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 3코스 남산
서울 전철 2,4,5 호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3번 출구 건너편 광희문에서 오전 10시 6분에 위짜추 서류바 조단스 패노우 까토나 다섯 명이 만났습니다. 서울 한양 도성 3 코스인 남산 구간을 오늘은 광희문을 기점으로 출발합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오늘의 논쟁 걸이는 서울 토박이라고 자랑하는 패노우의 한 마디가 도화선이 됩니다. 정릉 골짜기 미아리가 무슨 그 당시의 서울이냐고 딴지를 걸고 있는 위짜추 입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것이 왜 그리 궁금하고 중요한지는 각자의 생각 나름입니다.
바로 이 모습이 우리 전공노들의 심심풀이 땅콩이며 토론(?)의 장(場)으로 웃음의 보따리가 됩니다.
조선 시대 광희문(光熙門)은 청게천 물이 흘러 나가는 수구문(水口門)으로 장례 행렬이 많이 지나간다고 하여 시구문(屍口門)으로도 불립니다. 일반인에게는 특히 나이가 좀 들은 어른에게는 광희문 보다는 시구문이라는 단어가 익숙할런지도 모릅니다.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시구문은 지저분한 사창가 술집이 즐비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립하면서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기고 후에 한성부로 부르게 됩니다. 그 당시의 한성부의 경계선은 뚜렷이 선을 그을 수 는 없었으나 궁궐을 중심으로 설정한 것입니다. 한양 도성은 북으로는 북악산(342m,백악산)을 주(主) 산(山)으로 서쪽에 인왕산(338m) 남쪽에는 남산(262m) 동(東)에는 낙산(125m)등의 내사산(內四山)을 능선을 따라 성으로 쌓아 연결한 것입니다. 서울 한양 도성은 길이가 18.627km이며 10km가 현존하는 세계 수도 성곽 중 가장 큰 것입니다. 태조 당시 건립할 때는 1척 크기의 불규칙한 자연석을 사용하였으며, 세종 때는 2×3 척 크기의 다듬은 자연석을 사용하여 큰 돌은 아래에 놓고 중앙부가 밖으로 불룩하게 나와 있습니다. 숙종 때에는 자연석을 2×2척의 정방형으로 다듬어서 축조함으로써 성곽 외관상만으로도 그 당시 석조 기법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서울시가 수년 전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재를 신청했으며 잠정 유산으로 등재된 상태입니다. 조선 왕조의 한성부(漢城府)는 관할 구역으로 도성(都城)에서 10리 떨어져 있는 곳을 기준으로 했습니다. 북으로는 북한산(836m) 남쪽에는 관악산(829m) 동(東)으로는 수락산(638m) 서쪽에 덕양산(125m)의 외사산(外四山)을 그리고 중랑천이 흘러서 한강과 맞 닿은 곳을 경계로 삼았습니다. 따라서 굳이 오늘날의 행정 구역으로 유추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도 같습니다. 서쪽으로 북한산 비봉에서 덕양산으로 보면 대조동 역촌동 녹번동 불광동 홍제동등의 은평구 일부를 제외하고 포함이 되나 봅니다. 동(東)으로는 비봉 동쪽에서 수락산 기슭까지 생각해 보면은 미아동 길음동 정릉동 우이동 번동 창동 쌍문동 수유동 상계동등의 도봉 노원 강북 성북구가 해당이 되는게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낙산을 전후로 중랑천과 한강이 맞 닿는 경계까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종로구 동대문구 성동구 광진구 중구 용산구 서대문구 중랑구 일부를 대충 한성부로 유추해 봅니다. 진실이야 그 당시 지적도를 보아야겠지만 한반도 지도 자체가 그림 수준이었으니 시시비비(是是非非)를 따지는 것도 우스운 이야기 같습니다. 한성부의 인구수를 들여다 보더라도 조선 개국 초기에는 10만 명이 약간 상회하는 정도이며 후기에는 20만명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 노비도 있고 하여 호구 조사도 제대로 이루어지기 힘들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 정도의 인구로 미뤄 볼 때 내사산(內四山) 네 곳에 도성을 쌓았음은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힘들었을까를 짐작해 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한양도성을 바라보며 가벼운 마음으로 즐기면서 걷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생각이 정확한데 아무 것도 모르면서 우기기만 한다고 서로에게 언성을 높힙니다. 이렇게 서로가 잘났음을 떠드는 사이에 장충 체육관을 오른 쪽으로 약수동 로타리를 왼 편으로 바라보며 장충대로를 건너 갑니다. 성곽을 오른 쪽에 끼고 돌며 국립 극장 방향으로 건너서 남산 자락으로 올라 갑니다. 팔각정과 남산 타워를 찍고 통상적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접고 남산 셔틀버스 정류장으로 내려옵니다. 조금 못 가서 왼쪽 산책로를 향하고 보니 산객들은 한 명도 보이지를 않습니다. 오젓한 분위기를 접하고 보니 이 쪽으로 하산하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전에 다니던 오솔길인데 아직 제대로 도로를 정비가 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119 재난 본부와 교통 방송 건물 앞을 지나 영락 교회 앞 뜰로 들어 갑니다. 일요일이라 수 많은 교인들의 왕래가 많습니다. 1945년도에 이북에서 내려 온 한** 목사가 이북 사람들의 선교를 위하여 설립한 교회입니다. 1.4 후퇴 당시에 피난민들이 일주일 정도인가를 예배당 안에서 지내기도 했습니다. 먹먹한 마음을 뒤로 하고 옛 명보 극장 건물 앞을 지나 인현시장을 통과합니다. 힘들다며 아무 데나 적당한 식당으로 들어 가자는 볼멘 소리가 나옵니다. 길 건너에 내가 다니던 영희 국민 학교 교정이 시야에 들어 오고 발걸음이 빨라집니다. 교문을 들어서니 왼쪽 입구에 1989년도에 떠나고 이곳이 영희국교 터 였었다는 표지석만이 60년만에 찾은 나를 반겨주고 있습니다. 지금은 덕수 중학교로 바뀌고 영희 국교는 강남구 일원동에 있습니다. 또 한번 쓰라린 어린시절이 가슴을 짖누르는 것같습니다. 안녕이라는 말을 마음 속으로 되뇌이며 중부 시장과 오장동 냉면 거리를 빠져 나옵니다.
장충동 앰배써더 호텔 맞은 편에 우리의 모교 동북중 고등학교가 있던 건물 모습이 들어 옵니다
근처에 있는 허름한 식당에 자리를 잡고 묵은지 사태찜과 콩비지탕을 곁들여 각 한병의 쏘주로 쓰린가슴을 달랩니다. 그 다음 발걸음은 양고기 구이집으로 누구도 이의 제기가 없이 빨려 들어 갑니다. 주인장 부터 손님 모두가 우리 보다 덩치가 큰 우즈베키스탄인들 뿐으로 좁은 식당을 메우고 있습니다. 양고기 꼬치 구이는 타 음식점에서 먹어 본 것보다 크기도 클 뿐더러 향신료도 다릅니다. side dish는 당근과 양파를 절인 것 뿐입니다. 다시 각 한병의 술을 기분좋게 권주가를 부르고 완샷합니다. 일어 나서는 자연스레 생맥집으로 찾아 듭니다. 오늘 하루는 옛날 그 피난 시절로 돌아가는 기분이며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느낌입니다.
2016년 3월 10일 무 무 최 정 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