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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료(보조) 스크랩 삼태극은 삼신의 표상(박흥주 굿연구소 소장)
청림 추천 1 조회 59 16.08.18 09:1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잃어버린 무 대륙>의 삽화들

 

 

푸마 풍크 http://thebiggestsecretsoftheworld.blogspot.kr/2011/02/ancient-mystery-of-puma-punku-in.html

 

금제감장신라보검의 삼태극 <천부윷의 재발견 9장>

 

 

서울시 3호선 지하철을 타고 안국역에서 내려 인사동을 찾아갈 때나, 버스를 타고 안국역을 지나칠 때면 내 눈에 반갑게 들어오는 모습 하나가 있다. 지하철역을 오르내리는 출입구의 지상입구가 뻥 뚫린 구멍이 되지 않도록 그 둘레를 쳐놓은 철제 울타리, ‘ㄷ’ 자 형태로 쳐져있는 그 울타리에 장식된 문양이 그것이다.


 

그 문양은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당길 정도로 강렬하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다. 오히려 그 문양에 관심을 갖고 있는 나의 시선에 의아해할 것이다. 화려한 색으로 입혀있지도 않을 뿐더러 문양이 특별나지도 않으니 말이다. 그 문양은 보통 만(卍)자무늬라고 하는 전통의 문양으로서 卍자의 사방 끝을 연결해 끊임없이 이어 논 형상의 디자인이다.


 

卍자문양은 우리의 생활공간에서 수없이 사용되던 문양이다. 옛날에 사용되던 생필품이나 건물에서 이 문양은 쉽게 발견된다. 칠기(漆器)제품, 도기(陶器), 여러 종류의 가구, 문고리, 부적, 손수건의 자수, 다리난간 등등, 일상적으로 만지고, 보고, 사용하는 생활용기에 이 문양은 분명히 한 자리를 차지했었다. 또한 사찰과 궁궐의 담이나, 벽, 다리 난간 또는 장신구의 가장자리에는 卍자의 사방 끝이 연결되며 끊임없이 이어지는 형태로 남아있기도 하다.


 

이처럼 친숙하고도 뚜렷했던 문양이 최근에 건설한 지하철의 출입구 철제 울타리(안국역 뿐만 아니라 다른 전철역에서도 발견된다)에 되살아나 그 자태를 견지하고 있는 모습에 나는 무관심할 수 없다. 그 철제울타리를 설계한 사람이 의도적으로 그 문양을 채택하였을 지의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끈질기게 이어지는 그 문양의 생명력에 더할 나위 없는 경외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한편으론 ‘음! 이 민족은 어쩔 수 없어. 의도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저렇게 계속 이어지잖아’는 회심의 미소를 내심 짓게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별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요란을 떤다고 핀잔을 설사 듣는다 하더라도 말이다.


 

대개 문양에는 나름의 독특한 상징이 내포돼 있기 마련이다. 이 ‘卍자무늬’는 좋은 일을 불러다 주는 길상으로 여겨졌으며, ‘만복 수복(萬福壽福)이 모여든다’는 뜻을 갖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형태를 보면 ‘十’자 모양에서 사방으로 뻗어나가 날개가 회전하는 형태로 변했고, 사방 끝이 종횡으로 늘어나 펼쳐지면서 계속 이어지므로 회전 개념에서 연상된 무한성과 장구성을 담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래서 영원하다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의미를 도출해 낸다. 卍자 문양은 날개가 회전하는 방향에 따라 왼쪽으로 도는 ‘卍’과 오른쪽으로 도는 ‘ ’ 두 개의 형태가 생긴다.


 

일반적으로 이 만(卍)은 불교의 표상으로 인식되어 있다. 절을 표시하거나 불교를 나타낼 때 이 문양을 표지로 사용한다. 불가에서는 이 문양을 불심(佛心)을 상징하고, 존재의 바퀴 또는 윤회를 상징한다고 본다. 그래서 석가모니 불상이나 화상의 심장 부분에 이 문양이 쓰였다.


 

이 卍자가 불교의 상징이 되었지만 인도에서는 원래 힌두교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인도 고대 신화 속에 등장하는 태양의 신 비슈누(Vishnu)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 이 卍은 비슈누신의 가슴팍에 자란 털 모양을 나타내는 길상의 징표라는 것이다. 卍이 비록 힌두교에서 유래했지만 오늘날 불교의 상징 마크처럼 된 것은 부처님의 백호(白毫, 눈썹 사이에 난 흰 터럭)와의 관계에서 찾는다. 불가에서는 우선(右旋)이라 하여 오른쪽으로 도는 형상을 길상으로 여기는데, 부처님의 백호가 오른쪽으로 도는 길상이기 때문이다. 백호에는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 비춰 볼 수 있는 초월 능력이 있다고 한다. 오른쪽으로 도는 길상을 기호로 나타낸 형상이 곧 卍이다. 그래서 이 卍 문양은 절을 나타내는 표시로서, 불교를 상징하는 표상으로서 우리에게 친숙해 있으며, 현재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연유이기도 하다.


 

한편, ‘卍’은 ‘만’이라는 음을 갖는 문자이기도 하다. ‘卍’의 형상이 글자가 된 것은 측천무후에 의해서라는 기록이 화엄경음의(華嚴經音義)에 전한다. 이 기록에 의할 것 같으면, “당의 측천무후가 ‘卍’을 문자로 삼고, 발음은 ‘만(萬)’, 뜻은 ‘길상만덕(吉祥萬德)이 모인 곳’으로 하기로 했다. 그 후로 ‘卍’을 ‘가슴 만’, 또는 ‘만 만’이라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卍 문양을 표기할 때엔 만(萬)이라고 쓰며, 중국인들은 이것을 ‘1만 가지 효능을 지닌 상서로운 표적의 집합체’로서 하늘이 내린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명 · 청대에 이르기까지 가구나 창살 등의 문양으로 널리 사용되었으며, ‘만 万’의 원형으로서 일만 만(萬)의 연속체로서 인식되기도 한다.


 

이처럼 卍자 문양은 인도{현재 인도에서는 卍을 수바스티카(Svastika)라 부른다. 수바스티카는 산스크리트어 ‘su(잘)'와 ’as(되다)'에서 나온 말로 ‘잘될 것이다’, ‘그렇게 되어지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와 중국에서는 길상의 표시로서 사랑을 받아왔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이 卍자는 거의 모든 종교에서 발견된다고 한다. 키프로스섬에서 발굴된 청동기시대의 장식물, 독일에서 출토된 무기,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천막에서, 그리고 아일랜드의 십자가에서... 아프리카와 수메르 일부 지역을 제외한 전세계에서 이 흔적이 나타난다. 이 문양은 스칸디나비아에서는 싸움도끼의 표지였으며,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태양 빛의 네 방향, 티벳에서는 관대함을 상징했다.


 

주목할 만한 사항은 十(십자가 문양)의 근원을 卍 문양에서 찾는다는 사실이다. 十 문양은 이집트나 크레타 등에서 발견되는 고대 종교의 상징으로서 태양숭배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한다. 고대 태양숭배자들이 쓰던 태양의 상징은 환십자형(環十字形)이었다. 고대 기독교의 무덤에는 거룩한 상징으로서의 십자가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물론 그리스도의 처형에 사용된 도구와도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실제 로마인들이 집행한 십자가처형의 형틀은 ‘T'자 였다고 한다.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十 모양의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상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신의 영광을 상징하였다. 십자 마크가 기독교에서 ‘수난’의 상징, 나아가 예수의 상징이 된 것은 7세기 말엽에 이르러서였다. 서기 692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결정에 의해 십자가가 태양숭배의 성스러움을 버리고 ‘수난’의 상징으로, ‘악운 퇴치, 신의 가호’의 상징으로 변하게 되었다.


 

서양인들에게 있어 卍자의 이미지가 전세계적으로 위력을 발휘한 역사가 있었다. 독일 나치당의 문장인 하켄크로이츠( )다. 유럽인의 원조인 아리안 족의 적자로서 고대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상징적 의미를 과시하기 위해 나치가 도안한 문장이다. 본시 아리안 족에게 있어 卍은 ‘불의 요람(fire's cradle)' 또는 ’행운(luck)‘을 뜻했다고 한다. 아득한 옛날에는 나뭇가지의 교차점에다 막대기를 넣고 돌려 불을 일으켰는데 이 부분이 ‘불의 요람’이며, 불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불꽃이 빨리 피어나는 ‘행운’이 필요했기 때문에 ‘행운’의 뜻을 갖게 된 것이다. 나치는 이 ‘불의 요람’에서 불 · 힘 · 권력이란 속성의 이미지를 추출하여 진홍색 바탕 위의 흰색 원 속에 검은 색으로 하켄크로이츠를 도안하였다. 그리고 나치당의 문장으로 삼았다.


 

이처럼 전세계적으로 분포하는 이 卍 문양에 담긴 상징이란, 태양의 회전, 태양광선의 바퀴, 북극성을 중심으로 도는 북두칠성의 형상, 태양전차, 동서남북의 사 방위, 사계의 바뀜과 사계, 세계의 중심, 생명의 윤회, 창조의 원동력 등 여러 학설이 구구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좋은 뜻과 의미로 사용된다는 것과 태양이나 태양숭배, 그리고 창조력과 아주 밀접하다는 사실이다.


 

전세계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만자무늬. 우리 민족도 만자무늬를 선호하였다. 과거만이 아니라 현재도 활발하게 쓰이는 경우가 있다. 절이 아닌 데도 이 卍을 쓴 깃발을 사용하여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상징으로 사용하는 곳이 있으니 무당집이다. 흰 바탕에 붉은 색으로 卍을 써서 깃발을 만든 다음 대나무에 높이 매달아 집 입구에 매달아 놓은 모습이 우리 주위에 존재한다. 이 현상에 대해 박 용숙이라는 미술평론가는


 

“우주와 인간의 삶과 죽음 · 윤회를 주관하는 신의 영력을 나타내는 만자기(卍字

旗)를 꽂아 놓음으로서 그 곳이 신의 대리자인 무당이 있는 곳임을 알리고 있다.”


 

는 해석을 내린다. 아울러


 

“무당을 만신(萬神, 卍神)이라 부르는 데에도 무당이 신의 영력을 지닌 자임을 나타낸다. 무가 바리공주에서, 죽었던 부모를 살려낸 후에 바리공주는 ‘부모 슬하에서 호의호식을 못했으니, 만신의 인위왕이 되겠다‘고 말한 후에 巫祖神이 된다. 여자 무당의 무조신을 만명(萬明, 卍明)이라 하는 데서도 그 상징성을 알 수 있다”<박용숙, ’>


 

고 보았다. "흰 바탕에 붉은 색으로 卍자를 써 무당집임을 알리는 깃발은 불교와 무교가 습합한 경우로서 만자가 갖는 상징성과 무당이 갖는 신의 영력이 본질적으로 같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이 글을 통해 어느 시기에 무교가 불교와 습합하기는 하였지만, 卍에 대한 신앙은 그 근원이 卍의 신앙이 들어오기 이전부터 있어왔다는 관점에서 나는 보고 싶다.


 

이 卍자가 한반도에서 쓰인 것은 신라시대부터이며, 그것을 많이 사용하였던 전성기는 숭불정책을 썼던 고려시대로 본다.<황호근, ‘한국문양사’, 열화당, 277쪽>


 

한편, 민속학자인 김태곤은 회오리바람 문양과 卍 문양을 같은 상징으로 보면서 그 의미를 다음과 같이 해석하기도 한다.


 

“경남 울주반구대의 회오리바람 문양에서 볼 수 있듯이, 무속적인 제사터의 알바위에도 회오리바람 문양이 나타난다. 卍과 마찬가지로 회오리바람 문양도 오른쪽으로 회전하고, 왼쪽으로 회전하면서 우주적인 에너지가 발동하는 원리를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남북의 축을 기준으로 해 보면 오른쪽으로 돌고, 그 반대쪽에서 보면 왼쪽으로 도는 것으로, 민속에서 임신부가 왼쪽으로 누우면 아들을 낳고, 오른쪽으로 누우면 딸을 낳는다고 믿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고대 토기에서 발견되는 회오리바람 문양을 통해 옛 사람들이 이를 신성시했음을 알 수 있다. 탑돌이 신앙이나 제사 때에 술잔의 돌림은 우주적인 에너지 운동 법칙과 관련하여 원초적이고 시원적이며, 창조적인 현상을 상징하는 卍이나 회오리바람에 기인한다”<김태곤, ‘한국무속연구’, 집문당, 1980>


 

두 견해를 종합해 보면, 만자문양을 선호하는 심성이나 신앙은 회오리바람 문양에서 이미 발현되었으며, 회오리바람에 쏠리던 마음과 신심이 불교의 유입과 더불어 이 卍자 문양에게 자연스럽게 전이되었을 것이라는 가설을 제기해 봄직하다. 그런 토대가 있었기에 절이나 불교상징으로만 국한되어 쓰이지 않고, 민간의 생활 깊숙한 곳에서 일상적으로 보고, 느끼고, 만져보는 문양으로 정착하였으리라 가정해 보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다. 본래 가지고 있었던 믿음과 생각을 만자문양에 투영하여 나름대로의 도상을 창출하였을 가능성도 상정해 볼 수 있다.


 

한편,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만자무늬는 한 가지만이 아니다. ‘卍’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경우와 ‘ ’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경우가 함께 나타난다. 후자는 ‘十’자에서 한 번 꺾인 ‘卍’에서 다시 한 번 더 꺾인 형상이다. 사람들은 이 두 가지를 모두 ‘卍자무늬’라고 통칭하며, 같은 의미로 이해하고 넘어간다. 과연 그럴까? 나는 이를 구분하여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대개 ‘卍’자를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는 절이나 불교와 직접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절에 오르는 길목에 있는 다리의 난간이라든지, 절에서 직접 제작하여 민간에 배포한 부적 등에는 ‘卍’자 형상 그대로를 사용하고 있다. 절이나 불교를 상징하는 표상으로서의 ‘卍’과 똑 같은 형상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만들어 쓰는 생활용품에다 길상과 만복 수복을 불러들일 목적으로 이 문양을 새겨 넣을 때는 예외없이 후자의 형상을 하고 있다. 그리고 ‘卍’자 형상을 그대로 사용한 사례보다 후자의 형상을 사용한 경우가 현재 남아 있는 물품들 간에 견주어 보아도 압도적으로 많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것이며, 그 차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이 의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민간차원에서 사용하는 만자문양은 卍자 그대로가 아니고 변형이라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봐야 할 것이다. 변형을 시도한 민간인들의 속성은 좀 더 토속적이고, 좀 더 토착신앙에 젖어있을 것이며, 덜 개방적일 것이라는 속성에 견주어볼 때, 외래문화인 卍에 대한 이해가 卍이 제시한 내용과 차이가 날 수도 있다. 설사 같다 하더라도 뭔가 인식하는 데에 있어서는 경중의 차이가 있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대로 앵무새처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본래 갖고 있었던 생각과 신앙에 입각하여 卍을 수용하였을 확률이 훨씬 높아지지 않겠는가? 그 소화의 기준점이 무엇인가? 란 의문만 풀린다면 말이다.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우선 그 형상이 十의 중심점에서 세 번 뻗어 나간 모습인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卍자 모양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굳이 한 번 더 꺾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은 바로 이 3이라는 수리체계와 그 사상의 풍토 속에서 가능한 모습이었다는 해석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만자문양이 갖는 상징과의 공통점을 회오리바람 문양에서 찾는 김태곤의 견해에 비춰볼 때, 그 토양이 바로 회오리바람 문양이라고 이해해도 무방하며, 회오리문양이 무속적인 제사터의 ‘알바위’에도 나타난다는 사실은 ‘알바위’와 ‘굿’과 ‘3수 원리’가 서로 맥이 닿아 있다는 암시로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든다.


 

다시 말해서 회오리바람의 출발점과 十의 중심점이 같다고 본다면, 그 중심점은 ‘우주적 에너지’<김태곤의 표현>가 발동하는 곳으로 이해해도 될 것이며, 그 ‘우주적 에너지’는 불이나 태양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에너지, 즉 생명에너지로 볼 수 있다. 그 생명에너지가 ‘풀리고(卍) 감기면서( )’ 또한 ‘감기고( ) 풀리면서( )’ 생명을 잉태하여 마침내 세 번째에 생명체를 창조(‘ ’와 ‘ ’) 해냈다고 본다는 말이다. 분명 ‘ ’ 문양은 생명원리를 담고 있다. 뒤집어 말한다면, 그 우주원리를 도상으로 그려놓은 것이 ‘ ’이자 ‘ ’으로서 굳이 卍자에서 한 번 더 꺾은 것은 생명탄생의 숭고한 ‘사실’을 ‘굳이’ 강조하고픈 우리 민족의 심성이 담겨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 중심점은 생명의 씨앗(점)이라고 이해해도 무방해진다.


 

그런데 ‘사람’(살아있는 존재)이란 것은 생명에너지를 갖고 있는 아버지(숫컷)와 그 생명에너지를 갈무리하고 키워낼 능력을 갖은 어머니(암컷)가 하나 되는 만남(十), 그리고 그 즐거운 만남이 자연스럽게 만들어 내는 ‘엎치락 뒤치락(卍와 )’, ‘감고 풀고( 와 卍 )’ 의 교감에 의해 알(정자)과 알집(난자)이 마침내 하나가 되고, 드디어 ‘나’를 세상으로 밀어내 세상구경을 하게된 것이다.


 

그래서 그 중심점은 생명의 알(정자)이라고 이해해도 무방해진다.


 

알바위라는 것이 있다. 그 분포는 전국적이다. 전국 도처에 깔려 있는 것으로서 난생신앙과도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조자룡, ‘삼신민고’, 도서출판 가나아트, 1995, 107쪽>. 바위에다 대개 10cm 내외의 구멍을 여러 개(대개 7개) 뚫어 놓은 형상으로서, 그 구멍에 계란을 꽂아 놓고 비는 예와 오곡을 넣고 비는 경우, 사내 모양의 떡을 세워 놓고 비는 경우 등이 발견된다. 바위에 파인 구멍의 모양도 결국 알을 반으로 쪼개 놓은 형상이 되며, 계란도 알이며, 오곡도 알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삼신의 신체가 쌀(알)이었던 사실을 환기하고 넘어가자.


 

결국 ‘ ’문양은 삼신의 생명력과 창조력을 상징하고 있으며, 일상 생활 도구에 이 문양을 새겨서 혹은 수를 놓아서 시도 때도 없이 보고 느낀 것은 그 문양에 담겨있은 삼신의 생명력과 창조력의 감응하에 하루 하루의 생활을 활기넘치고 생기넘치게 살아가겠다는 기원과 희구일 뿐더러 그 구체적인 실천 현장임을 알 수 있다.


 

알은 씨다. 생명을 잉태하고 있는 씨앗이다. 사람의 씨앗은 정자다. 그 정자 모양을 문양으로 형상화 하여 ‘ ’ 문양처럼 일상적으로 사용하였다면 둘 간의 친연성을 의심해 봐야 할 것이다. 우리 민족에게 정자의 모양을 한 문양이 있었으니 바로 태극문양(3태극문양)이다.


 

3태극 문양도 卍자문양 못지않게 일상생활에 흔히 쓰이던 문양이다. 소고에, 북에, 부채에... 단지 생활용품으로만 쓰인 것이 아니라 서낭당의 문에도 그려져 있었으며, 절집 대웅전의 문짝에도 등장하고 향교의 외삼문에도 그려져 있다. 개인의 사당이나 비각의 문짝에서도 발견하게 된다. 종교적 의미와 철학적 의미를 많이 함축하고 있는 문양이라는 뜻일게다. 이 삼태극 문양에 대한 이해가 이뤄진다면, 세 번 뻗어나간 만자무늬의 비밀과 상호 연관성이 보다 분명해질 것이다.


 

현재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는 태극문양이라는 것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종류가 있다. 태극기에서 항상 볼 수 있는 쌍태극 문양, 북 · 부채 · 소고 · 반지그릇 · 색실함 · 떡살 · 무신도 · 각종 목기장식 · 지붕의 와당 · 대문의 문장 · 베개모 · 서낭당의 문장 · 연 · 갓통 등 주로 민예품에 많이 등장하는 삼태극 문양(물론 쌍태극 문양도 심심치않게 이들 민예품에 등장한다), 그리고 4태극 문양, 6태극 문양, 8태극 문양, 그리고 ‘ㅇ태극 문양’ 등이 있다. 그러나 이 모두를 통틀어 같은 태극문양이라고 이야기 해 버린다. 즉, 모두를 같은 의미와 상징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그렇게 뭉뚱거려 넘겨버린다는 뜻이다. 전혀 구분하려 하질 않는다. 쌍태극 문양이 태극문양의 전부인 것처럼 이야기되고 있다. 마치 도매금으로 넘기듯이 나머지 태극 문양들은 쌍태극 문양에다 덤으로 끼워 처리해버리는 셈이다. 그러나 여타 태극 문양들도 각기 다 나름대로의 뜻을 갖고 있다.


 

쌍태극 문양은 주역(중국철학)에서 말하는 음양(陰陽)을 도상화한 것이다. 삼태극 문양은 천 · 지 · 사람 (三才)과 울 · 알 · 얼 (三極)을, 혹은 음 · 양 · 중(中)을 도상화한 것이다. 4태극 문양은 음양이 1변(一變)하여 생긴 사상(四象)을 상징한다. 6태극 문양은 음양과 삼극이 결합된 6효(6爻)를 뜻한다. 8태극은 사상이 또 다시 1변(一變)하여 생긴 8괘(8卦)를 나타낸다. ㅇ태극은 무(無)이면서도 유(有)이고 유(有)이면서도 무(無)인 무극(無極)을 뜻한다.


 

내용상 쌍태극 · 4태극 · 8태극은 결국 같은 내용으로서, 쌍태극을 이해하면 자연스럽게 의문이 풀리게 된다. 6태극은 쌍태극과 삼태극의 결합이기 때문에 삼태극과 쌍태극에 대한 이해가 있으면 그 실체 또한 풀릴 것이다. 쌍태극과 삼태극! 삼태극은 분명 쌍태극과 다르다. 모든 태극문양은 한결 같이 하나의 ㅇ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으므로 ‘ㅇ태극’은 모든 태극문양의 기본이다. 결국 쌍태극과 삼태극이 문제다. 이 두 태극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있다면 모든 태극 문양에 대한 의문은 풀리지 않겠는가.


 

먼저 쌍태극에 대한 상식적인 이해를 돕고 가자.


 

쌍태극 문양의 각각을 상징하는 음(陰)과 양(陽)은 우주의 근원이 되는 상반된 원소(元素)로서, 만물을 생성하는 원기(元氣)로 알려져 있다. 그 두 가지 원기는 서로 상반된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즉, 만물은 여자가 있으면 남자가 있고, 낮이 있으면 밤이 있고, 여름이 있으면 겨울이 있고, 그늘이 있으면 밝음이 있는 자연과 만물의 그러한 사실과 현상을 각각 상징한다. 음(陰)과 양(陽)이라는 글자 자체도 그런 뜻을 담고 있다. 모두 ‘언덕 부(阜)’ 변에 속하는데 언덕에 해가 비치는 쪽이 양(陽)이고 해가 비치지 않아 그늘이 지는 쪽이 음(陰)이다. 그러나 이 음양의 상반된 모습의 다름(異)은 배타와 부정을 위한 개념이 아니며, 우주만물의 생성변화를 설명하기 위한 양의(兩儀 ; 두 가지 거동, 나타남)로서만 파악된다는 데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음과 양은 태극(太極)이 한 번 동(動)하고 한 번 정(靜)하여 생겨난다고 본다. 양은 동(動)하는 속성(動者 陽之常也)이고, 음은 정(靜)하는 속성(靜者 陰之常也)을 지니게 된다. 우주 만물의 ‘변화’란 이 음양이 동하고 정하는 속성의 결과다. 즉, 음이 바뀌어 양이 되는 것이 ‘變’(變者 陰爲變陽)이고, 양이 음으로 되는 것은 ‘化’(化者 陽爲化陰)로서 음변양화(陰變陽化)에 의해 세상 만물은 생성변화하게 된다는 것이다<김석진 “주역과 세계”, 동신출판사, 1990, 58쪽>. 음과 양은 대우주의 변화 속에서 대등한 위(位)를 가지면서도 각기 그 공능(功能 ; function or operation)만 다르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한 번 음이 되었다 한 번 양이 되었다 하면서 계속 변화하는 것(一陰一陽之謂道)”을 만상 · 만물의 도(道)라고 하였다.<김용옥,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 통나무, 1986, 288쪽>


 

한편, 이 음양지도의 본원은 하늘과 땅에서 찾는다. 하늘의 원(乾元)은 “만물이 그것을 바탕 삼아 시작되는 것이며 하늘의 모든 것을 통솔하며(大哉乾元 萬物資始 乃統天)” 땅의 원(坤元)은 “만물이 그것을 바탕 삼아 생성되는 것이며 하늘의 공능을 순화롭게 이어가는(地哉坤元 萬物資生 乃順承天)” 것이라고 본다.


 

우주만물의 생성변화 원리로서의 음양지도는 음과 양이라는 둘(二, 다름)이 반드시 반응을 일으킬 때 발동하게 된다. 건원(乾元)과 곤원(坤元)이 제 각각이어서는 변화 생성이 있을 수 없고 뭔가 서로 오고 가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역에서는 이 정감 어린 반응을 ‘감(感)’이라고 부른다. 만물을 덮는 성질의 하늘(天, 乾)과 만물을 싣는 성질의 땅(地, 坤)! 이는 우주를 평면적으로 파악하지 않고 입체적으로 파악했으며, 땅 자체만을 자연으로 본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을 포괄해서 덮는 양면을 갖추어 우주라는 불가분의 전체를 구상한 것이라 본 것이다. 그러면서 우주는 기계적이고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체이며, 이 생명체에 있어서 생성의 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은 다름 아닌 하늘과 땅 자체의 ‘感’이라는 말이다. 이 원리를 태극도설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 주고 있다.<김용옥,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 통나무, 1986, 288쪽>

 

 

하늘의 길(乾道)은 남자의 원리를 이루고 땅의 길(坤道)은 여자의 원리를 이룬다. 이 두 기(氣)가 교감(交感, 서로 느낌)하여 만물을 생성변화시킨다. 만물이 이렇게 해서 창조(生)되고 또 창조(生)되며, 변(變)하고 화(化)하는 것이 끝이 없다.(乾道成男 坤道成女 二氣交感 化生萬物 萬物生生 而變化無窮焉)


 

주역의 이와 같은 사상은 고대 중국인의 우주관을 집결해 놓은 것이라고들 한다. 후대의 중국철학은 이 우주관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중국철학사는 ‘주역’의 해석사(解釋史)라고까지 표현한다. 결론적으로 음양 쌍태극은 중국인들의 태극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 음양사상은 2수세계관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우주의 원리와 만물의 생성원리를 이야기하는 이 음양사상은 결국 음과 양이라는 양의의 2수(數) 세계관이다. 만물과 우주는 음과 양이라는 2개의 기(氣)에 의한 교감과 그의 작용으로 보기 때문이다.


 

중국의 유교가 2수세계관에 입각하여 우주만물의 생성원리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은 농경문화가 만들어낸 결과라는 분석을 내리기도 한다. 2수세계관에 입각한 중국인들은 사유세계란 그들의 밥을 해결해 주는 농경의 원리와 특성에 입각하여 배태되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씨를 뿌리고 거둬들이는 2단계의 과정과 순환원리가 음양과 역(易, 日+月=易, 바뀔, 쉬울)의 원리로 정립됐다고 보는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수는 ‘2’인 반면, ‘3’이라는 숫자는 흉수로 인식한다는 점이다.<何神 著, 洪喜 譯 ‘神의 起源’, 동문선, 1990, 333쪽>


 

여하튼 쌍태극은 음양의 원리가 살아 숨쉬는 도상이며, 그 기저에는 2수세계관이 깔려있으며, 중국인들의 생활과 그 사유체계에서 우러나온 결과물인 것만은 분명해보인다.


 

그렇다면 삼태극은 어떠한가.


 

삼태극 문양은 3개의 태극이 한 점을 중심으로 돌고 있는 형상이다. 각각의 태극은 하늘과 땅과 사람을 상징한다고 한다. 쌍태극에서는 하늘과 땅만을 이야기하고 있으나 삼태극에서는 사람이 하늘과 땅과 대등한 위치(位)에 자리하고 있다. 우리민족의 창세 신화를 전해주는 규원사화(揆園史話)에 보면,


 

태고에 음양미분(陰陽未分)할 적에 천지는 혼돈하고 우주는 암흑의 큰 덩어리 같은 상태였다. 상계(上界)에는 문득 하나 큰 신(神)이 있었으니 그는 환인(桓因)이오, 온 세상을 다스리는 무량한 지혜와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 모양은 나타나지 않고 제일 높은 하늘에 앉아 계시니 그곳은 늘 환하게 빛이 나고 그 아래에는 다시 수많은 작은 신(小神)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 때에 일대주신(一大主神)이 두 손을 마주잡고 한웅천황을 불러 창세(創世)의 큰 일을 행하도록 명을 내렸다. - 중략 - 풀과 나무가 뿌리박고 벌레와 물고기 날짐승이 생육하여 지상에 번식하게 하였다. 천지간에 마땅히 만물의 주(主)를 두어야 하니 그 이름은 사람이요 천지(天地)와 더불어 삼재(三才)가 되고 만물의 주가 되게 하였다.


 

<신학균 譯, ‘揆園史話’, 1968, 대동문화사, 23-27쪽/ 조자용, 삼신민고, 1995, 삼신사, 225-226쪽에서 재인용 >


 

고하였다. 이 신화는 천지개벽에 있어서 하늘과 땅과 사람을 같이 창조했다는 점에서 천 · 지 · 사람 삼재사상의 모태를 명시해 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음양론에 입각하여 인간을 살펴본다면, 인간이란 음양(天地, 乾坤)교감에 의한 변화생성물(어느 순간의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만 이야기 되도 무방한 것이다. 그러나 삼태극에서는 굳이 사람을 중시하여 사람이 있게 한 하늘과 땅과 대등한 반열에 두고 있다. 이는 역설적으로 하늘과 땅은 사람이 있기 위한 조건이나 토대라는 인식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람이 하늘과 땅보다 더 중시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결국, ‘나’는 하늘의 기(氣)인 아버지(男)와 땅의 기(氣)인 어머니의 정감 어린 교감에 의해 태어났으며(生), 이 상승된 기는 내 자식으로 또 그 자식으로 끝이 없이 이어진다는 말이기도 하다.


 

한편, 모든 삼태극 문양은 3색으로 채색된다. 쌍태극 문양이 대부분 흑백으로 처리되거나 청 · 적의 2색으로 채색되는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삼태극의 3색은 청 · 적 · 황 3원색이다(물론 다른 색의 배합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전국 도처에 깔려있는 삼태극 문양 중에는 흑·적·황, 청·적·황, 녹·적·황 등 여러 가지가 전해져 있으나 청 · 적 · 황이 지배적이다). 우리가 이 세 가지 색에서 음미할 것은 그 색상의 화려함이 아니라 세 가지 색의 조합이 만들어 내는 색의 작용과 그 수리체계다.


 

과학적 실험에 의할 것 같으면 청 · 록 · 적 삼색은 백색을 만들어낸다고 한다. 삼태극은 청 · 적 · 황 삼색이다. 그런데 재물보(才物譜)라는 책에 보면 녹색을 청황색으로 보고 있다. 삼태극의 황색은 청황색으로 봐도 무방하며 결국 녹색과 같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삼태극의 3색은 백색을 만들어 내는 삼색이며, 백색을 만들어 내는 3색은 빛의 삼원색이다. 삼태극의 삼색은 빛의 삼원색인 셈이다<조자용, 삼신민고, 1995, 삼신사, 475쪽>. 백색은 청 · 적 · 황 삼원색을 거쳐서 만색(萬色)을 창출한다고 한다. 빛은 생명의 원천이다. 여기에서 ‘만물은 하나에서 나왔다’, ‘만신은 삼신 즉 일신(一神)의 분신이다’라는 사상이 도출되는 것이다.


 

삼태극의 색은 백색(1색)에서 빛의 삼원색(3색)으로 변화하여 수 없이 많은 색으로 변화해 간다. 이 수리체계는 1에서 3으로의 변화다. 1 · 2 · 4 · 8 로 변화해 가는 2의 수리체계와는 분명 다른 세계다. 이 1 · 3의 원리를 이야기 해주는 우리의 신화가 또 있다.


 

태초에 온 우주 속은 상하사방도 없는 암흑 세계였는데 오직 하나의 광명이 있었으니 바로 삼신(三神)이었다. 삼신은 일신(一神)이면서 나타날 때는 삼신으로 작용한다. <李裕 譯, 太白逸史, 三神五帝本記, 倍達民族史(2), 1987, 高麗家>


 

1과 3이 만들어 내는 우주의 질서다. 이를 삼신이라 이야기하고 있다. 이 삼신의 묘용에 대해 이야기하는 말을 계속 들어보자.


 

삼신의 모습은 볼 수 없으나 무량한 지능으로 만물을 창조하고 통치한다. 항상 큰 빛을 내며 신묘를 나타내는데 이 세상 구석구석에 나타나지 않는 데가 없다.첫째로 물을 창조하시고......


 

규원사화의 이야기나 태백일사의 이야기나 공통되는 내용이 있으니 모두 빛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빛을 통해 삼재와 삼신의 모습으로 신묘를 나타내는 두 분 한인(桓因)과 삼신은 결국 같은 존재라고 이해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규원사화도 우리 민족의 창세에 관한 이야기이며, 태백일사도 우리 민족의 창세와 역사를 이야기하는 책들이다. 삼태극은 우리 민족의 사유세계와 우주관을 담고 있는 도상임이 분명하다.


 

흰옷을 즐겨 입었던 민족, 백색을 좋아하는 민족, 밝음과 태양을 숭배했던 민족, 죽도록 3이라는 숫자를 좋아하는 연유가 이 삼태극을 통해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처럼 뼛 속 깊이 배어 있는 삼태극이기에 여전히 ‘우리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거나 내세우고 싶을 때 이 삼태극 문양을 선택하여 사용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지 모른다. 사물놀이를 소개하는 인터넷 홈페이지 상의 이메지문양으로, 전국에서도 맛있는 한식집임을 인정한다는 인증서에도, 외국관광객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인사동 상점의 길가에 진열된 부채에도 삼태극은 자신의 존재를 잃지 않고 있다. 분명 ‘우리다움’이나 ‘우리’를 극명하게 상징으로 나타내고자 할 때는 쌍태극을 선정하지 않고 3태극을 선택한다. 이는 거의 본능에 가깝다.


 

그래서 우리국가를 상징하는 태극기의 쌍태극은 진정한 우리의 표상일 수 없고, 삼태극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아울러 태극기의 제정은 100여년에 불과하고 국기를 제정한 주체는 그 시대의 정치조직이므로 어느 한 시기의 정치조직이 영원한 민족성을 대변할 수 없다는 가능성이 존재하며, 영원한 민족성은 시대를 초월하여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우리들(民)의 선택이어야 한다는 견해도 음미할 대목이다.


 

각설하고...


 

쌍태극과 삼태극의 차이점을 정리하고 넘어가자.


 

우주만물은 하늘성과 땅성(땅性)의 교감에 의한 생성변화라는 점은 쌍태극과 삼태극이 모두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주역도 3수체계를 인정하고 들어간다. 6효(6태극)가 그 증거다. 주역의 기본 괘상은 천지인 삼재와 각각이 갖고 있는 음양 양성(兩性)을 합한 6효다. 이 6효를 기본 괘상으로 하여 우주만물의 생성변화 현상을 8x8=64가지의 경우로 분류하여 설명하는 것이 주역이다. 즉, 천(天) 속에도 음양이 있고, 지(地) 속에도 음양이 있고, 인(人) 속에도 음양이 있다는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다. 그래서 우주만물의 생성변화를 제대로 이야기하려면 음양 2기(氣, 元)만으로도 안되고, 천·지·인 삼재만으로도 안되며 이 들의 결합에서만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삼태극에서도 6을 중시하기는 마찬가지다. 삼태극의 원리를 이야기해주는 경전이 있으니 바로 천부경(天符經)이다. 분명 천부경은 1 · 3 · 9 · 81의 수리체계로 나가는 우리민족의 역(易)이다. 천부경은 가로 9줄 세로 9줄 하여 모두 9 x 9 = 81개의 글/부호로 우주만물의 생성원리를 다 설명해낸다. 그 81자를 가로 세로 9자씩 배치를 하면 41번째 글자가 중심이 되는 정방형이나 원형을 이루게 되는데, 41번째 글자가 천부경의 중심되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하겠다. 천부경의 그 41번째 글자가 바로 ‘六’(6)이다. 그 ‘六’이 들어가는 귀절을 살펴보면,


 

“...大三合生七八九...(...대삼합생칠팔구...)”


 

으로서 해석을 하면, “큰 3을 합하니 6이요, 그 6은 7, 8, 9를 만들어낸다”가 될 것이다. 그 뜻을 음미해 보면, ‘大三’이란 ‘천·지·인’ 삼재(三才)를 일컫는 것으로 삼재가 각각 음양을 갖고 있어 모두 합하니 6이 된다는 말이다. 그 여섯에 하나와 둘과 셋을 더하면 7의 세계, 8의 세계, 9의 세계가 되는 지라, 대개 수는 아홉에 이르면 돌고 돌아 다시 나서 다함이 없으므로 완성의 수로 본다.


 

즉, 6에서부터 다시 1, 2, 3과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9라는 완성의 단계에 접어 들며, 그 완성은 또 다시 새로운 세계의 시작으로 이어짐으로서 만물을 생성해 나간다는 뜻이다. 그 6이 음양을 가진 천지인 삼재의 합에서 나오므로, 천부경 연구자들은 ‘六’을 중핵(中核)인 주재주(‘?’, 하느님)로 본다.<정재승 엮음, 천부경의 비밀과 백두산족 문화, 정신세계사, 1989, 65쪽> 주역에서도 ‘中’은 중요한 개념이다.


 

그런데 굳이 쌍태극을 선호하는 중국인이나 주역은 전면에서 3을 빼버리고 2인 쌍태극을 내세우며, 삼태극을 선호하는 우리민족과 천부경은 굳이 3인 3태극을 내세우는 것일까.


 

그것은 “우주만물은 음양 2기가 교감하여 변화생성하는 과정의 결과물”이라는 인식과 “음양 2기는 우주만물, 즉 ‘나’가 있기 위한 조건일 뿐”이라는 인식의 차이다. 이 인식의 차이는 우주의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인식하는 인식의 주체가 만들어 나가는 삶이나 그 문화는 결과적으로 엄청난 차이를 가져올 것이다.


 

‘나’는 생명체다. 음양사상에서는 우주마저도 생명체로 본다고 이미 언급하였다. 만물 중의 하나인 ‘나’, ‘사람’인 ‘나’는 생명체다. 숨쉬고, 사유하고, ‘나’라는 의식을 갖고 삶을 살아가는 존재다. 아무리 대단하고 위대한 우주, 혹은 하늘과 땅이라 하더라도 ‘나’라는 존재가 ‘나’라는 의식을 갖고 바라보고 느끼고 부대끼지 않으면 ‘나’에게는 무의미할 뿐이다. 굳이 ‘사람(人)’을 강조하고 오히려 하늘과 땅보다도 중심에 두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라고 봐야할 것이다. 결국 ‘살아있다’는 사실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말이다. 살아있지 않으면 ‘나’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 아닌가. 우리말이 왜 ‘나’를 ‘인간’이라고 하지 않고 ‘사람’이라고 하는지도 깊이 음미할 대목이다. 기어가지 않고 서서 걸어가는 동물(人)과 그들이 만들어 가는 사회(間)라는 중국인들의 ‘인간’이해와 ‘살아있는 존재’라는 뜻의 ‘사람’으로 ‘나’(생명체)를 인식하는 우리민족의 ‘사람’에 대한 이해는 분명 차별성을 갖는다. 삼태극은 처음부터 끝까지 생명의 세계관이자 주체의 세계관이다.


 

이런 이유도 있을 것이다. 우리민족이 좋아하는 3은 뒤로 숨겨버리고 자신들이 좋아하는 2를 굳이 내세우는 중국과 3을 시도 때도 없이 내세우는 조선 사이에는 정치적인 역학관계가 이면에서 작용하고 있을 것이라는... 서로 3(천지인)과 2(음양)를 실제로는 인정하고 수용하고 있으면서도 표면적으로는 자존심을 내세워야만 했던 경쟁관계의 역사... 뭐 이런 요인이 이면에서 작용하지 않았겠는가 라는 추론도 해봄직하다.


 

이제 마무리를 하자. 처음 이야기가 卍자 무늬에서 시작되어 태극문양으로 넘어왔는데 주장하고 싶은 것은 ‘卍’(佛敎)과 ‘ ’은 엄밀히 다르며, 쌍태극(儒敎)과 삼태극도 엄연히 다르니 반드시 구별해야 하며, ‘ ’과 ‘삼태극’은 결국 같은 것으로 그 의미는 삼신의 표상이라는 것이다.


 

목청 높여 떠들고 싶은 이 주장을 일목요연하게 증명해주는 실체가 있다. 이 증거물을 마지막으로 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삼고자 한다.


 

현재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제 82-라호)로 지정되어 있는 남해안별신굿이라는 굿이 있다. 지금부터 이 남해안별신굿에서 쓰이는 어떤 물품에 대해 이야기 하려 한다. 굿이란 여러 거리가 모여서 이뤄진다. 그 내용이나 의미로 봐서 아주 중요한 ‘큰거리’와 덜 중요한 ‘작은거리’가 12거리 혹은 20여거리 모여서 몇 일 몇 밤을 잡아먹으면서 벌어지는 것이 굿판이다. 남해안별신굿은 대개 16거리를 중심으로 이뤄지는데 소개하고자 하는 물품은 꼭 ‘큰거리’에서만 등장한다. 중요한 순간에만 등장한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물건이고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상식적으로 이해해도 말이다.


 

그 물건은 머리에 쓰는 ‘큰머리’라는 것이다. 이 ‘큰머리’는 아무나 쓰는 것이 아니다. 대모만이 쓴다. ‘대모’란 굿을 하는 그 굿패 일원 중에서 여자 무당으로는 가장 웃어른에 해당하는 분이다. 무당들 사이에서만 그렇게 부르는 것이 아니라 신도라고 할 수 있는 일반인들도 ‘대모님’이라고 부른다.


 

우리 민족은 머리를 중시하였다. 가장 높은 곳이다. 어느 집단의 대장을 표현할 때 ‘우두머리’라고 하질 않는가. 머리에 쓰는 관은 그래서 방에서도 가장 상석에 모셔놓았었다. 굿판에 무당이 들어서면 그 무당은 신과 동격이 된다. 그런 무당 중에서도 가장 어른에 해당하는 ‘대모님’의 머리에 올라가는 ‘큰머리’이니 그 중요성을 재삼 짐작하고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너스레가 좀 길었는데 이제 그 큰머리의 형상을 살펴볼 차례다. 사진을 참조해 주시면 좋겠다. 이 큰머리는 텔레비전의 전통사극에 등장하는 주막집 주모나 여염집 여인네의 큰머리하고는 다르다. 그 큰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수식류가 특징인데 그 수식류들이 심상치가 않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이 봉황같은 새 두 마리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놋쇠판이다. 그것도 세 개가 우뚝 솟아있는데 이 놋쇠판들을 ‘원정’이라고 부른다. 왜 하필 세 개인가? 내가 세 개를 들먹이는 이유를 이미 눈치채셨을 것이다. ‘삼신’의 실체?


 

그렇다. 이 원정은 반드시 세 개가 한 틀을 이룬다(이 원정은 대대로 대모의 후계자로 전해져 내려온다. 현재 남해안별신굿패에 윗대로부터 전해 받아 보유하고 있는 원정은 모두 세 틀인데 모두 3개를 한 틀로 하고 있다). 원정을 보는 우리들의 눈이 삼신을 연상하는 것이 단순하게 추측의 선에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남해안별신굿을 이어가고 있는 현재의 무녀들이 또렷하게 “세 개가 한 틀인 것은 ‘삼신과 천 · 지 · 인’을 상징한다”고 증언하기 때문이다.<고부자, ‘무복’ , “남해안별신굿종합조사보고서”, 1996, 359쪽>


 

이 원정을 좀 더 세밀히 음미해 보면 세 개의 각각은 새(봉황이든 무엇이든) 두 마리가 한 쌍이 되어 있다. 분명 음양을 상징할 것이다. 이들의 명칭이 ‘원정’이라는 사실도 중요하다. ‘원(元)’은 주역의 음양론을 살펴볼 때 이미 들어봐 익숙해져 있는 개념이다. 새도 우리에게는 아주 친숙한 존재이며 개념이다. 비상하기 전, 솟대 위에 앉아있는 새 세 마리! 새는 하늘과 땅을 연결시켜주는 메센져로 우리의 사유체계에서는 인식돼 있다. 무당을 ‘새타니’, ‘새탄이’(새를 탄 사람)라고도 일부 지역에서는 부른다. 무당이란 “하늘과 땅을 연결시켜서 하늘성과 땅성이 서로 통하고 교감하도록 이끌고 도우며, 하늘과 땅 사이의 삼라만상이 조화롭게 잘 돌아가도록 하여 왕성한 생명력을 얻도록 돕는 것”을 중요한 기능과 역할로 여긴다.


 

각 원정의 밑바닥을 보면 꽃잎 모양의 판이 세 개씩 세 줄로 총 9개가 달려있다. 3수 수리체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 꽃잎 배열에서 놓쳐서는 안될 대목은 높이가 서로 일정하지 않고 중앙이 반드시 올라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고 그 위에 십자가 모양이 확연하게 드러나도록 도안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http://www.kut.or.kr/zboard/zboard.php?id=phj_samsin

http://theologia.kr/index.php?mid=board_chungeein&category=21642&sort_index=voted_count&order_type=asc&document_srl=21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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