지 않는 복이 있겠는가. 진실이고 심심(甚深)하니 이를 신수(信受)할지어다.
(성우문답초 497페이지)
三十三의 액(厄)은 전환되어 三十三의 행(幸)으로 되시리라, 칠난즉멸(七難卽滅)·칠복즉생(七福卽生)이란 이것이니라, 나이는 젊어지고 복은 쌓일 것이외다.
(시조깅고전부인답서 1135페이지)
이 만다라(曼茶羅)를 정성껏 믿도록 하시라. 남묘호렌게쿄는 사자후(師子吼)와 같으니, 어떠한 병인들 장해를 할 손가.
(교오전답서 1124페이지)
「이 경(經)은 즉 이는 염부제(閻浮提)의 사람의 병의 양약이니라, 만약 사람이 병이 있는데 이 경(經)을 들을 수 있으면 병이 곧 소멸하여 불로불사(不老不死)하리라」
(오타입도전답서 1010페이지)
일체중생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는 이외에 유락은 없느니라
경(經)에 가로되 중생소유락 운운 이 글월 어찌 자수법락이 아니겠느뇨(중략)
유락이란 우리들의 색심 의정 함께 일념삼천 자수용신의 부처가 아니겠느뇨
법화경을 받드는 이외에 유락은 없으며 현세안온 후생선처란 이것이니라
(어서 1143페이지)
법화경의 본문의 간심인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는 삼세제불의 만행만선의 공덕을 모아서 五字로 하였으니 이 오자(五字) 내외 어찌 만계의 공덕을 포함하지 않겠느뇨
그러나 이 구족의 묘계는 한번 가진후 행자가 파하려고 해도 파해지지 않으니 이를 금강보기계 라고 말한다.
(중략)
삼세제불은 이 계를 갖고 법신 보신 응신 등 어느 것이나 무시무종으로 부처가 되셨느니라
(어서 1282페이지)
대지를 가리켜서 빗나갈지라도 허공을 동여매는 자는 있을지라도 · 조수(潮水)의 간만(干滿)이 없는 일은 있을지라도, 해는 서쪽에서 돋을지라도, 법화경의 행자의 기원이 성취되지 않는 일은 있을 수 없느니라.
(기도초 1351페이지)
반드시 우리들과 우리들의 창제행과 절복전으로 새로 용출할 75억명 모두는 자연스레 불계의 경애를 구축하게 되어 끝없이 행복한 삶을 살고 또 살아가면서 수 많은 민중들을 연이어 구해가게 될 것입니다.
불계의 생명의 대연대와 연동에 의해 그 흐름은 지구촌의 평화낙토 건설과 전민중의 행복구축이라는 이상향을 실현해 내게 될 것입니다.
다만 이런 중차대한 때와 더불어 환희 중의 대환희의 생명의 연대 구축을 방해할려는 생명 즉 마성의 준동 만큼은 철저히 경계해야 합니다.
당신들은 소중한 니치렌의 편이니라. 그러나 노심(勞心)하여 애써서 기원했는데 · 지금껏 증험이 없음은 이 중에 마음이 변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나이다.
(벤전어소식 1225페이지)
좋은 부시와 좋은 부싯돌과 좋은 부시 깃과 이 셋이 합치해야만 불을 쓰게 되느니라. 기원도 또한 이와 같아서 훌륭한 스승과 훌륭한 단나와 훌륭한 법과 이 셋이 합치하여서 기원을 성취하고 국토의 대난마저도 없애는 것이로다.
(법화초심성불초 550페이지)
그대 부처가 되고자 생각한다면 만의 당번을 쓰러뜨리고 분노의 지팡이를 버리고 오로지 일승에 귀의 할지어다
명문명리는 금생의 장식이고 아만편집은 후생의 족가이니라
아 아 부끄러워하고 또 부끄러워 할지어다 또 두러워하고 두러워 할지어다
(어서 463페이지)
마성은 탈명자 즉 생명력을 약하게 하거나 악의 생명을 증장시키거나 목숨을 빼앗고 또 탈공덕자 즉 공덕. 복운을 일시에 없애버리는 무서운 생명의 존재입니다.
그 마성은 마성에 휘둘리고 있는 본인 뿐만 아니라 가까운 가족과 친척은 물론 주변의 생명들 까지도 탈명자.탈공덕자의 극악한 생명으로 작용하여 본인 뿐만 아니라 주변 모두를 불행의 나락으로 이끄는 악의 생명입니다.
다보불은 법화경의 위대함을 증명하기 위해 나타납니다.
다보불은 법화경이 유포되는 싯점에 맞추어 태어나서 위광세력의 갖가지 상상을 초월하는 제현상과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가 진실함을 증명해 줍니다.
이 다보불이라고 확신되는 분이 우리들 보다 먼저 세상에 태어나서 경문대로 신비로움과 선을 베풀고 있는데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의 대단함은 글로써 표현 못할 정도로 대단함을 체현해주시고 계신데 조만간 함께 만나보시면 제가 왜 이분을 언급하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분 말씀 중에 선행을 베푼 것을 남이나 세상에 알리는 순간 그 복운은 날아가버리고 소멸되고 만다고 하시면서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겸손하라. 겸손하라. 겸손하라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본인 스스로도 이 마음을 잃어버리는 순간 자신의 초자연적인 신비한 제현상들도 함께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고 걱정하며 확신하고 있는 마음가짐과 태도를 견지하시고 계시답니다.
우리들도 조만간 깊고도 좋은 차원에서 이 분과 함께 생명의 연대를 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다했다. 전부 내가 다했다고 헛소리하는 생명은 이미 대자대비의 마음 대신에 마성이 자리했다고 소리치는 모양새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70년 이상을 신심을 해온 이께다선생 같은 생명이 두파작칠분.심파작칠분의 뇌란자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니치렌(日蓮)의 제자(弟子)중에·어지간히 법문(法門)을 아는 척하는 사람들은·나빴던 것 같소이다.
(우에노전답서 上野殿答書 1546페이지)
의법불의인(依法不依人)의 경문(經文)·훼방차경(毁謗此經)의 문(文)을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소냐 악귀입기신(惡鬼入其身)하여 무명(無明)의 악주(惡酒)에 취(醉)해서 가라 앉으시리라.
(교행증어서 敎行證御書 1279페이지)
의법불의인(依法不依人) - 법에 의하되(근거하되) 사람에 의하지 말라 즉 법문을 좀 아는 척하거나 신심을 자기 혼자 잘하는 척 하는 사람의 말이나 글이나 행동을 보고 무턱대고 따라해서는 안되며 오직 법화경(法華經)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에 의거하고 니치렌대성인님의 어서와 일염주제총여의 대어본존님을 근본으로 해서 일체를 판단하고 실천해 나아가야지 그렇지 않으면 악귀입기신(惡鬼入其身) 즉 그 몸에 악귀가 들어가서 생명을 파괴하고 주변의 따르든 사람들의 목숨마져도 빼앗게 되는 탈명자. 마성에 지배된 생명이 되어버리고, 자기만 이상하게 되는 것 뿐만 아니라 따르든 무리들 또한 그 따르는 깊이와 행한 악행.방법의 정도에 따라 불벌. 현벌을 함께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니치렌(日蓮) 은 천상(天上)·천하(天下)의 일체중생(一切衆生)의 주군(主君)이고 부모(父母)이고 사장(師匠)이니라. 지금 구원하종(久遠下種)의 수량품(壽量品)에 가로되「금차삼계개시아유(今此三界皆是我有) 주군(主君)의 의(義)이니라. 기중중생실시오자(其中衆生悉是吾子) 부모(父母)의 의(義)이니라 이금차처다제환난(而今此處多諸患難) 국토초목(國土草木) 유아일인능위구호(唯我一人能爲救護) 사장(師匠)의 의(義)이니라」고 했느니라. 삼세상항(三世常恒)으로 니치렌(日蓮)은 금차삼계(今此三界)의 주(主)이니라. 니치렌(日蓮)은 대은이희유사(大恩以希有事)·연민교화이익(憐愍敎化利益)·아등무량억겁수능보자(我等無量億劫誰能報者)일 것이니라.
(산탕상승사 産湯相承事 879페이지)
대어본존님의 주.사.친 삼덕 중에서 사(師)를 교묘히 포장하여 사제불이(師第不二) 운운하면서 불법의 본의를 왜곡하는 사람은 어서 말씀대로 바로 "악귀입기신(惡鬼入其身)하여 무명(無明)의 악주(惡酒)에 취(醉)해서 가라 앉으시리라" 라는 말씀대로 되는 것입니다.
어떤 누구를 막론하고 이런 류의 사람은 현벌.불벌은 피할 수도 없고 무명(無明)의 악주(惡酒)에 취(醉)해서 비참하고 처참하게 나락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은 자명합니다.
지금 이케다선생 부부와 그 자식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사제불이를 외치면서 알게 모르게 대어본존님께 사적대한 수 많은 학회 수뇌부 간부들과 닛켄법주를 박명 운운하며 제일 선두에서서 목숨을 걸듯이 싸웠든 직제자들이 젊은 나이에 요절하거나 멀쩡하든 사람이 갑자기 급사하게 되는 현상이 연이어 일어나고, 또 가까이는 박모 전한국SGI이사장 같이 이케다선생의 아픈 부위와 똑같은 곳에 아프게 되는 안타까운 사제불이의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케다선생님 처럼 훌륭한 분이 설마 악귀(惡鬼)일까라고 의심하는 분들은 그 불벌.현벌의 모습을 보고 일체를 판단하면 될 것입니다.
전세계의 SGI멤버들이 조석으로 건강.장수를 기원했는데, 결과는 염원과는 정반대로 사람구실도 못할 정도로 병에 찌들고 마성에 찌든 추악하고 비참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상황-이 사실 그대로를 근거로 해서 일체의 정사를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저 또한 누구보다도 이케다선생과의 사제불이를 외쳤든 한 사람으로서 천만다행히도 대어본존님과 하나되는 경지명합된 상태에서 차순으로 사제불이를 생각하고 실천했기에 그나마 이런 올바른 창제행을 실천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두고 두고 참회제목을 부르면서 송구스러워하고 있고, 대다수의 순수하신 SGI멤버들을 악마의 권속. 소굴에서 벗어나게 하여 대어본존님 근본의 순수한 신심을 실천하여 위에 언급한 상상을 초월하는 현증들을 맛보면서 환희 중의 대환희의 대성인님의 권속-품 안에서 행복하실 수 있도록 목숨을 걸고 인도해 가고자 합니다.
내가 누구 누구를 입신시켰다. 내가 전부 연결했다. 내가 전부 지도했다. 라고 헛소리 하는 생명의 상태는 이미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어서와 현증 등을 통해 확연하고 스스로가 나는 정상이 아닌 마성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모양새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런 생각과 언행을 하고 있는 분은 하루 빨리 정상적인 일념으로 돌아와야 불벌을 피할 수 있을것이고 이런 류의 생명과는 어떠한 연대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이제 우리들이 학수고대해왔든 말법 광선유포의 그 때가 드디어 5월30일 시작됩니다.
입종선언 777주년이 되는 2030년 5월 30일 즉 향후 17년간 7억5천만명의 지용보살들을 용출시키게 될 것입니다.
청정무구한 불계의 생명들이 연대하여 일체의 민중을 근원으로 부터 구제해가는 위대한 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에 맞추어서 제반 여건 즉 자금등의 여건이 일시에 풀리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은 대어본존님의 계책 하에 설계도.시나리오 대로 전개되고 있음을 실감합니다.
두고 보시면서 자연히 아시게 될 것이고 우리들은 유유히 그 과정을 함께 실천하고 노고하면서 즐겨가면 되는 것입니다.
이 위대한 사명의 길에 함께 할 수 있음에 한없이 감사하면서 더욱 순수하고 겸허하고 겸손한 마음가짐과 행동. 실천으로 말법 광선유포의 위대한 역사의 페이지를 말법법화경행자.니치렌대서인님의 불제자 답게 새겨가려 합니다.
구원실성(久遠實成)의 석존(釋尊)과 개성불도(皆成佛道)의 법화경(法華經)과 우리들 중생(衆生)의 셋은 전(全)혀 차별(差別)이 없다고 깨달아서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바를 생사일대사(生死一大事)의 혈맥(血脈)이라고 하느니라. 이 일은 다만 니치렌(日蓮)의 제자(弟子) 단나(檀那) 등(等)의 간요(肝要)이며, 법화경(法華經)을 가진다고 함은 이것이로다. <중략>
기필(期必)코 기필(期必)코 강성(强盛)한 대신력(大信力)을 다하여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임종정념(臨終正念)이라고 기념(祈念)하시라. 생사일대사(生死一大事)의 혈맥(血脈)은 이 외(外)에 절대(絶對)로 구(求)하지 말지니라,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이란 이것이로다. 신심(信心)의 혈맥(血脈)이 없이는 법화경(法華經)을 가질지라도 무익(無益)하니라.
생사일대사혈맥초(生死一大事血脈抄) 사도에서 51세에 술작 1337~8쪽
물어 가로되, 법화경(法華經)을 믿는 사람은 본존(本尊)과 행의(行儀) 그리고 일상(日常)의 소행(所行)은 어떻게 해야 하느뇨. 답(答)하여 가로되, 제일(第一)에 본존(本尊)은 법화경(法華經) 팔권(八卷) 일권일품(一卷一品) 혹(或)은 제목(題目)을 써서 본존(本尊)으로 정(定)할지어다 라고 법사품(法師品) 및 신력품(神力品)에 쓰였느니라. 또 감당(堪當)할 수 있는 사람은 석가여래(釋迦如來)·다보불(多寶佛)을 쓰거나 만들어서 법화경(法華經)의 좌우(左右)에 이것을 세워 모실지어다. 또 감당(堪當)할 수 있다면 시방(十方)의 제불(諸佛)·보현보살(普賢菩薩) 등(等)도 만들고 써서 받들지어다. 행의(行儀)는 본존(本尊)의 어전(御前)에서 반드시 좌립행(坐立行) 할지어다. 도량(道場)을 나와서는 행주좌와(行住坐臥)를 가리지 말지어다 . 일상(日常)의 소행(所行)은 제목(題目)을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할지어다. 감당(堪當)할 수 있는 사람은 일게(一偈)·일구(一句)라도 봉독(奉讀)할지어다. 조연(助緣)에는 나무석가모니불(南無釋迦牟尼佛)·다보불(多寶佛)·시방제불(十方諸佛)·일체(一切)의 제보살(諸菩薩)·이승(二乘)·천인(天人)·용신(龍神)·팔부(八部) 등(等) 마음에 따를지어다, 우자(愚者)가 많은 세상(世上)이 되면 일념삼천(一念三千)의 관(觀)을 우선으로 하지 않으며 그 뜻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습학(習學)하여 이를 관(觀)할지어다.
물어 가로되, 오직 제목(題目)만을 부르는 공덕(功德)은 어떠하오. 답(答)하여 가로되, 석가여래(釋迦如來)는 법화경(法華經)을 설(說)하려고 생각하시어 출세(出世)하셨지만, 사십여년(四十餘年) 동안은 법화경(法華經)의 명호(名號)를 숨겨두려고 생각하시어, 성수(聖壽) 三十때부터 七十여(餘)에 이르기까지 법화경(法華經)의 방편(方便)을 만들어 七十二가 되어 비로소 제목(題目)을 불러 내어놓으셨으니, 제경(諸經)의 제목(題目)에다 이를 비교(比較)하지 말지어다. 게다가 법화경(法華經)의 간심(肝心)인 방편(方便)·수량(壽量)의 일념삼천(一念三千)·구원실성(久遠實成)의 법문(法門)은 묘법(妙法)의 이자(二字)에 포함(包含)되었느니라. 천태대사(天台大師)는 현의(玄義) 십권(十卷)을 만드시고 제일(第一)의 권(卷)에는 약(略)해서 妙法蓮華經의 오자(五字)의 의(意)를 말씀하셨으며, 제이(第二)의 권(卷)부터 七의 권(卷)에 이르기까지는 또 널리 묘(妙)의 일자(一字)를 설(說)하셨으며 八의 권(卷)부터 九의 권(卷)에 이르기까지는 법연화(法蓮華)의 삼자(三字)를 석(釋)하고 제십(第十)의 권(卷)에는 경(經)의 일자(一字)를 설(說)하셨느니라. 경(經)의 일자(一字)에 화엄(華嚴)·아함(阿含)·방등(方等)·반야(般若)·열반경(涅槃經)을 포함(包含)하셨느니라, 묘법(妙法)의 이자(二字)는 현의(玄義)의 심(心)은 백계천여(百界千如)·심불중생(心佛衆生)의 법문(法門)이로다. 지관(止觀) 십권(十卷)의 심(心)은 일념삼천(一念三千)·백계천여(百界千如)·삼천세간(三千世間)·심불중생(心佛衆生)·삼무차별(三無差別)이라고 세우셨으며, 일체(一切)의 제불보살(諸佛菩薩), 십계(十界)의 인과(因果)·시방(十方)의 초목(草木)·와력(瓦礫) 등(等)은 묘법(妙法)의 이자(二字)가 아니라 하는 일은 없느니라. 화엄(華嚴)·아함(阿含) 등(等)의 四十여년(餘年)의 경(經)들은 소승경(小乘經)의 제목(題目)에는 대승경(大乘經)의 공덕(功德)을 포함(包含)하지 않으며 또 대승경(大乘經)에도 왕생(往生)을 설(說)하는 경(經)의 제목(題目)에는 성불(成佛)의 공덕(功德)을 포함(包含)하지 않았고, 또 왕(王)이기는 하지만 왕중(王中)의 왕(王)이 아닌 경(經)도 있으며, 부처도 또 경(經)에 따라 타불(他佛)의 공덕(功德)을 포함(包含)하지 않는다. 평등의취(平等意趣)를 가지고 타불(他佛)과 자불(自佛)과를 같다고 말하고 혹(或)은 법신평등(法身平等)을 가지고 자불(自佛)·타불(他佛)이 같다고 말함이라. 실(實)은 일불(一佛)에 일체불(一切佛)의 공덕(功德)을 갖추지 않으며, 이제 법화경(法華經)은 사십여년(四十餘年)의 제경(諸經)을 일경(一經)에 담고 시방세계(十方世界)의 삼신원만(三身圓滿)의 제불(諸佛)을 모아서 석가일불(釋迦一佛)의 분신(分身)의 제불(諸佛)이라 말하는 고(故)로, 일불(一佛)은 일체불(一切佛)로서 묘법(妙法)의 이자(二字)에 제불(諸佛)이 모두 들어 있느니라. 그러므로 妙法蓮華經의 오자(五字)를 부르는 공덕(功德)은 막대(莫大)하며, 제불(諸佛)·제경(諸經)의 제목(題目)은 법화경(法華經)의 소개(所開)이며 묘법(妙法)은 능개(能開)라고 알고 법화경(法華經)의 제목(題目)을 부를지어다.
창법화제목초(唱法華題目抄) 가마쿠라에서 39세에 술작 12~3쪽
물어 가로되, 부처의 명호(名號)를 가지듯이 법화경(法華經)의 명호(名號)를 유다르게 가져야 할 증거(證據)가 있느뇨 없느뇨. 답(答)하여 왈(曰), 경(經)에 가로되 「부처가 여러 나찰녀(羅刹女)에게 고(告)하시기를 좋도다 좋도다, 그대들 다만 능(能)히 법화(法華)의 이름을 수지(受持)하는 자(者)를 옹호(擁護)하는 복(福)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고 운운(云云). 이 문(文)의 의(意)는 십나찰(十羅刹)이 법화(法華)의 이름을 가진 사람을 수호(守護)하리라고 서언(誓言)을 세움을 대각세존(大覺世尊)이 칭찬하여 가로되, 좋도다 좋도다, 그대들이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수지(受持)하는 사람을 수호(守護)하는 공덕(功德)은 얼마인지 헤아리기 어렵고·뛰어난 공덕(功德)이며 신묘(神妙)하니라고 말씀하신 문(文)이로다. 이는 우리들 중생(衆生)이 행주좌와(行住坐臥)에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를지어다 라는 문(文)이니라.
대저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란 우리들 중생(衆生)의 불성(佛性)과 범왕(梵王)·제석(帝釋) 등(等)의 불성(佛性)과 사리불(舍利弗)·목련(目連) 등(等)의 불성(佛性)과 문수(文殊)·미륵(彌勒) 등(等)의 불성(佛性)과 삼세(三世)의 제불(諸佛)의 깨달음의 묘법(妙法)과 일체불이(一體不二)인 이(理)를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라고 이름하였느니라. 그러므로 한 번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면, 일체(一切)의 불(佛)·일체(一切)의 법(法)·일체(一切)의 보살(菩薩)·일체(一切)의 성문(聲聞)·일체(一切)의 범왕(梵王)·제석(帝釋)·염마(閻魔)·법왕(法王)·일월(日月)·중성(衆星)·천신(天神)·지신(地神)·내지(乃至)·지옥(地獄)·아귀(餓鬼)·축생(畜生)·수라(修羅)·인천(人天)·일체중생(一切衆生)의 심중(心中)의 불성(佛性)을 오직 한 마디로 불러 나타내시는 공덕(功德)은 무량무변(無量無邊)하니라. 나의 기심(己心)의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를 본존(本尊)으로 숭앙(崇仰)하고, 나의 기심(己心) 중(中)의 불성(佛性)·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고 불리어서 나타나심을 부처라고 하느니라. 비유컨대 새장 속의 새가 울면 하늘을 나는 새가 불리어서 모이는 것과 같고, 하늘을 나는 새가 모이면 새장 속의 새도 나가려고 함과 같으니라. 입으로 묘법(妙法)을 봉창하면 나의 몸의 불성(佛性)도 불리어서 반드시 나타나시고, 범왕(梵王)·제석(帝釋)의 불성(佛性)은 불리어서 우리들을 지키시고, 불보살(佛菩薩)의 불성(佛性)은 불리어서 기뻐하심이라. 그러므로「만약 잠시라도 가지는 자(者)는 내가 즉 환희(歡喜)하며 제불(諸佛)도 또한 그러하니라」고 설(說)하심은 이 심(心)이니라. 그러므로 삼세(三世)의 제불(諸佛)도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의 오자(五子)로써 부처가 되셨으니 삼세제불(三世諸佛)의 출세(出世)의 본회(本懷)이고 일체중생(一切衆生)·개성불도(皆成佛道)의 묘법(妙法)이라 함은 이것이로다. 이러한 취지(趣旨)를 깊이 깊이 알아서 부처가 되는 도(道)로는 아만편집(我慢偏執)의 마음 없이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여야 하는 것이니라.
법화초심성불초(法華初心成佛抄) 미노부에서 56세에 술작 556~7쪽
교오(經王)의 일을 이육시(二六時) 동안 일월천(日月天)에게 기원(祈願)드리고 있소 , 전날의 그 수호본존(守護本尊)을 잠시(暫時)도 몸에서 떼어 놓지 말고 지니시라. 그 본존(本尊)은 정법(正法) 상법(像法) 이시(二時)에는 전습(傳習)한 사람조차도 없었고 더욱이 도현(圖顯)한 일은 전혀 없었느니라. 사자왕(師子王)은 전삼후일(前三後一)이라 하여 개미새끼를 잡으려 할 때나 또한 사나운 것을 잡으려 할 때나 힘을 내기는 매양 한 가지이니라. 니치렌(日蓮)이 수호(守護)의 어본존(御本尊)을 쓰는데 있어서도 사자왕(師子王)에 못지 않노라. 경(經)에 가로되 「사자분신지력(師子奮迅之力)」이란 이것이니라. 또 이 만다라(曼茶羅)를 정성껏 믿도록 하시라.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는 사자후(師子吼)와 같으니, 어떠한 병(病)인들 장해(障害)를 할 손가, 귀자모신(鬼子母神)·십나찰녀(十羅刹女)는 법화경(法華經)의 제목(題目)을 수지(受持)한 자를 수호(守護)하리라고 쓰였느니라. 행(幸)은 애염(愛染)과 같고 복(福)은 비사문(毘沙門)과 같이 되리라, 어떠한 곳에서 놀고 장난쳐도 탈이 없을 것이며, 유행(遊行)하여 두려움이 없음은 마치 사자왕(師子王)과 같으리라. 십나찰녀(十羅刹女) 중(中)에서도 고제녀(皐諦女)의 수호(守護)가 깊을 것이니라. 오직 신심(信心)에 달렸느니라. 검(劍)이라도 부진(不進)한 사람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다. 법화경(法華經)의 검(劍)은 신심(信心)이 강성한 사람만이 소용(所用)되는 것이며, 범에 날개가 돋힌 격이니라.
니치렌(日蓮)의 혼(魂)을 먹물에 물들여 넣어서 썼으니 믿으실지어다, 부처의 어의(御意)는 법화경(法華經)이며 니치렌(日蓮)의 혼(魂)은 바로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묘락(妙樂)이 가로되 「현본원수(顯本遠壽)로써 그 명(命)으로 하다」라고 해석(解釋)하셨느니라.
교오(經王)님에게는 화(禍)도 전환(轉換)되어 행(幸)으로 되리라, 기필코 신심을 일으켜 이 어본존(御本尊)께 기념(祈念)하시라. 무슨 일이든지 성취(成就)되지 않을손가. 「충만기원(充滿其願)·여청량지(如淸凉池)·현세안온(現世安穩)·후생선처(後生善處)」라고 함은 의심할 바가 없느니라.
교오전답서(經王殿答書) 사도에서 52세에 술작 1124쪽
바라건대 법화경(法華經) 때문에 국주(國主)에게 적시(敵視)당하여 이번에 생사(生死)를 벗어나고 싶다. 천조태신(天照太神)·정팔번(正八幡)·일월(日月)·제석(帝釋)·범천(梵天) 등(等)의 불전(佛前)에서의 서원(誓願)을 이번에 시험(試驗)해 보고싶소. 제사(諸師)는 차치(且置)하옵고, 각각(各各)의 신상(身上)의 일은 여기에서 기원드리리라.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 법화경(法華經)을 십이시(十二時) 동안 행(行)하는 것이 되리라. 명심(銘心)하고 명심(銘心)하여 사관(仕官)을 법화경(法華經)이라고 생각하시라, 「일체세간(一切世間)의 치생산업(治生産業)은 모두 실상(實相)과 서로 위배(違背)하지 않음」이란 이것이니라, 부디 부디 글월의 뜻을 헤아리시라, 공공근언(恐恐謹言).
단월모답서(檀越某答書) 미노부에서 57세에 술작 1295쪽
그러므로 경문(經文)에는「부처의 지혜(智慧)로써 다소(多少)를 주량(籌量)한다 해도 그 변(邊)을 알지 못함」이라고 설(說)하여져 부처의 지혜(智慧)조차 이 사람의 공덕(功德)을 아시지 못함이라. 부처의 지혜(智慧)의 진귀(珍貴)함은 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에 칠일(七日)·혹은 이칠일(二七日)이나·내리는 비의 수(數)까지도 아실 수가 있으나, 다만 법화경(法華經)의 일자(一字)를 부르는 사람의 공덕(功德)만은 알지 못하신다고 쓰여있다.
월수어서(月水御書) 가마쿠라에서 43세에 술작 1199쪽
공덕(功德)이란 육근청정(六根淸淨)의 과보(果報)이니라, 결국 지금 니치렌(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자(者)는 육근청정(六根淸淨)이니라, 그러므로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의 법(法)의 스승으로 되어, 큰 덕(德)이 있느니라, 공(功)이란 행(幸)이라는 것이며 또한 악(惡)을 멸(滅)함을 공(功)이라 하고 선(善)을 생(生)함을 덕(德)이라고 하느니라, 공덕(功德)이란 즉신성불(卽身成佛)이고 또 육근청정(六根淸淨)이니라, 법화경(法華經)의 설문(說問)과 같이 수행(修行)함을 육근청정(六根淸淨)이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운운(云云).
(어의구전 762페이지)
일념무명(一念無明)의 미심(迷心)은 닦지 않은 거울이며, 이를 닦으면 반드시 법성진여(法性眞如)의 명경(明鏡)이 되느니라. 깊이 신심을 일으켜 일야조모(日夜朝暮)로 또한 게으름 없이 닦을지어다. 어떻게 닦는가 하면 오직 南無妙法蓮華經(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함을 이를 닦는다고 하느니라.
(일생성불초 384페이지)
부처가 된다고 함은 별다른 일은 아니로다. 南無妙法蓮華經(남묘호렌게쿄)라고 타사없이 불러 나아간다면 천연(天然)히 삼십이상팔십종호(三十二相八十種好)를 갖추게 되느니라. 여아등무이(如我等無二)라 해서 석존과 같은 부처로 손쉽게 되느니라.
(니이케어서 1443페이지))
이러한 어본존(御本尊)을 공양(供養)해 드리시는 여인(女人)은 현재(現在)에는 행운(幸運)을 초래(招來)하고 후생(後生)에는 이 어본존(御本尊)이 좌우(左右) 전후(前後)에 다가서서 어둠에 등불과 같고 험난(險難)한 곳에서 강력(强力)한 종복(從僕)을 얻은 것과 같이 저쪽으로 돌고, 이쪽으로 다가와서 니치뇨부인(日女夫人)을 둘러싸고 지켜 주시리라. 결단코 명심하여 유녀(遊女)가 나의 집에 접근하는 것을 꺼리듯이 방법자(謗法者)를 방지(防止)하시라, 악지식(惡知識)을 버리고 선우(善友)에게 친근(親近)하라 함은 이것이니라.
이 어본존(御本尊)을 결코 타처(他處)에서 구(求)하지 말지어다. 다만 우리들 중생(衆生)이 법화경(法華經)을 수지(受持)하고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흉중(胸中)의 육단(肉團)에 계시느니라. 이것을 구식심왕진여(九識心王眞如)의 도(都)라고 하느니라. 십계구족(十界具足)이라 함은 십계(十界)가 일계(一界)도 빠짐없이 일계(一界)에 있음이라, 이에 의(依)해서 만다라(曼陀羅)라고 하며 만다라(曼陀羅)라고 함은 천축(天竺)의 이름으로서 여기서는 윤원구족(輪圓具足)이라고도 공덕취(功德聚)라고도 이름하느니라. 이 어본존(御本尊)도 다만 신심(信心)의 이자(二字)에 들어 있으니 이신득입(以信得入)이란 이것이니라.
(니치뇨부인답서 1244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