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익한은 앞서 徐진사 집을 나와서 서쪽 10리쯤 되는 순흥면 읍내 김교림 집에 이르러 단양군에 사는 최모(김교림은 청풍군 백운동면 최창서라고 들었다고 한다)라고 칭하면서 이 곳을 지나는 일(서원 참배라고도 하고 영주군의 유지인 김동진에게 한문서적을 배우기 위해 가던 길이라고도 하였다)이 있어 방문하였다고 인사하였다. 그때 내객이 4,5명 있었으므로 밀담을 청하였다. 김교림은 옆방으로 안내하자 최익한은 서진사 집에서와 같이 실명을 말하였다. 김교림도 최익한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최익한은 상해 임시정부를 위해 자금을 요청하였더니 김교림은 이름을 들은 바 있으니 잠시 숙고하겠다고 하였다. 그때 밖에서 김교림의 사촌 김경림이 와서 그를 불러서 잠깐 나갔다가 들어왔다.
김경림은 같은 면서기 서병식이 어제 안정면 동촌리의 박수성 집에서 임시정부원이라고 칭하는 자가 돈을 강탈했다는 것을 박수성의 동생으로부터 들었다는 것이었으므로 김교림의 집에도 혹시 그러한 자가 올 위험이 있을 것이므로, 그 이야기를 듣고는 즉시 달려가서 전하고 2,3 일간은 함부로 얼굴을 모르는 자와 면회하지 않도록 주의를 주고 돌아가려고 하던 차에 객실의 옆에 낯 모르는 소년이 있으므로,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고 물으니, 성명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이었으므로 이 인물이 의심스러우니 충분히 조심하라고 일러주고 면사무소로 돌아간 것이었다.
다시 들어온 김교림은 어제 박수성, 서진사 집을 방문했느냐고 확인하였다. 그리고는 무슨 일로 방문하였는지 박수성이 당신을 미행하여 와서 경찰에 고소하겠다고 한다(김교림은 4촌인 김경림이 와서 이웃 동촌동 박수성이 강탈당했다고 전했다고 한다). 다만 명망있는 김교림 집에서 체포하는 것은 결례가 되어 주저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익한은 박수성을 불러달라고 했지만 김교림이 나가보니 이미 박수성은 사라지고 그의 친척인 면서기 서병석(30세 가량)이 들어왔다. 최익한은 그를 향해 박수성이 돈 때문에 나를 미행해 왔다면 반환하겠다고 하였다. 자신은 국가를 위해 일을 하였으니 무사히 낙착이 되도록 조처해달라고 하였다. 서병석은 박수성이 이 정도의 돈으로 곤란을 받지 않으니 고소하기 전에 빨리 도주하라고 하였고, 최익한은 돈을 가지고 도망하기 곤란하니 김교림에게 가방을 소각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김교림은 그 또한 불상사가 되니 가방을 가진 채로 도주하라, 집으로 가던지 경성으로 가서 공부를 하라고 하여 정오쯤 그 집을 나섰다.
그리고 그 집 앞산 속에서 김성일을 만나서 이같은 사정을 말하고 위기 절박하니 편안하고 한가로이 있을 일이 아니라고 하여 최익한에게 10원권으로 10매, 1백원을 주었고, 최익한은 그 가운데 15원을 받아서 헤어졌다. 김성일은 단양 방면으로 최익한은 풍기 방면으로 헤어졌다. 김성일은 만주 한족회에 들어가 산업 장려에 종사할 것이라고 하였다.
최익한은 예천을 지나는 도중 벌방 경찰관주재소의 소재지에서 순사로부터 검문을 받아 신체의 검사를 받았다. 또 한번 위기의 순간을 맞았다. 다행히 가진 돈이 커지 않아서 호구를 벗어나서 곧바로 김천 역으로 가서 기차를 타고 경성으로 올라갔다. 당시 헌병경찰은 군사, 사법, 행정경찰까지 장악, 대구헌병대는 경북지역까지 관할하였다. 헌병분대는 대구, 김천, 함창, 순흥, 영양, 청하에 있었는데 벌방은 순흥 관할이었다.
김교림의 집에서는 이전과 달리 사단이 생겼고 면서기 서병석이라는 자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모금 대상이 되었던 김교림은 이 때문에 모금에서 피해갈 수 있었다. 이로써 며칠간 영주지방에서 군자금 모금을 하러 세 사람과 접촉했던 사건은 끝이 났다. 무모해보이지만 초짜 독립운동가로서의 열정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